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 짧게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면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성서에서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다고 전하고 있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 기술된 구약성서 창세기 39:7~20의 구절들을 차례로 따라가 보자. 창세기 39장 7절은 요셉의 출중한 용모에 대해 언급하고, 이에 반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 에게 동침하자는 내용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그녀가 왜 요셉에게 유혹의 말을 건네는지 그녀의 내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성서는 오로지 요셉에게만 집중해 기술하고 있으며, 독자는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의 이름도, 삶도, 과거사도, 그리고 그녀가 왜 요셉을 유혹했는가에 대해서도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 오로지 요셉의 정신적, 영적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서 요셉의 도덕적 시험에 집중하고 있으며, 여기서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는 “욕망의 덩어리”(Kurzke 2003, 81)로 묘사될 뿐이다. 내용의 전개를 위해서 토마스 만은 그의 저서 <구덩이>에서 보디발의 아내에 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대인의 전설과 보디발의 아내 1 빈 고리안 Micha Joseph Bin Gorian이 출판한 <유대인 의 전설 Die Sagen der Juden> 이제 요셉은 거만해졌다. 그는 음식과 마실 것을 즐겼으며, 머리를 곱슬하게 만들었 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로 하여금 내 아버지의 집을 잊게 해주신 주님을 칭송할지어 다.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는 너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는 재를 온몸에 바르고, 자루를 옷 삼아 몸을 감싸고 있다. 그런데 너는 행복감을 느끼고 머리를 곱슬 거리게 한다고? 이에 너는 너의 여주인을 통해 곤궁에 빠져야만 한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는 그녀의 눈을 들어 요셉을 응시했고, 그에게 말하였다. 동침하자! 성서와 큰 차이 없이 여기서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요셉을 시험하는 수단으 로 사용하고 있다. 요셉이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 줄도 모르고 죽은 것으로 오인해 괴로워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이집트의 삶에 빠져 있는 요셉을 징벌하고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이용된 것이다. 요셉의 허영기와 교만함에 대한 묘사를 할 뿐, 빈 고리안의 전설은 성서와 마찬 가지로 보디발의 아내가 왜 유혹하는 여성으로 전락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2 긴즈버그 Louis Ginzberg의 <유대인의 전설 Legends of the Jew> 보디발의 아내는 처음에는 요셉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이러저러한 핑계로 요셉에게 접근하다가, 나중에는 그에게 “동침하자”고 말하고, 요셉이 이를 거절하자 새로운 계략과 협박으로 그를 위협한다(Ginzberg 1988, 51). 보디발의 아내의 요구는 점점 거세지고, 행동방식은 사악하고 병적으로 변해가며, 마침내 요셉이 도망치려 하자 그의 옷을 잡아채 증거로 남겨서 그를 감옥에 가두게 한다.
긴즈버그의 저서는 보디발의 아내를 욕망의 덩어리로만 표현하지 않고, 채워지지 않은 사랑 때문에 고통 받는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Lehner 1993, 57). 요셉이 무트의 구애에 대한 거절의 이유를 토마스 만의 작품 6부 <흔들리는 여인>의 마지막 장 ‘요셉의 순결’에서 일곱 가지의 근거를 통해 설명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에 대해 “요셉은 신의 약혼자이고, 현명한 통찰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의 배신이 외로운 그분에게 안기게 될 특별한 아픔을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첫 번째 이유는 요셉이 하나님의 약혼자라는 사실, 두 번째는 요셉이 주인 보디발을 섬기겠다고 맹세해 그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와 연관된 것으로, 이를 세속적인 것으로 변형했을 뿐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이유는 성서와 흡사하다. 다만, 토마스 만의 작품에서는 성서에서 제시한 이유들의 순서를 뒤바꾸었을 뿐이다. 결국 성서와 토마스 만의 작품에서 공동으로 제시된 거절의 이유는 주인 보디발에 대한 신의를 지켜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Golka 2000, 36). 첫 번째, 두 번째의 이유가 성서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이를 프로이드 식으로 보자면, 이 두 가지는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규범에 입각한 ‘초자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다섯 개의 이유는 요셉의 깊은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자. 