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洞書院 과 방촌 黃喜政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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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이 옳다
다음은 이기의 ‘송고잡기’에 실려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é황익성(黃翼成)은 세종의 성대(聖代)를 만나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며 나라의 큰일을 의논하고 중요한 논의(論議)를 결정하면서 날마다 임금을 도와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를 성취시키는 데에만 전념할 뿐, 크고 작은 가사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하루는 계집종들이 서로 다투며 한동안 떠들썩하다가 한 계집종이 공이 앉은 걸상을 두들기며 하소연하였다. "아무개 종년이 나와 서로 다투어 이러저러한 잘못을 범하였으니, 몹시 간악합니다." 공이. "네 말이 옳다." 고 대답하고 책만 보고 있었다. 조금 뒤에 상대방 계집종이 또 와서 걸상을 두들기며 똑같은 하소연을 하였다. 공이 또, "네 말이 옳다." 고 대답하였을 뿐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침 공의 조카 아무개가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숙부님의 분명치 못하심이 너무하군요. 아무개는 이러하고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러한 년은 옳고 저러한 년은 그른데도 둘 다 옳다고만 하니, 숙부님의 분명치 못하심이 너무하군요." 하였으나, 공은 또, "네 말도 옳다." 고 하고는 글만 계속 읽을 뿐, 옳다 그르다는 말은 끝내 한 마디도 없었다.û
위 일화를 인용하면서, 어떤 공직자가 말하기를, ‘황희정승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안 된다.’라고 했다 하고, 또 어떤 정객(政客)이 국회에서 황희정승을 우유부단한 지도자로 비유한 기사가 있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많은 이들이 황희정승의 성품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위 일화의 배경과 깊은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우선 위 일화의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황희정승은 수상(首相)으로써 육조(六曹) 판서를 지휘 감독해야 하는 막중한 직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세자사(世子師), 영집현전사(領集賢殿事), 경연(經筵),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승문원도제조(承文院都提調), 상정소도제조(祥定所都提調), 풍수학도제조(風水學都提調), 영서운관(領書雲觀) 등의 막중한 고정직을 겸하였다. 이들 고정직은 그 하나하나가 임금의 자문에 즉시 응해야 하는 막중한 직책들로서, 고정적인 한 재상(宰相)의 업무가 충분히 될 뿐 아니라 이들 중에 한 개의 직책만 맡아도 사림(士林)으로서는 대단히 영예롭게 여기는 중요한 자리들이다. 또한 황희정승은 과거(科擧)의 고시관을 맡아 세종조의 많은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였고,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등 국가적 막중대사인 숱한 임시직도 겸하였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황희정승에게 거의 모든 중요한 국정을 다 맡기고 의논하였다. 위 일화가 나올 무렵의 황희정승은 맡은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세종 14년~ 15년 어간에는 방대한 분량의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을 직접 편찬하였고, 아악(雅樂)과 여러 제사(祭祀)의 제도(制度), 대성악(大晟樂)의 제도,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제도 그리고 회례악(會禮樂) 등의 예악(禮樂)과 여러 제도를 조선 500년 동안 거의 수정 없이 운영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정하였다. 황희정승과 동시대 관료였던 고령부원군 신숙주가 작성한 황희정승의 신도비문에, ‘모든 상소와 건의문은 공(公)이 손수 만든 것으로서 그 말의 뜻이 명쾌하여 한번만 읽어 보아도 그가 정성을 다한 것을 엿볼 수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또 묘지명에, ‘연세 90이 되어도 총명이 감퇴되지 않아, 조정의 법도와 경(經) 사(史) 자서(字書)들을 촛불처럼 환히 기억하였고 더욱이 산수(算數)에 있어서는 제아무리 젊은이라도 감히 공(公)을 따를 수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황희정승은 당면한 일에 대하여 모든 자료를 직접 수집하고 연구하였고, 천문(天文)에 관한 복잡한 계산 등은 젊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직접 계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위 일화를 살펴 보면, 황희정승이 집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국정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걸상에 단정히 앉아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는 공직자로써의 모범적 자세를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밖에서 말다툼하던 두 계집종이 각각 황희정승을 찾아와서 상대방의 잘못을 이르며 하소연하였다고 되어있다. 즉, 여기서 우리는 두 계집종이 시비의 잘잘못을 가려달라고 찾아온 것이 아니고 단지 억울함을 하소연하러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에 황희정승은 그녀의 하소연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네 말이 옳다’라고 위로하였고, 다음에 찾아온 계집종에게도 똑같이 ‘네 말이 옳다’라고 공평하게 위로해 주고 계속 책을 읽었다. 