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에는 관향은 같지만 시조가 각기 다른 2개의 선산 김씨가 있다.
이로 인하여 선산 김씨에 대해서 간혹 혼란이 초래될 때가 있다.
김선궁을 관향조로 하는 일선[선산] 김씨와 김추를 관향조로 하는 들성[선산] 김씨가 그것이다.
일선 김씨의 시조 김선궁은 신라 제 46대 문성왕의 7세손이자 김알지의 30세 손이다.
신라의 경순왕과는 먼 친척뻘로 여겨지고 있다.
선대가 서라벌을 떠나 선산 지역에 정착하면서 가문이 부흥하여 이지역의 거대 호족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선산 땅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의 군대와 일전을 벌일 때 왕건의 군대에 종군하여 고려군이 승리를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후에 개국공신[익찬공신]에 책봉되고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후손들 또한 대대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다.
일선 김씨는 모두 18파로 첫째 아들 봉술에서 13파가 분파되고, 둘째 이들 봉문에서 5파가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봉술은 조정에서 문하시중의 벼슬에까지 올랐고, 봉문은 벼슬을 그만두고 선산에 낙향에 호족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처의 관향이 일선 김씨 백암파 문중이다.
백암파는 시조 김선궁의 13세손인 김원로의 첫째 아들인 충개공 김제를 파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찬탈 소식에 벼슬을 버리고 갈대 삿갓을 쓰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 세상과 단절했다고 한다.
김제의 동생 김주 또한 고려 말에 벼슬을 한 인물로 농암파의 파조가 되었다.
고려 말 이색, 정몽주, 길재에서 비릇된 사람의 학맥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강호산인 김숙자가 일선 김씨이다.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던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은 영남 사림의 실질적 조종으로서 그에게서 나온 학문은 조선 중기에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이이로 전해지게 된다.
서인 심의겸과 이조 전랑직을 두고 대립했던 동인의 영수 김효원 또한 일선 김씨이다.
이밖에도 소설가 김동리와 그의 형인 독립 운동가 김범부, 전 국회의원 김윤환, 전 국회의원 김동영, 구미 오상고 설립자인 김동석, 탤런트 김지호, 헌법학의 대가인 김철수 교수 등이 일선 김씨의 주요 인물들이다.
일선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때에 선산부로 개칭되어 일선 김씨는 달리 선산 김씨라고도 불린다.
이 때문에 김추를 관향조로 하는 또 다른 선산[들성]김씨와 명칭상의 문제로 간혹 혼동이 발생하기도 한다.
들성 김씨의 시조 김추는 경순왕의 8번째 아들로서 태조 왕건의 맏딸인 낙랑 공주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즉 태조 왕건의 외손자인 셈이다.
선산[들성]김씨는 김추 이후 세계가 불확실하여 고려 말에 광주 목사를 지낸 김기를 실질적인 시조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김기는 기울어가는 사직을 개탄하고 낙향하여 선산군 옥성면에 터를 잡고 여생을 마쳤다..
훗날 후손들이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의 들성[평성]에 집성촌을 이루게 되어 들성 김씨라고도 불려진다.
그런데 삼척 김씨 측에서 김추가 삼척 김씨의 시조임을 내세우면서 선산[들성]김씨 측에 대해 고증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들성 김씨의 명유로서 조선 명종 때 청백리였던 구암 김취문을 들 수 있다.
그는 김기의 6세손으로 밀양 박씨 찬성공파 문목공 송당 박영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현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또한 들성 김씨이다.
이와 같이 김선궁계의 선산 김씨와 김추계의 선산 김씨는 엄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선 김씨의 시조 김선궁의 묘원은 경북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의 미석산에 있다.
구미에서 상주 방면으로 난 25번 국도를 지나다가 도리사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나오면 도로 우측에 시조의 묘원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淵源(연원) 및 由來(유래)◆
始祖(시조) 金錘(김추:일선군)는 新羅(신라) 敬順王(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王建(왕건:태조)의 외손(外孫)으로 고려조에서 一善君(일선군:선산의 고호)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本貫(본관)을 善山(선산)으로 하여 世系(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錘(추)의 17세손 成富(성부)가 朝鮮朝(조선조)에서 戶曹 判書(호조판서)를 지내고 和義君(화의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敬道(경도)와 敬迪(경적)은 나란히 敎授(교수)를 지냈다.
