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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정 재 훈**
Ⅰ. 머리말
Ⅱ. 초기 사림의 성장
Ⅲ. 노촌 이약동의 생애와 활동
Ⅳ. 맺음말
* 이 논문은 2013학년도 경북대학교 학술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경북대학교 사학과, jinsojung@knu.ac.kr
第125輯(2016.11) 93~112
http://dx.doi.org/10.17751/DHR.125.93
- 2 - 大 丘 史 學 第125 輯
[국문초록〕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1416∼149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서 태종 연간에 태어나서 성종 때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이약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전기의 인물 가운데서 전형성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문과로 과거 급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어 문무를 겸비하였다. 또 관료로서 내직과 외직을 고루 거쳤다. 특히 외직으로 지방행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점은 그가 관료로서 매우 유능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초기 사림들이 진출하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성종대의 경우 아직 사림세력의 활동이 충분하지 않은 때였다. 이약동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이 시기에 많은 문제에 봉착하여서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구성절제사, 제주목사, 전라도 관찰사 등의 경험은 현실의 문제를 절실하게 다룰 수 있는 힘을 기르는데에 기여하였다. 중앙의 내직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 문제가 되었던 현실을 바꾸는 데 노력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은 그의 청백리 정신과 함께 관료로서 전범(典範)이 될 수 있는 측면이었다.
중앙관직으로 나가서 이약동은 그 사이에 문제가 되었던 유향소의 복립을 청하는 등 사림들과 입장을 같이하였다. 이약동은 김종직과 막역한 교유를 가져서 자신이 지방관으로 내려갈 때 전별시를 주고 받을 정도였다. 지역적 연결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지연(地緣)만의문제는 아니었고, 정치적 지향(指向)과 관련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당장은 이들의 지향이 현실에서 충분하게 소통되지는 못했지만 결국 사림들이 조선을 바꾸는 데 일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렴이라는 가치를 내면화하고, 지방에서 수령으로서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내려지는 세금이나 억압을 줄이려고 했던 것, 합리적인 행정을 지향한 것, 일방적인 통치보다는 사대부 사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태도 모두 이전의 장점을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초기사림으로 평가받는 김종직(金宗直), 또 함께 신진 사림의 기풍이 있었던 조위(曺偉)와 함께 이약동이 김천(金泉)에서 최초로 세워지는 서원에 모셔졌던 사실은 그만큼 그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공유하였던 인물이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주제어 : 이약동, 청백리, 유향소 복립, 사림, 김종직
Ⅰ. 머리말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1416∼149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서 태종 연간에 태어나서 성종때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이약동이 어떤 인물이었지에 대해서는 실록의 몇 개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성종 22년(1491), 1월에 벼슬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이때 실록에서는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약동은 문과(文科) 출신으로 겸하여 사예(射藝)에도 능하였으며, 일찍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서는 청렴, 개결하였고 은혜로운 정사도 있었다. 사대부(士大夫)로서 지위가 2품에 이르렀는데, 나이 70을 넘어 전야(田野)로 물러나서 여유롭게 즐기며 여생을 마치기를 이약동과 같이 한 사람도 세상에 드물 것이다.” 하였다1)
라고 하여서 그의 은퇴에 대해 매우 높은 평가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약동에 대한 높은 평가는 그의 사후에 기록된 실록의 졸기(卒記)에서도 볼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2년 뒤인 78세가 되던 해 6월에 타계하자 실록에서는 “이약동은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마음가짐이 굳세고 확실하여 청렴하다고 일컬어졌다. 여러 차례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어 훌륭한 공적이 있었다.”2)고 하여 역시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후에 이약동은 김종직과 나란히, 연로하여 은퇴할 때 국가에서 우대한 모범적인 사례로 거론되기도 하였다.3)
1) 성종실록 권249, 성종 22년 1월 23일(경자)
2) 성종실록 권279, 성종 24년 6월 13일(을해)
3) 중종실록 권20, 중종 9년 2월 5일(기해)
나아가 그는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될 정도로 후대에 그의 청렴함을 인정받기도 하였다.4)
이러한 평가로 미루어볼 때 이약동은 매우 오랜 관료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았으며, 특히 청백리로서 인정될 정도로 모범적인 관료생활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약동은 단지 청백리로서만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일생과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과거의 문과(文科)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도사 등 무관직을 수행하면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개성유수나 전라도 관찰사 등의 외직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성부좌윤 · 이조참판 등의 중앙관직도 지냈다.
