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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州 檜岩寺 無學王師 妙嚴尊者塔 碑文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묘엄존자탑 비문
경기도 양주시의 천보산 아래에 위치한 회암사의 무학대사 석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를 기리기 위해 그가 입적한 후
태종 때 세웠으나 순조 때 훼손당하자 1828년(순조 28년) 5월에 다시 세워졌다.
그 뒤로 무학대사 부도탑과 석등이 보인다.
朝鮮國王師 大曹溪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 塔銘 幷序
조선국 왕사 「대조계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탑명 병서(並序)
嘉善大夫 藝文舘 提學 同知經筵 春秋舘事 兼 判內膳寺事 臣 卞季良 奉敎撰 嘉靖大夫 檢校漢城尹 寶文閣提學 臣 孔俯 奉敎 書
「가선대부(嘉善大夫) 예문관 제학 동지경연 춘추관사 겸 판내선시사」(藝文舘提學 同知經筵 春秋舘事 兼 判內膳寺事)인 신(臣) 변계량(卞季良)이 교지(敎旨)를 받들어 비문을 지었고, 「가정대부(嘉靖大夫) 검교 한성판윤 보문각제학」(檢校 漢城尹 寶文閣 提學)인 신(臣) 공부(孔俯)가 왕명에 따라 비문을 썼다.
* 변계량(卞季良, 1369~1430) : 고려. 조선의 문신으로 조선 개국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집현전 대제학으로 20여 년 간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我太祖之元年冬十月 師以召至松京 太祖以是月 十一月 誕晨 具法服若器 封爲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 兩宗五敎 諸山衲子 皆在焉
태조 원년(1392년) 겨울 10월에 대사께서 왕의 부름을 받아 송경〔開城〕에 이르니 이달 11일은 태조께서 태어나신 날이다. 법복과 그릇을 갖추어 대사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禪敎) 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都大禪師) 묘엄존자」라는 호(號)를 바쳤다. 이때 양종(兩宗)과 오교(五敎)의 선승들은 거의 참석 하였다.
師陞坐 拈香祝釐已 竪起拂子 示大衆曰 這箇是三世諸佛說不到 歷代祖師傳不得底 大衆還會麼 若以心思口舌 計較說話者 何有吾宗
대사께서 법좌(法座)에 오르시어 향을 피우고 국리민복(國利民福)과 왕(王)의 만수무강을 축원한 뒤에 불자(拂子)를 세워들고 대중에게 보이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에는 삼세의 부처님들도 이르지 못하는 곳이며, 역대의 조사(祖師)들도 다가오지 못하는 경계(境界)이니 대중은 이를 아는가 모르는가? 만약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여 서로 견주고 살펴서 말하는 것으로써 종지(宗旨)를 삼는다면, 어찌 우리 종지가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 拂子 : 짐승의 털이나 삼(痲) 등으로 만든 일종의 총채로서 벌레를 쫓을 때 쓰는 도구로 수행자가 마음의 번뇌망상을 털어 버리는데 사용하는 상징적 의미의 불구(佛具). 후대에 와서는 조사(祖師)나 주지(住持)의 신성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 법구(法具)로 활용되고 있다.
復於上曰 儒曰仁 釋曰慈 其用一也 保民如赤子 乃可爲民父母 以至仁大慈 莅邦國 自然 聖壽無疆 金枝永茂 社稷康寧矣
다시 왕(王)에게 고하되, “유교에서는 인(仁)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를 주장하나, 그 쓰임은 하나인 것입니다. 백성을 보호하되 마치 갓난아이[赤子]와 같이 여겨야만 참으로 백성의 부모라고 할 수 있으며, 지극한 인(仁)과 큰 자비심으로 나라를 다스리셔야, 자연히 만수무강하실 것이며, 자손이 번성하고 사직(社稷)이 편안할 것입니다.
* 赤子 : 아직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벌거숭이 어린아이로 백성을 뜻함
金枝永茂 : 동궁을 왕의 자손들이 영원히 번성한다는 뜻
今當開國之初 陷於刑法者非一 願殿下 一視同仁 悉皆宥之 俾諸臣民 共臻仁壽之域 此我國家無疆之福也 上聞而嘉之 即宥中外罪囚
지금은 나라를 여신지가 얼마 되지 않아 형법(刑法)에 걸린 자가 많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모두 죄를 사면하여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천명(天命)대로 살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이는 우리 나라와 임금의 무궁한 복(福)이 될 것입니다.” 하셨다. 왕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겨 곧 전국 각 지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을 사면해주었다.
