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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다락골 성지 - 이름도 없이 줄지어 신앙을 증거하는
1. goodnews - 성지 - 대전교구, 청양 다락골
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holyplace&ctxtOrgCode=71&ctxtGyoguCode=12&Orggubun=71&ctxtHigh=&ctxtLow=&curpage=2&ctxtOrder= name1 &ctxtOrderType=&ctxtOrgNum=2302&PSIZE=20
<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지번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676-1
도로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
전화번호 (041)943-8123 홈페이지 http://www.daracgol.or.kr
차령산맥의 줄기가 지나가는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는 오소산 기슭에 자리 잡은 청양 다락골은 굽이굽이 산비탈 중턱에 40여 호의 인가가 모여 있는 두메산골이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지금의 홍성)골에 속했으나 지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청양에서 대천으로 국도를 따라 8킬로미터쯤 가면 화성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면소재지 조금 못 미쳐 국도변에 최경환, 최양업 부자상(父子像)이 보인다. 묵주와 성지(聖枝)를 들고 앉아 있는 최경환 성인, 그 옆에 십자가와 성서를 펴든 최양업 신부의 부자상은 지난 1986년 8월에 건립된 것으로 이곳이 이들 부자의 탄생지임을 나타낸다.
다락골은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다시 2.5킬로미터 가량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국도에서 갈라지는 초입에 ‘양업로(良業路) - 성지 줄무덤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가쁜 호흡을 고르며 마을 뒤 산길을 마저 오르면 항아리 모양으로 생긴 14처를 만난다. 그 옆을 지나면 경주 최씨 종산의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다.
하지만 이 무덤들의 임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훔쳐 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만 입을 통해 전해진다.
혹자는 황새 바위에서 순교한 이들이 묻힌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동학란 때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든지 간에 확실한 것은 치명자들의 무덤이고 그들의 이름 없는 피 흘림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다.
농암리 다락골은 처음에는 ‘월내리’(月內里)로 불렸는데 이것을 순수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한다. 혹은 다래가 많이 나서 ‘다랫골’로 불렸다고도 한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祖父) 최인주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된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서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 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新垈)로서, 점점 이웃이 모여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최인주가 슬하에 둔 3형제 가운데 셋째가 최경환 성인으로 그는 1821년 한국에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을 6형제 중 장남으로 얻는다. 이들은 박해 시대에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을 겪던 중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한다.
그 후 다시 안양의 수리산 담배 마을에 정착한 최씨 일가는 이곳에 교우촌을 만들고 1836년에는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나보낸다. 1839년 최경환은 가족 및 교우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돼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다. 한편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의 교우들은 대화재의 참화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씨 문중에서 일군 새터라는 마을 이름은 지금도 신앙의 흔적으로 역력히 남아 있다.
2003년 2월 17일 대전교구는 다락골 성지를 성지본당으로 설정하고 상주사제를 임명하여 성지 개발 및 보존과 순례자와 인근 교우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토록 하였다. 2008년 1월 23일 다락골 성지본당은 다시 성지로 환원되었고 기존의 관할 구역은 청양 본당으로 재편입되었다. 대전교구는 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1월 9일 최경환 성인 일가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 및 선교 정신을 널리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당을 다락골 성지에 건립하여 봉헌하였다. 또한 인근에 있는 새터,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생가터에 박물관 겸 소성당도 마련할 계획을 갖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새터 -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생가터
김대건 신부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1805-1839년) 성인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또 성직자 아들을 두었다는 이유로 한없는 영광과 함께 온갖 곤욕을 치어야만 했다.
오늘날 신학생 아들을 둔 부모들이 밤낮을 기도와 희생으로 살아가며 부디 아들이 성인 사제되기를 염원하듯이 최경환 성인은 아들 양업을 위한 끝없는 기도의 삶을 살았고 마침내는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차령산맥의 줄기가 지나는 청양군은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대가 높은 편이다. 청양읍에서 대천에 이르는 서쪽으로 포장도로를 가다 보면 화성면이 나오고, 면 소재지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곡을 따라 오르면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 최경환이 탄생한 당시 홍주(洪州) 다락골이 나온다.
