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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14일(금) 야간에 출발하여 약 보름간 그리스 전역을 자동차로 여행하고 9월28일 귀국하였다.
여행지는 다음과 같다.
1. 아테네
2. 그리스 북쪽 여행: 아테네 -> 델피 -> 메테오라 -> 디온 -> 베르기나(아이가이) -> 테살로니키
3. 그리스 섬 여행: 코르푸, 팍소스-안티팍소스
4. 그리스 남쪽 여행: 아테네 -> 코린토스 -> 에피다우로스 -> 나프플리오 -> 미케네 -> 올림피아 -> 퓌르고스 -> 아테네
5. 아테네 인근 아티카 지역 여행: 아테네 -> 브라브로나 (브라우론) -> 수니온 곶 -> 아테네
여행을 다녀온지 6개월이 넘어가니 여행의 기억과 감동이 흐릿해진다. 여행의 추억을 다 잊기 전에, 여행지 방문순서에 상관없이 생각나는대로, 쓰고 싶은대로 써 보기로 했다. 앞으로 짬짬이 시간나는대로 여행기를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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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 아폴론 신전을 구경하고 한밤중에 핀도스 산맥을 넘다. (1/3)
아테네 도착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그리스 북쪽여행을 시작했다. 이번 그리스 여행은 그리 길지 않은 보름간에 걸쳐 그리스 전역에 흩어져 있는 고대 그리스 유적지를 살펴볼 생각으로 승용차 여행을 계획하였다. 유럽에서는 난생처음 해보는 승용차 여행인지라 첫날 컨디션이 중요했다. 그래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여유 있게 호텔을 나서 메트로를 타고 아테네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11시였다. H 렌터카 사무실을 찾아가 한 달 전에 예약한 예약증을 건네주고 몇 가지 자동차보험이 포함된 렌트비를 계산한 다음 자동차 키를 받았는데 렌트 차량으로 예약할 때 신청했던 시트로엥 톨레도 오토차량대신 현대차 i30 최신모델이 배정되었다.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할 때면 호텔이나 길거리에서 국산제품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 때마다 ‘아, 우리나라가 어느새 훌쩍 컸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은근슬쩍 기분이 좋아진다. 이번 그리스 여행에서도 세계적인 차량 렌탈 서비스업체가 최근 연식의 현대차를 구비하여 유럽여행객에게 제공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니 괜스레 기분이 으쓱해졌다. 우리 자식세대에서는 이런 기분조차 들지 않는, 아주 흔하디흔한 일상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그리스 북쪽여행은 아테네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디온-베르기나를 거쳐 테살로니키에 도착하는 3박4일간의 여행이다. 자동차 여행초보라서 하루 주행거리를 300km 정도로 정했고, 길을 가다가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가까운 마을에 들러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다. 즉, 출발지와 최종도착지만 정하고 중간에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자유롭게 일정을 바꿀 수 있는 진정한 자유여행이었다. 차량인수 장소인 렌터카 주차장은 공항건물 근처 도로변에 있었다. 드디어 엔진시동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차장 주변의 공항도로가 약간 복잡하여 델피방향 도로로 진입하는데 신경이 약간 쓰인 것을 제외하면 운전은 무척 순조로웠다. 공항도로에서 빠져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A6 고속도로의 톨게이트가 나타났다.
그리스 고속도로의 톨게이트는 우리나라처럼 무인요금소와 현금을 받는 유인요금소로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네와 달리 무인 부스와 유인 부스를 멀리서도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패널이 톨게이트 지붕에 부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톨게이트에 접근할 때 당황하지 않고 내 차를 어느 차선으로 진입시켜야 하는지 멀리서도 매우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정보의 시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특정언어나 글자를 모르더라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보의 시각화는 그 나라 말을 모르는 외국인 방문객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이런 것도 어찌 보면 인간 행동에 대한 깊은 관찰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디자인 전통이 뿌리 깊은 유럽은 인간의 행동과 디자인을 접목시키는 정보의 시각화 분야에서는 우리보다 크게 앞서 있는 것 같다.
1. 그리스 고속도로의 요금정산소: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유인·무인 요금소 상황에 맞는 그림이 그려진 패널이 있어서, 빠른 속도로 요금정산소에 접근하는 내 차가 어느 차선으로 진입해야 하는지 멀리서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정보의 시각화는 그 나라 말을 모르는 외국인 방문객에게 매우 쓸모 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우리 차는 얼마 안가 왕복4차선의 유로피안 루트 E75 도로로 갈아타고 한동안 북쪽으로 달렸다. 오후 1시 반을 넘긴 고속도로는 열기가 가득하여 내 차 앞 아스팔트 도로 위에는 방금 소나기가 내려 물에 흠뻑 젖어있는 듯한 신기루가 오랫동안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아테네에서 델피까지 200km 거리의 약 2/3 지점인 카스트로란 곳에서 48번 국도로 옮겨 타고 또 다시 한동안 달렸다. 어느덧 눈앞에 보였던 너른 평원은 사라지고 마치 백두산 초입에 들어선 듯 육중한 산들이 켜켜이 겹쳐진 호쾌한 산악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유러피안 루트 E75 (아테네-데살로니키 고속도로; 델피 가는 길): 오후 1시 반을 넘긴 고속도로에는 열기가 가득하여 내 차 앞쪽의 도로 위에는 방금 소나기가 내려 아스팔트길이 물에 흠뻑 젖어있는 듯한 신기루가 보이기도 하였다.
2. 델피 가는 길: 델피 방향의 48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눈앞에 펼쳐지던 너른 평원은 사라지고 마치 백두산 초입에 들어선 듯 육중한 산들이 켜켜이 겹쳐진 호쾌한 산악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득 3년 전 이맘 때, 아테네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이곳에 들어섰을 때가 생각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뭉게구름이 드문드문 떠있었던 파란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빗방울이 차창을 둔탁하게 때리기 시작하였다. 점차 굵어지는 빗줄기는 차창에 쉼 없이 부딪혀 흘러내리고 김까지 서리면서 차창 밖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너무나 갑작스레 변한 날씨 탓에 ‘와~ 델피란 동네가 소문에 듣던 대로 과연 신기가 서린 곳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가느다란 빗줄기는 그칠 줄 몰랐고, 델피 정거장에 내렸을 때는 간간이 바람마저 몰아쳤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이었던 나는 어느 가게 처마 밑에서 간신히 피를 피하고 있었는데 서서히 추위가 몰려왔다. 이러다간 늦여름에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아서 급히 옷가게로 들어가 점퍼와 장우산을 샀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비는 더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 비가 언제 그칠지 모르는데다가 아테네로 되돌아가는 시외버스 시간은 정해져 있었기에 우리는 우산을 쓴 채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델피박물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마을입구를 벗어나자마자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마치 이방인인 우리가 허락 없이 델피성역을 침범하여 단단히 화가 난 제우스신이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처럼 들렸다. 성깔 있는 제우스신이 벼락이라도 던질까봐 무섭기도 하여 그가 노여움을 풀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는 마을입구로 되돌아가 카페에 들러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비가 그치기를 한 시간쯤 기다렸다. 델피하면 이때의 변덕스런 날씨가 먼저 떠오를 정도로 우리 부부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 델피여행을 위해서 긴팔 옷이랑 우산과 우비를 챙겨왔지만 오늘 날씨는 그 때와 달리 아주 쾌청했다.