時韓山牧隱李文靖公 以詩贈師 有聖主龍飛天 王師佛出世之句 上以檜巖寺懶翁所居大道場 命師入焉 丁丑秋 造塔于寺之北崖 師師指空浮屠所在也
이때 본관이 (충청도의) 한산(韓山)인 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 이색李穡)이 시(詩)로써 대사를 찬양하였는데, 그 시 중에, “성군(聖君)은 하늘을 나는 용이요, 왕사(王師)는 세상에 태어난 부처.”라 하여 왕과 대사를 용(龍)과 부처[佛]에 비교한 구절이 있다.
태조께서 회암사(檜岩寺)는 나옹(懶翁)이 머물던 큰 도량이라 하시며, 대사에게 들어갈 것을 명(命)하셨다. 정축년(太祖 6, 1397년) 가을, 왕명으로 대사의 수탑(壽塔)을 회암사 북쪽 벼랑에 대사의 스승인 지공(指空) 대사의 부도가 있는 곳에 세웠다.
* 이색(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태조 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戊寅秋 師以老辭 歸居于龍門 壬午五月 今我主上殿下 又命入檜巖 明年正月 又辭 入金剛山 以乙酉 九月 十一日 示寂
무인년(太祖 7, 1398년) 가을, 대사께서 늙었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회암사를 떠나 양평 용문사(龍門寺)로 돌아가 기거하셨다. 임오년(太宗 2, 1402년) 5월, 지금의 주상이신 태종(太宗)께서 다시 회암사 주지로 명(命)하셨다.
다음해 1월 또 사임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을유년(太宗 5, 1405년) (4월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그 해 9월 11일에 그곳에서 入寂하셨다.
越三年丁亥冬 十有二月 厝師骨于檜巖之塔
3년이 지난 정해년(太宗 7, 1407년) 겨울 12월, 유골을 가져와 회암사 탑에 안치하였다.
又四年 庚寅秋七月 上王以太祖之志 言於上 上命臣季良 名其塔 且爲銘臣季良 謹按其弟子 祖琳所撰行狀 師諱自超 號無學 所居曰溪月軒 壽七十九 法臘六十一 俗姓朴氏 三岐郡人也 考諱仁一 贈崇政門下侍郎 母固城蔡氏
그로부터 4년이 지난 경인년(太宗 10, 1410년) 7월, 상왕(上王, 2대 定宗)께서 태조(太祖)의 뜻으로써 주상(主上, 太宗)에게 말씀하시니, 주상께서 신(臣) 계량(季良)에게 탑의 이름과 명(銘)을 짓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신(臣)이 대사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대사의 행장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사의 이름은 자초(自超)요, 호는 무학(無學)이며, 머물던 처소 이름은 계월헌(溪月軒) 이었다. 속세의 나이는 79세고, 불교에 귀의한 뒤의 나이[法臘]는 61세였다. 속성(俗姓)은 박(朴)씨이고 (경상도의) 삼기군(三岐郡) 출신이다. 아버지 인일(仁一)은 숭정문하시랑(崇政門下侍郎)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이다.
夢見初日射懷中 遂有娠 以泰定丁卯後 九月二十日生 始免褓襁 便行掃除 及就學 人莫敢先
어머니 채씨가 어느 날 밤 떠오르는 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을 해, 태정(泰定, 元나라 晉宗의 연호) 정묘(丁卯, 忠肅王 14, 1327년) 9월 20일에 대사가 태어났다. 강보를 벗어났을 때부터 집안 청소를 하였고, 취학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학도들 중에 아무도 그를 앞서지 못했다.
年十八 脫然有出世之志 依慧鑑國師 上足弟 小止禪師 薙髮具戒 至龍門山 咨法于慧明國師 法藏國師示法己 乃曰得正路者 非汝而誰 遂令居浮圖庵 一日庵中失火 師獨靜坐 如木偶人 衆異之
18세에 기쁘게 부처에게 귀의할 뜻을 품고는 혜감국사(慧鑑國師)의 뛰어난 제자 소지선사(小止禪師)를 은사로 삭발하고 스님이 된 뒤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후 용문산(龍門山)에 가서 혜명국사(慧明國師) 법장(法藏)께 법(法)을 여쭈니, 국사께서 법을 일러준 다음 “바른 길을 얻을 자가 너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시며 그 절의 작은 암자인 부도암(浮圖庵)에서 머물게 하셨다. 어느 날 암자에 불이 났는데, (대중스님들은 모두 피난하였으나) 스님께서만 나무 인형같이 고요히 앉아 계시니 대중이 기이하게 여겼다.
