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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이중주 / 손훈영 >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초록 숲 위로 투망처럼 드리워져 있다. 베란다 창 앞으로 바투 다가와 있는 산은 이제 마악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창을 열어두고 다가오는 여름을 바라본다.
팡, 팡. 열어 둔 창으로 테니스공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 부딪히는 소리 사이사이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섞여든다. 힘껏 내리친 공이 빗나갔는지 안타까운 탄식이 터지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쳤을 때의 환호성이 높다랗게 들려오기도 한다.
베란다로 나가 테니스장을 내려다본다. 높푸른 히말라야시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테니스장은 치외법권 지역인양 아늑하다. 알맞게 다져진 맨 흙바닥이 정갈하고 높다란 심판석 의자의 진초록 덮개가 새뜻하다.
연두색 공들이 네트 위를 빠르게 오간다. 황토빛 흙을 박차고 하얀 운동복이 튀어 오른다. 튕겨 오르는 공을 따라 공기를 가르는 사람들의 그을린 허벅지 위로 햇살이 작열한다. 약동하는 생명력이 라켓 한복판에서 전율하고 터질 것 같은 율동성이 코트를 가득 메우고 있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소리로 흥건한 테니스장을 벗어나 시선을 조금 오른편으로 옮긴다. 봉긋한 봉분 세 개를 감싸 안고 있는 야트막한 동산이 보인다. 조밀한 숲을 병풍처럼 두른, 나무 없는 낮은 구릉은 푸른 풀들이 융단을 깐 듯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공기 중에 보랏빛 풀꽃들이 고요하다. 이따금 비롱비롱 산새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날아든다.
투명한 햇살 아래 둥그렇게 누워있는 봉분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생로병사의 긴 여로를 마감한 삶은 이제 비로소 진정한 안식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훼손시킬 수 없는 견고한 평화다. 살면서 늘 갈구하던 그것을 이윽고 품안에 안고 흔들림 없는 침묵으로 고요하다.
봉분은 하나의 메시지다. 비등점에 이를 때까지 열렬히 살라고, 그리하면 마침내 이런 확실한 것 하나 안겨 주겠다는 신의 약속이다. 약속은 적요한 햇살 아래 명확하게 빛나고 있다. 저 약속들은 이미 도처에 새겨져 있었다. 다만 두려워 우리들이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네 삶의 공간으로부터 멀리 추방시켜 놓았었다.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살아가지만 삶이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어야만 우리들은 살아갈 수 있었다.
얼마 전 중병을 선고받음으로써 죽음과 좀 더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투병의 시간이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이다. 나와는 별 상관이 없던 그것이 이제 불가분의 관계로 가까워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어둠이 더 무서워지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죽음을 바로 볼 수밖에 없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바로 죽음이다. 죽어있는 상태로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 마음이어선지 요즘 들어 잔치에는 잘 가지 않아도 죽음의 장소는 열심히 찾아다닌다. 가까운 친인척 장례식에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먼 친척까지 문안을 간다. 정기 진료일이면 병원 장례식장을 서성대다 오기도 한다. 쇠락의 냄새와 죽음의 기미에 점점 익숙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무엇으로 내 일상에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며칠 전 시백부 상을 치렀다. 입관을 지켜보았다. 입관실은 삶과 죽음이 아무런 갈등 없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주검 옆에 싱크대와 세제가 천연덕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에 익숙한 세제와 핸드크림이 삶과 죽음과의 거리를 빠르게 단축시켜주었다.
전통적 예법에 준한 절차로 구순을 넘긴 백부는 봉인되었다. 딸들의 흐느낌이 백부의 감긴 눈 위로 흩어졌다. 차가운 테이블 위에 일자로 누운 백부의 한 줌 몸뚱아리를 겹겹이 싸매고 묶는 절차가 당연한 수순을 밟는 듯 자연스러웠다.
장례관리사들의 일상적인 표정과 직업적 몸짓이 한 사람의 죽음에 압도당해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럴 거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살아있음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죽음이 저 먼 곳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누수로 얼룩진 천장이나 수도꼭지만큼이나 우리들 삶 속에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과실 속에 씨가 들어있듯 삶이 시작될 때 이미 죽음도 함께 잉태되었다’는 릴케의 말이 생각났다. 삶 속에 죽음이 있다는 말이 하나의 관용어구가 아니라 생생한 느낌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표면과 이면이었다. 삶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시작되면서 죽음도 함께 시작되었다. 삶이 무르익으면 죽음도 함께 무르익었다. 사람은 삶만 사는 게 아니라 죽음도 함께 살아야 했다. 결국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이었다. 잘 죽을 수 있으려면 잘 살아야 함이 전제되었다.