그녀들이 달려와 걸상을 두들기며 소란을 피웠으므로 분명히 책 읽기에 방해가 되었을 것인데도 황희정승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그 하소연을 두 번씩이나 받아 주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도 황희정승의 넓은 도량이 드러나고 있다. 철부지 계집종들의 사소한 말다툼이란 다반사로 있는 일이다. 만약 잘잘못을 가려야 할 다툼이었다면 응당 그녀들의 직접 상전인 집사에게 찾아갔을 것이고, 집사가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중대한 시비였다면 그 집사가 내당(內堂) 마님께 아뢰어 최종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바깥주인은 계집종을 다스리는 등의 내당 일을 관여하지 않는 것이 법도이다. 따라서 만약 황희정승이 계집종들의 말다툼에 직접 끼어들어 시비곡절을 가려주었다면, 사대부가의 바깥주인으로써의 체통을 잃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이 일화는 아예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카는 아직 위와 같은 전반적인 정황을 헤아리지 못할 나이이므로, 황희정승은 ‘네 말도 옳다’라고 대답하여 스스로 판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여기서는 황희정승의 유연한 훈육 자세를 엿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몇 마디 안되는 짧은 글에서 황희정승의 단정한 몸가짐과 넓은 도량 그리고 사대부가의 법도와 유연한 훈육 태도 등을 잘 나타내었고, 특히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별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황희정승이 어린 여종의 하소연을 두 번씩이나 너그럽게 받아 준 그의 인간 평등사상(平等思想)이 크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 일화가 유명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황희정승이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식으로 진정 우유부단한 정치가였다면, 영명하신 세종대왕께서 무슨 이유로 2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를 수상으로 삼아 온갖 국정을 다 맡겼겠으며, 그와 더불어 정치생애를 같이 하였겠는가? 오늘날의 공직자나 정치인이 만약에 진정 황희정승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나라를 이끌어 나간다면, 이 혼탁한 세상도 반드시 태평성대로 다듬어질 것이다. 고령부원군 신숙주가 지은 황희정승의 묘지명에 이런 시구(詩句)가 있다.
"논의(論議) 중에 가부(可否) 결단을 내릴 때는 깊은 계곡 달리는 급한 여울과 같고,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하며 세운 공훈과 업적이 불꽃처럼 빛나고 있네." (論斷可否如湍赴壑 秉匂最久有赫勳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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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사(飛蛛絲)
황희정승이 임종하는 날에 시중드는 아이가 물었다. "대감께서 돌아가시면 소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갑니까?" 황희정승이, "공작은 날거미줄만 먹고도 사는데 무엇을 걱정하느냐?(孔雀尙食飛蛛絲以生有何患乎)" 라고 대답하고 아무 말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중국에서 공작 한 쌍을 조선에 보내면서, 잘 길러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작은 우리나라의 새가 아니므로 온 조정이 그 먹이를 알 수 없었다. 황희정승이 온갖 짐승의 생태에 대하여 박식했다는 것을 아는 조정 관리가 혹시나 하고 황희정승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문의하자, 그 시중드는 아이가 황희정승이 임종 시에 하던 말을 그대로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많은 날거미를 채집하여 먹인바, 과연 공작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임금이 그 아이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현명한 재상은 사후에도 나라를 위하였다고 감탄하였다.û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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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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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렁소와 검정소
젊은 시절 황희가 한 늙은 농부로부터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얻었다는 이 ‘누렁소와 검정소’ 이야기는 잘 알려진 유명한 일화이다.
「젊은 시절 강직하고 의론이 날카로웠던 황희는 일찍이 암행어사가 되었다.
공이 어느날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암행하는데 길 옆에서 한 늙은 농부가 쟁기에 누렁소와 검정소 두 마리를 함께 메워서 밭을 갈고 있었다. 당시 그 지방에서는 소 두 마리로 밭을 가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공은 농부에게 그 고을 수령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놓고 묻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우선 말에서 내려 길가에 앉아 농부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 두 마리 소 가운데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하오?”