전체 일곱 개의 이유 중 세 번째는 요셉의 남성성에 대한 공격에서 오는 거부감의 표현이다. 이 시대만 해도 남녀 간의 구애의 과정에서 보통 남성이 주도권을 갖는 것이 상례지만, 무트는 자신이 마치 남성인 양 요셉에게 “구애의 적극성을 보인다. 이 때문에 요셉은 수동적 역할로 뒤처지고, 이것은 요셉의 자존심을 건드릴 뿐만 아니라, 마치 동성애를 연상시킴으로써 요셉으로 하여금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때문에 네 번째의 거절 이유는 세 번째와도 연결되는데, 네 번째의 이유는 무트가 스핑크스를 연상시키는 섬뜩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무트의 모습은 스핑크스의 형상, 즉 공포의 여성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그녀는 이집트의 노쇠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이유는 서로 맞물려 있고, 요셉은 무트에게서 표출되는 공포의 이미지에 두려워한다. 이것은 이집트에 대한 요셉의 오랜 선입견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선입견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며, 바로 이것이 요셉이 무트를 거부한 다섯 번째 이유이다. 야곱은 이집트를 "하갈의 나라, 원숭이와 같은 이집트의 나라" 라 부르며, 이집트가 인간이 사는 나라가 아닌, ‘동물의 나라’이자 ‘이교도적인 비도덕성’이 난무하는 곳이라 혐오한다.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이집트가 ‘도덕적 으로 타락한 나라’라는 얘기를 듣지만, 이집트에서 생활하면서는 내심 아버지의 비판을 거부한다. 그러나 자신을 유혹하는 무트 앞에서 이집트가 도덕적으로 추락해 있으며, 아버지의 판단이 옳은 것임을 알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요셉이 무트를 거절하게 된 여섯 번째 이유가 등장한다. 요셉에게 비춰진 무트의 이미지는 곧 “지옥과의 동맹”을 상징한다. 이것은 곧 무트로 상징되는 이집트의 문화가 “죽음과 죽은 자에 대한 숭배”이자 “바알의 매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옥과의 동맹’에 가담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금지명령을 어긴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죄를 짓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능력은 아브라함의 부족 이래 대대로 계승된 “하나님의 이성이자 정신”을 나타낸다. 따라서 마지막 일곱 번째 이유는 요셉이 무트의 유혹에 넘어가 “발가벗김”을 당하고, 결국 조상 대대로 이어 온 하나님의 이성과 정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는 두려움과 연관되고 있다. 무트의 불행은 요셉이 그녀의 구애에서 죽음과 음탕함이 뒤섞인 유혹, 즉 지옥의 유혹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에 진다는 것은 발가벗김을 당해 모든 게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요셉이 무트를 거부하는 일곱 번째 이유는, 그녀의 구애에서 죽음과 음탕함이 뒤 섞인 악마의 시험, 즉 지옥의 유혹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유혹에 진다는 것은 곧 ‘발가벗김’을 당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마스 만의 저서에서 주인공 요셉은 철저하게 ‘반-오이디푸스적 주인공’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반항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사상을 심화하고 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과 일치하고, 이를 프로이드식으로 해석하자면 ‘성서의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을 상징하며, ‘성서의 종교’는 ‘아버지의 종교’를 나타낸다. 3 요셉과 무트, 정신성의 승리와 육체의 굴복 <구덩이>의 두 번째 장 ‘아픈 혀 Die schmerzliche Zunge’에는 무트가 요셉을 본격적으로 유혹하는 장면과 요셉이 무트와의 동침이 왜 안 되는지를 장시간 설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기서 무트와 요셉의 논리가 팽팽하게 대결하며 수면 위로 드러난다. 무트는 정상적인 상태로는 요셉을 유혹하기 힘들다 판단하여 혀를 깨물고, ‘아픈 혀’를 만들어 혀 꼬이는 애교의 목소리로 “나와 동침하자 고 유혹한다. 앞 장에서 제시한 일곱 가지 근거로 요셉은 무트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깊은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나타낸다. 이러한 이유로 요셉은 그녀의 유혹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해 나간다. “아무튼 저에 대한 주인마님의 유혹에 대해 저는 겸손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고, 그 의미는 일곱 가지나 됩니다. 왜냐하면 마님께서 저를 유인하시려는 바닥은 진흙탕이기 때문입니다. (...) 거기서 마님은 저를 간통이나 하는 멍청한 당나귀로, 마님 자신은 방황하는 암캐로 만들려 하십니다. 