죽음의 절차를 지켜보며 살아갈 일을 생각하는 나를 보았다. 죽은 자를 보내는 시간 속에서 산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진실한 약속 하나를 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떠나는 자에게 남아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약속은 무엇일까. 당신 곁으로 갈 때까지 더 멋지게 살아가겠다는 새김질이 아닐까.
막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에게 하는 약속은 신에게 하는 약속이나 진배없었다. 혹 이것이 죽은 자에 대해 산 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조문행위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성복제를 지내는 의식들이 이어지는 그 시간만큼 나 자신이 삶에 대해 열렬해지던 때가 또 있었을까. 명확한 죽음 앞에서 삶도 명확해졌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자의 육신을 눈앞에 두고 삶에 대해 열심을 다짐하는 오롯한 시간이었다. 내 다짐이 더 뜨겁고 간절할수록 장례의 의미는 깊어지고 죽은 자와의 관계는 더 두터워졌다.
우리 집 베란다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망을 안고 있다. 왼편 테니스장은 살아있음을 음미하기에 좋고 오른편 봉분은 죽음을 명상하기에 더 할 나위 없는 풍경이다. 생사가 원래 같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삶의 충동인 테니스장과 죽음의 집인 봉분이 환한 햇살 아래 거리낄 것 없이 어우러지고 있다. 귀를 열면 약동하는 생명의 환호성을 들을 수 있고 눈을 돌리면 언제나 고즈넉한 봉분을 마주 볼 수가 있다. 삶과 죽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전망이 이 공간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십년 넘게 이 집을 지키고 있다.
산책길일까, 테니스장과 야산 사이의 작은 오솔길로 초로의 할아버지와 예닐곱 손자가 손을 맞잡고 올라간다. 호기심 많은 손자의 해찰에 할아버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고른다. 그들 속에 삶이, 또한 죽음이 있다. 삶과 죽음의 두 얼굴이 사이좋게 그들의 등 뒤를 따르고 있다.
* 심사평 : 지연희 수필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7사람의 14편이었다. 각기 주제가 다른 작품들로 특정한 공간, 사물, 상념의 세계를 사유의 깊이로 짚어내어 준 보편성을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은 삶의 체험을 중심축으로 확고한 주제와 다양한 소재를 결합하여 의미를 형상화시켜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당선작 한 편을 선하여야하는 책무를 다하기 위해 보다 세심한 심의가 필요했다. 무엇을 말하려하고 그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에 관점을 두었다.
본심 2차 심사에서 김응숙의 <마당>, 양태순의 <두레>, 조현미의 <민달팽이의 노래>, 손훈영의 <이중주> 수필작품을 선정하여 놓고 이들 작품들이 지닌 단점을 골라내는데 시선을 모았다. 수필문학이 문학작품으로 승화되는 데는 일상적 사실체험에 대한 심도 깊은 사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어떤 사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실에 대한 필자의 사고를 천착하는데 있다. 최종심에는 <이중주><민달팽이의 노래>를 두고 당선작을 선별하다가 수필 <이중주>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수필 <이중주>는 아파트 베란다를 열면 테니스장이 보이고 테니스장을 조금 벗어나면 봉긋한 봉분 세 개를 감싸 안고 있는 야트막한 동산이 보인다. 활기찬 호흡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죽은 이들의 안식처가 생멸의 크기로 공존하는 이중주의 연주가 이 수필의 주제이다. 유려한 문장으로 펼쳐내는 이 수필은 필자의 숙련된 내공의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문장은 의미를 담는 그늘이다. 한 문장 한 문장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문장들의 조합은 감동의 크기로 독자의 감성을 흔들게 한다.
<2016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물미장/류현승>
객주 문학관에 들어섰다. 농기구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다들 투박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그 시대의 사내를 닮았다. 지게 앞에 작대기 하나가 길게 누웠는데, 밑 부분에 뾰족하게 박힌 쇠가 보인다. 지게와 작대기를 보니 평생 짐을 진 아버지의 삶에 가 닿는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번도 없이 전장에 배치되었다. 낯선 골짜기에서 전우들이 하나둘 쓰려져도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셨다. 전쟁이 휩쓸고 간 뒤라서 남은 것이라고는 기근과 상처뿐이었다. 많은 식솔이 먹고살려면 산골짜기 비탈이라도 개간해야 했다. 물길을 따라 일구다 보니 천 평이 될까 말까 한 논이 자그마치 쉰하고도 다섯 다랑이나 되었다.
말이 좋아 논이지 기름진 밭보다 못했다.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만들었기에 논바닥이라야 함지박만 했다. 가족에게 목숨 줄과 같기에 아버지는 문전옥답으로 여기며 농사를 지었다. 살얼음이 녹기도 전에 못자리를 하고 나서부터 논으로 가는 날이 잦아졌다. 안방보다는 산골짜기가 편한지, 아버지가 논에 가지 않는 날은 밥에 뉘같이 드물었다.
