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 충남 홍성 ~ 1984 | 대금·해금·퉁소의 명인
[경력 요약]
10세 전후에 지방 음악인들로부터 단소·대금을 배워 음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1930년 충청남도 대천에서 국악강습소를 열어 일반 강습을 시도했으며, 1938년 4월 잠시 동안 대금산조의 창시자 박종기로부터 산조를 배웠다. 그러나 박종기와의 수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으며, 잠시 배운 산조를 유성기 음반을 참고해 자득했다. 1947년부터 약 10여 년 동안 여성국악협회 등의 국악단체에 가담해 공연활동을 벌였고, 1960년대 초반까지는 해외공연을 갖기도 했다. 1964년부터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및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강사로 나가 대금·해금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무렵 교육현장에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박종기·한주환·지영희 등 여러 명인이 가락을 정리하여 '한범수류 대금산조', '한범수류 해금산조', '한범수류 퉁소산조' 등을 짰다. 1966년부터는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대금·해금 등을 가르쳤다. 한범수류 대금산조보를 정리한 악보를 1975년에 출판했는데 이 악보에는 그의 산조론(散調論)도 수록되어 있다. 오랫동안 교육 일선에서 가르치는 일에 주력했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이상룡·홍종진 등 현재 국악계의 중진 연주자들을 많이 배출했고, 그의 대금산조·해금산조·퉁소산조는 음반으로 전한다.
[한범수님의 음원을 구할 수 없어, 아래 박용호님의 한범수류 대금산조 Launching 해봅니다]
[한범수의 생애 및 음악세계]
죽사(竹史) 한범수(韓範洙)는 1911년 11월 12일(음)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율암리에서 부친 한윤석(韓允錫)과 모친 박순서(朴順緖)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범수는 10세 때 김원삼의 퉁소소리에 반해 그에게서 퉁소와 단소의 제작법과 연주법을 배우게 되면서 음악을 접하게 되었는데, 일제치하의 벼슬길을 작파하고 한학에 파묻힌 채 내산사립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을 기울였던 부친은 한범수가 퉁소와 단소를 만들고 배우는 일을 막지 않았다. 한범수는 1926년 충남 홍산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주 보통학교로 진학 할 때까지 퉁소와 단소를 그저 취미 삼아 불었을 뿐이었으나, 1927년 그의 나이 17세 때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마당 윤종선의 단소 독주를 듣게 되면서 그 동안 자신이 접한 음악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 해 여름 방학 때 공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한범수는 부친으로부터 윤종선을 소개 받고 부친과 더불어 단소배우기를 청하나 윤종선은 무정리에 살던 이영익을 소개해 주었고 한범수는 이영익에게서 단소와 양금으로 영산회상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그의 집에는 부친의 친구 뿐 아니라 여러 재인들이 많이 찾아 들었던 관계로 그의 솜씨가 알려지게 되면서 합주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고 그러면서 그의 음악적 감각은 자연히 무르익어 갔다. 다음해 광주학생사건이 터지고 그 여파가 전국으로 퍼져 공주에서도 학생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 한범수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쫓기게 되는 생활에 이르렀다. 그런 이후로 그는 몇 달째 학교도 가지 않고 단소만 불며 세월을 보냈고 가야금도 배우면서 악보를 익히게 되었다.