이약동이 관료로 지내던 후반부의 시기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대표로 하는 사림(士林)들이 정치적 진출을 하던 시기였다. 더구나 이약동은 자기보다 15세 아래인 김종직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깊은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따라서 이약동은 김종직 등의 초기 사림들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유의하여, 초기 사림의 성장과 이약동의 생애와 활동을 연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종래 훈구와 사림에 관한 연구에서는 최근에 논쟁이 되면서 훈구와 사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거나 사림파의 경우에도 훈구와 차이가 없다는 지적이 이어지기도 하였다.5)
그러나 훈구와 사림의 구분은 존재기반이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만 사림들이 지향하였던 새로운 경향의 정치와 사회, 문화의 분위기도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종래 김종직으로부터 이어진 사림의 단선적 계보보다는
‘사림’으로 공통되는 새로운 정치사회 분위기의 변화를 통해 왜 대립과 사화가 일어났는지의 원인에 대해 전반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4) 중종실록 권21, 중종 9년 12월 25일(계축)
5) 훈구와 사림에 대한 상세한 대략적인 연구경향의 변화는 김용흠, 「정치세력과 정치운영」
새로운 한국사길잡이(파주: 지식산업사, 2008), 367~368쪽 참조.
이약동의 일생은 아직 사림의 등장이 본격화되기 이전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사림적인 지향이 나타난 점에서 주목이 된다. 그의 삶이 사림들의 지향과 일치하는 점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당시의 변화하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렴한 생활로 청백리가 된것도 그러한 예이지만 유향소(留鄕所)의 회복을 건의하거나 지방행정에 역량을 발휘한 점 등은 사림파 관료로서 평가해도 손색이 없는 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이약동은 후대인 인조 대에 김천(金泉)에 최초로 세워진 경렴서원(景濂書院)에 모셔지기도 하였다.
Ⅱ. 초기 사림의 성장
조선왕조의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에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이를 기반으로 유교국가를 만들었다. 유교정치에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여긴다는 민본(民本)의 이념이 중요하였다. 따라서 조선초기에는 민본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를 뒷받침해 준 성리학은 원나라로부터 들여온 것으로서, 조선 초 성리학의 특징은 국가운영의 원리로서 성리학의 공적 측면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그 결과 조선 초기의 제도정비와 국가운영에는 일정한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국왕으로 상징되는 국가가 전면에 등장하였고, 또 국가의 지배대상인 민(民)은 모두 비슷한 존재가 되는 것을 요구받았다.
현실정치에서는 국왕을 뒷받침해주는 세력으로 관료가 있었지만 특히 공신(功臣)의 역할이 컸다. 공신은 왕자의 난 등 조선초기의 여러 정치적 사건 때문에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국왕을 뒷받침하여 현실을 좌지우지하였다. 공신들은 태조 때 개국공신 52명을 시작으로 정종대의 정사공신 29명, 태종대의 좌명공신 26명, 세조대의 정난공신 43명, 좌익공신 46명, 적개공신 45명, 예종대의 익대공신 39명, 성종대의 좌리공신 75명 등 지속적으로 양산되었다.
중종반정 때의 ‘반정(反正) 공신’은 무려 117명에 이르렀다. 이들에게는 1등 공신의 경우 본인과 부모 처자를 3계급 승진시키거나 조카, 사위를 2계급 승진시켰다. 그리고 전 150결과 은 50냥 등 막대한 재물을 안겼고 반당(伴倘:호위병) 10명, 구사(丘史:하인) 7명, 노비 13명, 말 1필을 주었다. 중종반정 주도자 박원종(朴元宗)에게 연산군 때의 시녀 300명을 상으로 따로 주었다. 자자손손 대물림한 이들 특권으로 인해 조선왕조는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공신 가운데서도 특히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계유정란(癸酉靖亂)에 참여한 정인지, 최항, 양성지, 신숙주, 서거정 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은 이후 문제되었던 ‘훈구’의 원조가 되었다.
