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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공파에 대하여 (1) 참판공 할아버지
사의공 16대손 秉錫 (醫學博士, 編輯委員)
고려말에 함안의 모곡으로 은거하신 모은공(휘 午)의 후손은 함안의 망족(望族)으로서 육백년이 지난 현재 우리 재령이씨의 8할 이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손자이신 사의공(司議公)의 후손은 함안에서 창원·진해를 위시하여 진주와 서부경남 일원에 주로 세거하여 왔으며 그외 밀양서가정, 고령월막, 광양, 남원, 장수 등지에도 분파되어 있다. 사의공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족보와 묘갈명(墓碣銘)이 유일하게 전하여 오고 있을 뿐 생졸년도와 배위의 본관은 미상으로 되어 있다. 이에 필자는 함주지(咸州誌)를 비롯한 고문서와 타 성씨의 족보 내용을 정리하여 사의공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이를 3-4회에 걸쳐 나누어 엮어 보았다.
모은공의 아드님은 참판공(휘 介智, 1415∼1487)이시고 진양하씨 목사공(河敬履)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4녀을 낳았다. 네 아드님중 장자(근재공, 휘 孟賢, 1436∼1487)와 차자(율간공, 휘 仲賢, 1449∼1508)는 1460년(세조 6년)과 1476년(성종 7년)에 각각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의 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다음은 휘가 숙현(叔賢)이고 季子가 사의공(司議公)이시다. 황해도관찰사 근재공의 현귀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할아버지이신 모은공은 병조참의에 각각 증직되었다.
사의공의 휘는 계현(季賢)이요 자는 술성(述聖)이다. 공은 생원에 학행 천(薦)으로 장례원 사의(司議)를 제수 받았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독실했으나 불행하게도 셋째형의 면옥(寃獄)에 대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별세하셨다. 공이 돌아가신지 200-300년이 지난 후의 족보와 묘갈명이 공의 유일한 기록이었다.
참판공의 장인이신 성주목사 하경리(河敬履)는 진주의 수곡이 고향으로서 필자의 본가와 가깝다. 목사공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하충(河漴)은 145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역임하였으며, 세 따님은 진주인 유봉(柳菶), 참판공 그리고 밀양인 오곡(梧谷) 손수령(孫壽齡,오곡공파조)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참판공의 배위에 대한 행적은 함주지와 밀암선생문집의 가세고사(家世故事)편에 기록되어 있다. 목사공의 형은 양정공 하경복(河敬復,1377∼1438)장군으로 함길도병마절제사 등을 15년간 수행하였기 때문에 노모를 공양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의 특별한 배려로 목사공에게 진주와 가까운 아홉 고을의 수령을 맡겼다. 사의공의 외가는 진주 수곡이지만 근재공은 외조부 목사공이 사천군수를 맡을 때인 1436년에 사천의 현아(縣衙)에서 태어나셨다.
참판공의 넷 딸은 성산인 署令 이의인(李依仁), 선산인 兵使 김치성(金致誠), 김해인 別侍衛 허원질(許元質), 순흥인 안창공(安昌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참판공의 사위(婿)들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서령 李依仁은 함주지에 상세히 기록된 정무공(靖武公) 李好誠(1397∼1467)의 아들이며, 점필재 金宗直(1431∼1492)의 시집에 〈함안 이 서령 의인의 새 집에서 사성의 운에 차하다[咸安李署令依仁新居次師聖]〉란 시가 전하는데, 師聖은 곧 서령의 큰 처남인 근재공의 자(字)이며 근재공·점필재와 함께 가깝게 지낸 것으로 생각된다. 서령의 아들은 만호 이희조(李希祖)인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며, 다음에 설명할 종제 이순조(李順祖)의 후손들이 함안의 성산-광평이씨 집안이다.