36번 국도에서 다락골 줄무덤 입구까지는 순례자들이 찾기 쉽도록 잘 포장되어 있는 양업로가 뻗어 있다. 이 양업로를 따라가다 보면 최경환 성인의 생가터가 눈에 띄는데 마치 수줍은 새색시 모양 숨어 있다. 인근에는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목을 축여 주었던 새터 우물이 아직도 보존돼 있다. 최양업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한 최경환 성인의 생가터에는 박물관 겸 소성당이 들어설 예정이다.
다락골은 최씨 문중이 오랫동안 살아온 곳으로 최 신부의 조부 최인주가 신해박해(1791년) 때 피난해 정착함으로써 유서 깊은 교우촌이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던 최씨 문중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 생활을 해야만 했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경환의 집안은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오던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와 결혼한 뒤 가족들과 상의해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한다.
청양 다락골에서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으로 옮겨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깊은 산 속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의 집을 급습해 온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 · 선정 · 우정 · 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는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다시 갇힌 몸이 되고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는 4형제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생가 터.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 그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에 앞서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 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청양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자리한 곳입니다.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는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빼내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락골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791년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祖父)인 최인주와 그의 어머니가 피난을 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모자는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新垈)로 점점 이웃이 모여옴에 따라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최인주 슬하의 3형제 가운데 셋째가 최경환 성인으로, 그는 1821년 한국에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을 6형제 중 장남으로 얻었습니다. 이들은 박해 시대에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을 겪던 중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하였고, 그 후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 교우들은 대화재의 참화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2003년 대전교구는 다락골 성지에 상주사제를 임명하여 성지 개발 및 보존, 순례자와 인근 교우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토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1월 9일 최경환 성인 일가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 및 선교 정신을 널리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당을 다락골 성지에 건립하여 봉헌하였습니다. 또한 인근에 있는 새터,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생가 터에 박물관 겸 소성당도 마련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미사시간 안내
주일미사 일 11:30 교중미사
평일미사 화 11:30 수 11:30 목 11:30 금 11:30 토 11:30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 천주교 대전교구 - 60주년 행사자료
http://www.djcatholic.or.kr/home/pds/60th_notice.php?enter=v&idx=13154&page=1&s=&k=
<위 게시된 내용 중 일부 소개>
2-1. 4차 도보성지순례 : 다락골 줄무덤
(4차 도보성지순례 다락골 줄무덤, 갈매못순교성지)
다락골 줄무덤
1. 성지에 대하여.
1) 줄무덤의 유래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들의 묘소로 추정되는 37여기 묘가 이곳 다락골에서 줄무덤을 이루고 있고, 이 묘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다만 최양업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야음을 타 급히 옮겨다가 이 마을 뒷산인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증언을 이 마을 노인들이 말한다. 최양업 신부님 집안들은 박해가 닥칠까봐 이 무덤이 신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이 마을을 불살랐고,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오기선 요셉 신부님은 당신의 회고록인 ‘곡예사 같은 인생’에서 줄무덤에 대하여 두 가지 증언을 한다. 하나는 1952년 당시 청양 사람들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하였던 최영천 노인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에 오 신부님은 이곳을 현지 답사하여 순교자들의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였다. 또 하나의 증언은 1920년대에 공주에 사시던 송 아오스딩 노인께서 “청양 고개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하시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250여명의 교우가 치명당하셨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 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느라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고 오기선 신부님은 증언한다.
2) 줄무덤의 기수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에 의해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 1,2,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다. 오기선 신부님의 증언에는 17기라고 하셨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비신자인 최씨들이 임자없는 무덤이라 하여 이장하는 바람에 아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다. 제1줄무덤 서남쪽 밑으로 20m 쯤 떨어진 지점에 10기의 제2줄무덤이 있다. 제3줄무덤은 제1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고 13기가 있다. 이렇게 이곳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된다. 그러나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발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1982년 대전교구에서는 이들 무명 순교자들을 위한 묘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2. 청양 출신 순교자.
