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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6:1-10절)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오늘날 교회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교회의 귀족화(貴族化)된 것입니다. 교회가 귀족화되려면,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 안에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많으면, 성공한 사람들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다 보니, 자동적으로 세상 적으로 잘난 사람들만 모이게 되고, 성도들은 그런 성공한 집단에 자기가 포함된 것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 집단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높여주고, 서로 치켜세우면서 만족스럽게 지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審判臺)앞에서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판단되고, 그들의 수고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이 숙제(宿題)입니다.
Ⅰ.하나님의 은혜는 취소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한번 받은 구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6:1절)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헛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그 구원이 취소나, 무효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은“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취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부르시고,“의롭다”하신 사람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롬10:13절)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데 사도 바울은 6:1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지금 “너희의 구원은 취소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나름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믿었는데, 후일 심판대에 서 보니, 전혀 믿음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그 은혜가 무효화되고, 지옥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성경은“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요15:2절)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중, 진정한 열매가 없는 자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뜻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우선 자신의 죄(罪)를 진정으로 깨닫고, 예수를 믿는 자는 그 사람이 연약(煉藥)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절대로 구원이 취소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서운 죄 성이 있고, 자주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알면서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자주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마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주님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낍니다. 즉 한 순간이라도 주님이 붙들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가 292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고 상태가 좋다가도 세상적인 말 한마디와 죄의 유혹(誘惑)으로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상태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용서받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연약하고, 자주 넘어진다 해도 절대로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둘째, 복음을 거부하지는 않아도, 복음이 갖는 사상(思想)이 너무나 신선하고, 숭고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에 강한 성령의 체험을 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罪人)이란 사실을 한 번도 심각하게 깨달은 적이 없습니다. 그가 교인이 된 이유는 기독교가 너무나 좋고, 믿는 사람들이 신사적이기 때문인데,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지옥(地獄)형벌을 피할 수 없는 죄인(罪人)이란 사실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날 이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이 이런 상태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①복음이 없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죄인(罪人)인지를 전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축복(祝福)과 은혜(恩惠)만 전한다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많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를 들어서 계란으로 말하면, 무정란(無精卵)과 같습니다. 생긴 것은 다른 계란과 같은데, 그 안에 생명(生命)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 그런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죄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독교 진리(眞理)를 많이 알고, 여러 가지 은사(恩賜)를 맛보았고, 열심으로 교회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거듭난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회적으로 지위(地位)도 높고, 교회에서 중책(重責)을 맡은 사람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거듭난 것 같지가 않다”고 말한다면, 누가 그 말을 인정할까? 아마“당신이 도데체 뭔데 나의 구원을 문제 삼느냐? 면서 벌컥 화를 낼 것입니다.
또 예를 들어서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들이 외국 신학교로 유학을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신앙과 생각이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시다. 만약 그들 중에 한 사람이 같은 유학생 친구 목사에게“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거듭난 것 같지 않다”고 한다면, 아무리 사랑으로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평생 율법을 가르치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던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본 이유는 지나친 형식주의(形式主義)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겉으로는 비천(卑賤)한 모습과 내면(內面)으로는 풍성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이 사람의 中心을 보지 못하고, 外的 조건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사도 바울을 하찮게 여긴 것은 그의 겉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항상 식사도 굶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매나 맞고, 죽도록 고생만한 것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을 무시한 것입니다.
세상 적이 눈으로 보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실패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기(人氣)가 높고, 유명한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핍박(逼迫)과 궁핍(窮乏)하면서 복음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처지의 사도 바울을 보는 고린도 교인들의 시각(視覺)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사도 바울을 무시하고, 업신여겼고, 능력이 없어서 그 나이가 먹도록 그렇게 거지처럼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의 외적(外的)조건을 보고,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이것입니다. 중심(中心)이 변한 사람은 반드시 그 열매를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단계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외적(外的)조건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인간적인 능력일 뿐입니다.
Ⅱ.사도 바울의 선포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다시 복음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2절)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말씀은 사49:8절)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는 예언으로써 오랫동안 죄(罪)와 저주(咀呪)의 어두운 감옥(監獄)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선포입니다.