우리 차는 '아라호바'라 불리는 산간마을을 통과했다. 여기서 10km 정도 더 가면 델피가 나온다. 다시 3년 전 그때가 떠올려졌다. 차창 밖에는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이름 모를 산간마을에는 관광객이 더러더러 눈에 띄었고 버스가 잠시 마을 정거장에 정차하니 몇 명의 승객이 내렸다. 유명 유적지만 찾아다니던 나에겐 희한한 광경이었다. ‘산골마을에 볼 게 뭐 있나?’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여행을 마치고 알아보니 아라호바 마을은 그리스 본토에서 꽤나 유명한 휴양지였다. 지중해에 산토리니 섬이 있다면 육지에는 아라호바 마을이 있다고나 할까? 파르나쏘스 산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아라호바 마을은 파르나쏘스 산의 암벽을 닮은 잿빛 담벼락과 붉은 기와지붕이 무척 아름다운 산골마을이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등장하는 남녀주인공이 이곳 도로변의 시계탑에 올라 한껏 분위기를 잡고 키스를 했던 장소로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그래서 한국 관광객은 델피 가는 길에 잠시 잠깐 들르는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에도 아라호바 마을에 머물지 못하였다. 오늘 아테네 공항에서 너무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델피유적을 충분히 구경하고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하려면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3. 아라호바 마을 풍경: 이곳은 그리스 본토에서 꽤나 유명한 휴양지이다. 에게 해에 자리 잡은 산토리니 섬의 이아마을이 지중해 물빛과 흰 구름을 상징하는 파란색 지붕과 흰색 벽으로 관광객의 눈길을 잡아끈다면, 파르나쏘스 산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아라호바 마을은 파르나쏘스 산의 암벽을 닮은 잿빛 담벼락과 붉은 기와지붕이 무척 아름다운 산골마을이다.
승용차 두 대가 간신히 비껴 지나갈 수 있는 아라호바 마을의 중심도로를 빠져 나와 십여 분간 산허리에 난 국도를 따라 달리니 델피 박물관이 보였다. 델피 유적지는 아테네에서 당일치기 관광을 할 수 있는 이름난 곳이라서 관광시즌 중에는 버스와 승용차가 많이 몰리는 곳이다. 더욱이 이곳 유적은 산비탈에 있는 관계로 주차공간이 협소하기에 차를 몰고 오는 동안 은근히 주차문제가 걱정됐었다. 그런데 2차선 도로 폭이 살짝 넓어지는 곳마다 주차공간이 있어 염려했던 것보다는 주차공간이 많았고, 더욱이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여름철 관광성수기가 약간 지난 9월 중순인데다 3시를 넘긴 늦은 오후라서 그런지 주차공간마다 차 한두 대를 주차시킬 수 있는 빈공간이 더러 남아있었다.
* 구글지도(자료사진): 아라호바 마을을 빠져나와 델피박물관으로 가는 48번 국도이다. 산머리에 가로방향으로 난 길은 델피에서 라미아를 거쳐 메테오라로 가려면 넘어야 하는 산길이다. 델피 구경을 마치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8시경에 이 산길을 넘었다. 이후 2시간여에 걸쳐 산맥 2개를 넘는 스릴만점의 야간운전을 경험했다. ^^
4. 델피박물관 앞 도로변 주차장: 델피박물관에 오는 동안 주차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여름철 관광성수기가 약간 지난 9월 중순인데다 늦은 오후 3시쯤이라서 그런지 2차선 도로를 따라서 군데군데 만들어놓은 도로변 주차장에는 차 한두 대쯤은 주차시킬 수 있는 빈공간이 있었다.
계절에 따라서 약간 다르긴 하지만, 관광성수기에 그리스 박물관의 개장시간은 오전 8시-오후 8시까지이고, 유적지는 이보다 한 시간 일찍 문을 닫는다. 그래서 만약 어느 유적지에 늦게 도착했다면, 문을 한 시간 일찍 닫는 유적지를 먼저 둘러보고 박물관을 나중에 구경하는 것이 시간에 쫒기지 않아서 좋다. 우리는 대개 유적지 관람을 오전에 시작했기 때문에 여행 내내 박물관과 유적지 관람종료시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리스 여행 막바지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올림피아 유적지에 오후 5시에 도착했을 때, 늘 하던 대로 박물관 구경을 먼저 하고 느지막이 유적지 관람에 나섰다가 30분밖에 구경하지 못하는 낭패를 겪은 적이 있다. 우리는 델피유적지에서도 입구에 있는 박물관부터 구경했다. 박물관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은 마치 이곳 델피 유적지의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성스러운 길(sacred way)을 닮았다.
5. 델피박물관으로 오르는 계단: 박물관 매표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마치 이곳 델피 유적지의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성스러운 길(Sacred way)을 닮았다.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델피박물관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신탁 장소였던 델피지성소의 역사를 보여준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은 기하양식 시대(geometric period; 900-700 BCE)부터 고대후기(late antiquity; CE 2-8세기)에 이르는 유물로, 건물의 외벽을 장식했던 부조, 건축자재, 조각상, 지성소에 바친 봉납물이 주류를 이룬다. 델피박물관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몇몇 유물에 대해 소개해 보기로 한다.
