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로비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북적였던 고성의 거리가 한산해졌다. 뭘 할까 고민하고 잇는데
마침 어제 이형이 이야기해준 카페 생각이 났다. 카페 이름은 "我在丽江等你 I am waiting for you in Lijiang" 번역하면 '나는 리장
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이다. 연인이 리장을 떠났지만 자신은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슬픈 전설(?)을 지닌 카페다. 나름
문화 카페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구글에서 찾아봤는데 마침 홈페이지가 있었다. 홈페이지에 적힌 주소를 지도에 대
략 표시해놓고 호텔을 나왔다.
비 때문에 고성의 돌길이 정말 미끄러웠지만, 돌에 맺힌 물기에 빛이 반사되어 예뻤다. 빗방울이 기와 지붕과 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도 듣기 좋았다. 주변에서 가끔씩 넘어지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평화롭고 예쁜 풍경이었다. 여행중 비는 가장 피하고 싶은 것
들 - 설사병, 소화 불량, 도난, 고수풀 등 - 중 하나지만, 리장 고성은 오히려 비가 오는 편이 좋았다.
비오는 거리
카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예쁜 카페를 기대했는데 그냥 집 마당에 소파를 늘어놓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일단 들어가서
운남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한켠에서는 한 청년과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가사의 대부분이
"워짜이리장덩니"인 슬픈 느낌의 노래였는데 비소리와 꽤 잘 어울렸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옆에 누가 앉아 영어로 말을 걸었다.
"이 시간에는 원래 한가해. 하지만 9시가 넘으면 라이브 공연도 하고 사람들도 많이 와"
"너 여기서 일하니?"
"응. 난 미셸.(중국 여자들은 다 영어 이름이 있는건가?) 3일 됐어"
"덩 슈이? 누구를 기다린다는거야?"
"그건 나도 몰라. 우리 사장님한테 물어봐. 그가 만든 노래야"
연습하는 모자가 너무 다정해 보여서 동영상과 사진을 좀 찍었다. 사진을 어머니한테 보여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다. 파일을 아들
의 컴퓨터에 옮겼다. 동영상 파일을 컴퓨터로 보려면 변환이 필요하다. 파일 변환 프로그램 따위를 들고 다니지는 않으니, 인터넷
으로 다음 인코더라도 받아야했다. 다운로드 예상 시간 65분. 난감해 하는 아들에게 "괜찮아. 나 시간 많아. 어짜피 할 일도 없는
걸." 하고 말해주고 모자의 노래를 들었다.
"리장에 온지는 얼마나 됐니?"
"왜 운남성에 온거야?"
미셸이 보통 여행자에게 묻는 질문들을 하고, 나는 몇 번 해봤던 대답들을 반복하고 있는데 기타를 치던 어머니가 미셸에게 말했
다.
"그 한국애 중국어 잘해. 중국어로 말하지 그러니"
그렇게 시작된 중국어 실습. 내 중국어 밑천은 대략 10분이면 전부 바닥이 나 버린다. 어색한 침묵 사이로 비소리와 기타소리가 흘
렀다. 잠시 후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동네 아주머니가 오셔서 한국에서 있었던 재미있던 일들을 '중국어'로 이야기해 주셨다.
20%도 못알아들었지만 다 알아듣는 척 하고 반응해드렸다. 그러는 동안 비가 그치고 다운로드도 다 됐다. 파일을 얼른 변환해주고
카페를 나왔다.
"이따 9시에 올래?"
"그래 이따 봐"
워짜이리장덩니
카페 프라하에 가서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시고 가방을 사러 갔다. 호도협에 올라갈 때 큰 베낭은 게스트하우스에 맡기고 꼭 필요한
것만 작은 가방에 넣어서 올라갈 계획이었다. 고성에 있는 아웃도어 용품점에는 다 가봤는데 적절한, 그러니까 작고 싼 가방을 찾
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단 대부분의 가방은 컸고, 마음에 드는 작은 가방은 너무 비쌌다. 대부분 2만원 정도. 우리 나라에서 2만원
짜리 가방은 비싸다고 하지 않겠지만, 내가 본 가방들은 2만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중국산스러웠다.
거의 포기했을때 쯤 마음에 드는 크기의 가방을 발견하고 가격을 물어봤는데 90원이라고 한다. 혹시나 해서 30원을 불러봤는데,
좋다고 30원에 가져가라고 한다. 30원이면 5000원 정도다. 득템했다는 생각에 바로 사들고 나왔다. 빨간색이지만, 촌스럽지만 괜
찮다. 어짜피 한 번 쓸 것 작고 싸면 그만이다. (한 번도 못 쓸 수 있다는 것을 호도협에 올라간 다음에야 알았다) 그래도 리장 시내
에서 들고 다니기에는 좀 모양이 빠지는 것 같아서 호텔로 돌아왔다. 화가 로비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길래 하나 사서 같이 먹었다.
"화. 내일 호도협으로 갈건데 차편을 좀 알아봐줄래?"
"택시를 말하는거야? 물론 불러줄 수 있지"
"아니. 택시는 비싸자나. 공공버스를 말하는거지."
"호도협 가는 버스는 없어."
