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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도올 3화
1. 소황제
우리나라의 경우, 아기 때부터 배우는 교재나 교구가 너무 많아서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걱정이다. 이탈리아나 유럽에서는 조기교육이 별로 없다. 중국 상황이 한국과 아주 비슷하다.
중국 베이징에도 8학군 같은 곳이 있다. 베이징에 허름한 판자촌이 있는데 3평짜리가 7억5천만원이다. 거기 바로 앞에 명문 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북경 판자촌 인근에 1909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때 세워진 ‘제2 실험 소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를 졸업하면 북경대, 칭화대 등 중국의 명문대 입성에 유리.
또 중국에는 소황제라는 단어가 있다. 중국의 부모들이 외동아이를 황제처럼 키워서 생긴 말이다.
소황제(小皇帝): 중국에서 과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외동아이를 일컫는 말.
중국이 ‘한 자녀 정책’을 시행해서 교육열이 더 심하다. 게다가 소황제들이 스무 살이 되면서 입대도 하고,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따라 문제가 많다. 개인 주의자들도 많고, 인성이 부족한 사람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소황제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등 여러 명이 용돈을 주다보니깐 인성교육이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시징핑 주석은 유교 도리를 부활시키려고 국학원을 차리려고 하는 훈장님들한테 국가에서 지원금도 주고 있다. 그리고 2016년부터 중국은 ‘두 자녀 정책’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교사상이 오랫동안 이어왔기 때문에 외동아이도 어느 정도 예의를 지키는데, 중국은 소황제들로 인한 문제가 새로운 사회 현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유교 사상은 원래 중국 문화의 기본이었는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이후 사라져 버렸다. 요즘 중국의 젊은 사람들은 유교 사상을 모른다.
2. 차이나는 퀴즈
1. 맹자가 말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은 무엇일까요?
1) 부모가 두 분 다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父母俱存 兄弟無故)
2)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3)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得天下英才 而敎育之)
2. 얼마 전 중국의 어느 학교에서 친구를 때린 아들에게 ‘알몸 구걸’을 시키는 호랑이 엄마의 사진이 게재되어 화제가 되었다. 중국에서 엄격한 훈육과 사교육을 강조하는 엄마들을 ‘타이거 맘, 호랑이 엄마’라고 부르는데, 반대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가지는 자상한 아빠를 가리키는 이 동물은 무엇일까요? : [고양이 아빠.]
3. 교학상장(敎學相長)
지난 시간 박철민군이 상당히 좋은 말을 했다. 내가 지난 시간에 군자삼락을 이야기했다. 그때 3번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니 얼마나 기쁜가.(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였다.
그런데 철민 군 이야기가 군자의 네 번째 즐거움은 ‘큰 스승님을 모시고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군자의 4락이 아니냐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난 구절을 소개해 주겠다.
예기(禮記)의 제18편 학기(學記)에 나오는 구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동양식 교육은 모두 주입식이고,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서양식 교육은 굉장히 자유롭고 쌍방적이라고 여긴다. 그 생각은 다 엉터리다. 우리의 동양식 교육이 서양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쌍방적이다.
敎學相長 - 禮記 學記篇
玉不琢不成器
人不學不知道
念終始典于學
是故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故曰敎學相長也
玉不琢不成器 (옥불탁불성기)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아무리 귀한 옥이라도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다.
人不學不知道 (인불학부지도)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모른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가 없다.
念終始典于學(염종시전우학)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항상 배움에 힘쓰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항상 배움에 힘쓰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是故學然後知不足 (시고학연후지부족)
그러므로 배운 후에 부족함을 알 수가 있다.
고로 배우고 난 연후에나 사람은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가 있다. 배워 봐야 '내가 부족하구나'를 알 수가 있다.
敎然後知困 (교연후지곤)
가르쳐 본 후에나 그 힘듦을 알게 된다.
사람을 직접 가르쳐봐야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故曰敎學相長也 (고왈교학상장야)
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서로를 키워주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가르친다고 하는 것과 배운다고 하는 것은 서로를 키워주는 것이다.