델피 박물관에는 깊이가 얕은 술잔 바닥면에 아폴론신이 뚜렷하게 그려진 퀼릭스라 부르는 고대 그리스 술잔이 있다. 이 술잔은 현재 박물관 자리에 있던 묘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기원전 480-470년에 아티카 공방에서 제작된 도기이다. 흰색 바탕에 적색인물 기법(red-figure technique)을 사용하여 그린 도기화를 살펴보자. 아폴론신이 민소매의 키톤을 걸치고 히마티온(망토)으로 자신의 몸 아랫부분을 두르고 있으며 머리에는 은매화(myrtle·미루투스) 가지로 만든 화환을 왕관처럼 쓴 채 사자다리 의자에 앉아 있다. 그는 왼손으로 소리울림통을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7줄의 리라를 쥐고 있고, 오른손은 쭉 뻗어 피알레(phiale·운두가 얕은 그릇)에 담긴 헌주(libation·리바티온)을 붓고 있다. 까마귀 한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 까마귀는 아폴론이 키우던 새로 이름이 카라스였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의 아들이자 태양신인 아폴론은 인간세상의 코로니스 공주를 사랑했다. 하지만 공주는 자신과 같은 인간인 이스키스라는 다른 남자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 아폴론은 까마귀를 보내서 코로니스 공주 주변을 감시하게 했다. 어느 날 까마귀는 공주가 이스키스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아폴론에게 알려주었다. 이에 분노한 아폴론은 화를 참지 못하고 누이동생이자 사냥의 신인 아르테미스를 보내 코로니스 공주를 활로 쏘아 죽게 하였다. 코로니스 공주의 장례식에서 아폴론은 공주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아폴론은 자신이 한 일을 뒤늦게 후회하고 자신에게 공주의 결혼 소식을 알려준 까마귀에게 화풀이를 하여 원래 흰색이었던 까마귀를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이때부터 까마귀는 검은색이 되었다고 한다. 아폴론은 죽은 공주의 몸에서 아기를 꺼내어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 종족의 현자인 케이론에게 대신 키우게 하였다. 케이론은 아폴론의 아이에게 의술을 가르쳤는데 이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가 되었다.
6. 아폴론이 그려진 고대그리스 술잔, 퀼릭스(Kylix): 기원전 5세기 초(480-470 BCE), 흰색 바탕에 붉은색 인물기법을 적용하여 아티카 공방에서 제작된 도기화이다. 아폴론이 왼손에 들고 있는 7줄의 리라는 헤르메스가 거북이 등껍질과 양 창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아폴론에게 선물한 것이다.
퀼릭스 도기화에서 아폴론이 왼손으로 쥐고 있는 리라의 울림통은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리라의 가장 초기버전으로,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도둑과 사기꾼의 수호신인 헤르메스가 최초로 발명하여 아폴론이 기르던 소 50마리와 바꾼 것이라고 한다. '빛나는 자'라는 뜻의 '포이보스(Phoibos)'로 불리는 아폴론은 왜 목동이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가 죽은 자를 살려내 신들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로 제우스의 벼락에 맞아 죽자, 이에 격분한 아폴론이 제우스에게 번개를 만들어 준 키클롭스 삼형제를 활로 쏴죽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대한 죄 값으로 1년간 인간 아드메토스 왕의 가축을 돌보는 벌을 받고 목동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갓 태어난 이복동생 헤르메스가 그날 저녁 아폴론이 키우던 소 50마리를 훔쳐 잡목 숲에 숨겼다. 잃어버린 소떼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던 아폴론은 마침내 헤르메스의 동굴을 찾아냈고 요람에 누운 갓난아기 헤르메스를 붙잡아 아버지 제우스 앞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의 중재로 아폴론과 헤르메스는 소 50마리와 리라를 맞바꾸었고 헤르메스는 아폴론이 음악의 신이 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이곳에는 헤르츠스프룽 타입의 방패(herzsprung type shield)가 전시되어 있는데 방패 모양은 판판한 원형이다. 유럽 독일북부의 헤르츠스프룽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이런 형태의 방패가 처음 발견되었기에 이곳 지명을 따서 방패 이름을 지었다. 나는 고대 그리스의 전쟁용 무구(투구, 흉갑, 방패, 창) 가운데 특히 방패에 관심이 많은데 그 이유는 전통문양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스 투구나 흉갑에는 문양이 거의 없어 심심한 반면에 방패, 특히 기원전 8세기 이후의 아르고스 방패에는 자기네 도시국가를 상징하는 독특한 문양이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헤르츠스프룽 방패의 전면에는 몇 개의 동심원 문양이 있고 동심원의 중간에 ‘V’ 또는 ‘U’자 형태로 꺾인 부분이 있다. 그리스에서 발견되는 헤르츠스프룽 방패의 동심원은 V자로 꺾인 형태이다. 이 노치 모양이 그리스 알파벳, 람다(λάμδα: Λ)를 닮아서 람다 타입 방패(Lamda type shield)로도 불린다. 그런데 이 V 문양이 마치 프랑스 자동차 회사인 시트로앵의 엠블럼을 닮아서 상당히 흥미로웠다. 헤르츠스프룽 방패는 유럽의 일부 지역과 그리스 및 에게 해 일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호메로스가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 일리아스(Iliad)에서 묘사한 아킬레우스의 방패가 바로 이런 타입이다. 헤르츠스프룽 방패는 동그란 나무판의 전면을 얇은 청동 판으로 덮은 것으로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후기 미케네 시대(기원전 12-13세기)부터 기하양식 시대(기원전 1,000-700년)에 걸쳐 오랫동안 사용된 방패였다. 그리스 지역에서는 키프로스 섬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오래되었는데 델피 박물관의 방패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순례자가 봉납물로 바친 것이다.
7. (왼쪽) 헤르츠스프룽 방패(Herzsprung type shield)와 (오른쪽) 아르고스 방패(Argive shield): 헤르츠스프룽 방패는 미케네 시대(기원전 13세기)부터 기하양식 시대(기원전 8세기)까지 사용되었던 방패이다. 방패 전면에 몇 개의 동심원 문양이 있으며, 동심원의 중간이 'V'자로 꺾인 것이 특징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가 사용했던 방패가 이런 타입이다. (오른쪽) 기원전 8세기 이후에 아르고스 방패가 등장했다. 아르고스 방패는 테두리를 제외한 나머지가 마치 볼록렌즈처럼 툭 튀어나온 것이 특징이다. 방패 전면에는 도시국가를 상징하는 그림이나 문양이 장식되었다. 자료사진은 스파르타의 또 다른 이름인 라케다이몬(Λακεδαίμων·Lacedaemon)의 첫 글자 람다(Λ·Lambda)로 멋을 내었다.
그리스에서 헤르츠스프룽 방패는 기원전 8세기 끝자락에 아르고스 방패(argive shield)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아르고스 방패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을 일컫는 호플리테가 왼손에 들고 있는 원형방패를 일컫는다. 호프론(hoplon)으로도 불리는 이 방패의 특징은 헤르츠스프룽 방패처럼 평편하지 않고 방패 테두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볼록렌즈처럼 툭 튀어나와 있으며, 손잡이가 이중으로 되어있다는데 있다. 즉, 방패의 안쪽을 보면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의 한가운데에 팔뚝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가죽 끈(porpax)이 있고, 방패의 테두리 가까이에 왼손으로 거머쥘 수 있는 손잡이(antilabe)가 있어서 전투 중에 방패를 쉽사리 놓치지 않게 되었고 이동 중에는 무게가 대략 7kg인 무거운 방패를 어깨 위에다 걸칠 수 있게 됨으로써 이동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평균직경이 90㎝인 아르고스 방패는 참나무로 만들었고 방패 테두리를 빙 둘러 동판을 덧대거나 얇은 동판으로 방패 전면을 덮어 방호력을 높였다.