처음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신 후, 눅4:21절)...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즉 예수님이 읽으신 글은 눅4:18-19절)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여기서“주의 은혜”란 희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포로 된 자에게 희년이 되면, 그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과거 자기 땅을 다시 되찾는 때가 곧 희년(禧年)입니다. 예수님은 그 희년(禧年)이 그들에게 찾아 왔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죄에서 해방되지도 못한 고린도 교인들에게“하나님의 은혜의 날”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자들을 죄에서 건지시고, 축복(祝福)을 회복시켜 주시는 날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임무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당장 고린도 교인들과 원수(怨讐)가 되는 한이 있어도, 나중에 심판대(審判臺)앞에서 함께 웃을 날을 바라본 것입니다.
즉 “지금 너희들은 세상 적인 복(福)을 가지고,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너희들은 아직 죄악(罪惡)의 소굴을 떠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너희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다 버리고, 주께로 오면, 하나님은 너희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능히 도와주실 것이다.” 라는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죄인(罪人)들을 향하여 넓은 팔을 벌리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죄(罪)로 인하여 번민(煩悶)하고 있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능히 도우실 것입니다.
Ⅲ.바울의 처지와 하나님의 축복 사도 바울은 자신의 외적(外的)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열거합니다. 사실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무시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이것들은 이 세상에 없는 것들입니다. -5- 사도 바울은 왜 자기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3-5절)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란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기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중요한 것은 바울이 왜 숱한 고생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느냐? 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는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구도(構圖)가 짜여져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일어난 박해(迫害)를 피해 흩어지면서 여러 곳에 교회가 생겨났는데, 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교회만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상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의 놀라운 섭리(providence)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종속(從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 교회는 독립적이어야 했고, 예루살렘 교회와 대등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유대교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존 교회의 도움도 없이 아예 처음부터 개척(開拓)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대접 받기는커녕 오히려 모진 고초(苦草)를 당하면서 밑바닥에서부터 복음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롬1:17절)...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고도,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복음(福音)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은 돈을 주고, 지식(知識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진리를 일종의 거래(去來)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바울에게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면, 돈으로 복음을 샀다 생각하고,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여 복음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고린도 교회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일체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존 큰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교회를 개척하거나 선교하는 것은 좀 나은 편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무일푼)상태로 처음부터 개척하려면 어려움이 따릅니다. 즉 물질적 후원도 없는데다 목회자가 핍박(逼迫)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심지어 불신자들을 열심히 전도, 양육하던 전도목사를 세입자라는 이유로 토공이 모두 해체시키고, 또 재산까지 교묘한 방법으로 빼앗아 재기 할 수 없도록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젖먹이 어린 자식을 맹수들에게 빼앗긴 부모의 심정으로 가슴이 너무나도 아풉니다.
4절)오직 모든 이레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전도자가 아니라, 직접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자천(自薦)하여 이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고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대접을 받아가며, 남들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고, 편안하게 사역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더라면, 고린도에까지 복음이 올 수도 없었을 것이고,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교회가 되던가, 아니면, 유대교의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랫동안 많은 일들을 견디었습니다. 복음의 열매는 그렇게 쉽게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변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산모의 고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식물은 겉보기에 쑥쑥 자라지 않는 것 같지만, 계속 물을 주다 보면,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음 4절에서 환란(患亂)이란 복음에 대한 저항(抵抗)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저항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대적(對敵)을 많이 당했습니다. 또“궁핍(窮乏)”이란 경제적인 고통입니다. 객지에서 돈이 떨어지면, 거지가 되어 먹을 것을 구걸하거나, 타인에게 잠자리를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곤란(困難)이란 오해를 받아서 공격당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돈을 좋아한다. 오해 하든가, 아니면 있지도 않은 과거의 일을 들춰내어 공격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바울을 정신적으로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5절은 육체적 고통입니다. 사도행전 12절에서도 매 맞는 것과 갇히는 것과 난동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일을 당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5절)...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이란 바울이 잡혀가서 그런 고통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장막(帳幕)을 짜느라고 그런 고생을 한 것인지? 아니면, 복음을 전하느라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된 일일 것입니다.