병사 金致誠은 아들이 없고 따님 한분만 두었는데 함주지에 기록된 현감 오석복(吳碩福,1455∼1533)의 처 일선김씨(一善金氏)이니 참판공의 외손녀이자 사의공에게는 생질녀(甥姪女)가 된다. 부인은 무남독녀로 어릴 때 외롭게 자라서 고창오씨(高敞吳氏) 집으로 시집왔으며 부녀의 법도가 단정하고 제사(祭祀)에 치성을 다하고 시부모를 효도하며 섬겼다. 또한 평생 털끝만큼이라도 남의 것을 해롭게 한 일이 없었으나 항상 형제가 없는 것을 통탄하여 매월 초에는 정성을 들여 새벽기도를 올려 나에게 자식을 많이 점지하소서 하며 빌었더니 나이 70세에 아들이 둘에 손자가 30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부인의 아들 오언의(吳彦毅,1494∼1566)는 이퇴계(李滉, 1501∼1570)선생의 숙부 송재공(松齋公 李瑀)의 문하에서 수년간 학문한 후에 전의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곧 송재공의 사위이다. 계사년(1533년) 봄에 퇴계선생이 남쪽 고을을 순방 중에 모곡에 들러 의령공(吳碩福)을 찾아 뵌 이야기와 퇴계선생의 장인 허 진사(許瓚, 1481∼1535)가 의령에서 생신잔치를 했을 때 돌아가는 길에 오현감과 갑자기 시냇가에서 술상을 차린 이야기가 함주지에 실려 있고, 竹齋 또는 三友臺에 대한 詩가 퇴계선생문집에 실려있는데 죽재는 곧 의령공의 호이다. 부인의 증손자는 우리가 잘 아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에 창의한 죽유(竹牖) 오운(吳澐,1540∼1617)이며 증손녀가 김해 관천공(휘 大亨)의 배위 오씨이다. 죽유는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부윤의 관직까지 지내고 문집을 남겼으며 관천공행장을 지은 분이다.
별시위 許元質은 후사가 없어 기록이 미비하나, 백형 송와 허원필(許元弼)은 후손이 번성하여 고성과 합천에 많이 살고 있으며, 중형은 의령의 김해허씨 집안을 이룬 예촌 허원보(許元輔,1455∼1507)이며 그 손녀가 퇴계선생의 배위가 됨으로서 퇴계선생의 문집에 그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
참판공의 넷째 사위는 충순위 安昌恭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순흥안씨는 삼대파가 있는데 함안에는 주로 제3파가 많이 살고 있으나 충순위는 제1파 중 직장공파로서 처가인 모곡의 담안 서편에 터를 잡고 살았다. 생졸연대는 정확히 알수가 없지만 별시위(別侍衛)와 함께 사의공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충순위는 2남 2녀를 두었다. 증손자 竹溪 안희(安熹)는 1585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죽계문집이 전하는데 묘갈명은 밀암선생의 증손 진사공(進士公, 휘 宇錥)이 지었다. 함안의 두릉서원에 향사되었다.
충순위의 두 딸은 참판공의 외손녀로서 각각 이순조(李順祖, 1475∼1534) 이란(李鸞)에게 출가하였다. 이순조는 앞에 언급한 이희조의 종제로서 1503년에 무과에 올라 현감을 하였으며 손자대에는 함주지의 편집에 참여한 황곡(篁谷) 이칭(李偁)를 비롯하여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여 함안의 광평이씨 가문의 중심을 이루었다.
李鸞의 선대는 원래 수원에 살았으나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조부가 산청군 단성으로 은거한 후 공이 기묘사화(1519년)때에 이곳 산인면 모곡의 수동으로 이거하여 함안의 여주이씨의 일문을 이루었다. 이분의 질녀(姪女)는 우리 가문으로 출가한 후 시모를 섬겨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시모가 노환에 전복이 먹고 싶다고 하자 전복을 구하고자 하는 효성에 하늘이 감탄했는지 담안의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는 복정(鰒井)의 유래를 전하게 한 주인공이시다.
이상과 같이 우리 재령이씨는 함안에서 흔히 조·이·안(咸安趙氏·載寧李氏·順興安氏)이라 불리워진 3대 대성(大姓)으로 살아왔으며 인척(姻戚) 또한 함안과 진주의 명문가 들이며 선비의 가문이라 하겠다.(계속)
사의공파에 대하여 (2) 司議公할아버지
사의공 16대손 秉錫 (醫學博士, 編輯委員)
지난호의 참판공(휘 介智, 1415-1487) 할아버지에 이어 이번에는 사의공 할아버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공의 생졸년도는 미상으로 되어 있다. 중형 율간공께서 1449년에 태어나시고 셋째형에 이어 사의공과 누이의 생년도는 아마 1450년대 후반기 이후가 아닌가 추측된다. 사의공의 별세하신 졸년도(卒年度)는 미상이라 되어 있으나 《함주지(咸州誌)》에 기록된 넷째 아드님 대산처사공(휘 琠, 1502-1579)편에 나이 9세에 연달아 부모를 여의고(年九歲連失怙恃)라 했으며, 중종 9년(1514년)의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함안의 토호(土豪) 李季賢"의 내용을 참고하면 김안국이 경상도 경차관으로 간 중종 5년(1510년)에 별세하신 것이 확실하다.