15세기 후반 이래 정치를 장악하였던 훈구는 중앙의 관직을 독점하고, 대대로 부를 쌓는 일을 저질렀다. 그 가운데는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인 행위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서해안에 권력을 이용하여 해안을 개간하여 토지를 사유화하는 것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사림파라고 하는 세력이 등장하여 이들의 행위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6) 성종 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의 비판에 대해 훈구는 정치적인 공격을 가해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화가 발생하였다. 사림파의 시작은 성종 때에는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를 시작으로 하여 그의 아들인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차례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시작된다. 이 가운데 김굉필 같은 사람은 별명이 ‘소학동자(小學童子)’였는데, 이는 성리학의 기본교과서였던 소학을 철저하게
6) 훈구와 사림의 구분에 대해서는 일단 유승원의 논의대로 훈구파는 훈구로, 사림파는 그대로 사림파로 용어를 통일한다. 훈구의 경우 사림파의 대척적인 세력으로서의 의미보다는 공신이나 대신 등 개인적인 존재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이 집단적으로 훈구파를 형성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유승원, 「조선시대 '양반' 계급의 탄생에 대한 시론」 역사비평(서울, 역사비평사, 2007) 여름호 참조.
따를만큼 원칙을 중요시하고 성리학을 내면화하여 실천하려고 했던 경향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결국 훈구의 비도덕적이고, 정치경제적인 비리를 고발하려는 문제의식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림파의 뒤에는 성종이 있었다. 성종은 커져가는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비교적 젊고, 원칙을 뚜렷하게 지녔던 사림을 등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중종 때나 선조 때에 사림이 등장할 때에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정치적 특징이다. 왕권 측에서 왕권에 한계를 느끼거나 명분이 약해졌을 때 이를 보완하거나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사림의 정치적 진출을 적극적으로 돕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성종대 사림들의 위상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초기사림에 해당하였다. 성종대의 중기 이전에는 김종직을 비롯한 김맹성(金孟性) ․ 조위(曹偉) ․ 김흔(金訢) ․ 양희지(楊熙止) 등 약간의 인물들만이 정치적인 진출을 한 것이 눈에 보일 뿐, 중앙의 모든 권력기구는 훈구에 의해 독점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사림파의 비조로 길재 → 김숙자 →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영남지방의 학통이 이어지는 면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종직 이전에 길재에서 김숙자로 이어지는 학통은 후대에 만들어진 측면이 있으며 현실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7) 실제의 현실에서는 김종직이 후진에 대한 교육활동을 본격화하여 문인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자각하면서부터 일정한 현실적인 영향을 갖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김종직은 29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세조 5년(1459) 이후 62세로 사망하는 성종 23년(1492) 이전까지 많은 제자 문인을 양성하였다. 특히 본격적인 교육활동은 성종 원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종직은 그의 대표적 문인인 김굉필과 정여창 등과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면서 교육을 하였다. 이들은 산발적인 만남을 통해 접촉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7) 김훈식, 「朝鮮初期의 정치적 변화와 士林派의 등장」 한국학논집45(2011) 참조.
비교적 연대의식은 매우 강하였다.
김종직이 성종 8년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있을 때 자신을 방문한 문인들을 전송하면서 쓴 시에서 ‘우리당〔吾黨〕’8)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학문적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들 가운데는 중앙의 정계에 진출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성종 16년(1485)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들이 늘어났다.