그러니 제가 마님을 마님 자신으로부터 지켜드리고, 제 자신은 수치스러운 변신으로부터 보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셉은 육체의 욕망에 눈이 멀어 ‘동침’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성을 저버리는 것이며, 각자 ‘멍청한 당나귀’, ‘방황하는 암캐’로 전락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무트는 요셉을 ‘겁쟁이 소년’이라 비난하고, 요셉은 창세기 39: 8~9에 나오는 바와 같이 동침이 불가한 이유를 설명한다. “주인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믿고 맡기셨으 니, 이 집에는 나보다 높은 이가 없으며, 주인님이 마님을 빼고는 금하신 것이 없습 니다. 마님은 주인님의 부인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큰 악을 저지르고,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요셉은 무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항변한다. 첫째, 주인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하여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겼는데, 그 신뢰를 저버리고 주인의 아내와 동침 한다는 것은 크나큰 배반이며, 둘째 그것은 곧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제가 미래 모두를 위해 우리가 서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거절하며 마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살과 피를 즐기는 그런 세상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보디발이라는 주인님도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 두 사람의 크나큰 주인님이시며 외롭게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영혼을 사랑으로 섬기기는 커녕 결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분의 여린 품위는 다치게 되고, 신뢰는 깨지게 됩니다.” 요셉은 무트의 심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그녀를 설득해 나간 다. 그는 “우리”라는 표현과 “우리가 서로 누릴 수 있는 쾌락 ”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 자신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적 존재임을 거부하고 본능에 흔들리게 될 경우, 무트와 요셉 모두에게 은인인 보디발의 신뢰를 저버리는 죄를 범할 것이라 강변한다. 이에 무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유혹을 정당화하고, 요셉에게 미끼를 던진다. “내 사랑! 이 아무 죄도 없는 조치에 반대하지 마! 그의 몸은 살아 있지만 벌써 죽은 몸 아니야? 어딘가에 쓰일 데라도 있나? 아니면 살만 잔뜩 찌워서 아무짝에 쓸데없는 몸뚱이가 아닌가? 그대를 향한 사랑이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내 살이 사랑의 육신으로 변한 뒤로, 내가 그의 굼뜬 몸뚱이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이루 말할 수 없어. 그저 비명만 지를 수 있을 뿐이야. (...) 우리의 행복이 어떨지 한번 상상해봐. 그 버섯이 떨어져서 치워버리면, 집에는 우리 둘만 남게 될 거야. 그러면 그대는 젊은 나이에 이 집의 주인이 되는 거지. 내가 여주인이니 그대는 주인이 되는 거야. 누구든 여주인과 동침하면, 그 자가 주인이 되기 때문이지.” 위의 무트의 주장은 최고 수위의 발언이다. 요셉을 “내 사랑”이라고 칭하면서, 남편 보디발에 대해서는 그의 정신성을 부인하고 육체에만 몰두하여 “살아 있으나 벌써 죽은” 몸, “게을러빠진 몸뚱이”라고 폄하함으로써 보디발이 자신에게 베푼 은공을 모두 부인한다. 그리고 보디발을 제거하고, 동침을 통해 요셉이 집주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제 시함으로써 요셉에게 권력의 미끼를 던진다. 이에 대한 요셉의 답변을 보자. “아니요, 무트,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이어서 그가 말했다. “이제 마님을 불러내야겠습니다. 말 그대로 마님을 불러냅니다. 여기서는 이게 가치가 있습니다. 실제로 마님을 아니 마님 속에서 말하고, 마님을 사로잡는 그 악령을 불러내 쫓아내야 하겠습니 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 그러니 사랑하는, 선하신 마님, 제발 간청하건대 마음을 달래셔서 제게 그런 몹쓸 짓을 시키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요셉은 무트가 병든 사랑에 빠진 것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겨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지만, 그녀가 육체의 욕망에 빠져 주인을 배반하고, 심지어 주인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에게 권력의 미끼를 던지는 모습에서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며, 그녀가 본래의 고귀한 모습을 잃고 어둡고 마귀적인 힘에 사로잡혔다고 판단한다. 이것은 신약 성서의 예수가 광야에서 자신을 시험하는 사탄을 꾸짖는 장면과 오버랩 된다. 요셉은 장시간 무트를 설득하지만, 무트가 돌아서기는커녕 권력을 미끼로 자신을 시험하자 무트 안의 어두운 힘을 보고 떠난다. 요셉과 무트의 극명한 대립은 바로 정신의 승리와 육체의 굴복이다. 요셉이 보여주는 인간적 품격은 자신에게 몰아닥친 무트의 유혹에 깊은 연민과 책임을 통감하고, 그녀를 설득하는 데 있다. 그러나 요셉이 고귀한 윤리적-도덕적 가치를 통해 육체의 유혹을 이기고 정신의 승리를 이루어내는 반면, 무트는 육체에 굴복하고 만다. 출처: 토마스 만의 -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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