공의 배위는 부사 이맹지(李孟枝)의 따님으로 본관과 생졸년도는 미상으로 되어 있지만 역시 졸년도만 1510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간송 조임도(澗松 趙任道,1585∼1664)가 저술한 《金羅傳信錄》에 아드님의 외가가 진주 정수동(丁樹洞)이라 했으니 丁樹介는 현재의 이반성면 평촌이다. 이곳에 본관 미상의 개천군수 이계흥(李繼興)과 합천이씨가 세거한 기록이 있으나 배위는 어느 李氏인지 옛 진양지와 타성의 족보 등 문헌에서 고증할 수가 없고 청주한씨와 청송심씨가 주로 살아 왔다. 그러나 사의공의 둘째 아드님과 손자의 묘소가 이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공의 많은 후손들이 진주 등지에 살고 있는 연유가 되는 지역이다.
사의공은 슬하에 4남 1여를 두었는데, 네 아드님의 휘는 변(玣) 침(琛) 종(琮) 전(琠)이고 따님은 윤달명(尹達溟)에게 출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사마방목(司馬榜目)을 고찰해보면 생원·진사에 합격한 분이 거의 대부분 사의공의 손자와 증손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분들을 열거하면 喜精(1549년 生員), 喜益(1558년 進士), 喜中(1558년 生員), 喜弼(1568년 生員), 喜萬(1570년 進士), 禮勛(1582년 生員) 景勛(1589년 進士) 義勛(生員)등 8명에 이른다. 또 喜弼과 喜誠은 遺稿를 남겼다고 하였으나 전하지 않으며 弘勛 純勛(개명 蕃) 德勛(개명 蔶)은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나라에 충성한 증손자들이다. 이렇게 많은 손자들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막내아드님인 대산처사공을 비롯하여 인척관계의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집의 조삼(趙參)·헌납 한여철(韓汝哲)등의 영향이 컷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녀들의 혼인은 함안조씨 광주안씨 남원양씨 청주한씨 무송윤씨의 집안과 맺었으므로 이들 가문을 알아보자.
함안조씨인 生六臣의 한 분 漁溪 조려(趙旅)선생의 후손들은 함안을 위시하여 서부경남 일원에 많이 살고 있다. 선생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해 함안의 원북으로 물러나 일생동안 독서와 낚시로 소요하면서 은거하였는데 선생의 손자 조순(趙舜) 조삼(趙參) 조적(趙績) 삼형제가 나란히 문과에 급제하여 이름을 드높였다. 그 중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한 무진정 조삼(無盡亭 趙參, 1473∼?)의 따님이 사의공의 장자에게 출가함으로써 모은공께서 모곡에 은거한지 약 백년만에 처음으로 咸安趙氏와 인척(姻戚)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함안의 군북면 장지리에는 광주안씨(廣州安氏)가 살고 있었는데 조선초기의 남산주인 안현(安峴)의 후손들이며 그 손자인 진사 안여거(安汝居)에게는 따님이 두분 계셨다. 장녀는 사의공의 2자이신 통정공(휘 琛)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백운동서원의 창시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에게 출가하였다. 신재 주선생이 처음에는 홍문관 교리 하옥(河沃)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이 1519년에 일찍 별세하였으므로 그 다음해인 26세에 安氏를 배위로 맞이하였으므로 통정공과는 동서간이 되었다. 주선생이 남긴 《무릉잡고(武陵雜稿)》에는 〈題李可沽琠書齋〉와〈與李喜直歷見白雲洞書院投宿草菴寺....癸卯=1543年〉이란 제목의 시가 있으며 통정공의 제씨 처사공과 아들들은 자연히 주선생을 접할 기회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선생의 셋째 손자는 주익창(周益昌)으로서 김해사직공파 휘 대윤(大胤) 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넷째 손자 주필창(周必昌)의 배위 의성김씨와 함께 임진난에 왜적을 만나 부인이 물에 투신하여 절사(節事)를 지켜 정려(旌閭)를 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1496년에 문과 급제하여 모은공의 행장을 찬(撰)한 河沃공의 배위 이씨에 대하여 잠간 살펴보자. 진양하씨 족보에는 재령이씨 현감 이돈흠(李敦欽)의 따님으로 기록되어 있고 교리공의 묘갈명(星州 李章漢 撰)과 貞夫人晉州河氏墓壇碑陰記(鐵城 李泰植 撰)에도 재령이씨로 되어 있다. 