1) 교우촌이 되기까지
이곳 다락골은 한때 열심한 교우촌이었다. 조선 정조 15년에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였던 1791년 신해박해가 발생하였다. 한국 천주교 창설 때부터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권고를 받고 교우가 된 이씨 부인은 이 박해를 피해 12살의 아들인 최인주를 데리고 서울에서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이씨 부인은 최양업 신부님의 증조모가 되며 최인주는 최양업 신부님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이씨 부인이 이곳에 온지 4~5년이 지나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700여미터 떨어진 새터에 땅을 일궈 농사를 시작하였고, 이씨 부인은 경성 부인으로 예법과 바느질에 능통하였고 경주 최씨와 집안간이 됨으로 경주 최씨 마을인 이곳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졌다. 이씨 부인의 아들 최인주는 6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막내가 바로 최경환 성인이다.
최경환 성인은 내포지방의 사도인 이존창의 후손으로 홍주에 살고 있던 이성례와 혼인하여 최양업 신부님을 낳았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과 집안인 어머니를 둔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과 진외 6촌간이 된다. 최경환 성인이 장가를 들고 사흘 만에 재행을 가니 처가 동네 교우 여인들이 몰려와 “구교집 서방이니 교리를 듣자.”며 신랑을 달아 먹으려 했을 때 사실 교리에 대하여 밝지 못한 최경환 성인은 망신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칠극(七克)이라는 책, 즉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으로 죄악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다룬 수덕서를 며칠 밤을 새워 다 외우고 나니 교리에 밝아져 강론을 잘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미신이 성행하여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족과 상의하고 교우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로 이주하였다. 서울에 갔지만 그곳에서는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으로 갔다가 다시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 서북쪽에 있는 수리산에 정착을 하여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고, 1839년에 큰아들 최양업을 모방 신부님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박해의 손길이 충청도 땅에도 거세게 몰아쳐와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특별히 병인박해는 프랑스 함대의 침입과 독일 상인 옵페르트가 해미 근처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였는데 천주교 신자들이 자기 아버지 묘를 파헤쳤다고 생각하고 내포지방 천주교 신자를 없애 버리려는 악의에서 생겨난 것이다.
박해가 내포지역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이곳 다락골도 교우촌으로 발각되자 포졸들이 급습하여 교우들을 잡아가고 방화와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교우들은 순교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도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천주교를 믿으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니 절대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옛 어른들이 대대로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2)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1839년의 서울은 박해와 기아로 말미암아 많은 교우가 죽었다. 성인께서는 많은 애긍을 거두셨고 동네 교우들을 권고하고 그들에게
간청하여 그들과 함께 순교자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또한 불쌍한 교형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집으로 돌아오신 성인께서는 가족에게 순교 준비를 시킬 때가 되었다고 믿으셨다. 성 최 프란치스코가 이 거룩한 의무에 전심하고 계시던 어느 날 포교들이 날이 밝기 훨씬 전에 문전에 나타났다. 성인께서는 그들 앞으로 마중나가며 물으셨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서울서 왔소" 하고 포교들이 대답하였다. "어째서 이리 늦게 오셨소. 우리는 오래 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소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다리나 좀 쉬고 식사를 해서 기운을 돋구도록 하시오. 그러면 조금 있다가 질서 정연하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맞이하여 주니 포교들은 감탄하여 거의 열광적으로 부르짖었다. "이 사람과 그 가족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다. 이런 사람들이 도망칠 염려는 조금도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겠다." 이렇게 말하고 포교들은 깊이 잠들었다. 그 동안 성인께서는 순교하자고 교우들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는 포교들의 식사를 준비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성인께서는 포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옷을 주었다. 그리고 40명이나 되는 온 집안 식구가 모여 길을 떠났다. 맨 앞에는 남자들이 큰 아이들을 데리고 걷고 그 뒤에는 아녀자들이 젖먹이들을 업고 걸으며 포교들은 맨 뒤에 따라갔다. 때는 7월(양력)이라 더위가 심하였다.