이런 고생이 고린도 교인들의 눈에는 바울의 무능력(無能力)으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보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6-7절)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①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깨끗합니다. 이는 영혼(靈魂)의 깨끗함입니다. 만약 영혼이 깨끗하지 않으면, 마귀(魔鬼)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영혼이 깨끗한 이유는 죄(罪)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 회개(悔改)하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②복음 전하는 사람은 영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있습니다. 한 영혼이 변화되는 기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상급(賞給)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을 낼까? 그 사람이 변화되는 기쁨이 돈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아기를 그토록 힘들게 키우는 이유는 아기가 자라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③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심하게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발걸음을 인도해 주심을 체험합니다.
④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더 많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리(眞理)는 현장에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초라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풍성함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진 것들 중, 이 세상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즉 ①깨끗함이나 ②지식이나 ③오래 참음이나 ④자비나 ⑤성령의 감화나 ⑥거짓 없는 사랑을 이 세상 어디어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주님을 인해 고난당하다가 얻는 하늘의 귀한 선물(膳物)들입니다. 약1:17절)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특히 7절)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라고 했습니다.“의의 무기를 좌우로 한다”는 것은 양쪽이 하나님의 칼을 들고 서 있어서 빈틈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양쪽에 칼을 들고 있어야 한쪽 칼은 공격용으로 방어하고, 한쪽 칼은 상대방을 공격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福音)을 자유자제로 사용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진정한 부자(富者)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돈과 사회적 지위에 연연하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靈的)인 것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Ⅳ.그리스도인의 실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을 내리는데, 고린도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 소중하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8절)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여기서“그러했다”란 헬라어로“디아”인데,“무엇 무엇을 통해”라는 뜻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광도, 욕됨도, 아름다운 이름도. 악한 이름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도 영광이요, 칭찬도 영광이요, 또 아름다운 호칭도, 더러운 오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리를 다 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은 칭찬과 모욕도 다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를 천사처럼 좋아할 것이고, 그러나 변화되지 못한 사람은 그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온갖 흉을 다 볼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비판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즉 자꾸만 자기를 정죄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죄인(罪人)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을 그냥 평안하게 돌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격해서 그의 죄 성을 보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지옥(地獄)에 가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은 바울의 겉모습과 진정한 실체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8-10절)...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얼마나 멋진 비교입니까? 사람들이 바울을 사기꾼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기꾼이라고 부른 이유는 너무 쉽게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즉“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으니, 얼마나 쉽습니까? 그것이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미쳤다. 귀신들린 자”라고 말했지만, 사도 바울은 진실한 예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알려진 사람도, 신문에 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나라에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적으로 유명한 것과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다릅니다. 세상 적 유명한 사람은 세상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고, 치켜세우지만, 하나님의 종은“세상은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이 세상을 본 받지 말라”고 말하니, 그가 유명해질 리가 없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습니다. 마치 살 소망이 없는 자처럼 보입니다. 그는 애써 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아직 살았습니다. 또 그는 돈도 없는데, 많은 사람을 부요(富饒)하게 했습니다. 그는 근심하는 것 같았은데,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은데,“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가진 것이 없으면, 자신을 비참하게, 근심할 것이 있으면, 실제로도 근심이 많고, 죽을 것 같은 지경이면, 실제로 죽어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다같이“그러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너는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말하면,“나는 모든 것을 다 가졌어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거든”이라고 대답을 주어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너는 집도 없구나.” 라고 말하면,“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적인 것으로 부요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하늘의 것으로 부요(富饒)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굴복하면, 안 됩니다. 그들의 평가에 우리는“그러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부요(富饒)함을 알지 못하고, 그의 겉모습만 보고‘저는 무능한자요 저는 실패한 자요”라고 말한 고린도 사람들을“너희는 헛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실컷 믿고도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지옥(地獄)에 가야할 형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은혜를 헛되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의 가치관(價値觀)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하고, 어린 아이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되기 싫은 사람은 심판대(審判臺)앞에서 가장 비참한 실패자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523장 *어둠 죄악 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