아버지의 지게는 유난스레 높았다. 짐을 많이 싣기 위해, 지겟가지 중간을 가로지르는 까막서리 양쪽으로 다른 막대를 덧대 묶어 높이를 더했다. 그러고는 누렇게 익은 나락을 지게 위에 쌓아올렸다. 우기가 감도는 날이면 베어놓은 나락이 비에 젖을세라 꼭두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집과 논을 오갔다. 멀리서 보면,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나락볏가리가 공중에 뜬 채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골짜기에 있는 외딴집이다 보니, 밤마다 빨갱이들이 와서 괴롭혔다. 자칫 자식에게 해를 입힐까봐 아버지는 집을 버리고 큰 마을로 이사하였다. 그리하여 애써 개간한 논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산모퉁이 몇 개를 돌고 개울을 두 개나 건너야 논에 닿을 수 있었다. 가는 길은 오르막이라서 숨이 턱에 닿아 입에서 단내가 났고, 오는 길은 내리막이라서 산짐승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후르르 뛰어 내려왔다. 빈 몸으로 다니기에도 힘든 길이었다. 그런 길에서 나락을 지고 후들후들 다리를 떨던 아버지가 잠시 쉴 때는 지게가 넘어지지 않도록 작대기로 받쳐 놓았다.
아버지는 분답잖게 봄비가 오는 날이면 창고 앞에서 지게 만들기에 열중했다. 끌과 자귀로 뚝딱뚝딱 나무를 다듬는 소리가 늦잠 자는 내게 자장가처럼 들렸다. 지겟가지 두 개를 바로 세워 놓고 중앙에 세장을 붙여 몸체를 맞댔다. 정으로 지게 목발에 구멍을 뚫은 다음, 짚을 물에 축여 꼽꼽해지면 나무망치로 토닥토닥 두드려 등석을 엮어 붙였다. 어깨에 메는 미끈은 긴 머리를 땋듯 정성스레 땋아 지게에 달았다.
지게를 손보고 나면 아버지는 지겟작대기를 만들었다. 위쪽이 가위처럼 벌어진 나무를 골라 아버지의 키에 맞게 잘랐다. 겉을 매끈하게 다듬은 다음 송곳처럼 뾰족한 쇠를 끝 부분에 박았다. 아버지는 빈 지게를 진 채 작대기로 땅을 몇 번 짚어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작대기 끝에는 쇠가 들어가도록 둥글게 말아놓은 놀구멍이 없다. 슴베가 잘 들어가게 하는 괴구멍도 파지 않는다. 작대기 끝에 쇠를 박으면 그것이 물미장이다. 호미나 낫에는 힘을 받도록 테두리를 감싸주는 신쇠가 있지만 물미장에는 아무런 치장도 없다. 오직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묵묵하게 삶을 지탱하는 내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농사일밖에 몰랐다. 땀에 젖은 베적삼에 논 갈고 밭을 갈았다. 동이 트면 아침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오듯, 자고새고 하는 일이 지겹지도 않은지 우직하게 일만 하였다. 밤이면 끙끙 앓아도 날이 밝으면 들로 나가는 일벌레가 따로 없었다. 오직 땅만 아는 샌님처럼 땅 한 뙈기 늘이는 일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다. 그런 아버지는 일을 놓으면 밥숟가락을 놓는 것과 같다고 여기셨는지도 모른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날 때 작대기는 요긴했다. 촉이 땅에 쏙 들어가라고 아버지는 작대기에 힘주어 꽂았다. 그런 다음 한 손으로 작대기를 짚고 한 손으로는 지게 목발을 잡고 무릎을 천천히 세웠다. 비탈진 길에서는 작대기로 지탱하며 한 발 두 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발이 부르트고 다리가 아파도 묵묵히 버틴 아버지에게 지게와 작대기는 한 몸이었다.
아버지는 새벽이슬을 맞으며 길도 아닌 비탈 섶을 넘나들었다. 촉이 박힌 작대기로 땅을 짚으며 산속의 적요를 발걸음으로 사각사각 깨워가던 길. 아버지의 발바닥에 굳은살을 덧대게 한 그 길엔 이제 울울창창 숲이 우거져 있으리라. 산골짜기 하나를 길게 차지했던 논은 주인의 부재를 알까. 여름이면 어김없이 하얀 벼꽃을 피우는지 궁금하다.