이러한 비문은 근세에 지은 것이며 우리족보에는 전혀 기록이 없는 분이다. 속찬 함주지의 鄕案座目에 伊川縣監 李敦欽은 南山에 거주하였고 본관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武陵雜稿에도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함안이씨와 분성배씨의 족보를 살펴보니 본관은 함안으로 확인되는데 진양하씨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서 1800년대의 족보를 확인해 봐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진주 운곡의 남원양씨는 조선초기에 대사간 양사귀(梁思貴) 공이 진양강씨에게 장가들어 산청군 단성에 거주하였는데 그 셋째 아들 연일공(延日公, 梁譯)이 운곡(현 하동 옥종)으로 이거하였다. 대사간공은 사의공의 외조부 목사공 하경리(河敬履)와는 동서간이 되며 연일공의 손자 양순인(梁舜仁)은 연산조(燕山朝)에 어모장군 적량만호(赤梁萬戶)로 있다가 중종반정 때 운곡으로 낙향하였으며 이 분의 따님이 사의공의 3자이신 주부공(휘 琮)에게 출가하였다. 운곡은 남원양씨가 집성촌을 이룬지 550년이 지났지만 현재까지도 옥종면의 양구 가덕 대정 등지에 많이 살고 있는 가문이다.
사의공의 처가는 전술한대로 본관은 미상이나 진주의 정수동에 별장이 있었다고 하니 공의 아드님 중 통정공과 대산처사공은 함안에서 이곳 외가를 자주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세조-성종조의 문신 서평군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손자 한승리(韓承利, 1477∼1536)공이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이곳으로 은거한지 오래 되지 않았으며, 사의공은 文靖公 韓繼禧의 손녀가 백형이신 근재공의 며느리로 시집을 왔기 때문에 韓承利공과는 친분이 있었으며 사의공께서 별세하신 후 4子인 대산처사공이 그분의 따님에게 장가들게 됨으로써 청주한씨와 인연이 더욱 돈독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산처사공은 서재에서 국암 나익남(菊菴 羅翼南)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들 중에는 과거에 급제한 이들도 있었다고 《金羅傳信錄》의 「李處士事蹟」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9살 연하의 처남 한여철(韓汝哲)도 그 중의 한 분이 아닌가 추측되는데 28세(1548년)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헌납(獻納)과 세 고을의 원을 지냈으며, 처사공의 백형인 첨지공(휘 王卞)의 사위가 되었으며 호는 수은(睡隱)이다. 수은공의 손자 중 조은 한몽삼(釣隱 韓夢參, 1589∼1662)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진주의 선비이며 지수의 근재공파 행정공(휘 重光)과는 사돈간이다. 의암(義巖)은 진주성이 함락된 후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인데 남쪽벽면의 해서체로 된 '義巖'이란 두 글자는 조은공이 쓴 글씨로 유명하다. 《조은집(釣隱集)》을 살펴보면 〈李公承後墓碣銘〉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분은 첨지공(휘 王卞)의 현손으로서 임진왜란때 김해성에서 순절하신 우두(友杜)공의 후사로 가셨는데 그 어디에도 묘갈명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그 출처를 밝혀둔다.
사의공의 따님은 족보에 윤달명(尹達溟)에게 출가하여 아들은 없고 따님 한 분만 이창국(李昌國)의 배위로 기록되었을 뿐 자세한 내용이 없다. 그러나 문헌을 고찰해 보면 윤달명은 무송인(茂松人)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인 낙한재 윤자운(樂閒齋, 尹子雲, 1416∼1478)의 손자로서 중형인 윤화명(尹化溟)이 근재공의 사위이다. 윤달명은 아들이 없고 따님 한 분은 즉 사의공의 외손녀로서 전주인 찰방 이창국에게 출가하였다. 찰방공은 정종(定宗)의 6남인 진남군(鎭南君, 李終生)의 증손자 회인수 이정(懷仁守 李禎, 1480∼1534)의 아들이며 후손은 음성군 삼성면, 화성군 용담, 시흥군 군자 등지에 살고 있다. 찰방공의 종제인 이헌국(李憲國,1525∼1602)은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宣祖) 말기에 좌의정을 지냈으며 임진난 후에 받은 '李憲國扈聖功臣敎書'가 금년에 문화재-보물로 지정되어 언론에 보도된 분이다.