내가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동시에 배우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면서 나를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결국 배우는 것도 4락으로 들어가지 않겠냐고, 자신의 기쁨을 토로했는데, 실제는 맹자의 삼락 속에 이미 배운다고 하는 입장이 들어가 있다.
4. 공산당의 뿌리, 농민
오늘은 중국의 시진핑이라고 하는 위대한 인간이 탄생하는 과정을 알아본다.
일단 중국의 14억 중의 1명으로 뽑힌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Great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다.
중국은 1921년 공산당을 결성하고, 1927년 홍군을 결성한다. 그리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한다. 1921년에서 1949년까지 이어가는 중국 공산당 운동의 과정은, 모택동의 사상과 영도력 하에서 중국 대다수 인민이었던 농민의 마음을 얻는 과정이었다.
시골에서 지주를 타도하고, 그 지주가 갖고 있던 땅을 빼앗아서 농민한테 나누어줄 때, 소작농이던 농민들은 불안했다.
몇 백 년, 몇 천 년을 소작으로 착취를 당하며 살아온 사람인데 ‘이게 네 것이다!’라고 줄 때, 처음엔 불안해했다.
그런데 모택동은 그걸 보장했다. 그런 식의 운동이 한 군데에서 성공하니깐, 점점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모택동이 농민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중국을 세웠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 가면, 가장 힘들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농민이다.
농민의 지지를 얻어서 만든 중화인민공화국이 철저하게 농민을 탄압하고, 억압하고, 배반하고, 그냥 개똥 취급을 해서 오늘날 중국의 부귀(富貴)를 이루었다.
과연, 중국의 공산당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지금 시진핑을 논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시진핑이라는 인간을 놓고 보면, 아버지가 유명한 혁명 원로였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5. 혁명의 아버지 시종쉰
보통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종쉰(習仲動)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시진핑의 아버지 이름을 모른다.
시종쉰(習仲動) : 1913~2002
그런데 우리가 모를 뿐이지, 시종쉰은 중국정치사에 있어서 정말 위대한 인물이다. 위대하다는 표현을 써서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시종쉰이라는 분은 혁명 1세대로 중국 공산 혁명의 선도자이다. 시진핑이 9살 되는 해, 반혁명 분자로 몰려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공산당 혁명 원로 시종쉰, 그는 시진핑에게 어떤 의미인가?
중국에 가면 섬서성(陝西省)이라는 곳이 있다.
섬서성(陝西省) : 중국 중서부에 있는 성.
섬서성에 서안(西安)이라는 곳이 있고, 그 위로 혁명의 성지 연안(延安)이 있다.
서안(西安) : 중국 섬서(산시)성의 도시. 연안(延安) : 섬서성 북부 도시. ‘대장정의 종착’ 혁명의 성지라 불림.
섬서성은 중국에서 본다면 굉장히 후미진 곳으로 고원지대다. 바로 그 섬서성의 부평(富平)이란 곳에서 시종쉰이 태어났다.
시종쉰 : 섬서성(陝西省) 부평현(富平縣) 출생.
주은래(1898-1976), 등소평(1904-1997), 모택동(1893-1976)은 모두 청나라 시대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시종쉰은 1912년 손문에 의해 공화국(중화민국)이 수립된 이후인 1913년에 태어난 공화국의 신생아였다. 그 이전의 사람들하고 다른 사람이다.
시종쉰 : 새로 수립된 공화국의 신생아
6. 모택동 대장정
중국의 공산혁명에서 모택동을 오늘의 모택동으로 만든 가장 위대한 사건을 뭐라고 부르나? 바로 장정(長征)이다.
혁명 원로는 모두 무지막지한 장정(長征, long march)에 참가했다.
장정(長征, long march, 1934~1935) : 중국 홍군이 강서성 서금에서 섬서성 오기진(오기진)까지 국민당군의 토벌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12,500km를 걸어서 이동한 행군. 모택동이 공산당에서 지도력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모택동은 삼국지를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에게 재미나게 삼국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사람은 주로 삼국지를 가지고 혁명을 했다. 삼국지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으니깐 농민들이 모여 들었다.