* 慧明國師 法藏國師 : 혜명국사와 법장국사가 동일 인물인지 불분명하나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丙戌冬 因看楞嚴經有悟 歸以告其師 師加稱嘆 自是廢寢忘湌 專於參究 己丑秋 抵鎭州吉祥寺居焉
병술년(忠穆王 2, 1346년) 겨울, 「능엄경(楞嚴經)」을 보시고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께서 더욱 칭찬하고 감탄하셨다. 이때부터 침식을 잊으시고 참선하며 진리를 연구하는데 전념하셨다. 기축년(忠定王 1, 1349년) 가을, 진주(鎭州, 오늘날 충북 鎭川) 길상사(吉祥寺)로 가서 머물렀다.
壬辰夏 住妙香山金剛窟 功益進 或睡則若有擊鍾磬以警焉者 是時釋然了悟 汲汲有求師 就質之意
임진년(恭愍王 1, 1352년) 여름, 묘향산(妙香山) 금강굴(金剛窟)에 머무는 동안 공부가 더욱 깊어져 혹시 졸기라도 하면 종과 경쇠를 쳐서 잠을 깨우는 일이 있는 듯 했다. 이때 미심쩍었던 것이 환히 풀림을 깨닫고, 서둘러서 자신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스승을 찾고자 하였다.
癸巳秋 挺身走燕都 叅西天指空禮拜起云 三千八百里 親見和尚面目 空云 高麗人都殺了 盖許之也 衆乃大驚
계사년(恭愍王 2, 1353년) 가을, 큰 뜻을 품고 분연히 일어나 연경(燕京, 오늘날 北京)으로 가서 중국에 와 있던 인도인(印度人) 지공(指空) 스님을 뵙고,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3,800리(1,520㎞) 밖에서 법문을 듣고자 화상(和尚)의 얼굴을 직접 뵙습니다.”고 하셨다. 그러자 지공(指空)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려 사람들을 모두가 죽이겠구나!” 하셨으니, 이는 스님의 입실(入室)을 허락하신 것이다. 대중들이 이에 크게 놀랐다.
次年甲午 正月 到法泉寺 參懶翁 懶翁一見而深器之 遊霧靈 歷五臺再見懶翁於西山靈巖寺 留數載 其在定也
다음해 갑오년(恭愍王 3, 1354년) 정월, 元나라 연경(燕京)에 있는 법천사(法泉寺)로 가셔서 그곳에 와계시던 나옹(懶翁) 스님을 처음으로 만나 뵈었다. 나옹(懶翁)께서도 스님을 한번 보시고도 그릇이 큰 인재임을 아셨다. 무령(霧嶺, 중국의 地名)을 유람하고 오대산(五臺山)을 거쳐 서산(西山, 중국 江西省 소재) 영암사(靈巖寺)에서 다시 나옹(懶翁)스님을 만났다. 그곳에서 여러 해를 머물렀다.
至有當食而不知者 翁見之曰 汝却死了耶 師笑而不答 翁一日 與師坐階上 問曰 昔趙州與首座 看石橋 問是甚 麼人造 首座答云 李膺造 州云向甚麼處 先下手 首座無對 今有人問 爾如何祗對 師即以兩手 握階石以示之 翁便休去
그가 한번 선정(禪定)에 들면 공양할 때가 되어도 아시지 못하시니, 나옹(懶翁)께서 보시고, “너 이미 죽었느냐?”라고 하니 대사께서는 빙그레 웃기만 하고 대답치 않으셨다.
나옹(懶翁)께서 하루는 대사와 뜰에 앉아서 묻기를, “옛날에 조주(趙州)스님이 수좌(首座)와 함께 돌다리를 보고, ‘누가 만들었을까?’ 하니, 수좌(首座)가, ‘이응(李膺)이 조성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주(趙州)가 다시, ‘어디를 먼저 시작했을까?’ 하니, 수좌(首座)가 대답치 못했다.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네게 이 일을 묻는다면 뭐라 대답하겠는가?” 하시니 대사께서 두 손으로 섬돌〔階石〕을 잡아 들어 보이니 나옹(懶翁)께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其日夜分 師入翁室 翁云 今日乃知吾不汝欺也 後謂師曰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爾與我一家矣 又曰道之在人 如象之牙 雖欲藏之 不可得也 他時 爾豈爲人前物乎
그날 밤 대사께서 나옹(懶翁)의 방에 드시니, 나옹(懶翁)이 이르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너를 속이지 못하는 줄 알았다.”라고 하였다. 그 후 대사에게 이르되 “서로 아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한데 능히 마음을 아는 자가 몇 사람인가. 너와 나는 일가(一家)이다”라 하였다.