대열은 천천히 발을 옮기고 대열 속에서는 지쳐버린 어린이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길을 가는 중에 이들 순교자를 맞이하는 것은 욕설과 저주요, 때로는 동정하는 탄식도 섞였다. 그러나 대열 맨 앞에서 가시던 성 최 프란치스코의 목소리는 이 모든 소음을 덮어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그 마음에 용솟음치는 용맹을 전해주었다. "형제들! 용기를 내시오. 주의 천사가 손에 금으로 된 자를 쥐고 당신들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세고 하는 것을 보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들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오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오." 이런 열렬한 애덕에서 나온 격려의 소리를 들으며 우리 교우들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마치 잔치에 가듯이 형장으로 나가는 이 용사들과 그 연약한 팔로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이 어린이들을 보자 외교인들은 악담을 하며 증거자들에게 몽둥이와 돌과 욕설을 퍼부으며 소리쳤다. "이 극악무도한 놈들아! 이 인정없는 놈들아! 어떻게 감히 그 어린 것들을 데리고 죽으러 나간단 말이냐." 마침내 옥문이 활짝 열려 이분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런 악담을 벗어나게 하였다. 그러나 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도둑들과 무서운 쇠사슬이었다.
이튿날부터 성인께서는 관청에 출두하여 고문을 당하였다. "이 몹쓸 양반! 나더러 감히 배반을 하라고 명하십니까? 사람에 대하여 불충분한 것도 죄가 되는데 천주에 대하여 불충한 것은 어떠하겠습니까."이렇게 대답하시자 그들은 팔다리를 찍고 으스러뜨렸고 매 110대를 맞은 살은 점점이 흐트러졌다. 마침내 성인의 육체가 상처와 피로 뒤덮이자 옥으로 다시 끌고 갔다. 몇몇 다른 교우들도 출두하여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초주검이 되고 자기들이 무슨 대답을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된 그들은 관원들이 불러주는 배교의 말을 중얼거렸다. 첫 번 심문이 끝나자 관리들과 포교들은 관청에 모여 성 최 프란치스코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기 네가 믿는 교의 책이 한 권 있는데 네 말을 듣고 싶어 몇 장 읽어 달라고 이렇게 모였다." 성인께서는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들여 훌륭한 잔치에 초청된 것만큼이나 즐거워서 웃으며 책을 펴서 하도 열심으로 하도 감격적으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분이 읽는 것을 듣던 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일어나 그 무서운 고문 속에서도 그렇게도 자유롭고 깨끗한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천주교를 찬미하였다
포도대장이 최경환 성인에게 "너는 정말 그 교를 믿으려거든 이 사람들을 꼬이지 말고 너 혼자서만 할 것이 아니냐?" 라고 물으니 그는 "네! 누구든지 천주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는 지옥으로 떨어짐이 틀림없소이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러한 운명에 빠질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이고 천주를 섬기고 저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서외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판관은 최경환에게 두 차례의 주리형을 틀게 하였고 꼬챙이로 살을 찌르되 배교하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하라고 명하였다.
여기서 형리는 곧 최경환의 옷의 일부를 벗기고 잔악한 형벌을 주게 되니 피는 흘러 내를 이루고 살은 흩어져 떨어지며 흰 뼈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괴로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판관은 다른 교우들을 불러내어 교를 버리라고 큰 소리 치면서 곤장대로 열번씩 때리게 하니 그들은 배교한다고 말하고 석방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 많은 교우 중에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있던 교우는 최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와 그의 친척이던 여교우 이 에메렌시아나 3명뿐이었다. 이를 본 프란치스코는 그들의 비겁한 것을 슬퍼하여 마지않았다.
