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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복음
(막 1:14-15)
주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에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고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았으나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런 이후에 세례요한이 헤롯왕에게 잡히고 나서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논지 1. 영적인 때가 차야 합니다.
2. 영적인 회개를 해야 합니다.
3. 영적인 복음을 믿어야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자를 나누어보면 다섯 종류의 부자가 있습니다. 첫째는 배고픈 부자, 둘째는 품격 부자, 셋째는 철없는 부자, 넷째는 존경받는 부자, 다섯째는 버릴 줄 아는 부자입니다. 첫 번째 배고픈 부자는 자신이 부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모으는 데만 집중하는 부자입니다.
두 번째 부자는 품격부자입니다. 부자는 부자인데 외형적으로 품위를 지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서 남들 보다 고급 외제차를 타야하고,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하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세 번째 부자는 철없는 부자입니다. 철없는 부자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부자입니다.
네 번째 부자는 존경받는 부자입니다. 존경받는 부자는 돈을 사용하는 것을 누가 보아도 존경받게 사용합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는 학생들을 위해서 기부를 하지만 자신의 명예를 우선시 합니다. 다섯 번째 부자는 버릴 줄 아는 부자입니다. 버릴 줄 아는 부자는 놀라운 인생의 철학을 깨닫고 살아가는 부자입니다.
버릴 줄 아는 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순간이지만 버릴 때 영원한 부자가 된다는 것을 아는 부자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부자가 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다 부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자로 살 것인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1. 영적인 때가 차야 합니다.
막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여”
‘잡힌’ παραδίδωμι (파라디도미) (옆에서+주다), 항복하다, 포기하다
‘갈릴리’ Γαλιλαία (갈릴라이아) 히) ל (가랄) 굴러가다, 옮기다(밸브, 경첩)
‘복음’ εὐαγγελίζω (유앙겔리조)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 복음을 가르치다
세례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드디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 잡힌 이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을까요? 그것은 영적인 때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영적인 때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담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때입니다. 선악나무를 먹지 말고 생명나무를 먹으라고 하는 것이 영적인 때입니다. 영적인 때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길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는 영적인 때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서도 영적인 때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영적인 때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결국에는 홍수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홍수심판을 내렸습니까?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으로 홍수심판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이 때는 죄악이 관영한 때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가 영적인 때입니다.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은 영적인 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삭이 태어난 때가 바로 영적인 때입니다. 또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드려질 때가 영적인 때입니다. 영적인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입니다. 일상적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면 영적인 때를 볼 수 없습니다.
요셉이 17살이 되면서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이 17살이 되면서부터 꿈을 꾸고 싶어서 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꿈을 꾸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이 때입니다. 영적이 때가 도래하게 되면 수반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핍박이 따르기 시작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꿈을 보여주셔서 말한 것뿐인데 그것으로 인하여 핍박을 당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모세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영적이 때를 만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에 사사들 중에 다섯 번째 사사인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미디안 사람들을 피하여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기드온도 영적이 때를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어서 아침에 일어나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며 믿겠다고 합니다. 한 번의 시험으로 믿을 수가 없어서 다음 날에는 양털만 마르고 사면에는 이슬이 있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영적인 때가 왔지만 그 때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또 다윗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찾아와서 형들을 다 보았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막내인 보잘 것 없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름부음을 받아 드렸습니다. 이것이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데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다고 합니다. 왜 하필이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제일 먼저 전파할까요? 그것은 갈릴리에 호수가 있는 지형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갈릴리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가나안 지역의 모든 생명을 살리는 중요한 호수입니다.
‘갈릴리’ Γαλιλαία(갈릴라이아) 히) ל (가랄) 굴러가다, 옮기다(밸브, 경첩)
갈릴리라는 단어 속에는 굴러가다, 옮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굴러 굴러서 어디로 가야합니까? 하나님의 집으로 가야합니다. 이것을 옮겨진 자들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집으로 옮기겠다는 뜻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로 옮기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옮겨지는 때가 바로 영적인 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려면 영적인 때가 차야 됩니다(전 3:11).