하고 물었더니 농부가 쟁기를 놓고, 가까이 와서 공의 귀에 입을 대고는,
“왼쪽 누렁소가 일을 더 잘 합니다.”
라고 속삭였다. 공이 웃으면서,
“그런데 왜 귀에 대고 소근거리오?”
하고 묻자 농부는,
“짐승이라도 서로 비교되는 것은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그럼 저 미련한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단 말이오?”
하고 되묻자 농부가,
“설령 저 놈들이 아무것도 모른다손 치더라도 사물을 대함에 있어 경솔해서는 안됩니다. 저 놈들은 ‘이랴!’ 하면 가고, ‘워!’ 하면 멈추며, ‘이리!’ 하면 우측으로, ‘저리!’ 하면 좌측으로 향할 줄 아는데 어찌 저 놈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농부의 말을 들은 공은 숙연한 마음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미물을 대하는 데도 이러해야 하거늘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소? 노인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경박함을 면치 못할 뻔했소. 앞으로 노인의 말을 약으로 삼아 주의하리다.”
하였다.
공이 한 평생 겸손하고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지게 된 것도 이 암행어사 때 깊이 깨달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위 일화에 등장하는 노인을 가리켜, 황희가 장차 국가에 크게 쓰일 인물이므로 그의 날카로운 성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나타난 신선이라는 말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그 당시에는 정국이 매우 어수선하여 학덕 높은 선비들이 초야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 중 한 분이 범상치 않은 젊은 선비를 보고 매사에 신중하라고 행동으로 훈육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현우님 작
효도(孝道)
황희정승은 남달리 풍속을 장려한 정치가이다. 그는 효자와 열녀에게 정문(旌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세워 표창한다든가 부역을 면제해 주는 등의 풍속 장려책을 국가 정책에 반영하였다. 이러한 장려책은 뒷사람에게 권장하기 위한 것이므로, 일시적인 행사로 끝낼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일로 삼아야 한다며 이를 제도화 하였다. 또 풍속장려책의 일환으로 효도에 대하여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효자와 순손(順孫)을 포상하는 법은 원전(元典)에 실려 있어서, 매양 교지(敎旨)를 내릴 때마다 중앙과 지방을 방문하여 찾아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효행을 기리는 정문을 세워주거나 부역을 면제해주고 혹은 벼슬을 제수한 자를 연서(連書)하여 아뢰었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손가락을 끊어 병을 고친 것과 같이 눈에 띄는 것은 즉시 보고하고 있습니다만, 나머지 효행(孝行)의 항목으로 쉽사리 알 수 없는 것은 즉시 보고하지 아니하는 자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손가락을 끊는 일은 지나친 일이니 반드시 이렇게 한 뒤라야 효(孝)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도하는 마음이 지극히 순수하고, 어버이 뜻에 극진히 순종하여 즐겁게 해드리고, 특히 늙으신 어버이를 모심에 있어 남들로부터 이간하는 말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욱 포상함이 마땅합니다.<윤리-5> 이제부터는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표창 받을 만한 자를 모두 추천해 올려 풍속을 장려하게 하소서. 혹시 실제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지 아니하거나, 혹 실적이 없는 자를 추천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추천한 향리(鄕里) 사람이나 관리를 캐물어 죄를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세종 23/10/22>
여기서 황희정승이 강조한 효도에 대하여 잠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일찍이 황희정승이 말하기를, “사람이 효도(孝道)를 다하지 않으면 백행(百行)이 다 무너집니다.”라고 하였다. 자기 부모를 소중히 여기는 자(者)라야 남의 부모를 소중히 여기고, 남의 부모를 소중히 여기는 자라야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자라야 사회에 봉사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자라야 나라에 충성한다. 또한 자기 부모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남의 부모를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남의 부모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는 사회에 봉사하지 아니하고, 사회에 봉사하지 않는 자는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효·불효는 곧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된다. 그렇다면 효도란 무엇인가? 효도는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도(人道, 인간으로써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의 하나이다. 