페리란테리온(perirrhanterion)은 종교의식에서 손에 물을 적혀 뿌리는 정화의식에 사용되는 것으로 물을 담아둔 커다란 수조를 떠받치는 지지대를 일컫는다. 대야처럼 생긴 수조는 페리란테이론과 일체형인 것도 있고 분리되는 것도 있는데, 보통 사원 앞이나 지성소 입구에 혹은 김나지움의 숭배 장소에 설치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기원전 6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중심에 있는 원기둥 주위로 빙 돌아가면서 세 명의 처녀(kore·코레) 상을 배치했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그렇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에레크테이온 신전의 남쪽 포치를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여섯 명의 카리아티드 처녀상이 이와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페리란테리온의 처녀상과 다음에 설명할 6세기 말에 제작된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카리아티드 여인상에서 알 수 있듯이, 처녀 상을 신전 기둥으로 사용하는 건축양식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1세기에 활약한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직후가 아닌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8. 페리란테리온: 종교의식에서 손에 물을 적혀 뿌리는 정화의식에 사용되는 수조를 떠받치는 지지대를 일컫는다. 이 작품은 기원전 6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중심에 있는 원기둥 주위로 빙 돌아가면서 세 명의 처녀 상을 배치했는데, 이것을 보고 있으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에레크테이온의 남쪽 포치를 머리에 이고 있는 카리아티드 처녀 상이 떠오른다.
페리란테리온의 처녀 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의 머릿속엔 우리나라 고려 때 많이 세워졌던 이형석탑(異形石塔) 가운데 하나로 사자 네 마리가 석탑의 탑신부를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 떠올랐다. 전남 구례의 화엄사, 충북 제천의 사자빈신사지, 강원 금강군 금장암의 사사자석탑이 대표적으로, 원래는 사사자석탑과 그 앞에 놓인 석조인물좌상이 한 세트로 제작되었지만 사자빈신사지 석탑처럼 현재는 석조인물좌상이 사라지고 없는 것도 있다.
잠시 이야기가 옆길로 새지만, 말이 나온 김에 사사자석탑과 석조인물좌상에 얽힌 불교전설을 들어보자. 그리스 신화만큼 재미있다. 우리나라 고고미술사학계에서는 이 한 쌍의 조형물에서 석조인물좌상을 보살로 보고, 보살이 사사자석탑 기단부의 한가운데에 모신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조형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석조인물상을 석조보살좌상 또는 공양보살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이 석탑과 석조인물상으로 이루어진 한 쌍의 조형물은 불교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가운데 하나인 범천권청(梵天勸請)을 조형한 것이다. 범천권청이란 불법의 수호신 범천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이제 막 증득한 붓다에게 중생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설법을 간청했다는 불교전설을 나타내는 사자성어이다. 불교경전 ⟪마하박가⟫에 소개된 범천권청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9. 사자빈신사지 사사자구층석탑: 충북 제천 월악산 아래 사자빈신사 터에 있다. 기단부의 하대면석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고려 초인 현종 13년(1022년)에 건축된 것이다. 석탑 기단부의 네 귀퉁이에 각각 사자석상이 있고 한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을 안치했다. 원래 이 석탑 앞에 석조인물좌상(범천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네 마리 사자상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이제 막 증득한 고타마 붓다의 최초의 설법(사자후)을 상징하고, 비로자나불의 머리 위, 상대갑석 아랫면에 조각된 연꽃 한판은 지금부터 2500년 전, 붓다의 설법에 의해 불교가 탄생하게 되는 바로 그 극적인 순간, 고대 그리스 미술의 용어를 빌려서 말한다면 불교의 카이로스(καιρός·결정적 순간)를 상징한다.
홀로 선정에 든 부처님 마음에는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숭고하다. 단순한 사색에서 벗어나 미묘하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하기 좋아하여, 아예 집착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도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모든 행(行)이 고요해진 경지, 윤회의 모든 근원이 사라진 경지, 갈애가 다한 경지, 탐착을 떠난 경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경지 그리고 열반의 도리를 안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게송을 떠올렸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다. 그러나 지금 결코 드러낼 수 없다. 이 법을 원만히 깨달을 수 없다. 흐름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미묘하고 깊고 보기 어렵고 섬세하니, 탐착에 물든 자들이 어떻게 이 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이같이 깊이 사색한 부처님은 법을 설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주저하는 부처님을 본 범천(梵天) 사함파티는 생각했다. ‘아! 세상은 멸망하는구나. 아! 세상은 소멸하고 마는구나. 여래·응공·정등각자가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리하여 사함파티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혔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굽히는 것처럼 재빠르게 범천의 세상에서 사라진 뒤 부처님 앞에 나타났다.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다음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며 간청했다. “부처님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선서(善逝)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나,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 쇠퇴할 것입니다.”
사함파티는 다시 게송으로 간청했다. “부처님 이전의 마가다국에는 어지러운 법이 설해져 있었으니 때 묻은 자들이 사유한 것이었네. 이제 부처님께서 오셨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여시어 그 법을 듣고 때 없는 자들이 깨닫도록 하소서. 지극히 현명한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는 분이시여! 슬픔이 제거된 분이시여! 선의 정상에 있는 바위에 오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법으로 이뤄진 누각 위에 올라 태어남과 늙음에 정복당하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소서. 빚 없는 대상(隊商)들의 지도자처럼 세상을 다니소서. 부처님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사함파티의 청을 듣고 부처님이 말했다. “범천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열반의 도리를 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범천아! 나에게는 이런 게송이 떠올랐다. ‘나는 어렵게 도달했다. 어떻게 이 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범천아! 이런 깊은 사색 끝에 나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사함파티가 다시 부처님에게 청했다. 부처님은 “내가 피곤할 뿐이다.”며 거절했다. 사함파티는 낙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간청했다.