가끔 작대기가 사립 안에 있으면, 우리 형제들은 그것으로 마당에 금을 그었다. 반대차기나 땅따먹기를 할 때 몸을 구부리지 않고 금을 그을 수 있었다. 물미장으로 그은 금은 밟아도 여간해서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뒷밭에 독사라도 나오면, 화들짝 놀란 어머니는 김을 매다가도 촉이 박힌 작대기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창처럼 뾰족한 물미장에게 죽임을 당한 독사는 개울가에 있는 가시나무에 연 꼬리처럼 걸리기도 했다.
삶을 배우는 데 일생이 걸리고, 죽음을 배우는 데도 그만큼 걸린다고 한다. 사람은 늙어야 사방이 보인다는 성인의 말이 있듯,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나서야 아버지를 여러 면에서 볼 수 있었다. 노부모의 장남이었으며,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여러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었다. 마을에서는 척박한 땅을 억척같이 일궈 옥토로 바꾼 농사꾼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 권세를 내세우며 거드름을 피웠다면, 오늘 이처럼 애틋하게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아버지이기 전에 평범한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소낙비 지나가듯 가버리는 것이고 보면, 아무리 바동거려도 살림에 주름이 펴지지 않으면 다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 않았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었을 것이며, 친구들이 요사스런 자리에서 장단에 맞춰 가무를 즐길 때면 왜 휩싸이고 싶지 않았으랴. 약주를 좋아하는 옆집 아저씨처럼 취생몽사로 적당히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삼불주의 三不主義를 지켰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서 어떠한 일도 뿌리쳤을 것이다.
철부지 때는 지게를 지고 다니는 아버지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내 삶에 있어 이러한 기억의 화첩은 비밀의 유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면서 힘든 일에 부닥쳐도 옛 그림을 떠올리며 거뜬히 견뎌낼 수 있었다.
물미장을 가만히 바라본다. 연필심 같은 촉으로 기억을 다시 쓴다. 아득한 풍경이 연막처럼 퍼지다가 복통처럼 가슴을 내리누른다. 아버지의 삶이 납덩이같이 머릿속에 남아 무거운 공기를 타고 서서히 퍼진다. 평평한 일상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벼랑에서 피운 삶. 비탈길을 오르고 아찔한 낭떠러지 옆을 조심스레 걸어온 아버지의 삶이 전시관 유리 안에 박제 되어 있다.
오늘 아버지의 삶을 다시 읽는다. 그 시절의 화첩을 몇 장 넘기다가 덮는데, 마음의 골짜기에서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꾸다 만 꿈처럼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 당선소감
꿈에 아버지가 아무 말씀 없이 나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편찮으신 어머니의 손을 잡는 순간에 깨어났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부리나케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당선통보를 받았습니다. 순간 꿈에 본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성탄절에 날아온 선물이었습니다.
수필은 하얀 공간을 메우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를 채우면서 내면의 아픔을 숨기고 싶었지만, 펜은 자꾸만 즐겁던 일보다 아픔을 후볐습니다. 썼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다시 썼습니다. 수필은 내게 있어 내면의 허물을 한 겹씩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더 깊은 사색의 길로 떠나야겠습니다.
그동안 채찍질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머리를 맞대고 긴 시간 함께한 문우님과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준 남편과 딸에게 빚을 졌습니다.
졸작을 선정해 주신 심사 위원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큰 문학의 장을 열어주신 전북도민일보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눈부시게 솟는 해처럼 병신년 새해에도 빛나는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심사평] 조미애 <한국문인협회 및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전국 각지에서 응모한 수필은 150명의 작품으로 총 332편이었다. 한 편의 수필을 위해 오랜 시간 공부를 했고 공을 들여 완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예년에 비해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글들이 많았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담아 두었다가 자신의 기억을 역사화 하면서 풀어 쓴 수필은 새로운 감동이 된다. 단순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문학과 삶이 자유롭게 교차할 수 있다면 좋은 수필이다. 응모한 모든 분들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낸다.
당선작으로 류현승의 〈물미장〉을 뽑았다. 객주문학관에서 발견한 물미장을 통해 평생 지게 짐을 진 아버지를 연상함으로써 물미장의 존재를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승화시킨 점이 돋보였으며 문장의 구성 또한 자유로운 점이 뛰어났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문학이 삶의 물미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아깝게 탈락했지만 김형만의 〈점촌〉도 오래 들고 있었던 글이다. 독짓고 옹기 굽던 점촌이 없어지고 어머니 떠나신 장독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려져 있는 글의 소재가 좋았다. 현대와 과거를 좀 더 섬세하게 엮었다면 더욱 완성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조이섭의 〈널밥〉, 최재선의 〈못의 미학〉, 윤희순의 〈도래샘〉, 박일천의 〈바람꽃〉 역시 잘 쓰여진 글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가면>,<시금치 판 돈>,<부부>,<청국장 냄새>,<제사>,<푸른꽃>,<가방>,<할매매운탕>,<섬진강 패랭이꽃>,<절구에 얽힌 내력> 등의 작품에서 보여 준 가족의 소중함은 수필이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에 남는 글이었다. 아깝게 낙선한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2016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 박혜자 / 복숭아씨 >
과일가게 주인이 맛보라며 복숭아 한쪽을 준다. 토실토실 살이 올라 단 냄새를 물씬 풍기던 복숭아는 살을 다 발라내자 씨만 남았다. 주인이 복숭아씨를 휴지통에 던지고는 복숭아 한 개를 또 깎는다. 복숭아씨가 맨 몸으로 휴지통에 웅크리고 있다.