효도에 관한 인도라는 것은, 인간이나 금수(禽獸)는 다같이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 태어났지만,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금수와 구별된다는 개념에서 출발한 인도를 말한다. 즉 인간은 어버이 덕분에 이 몸이 태어났고 어버이의 희생적인 수고로움과 절대적인 사랑으로 길러졌음을 이성적(理性的)으로 알고 있으므로, 한없는 어버이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효도를 다하지 않으면 ‘금수와 같다’라고 하였고, 어버이를 욕되게 하면 ‘금수만도 못한 자(者)’라는 낙인을 찍었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가? 효도에 대하여 황희정승(79세)이 말하기를, “효도하는 마음이 지극히 순수하고, 어버이 뜻에 극진히 순종하여 즐겁게 해 드리고, 특히 늙으신 어버이를 모심에 있어 남들로부터 이간하는 말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욱 포상함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였으며, 손가락을 끊어 어버이의 약으로 써야만 효도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였다. 황희정승이 말한 효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효도하는 마음이 지극히 순수해야 한다.(至如孝心純) 어버이를 섬기는 효행(孝行)은 순수한 효심(孝心)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또한 그 효행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리고 남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한결같아야 한다. 부모에게 아무리 호의호식해 드리더라도, 만약 다른 저의가 있어 그렇게 섬긴다면 그것은 이미 효도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금전이나 유산을 얻으려는 마음에서나, 다른 사람에게 내가 효도를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효행은 결코 효도일 수 없다. 왜냐하면 어버이는 세상살이 경험이 풍부하고 자식의 행위에 민감하기 때문에 자식이 하는 효행의 저의를 훤히 들여다 볼 수가 있으므로, 그러한 효행은 어버이에게 즐거움을 드리기보다 도리어 슬픔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어버이의 뜻에 극진히 순종하여 즐겁게 해드려야 한다.(至順悅親意) 어버이의 뜻이 내 뜻과 비록 다를 지라도 어버이의 뜻에 순종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드린다 하여도 어버이의 뜻을 거슬러 심기(心氣)를 상하게 한다며 결코 효도가 될 수 없다. 즉, 호의호식을 못해드릴지라도 다른 어떤 행위로든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효도이다.
셋째, 특히 늙으신 어버이를 모심에 있어 남들로부터 이간질하는 말이 없어야 한다. (人無間言特異於人老) 늙으신 어버이를 모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긴 병(病)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특히 노환으로 장기간 자리보전하고 있는 노인을 모시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이 병상에 누운 노인을 모실 때에 흔히 남들의 입에서 이간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즉 이웃이나 친지들의 입에서, 와병 중인 노인과 모시고 있는 며느리(혹은 딸)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다는 등의 간언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간언이 있으면, 외견상 물질적으로는 잘 모시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순수한 효심으로 어버이를 모시지 않는 경우가 있으므로, 간언이 없는 사람에게 더욱 포상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효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죽 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면 정성껏 마련한 따뜻한 죽을 어버이께 드리고, 비단옷을 드리지 못할 형편이면 무명옷이라도 깨끗이 빨아 드리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 드려서 불편한 것이 있나 없나를 보살펴 드리고, 어버이 앞에서 아이를 때리지 말고 큰 소리도 내지 말고, 비록 지쳐 피곤할지라도 내색하지 않고 즐거운 표정으로 어버이를 모시면 그것이 바로 효도이다. 효도를 자식에게 어떻게 가르칠까? 물론 학교 교과서에 효자∙효녀에 관한 일화를 수록한다든가, 효자∙효녀를 표창하고 풍속을 장려하는 방책도 있다. 그러나 효도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서 그대로 효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효도는 말로써 배우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병아리는 어미 닭을 본받아 모이를 쪼아먹고, 송아지는 어미 소를 본받아 풀을 뜯어 먹고, 새끼 호랑이는 어미 호랑이를 본받아 먹이 사냥을 하듯이, 자식은 어버이를 본받아 효도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내가 먼저 내 어버이께 효도를 해야 한다. 자식은 어버이의 거울이다. 내가 효도를 하면 자식도 따라서 효도할 것이고 내가 효도를 하지 않으면 자식도 또한 효도를 하지 않는다. 내가 효도를 하지 아니하고 어찌 자식이 효도하기를 바라겠는가
[자료출처 : http://home.megapass.co.kr/~hh34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