또 “도(道)를 가진 사람은 마치 코끼리의 어금니와 같아서 비록 아무리 감추고자 하나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것과 같다. 훗날 네가 어찌 다른 사람들의 앞에 서는 존재(存在)가 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師之質其所得 殆無可疑 然而遊歷山川 又訪師友之志 盖未己也 將游江浙 適南方有變 路梗乃止
대사께선 그간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미심쩍은 부분을 거의 풀었으나,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스승과 도반(道伴) 찾기를 계속하였다. 장차 강절(江浙, 오늘날 중국의 江西省. 浙江省) 지방으로 떠나고자 하였으나 그 무렵에 남방(南方)에 변란이 일어나 길이 막혀 참방노정(參訪路程)을 그만 중지하게 되었다.
丙辰夏 欲東還 告辭 翁手書一紙 送行曰 觀其日用 全機與世有異 不思善惡聖邪 不順人情義理 出言吐氣 如箭鋒相拄 句意合機 似水歸水 一口呑却賓主句 將身透過佛祖關 俄然告行 予以偈送云
병신년(恭愍王 5, 1356년) 여름, 귀국에 앞서 찾아가 인사를 드리니, 나옹(懶翁)께서는 편지 한 통을 써주시고는 전송하시기를,
“날마다 움직이는 전체적인 기틀과 세상살이는 일반 세인(世人)들과는 다름이 있다. 그러니 착함과 악함, 성스러움과 사악함을 생각지 말고, 인정이나 의리에도 끌려가지 마라. 말하고 기(氣)를 뱉는 것을 마치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과 같이 준엄(俊嚴)하게 하며, 구(句)의 뜻이 기(機)에 합(合)함은 마치 물이 다시 물로 돌아가 합일(合一)되는 것과 같이 하라. 한 입으로 손님과 주인의 구절을 삼켜버리고, 몸으로 부처와 조사(祖師)의 관문을 넘어서라. 갑자기 떠난다 하니, 게송(偈頌)으로 전송하겠다.” 하셨다.
* 賓主句 : 賓은 손님, 主는 주인. 主와 客에 대한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의 독창적 단어로 佛法의 지혜로 작용하는 안목을 구족하게 하기 위한 선문답의 하나
已信囊中別有天 東西一任用三玄 有人問爾參訪意 打倒面門更莫言
‘이미 주머니 속에 별천지(別天地)가 있음을 믿었으니,
동서(東西)로 자유롭게 다니면서 삼현(三玄)을 수용(受用)하라.
만약 누가 너에게 선(禪)이 뭐냐고 묻거든
얼굴을 때려주고 다시 말하지 말라.’
* 삼현(三玄) : 임제의현(臨濟義玄) 스님이 학인(學人)을 위해 설정한 화두(話頭)의 하나
師旣還 懶翁 亦以指空三山兩水 授記 還國 住天聖山元曉庵 己亥夏 往見 翁以拂子與之
대사께서 돌아오신 뒤에, 나옹(懶翁)께서도 역시 지공(指空) 선사로부터 삼산양수(三山兩水)의 위치에 절을 창건하라는 수기(授記)를 받고 돌아와 양산 천성산(天聖山, 오늘날 千聖山) 원효암(元曉庵)에 머물러 계셨다. 기해년(恭愍王 8, 1359년) 여름에 대사께서 찾아뵈니, 나옹(懶翁)께서 불자(拂子)를 주셨다.
翁在神光寺 師亦徃焉 翁之徒有忌師者 師知而去之 翁謂師曰 衣鉢不如言句 以詩遺師云 閒僧輩 起人我心 妄說是非 甚不然也 山僧以此四句之頌 永斷後疑
나옹(懶翁)께서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머물 때 대사께서도 가서 친견하고 그곳에서 함께 주석하셨다. 그때 나옹(懶翁)의 제자 중에 대사를 미워하는 자가 있어 이를 알고는 떠나셨다. 이때 나옹(懶翁)께서 대사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는 것이 직접 일러주는 말이나 글만 못하다.” 하시고 시(詩)를 지어 주시며, “수행도 않고 계(戒)를 지키지 않는 중들이 너와 나를 구별하는 마음을 일으켜 시비(是非)를 일삼고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산승(山僧)은 이 네 구절의 게송(偈頌)으로 남아있는 의심을 영원히 끊으라.”하셨다.