당시 홍군의 무기는 국민당에서 뺏은 것뿐이었다. 공산당은 갖고 있는 게 없었다. 매우 빈곤한 조건 하에서 국민당 군대와 싸워야 했다. 공산 세력이 앞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깨달은 사람이 누구였을까? 바로 장개석이었다.
그 당시 중국의 진정한 상대는 중국을 침략한 일본이었다. 일본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일본 세력이 치고 들어오는데, 장개석은 ‘일본과 싸우는 건 나중 일이고, 먼저 안에 있는 공산당을 평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장개석은 선안내(先安內) 후양외(後攘外)!
중국 인민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장개석은 선안내(先安內) 후양외(後攘外)라는 작전 하에서 반드시 먼저 공산당을 먼저 박멸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이 계속되자, 강서성 서금에서 탈출하기 시작한다. 연안까지 오는 과정은 12,500km나 걸리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12,500km의 거리가 어느 정도냐 하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그 사이가 전부 어마어마한 산악지대거나, 어마어마한 늪지대였다. 아니면 한겨울의 설산을 넘어야 했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장정이었다.
그래서 강서성에서 떠날 때 15만 명 정도가 출발했는데, 연안에 도착했을 때 8천 명으로 줄어 있었다. 다 죽은 것이다.
7. 안전지역 연안
그런데 국민당에겐 비행기와 대군이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은 어떻게 연안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북지역인 연안은 안전한 곳이었을까?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섬서성은 일본의 침략을 전혀 받지 않은 산간벽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태어난 시종쉰이 모택동의 공산운동과 별도로 이 지역에서 공산운동을 하였다.
유지단, 고강이라는 사람하고 셋이서 합심해서 연안 지역을 해방시켰다. 즉 연안에 이미 ‘소비에트 혁명 근거지’를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소비에트 : 민중 대표회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 운영되는 민간정부
그러니깐 모택동의 장정으로 피곤한 부대들이 올 수 있는 공산당의 근거지가 이미 섬서성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은 서북지역의 연안에 올 수 있었다. 이미 공산당 근거지가 섬서성과 감숙성에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택동이 연안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8. 소련과의 관계
질문 : 그럼 그것들은 모택동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형성이 되었나?
대답 : 그렇다. 중국은 거대하기 때문에 모든 공산 운동을 모택동이 다 지휘한 것은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공산주의 명분에 호응한 자들이 자체적으로 인민을 조직하고,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그 당시 최고의 지도부가 어디 있었냐? 명문적으로 중국에 있었던 게 아니라 소련의 코민테른에 있었다.
코민테른 :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설된 공산주의 국제 연합
질문 : 아까 공산당의 무기는 전부 국민당한테 빼앗은 것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셨다. 당시 세계 공산주의 트렌드가 한 나라에 공산혁명이 일어나면, 전 세계의 공산당이 가서 도와주는 분위기였다. 예를 들어 스페인 내전 때도 그랬다. 그런데 중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소련은 비행기 한 대, 총 한 자루, 총알 한 발도 안 왔다는 것이 굉장히 의아하다. 왜 중국을 지원하지 않았나?
대답 : 당시는 스탈린 치하였는데, 스탈린은 중국의 공산 운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지원방식은 독특하다.
스탈린의 1차적 주된 관심은 유럽이었다. 중국이나 동북쪽으로 관심이 없었다.
스탈린(1879~1953) : 소련 공산당 서기장
그래서 중국의 혁명을 몇몇의 고문단을 파견해서 컨트롤하는 방식을 취했다. 중국인들에게 모스크바 중산대학 설립을 지원했다. 공산대학을 만들어서 중국 사람들이 소련 모스크바에 와서 교육받게 하였다. 무력적으로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다.
9. 모택동을 살린 묘수는?
그 질문이 나와서 굉장히 재미난 사건을 하나 이야기하겠다.
대장정 때 국민당이 공산당을 박멸할 순 없었나? 남은 8천명을 싹 없앨 수 없었을까? 이것에 대해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위대한 대장정을 해서 결국 연안에 입성했다고만 한다.
사실 당시 국민당의 군사력으로 충분히 박멸 가능했다. 여기에 미스터리가 있다.