범천의 간청을 세 번이나 들은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켜 부처Buddha·깨달은 자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음을 아셨다. 먼지가 적은 중생, 먼지가 많은 중생, 감관(진리에 대한 인지능력)이 날카로운 중생, 감관이 무딘 중생, 자질이 좋은 중생, 자질이 나쁜 중생, 가르치기 쉬운 중생, 가르치기 어려운 중생을 보셨다. 아울러 저 세상의 두려움을 의식하며 지내는 중생이 있는가 하면 저 세상의 두려움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는 중생도 있음을 보았다. 비유하면 연못의 연꽃들과 같으니, 그곳에는 푸른 연꽃, 붉은 연꽃, 흰 연꽃이 있다. 그들은 모두 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물의 보호를 받는데, 어떤 연꽃은 물에 잠긴 채 자라고 어떤 연꽃은 물의 표면에 있고 어떤 연꽃은 물위로 솟아 나와 물에 젖지 않은 채 있다. 그와 같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었다. 먼지가 적은 중생, 먼지가 많은 중생, 저 세상에서의 두려움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는 중생도 있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사함파티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 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함파티는 부처님이 설법을 허락했음을 알고 공손히 절하고 오른쪽으로 돈 다음 그곳에서 사라졌다. 부처님은 범천 사함파티의 간청으로 사르나트(녹야원)에서 여래께서 처음 출가했을 때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지혜와 광명을 얻은 다섯 비구는 고타마 붓다의 첫 제자가 되었다.
이야기의 초점을 다시 우리나라의 사사자석탑과 석조인물좌상에 맞춰서 이 한 쌍의 조형물에 숨어 있는 조형원리를 살펴보자.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친 채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석조인물상의 자세라든지, 석탑 기단부의 한가운데에 안치된 인물상이 세상에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이자 법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이라는 점에서 이 한 쌍의 조형물은 『마하박가』 불경에 소개된 범천권청을 모티브로 해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석조인물상은 우리 고고미술사학계의 해석처럼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보살이 아니며, 고타마 붓다에게 설법을 간청하는 불법의 수호신, 범천이다.
한편 석조인물상(범천)의 형태에는 금강산 금장암의 석조인물상처럼 머리 위에 석등을 올려놓은 것도 있는데 이 석등은 부처님의 말씀, 즉 진리의 빛을 상징한다. 석탑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 각각 배치된 사자는 '사자후(獅子吼)'라는 말도 있듯이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한다. 네 마리의 사자가 에워싼 공간의 한 가운데에는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존재인 비로자나불을 안치했다. 사자빈신사지 석탑처럼 비로자나불의 머리 위에 놓인 상대갑석의 아랫면에는 활짝 핀 연꽃 한판을 조각해놓은 경우도 있다. 이 연꽃은, 범천의 설법 간청을 세 번씩이나 뿌리쳤던 여래께서 부처의 눈으로 중생을 바라봤을 때 이 세상에는 연못의 연꽃처럼 매우 다양한 인간군상이 있음을 깨닫고 적어도 귀 있는 자들을 위해 설법하기로 결심했던 바로 그 순간, 그리하여 지금부터 2500년 전 불교가 탄생하게 되는 바로 그 극적인 순간, 고대 그리스 미술의 용어를 빌려서 말한다면 불교의 카이로스(καιρός·결정적 순간)를 상징한다.
다시 델피박물관을 구경해 보자. 낙소스 스핑크스The Sphinx of the Naxians는 돌기둥 위 이오니아식 주두에 올라앉아 있는 그리스식 스핑크스 석조물인데, 넓은 전시실의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어 이곳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조형물이다. 스핑크스는 그리스 미술과 신화 속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로, 사자의 몸뚱이에 인간 여성의 머리, 독수리의 날개와 뱀의 꼬리가 달린 무시무시한 짐승으로 묘사되었으며, 보통 신전 입구의 측면에 일종의 수호신으로 세웠다. 델피 박물관에 전시된 스핑크스는, 기원전 560년, 에게 해의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한 낙소스 섬의 주민들이 델피 신전의 남쪽 석축 아래, 아폴론이 뱀 퓌톤을 화살로 쏴 죽인 곳이라고 전하는 신성한 장소 근처에 10m 높이의 원기둥을 세우고 이 꼭대기에 올려놓은 것이다. 높이 2.25m에 달하는 거대한 스핑크스를 안치한 이오니아식 주두Ionic capital는 그리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이오니아식 주두 가운데 하나라고 하며, 기단부와 원기둥까지 포함한 전체 높이는 12.5m에 달하는데, 현재는 기둥은 잘려서 일부만 남았다. 기원전 4세기경 기단부에 새긴 명문에 따르면, 델피신전의 사제들은 신탁을 받을 때 다른 도시보다 우선권을 주는 프로만테이아(προμαντεία·promanteia)라 부르는 특권을 낙소스 주민들에게 주어 그들의 명예를 드높였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스핑크스는 보이오티아 테베의 날개 달린 스핑크스로, 테베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지나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풀지 못하면 잡아먹는 공포의 요괴였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테베를 흉흉하게 만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발, 낮에는 두발,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마침내 오이디푸스가 정답인 “인간”을 맞췄고 스핑크스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골짜기에 몸을 던져 죽어버렸다. 스핑크스의 위협으로부터 테베 시민을 구한 오이디푸스는 영웅이 되어 자신의 어머니(이오카스테)가 왕비로 있는 테베의 왕으로 추대되어 그녀와 결혼하였다. 오이디푸스 비극의 한 줄거리이다.
10. 낙소스 스핑크스: 기원전 560년, 에게 해의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한 낙소스 섬의 주민들이 델피 신전의 남쪽 석축 아래, 아폴론이 뱀 퓌톤을 화살로 쏴 죽인 곳이라고 전하는 신성한 장소 근처에 10m 높이의 원기둥을 세우고 이 꼭대기에 올려놓은 것이다. 높이 2.25m에 달하는 거대한 스핑크스를 안치한 이오니아식 주두는 그리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이오니아식 주두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낙소스의 스핑크스가 전시된 전시실의 한쪽 귀퉁이에 시프노스인의 보물창고 (Siphnian Treasury)를 장식했던 여인상과 출입문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스의 호수격인 에게 해의 한가운데에는 무수히 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 섬들을 일컬어 키클라데스 제도라고 부른다. 낙소스 섬과 더불어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하는 시프노스 섬은 기원전 3천 년 전인 청동기 시대부터 금과 은을 채굴한 것으로 유명했다. 금·은 광산 덕분에 이 섬의 주민들은 매우 부유했다고 한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을 ‘신성한 길’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는 자기네 도시의 위상을 높이고 아폴론의 신탁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신성한 길옆에 보물창고를 세웠다.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익 시기인 기원전 525년에 시프노스 주민들도 그리스 세계의 종교적 컬트의 중심지였던 델피에 자기네 봉납물을 보관하기 위한 봉납창고를 아폴론 신전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갈지자로 크게 꺾이는 곳 가까이에 세웠다. 지금은 이곳에 있는 다른 보물창고와 마찬가지로 건물은 사라졌고 스틸로베이트(Stylobate·그리스 신전의 플랫폼)만 휑뎅그렁하게 남아 있지만 이 보물창고 출입구를 장식했던 멋진 여인상 기둥 하나와 이오니아식 프리즈가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델피신전으로 올라가는 성스런 길(Sacred way): 길 왼쪽(노랑색 화살표)에 시프노스 보물창고가 있다. 지금은 기단(플랫폼)만 남아 있고, 박공과 프리즈를 장식했던 돋을새김과 출입구의 엔타블러처를 떠받쳤던 카리아티드 여인상은 델피박물관 전시실에 있다.