판관들은 최 프란치스코의 한 아들이 외국으로 유학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분개하여 어떻게 하여서든지 그를 배교시켜 보겠다고 서두르게 되었다. 이때 그는 판관에 대하여 "만일 당신들이 나를 보고 먹지 말고 살라고 명하면 그것은 될 수 있을지 모르오나 천주를 버리는 것은 절대로 못할 일이외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형리는 그의 다리와 팔을 마구 닥치는 대로 때려서 그 뼈를 튀어나오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두 달 동안의 옥중 형벌에서 정강이 매질을 340대, 볼기의 매질을 110대나 맞게 되었으니 그래도 그는 죽을 때까지 기구와 교리의 강론을 그치지 않았다. 최경환이 이와 같이 끝까지 굽히지 않음을 보고 형리는 그가 갇힌 옥중에 사나운 강도 한명을 같이 있게 하여 그를 욕하고 발길로 차서 못 견디게 굴게 하였으나 최 프란치스코가 입을 꾹 다물고 이를 잘 참고 있음을 본 그 강도는 도리어 그의 인내심에 감탄하여 천주교를 예찬하게 되었다. 또 어느 날에는 앵베르 주교의 금관과 제복을 갖다 주면서 이것들을 입어보라고 말하니 그는 이를 굳이 물리쳤다. 이때 옥리가 그것을 외교인 죄수의 몸에 입히게 되니 그는 공손히 엎디어 십자가에 절하였다. 이리하여 1839년 9월 11일에 최 프란치스코는 마지막으로 포도대장의 앞에 불려나가 치도곤으로 50대의 볼기매를 맞고 옥으로 돌아와서 기진맥진하여 말하기를, "목숨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목을 잘리고자 한 것이 나의 일생의 바람이었으나 이대로 옥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바라신다면 그 뜻대로 되어 지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최 프란치스코는 다음날 12일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그 마지막의 숨길을 옥중에서 거두게 되었다.
3) 이성례 마리아
최경환 성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 집안출신이며 홍주고을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최경환 성인과 결혼하여 다락골에 살면서 맏아들 최양업을 낳았고 서울로 이사왔다가 여러곳으로 옮겨다니면서 지극히 헌신적으로 남편을 도왔고, 불평불만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일이 결코 없었다. 산 속에서 그 어린 자식들이 배고픔과 피로로 기진맥진한 것을 본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에는 이 세상의 짧음과 후세 생명의 영원함을 환기시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그들 앞에 보여주었다. 1839년 7월 남편과 함께 잡혀 포도청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며 곤장을 300대 이상 맞았다. 그러나 포장 앞에서 잠시도 굴하지 않고 다시 감옥에 갇혔다.
그 당시 감옥이란 마룻방으로 되어있고 널판문이 있어 그곳으로 겨우 빛이 통과할 정도여서 겨울에는 무섭게 춥고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더웠다. 대역 죄인처럼 학대받고, 먹는 것이라곤 아침,저녁으로 주는 한 주먹의 조밥뿐이며 물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건강한 사내라도 2-3주일 후면 파리하게 여위어져 뼈가 나오고 가죽만 남게 되었다. 뮈텔민 주교는 "옥중의 죄수는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해골이 걸어 다니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다블뤼 안 신부님은 "옥중생활은 고문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상처로부터 흐르는 피와 고름 때문에 멍석은 푹푹 썩어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병이 돌기 시작하여 하루에도 2-3명씩 죽어 나갔습니다." 라고 전했다.
가장 무서운 형벌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교우들은 이 기갈을 참지 못해 항복하는 예가 적지 않았으며 배고픔을 참다못해 썩어빠진 멍석자락을 뜯어 씹기도 하고 옥안에 들끓는 이를 한 웅큼씩 잡아먹기도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굶주림과 고문으로 말라 빠지고 상처가 난 이 마리아의 젖꼭지에서 젖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데리고 들어간 3살짜리 젖먹이 스테파노가 엄마의 젖이 끊어지므로 젖을 빨다가 굶어 죽어갔다. 엄마로서 아들을 굶어죽이게 되니 그 비통함은 얼마나 컸겠는가? 이런 실성한 상태에서 그녀는 "나는 배교하겠노라"고 말한다. 이 한마디 때문에 이성례 마리아는 복녀위에 누락되었다. 그러나 이성례 마리아는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후, 하느님과의 약속, 남편과의 약속도 저버린 몹쓸 죄인이 된 자신의 처지, 한없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던 중 큰 아들 양업이 마카오에서 신학 교육을 받는다는 사실이 형조에 알려져 다시 감옥에 수감되게 된다.