장개석에겐 장경국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장경국은 소련으로 유학을 가서 소련 여자와 결혼을 한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자와 결혼을 해서 소련에 살았다.
장경국(1910~1988) : 장개석의 아들. 1935년 벨라루스계 소련 여인 화이나와 결혼
그리고 스탈린은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장경국을 아꼈다. 국민당 쪽이지만 사랑했다.
여기서 주은래(周恩来)가 외교 전략을 펼친다. 장개석한테 메시지를 보낸다. ‘당신이 공산당을 박멸하면, 장경국을 죽이겠다.’ 아들을 볼모로 삼아 협박을 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함수일 뿐이다. 당시 국민당이 공산당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 더 있다.
아까 소련이 왜 도와주지 않았냐고 했지만, 소련이 어느 정도 장정을 도와준 셈이다.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소련은 직접적인 무력적 개입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당을 통제했다.
10. 시진핑의 아버지 시종쉰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준의회의(遵義會議) : 1935년 1월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정치국 확대회의.
이미 준의 회의에서 서북지역은 완벽한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그 당시 소비에트 혁명 정부의 거의 주석 같은 노릇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 누구냐? 바로 시진핑의 아버지 시종쉰이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모택동은 말만 듣고, ‘아, 연안(延安)에 우리의 위대한 소비에트 해방 지구가 구축되어 있다니...’하며 연안에 갔다.
그 어려운 장정을 거치고 피곤한 상태로 주석을 딱 만났는데, ‘네가 주석이냐? 여기 소비에트 서북지구 주석이냐?’라고 되물었다.
왜냐? 그때 시종쉰의 나이가 22살이었다.
시종쉰이 소비에트 지구를 해방시켜서 섬서, 감숙성의 광대 지역에 혁명 근거지를 만든 나이가 불과 19살 때였다. 그러니깐 타고난 인물이다. 뭔가 특별한 사람이었다.
11. 모택동의 진면목
질문 : 모택동의 장정(長征)은 시작할 때 15만 명에서, 시종쉰이 살고 있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8천 명으로 참여 인원이 줄었다. 그때 시종쉰 본인이 주도적으로 공산혁명을 이끌려는 움직임은 없었나?
대답 : 당시 사회주의 운동은 순수한 이상주의였다. 시종쉰은 인민을 해방하고, 그 지역의 토지를 인민들에게 나눠주고,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이 향상되는 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을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집권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깐 중국의 혁명이 이루어지게 만든 많은 로컬 리더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숨은 주역들을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오로지 모택동이라고 하는 선동가, 조직가, 대문장가만을 기억할 뿐이다. 모택동만큼 이론과 문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모택동의 글씨는 대단하다.
혁명가이자 사상가. 중국혁명을 이끈 모택동. 특유의 말솜씨와 글솜씨로 대륙을 이끌었지만, 엇갈리는 역사의 평가. 농민과 노동자의 힘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지 67주년. 이제 중국은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모택동은 대장정을 통해, 국민당이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중국 혁명을 이끌어간다. 그는 혁명의 성지 연안에 안착 후, 붓 한 자루로 중국 혁명을 이끌어 간다.
거기에는 장학량이라고 하는 위대한 인물을 우리가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12. 중국의 풍운아 장학량
모택동은 8,000명이라는 빈곤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몇 년 내에 수백만의 군대로 성장한다. 어떻게 그는 10여년 만에 중국 대륙을 장악했을까?
동북 세력 가운데 장개석과 같은 또 하나의 킹이 있었다. 그 사람이 장학량이란 인물이다. 이 사람이 일으킨 서안사변(西安事變)에 의해서 가능했다.
서안사변이 무엇이냐?
위초작전(圍剿作戰) : 1930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려 중국 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한 국민당 군사 작전
그런데 위초작전의 사령탑인 장학량(張學良)이라는 위대한 장군이 어느 날 장개석을 잡아버린다. 이것이 서안사변이다.