* 오른쪽에 있는 시프니안 보물창고 옆에 서서 아래를 바라 본 것이다. (즉, 서쪽에 서서 동쪽 방향(성역 출입구쪽)을 바라본 것)
신전을 닮은 시프노스 봉납창고를 정면에서 바라보면, 건물의 오른쪽과 왼쪽 끝에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필라스터(Pilaster·사각형 기둥: 그리스 신전구조에서는 이 사각형 기둥을 안타(Anta)라고 부른다.)사이에 두 명의 코레(Kore·그리스어로 처녀)가 이오니아식 아키트레이브를 지탱하고 있다. 이 여인상이 바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에레크테이온에 세워진 카리아티드 기둥양식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11. (왼쪽)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복원도 (오른쪽) 카리아티드 여인상 기둥: 기원전 525년에 시프노스 시민들은 그리스 세계의 종교적 컬트의 중심지였던 델피에 자기네 봉납물을 보관하기 위한 보물창고를 세웠다. 신전이나 보물창고의 출입문은 대개 동쪽에 두었으나, 가파르게 비탈진 지형으로 인해 서쪽에 두었다. 신전의 서쪽 박공과 엔타블러처를 떠받치고 있는 여인 형태의 기둥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에레크테이온에 있는 카리아티드 기둥양식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출입문이 있던 서쪽의 박공은 사라지고 없고, 맞은편인 동쪽의 박공은 살아남아 델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동쪽 박공을 살펴보면, 제우스신을 가운데 두고 그 오른쪽의 헤라클레스와 왼쪽의 아폴론이 델피의 삼발이 의자Tripod를 두고 심하게 다투고 있고, 제우스는 그 둘을 떼어놓으려 애쓰고 있는 모습을 나타냈다. 이 돋을새김은 아폴론 신전의 무녀인 퓌티아(Pythia)가 살인죄를 저지른 헤라클레스에게 신탁을 내리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헤라클레스가 분노하는 것을 보여준다. 욱한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직접 신탁소를을 세워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퓌티아가 신탁을 받을 때 걸터앉는 삼발이 의자를 빼앗아 두 손으로 움켜잡고 나가려는 순간, 이를 눈치 챈 아폴론이 재빨리 나타나 기물을 붙잡고 저지하는 장면이다. 도대체 고대 그리스인은 어떤 생각으로 아폴론에게 바치는 봉납물을 보관하는 보물창고의 박공에 이곳 주인장이 싸움박질 하는 장면을 새겨놓은 걸까? 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12.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동쪽 박공: 헤라클레스(오른쪽)와 아폴론(왼쪽)이 델피의 삼발이 의자Tripod를 두고 심하게 다투고 있고, 제우스는 그 둘을 떼어놓으려 애쓰고 있다. 도대체 고대 그리스인은 어떤 생각으로 아폴론에게 바치는 봉납물을 보관하는 보물창고의 박공에 이곳 주인장이 싸움박질 하는 장면을 새겨놓은 걸까? 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그 발상이 재미있기도 하다.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처마 아래에 있는 이오니아 프리즈의 돋을새김은 두 명의 조각 거장이 각각 이끄는 공예가 그룹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원형이 비교적 많이 보존된 동쪽과 북쪽 돋을새김의 장면은, 격렬한 전쟁을 주제로 삼은 탓이 크긴 하겠지만, 상당히 역동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생기발랄하기에 진취적 경향의 키오스 섬과 아티카 공방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서쪽과 남쪽의 돋을새김은 이와 반대로 다소 정적이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부족하여 아마도 소아시아의 해안지역, 특히 이오니아 지역의 예술학교에서 훈련받은 보수적인 조각가가 이끄는 공방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동쪽 프리즈의 돋을새김은 트로이 전쟁을 나타냈다. 돋을새김의 왼쪽 절반은 이 전쟁의 결말을 결정하려는 한 무리의 신들을 보여준다. 화려한 권좌에 앉아있는 제우스를 중심에 두고 왼쪽에는 트로이를 편들었던 이름이 ‘A(아)’자로 시작되는 신들을 배치했다. (전쟁의 신) 아레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궁술과 예언의 신) 아폴론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 멤논이 이끄는 트로이 전사를 응원하고 있다. 제우스의 오른쪽에는 아카이아(Achaea·미케네 시대의 그리스를 일컬음)를 편들었던 신들을 배치했다. 제우스의 오른쪽 바로 옆은 망실되었는데, 이곳에는 아마도, 제우스의 턱을 어루만지면서 아들 아킬레우스의 안전을 위해 전투를 중지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바다의 요정 테티스가 있었을 것이다. 이 뒤로 (전쟁의 신) 아테나, (결혼의 신) 헤라, (곡식과 수확의 여신) 데메테르가 의자에 앉아 아킬레우스가 이끄는 그리스 전사를 옹호하고 있다. 제우스는 중앙에서 앉아 이 두 경쟁자의 운명의 무게 추를 관리하고 있다. 사실, 이 트로이 전쟁은 바다의 요정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의 결혼식장에서 세 여신, 즉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간에 가장 아름다운 신이 누군가 다투다가 그 판결을 제우스에게 맡겼는데 세 여신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제우스가 목동 파리스에게 판결을 맡기는 통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13.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동쪽 프리즈의 돋을새김(왼쪽 절반): 동쪽 프리즈의 돋을새김은 트로이 전쟁을 나타냈다. 돋을새김의 왼쪽 절반은 이 전쟁의 결말을 결정하려는 한 무리의 신들을 보여준다. 화려한 권좌에 앉아있는 제우스를 중심에 두고 왼쪽에는 트로이를 편들었던 신들(아레스,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아폴론)을 배치했고, 제우스의 오른쪽에는 그리스를 편들었던 신들(아테나, 헤라, 데메테르)을 배치했다.