평생 땅 한 뙈기 가져 본 적이 없는 아버지 이름으로 땅이 생겼다.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산 아래의 천수답이었다. 천수답이 생긴 후로 아버지는 더욱 일에 매달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농작물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가는데 아버지의 몸은 마른 장작처럼 말라갔다.
복숭아 알이 주먹만큼 커지고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던 날 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터널 앞에서 내린다는 것을 그만 터널을 지나서 내리고 말았다. 무엇이든 때가 있다. 아버지가 건강을 챙겨야 할 때를 놓쳐 병을 얻은 것처럼 나는 터널을 지나 내리는 바람에 되돌아가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터널을 지나칠 때는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차가 데려다 주었지만 되돌아오는 데는 어둠과 매캐한 매연과 싸워야 했다.
세상을 살면서 예기치 못한 복병과 만나는 일이 허다하다. 허방을 짚는 일도 많다. 터널을 지나쳐 내린 것이 그랬다. 터널을 지나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내 몸무게만큼의 짐은 어깨를 짓누르고 발은 쇠사슬을 묶어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아무리 걸어도 보이지 않는 입구, 지나가는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 후끈거리는 열기, 짐이 누르는 육체의 고통, 암담한 내 현실과 살아갈 일들. 내 인생이 터널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고 무서웠다.
울면서 걸었다. 터널 속의 열기와 눈물 콧물이 섞이자 정신이 혼미해 왔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아버지에게 전해 달라며 동생이 준 사탕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사탕이 입안을 맴돌자 땅속으로 가라앉던 내 몸이 조금씩 땅 위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쓰디쓴 인생을 견디게 하는 것은 가슴에 담아놓은 달콤한 추억과 희망이다. 달콤한 추억은 아무리 먹어도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성격 급한 아버지는 지게작대기든 바지랑대든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셨다. 험한 말을 가리지 않아 욕쟁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학교에 다녀오면 들로 나갔다.
그 날은 오일 만에 서는 우리 동네 장날이었다.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포대를 메고 대문을 들어섰다. 동생과 공기놀이를 하던 나는 호미를 챙겨들고 들로 나갈 준비를 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포대를 보여 주었다. 포대에는 우리 가족 수만큼의 수박이 들어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환한 웃음을 지으며 수박 한 통씩을 나눠주셨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수박의 꼭지부분을 잘라 뚜껑을 만들고 숟가락으로 수박을 파서 먹었다. 수박 한 통씩을 안고 마루에 앉은 가족. 세상에서 그보다 아름다운 그림은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수박을 다 먹고도 수박뚜껑을 열었다닫았다하며 한참을 가지고 놀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수박의 추억을 남겨주셨다. 그 추억 덕분에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힘들고 표현을 잘 못해서 그러셨던 거라고 믿게 되었다.
복사꽃처럼 뽀얗던 아버지의 얼굴은 검게 변해서 광대뼈가 나와 있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살가죽은 고무줄처럼 늘어났고 희망을 놓아버린 마음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내 손을 잡은 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삶이 말라가면 눈물도 마르는지 아버지는 오래 울지 못했다.
한 때는 태산을 옮길 만큼의 패기와 열정을 가졌고 가족을 위해서라면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 지금은 잎을 다 떨구어낸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근사한 집을 지어 아내와 자식을 호강시키며 호기롭게 살리라 꿈도 꾸었다. 그러나 건강 앞에서 꿈은 바스라졌고 가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처지에 놓였다.
아버지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 어둡고 습기 찬 터널에서 입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입구는 찾을 수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미동도 않는 몸을 원망해봤자 마음만 상할 뿐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밀양 어디선가 복숭아 농사를 짓는 아저씨의 아들이 복숭아를 들고 병실로 들어섰다. 입에 대기만 해도 단물이 줄줄 흐를 것 같은 복숭아의 냄새는 향긋했다. 그 때 아버지가 번쩍 눈을 떴다. 복숭아가 아버지의 눈꺼풀을 밀어올린 것이었다. 손오공이 하늘에 있는 천도복숭아를 먹고 불로불사를 누린 것처럼 아버지도 복숭아를 먹으면 병을 툴툴 털고 일어날 것 같았다.