위초작전의 사령탑 서북초비총사령부 장군 장학량(張學良)
당시 일본 침략에 고통 받고 있었던 중국 인민들은 일본 침략을 먼저 막아야지, 공산당 박멸은 옳지 않다고 한다. 먼저 일본 침략을 함께 막는 것이 급선무라고 한다. 선양외(先攘外)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 여론을 수렴한 장학량의 명분은 정당했다. 정당한 명분을 쥔 장학량은 장개석을 구금한다. 그리고 강제로 국공합작(국민당 공산당 힘을 합침)을 시킨 것이다.
왜 중국인이 중국인을 죽이는가?(中國人不打中國人)라는 소리를 들은 장학량은 ‘나는 이거 못해먹겠다.’하고 서안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이 스토리는 너무나도 눈물겨운 이야기다.
사실 20세기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모택동과 장개석 그 양자(兩者) 중에 한 사람을 꼽는 게 아니라, 장학량이라는 인물을 꼽는다.
장학량이라는 인물이야말로 장개석과 모택동의 게임이 되도록 만든 필수적인 인물이다.
육해공군 총사령 장개석과 동북군 총사령 장학량
장학량은 ‘일본이 중국땅에 침략했는데 왜 우리는 같은 민족을 죽이고 있는가?’라고 외친다. 그리고 장학량은 장개석 납치 구금한 것이다.
중화 민족의 생존 쟁취를 위해 어제 장학량(張)과 양호성(楊)이 장개석에게 무력으로 강권하다.
-1936년 12월 13일 서북문화일보
장학량의 서안사변 직전 항일 연설
“일본은 무력으로 만주 영토를 점령했다. 이 침략으로 수천만의 재산과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었다.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1명이 남더라도 우린 싸울 것이다.”
서안사변 후 국공합작으로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되며, 국공합작 약속 후 장개석은 석방된다.
생각해보라. 내가 장개석인데 내 부하가 나를 감금해서 강제로 앉혀놓고 ‘풀려나려면 국공합작에 동의하시오!’라고 했다. 풀려나려면 할 수 없이 사인을 해야 했다. 그런데 풀려나서 남경으로 돌아간 다음에 약속을 지킬 필요 있나? 없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데 장개석은 그 약속을 지킨다. 왜냐? 장개석이 위대해서? 아니다. 그 약속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장학량이 붙잡혀 갔기 때문이다.
장개석에게 하극상의 죄를 인정하겠으니, 국공합작에 동의하고 자신을 잡아가라고 한 것이다. 대외적인 국민의 명분으로 보면, 그 약속을 안 지키면 장개석은 천하의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켜야 했다.
국공합작을 위해 장학량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는데, 그것을 안 지키고 배반을 한다면 장개석은 설 곳이 없었다.
질문 : 장개석은 자신을 감금했던 장학량을 죽이지 않았나?
대답 : 결국은 죽이지 못했다. 죽이려고 했는데, 누가 장학량의 살해를 막았냐? 바로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이었다. 그럼 송미령을 왜 그랬냐? 장학량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송미령(1897~2003)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 장학량이라고 고백했다.
13. 역사에서 사라진 장학량
장학량은 중국의 20세기 역사를 지금의 모습으로 끌고온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고 있다. 왜냐?
장학량은 대만의 장개석 입장에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너 때문에 대만까지 쫓겨왔어!’라며 이를 갈 인물이다.
그리고 모택동의 입장에선, 장학량 덕분에 8,000명의 빈곤한 군대가 중국을 장악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아사 직전의 모택동 홍군은 장학량의 국공합작 덕분에 하루아침에 ‘중국 정규군’이 되었다.
빨치산 홍군은 그 다음날로 정규군인 국민혁명군이 되었다. 그러면서 막막했던 보급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공산당 군대인 홍군이 국민혁명군 제8로군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사람은 모택동이 아니라 장학량이었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게 되면, 모택동의 카리스마는 다 날아가 버린다.
그러니깐 양쪽에서 모두 장학량의 행적을 지우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장학량이라는 인물을 모르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에서 멀어지게 된 인물 장학량
14. 비운의 사랑, 장학량 송미령
동북군의 총사령 장학량은 국공합작 후 송미령의 간청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장개석에 의해 54년 동안 연금된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던 장학량은 어떤 사람이었느냐?
장학량 (1901-2001) : 동북의 군벌, 장작림(張作箖)의 장남으로 다양한 군사 경험을 통해 19살에 육군 소장이 된 희대의 총아 엘리트.