프리즈의 오른쪽 절반은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의 거의 마지막 전투장면을 나타낸다. 트로이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 헥토르의 죽음으로 인해 운명의 추는 이미 그리스 쪽으로 기울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의 아들이자 에티오피아의 왕인 멤논(Memnon)이 이끄는 구원군과 트로이 군대가 왼쪽에 있고, 바다의 요정 테티스의 아들이자 아카이아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이끄는 그리스 군대가 오른쪽에 있다. 멤논은 아킬레우스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하지만, 그를 죽인 아킬레우스도 결국 신탁의 예언(“만일 네가 트로이에 간다면 엄청난 명예를 얻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겠지만 단명할 것이고, 가지 않는다면 오래 살겠지만 아무런 명예도 얻지 못하리라”)대로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만다. 앞장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리스 인들이 신전의 프리즈에 트로이 전쟁 장면을 즐겨 새긴 이유는 트로이로 상징되는 야만과 혼란에 대한 그리스로 상징되는 문명과 질서의 승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4.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동쪽 프리즈의 돋을새김(오른쪽 절반): 프리즈의 오른쪽 절반은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의 거의 마지막 전투장면을 나타낸다. 왼쪽은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이자 에티오피아의 왕인 멤논이 이끄는 구원군과 트로이 군대이고, 오른쪽은 바다의 요정 테티스의 아들이자 아카이아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이끄는 그리스 군대이다.
연극 무대에서 도둑은 오른쪽에서 등장하고 도둑을 잡는 경찰은 왼쪽에서 튀어나오듯이, 고대 그리스의 건축조각에서도 전투장면을 묘사할 때면 그 전투의 최종 승리자를 왼쪽에 배치하고 패배자를 오른쪽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트로이 전쟁을 나타낸 동쪽 프리즈에서는 멤논(패배자)을 왼쪽에, 아킬레우스(승리자)를 오른쪽에 배치하였는데, 이것은 통상적인 인물 배치법에 어긋난다. 이것은 동쪽과 북쪽 프리즈를 맡은 조각가가 성스런 길의 왼쪽에 자리 잡은 시프노스 보물창고의 위치와 순례자(관찰자)의 시선을 두루 고려하여 의도적으로 승리자와 패배자의 위치를 서로 뒤바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델피신전의 성스런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순례자는 시프노스 보물창고의 동쪽 벽면 (동쪽 프리즈)과 마주치게 된다. 보물창고는 관찰자의 왼쪽에 있으므로 관찰자는 자연스럽게 아킬레우스가 이끄는 그리스 군 뒤쪽에 서있게 된다. 즉, 조각가는 관찰자와 좀 더 가까운 프리즈의 오른쪽에 그리스 군을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관찰자와 그리스 군이 서로 한편이 된 듯한 유대감을 느끼면서 트로이 전투장면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15.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동쪽 프리즈와 순례자의 위치: 고대 그리스의 건축조각에서도 전투장면을 묘사할 때면 그 전투의 최종 승리자는 왼쪽에 배치하고 패배자는 오른쪽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시프노스 보물창고의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 부조에서는 멤논(패배자)을 왼쪽에, 아킬레우스(승리자)를 오른쪽에 배치하였다. 이것은 통상적인 인물 배치법에 어긋난다. 그러나 성스런 길의 왼쪽에 위치한 시프노스 보물창고의 위치와 순례자의 시선을 감안하여 조각가가 의도적으로 순례자에 좀 더 가까운 프리즈의 오른쪽에 그리스 군을 배치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 동쪽 프리즈 감상을 마치고 다시 발걸음을 위로 옮기면, 이번에는 길옆에 있는 북쪽 프리즈가 순례자의 눈길을 잡아끈다. 북쪽 프리즈의 주제는 ‘기간토마키아(Gigantomachia)’이다. 대지의 신인 가이아(Gaea)는 올림포스 신들이 자기 자식인 티탄들을 타르타로스(Tartaros·명계 최하층의 지옥)에 가둔 것에 불만을 품고 또 다른 자식인 기가스(Gigas)들을 부추겨 제우스에게 맞서게 했다. 기간테스(Gigas의 복수형)는 올림포스 신들과 싸움을 벌였는데, 이 싸움을 ‘기간테스의 전쟁’ 이란 뜻의 기간토마키아 또는 기간토마키(Gigantomachy)라고 부른다. 제우스와 올림포스 신들은 거대한 기간테스와 힘겨운 일전을 펼쳤는데, 헤라클레스가 있어야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신탁을 받았다. 제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소환하여 기간테스와 싸우게 했다. 헤라클레스는 기간테스 대장을 비롯한 여러 명을 죽였고, 전쟁은 올림포스 신들의 승리로 끝났다.
북쪽 프리즈는 마치 현대영화의 롱 테이크(Long-take) 기법으로 영화를 찍은 듯 연속된 전투장면을 순례자에게 보여준다. 기간테스를 제압하기 위해 올림포스 신들은, 순례자의 이동방향과 똑같은 방향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진하면서 맹렬히 싸우고 있다. 맨 왼쪽에 헤파이토스가 그리스 장인들이 즐겨 입는 짧은 키톤을 입고 전투에 쓸 불덩어리를 만들기 위해 풀무 앞에 서 있다. 오른쪽 바로 옆에는 데메테르와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자(Kore)가 있고, 그 앞에는 표범 가죽을 몸에 두른 디오니소스 (혹은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헤라클레스)와 키벨레(Cybele) 여신이 기간테스와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있다. 키벨레 여신이 올라탄 전차를 끄는 사자는 마치 날랜 사슴을 공격하듯이 기가스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허리를 물어뜯는다. 그 바로 앞에는 쌍둥이 신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방패를 들고 있는 네 명의 기간테스를 향해 화살을 번개처럼 날리고 있다. 기가스 한명은 겁을 집어먹고 등을 보이며 달아나고 있고, 또 다른 한명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 하지만 투구, 방패, 흉갑과 정강이 보호대로 중무장한 기간테스도 쉽게 물러서지 않고 창, 칼, 돌멩이를 사용하여 왼쪽의 신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리스의 전쟁영화, ‘기간토마키아’의 남자주인공인 제우스는 망실되어 보이지 않지만, 그가 올라탔을 것으로 짐작되는 전차를 이끄는 말들이 앞발을 높이 쳐들고 있다. 그 앞에서 투구와 방패로 무장한 헤라, 아테나, 아레스가 기간테스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기간토마키아는 트로이 전쟁과 마찬가지로 기간테스로 상징되는 야만, 미개함, 혼란에 대하여 그리스로 상징되는 문명과 질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트로이 전쟁과 함게 고대 그리스 건축미술에서 자주 다룬 주제였다.