眞樂堂(진락당) 就成(취성)은 吏曹 參判(이조참판)에 추증된 匡佐(광좌)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松堂(송당) 朴英(박영)의 문하에서 宋學(송학)을 공부하여 「眞樂堂集(진락당집)」을 저술했으며 醫藥(의약)에 밝아 치료해 준 사람이 수천 명을 헤아렸다.
孝誠(효성)이 지극한 그는 만년에 金安國(김안국)·李彦迪(이언적)의 천거로 네 번이나 叅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선산의 洛峯書院(낙봉서원)에 祭享(제향)되었다.
淸白吏(청백리)에 녹선리 就文(취문)은 1537년(중종32) 式年文科(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지방 수령으로 전전하다가 司成(사성)을 거쳐 1568년(선조 1) 강원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간을 지냈다.
취문의 아들 宗武(종무)는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李鎰(이일)·權吉(권길) 등과 함께 전공을 올리고 다시 전장에서 순절하여吏曹 判書(이조판서)에 추증되고 尙州(상주)의 忠烈祠(충렬사)에 祭享(제향)되었다.
그외 義兵將(의병장)으로 활약한 天英(천영)은 1606년(선조39)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여 成均 學諭(성균학유)로 있다가 병자호란 때 崔峴(최현)과 더불어 義兵(의병) 활동에 功(공)을 세우고 世子師傅(세자사부)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金烏山(금오산)에서 餘生(여생)을 마쳤다.
경북 선산군(善山郡) 고아면(高牙面) 元湖洞(원호동) 속칭 들성(坪城:평성) 마을은 2백 35가구 중 32가구를 뺀 2백 3가구가 모두 선산김씨(善山金氏)다.
고려말 중서령공(中書令公)의 아들 광주 목사(廣州牧使) 기(起)가 기울어져 가는 사직을 개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당초 이곳에서 16킬로미터 거리의 선산군(善山郡) 옥성면(玉城面) 포상동(浦上洞) 하송산(下松山) 아래에 터를 잡았다.
이곳에서 여생을 마친 기(起)가 하송산(下松山)에 묻히고 후손이 번성하면서 비좁은 골짜기를 벗어나 청용산(靑龍山)과 당산(堂山) 줄기가 사방 20리나 병풍처럼 둘러싸인 남쪽 들판으로 옮겨 `들성'이라 이름 지은 것이 오늘날의 원호동(元湖洞)이다.
기(起)의 6세손이자 조선(朝鮮) 명종(明宗) 때 청백리이던 취문(就文)대에 이르러 후손이 더욱 번성, 육종파(六從派)로 분가하면서 원당골 윗골 아랫골 등 10~20여 채씩 새로운 마을을 형성해 5백 여년이 흐른 지금은 모두 12개 자연부락이 모여 있는 큰 마을로 발전했다.
동구밖에는 임란 당시 순절한 종문(宗武:就文의 아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충신비(忠臣碑)가 마을의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다.
동서(東西)로 마주 보며 마을전체를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 청용산(靑龍山)과 당산(堂山) 등은 모두 김(金)씨네 종산(宗山)이다. 예로부터 부촌을 이루어 학문에 전념한 탓인지 5·16 직후엔 사무관급 이상 고급 공무원만도 20여명이나 배출했다.
요즘에도 적게는 10마지기, 많게는 80여 마지기의 농사를 자영하며 충효렬(忠孝烈)의 정통 씨족사회를 이어간다.
*역대인물
김起 고려 때 廣州牧使(광주목사)를 역임하였으며 和義君(화의군)에 봉해졌다
김취문 조선의 문신. 자는 文之(문지), 호는 久庵(구암), 어려서 朴英(박영)의 문인으로 文名(문명)이 있었다. 1537년(중종32)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지방 수령으로 전전하다가 司成(사성)을 거쳐, 명종 때 淸白吏(청백리)에 錄選(녹선) 되었으며, 1568년(선조 1) 강원도 관찰사, 뒤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初諡(초시)는 貞簡(정간), 뒤에 文簡(문간)으로 改諡(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