장학림이라는 사람은 이미 19살에 장군이 되었다. 장학량이 거느리고 있던 동북군은 30만 명의 병력이었는데, 자그마치 250대의 전투기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최강의 최정예 군대였다. 중국에서 가장 막강한 공군과 육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보면 고구려 패러다임이라고 하는 북방 세력의 진취적 기상을 나타내는 인물이다. 워낙 인물이 출중했다.
동북군의 움직임에 따라 장개석과 기타 군벌의 운명이 결정될 정도로 중국의 역사는 복잡하다 .
그런데 결정적으로 장학량이 장개석을 도와줬다. (1928년 동북역치(東北易幟)사건)
그 과정에서 장학량이라는 청년이 상해를 여러 번 오게 되었다. 그때 이미 어릴 적에 청춘남녀로서 화려한 상해의 여인 송미령을 만난다. 결혼 전에 만난 것이다. 이것이 어긋난 운명의 시작이었다.
송미령은 그 당시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장개석이 결혼하고 싶어서 애를 쓰던 여인이었다. 모든 중국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중국의 1등 신붓감이었다.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부(富)와 힐러리가 나온 미국 웰슬리 대학을 나왔으며, 미모마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송미령이 매력을 느끼는 유일한 남자는 장학량밖에 없었다. 장학량은 영어를 잘 했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고, 최고의 미남이었다.
장학량은 한학뿐만 아니라 영어를 잘했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 미남이었다. 키도 컸지만, 탁월한 심미적 안식(眼識)을 갖고 있는 골동품의 대가로 중국 고문명 예술 감식의 대가였다.
그럼 세기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냐? 당연히 집안에서는 송미령의 결혼 상대로 장학량을 생각했다. 그러나 장학량에게 이미 부인이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중국에서 여자가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눈에 차는 남자는 전부 유부남이었다. 10-15세에 조혼 풍습이 있었다. 어려서 다들 결혼했다. 집안끼리 중매결혼을 했다.
모택동도 양카이훼이(楊開慧)이전에 부인이 있었고, 장개석도 송미령과 결혼할 때 부인이 3명 있었다. 당시 중국의 20세기는 일부다처제와 일부일처제의 중간 단계였다. 그게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송미령을 사랑했던 두 유부남 중에서 장학량은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본처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고 한다. 그런데 장개석은 세 부인과 일시에 이혼하고 송미령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결국 장개석과 결혼한다.
그럼 시진핑은 언제 나오냐? 사실 시진핑만 알려고 해도 12회 특강으로 모자란다. 근현대사 전개 과정을 통해 중국을 자연스럽게 이해해야 된다. 중국 근대사는 너무도 복잡하고 다난하고 재미있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함수가 무한히 숨어있다. 그래서 차근차근 전체 맥락을 알아야 2016년의 시진핑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시진핑 아버지가 그런 사람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 거대한 연안의 혁명 근거지를 마련해서 모택동에게 선사한 인물이 시종쉰이었다.
서북지구 소비에트 대표 시종쉰, 모택동 공산 혁명 완성의 기초가 됨.
공산당이 8,000명의 군인으로 중국을 장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택동의 전략, 시종쉰의 헌신, 장학량의 결단, 이 세 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15. 오마진경(五馬進京)
오마진경(五馬進京) :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모택동이 중앙권력 견제를 위해 전국 5권역의 수뇌급 인사들을 북경으로 불러들임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 불행한 인간이 되었다. 혁명을 완수해 가는 과정, 국가를 건국해 가는 과정에는 인민을 위해 산다고 하는 보편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타락할 기회가 없었다.
혁명 투쟁 속에서는 저절로 도덕성 유지
그런데 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고 나서, 이 사람은 중국의 역사서인 25사를 다 읽었다고 한다. 거기서 뭘 배웠냐?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신하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배웠던 거 같다. 자기 밑에 있던 혁명동지들을 어떻게 거세할 것인가를 연구한 모양이다.
그런 상황에서 모택동은 진시황보다 훨씬 더 무서운 권력을 휘둘렀다.