김흔(金訢) · 표연말(表沿沫) · 조위(曹偉) · 유호인(兪好仁) · 김심(金諶) · 양희지(楊熙止) · 김맹성(金孟性) · 강경서(姜景敍) · 강백진(康伯珍) · 이의형(李義亨) · 강겸(姜謙) · 주윤창(周允昌) · 최부(崔溥) · 김기손(金驥孫) 등 14명은 성종 15년 정도까지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런데 이 숫자는 점차 늘어 성종 16년부터 연산군 4년(1498)까지는 박한주(朴漢柱) · 이종준(李宗準) · 권경유(權景裕) · 홍한(洪瀚) · 권오복(權五福) · 강혼(姜渾)김일손(金馹
孫) · 유순정(柳順汀) · 이주(李胄) · 이수공(李守恭) · 이원(李黿) · 이계맹(李繼孟) · 방유령(方有寧) · 손중돈(孫仲暾) · 임유겸(任由謙) · 정여창(鄭汝昌) · 조광림(趙廣臨) · 김굉필(金宏弼) · 정승조(鄭承祖) · 안구(安覯) · 남곤(南袞) · 이목(李穆) · 정희량(鄭希良) · 강중진(康仲珍) · 이철균(李鐵均) · 임희재(任熙載) · 허반(許磐) · 조유형(趙有亨) 등 28명이 문과에 진출하였다.9)
이들은 대개 대간이나 홍문관 등 언론기관에 진출하였다. 특히 홍문관에 진출하여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면서 훈구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비리를 비판하는 데에 힘을 썼다. 홍문관원의 후보자 명단인 홍문록(弘文錄)의 선발에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면서 사림들이 언관에 진출하도록 힘을 썼다. 홍문관원이 되어서는 국왕의 경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을 활용하여 경연(經筵)에서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강력한 언론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홍문관이 사헌부, 사간원의 양사와 함께 삼사(三司)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8) 점필재집(佔畢齋集) 문집 부록 「점필재 선생 年譜」
9) 李秉烋, 「1) 사림의 중앙진출」 신편한국사 28(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96), 174~180쪽.
김종직(金宗直)이 김천과 관련이 된 계기는, 그가 58세 때인 1489년(성종 20)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아내의 고향이며 아버지의 임지(개령현감)를 따라 면학하던 곳이고, 아내와 아들 김목아(金木兒)가 묻혀 있어 가장 애착이 가는 김천의 배천(白川)으로 돌아온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서당인 경렴당(景濂堂)을 짓고 평소 공부하던 경서(經書) 등 천 권의 서책을 옮겨 학문 강론의 거점으로 삼았다. 김종직이 이곳에 오게 되면서 김천은 새로운 학문의 바람이 불게 되었다.
Ⅲ. 노촌 이약동의 생애와 활동
이약동은 본관은 벽진(碧珍; 성주)이고,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이다. 시조는 이총언(李忩言)으로서 태조 왕건의 삼한 통합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서 벽진장군에 봉해져 이때부터 자손들이 여기에 살게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판 종부시사 희목(希牧)이 증조가 된다. 할아버지는 존실(存實)이며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지냈고, 아버지는 남해현령을 지낸 증 호조판서 덕손(德孫)이며, 어머니는 공조전서 유무(柳務)의 딸이다.
이약동은 태종 16년(1416) 5월에 금산군(金山郡) 하로촌(賀老村:현재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다.10) 1441년에 진사가 되었고, 문종 1년(145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4년(단종 2) 감찰 · 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4년(1458) 유장(儒將)으로 특별히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고,11) 이듬 해 사직했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 정(宗簿寺正)이 되고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1468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10) 노촌선생실기(老村先生實紀) 권3, 「연보」 참조. 이하 생애와 관련된 서술에서 연보의 내
용은 특별히 주를 붙이지 않음.
11) 성종실록 권279, 성종 24년 6월 13일(을해)
특히 그는 외직에 나가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온 경우가 많았다.
성종 1년(1470) 제주목사 때에는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줄여서 백성의 부담을 더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또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모르고 들고 온 관물(官物)인 말채찍을 성루 위에 걸어놓고 왔으며, 항해 중 배가 파선의 위기에 놓이자 하늘을 속인 노여움이라 단정하고 배 안을 살펴 부하들이 몰래 넣어둔 갑옷을 찾아내 강물에 던진 투갑연(投甲淵)의 일화는 유명하다.
성종 5년(1474)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성종 8년(1477)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호조참판 ·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성종 18년(1487) 한성부좌윤· 이조참판 등을 거쳐, 성종 20년(1489)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성종 22년(1491)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33세에 선산 교도로 관직생활을 시작하고, 36세에 증광 문과에 합격한 후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간 이후 초기의 관직 생활에서 특징적인 점은 43세에 유장(儒將)으로 천거된 점이다. 이약동은 이후 문관직에도 나가지만 선전관을 겸하거나 오위의 장군이나 수군절도사에 제수되기도 하였다.12)
특히 51세에 구성절제사에 제수된 뒤,13)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는 데에 활약하기도 하였다.14)
제주목사가 된 것도 구성에서 53세에 돌아온 뒤 2년 후였다. 제주목사 시절에 이약동은 성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글을 받았다.