分襟別有商量處 誰識其中意更玄 任爾諸人皆不可 我言透過刼空前
헤어질 때 나누어야할 말이 있으니
누가 그 뜻이 극히 현묘함을 알 것인가.
너희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하겠지만
나의 말은 공겁을 넘어서리라.
師入高達山 卓庵自守 辛亥冬 前朝恭愍王 封懶翁爲王師 翁住松廣 以衣鉢付師 師以偈謝
대사께서 임실 고달산(高達山)에 암자를 짓고 정신하셨다. 신해년(恭愍王 20, 1371년) 겨울, 고려 공민왕이 나옹(懶翁)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송광사(松廣寺)에 거주하시던 나옹(懶翁)께서 의발(衣鉢, 가사와 바리때)을 대사에게 보내시니, 대사께서 게송(偈頌)을 지어 감사의 인사를 하셨다.
丙辰夏 翁移錫檜巖 大設落成會 馳書召師 以充首座 師力辭 翁曰多管 不如多退 臨濟德山 不做首座來 俾居便室 翁逝矣 師遊諸山 志在晦藏 不欲人知
병진년(禑王 2, 1376년) 여름, 나옹(懶翁)께서 회암사(檜巖寺)로 옮기시고 중수(重修)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크게 열었다. 이때 서찰로 대사를 불러 수좌직(首座職)을 맡기려 하였다. 대사께서 굳이 사양하시니, 나옹(懶翁)께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물러남이 많은 것보다는 못하지. 임제(臨濟)나 덕산(德山)도 수좌 소임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하시고는 별실에 머무르게 하셨다. 나옹(懶翁)께서 1376년 12월 24일 유시(酉時)에 세상을 떠나시자, 대사께서 여러 산을 돌아다니셨다. 그 뜻은 자신의 학식이나 재주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前朝之季 召以名利 至欲封爲師 師皆不至 卒有壬申之遇 師之去就 豈偶然哉
고려조 말기에 대사를 초빙하여 국사(國師)로 책봉하려고까지 하였으나 대사께서는 모두 사양하셨다. 마침내 임신년, 태조(太祖) 임금과 만남이 있었으니 대사의 거취를 어찌 우연한 것이라 하겠는가.
歲癸酉 太祖欲相土建都 命師隨駕 師辭 太祖謂師曰 古今相遇 必有因緣 世人所卜 豈若道眼 巡幸鷄龍山 及新都 師皆扈從
계유년(太祖 2, 1393년)에 태조께서 왕도(王都)를 세울 터를 살펴보고자 대사에게 동행을 청하였으나 대사께서 사양하셨다.
태조께서 대사에게, “예나 지금이나 만남엔 반드시 인연이 있소이다. 일반 사람이 고른 것이 어찌 대사께서 고른 것에 미치겠소이까?” 하자, 계룡산(鷄龍山)과 신도안(新都岸)의 순행(巡幸) 길에 따라 나섰다.
其年九月 師以先師指空懶翁二塔名 及掛懶翁眞事 奉塔名於檜巖 大設掛眞佛事於廣明寺 自製眞贊云 指空千歛平山喝 選擇工夫對御前 最後神光遺舍利 三韓祖室萬年傳
그해 9월, 대사께서 선사(先師)이신 지공(指空)과 나옹(懶翁) 두 분을 모신 탑(塔)의 이름과 나옹(懶翁)의 영정(影幀)을 거는 불사(佛事)를 받들었다. 회암사(檜巖寺)에선 탑에 이름을 새기시고, 개성 광명사(廣明寺)에선 영정(影幀)을 거는 불사(佛事)를 크게 여셨다. 스스로 영정(影幀)에 대한 찬미 글을 지어,
“지공(指空)의 천 개의 검(劒)과 평산(平山, 중국 스님 이름)의 갈(喝)을 받고, 임금 앞에선 승려들의 공부선(工夫選, 僧科를 말함)을 했도다. 마지막까지 신비로운 광채, 사리를 남기시니, 삼한(三韓)의 조실(祖室)로, 영원히 전해지리라.” 하셨다.
十月 國設轉藏佛事於演福寺 命師主席 師自戊寅辭退之後 倦於待衆 雖以上命 復住檜巖 旋入金剛山眞佛庵
10월에 나라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옮기는 불사(佛事)를 개성 연복사(演福寺)에서 베풀고, 이를 대사께서 주관토록 하셨다. 대사께서 무인년(태조 7, 1398년)에 사퇴하신 뒤로는 대중들을 대하시는 것을 스스로 꺼려하셨다. 비록 임금의 명에 따라 다시 회암사(檜巖寺)에 계시도록 하였으나 곧 바로 금강산 진불암(眞佛庵)으로 들어가셨다.