사의공의 묘갈명은 공이 별세하신 후 약 300년만에 풍산인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 1763∼1837)선생이 지었는데 명(銘)은 이러하다.
維체有화 珠樹之聯 빛나는 상체(常체)의 꽃 가지가지 엉키었거니와
維玉無瑕 崑火之燃 玉은 하자 없거니 崑山 불에 왜 탓을까?
義篤爭死 報驗昌後 죽음을 다투는 돈독한 義로움이여 후손의 번창은 자연의 報酬의 증험이리라
銘詩闡幽 來世永久 詩를 새겨 묻힌 德 들춰낼가보다 오는 세대는 永久하기만 하나니
(註)維체有화는 형제끼리 잔치를 하며 부른 노래의 《시경(詩經)》상체(常체)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산앵두꽃이 만발해 있음에 비유하여 형제가 마음을 합하여 번영해 나가고 있다는 詩이다.
(다음호 계속)
사의공파에 대하여 (3) 4개지파의 분파
사의공 16대손 秉錫 (醫學博士, 編輯委員)
사의공(휘 季賢)은 함안에서 태어나시어 中宗 5년(1510년)경에 별세하셨는데, 공의 묘소는 모곡의 뒷산에 있으며 재사(齋舍)는 첨소재(瞻掃齋)이다. 사의공파(司議公派)는 네 아드님인 첨지공(휘 玣) 통정공(휘 琛) 주부공(휘 琮) 처사공(휘 琠)의 4개 지파로 분파되어 경남의 각 지역에 세거하고 있으며 멀리는 광양과 남원-임실까지 퍼져 있다. 각 지파가 어떻게 분파되었는지 그 내용을 족보와 문헌을 통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첨지공파] 첨지공와 배위 함안조씨의 생졸 년도는 미상이며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참봉 희연(喜連)이며 차자는 생원 희필(喜弼)이고 사위는 헌납 한여철(韓汝哲)이다.
참봉공은 6남 3녀를 두었는데 그 후손이 실제로 사의공파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참봉공과 생원공 형제의 효행은 일찍히 함안에서 알려져 왔으며 그 내용은 옛 함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교수공(휘 喜弼)의 자(字)는 경양(景亮)이고 1523년에 태어나 창원부 유학교수(敎授)를 역임하였고 금라전신록에 「이교수 유고(李敎授遺稿)」를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수공은 7세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형(참봉공)과 함께 성훈(腥훈)을 먹지 않았으며 연이어 아버지상을 당해서는 여묘(廬墓) 삼년을 마쳤다. 참봉공의 장남은 예빈시 주부(主簿) 인훈(仁勛)이며 3대의 묘소가 모두 모곡의 거양동에 있는데 연대가 오래되고 묘차(墓次)는 실전되어 삼세묘제단(三世墓祭壇)을 설치하여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참봉공의 2자 의훈(義勛)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후손은 미상이고, 3자 생원 예훈(禮勛)은 종숙부(통정공의 2자) 희직(喜直)공의 후사로 4자 성훈(誠勛)은 숙부 교수공의 후사로 각각 입적하였다. 참봉공의 장손 인암공(認菴公, 휘 학)이 함안에서 창원의 북계로 이거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창원파(昌原派)라고도 부르며, 그 시기는 임진왜란후의 병자호란 전후가 아닌가 추측되며 인암공의 손자대(孫子代) 이후에 창원 진해 천곡 서가정 함양 등지로 분파되었다. 창원의 북계에 있는 여임재(如臨齋)는 인암공 후 3세의 재사(齋舍)이고, 진성면 천곡의 학산재(鶴山齋)는 휘 壽吉 후 4세의 재사이다. 5자 충훈(忠勛)의 후손은 전남의 광양 구례등에 살고 있으며 6자 신훈(信勛)은 아들이 없다.