12) 성종실록 권43, 성종 5년 6월 27일(경진)
13) 세조실록 권39, 세조 12년 9월 15일(계미)
14)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6월 22일(을묘) : 앞의 책, 권43, 세조 13년 7월 9일(임신)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약동(李約東)에게 하서(下書)하기를,
“공진(供進)하는 모든 물건을 민간에 강요하니, 그 폐단이 작지 않다. 이제부터는 회실(灰實)이 없는 패자(貝子)는 올리지 말고, 녹자(鹿子)와 장피(獐皮)는 본시 50장(張)으로 정하였으나 이제 40을 감하고 단지 10장만을 봉하여 올리고, 진주(眞珠) · 앵무배(鸚鵡杯) 같은 것은 얻는 대로 올리는 것이 옳다. 이제 들으니, 세 고을의 수령이 타렵(打獵)하는데 비록 하룻밤을 지내더라도 반드시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서 거처하므로 그 폐단이 매우 많다 하니, 대저 임금의 거가(車駕)가 이르는곳도 다만 장막을 설치할 뿐인데, 신자(臣子)로서 이같이 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는 이와 같이 하지 말아서 민폐를 제거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15)
이와 같이 성종이 공납하는 물건에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사냥하는 데도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던 것은 이약동의 보고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 역시 이약동의 노력에 의해 취해진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제주목사에서 돌아온 이약동은 대사간이나 대사헌 직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겪은 변방에서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였다. 변경의 수비를 맡은 변장(邊將)으로서의 직무를 소홀히 한 하숙부(河叔溥)에 대해 논죄하는 차자를 올리거나,16) 경연에서 제주의 수령들이 백성들의 말을 취하지 않도록 국마(國馬)를 취하여 사용할 것을 건의한 사례 등도 이에 해당한다.17)
경상우도 절제사의 경험 역시 국정에서 적극 활용되었다. 이약동은 경연에서 강을 마친후에
15) 성종실록 권15, 성종 3년 2월 23일(경인)
16) 성종실록 권76, 성종 8년 2월 22일(신묘) : 앞의 책 2월 23일(임진)
17) 성종실록 권77, 성종 8년 윤2월 2일(경자)
신이 일찍이 경상도 처치사(慶尙道處置使)가 되었었는데, 군사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자는 선군(船軍)입니다. 선군은 매양 한 달[一朔]마다 서로 교체(交遞)하므로, 한달 사이에서 왕복(往復)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한가한 날이 8~9일에 지나지 아니하는데, 수령(守令)이 또 뒤쫓아서 이를 부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가난한 자는 유망(流亡)하고 부자는 피하기를 꾀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선군들이 그 역(役)에 오래 종사하여 배[船]를 다루는 데 익숙한 자가 있지않습니다. 옛적에는 선군의 전지(田地)는 사람들이 매매(買賣)할 수 없고, 수령이 부호(扶護)하지 않는 자는 죄를 주었는데, 지금은 이런 영(令)이 없기 때문에, (선군들이) 유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한 사람을 정하고 내일 한 사람을 정하니, 사람들이 그 역에 오랫동안 종사하는 자가 없으며, 또 수호(首戶)한 사람이 독자(獨自)로 입번(立番)하여 그 업(業)을 오로지하게 하나, 그 사람이 죽으면 뒤에 다른 사람이 그 일을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동거(同居)하는 자식(子息)과 고공(雇工)은 다른 역을 정하지 말고, 다시 서로 바꾸어〔遞代〕입역(立役)하게 하면, 수호(首戶)는 어깨를 펴고 쉴 수 있고, 물에 익숙한 자도 또한 많아질 것입니다.18)
라고 하여서 선군(船軍)의 고역을 덜어줄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약동의 제안은 제안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다음날 국정에서 이에 대해 종합적으로 토론하는 기회를 만들게 되어 바로 성종의 하교로 대책이 나오게 만들었던 것이다.19) 앞서 이약동이 제시한 제주의 수령에게 국둔 아마를 가려내어 훈련시키게 하고, 좋은 말은 올리게 만들자는 제안도 병조에 의해 건의되어 시행되기도 하였다.20)
이러한 활발한 국정의 참여로 인해 곧 이약동은 중국에 천추사(千秋使)로 다녀오기도 하였다.21) 이후에도 내 · 외직을 번갈아 가며, 활발하게 국정에 참여하였다. 천추사로 중국에 다녀온 이듬해인 63세 때에 경주부윤으로, 68세에는 호조참판에, 69세에 동지성균관사에, 71세에 전라도 관찰사, 72세에 한성부 좌윤, 이조참판, 다시 74세에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8) 성종실록 권77, 성종 8년 윤2월 10일(무신)
19) 성종실록 권77, 성종 8년 윤2월 11일(기유)
20) 성종실록 권77, 성종 8년 윤2월 14일(임자)
21) 성종실록 권83, 성종 8년 8월 25일(기미)