乙酉春 有微疾 侍者欲進醫藥 師却之曰 八十有疾 何用藥爲 夏四月 移于金藏庵 卽其示寂處也
을유년(太宗 5, 1405년) 봄에 가벼운 병을 앓아 모시는 사람이 탕약을 올리고자 하니, 대사께서 이를 물리치시면서, “80에 든 병인데, 어찌 약을 쓰겠느냐?”하시고, 4월에 그리 멀지않은 금장암(金藏庵)으로 옮기시니, 입적하신 곳이다.
八月 義安大君 致書 師答書 有山居邈爾 會謁無期 他時異日 佛會相逢 謂大衆曰 不久吾逝矣 已而果然 始師疾革
8월, 태조의 아들 의안대군(義安大君)이 편지를 보내와 뵙기를 청하였으나 대사께서, “먼 산 중에 있어 길이 멀어 만날 시기를 약속할 수 없으니 먼 훗날 부처님의 회상(會上, 법회)에서나 뵙겠습니다.”라고 답서하셨다. 어느 날 대중에게 이르기를 “머지않아 나는 떠날 것이다.”하신지, 얼마 뒤에 병환이 깊어 졌다.
* 已而 : ‘조금 있다가’라는 뜻(而已는 ‘~뿐이다’라는 뜻)
僧問四大各離 向甚處去 師云不知 又問 師厲聲云不知 又僧問和尙病中 還有不病者也無 師以手指傍僧 又問色身是地水火風 摠歸磨滅 那個是眞法身 師以兩臂相柱云 這個是一個 答己寂然而逝 夜半也
어떤 스님이 “몸은 흩어져 어느 곳으로 갑니까?”라고 여쭈었다. 대사께서 “모른다.”하시니, 또 여쭈었다. 대사께서 큰 소리로 “모른다.”하셨다. 또 어떤 스님이 “화상(和尙)께선 병이 드셨는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쭈니, 대사께서 곁의 스님을 가리켰다. 스님이 또 “몸은 흙, 물, 불, 바람(地水火風)이니 결국은 사라집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대사께서 두 팔을 위로 세우고 “이 두 팔이 곧 한 개.”라고 하시고는, 조용히 한 밤중에 입적하였다.
時華嚴釋賛奇 在松京法王寺 夢見師立空中佛頂蓮花之上 佛與蓮花 其大彌天 覺而心異之 與寺衆說其夢 聞者疑其非常 未幾訃至 即其夢時也
그때 화엄종의 찬기(賛奇) 스님께서 송경(松京, 현 개성) 법왕사(法王寺)에 계셨다. 꿈에, 대사께서 공중에 있는 부처님의 정수리 연꽃 위에 서 있었는데, 부처님과 그 연꽃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깬 뒤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절 안의 대중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듣는 이들도 모두 범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서 부고(訃告)가 왔으니, 대사께서 돌아가셨을 때가 바로 그 꿈을 꾼 시각이었다.
師所著曰 印空唫 文靖公 序其端 印成大藏 安于龍門 文成公跋其尾
대사께서 저술하신 「인공음(印空唫)」에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께서 서문(序文)을 쓰시고, 대장경으로 인출(印出)하여 용문사(龍門寺)에 봉안하니, 이 역시 문정공(文靖公)께서 그 끝에다 발문(跋文)을 쓰셨다.
師性尙質 不喜文飾 自奉甚菲 餘輒施捨 甞自言曰 八萬行中 嬰兒行爲第一 凡所施爲 無不相若者 且接人之恭 愛物之誠 出於至心 非有所勉 盖其然也
대사의 성품은 순박함을 좋아하시고 꾸미는 것을 즐기지 않으셨다. 스스로 낮추어 항상 공손하였으며, 먹는 음식은 매우 소박하게 하시고 남는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남에게 주셨다. 대사께서 일찍이 “팔만가지 수행 중에서 천진(天眞)한 영아행(嬰兒行)이 으뜸이라.” 하셨는데, 모든 행동을 함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처럼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의 공손함과 중생을 사랑하는 정성은 모두가 지극하신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억지로 힘쓰신 바가 아니니, 대체로 천성(天性)이 그러하셨던 것이다.
臣 季良 謹拜稽首而名其塔曰 慈智洪融 且系以銘 銘曰
신(臣) 계량(季良)은 삼가 절을 올리고 머리를 숙여 탑의 이름을 「자지홍융」(慈智洪融)이라 하고, 이어 명(銘)을 올립니다.