교수공의 후손은 진주일대와 고령의 월막에 살고 있다.
현재 서울종친회에는 정인(正仁-진주)부회장, 성해(成海-진해)부회장, 병춘(秉春-서가정)고문, 태운(太云-광양) 전 법원장이 첨지공의 후손이다.
[통정공파] 통정공과 배위 광주안씨의 생졸 연도는 미상이고 묘소는 진주의 정수리(이반성면 평촌)에 있으며 재사는 매산재(梅山齋)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통정공은 함안에서 외가의 고향인 진주로 이거하여 3남 4녀를 낳았으나 임진왜란 이후로 문헌이 병선(兵燹)으로 소실되어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어 안타깝다.
장자는 진사 희익(喜益)인데 字는 여겸(汝謙)이며 1558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아들은 없고 따님 두분은 매죽헌 이명호(1565∼1624)와 감정 허감(許玵)에게 출가하였다. 첫째 사위는 성산인으로서 황곡 이칭(簧谷 李偁)의 아들이며 진사시에 합격하고 남긴 문집(梅竹軒先生文集)이 있다.
통정공의 2자는 희직(喜直)인데 아들이 없어 첨지공파의 생원공 예훈(禮勛)이 후사로 잇게 됨으로써 통정공파의 많은 후손들이 진주 진성과 마진에 세거하고 있어 우리는 사의공-진주파(晉州派)라고도 부른다. 생원공은 壬午年(158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소위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불리는 삼대간(宋應漑, 朴謹元, 許篈)이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유배되는 붕당정치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진주 진성의 제월대(霽月臺)에서 전심으로 오로지 성리학에 몰두하였으며 호를 성재(誠齋)라 하였다. 성재공의 두아들은 잠(埁)과 강(堈)이며 임진왜란이 끝나자 큰 아들은 가수리(嘉樹里)로부터 동산마을로 돌아와 오늘날까지 동산파로 많은 후손이 살아 왔으며 둘째아드님인 도산공(諱 堈)은 남강 건너 마진으로 이거하여 그 후손을 마진파라 부르며 도산공의 玄孫代에 이르러 일부 남원에까지 분파되었다.
통정공의 3자 도암공(陶庵公,諱 喜誠 또는 喜成)은 숙부 대산처사공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학문의 경지가 매우 깊고 실천에 독실하였다. 공은 함안의 지곡으로 이거하여 마을입구에 여섯 그루의 소나무를 심으시고 그 아래에 단(壇)을 쌓고서 현인들과 강론하였는데 금라전신록과 육송정기(六松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전한다. 공의 후손은 지곡을 비롯하여 군북면 영운리 일대에 주로 세거하고 있으며, 증손자는 숙부 처사공파의 후사(後嗣)로 대을 이어오고 있으며 도암공의 묘소는 진주 반성(평촌)에 있다.
통정공의 사위는 황암 박제인, 나응벽(羅應璧), 사직 강열(姜洌)이다. 황암은 모촌선생과 함께 함주지 편찬에 관여한 분으로 경주인이다. 진양인 사직은 효자로 알려진 성재 강응태(誠齋 姜應台)의 아들이며, 사직의 따님(통정공의 외손녀)은 나라로부터 정려를 받은 분으로서 "節婦生員河國寶妻晉州姜氏之閭"의 정려비가 진주 단목골 마을입구에 있다.
서울종친회 故 찬중(瓚仲-지곡)전 부회장, 전 법원행정처장 故 병호(丙浩-남원)대법관, 웅해(雄海-마진)부회장, 동룡(東龍-동산)부회장, 병태(秉泰-마진)운영위원, 故 장환(璋煥-마진)전 운영위원 그리고 주호(周浩-지곡)고운식물원장이 통정공파이다.
[주부공파] 사의공의 3자 주부공(휘 琮)은 함안에서 운곡(현 하동군 옥종)으로 이거하여 남원양씨 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우리는 이파를 하동파라고 부르지만 진주의 옛 지명을 따서 일명 운곡파(雲谷派)라 하기도 한다.