한편 이약동은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유향소(留鄕所)의 복설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였다.22) 유향소는 주지하다시피 조선 초기에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品官)들이 조직한 자치기구이다. 유향소와 연관된 조직으로 경재소도 있었다. 경재소는 조선시대 지방의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앙 기구로서 그 지역의 유향소 품관을 임명,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재소에 의해 임명된 유향소는 군현 지배권을 향리로부터 회수하기 위해서 경재소의 힘을 빌렸던 것이며, 재경관인들은 각기 경재소를 발판으로 하여 해당 읍 수령과 유향소에 직접 · 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연고지의 지방행정은 물론, 자기들의 경제적 기반도 부식해 갔던 것이다.
재지사족들은 성장해감에 따라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확립하고 새 농법을 적용, 지역개발을 활발히 추진하는 데서 그들의 정치 · 사회적 세력도 신장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유향소를 발판으로 한 재지사족들의 향촌지배에 대한 신장(伸長) 추세는 결국 세조의 전제정치와 관권 중심의 중앙집권화와 충돌하여 세조 13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이후 유향소 복설에 관한 운동은 성종 13년부터 다시 전개되었다. 따라서 이약동이 유향소 복설에 관한 논의에 참여한 성종 19년은 세조대에 폐지된 유향소를 복설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현장이었다. 이때 성종의 장인이었던 윤호(尹壕)와 같은 훈구는 설립이 불편(不便)하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만일 유향소를 설립하여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읍재(邑宰)와 겨루게 되고, 공사(公事)를 방해하기만 할 것이라고 하였다. 관권위주로 옹호하는 전형적인 논리였다.
이에 비해 이약동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22) 성종실록 권216, 성종 19년 5월 12일(을해)
의논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수령을 적당한 사람을 얻으면 유향소(留鄕所)는 없어도 되고, 유향소에 적임자가 아니면 그 폐단이 간활(奸猾)한 아전보다 심하다.’ 하였습니다만, 신 등의 의견으로는, 간활한 아전이 여러 가지로 폐단을 일으키는 것은 수령이 듣고 보는 것으로써 다 감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앙의 경재소(京在所)와 지방의 유향소가 서로 들은 대로 규찰(糾察)하여 간활한 아전을 억제시키고 시골의 풍속을 유지시킨다면 풍속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계기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지금의 유향소는 바로 옛날의 사심관(事審官)이니 회복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23)
이라고 하여 관권의 규찰에도 한계가 있으니 향촌 사회에서 이를 도와서 풍속을 유지하는 방향, 곧 향촌사회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유향소의 복설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결국 「유향소 복설절목」에 의거하여 새모습으로 유향소가 복설되기는 한다. 그러나 복설된 유향소는 향사당(鄕射堂)과 같은 시설의 확충, 조직의 강화, 향안(鄕案)의 작성, 향규(鄕規)의 제정과 함께 수령 치읍의 보조기관인 군현의 ‘이아(貳衙)’로 정비되어 갔다. 당초 사림파가 의도했던 방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권 주도의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약동이 이 시기 유향소의 복설을 주장한 사실은 그의 지향이 사림파와 연결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이약동은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성종대의 사림파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김종직과는 관직 생활을 같이 하며 시를 주고 받을 정도로 긴밀한 친분이 있었다.24)
이약동의 고향인 김천은 김종직이 고을 원을 하였던 선산(善山)과 가까웠을 뿐 아니라, 김종직이 한때 김천에서 경렴당(景濂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깊은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종직은 이약동에게 보낸 시에서 ‘백관 중에서도 가장 고루 덕이 뛰어나다’든가 ‘공은 시서(詩書)에서 모든 사람의 참된 우두머리’라고 하여 최고의 칭송을 전하였다. 김종직은 또 ‘문무의 재질 갖추고 덕 또한 겸했네’라거나 ‘군덕(君德)을 보익(補益)할 인물을 구한다면 공론이 응당 세상에 우뚝 솟아난 그대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기도 하였다.