나는 복숭아 주위를 빙빙 돌며 아버지의 몫으로 몇 개나 돌아올까 계산을 했다. 떡 줄 아저씨는 잠만 자고 있는데 나 혼자서 김칫국을 마셔댔다. 아저씨는 잠에서 깨어나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복숭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줌마가 껍질을 벗겨 복숭아를 주자 아저씨가 짜증을 부리며 손으로 쳤다. 그 바람에 복숭아가 공중돌기를 하더니 내 발 앞에 떨어졌다. 살이 터진 복숭아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단 내음이 훅하고 코를 스쳤다.
아저씨는 복숭아나무를 키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복숭아는 단맛을 가지게 되었고 아저씨는 병을 얻었다. 복숭아를 돌보는 일을 좀 쉬어가면서 했더라면 싶어 복숭아를 미워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연민이 느껴졌다. 살이 터진 복숭아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아저씨의 마음을 모으듯 나는 정성을 다해 복숭아를 쓸어 모았다. 복숭아가 천도복숭아이기를, 복숭아를 키운 아저씨의 인생도 달고 달기를 빌었다.
복숭아의 성한 부분을 떼어 입에 넣어주자 아버지는 마다하지 않고 드셨다. 보고 있던 아저씨가 복숭아 두 개를 주셨다. 며칠째 죽도 넘기지 못하신 아버지가 “아! 맛있다!”를 연발하셨다.
아저씨가 복숭아씨를 침대머리맡에 두었다. 씨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또 싹을 틔우는 것을 보고자하는 마음이 엿보여 나도 따라 했다. 아버지의 고통이 복숭아씨 무게만큼 작아지기를, 복숭아씨가 또르락또르락 경쾌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아버지의 몸도 경쾌하기를 빌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아저씨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복숭아씨를 두 손 안에 감싸 쥐고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띠그그르르르 , 복숭아씨 부딪치는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아저씨를 따라서 복숭아씨를 비볐다. 복숭아씨 비비는 소리와 함께 병실에 생기가 흘렀다. 모로 누워 말도 하지 않던 환자들이 누가 씨를 더 빨리 비비는지 시합했다.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다. 나에게 남겨진 세 동생과 연약한 어머니, 우리 다섯 식구는 모진 세월을 살아왔다. 힘든 일과 마주칠 때마다 터널을 떠올리며 한발 한발 묵묵히 걸었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처럼 긴 터널도 한발 한발의 힘으로 빠져 나오고 높은 산도 한 걸음 걸음이 더해져 정상으로 간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럽던 일도 지나면 추억이 된다. 그 날의 터널도 복숭아도 이젠 추억이다.
크고 모양 좋은 것으로 백도 한 상자를 샀다. 씨를 깨끗이 씻어 두었더니 까슬까슬 말랐다. 손안에 넣고 비비자 경쾌한 소리가 난다. 내 인생이 경쾌해지는 것 같다.
■ 수필 당선소감 / 박 혜 자
돈키호테·연암처럼 멋진 문장가 되고파
글을 읽고 쓸 때면 행복하고 내가 지은 밥을 맛있게 드시는 분들을 보면 더 없이 행복하고 아이들과 떠들고 놀 때는 더더욱 행복합니다.
행복한 일이 또 있습니다. 동시를 쓰는 선생님들과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일입니다. 돈키호테를 시작으로 열하일기를 읽었습니다. 돈키호테의 시종 싼초와 연암의 하인 창대와 장복이는 주인을 능가할 만한 유머를 지녔습니다. 함께 지내다보면 생각도 닮기 때문인가 봅니다.
돈키호테처럼 고아와 과부와 힘없는 자의 편에 서고 싶었고 연암처럼 유머러스하고 멋진 문장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발뒤꿈치도 닮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발뒤꿈치의 그림자라도 닮자는 생각으로 오늘도 달리고 있습니다.
돈키호테 스타티 선생님들과 무가로 아름다운 동시교실을 운영하는 박일 선생님 덕분에 제 행복이 날로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엉뚱한 일만 벌이는 아내를 보듬어주는 고마운 남편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성준, 성아, 백현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제 인생에 또 하나의 행복을 쌓았습니다. 좋은 상을 주신 동양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게 살며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2016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비를 기다리는 마음 / 손훈영 >
두툼한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한다. 하늘의 허파가 용트림을 하며 짧고 강한 바람을 쏟아낸다. 번갈아 쉬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당장이라도 엄청난 비를 퍼부어 댈 것 같다. 비의 숨 냄새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비가 오면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힘이 솟아난다. 드물게 몸과 마음이 활력으로 탱탱해진다. 오늘은 비의 예감만으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달릴 채비를 한다. 막힘없이 달려 보기에는 고속도로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가까운 인터체인지로 차를 올린다. 목적지는 없다. 비를 맞으며 실컷 달리다 그만 달리고 싶을 때 돌아오면 된다.
