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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렘의 관상적 영성에 대한 이해
김오성(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
1. 들어가는 글.
이 글은 샬렘 선임연구원들의 논문과 샬렘 사명과 비전에 나타난 ‘관상적 영성’에 대한 이해를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관상’이라는 말은 그 말을 사용하는 단체들과 개인들의 의향에 따라서 일정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특히 관상적 영성에 대한 전통이 일천한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관상은 또 하나의 종교 상품이나,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이교적인 풍습, 과거로의 복고적 회귀, 신앙의 개인적인 악습을 강화하는 수단 혹은 신앙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 등으로 이해되곤 한다.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이해되는 관상의 스펙트럼 속에서 한국샬렘영성훈련원이 지향하는 관상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을 두고 기도생활을 하면서 깨달아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샬렘영성훈련원에서 반 발자국을 앞서서 함께 기도하고, 학습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온 사람들이 함께 걷고자 하는 길벗들에게 그동안 걸어온 중간적인 결과물을 나누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최종적인 결과나 판단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왔던 길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작업으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한국교회는 내외적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그 위기를 돌파할 방법을 마련해왔다. 물론 그 방법에 대한 모색은 부흥회 혹은 사경회, 성경공부, 다양한 형태의 설교연구, 제자훈련, 해외선교 등등이 그 일단을 이룬다. 이러한 방법들과 더불어서 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산업화와 발맞추어 농촌공동체가 붕괴되면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에게 전도활동을 시작한 흐름들이 도시산업선교와 빈민선교로 발전하면서 생성된 사회참여적인 운동과 신학도 한국교회 전체로 볼 때는 그 숫자는 미미하지만 한국사회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도 이제는 역사의 명맥만 겨우 부지한 채 겨우 버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제 한국기독교는 스스로 변화되면서, 한국사회를 변화시킬 그 근본적 능력을 재/발견해야 한다.
2. 몸 말
한국교회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80년대 후반인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말을 사용하면서도 기존에 신앙훈련의 일환인 산 기도나 통성기도, 방언기도와 같은 성령체험과 어떤 점에서 겹치고, 어떤 점에서 헤어지는지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던 것 같다. 영성에 대한 이해의 혼란은 샬렘의 선임연구원의 논문을 보면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샬렘의 선임 연구원들의 논문에서 ‘경로와 단계’ 부분을 보면 ‘영성은 앎과 행함, 느낌의 세 가지 주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세 가지 표현 양식은 인간의 능력을 지知·의意·정情으로 이해하는 고대의 구분방식을 따르고 있다. 지정의에 대한 이해는 진眞선善미美, 즉 진리, 선함, 아름다움의 길로 구분하지만 결국 영적인 삶의 성장이라는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결합되어 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12세기 수도사였던 클래르보의 버나드가 제시한 사랑 안에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선임연구원들은 제시한다. 그것은 (1)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 (2)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3)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결국 (4) ‘하나님을 위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세 가지 고전적인 경로들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고, 다만 각 사람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한 인도하심을 말하고 있다. 또한 사랑안에서 성장의 과정이 어떤 단계적인 발전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의 경험은 결코 직선전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설명은 직선적인 시간상의 발전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나선형의 성장’ 혹은 ‘입체적 성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영성훈련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3가지 이해와 관련되어 지(인식)적인 차원, 정서(감정)적인 차원, 의지(행함)의 차원으로 성경공부가 지적인 차원이라면,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나 부흥회는 정서적인 차원, 그리고 여러 가지 형식의 선교는 의지적인 차원으로 거칠게 분류해볼 수 있다. 인간이 기질적으로 어떤 선호 경향성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이 선호하는 차원을 강조하게 되거나, 혹은 자신이 경험한 어떤 차원을 더 우위에 둔 설명 방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영적인 삶에 대한 3가지 차원은 어떤 것을 우선으로 하는 계서階序적인 차원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지닌 경험의 제한적인 속성상 한 가지 차원에 대한 관심이 어떤 물매를 가지게 될 때, 지식이 건조한 추상적 개념에, 행동의 맹목적인 열정과 탈진에, 감정은 자기도취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를 경계하면서 이를 넘어서기 위한 방식은 3가지 차원을 깊숙하게 연결하는 것에 대한 열려진 태도와 공동체의 삶 가운데에서 타자를 통한 자신의 성찰을 생활에서 양식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실천이 그 기초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3가지 차원을 연결하는 설명방식의 한 표현이 ‘사랑’이라는 점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관상’이라는 말도 이러한 사랑의 가장 심오하고 농밀한 경험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고 논문에서는 말하고 있다. 관상이 사랑의 깊은 차원이라면, 사랑이 훈련으로 얻을 수 없는 것처럼, 관상은 훈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다만 어떤 것에 대하여 수용적인 태도로 지극한 시간을 들이게 되는 과정 중에 불현 듯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관상은 낯 설은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존재의 빈터’를 마련하는 어떤 자세와 태도를 일상적으로 지극하게 행해지는 과정 중에 은총으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상은 세상 가운데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인식하고 그것들에 대해 사랑의 응대이며, 세상 가운데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열린 태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은 개인과 체계, 침묵과 활동, 영성과 저항, 영과 육 등과 같이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구분된 것들 사이에 어떤 균형을 유지하려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이런 태도와는 달리 선임 연구원들은 “관상과 행동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행동 가운데 모든 것을 지탱하고 포괄하는 관상이 존재함을 이해하는 것”(5쪽)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의 현실 가운데 우리 존재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서의 관상은 ‘지금 여기(Here and Now)’(6쪽)에 관심을 두는 태도와 ‘비우는/지우는 법을 배우기(learning for unlearning)’(6쪽에 나와 있는 우리의 습관들을 버리는 것)라는 태도와 연관이 되어 있다. 이런 태도와 관계된 관상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 그래서 가끔씩 주어지는 경험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상의 경험은 일상생활 속에서 관상적인 방식의 어떤 삶의 양식을 발달시키는 중요한 기초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적인 삶의 양식은 우리 존재의 근거가 우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말하며, ‘우리들의 선택과 결정들의 과정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관상적인 삶은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온 과정을 신비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의 지식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인간의 경험 안에 포섭되지 않으며, 인간의 정서자극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느낌 안에서 발견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활동은 ‘철저한 사랑’으로(7쪽) 시공간을 넘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7쪽).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선함과 진리, 아름다움, 평화, 정의를 추구하며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삶이라는 춤판으로 이끄시고 계신다.(7쪽)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근본적으로(radical) 신뢰한다.