師道之卓 匪夷所思 禪覺之嫡 聖祖之師 師在平居 嬰兒之如 具眼之遇 箭鋒相柱 一鉢一衣 謙謙自卑 尊崇無對 若固有之 或去或就 先見不苟 天錫佛壽 七旬有九 來也何從 日射懷中 去也何向 蓮花之上 處處其徒 圖表厥跡 兩間之堅 無久惟石 刻此銘章 垂示罔極
닦고 닦아 우뚝하신 스님의 도덕
平凡 人生 凡夫들은 알 수가 없네.
平山處林 法을 이은 선각(禪覺, 懶翁禪師의 시호)의 적손(嫡孫)
朝鮮國을 開國하신 太祖의 스승.
스님께선 平常時의 모습 그대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꾸밈이 없네.
눈이 푸른 宗師 만나 法을 나눌 땐
삼엄하게 활과 칼이 버팀과 같네.
평생 동안 소지품은 삼의일발(三衣一鉢)뿐
온화하고 겸손함은 상불경보살(尙不輕菩薩).
존중(尊重)함은 본체만체 돌보지 않고
마치 본래부터 타고나신 그 天性.
가나오나 어딜 가든 모두가 내 집
善知識이 있는 곳엔 원근(遠近)을 不問.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불수(佛壽)를 받아
世俗 나이 79세요 법랍(法臘)은 61.
태어날 땐 어디에서 떠나 왔는가
아침 해가 떠오르는 태몽(胎夢)을 꿨고.
돌아갈 땐 어딜 향해 가시었는가.
空中의 불정연화(佛頂蓮花)에 서서 계시다.
전국 곳곳 문도들이 힘을 합하여
祖琳大師 行狀 모아 주청(奏請)하였네.
天地之間 萬物 中에 굳은 것으론
돌보다 더 오래감은 보지 못했네.
곱게 갈은 비석돌에 비문(碑文)을 새겨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영원하소서.
崇禎紀元後 四戊子 五月 日 立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순조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附 無學王師碑 陰記
부 무학왕사비 음기
東國三祖 師指空懶翁無學 浮圖及事蹟碑 在楊州天寶山檜巖寺之北崖 指空懶翁兩碑 牧穩李文靖撰 韓脩權仲和書 麗季所竪也
우리나라의 세 분의 조사(祖師)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의 사리를 안치한 탑과 사적비(事蹟碑)가 양주(楊州)의 천보산(天寶山) 북쪽 벼랑에 있으니, 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의 두 비는, 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이 글을 짓고, 한수(韓修)와 권중화(權仲和)가 써서 고려 말에 세운 것이다.
無學碑 卽我太宗踐祚之十年 庚寅奉上王命命詞 臣卞季良製孔俯書 幷竪于兩師碑塔之下
무학(無學)의 비는 태종께서 즉위하신지 10년(太宗 10, 1410년)되던 해인 경인년에, 왕명을 받들어 문신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가 써서 두 분 스승의 탑 아래에 세웠다.
寺近廢而碑獨存 今上二十一年辛巳 有李膺峻者與術人趙大鎭 毀浮圖而瘞其親 指空無學二碑俱被撞碎
그러나 지금은 절은 폐허가 되었고 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금상 21년(純祖 21, 1821년) 신사년에 이응준(李膺埈)이란 사람이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과 함께 사리탑을 헐은 뒤 자기 아버지를 묻고,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두 비를 두들겨 부쉈다.
道臣聞于朝上震駭 李與趙幷命島配 掘其瘞仍敎曰 所碎之碑國初所命 至今日而不能保存者亦甚怵然 分付畿營更爲竪建 如是處分豈爲釋敎而然 一則爲國初所重也 一則爲國綱也 於是自度支劃錢三千兩出付 僧德俊等使之重建而 畿營主其事
(경기도)관찰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주상(純祖)께서 놀라시어 “이응준(李膺埈)과 조대진(趙大鎭)을 섬으로 유배하고, 아울러 이응준의 아비를 묻은 무덤을 파버리라”고 명(命)하셨다. 이에 교시(敎示)하시기를
“부서진 비는 건국 초기 왕명에 의한 바인데 이제와 보존치 못하게 되었으니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라며, 경기 감영에 분부하여 다시 세우도록 하셨다.
이와 같은 처분이 어찌 불교를 위한 것이겠는가? 하나는 곧 건국 초기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요. 하나는 곧 국가의 기강(紀綱)때문이다.