‘비 탄다’는 말이 있다. 맑은 날과 비교해 비 오는 날의 심리상태가 유난히 다른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는 ‘습기에 특별히 민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흘려 넘겨 버리는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쉽게 상처를 입는다. 꿈속에서도 줄곧 비가 내리고 찬란한 햇빛 아래서는 현기증을 느낀다.
빗줄기가 사다리처럼 하늘까지 이어진 날, 그런 날은 모든 것에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쨍한 햇살 아래서 악착같아지던 마음과는 대조적이다. 닿을 듯 가까워진 하늘이 강퍅하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팍팍한 마음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일 때가 더 평화와 가깝지 않겠나.
자동차는 거침없이 달린다. 드디어 전면 창으로 빗방울이 투덕거린다. 아스팔트가 거뭇하니 젖어온다. 내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 안의 빗방울들은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에 이끌린다. 오랜 그리움 뒤 연인과의 해후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고 가슴 전체가 따뜻해져 온다.
대기를 장악한 빗방울들의 드라마가 풍성하다. 와∼와 쏠리듯 다가와 파열하듯 장렬하게 부서져 내린다. 녹음을 머금은 진초록 유리창 위로 방울방울 사념들이 매달린다. 온몸을 에워싸는 빗방울이 혈관에 주입되는 링거액처럼 메마른 정신을 빠르게 타고 돈다.
맑은 날보다는 어둑시그레 비 오는 날이 더 좋은 것은,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정서 가운데 하나이다. 두 날의 심리적 대비가 너무 도드라져, 한때는 런던이나 파리나 뮌헨 같은 곳에서 살고 싶기도 하였다. 늘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자주 가랑비가 오락가락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럽의 그 도시들을 동경해 보기도 하였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가로수의 춤은 더 격렬해진다. 서서히 타이어에 들러붙는 아스팔트의 질감도 달라진다. 차체와 도로가 한 덩어리로 밀착되며 어느덧 속도감마저 사라진다. 점차 우주적 진공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질구레한 잡념들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마침내 나는 느낌표 하나로 존재한다.
아름다운 음악과 감동적인 영화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만큼 비 또한 그렇다. 훌륭한 영화가 마음을 한껏 드높여 주듯 비도 정신과 영혼을 한 단계 상승시켜 준다.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 그 이전과 달라진 자신을 느끼지 않는가. 그때의 고양된 느낌은 욕망으로 얼룩진 우리 존재를 정화시켜 준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빗줄기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노라면, 와이퍼가 지나간 유리창처럼 말간 마음이 된다. 유난히 ‘비를 탄다’는 것은 남다르게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정화에의 요구가 유달리 강하기에 마음을 씻어 낼 수 있는 비 오는 날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마음의 정화 욕구가 남다르다. 그것은 그만큼 상처받기 쉬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상처의 파편들이 누구보다도 많기에, 그것들을 걸러 내는 작용이 더 자주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 홀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문득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환해져 온다. 동그란 핸들에 목숨을 얹고 어둑한 하늘을 향해 질주하노라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순하게 정리되면서 많은 것들로부터 초탈한 심정이 된다.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약하고 가뭇없는 존재들인지 뼛속 깊이 느껴지기도 한다. 풀과 같이 약한 생명이기에 지금, 살아서, 힘차게 내 심장에 대해 그만 숙연해지고 만다.
거대한 덤프트럭이 물세례를 퍼부으며 바짝 다가와 비켜 지나간다. 움찔하며 핸들을 다잡는다. 그렇다. 비 오는 날의 고속도로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확실한 긍정을 확인시켜 주는 공간이다. 시속 백 킬로미터의 속도감으로 펼쳐지는 비에 젖은 도로는 보다 더 본질적으로 살아갈 힘을 재생시켜 준다. 생명만이 진실이기에 누추한 욕심들이 떨어져 나가고, 검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향해 애틋한 마음이 된다. 비를 뚫고 도로를 가로질러 천천히 날아가는 흰 새를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하늘에 닿는 문장을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비를 기다린다. 햇빛 화창한 날에도 무슨 부적처럼 우산을 챙겨 들고 간절히 비를 기다린다. 비는 보이지 않는 실존적 물음에 마음껏 탐닉할 수 있게 해 준다. 삶이 무엇인지, 답 없는 답을 찾기 위해 영화관을 찾고 도서관을 드나들며 온몸에 비의 지문을 찍으며 거리를 헤매기도 한다. 예리한 비의 지문은 머릿속에 부식된 붉은 녹들을 벗겨 내고, 가슴속의 두터운 지방질을 뚫어 초록빛 생명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나날의 상처와 황폐함에도 이어질 것이다. 폭력과 무관심이 도처에 횡행해도 불친절한 우리네 하루는 안이하게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 위로 오늘도 비가 내린다.