16.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북쪽 프리즈의 돋을새김 (부분): 왼쪽에 표범 가죽을 뒤집어 쓴 디오니소스, 혹은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헤라클레스와 키벨레가 있다. 키벨레 여신이 탄 전차를 끄는 사자는 마치 날랜 사슴을 공격하듯이 기가스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허리를 물어뜯고 있다. 이 앞에서 활을 쏘고 있는 쌍둥이 신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이다. 아르카익 시기의 부조이지만, 인물상과 동물상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고 역동적이며, 부분적으로 겹쳐 있어 매우 입체적으로 보인다.
17.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북쪽 프리즈의 돋을새김 (부분): 왼쪽의 제우스는 분실되어 보이지 않지만, 그가 올라탔을 것으로 짐작되는 전차를 이끄는 말들이 앞발을 높이 쳐들고 있다. 그 앞에 투구와 방패로 무장한 헤라, 아테나,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아레스가 기간테스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기간토마키아는 기간테스로 상징되는 야만, 미개함, 혼란에 대하여 그리스로 상징되는 문명과 질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 건축미술에서 자주 다룬 주제였다.
신전이나 봉납창고의 출입문은 보통 동쪽에 두지만, 시프노스 봉납창고는 경사진 언덕이라는 지형조건으로 인해서 부득이 출입문을 서쪽에 두었다. 서쪽 프리즈의 주제는 망실되거나 파손된 부조가 많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테나, 아프로디테, 그리고 헤라 여신 사이에 벌어진 미인선발대회에서 최고의 미인을 가리는 ‘파리스의 심판’으로 짐작되고 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는 여신의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다. 파리스에 의한 헬레네 왕비의 납치는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불화살이 되었다. 서쪽 프리즈는 크게 세 등분으로 나누어 맨 왼쪽에는 아테나 여신을 새겼고, 한 가운데에는 미인대회 우승자 아프로디테 여신을 조각하였다. (망실되어 없는) 맨 오른쪽에는 헤라여신이 있었을 것이다. 심판자인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와 헤라여신 사이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이제 막 파리스의 심판이 내려졌고 우승자가 결정되었다. 우승자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승리의 월계관을 쓸 것이고, 패배자는 눈물을 머금거나 심판이 채점을 엉터리로 했다며 불만을 품고 경연장을 떠날 것이다. 먼저 서쪽 프리즈의 맨 왼쪽에는 파리스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아테나 여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개달린 말이 이끄는 전차에 올라타려고 한발을 올려놓고 있다. 프리즈의 가운데는 미인대회 우승자인 아프로디테 여신이 우아한 자세로 한발을 땅에 내디디면서 전차에서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한껏 요염한 자세로 목걸이를 만지고 있다. 프리즈의 오른쪽 부분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아마도 최고미인으로 선발되지 못한 아쉬움과 파리스에 대한 원망으로 흘끗 뒤를 돌아보면서 전차에 올라타는 헤라여신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한편, 남쪽 프리즈는 조각의 주제 파악에 중요한 부분이 망실되는 바람에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아마도 한 여인의 납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서쪽 프리즈의 돋을새김(부분): (위) 서쪽 프리즈의 주제는 아테나, 아프로디테, 그리고 헤라 여신 사이에 벌어진 미인선발대회에서 최고의 미인을 가리는 ‘파리스의 심판’으로 짐작되고 있다. 파리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아테나 여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개달린 말이 이끄는 전차에 올라타려고 한발을 올려놓는다. (아래)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아프로디테 여신은 우아한 자세로 한발을 땅에 내디디면서 전차에서 내려오고 있다. 그녀는 한껏 요염한 자세로 목걸이를 만지고 있다.
19.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남쪽 프리즈의 돋을새김(부분): 프리즈의 주제 파악에 중요한 부분이 망실되는 바람에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아마도 한 여인의 납치장면을 새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왼쪽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제단으로 접근하고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를 했지만, 델피신전은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옆에 봉납창고를 지으려면 지형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아테네 봉납창고처럼 출입문을 동쪽에 낸 이상적인 건축물도 있지만, 시프노스 봉납창고처럼 지형적 제약으로 출입문을 서쪽에 낸 것도 있다. 델피박물관에는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복원도가 패널로 제작되어 벽에 걸려 있는데, 카리아티드 여인상이 서 있는 서쪽 출입구의 상단 프리즈에 ‘파리스의 심판’을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박물관답게 고증에 맞게 제대로 그린 것이다. 반면에 구글에서 검색한 또 다른 시프노스 봉납창고 그림에는 출입구 쪽의 박공과 프리즈의 돋을새김으로 각각 ‘헤라클레스와 아폴론의 다툼’ 및 ‘트로이 전쟁’을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출입구가 있던 서쪽이 아닌 동쪽 부조이므로 고증에 어긋나게 그린 것이다.
20.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복원도: (왼쪽) 델피박물관에는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복원도가 패널로 제작되어 벽에 걸려 있는데, 카리아티드 여인상이 서 있는 서쪽 출입구의 상단 프리즈에 ‘파리스의 심판’을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박물관답게 고증에 맞게 제대로 그린 것이다. (오른쪽) 구글에서 검색한 또 다른 시프노스 봉납창고 그림에는 출입구 쪽의 박공과 프리즈의 돋을새김으로 각각 ‘헤라클레스와 아폴론의 다툼’ 및 ‘트로이 전쟁’을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출입구가 있던 서쪽이 아닌 동쪽 부조이므로 고증에 어긋나게 그린 것이다.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삼각형 박공의 꼭대기와 양모서리에는 아크로테리온이라 불리는 조상을 올려놓았고, 처마에는 그리스식 가고일(Gargoyle·빗물 배출구)인 사자머리 상을 촘촘히 부착하였다. 괴수형상의 가고일은 중세 고딕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기에, 13세기 유럽의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한 고딕건축 양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빗물배출구인 가고일은 이보다 훨씬 오래 전인 고대 이집트의 하토르 신전(Hathor temple)에서 가장 먼저 사용됐고, 이후에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중세 고딕성당의 가고일은 그리스식 사자상 가고일이 괴수상으로 변형된 것에 불과하다.
21. 시프노스 봉납창고의 빗물배출구, 가고일: 그리스 신전의 처마에는 그리스식 빗물배출구(Gargoyle·가고일)인 사자머리 상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사자머리 가고일은 고대 이집트의 하토르 신전에서 가장 먼저 사용됐으며, 이후에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3세기 중세 유럽의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한 고딕성당의 가고일은 그리스식 사자상 가고일이 괴수상으로 변형된 것에 불과하다. (왼쪽 아래의 사자상 가고일은 델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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