23) 앞 주와 같음
24) 노촌선생실기 권2, ‘唱和詩’ 金宗直
또 이약동이 외직으로 나가든가 할 때에는 거의 전별하는 시를 전하기도 하였다.25) <신도비문>과 같은 금석문의 기록에서도 이약동은 김종직과 조위(曺偉)와 더불어 함께 도의(道義)로 벗이 되어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고 하였다.26)
이러한 이약동의 활동과 평가 때문에 그는 금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이나 제주도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던 것이다. 김천 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경렴서원에 모셔진 인물은 김종직과 조위, 이약동이었다.
이가운데 조위는 ‘자기 검속을 바탕으로 도의(道義)를 견지하는 관인’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사림파의 새로운 지향과 연관되는 것이었다.27) 인조 26년(1648년) 김산군수 조송년(趙松年)이 감천면 금송리 사미정(四美停) 자리에 창건하였던 경렴서원은 주렴계를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세워졌는데, 이약동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사례이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노촌 이약동의 생애와 활동을 사림과 연결하여 살펴보았다.
이약동이 주로 활동하던 시기인 세조~성종 사이에는 15세기에 만들어진조선사회의 틀이 어느 정도 안정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이다.
25) 속동문선(續東文選) 권7, 「칠언율시(七言律詩)」 절도사 이약동(李約東)이 진에 부임할
제 연아(演雅)운으로 차운하다[次李節度約東赴鎭韻演雅] - 김종직(金宗直)
26) 노촌선생실기 권4, 「신도비문(神道碑文)」
27) 김창호, 「조위(曺偉) 시(詩)에 나타난 15세기(世紀) 후반(後半)의 관인상(官人像)과 그 의미」
한문고전연구 25(2012) 참조.
정치적으로 특히 성종대에는 이전과는 달리 사림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문제점에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약동은 조선전기의 인물 가운데서 전형성을 보이는 인물이다. 문과로 과거 급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어 문무를 겸비하였다. 또 관료로서 내직과 외직을 고루 거쳤다.
특히 외직으로 지방행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점은 그가 관료로서 매우 유능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본격적으로 초기 사림들이 진출하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성종대에는 아직 사림세력들이 중앙의 정치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일부의 모임이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기였다. 다만 훈구의 비리가 본격화되면서 사림 역시 이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기 시
작한 시기였다. 사림 세력들이 언로를 장악하여 훈구 대신들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하였던 것이다.
이약동이 활발한 활동을 펼친 시기는 이와같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였으므로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약동은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구성절제사, 제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의 경험은 현실의 문제를 절실하게 다룰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에 기여하였다. 중앙의 내직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 문제가 되었던 현실을 바꾸는 데에 노력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은 그의 청백리 정신과 함께 관료로서 전범이 될 수 있는 측면이었다.
중앙관직으로 나가서 이약동은 그 사이에 문제가 되었던 유향소의 복립을 청하는 등 사림들과 입장을 같이하였다. 이약동은 김종직과 막역한 교유를 가져서 자신이 지방관으로 내려갈 때 전별시(餞別詩)를 주고 받을 정도였다. 지역적 연결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지연(地緣)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정치적 지향(指向)과 관련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당장은 이들의 지향이 현실에서 충분하게 소통되지는 못했지만 결국 사림들이 조선을 바꾸는 데 일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렴이라는 가치를 내면화하고, 지방에서 수령으로서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내려지는 세금이나 억압을 줄이려고 했던 것, 합리적인 행정을 지향한 것, 일방적인 통치보다는 사대부 사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태도 모두 이전의 장점을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모습이었다.
초기사림으로 평가받는 김종직, 또 김종직과 함께 신진 사림의 기풍이 있었던 조위와 함께 이약동이 김천에서 최초로 세워지는 서원에 모셔졌던 사실은 그만큼 그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공유하였던 인물이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논문투고일자: 2016.10.27. 심사완료일자: 2016.11.10. 게재확정일자: 2016.11.1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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