"샹그릴라 가는 버스가 호도협 입구에 들린다고 들었어"
"그럼 알아보고 우리가 예매해줄 수 있어"
"응. 그럼 이따 받으러 올게"
표를 예약해놓고 피로를 좀 풀어볼까 하고 중국 마사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편안하고 좋았는데 점점 강도가 세지더니, 나중에
는 정말 너무 아팠다. 특히 목과 오른쪽 어깨가 좋지 않다며 집중공략을 했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마사지하는 아줌마
도 매우 힘이 들어 보였다. 이렇게 고생하는데 한 시간에 80원밖에 주지 않는다는 것이 좀 미안할 정도였다. 다시는 받지 말아야겠
다고 생각하고 100원을 주었다.
프라하 카페. 운남성 우유가 신선해서 그런지 카푸치노 맛이 신선하다.
리장 고성의 야경
9시가 넘었길래 워짜이리장덩니로 갔다. 가는 길에 리장에서 제일 유명한 망고 요거트를 사먹었다. 7원에 이렇게 맛있는 요거트
를 먹을 수 있다니. 신나게 떠먹으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커피 볶는 냄새가 났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커피 볶는 냄새를 지나치지 못한다. 냄새를 따라가보니 운남성 커피 전문 판매점에서 커피를 핸드 로스팅 하고 있었다. 여기서 핸
드 로스팅이라 하면 실제로 손으로 팬을 빙글빙글 돌리며 로스팅한단다는 뜻이다.
"운남성 커피는 참 맛있어요. 그렇게 강한 맛은 없지만 그래도 부드러워서 오전에 마시기 좋아요. 중국에 이렇게 맛있는 커피가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중국 사람들은 차만 마시는 줄 알았거든요."
아쉽게도 커피 볶는 사내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옆에서 가게 정리를 하던 여직원도 마찬가지. 저 긴 찬사가 중국어로는 짧게
번역된다.
"윈난카페이 헌 하오. (운남 커피 맛있습니다)"
"시에시에 (고마워요)"
윈난 아라비카 원두를 조금 사서 가게를 나왔다. "갈지 말고. 홀 빈으로"를 중국어로 설명하는데 진땀을 뺐다. 그냥 볶아 놓은 콩
하나를 집어 들었으면 됬을 것을. 한 손에 커피를 들고 한손에 망고 아이스크림을 들으니 세상에 맛있는 것은 내가 다 들고 있는
것처럼 뿌듯하다. 여행을 하면 참 단순해져서 좋다.
망고 아이스크림
윈난 아라비카
워짜이리장덩니에 갔더니 미셸이 말했던 대로 사람이 꽤 많았다. 아까 사장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연배가 비슷해 보
이는 남자가 기타를 치고 있었다. 잘 부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은 정말 좋았다. 노래를 즐기는 사람만 부를 수 있는 노래였
다. 구석에 앉아 맥주를 한 병 시켰다. 자세히 보니 다들 10대 후반 20대 초반인 것 같았다. 이런데서 놀기에 나는 너무 나이가 들
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미셸이 왔다.
"심심해 보인다. 재미 없어?"
"그냥. 노래는 좋은데, 내가 놀기에 여기는 너무 어린 것 같아."
"나도 그래. 이 일 그만 둘까봐. 나랑 안맞아"
"3일 됐다며"
"상관 없어. 난 운남성을 여행하는 중이고,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데서 일하면 돼"
"너 자유인이구나. 부럽다. 이제 어디로 갈껀데?"
"아마 루구호에 갈 것 같아. 여기 있는 너도 자유인 아냐?"
"그런가?"
워짜이리장덩니
호텔에 돌아오니 너무 늦어서 대문이 닫혀 있었다. 12시밖에 안됬는데;; 화에게 전화를 해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화에게 호도
협에 가는 버스 표도 받았다. 제일 빠른 버스는 8시인데 매진이 되어서 8시 반 표를 예매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터미널
까지 태워주라고 오전 근무자에게 이야기해놓았다고 한다. 호텔에 영어를 하는 스탭이 화 밖에 없어서 내가 뭔가 찾으면 근무 시
간이 아닐 때도 호텔에 와서 도와주었다. 정말 친절한 아가씨다. 고마운 마음에 한국에서 사간 장구 모양의 핸드폰줄을 하나 선물
로 주었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짐을 싸고 터미널에 갔다. 버스는 예정 시간을 20분 넘겨서 출발했다. 호도협에 가는 여행자들과 샹그릴라까
지 가는 현지인들을 한 눈에 구별할 수 있었다. 등산화를 신고 큰 가방을 든 사람들을 따라 내리면 되겠지. 리장에 묵는 3일 내내
고성 안에만 있어서 잘 몰랐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니 리장 시내에서도 옥룡설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렇게 멋진 산을 항상
보며 사는 것은 꽤 멋질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선이 1개밖에 없다보니 느린 트럭이 앞에 가면 하염없이 따라가거나 위험한 추월을 시도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추
월을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지만 1시간쯤 지나니 익숙해졌다. 산을 하나 넘으니 양쯔강이 눈에 들어온다. 양쯔강을 따라 조금 올
라가면 호도협 입구 마을 치아토우. 3시간 걸린다고 했는데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내리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기다리란다. 아저씨
는 조금 더 가서 호도협 입구에 내려주셨다. 난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큰 가방 맡기고 가야 하는데;;; 다시 거꾸로 올라가서 Jane's
guesthouse에 가방을 맡기고 트레킹 길에 올랐다.
호도협 가는 버스. 샹그릴라 가는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린다
리장 신시가지
호도협 가는 길. 옥룡설산
양쯔강
트레킹 시작을 알리는 간판
http://www.cyworld.com/itsnodoub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