첫 번째 거세 대상은 유소기(劉少奇)와 주은래(周恩來)였다. 사실 주은래가 아니었으면 모택동은 있을 수 없는 존재였고, 물론 평생 주은래는 모택동을 보좌했다.
하지만 이들은 가장 강력한 권력 후보들이었기 때문에 거세대상이 되었다.
유소기(劉少奇, 1898~1969) : 1959년 중국 국가 주석 문화대혁명 와중에 실각
주은래(周恩來, 1898~1976)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27년간 총리를 역임
이들을 치는 방식은 다섯 마리의 말을 북경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다섯 마리의 말은 중국의 소비에트 지구들을 관장하고 있던 거물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그대로 놔두면, 모택동 자신은 북경에 앉아 있어도, 자신의 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섬서성을 포함하는 서북지구를 중앙에서 관리하지 않으면, 시종쉰이 섬서성 지역의 왕이 되는 거였다.
이 다섯 명의 사람들을 중앙으로 끌어올려서, 중앙에 있는 두 명을 견제시키는 것이었다.
이 다섯 명이 바로 동북국의 고강, 화동국의 요수석, 중남국의 등자회, 서남국의 등소평, 서북국의 시종쉰이었다.
16. 반당분자로 몰렸던 시종쉰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시종쉰과 등소평은 같은 급이었다. 시종쉰이 이 오마진경으로 들어와서, 북경에 정착을 하면서, 그 다음 해인 1953년 아들을 낳았다.
그게 누구냐? 북경 낳았다고 해서 진핑(近平)이라 이름 지은 시진핑(習近平)이었다.
시진핑의 부친은 오마진경 후에 1959년 중국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된다.
시종쉰 : 1959년 중국 국무원 부총리 임명
부총리가 되어 중국의 지도부에 갔지만, 결국은 아주 초기에 당한다.
1962년 9월 반당 집단으로 몰려 모든 직책에서 해임.
완벽하게 16년 동안을 반당분자로 몰려 비참하게 살면서, 일체 배반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누군가를 비판했으면 살 수 있었는데, 어느 상황에서도 비판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해금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였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시종쉰 1962년 10월-1978년 2월까지 16년간 유배생활
시종쉰이라는 인물은 중국 공산당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지만 한 번도 영화를 누려보지 못했다. 억울하게 16년 동안 흑암의 세월을 보낸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시진핑의 생애는 최악의 환경으로 떨어진다.
시진핑은 시종쉰이 1962년 해임된 후, 1969년 1월부터 최하층 농민으로 노역
그래서 시진핑은 어려서부터 무서운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크게 보면, 이 아버지의 삶이 시진핑의 삶에 정말 무서운 은덕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시진핑의 생애를 떠받쳐준 보이지 않는 은덕
17. 시진핑, 여가수 사로잡다
시진핑 주석의 부인은 누구인가? 가수 펑리위앤이다. 정말 예쁘고 노래도 정말 잘 부르고 군대 가수로 군가를 부르며 컸기 때문에 모든 중국 군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인민해방군 소장 국민가수 펑리위앤.
펑리위앤은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억지로 선보러 온 펑리위앤은 시진핑을 처음 보고 너무 실망했다고 한다. 뚱뚱하고, 촌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시진핑은 시골에서 고생을 하면서 컸기 때문에 시골티가 났었다.
그래서 돌아서려고 했던 펑리위앤에게 보통 사람 같으면 ‘히트곡이 뭡니까, 출연료가 얼마예요?’ 등을 물어보았을 텐데, 이 무뚝뚝한 청년은 그 당시 의외의 질문을 했다고 한다.
‘지금 중국에 당신처럼 성악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으로 가수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이게 여러분에겐 대단한 질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펑리위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자신을 성악 공부을 한 사람으로 인정을 해줘서 너무 신선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첫 질문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지성무식(至誠無息)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 중용 제26장. 쉼 없이 정성을 다하자는 의미로 지극한 정선은 단절될 수 없다는 뜻. 4계절이 오고 감에 단절이 없는 자연의 무궁한 진리를 의미하기도 함.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중국철학에서는 천지 대자연을 그린 유명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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