그 다음 해(1929년) 봄에 해마다 정월이면 찾아왔던 건립 패에 대금을 부는 김두팔이 끼어 오게 되었는데, 김두팔의 대금 부는 소리에 감동 받은 부친의 권유로 김두팔에서 대금 안공 법을 배우게 되면서 대금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연주할 대금이 없어 임시로 한범수 자신이 김두팔의 대금을 본떠 만들었으나 처음에는 제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그 후 계속 연구하고 개척해서 대금 만드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후일 수소문해서 구한 대금은 당시 쌀 두 가마니 값이었는데 함께 사들인 해금과 함께 더욱 더 오묘한 소리에 파묻히면서 차츰 다른 악기보다도 대금에만 빠져들게 되었다. 1930년 11월 민을애(閔乙愛)와 혼인하고 1935년 충남 대천에서 국악 전수 강습소를 설치하고 국악 계몽 사업을 하였다. 그러던 중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금산조의 창시자인 박종기의 대금연주를 듣게 되었고 그에 감명 받은 한범수는 그 후 박종기를 찾아가 지금의 남대문 근처에서 하숙을 정하고 산조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종기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관계로 진양 밖에 배우지 못하게 되어 같이 다니면서 배우기를 청하는 한범수를 딱하게 여긴 박종기가 자신이 ‘포리돌’ ‘오케’ ‘빅타’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9장의 축음기판으로 연습한 후 다시 만나기를 제의하였다. 그 후 2년 뒤인 1938년 박종기를 찾아가 그 동안 판이 닳도록 연습한 대금 산조를 연주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박종기의 제자인 한주환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가락도 습득하게 되었다. 한편 30세 무렵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마산 쪽에 갔다가 상가에서 풍악이 울리는 것에 의아해 물었더니 돌아가신 분이 팔순을 넘겨 호상인데다가 소리를 좋아하던 사람이어서 임종시 유언에 따라 풍악을 울리는 것이라고 하니 그 곳에서 대금 산조를 연주해 주고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예산 수덕사에 들렀을 때 일본총독을 호통 친 송만공 스님을 감격케 했고 어느 주막에서 초라하게 요양 중이던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을 우연히 만나 그의 대금산조로 눈물짓게 했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랑생활로 가세는 더욱 기울어 갔다. 1944년에는 왜놈이 보기 싫다고 자주 이사를 다니다가 2년 전 충북 보은 수한면 질십리로 숨어들었던 부친 한윤석이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다가 11월(음)에 사망하였으며 그 다음 해인 1945년에는 한범수가 2달 동안 장티푸스를 앓아 고생하던 중 5월(음)에 처 민을애가 세상을 떠났고 얼마 안 되어 같은 해 6월(음)에 모친이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37세 되던 해인 1947년 6월에는 여성 국극 협회에 입회하여 10여 년 동안 각 단체에서 활동하였는데, 여성 국극 ‘옥퉁소’는 한범수의 퉁소 연주로 유명해졌다.
그는 여성 국극 단체에 있으면서도 대금 산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55년 6월에 이옥선과 재혼하여 충남 서천군 마산면 나궁리로 이사하고 그 무렵부터 그 곳에서 늘상 대금산조의 가락들을 형성해 나갔다. 또한 이 무렵에 대금산조 가락을 퉁애에 얹어 불어 퉁애 산조 한 바탕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해금산조는 1957년경부터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1962년 4월에 정부가 파견했던 프랑스 파리의 국제 예술제에 참가하면서 어려웠던 생활은 다소 풀리고 이를 시작으로 하여 30여 개국을 순회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1963년 4월 25일부터 1965년 9월 6일까지 국립국악원에서 악사로 재직하면서 1956년부터 매월 실시된 국악 감상회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는데 재임기간 이전인 1956년과 60년에도 연주하였고 <국악연혁>에 따르면 그가 국악감상회에서 연주한 횟수는 모두 9번으로 기록되어 있다.
1964년 3월에는 국립국악원 재직 중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강사로 위촉되었고 이때부터 한범수류 해금산조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1965년 1월1일부터 69년 6월까지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서 강사로 활동하였으며 1965년 6월24일에는 충남 대전 정악원 국악발표회에 참가하였다. 1966년부터는 선화무용단 악장으로 재직하면서 4회에 걸쳐 미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3월부터는 국악예술고등학교에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체계적인 국악교육을 위해 '대금산조보' 출간 준비작업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68년 9월에는 정부가 영위한 멕시코 올림픽 문화단체에 참가하여 공연하였고, 1970년 5월에는 일본만국전람회에 예술단으로 참가한 후 재일교포 위안 공연을 위해 2개월간 각지를 순회하기도 하였다. 1974년 10월에 "한국음악선집" 제3집에 퉁에 산조를 녹음하였으며 1975년에는 한범수가 심혈을 기울인 끝에 이룬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대금산조보가 출간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75년 12월 13일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출판기념회 겸 산조 발표회를 열었다. 이후로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1981년 문화재 심의 과정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3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1984년 7월 22일(음) 석관동에서 사망하였다.
[출처 : 사전 및 인터넷 자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