감옥으로 들어오면서 네 아이를 불러놓고 "절대로 성모님과 천주님을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지내며 떨어지지 말고 맏형이 올 때까지 용인 큰 아버지에게 가서 살아라. 그러면 맏형이 거두어 줄 것이다"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네 형제는 용인으로 가지 않고, 어머니가 떨어지지 말랬다고 넷이 노끈으로 서로 허리를 묶고 구걸을 하며 감옥에 들어간 어머니를 공양하였다. 하루는 형리를 통해 인절미가 들어왔는데 손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성례 마리아는 그것이 누구의 손때인지를 알았다. 어린 자식들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먹고 싶은 걸 참고 어머니에게 넣어준 것이었다.
사형 집행일이 다가왔을 때 둘째 아들 야고보를 불러 이제 어미가 죽게 되었으니 너희 모두 절대로 어미의 죽는 모습을 보지 말고 용인에 가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감옥을 나온 둘째는 그 날 밤 휘광이를 찾아가 그동안 동냥해서 모은 약간의 돈과 쌀을 휘광이에게 주며 "우리 엄마 이제 죽게 되었는데, 죽을 때 아프지 않게 목을 단박에 잘라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 무지막지한 휘광이도 눈물을 흘리며 밤새 칼을 새파랗게 갈았다고 한다.
이튿날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자녀들에게 오지 말라고 했지만 자녀들은 숨어서 '엄마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형장을 찾아들었다. 정말 휘광이의 한 칼에 어머니의 목이 떨어지자 이를 지켜보던 네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무명저고리를 벗어 하늘로 던지고 손뼉을 치면서 "우리 엄니 목이 단칼에 떨어졌다. 이제 우리 엄마 천당에 가셨다"고 그렇게들 좋아하는 데 천주교 신자들 잡아 죽인다고 구경 나왔던 외인들마저도 그 기막힌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4) 최양업 신부님
본명 최정구(崔鼎九), 세례명 토마스, 본관 경주, 1821.3.10일 충남 홍주 다락골(충남 청양군 화성면 능암리)에서 아버지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1805~1839)와 어머니 이성례 (李聖禮)마리아(1801~1840)에서 태어나고 부모는 순교 하였다
증조부 최한일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신앙생활의 도피로 자주 이사를 하고 경기도 과천의 수리산에서 산간생활로 정착하였다
15세때인 1836년(현종2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Mauban,R)에 의해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에 선발되어 1837.6.7일 마카오에 걸어서 도착 신부 수업중 1838.11월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사망한 뒤 두 사람은 공부를 지속하였다.
1844.12월 중국의 소인가자(小人家子)본당에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삭발례 와 부제품을 연달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며, 만주, 요동, 외몽고, 일대를 떠돌이처럼 헤매면서 입국을 시도하여 1845.1월 김대건이 의주에 입국하기를 성공하였다
그러나 최양업은 1846.1월 두만강을 건너려다 중국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실패하고 12월 다시 입국하기 위해 조선국경 변문에 도착 하였으나 감시가 더욱 강화 되었고 먼저 입국한 김대건 신부 와 교우들이 순교 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 순교자 현석문의 순교일기 [기해일기]를 라틴어로 번역 하고 현지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1847년 고군산도 와 1849년 백령도 등의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하였고. 1849.4.15일 28세 때 상해의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해 사제서품을 받고 만주의 遼東에서 활동 중 12월초 압록강을 건너 7년 만에 신의주로 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서울에서 하루를 쉬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리 신부를 만나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으로 6개월 동안 전라, 충청, 경상 등 5개도 5천리를 순회하며 12,000명의 신자에게 성사를 주기위해 매년 7천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127개 공소를 방문하는 사목활동을 11년 6개월 동안 지속하였다
1861.6.15일 영남지방에서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활동 보고를 위하여 상경 하던중 과로와 식중독으로 40세의 나이에 문경에서 병사하여 베론으로 옮겨졌으며 그해 11월초 베르뇌(Berneux)주교와 프르트에(Pourthie)신부의 주도로 충북 제천의 배론 성지 뒷산 언덕위에 안장하였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비석은 세우지 못하고 1945.9.27일 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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