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심언(金審言)시조님의 역사 자료
※차 례
1.약전(略傳)
2.원전(原典) 기사(記事)
(1).고려사(高麗史) -8건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 자료
(2).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5건 -<민족문화추진회> 인터넷 자료
(3).백헌집(白軒集) -2건 -이하 같음-
(4).동사강목(東史綱目) -3건
(5).星호사설(星湖僿說) -1건
(6).신증여지승람(新增輿地勝覽) -3건
(7).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3건
(8).이제유고(頤齋遺稿)-靈光金氏家史序 -1건
합계 -26건
---------------------------------------------
1.약전(略傳)-위의 자료들에 의거하여, 一세 김심언(金審言) 시조님의 연보를 만
들어보니 다음과 같이 되었다. ○은 고려사 열전(列傳)의 가록, 1.2.3...은 세가(世家)의 기록임.
................................................................................................................
○정주(靜州) 영광현인(靈光縣人). 상시(常侍) 최섬(崔暹)에게 배우고 그의 사위됨.
○성종조(成宗朝 981-997)에 벼슬. 승진하여 우보궐겸기거주(右補闕兼起居注)에 이름.
○성종(成宗) 9년(990) 7월에-설원(說苑)의 육정육사(六正六邪)와 한서(漢書의 자사육
조정(刺史六條政)에 의거하여 봉사(封事) 이조(二條)를 올림
-이상 고려사제93권 열전제6
1.成宗 경인 9년(990) 추9월에 기거랑(起居郞) -고려사제3권 세가제3
○목종조(穆宗朝 997-1009)에-주목(州牧)이 되어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을 크게 구휼함
-고려사제93권 열전제6
2.顯宗 경술 1년(1010) 3월에 우상기상시(右散騎常侍) -고려사제4권 세가제4
3.顯宗 신해 2년(1011) 5월에 예부상서(禮部尙書) -고려사제4권 세가제4
4.顯宗 계축 4년(1013) 8월에 좌복야(左僕射)로 지공거(知貢擧)
-고려사제73권 지제27 선거
5.顯宗 계축 4년(1013) 9월에 수국사(修國史) -고려사제4권 세가제4
6.顯宗 갑인 5년(1014) 하4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고려사제4권 세가제4
7.顯宗 갑인 5년(1014) 8월에 서경유수(西京留守) -고려사제4권 세가제4
8.顯宗 무오 9년(1018) 9월 졸(卒) 시호 문안((文安) -고려사제4권 세가제4
----------------------------------------------------------------------------------------
*좌우보궐(左・右右輔闕)-고려 때 中書門下省 정6품의 간관(諫官) 벼슬. 나중에 사간(司諫)으로 고쳐 부름.
*기거주(起居注)-고려 때 中書門下省의 종5품의 간관(諫官) 벼슬. 임금의 잘못에 간언하고 관리들의 잘못이나 게으름을 감찰
하고 탄핵하는 한편 풍속의 교정을 맡았다.
*좌우상기상시(左・右散騎常侍)-고려 때 문하성(門下省)의 정3품의 간관(諫官) 벼슬, 좌・우산기상시를 산기상시(散騎常侍)라 하고 약칭 상시(常侍)라 하였음. 정원은 각1명.
*지공거(知貢擧)-고려 때의 과거 시험관. 광종(光宗-950∼975) 때에 처음 쌍기(雙冀)를 임명하였다. 그 후부터 는 문신(文臣) 1명을 임명하였는데 광종23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더 두었다
*예부상서(禮部尙書)-고려 때 예부의 정3품 관직. 예의・제향・학교・과거등에 관한 일을 맡음 정원은 1명.
*수국사(修國史)-고려 때 국사를 편찬한 사관(史館)의 정2품 관직. 2품이상 관원이 겸임하였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고려 때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2품 관직. 정원은 1명.
*서경유수(西京留守)-고려 때 서경(평양)의 지방장관. 3품 이상. 정원은 1명.
==================================================================================
영광김씨의 시조인 김심언(?∼1018)은 묘지명에 “其先□.....下侍中諱審言, 高祖妃森溪郡夫人崔氏”로 되어 있다. 비록 궐자가 있지만 문하시중 김심언의 내용이며, 부인인 삼계군부인 최씨는 常侍 崔暹의 딸로 확인되고 있다. 고려에 과거제가 도입된 후 최초의 급제자였던 최섬에게 배웠으며,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종 때에 급제 出仕하면서 영광김씨가 중앙 개경에 본격 정착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성종∼현종 때에 크게 활약하였으며 典故와 文翰職을 역임하였다.
990년(성종 9) 가을7월에 우보궐이었던 김심언이 유향(劉向)의 육정(六正), 육사(六邪)의 설과 한나라 자사(刺史) 육조(六條) 의 정(政)으로써 서울과 지방에 반포해 알리고. 관청의 벽에 써서 권계(勸戒)로 삼기를 청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이 봉사는 海東孔子로 추앙된 崔沖이 덕종 초년에 내외의 관청 벽에 다시 써 붙이게 하여 관리들의 귀감을 삼게 할 정도로 후대까지 국가의 지침이 되었다.
1001년(목종 4)에 주목(州牧)이 되매 농사에 힘써 백성을 구휼(救恤)하니 심히 당시의 칭찬을 받았고 이어 지공거를 역임하였다. 현종 즉위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발탁(拔擢) 되어 예부상서로 옮기었고, 현종 5년 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옮겨 나가 서경유수(西京留守)가 되었다. 그의 淸德重望은 의ㆍ명종 때까지도 널리 칭송되었다.
현종 9년(1018년) 졸하니 삼일간 철조(輟朝) 하고 문안 (文安)이라 익(謚)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