이에 경기 감영이 주도하여 기획하였으니 돈 삼천 량을 출연하여 승(僧) 덕준(德俊) 등에게 부촉(付囑)하여 중건(重建)토록 하고, 경기 감영에서 그 일을 주관하였다.
* 도신(道臣) : 관찰사
* 진해(震駭) : 놀라고 두려워 함
* 출(怵) : 슬플 출. 두려워할 출
指空碑屬文靖後孫牧使義玄改書 無學碑碎不甚模舊刻孔俯書刻之 戊子秋 工始就竪于舊址
지공(指空)의 비는 문정공(文靖公)의 후손인 목사(牧使) 의현(義玄)에게 다시 쓰게 하고, 무학(無學)의 비는 많이 훼손되지 않았으므로 예전에 새긴 공부(孔俯)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기도록 하였다. 무자년(純祖 28, 1828년) 가을에 공사가 비로소 끝나 옛터에 세웠다.
盖指空懶翁自中國來演釋敎於麗季 無學師其道在我國初定鼎時其功多有可紀者
檜巖寺之同竪三碑良以此也 于今四百餘年之後忽遭破毀抑亦佛家之一刧而
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은 중국으로부터 와서 고려 말에 부처의 가르침을 폈다. 무학(無學)은, 그들의 도(道)를 이어받아 개국 초기 수도(首都)를 정할 때 공로가 많았으니, 기록으로 남길만한 분이다. 회암사에 세 분의 비를 함께 세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에 갑자기 비가 훼손당한 것은, 이 또한 불교의 한 수난이리라.
乃我聖上惕然憾懷 爰命有司一擧而重新之使 湮晦之古蹟賴而復顯 其傳益遠 豈不有光於大聖人追舊紀功之盛典歟
상감께서 지난날의 감회를 서글퍼하시며, 담당 관리에게 그윽이 명하시어 한 번에 거듭 새롭게 하도록 하셨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던 옛 자취가 이 때문에 다시 훤해지고 더욱 멀리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 어찌 훌륭한 성인의 옛 자취를 쫓고 공로를 기념하는 성대한 의식이 아니겠는가?
茲具顚末記之石右
이에 전말을 갖추어 비의 뒤에 기록하노라.
崇祿大夫行龍驤衛上護軍 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原任奎章閣提學 五衛都摠府 都摠管 世子右賓客 金履喬 追記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용양위 상호군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원임 규장각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우빈객」(行龍驤衛兼上護軍弘文舘大提學藝文舘大提學知成均舘事原任奎章閣提學都捴府都摠管世子右賓客) 김이교(金履喬)가 덧붙여 쓰고,
嘉善大夫 京畿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水原府留守 開城府留守 江華府留守 廣州府留守 巡察使 金鐮 書
「가선대부(嘉善大夫) 경기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순찰사」(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水原留守開城留守廣州留守巡察使) 김겸(金鎌)이 쓰다.
崇禎紀元後 四戊子 五月 日 立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純祖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主事都監董 仁峯堂 德俊 奉恩寺 首禪宗判事 釋會善 城庵堂 永哲
주사도감동 인봉당 덕준 봉은사 수선종판사 회선스님 성암당 영철
副看役 奇庵堂 義寬 前判事 喚虛堂 等還
부간역 기암당 의관 전판사 환허당 등환
物力次知 嘉善 熙行 奉先寺 首敎宗判事 平松堂 普蔡
물력차지 가선 희행 봉선사 수교종판사 평송당 보채
南漢都摠攝 翠峯堂 寬活 公員 嘉善 釋最仁
남한도총섭 취봉당 관활 공원 가선 최인스님
中軍 嘉義 釋義察 道庵堂 聖麒
중군 가의 의찰스님 도암당 성기
北漢都摠攝 嘉義 釋性黙 影漳堂 玉印
북한도총섭 가의 성묵스님 영장당 옥인
中軍嘉義 釋道聞 秋潭堂 三學
중군가의 도문스님 추담당 삼학
龍珠寺都摠攝諸方大法師肯俊 印城堂宜賢
용주사 도총섭 제방대법사 긍준 인성당 의현
中軍 嘉善 釋正愚 山人 信瓊
중군 가선 정우스님 산인 신경
刻手 朴枝春
각수 박지춘
石手 朴宗錫 文守兆.
석수 박종석 문수조.
☞ 이 비문에 대한 해설문은 관련 자료와 불교학자 등의 자문을 거쳐 작성한 것입니다. 이 해설문에 대해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그 의견을 올려 주시기 바라며, 앞으로 더 보완해 나갈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