장자 진사공(휘 喜萬)은 1522년에 태어나 1570년 융경(隆慶) 경오사마시(庚午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晩年(71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두 아드님인 남계공(휘 蕃)과 인풍헌공(휘 분)을 곽재우 장군의 휘하에 보내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의 수성에 참여시키고 종질 신산공은 이곳과 가까운 정개산성을 방어하게 하였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 동의록(同義錄)에 의하면 백의종군하던 충무공이 1597년 7월 20일부터 3일간 진사공의 집에 유숙한 후 7월 23일부터 신산공 이홍훈(李弘勛)의 집으로 옮겨 방어대책(防禦對策)을 강구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화왕산성의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는 아드님의 기록이 전한다.
차자는 학생공 휘 희억(喜億)이며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드님이 대장사에 향사되고 있는 군자감봉사(軍資監 奉事) 신산공(新山公, 휘 弘勛, 1554∼?)이며 다음은 1589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진사 휘 경훈(景勛)인데 임진난으로 후손이 없다. 따님은 생원 하천일(河天一, 號 守肯齋)과 창녕인 조경윤(曺慶潤)에게 출가하였다. 신산공의 아들과 손자들은 번영하여 그 후손이 하동군 옥종면과 하동읍 및 진주의 수곡면과 산청군 단성면을 비롯하여 멀리는 광양의 진상면에 살고 있다.
필자가 속한 주부공파에는 서울종친회 초대회장이신 故 규호(奎浩-옥종)장관, 故 동호(東浩-수곡) 고문(秉昭 감사와 秉玉 변호사의 선친), 병홍(秉弘-수곡)부회장이 있으며 성웅(聖雄-광양) 광양시장, 병희(秉熙-수곡)전 경상대교수도 이 파에 속한다.
[처사공파] 대산처사공(휘 琠)에 대한 사적은 금라전신록과 함주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번역문을 종보 168호(2004년 6월)에 소개한 바 있다. 공은 1502년에 태어나시어 함안의 서쪽 양전비곡(陽田比谷) 주리동(做理洞)에 은거하여 덕을 닦고 문을 닫아걸고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평생을 인재양성에만 힘쓰시다가 78세인 1579년에 별세하였다. 공의 묘소는 함안 대산의 조부 참판공 묘역에 있으며, 배위는 前述한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고 계배(繼配) 창원황씨(昌原黃氏)는 슬하에 자녀가 없고 두 부인의 묘소는 모두 진주의 반성에 있다.
장남은 희정(喜精)이고 차남은 희중(喜中)인데 모두 생원이고 삼남은 희시(喜時)이다. 세 아들에게는 모두 아들이 없다. 막내는 희인(喜仁)인데 두 아들 승훈(承勳)과 계훈(繼勳)을 낳았으나 모두 아들이 없어 절손의 위기에 처했는데 도암공의 손자와 증손자가 후사를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송 조임도(澗松 趙任道,1585∼1664)선생이 삼강절구(三綱絶句)에서 대산처사공의 효행을 읊는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痛親非命抱哀傷 부친이 비명에 가심이 애통한 상심을 품어
閉戶終身不踐鄕 문을 닫은 채 종신토록 고을에 나가지 않았네
追養每思如在敬 제사를 받들기에 매양 계실 때의 공경함을 생각하니
視公心事可沾裳 공의 심사를 봄에 옷자락을 적실만하다오
또 풍기군수 신재(周世鵬,1495∼1554)선생이 남긴 "題李可沽琠書齋"란 시를 살펴보면 처사공께서 서재에서 자제를 가르키는 정성이 다음과 같았다.
靑山繞舍水循除 푸른산은 집을 감싸고 물은 뜰을 돌고 있으며
書院端如白鹿廬 서재의 가장자리는 마치 백록동서원과 같도다.
爲道諸生須着力 도을 위해서 제생들에게 모름지기 힘을 부치니
功崇只在惜居諸 공적이 높은 것은 다만 세월을 아끼는데 있다.
주:거저(居諸)는 詩經 패풍백주편( 風柏舟篇)의 '일거 월저(日居月諸)"를 인용한 문구로 해와 달 또는 임금과 신하,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 日月 즉 세월을 뜻한다.
처사공께서 별세하신 후 13년만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7년간의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황폐화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을 알 수 없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남긴 문적(文蹟)들 마저 불에 타 사라지게 하였다. 특히 타지역에 비해 경남지역이 심했는데 그 중 처사공과 공의 종손(從孫) 청주목사 모촌(茅村, 諱 瀞)선생 집안의 극심한 피해는 두 분의 학문적 위치를 생각할 때 우리 재령이씨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