2. 영적인 회개를 해야 합니다.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 καιρός (카이로스) 기회(영적), 정해진, 적당한 때
‘찼고’ πληρόω (플레로오) 가득차다, 곽 채우다, 성취하다, 직무를 수행하다
‘가까웠으니’ ἐγγίζω (엥기조) 가까이 하다, 준비 되었다. 다가가다
‘회개’ μετανοέω (메타노에오) (함께+생각하다) 함께+뉘우치다(한 마음)
‘믿음’ πείθω (페이도) 회해하다, 동의하다, 내적인 확신으로 의존하다
영적인 때가 가득 찬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영적인 때가 도래했다는 것은 죄가 관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복음으로 들려지려면 듣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어느 때 잘 느낄 수 있습니까? 배가 고픈 사람은 시장이 반찬이라고 모든 것이 맛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부른 사람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있다는 것을 못 느낍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게 되면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했지만 듣고 회개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 극소주의 사람들은 대부분 질병과 가난 그리고 죄와 죽음의 자리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회개’ μετανοέω (메타노에오) (함께+생각하다) 함께+뉘우치다(한 마음). 회개는 혼자 생각하고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각하고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함께 생각하고 뉘우친다는 의미는 두 마음이 한 마음으로 합쳐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까지는 누구와 함께 생각했습니까? 어둠의 권세를 붙잡고 있는 마귀와 함께 생각하고 뉘우치면서 살아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회개라는 말씀은 함께 생각하는 존재가 바뀐 것을 말합니다. 이제까지는 땅의 소망을 두고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때가 찬 성도들에게 임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를 한 성도들에게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은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삶의 변화에도 두 종류의 변화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속적 삶의 변화입니다. 두 번째는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삶의 변화입니다. 첫 번째 세속적 삶의 변화를 체험해야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반성입니다. 잘못된 자신의 삶으로 인하여 망가진 자신의 인생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예를 들어서 술과 담배를 통해서 건강이 나빠졌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먼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을 조명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변화를 꾀하려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드디어 두 번째 단계인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삶 속에서 깨달아야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생명의 말씀과 하나가 되어갑니다. 하나가 되어간다는 것은 두 마음 이였던 것이 한 마음으로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주장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냥 쉽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순간부터 회개가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넉넉하지가 않습니다.
겔 18:30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 할지니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행한 대로 국문하시다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국문하신다는 것은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하지 않으면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바벨론 나라에 포로가 되었습니까? 우상숭배에 빠지는 바람에 비참한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불순종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모르면 우상숭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일까요?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운명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운명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보여주셨는데도 그 운명에 동참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진정한 회개를 보여준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이제는 본다고 했습니다. 듣기만 하던 사람이 직접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듣는 사람은 행하는 삶이 없습니다.
그리고 보는 사람은 행하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을 통해서 회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3. 영적인 복음을 믿어야합니다.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믿음’ πείθω (페이도) 화해하다, 동의하다, 내적인 확신으로 의존하다
때도 영적인 때와 육적인 때가 있고 회개도 육적 회개가 있고 영적인 회개가 있듯이 복음도 영적인 복음과 육적인 복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면 영적인 복음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믿는 복음이 영적인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육적인 복음과 영적인 복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먼저 육적인 복음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물과 기름처럼 분리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영적인 복음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와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은 불협화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의 마음이고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산에서 번제를 드릴 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요 5:17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이 내가 일하는 것이고 내가 일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아브라함이 일하는 것이 이삭이 일하는 것이고 이삭이 일하는 것이 아브라함이 일하는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이지만 마음이 하나가 된 성도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30). 이러한 상태가 된 성도들이 영적인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육적인 복음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회개가 되어졌다면 영적인 복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믿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믿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인 때를 넘어서야 하고 또 영적인 회개를 한 이후에 믿음이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를 무엇일까요?
‘영생’은 영원히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는 하나님을 섬기기만 했지 아직까지 함께 생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집 안에서 함께 생활한다고 해서 하나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다 똑같은 교인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신 것은 마귀로부터 멸망을 당하지 말라고 주셨습니다. 마귀에게 멸망을 당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녀들은 더 이상 아버지를 위해서 무엇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할 수 있도록 온전히 내어 맞길 수 있어야합니다.
요일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죄로부터 해방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온전히 믿어지는 성도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교회 형제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때를 만나야합니다. 그리고 그 때를 넘어서 영적인 회개를 온전히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로 말미암아 영적인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군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