우리는 이러한 신뢰가운데 관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배움과 익힘의 과정을 지속해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칸트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영적인 공동체의 도움 없는 개인의 영성훈련은 맹목일 수 있으며, 개인의 훈련 없는 공동체는 허망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임연구원들의 논문에서 말하는 관상은 일상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철저한 사랑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과 세계에 대한 궁극적 사랑에 함께 하기 위하여 분별의 전 과정(교육, 훈련, 공동체와 개인의 지도 등을 포함하는)을 우리 생활에 양식/버릇/습관으로 내려앉히기, 주의 깊게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를 동양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고, 성경적으로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살전 5:16-18)를 실천하는 신앙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상에 대한 표현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몸 안과 밖에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인 것이다.
이러한 관상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샬렘의 사명선언문과 비전이 작성되어져 있다. 사명선언문은 관상적 삶의 태도를 기르고, 이를 육성할 수 지도력을 양성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관상적인 삶의 태도를 풍성하게 하기 위한 수련의 과정과 이런 수련의 과정을 자극하고, 지원하고, 협력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나가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상적인 삶의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친밀하게 함께 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경험을 기독교 관상전통의 지혜를 따라 공유하고 해석하며, 이웃종교들과 영적 전통들의 관상적 차원들을 참조하여 더욱 풍성하게 하며, 삶의 최고의 지향인 하나님께서 진정한 안내자임을 근본적으로 신뢰하며, 이 안내를 받기 위하여 매순간 순간 하나님께 열려있기를 추구하며(능동적 수동),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전망이 불확실할 때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관상적 삶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핵심적인 가치들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사명선언문은 이러한 관상적인 삶을 지속하기 위하여 필요한 교육과 훈련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핵심적인 가치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가진 독특한 능력을 통하여 활동하시므로, 영적인 삶을 위하여 인간 능력의 3가지 차원인 지식, 행함, 정서에 역점을 두어 다양한 교육과 훈련을 하며, 개인이 공동체와 더불어서 함께 하는 침묵의 힘, 상호지지와 격려를 존중하며 이에 대한 충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와 더불어 관상적 삶의 지향은 개인과 공동체를 통하여 존재하고, 경청하고, 보살핌의 방식으로 구체화된다고 믿는다. 관상적 삶은 결국 행복한/좋은/참된 존재well-being(혹은 참자아, 구원받은 존재)로서 온전하게 살아가면서 평화를 이루라는 하나님의 열망에 응답하여 변화되는 개인과 세계를 전망한다.
결국 사명 선언문은 3가지 중심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관상적 삶이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것. 2) 관상적 삶을 이루기 위한 교육과 훈련의 방식. 3) 관상적 삶이 이루어내는 개인과 세계의 변화.
3. 나오는 글
이상으로 간략하게 샬렘의 선임연구원들이 말하는 관상적 삶과 이를 기반으로 해서 작성된 사명선언문과 비전을 살펴보았다. 이를 검토하면서 한국 샬렘영성훈련원이 지향해야 하는 관상적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중요한 참조점을 얻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서 현재 한국 샬렘영성훈련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개인의 인상에 기초하여 분석해보면서 과제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현재 한국 샬렘 영성훈련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과거에 소위 민중교회나 사회선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참여해오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관상적인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경로는 아마도 대부분 유사한 경로를 지니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것은 사회참여적인 신앙이 갖게 되는 피로감을 재충전하는 신앙의 방식을 발굴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기존의 교회적인 신앙훈련 방식으로 더 이상 자신을 신앙적으로 재주체화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재주체화하는 방식을 탐색하다가 한국샬렘영성훈련원과 조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평신도들과 목회자들도 역시 기존의 신앙에 대한 답답함과 갈증을 해결하기 위한 모색의 과정에서 접촉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담과 심리치유 등과 같이 심리학적인 접근 방식과 기독교적인 방식의 연결고리를 모색하거나, 보완하거나, 넘어서기 위한 과정에서 함께 자연스럽게 모인 것으로 보인다. 인상에 근거하여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략적인 분석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의 저평가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들의 향후 과제들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다종교적 사회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를 성찰하면서, 관상적인 삶의 태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보다 깊고 풍성한 삶의 방식을 전하며, 이러한 삶의 태도가 우리들의 일상적인 활동의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어야 됨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할 것이다. 이 운동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들이 선택해야할 언어와 태도들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우선적으로는 기존의 기독교 신앙인들을 위한 배려이다. 어떤 언어와 태도들이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는가는 섬세한 방식으로 접근해나가야 할 것이다. 진부한 언어로는 기존의 신앙양태를 재확인할 뿐이고, 낯선 언어로는 기존의 신앙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으로 비쳐지게 되어 배격됨으로써 다시 한 번 기존의 신앙양태를 고수하게 만들 뿐이다. 진부함과 낯선 사이에 어떤 길에 우리가 나아갈 길이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지혜를 모으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