◆당선 소감…어두웠던 무의식 구석구석 쓰다듬은 시간
서설이다. 질척이던 진눈깨비가 포근한 눈송이로 바뀌는 찰나, 순백의 허공을 뚫고 신의 특별한 전언이 날아든다. 한 장의 호외가 내 앞에서 꿈결같이 나부낀다. 재능에 대한 의심으로 황량하던 나에게 호외가 뿌려주는 황홀함은 아스피린과도 같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그동안 생활인으로서 실격에 가까웠던 내 아웃사이더적 행각이 당선이라는 소식 앞에서 이해되고 정당화된다.
아무도 나에게 프로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프로적으로 쓰고자 했다. 쓸 수 있을 때도 쓰고 쓸 수 없을 때도 썼다. 쓸 수 있을 때는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썼고 쓸 수 없을 때는 왜 쓸 수 없는지, 그 답답한 마음에 대해 썼다.
글 심(心)을 돋우기 위한 가장 좋은 자가발전 조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는 것이었다. 글 쓸 힘이 나지 않고 마음이 바싹 말라있을 때, 그보다 더 좋은 비책은 없었다. 그러므로 쓰고 또 써야 했다.
자판에 글자를 찍을 수 있는 이상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에게 쓴다는 행위는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냥 그대로 흘러 가 버리게 두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실천이었다. 흐르는 시간에의 저항은 그 시간을 응시하는 것이었고 그 응시는 기록이라는 실천으로 남았다. 응시와 기록은 적어도 더 이상 후회라는 괴물이 나를 조롱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게 해 주었다. 더 이상 후회할 시간이 없었기에 응시와 기록은 내내 현재진행형이었다.
한 편 두 편 글을 써서 내보일 때면 찢어진 천막처럼 펄럭이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세상을 향해 굳게 닫은 문을 조금 열고 깨끗이 빤 빨래 하나 내 거는 심정이었다. 나에게 글쓰기는 어둡고 음습하던 무의식의 오지를 구석구석 훑고 쓰다듬어 나가는 시간이었다. 불안을 종식시키는 자가 치유의 시간이며 시커멓게 죽어가는 의식을 도려내는 정신분석의 시간이었다. 누구와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할 수 있었다. 혼자라면 자신 있었다.
글 판 깊숙이 발을 담그기가 두려웠던, 그저 그 언저리를 맴도는 주변인일 뿐이었던 나를 ‘발견’해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하다. 기쁨도 슬픔도 없이 매일 조금씩 글을 씀으로써 그 고마움을 갚겠다. 수필사랑 문우들과 두 분 선생님, 오래 같이 가고 싶다.
◆심사평…읽고 나면 삼빡한 뒷맛…탄탄한 문장 돋보여
문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신춘문예에 도전해 본다. 더러는 재수`삼수`사수를 마다하지 않는다. 열정 때문이다. 신춘문예를 통해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문학에 대한 꿈을 실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매일신문의 신춘문예는 ‘작가의 꿈’을 실현하는 관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을 뿐 아니라 그 역사와 전통 또한 오래되었다.
문학은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다. 마땅히 낱말을 부리고 문장을 다듬는 기술을 터득함으로써 개성 있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문단의 구성과 내용의 효과적 전개, 주제의 설정과 형상화, 그리고 사람살이의 지혜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 거기다 신인다운 참신성을 겸비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응모작품 가운데 태반이 신변잡기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수필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찰하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타인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고, 주체 밖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현상에 관해 서술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작가 개인의 자잘한 신변사를 글감으로 삼기 마련인데, 자칫하면 무늬 없는 평범한 작품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수필은 산문으로 쓰인다. 그러나 같은 산문이라도 소설이나 희곡에 비해 운문적 성격이 강하다. 이를테면 치밀한 묘사나 장황한 서사적 언어보다는 간결하고 여운이 있는 문장이 돋보인다.
심사 대상 작품은 총 436편이었다. 먼저 수필로서의 기본에 미달하는 작품을 걸러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20여 편을 가려 뽑았고, 다시 읽고 추린 결과 5편의 작품이 끝까지 남았다. 김승연의 '꿀꿀이바구미애벌레', 김정선의 '매화육궁, 피어나고', 김학철의 '달챙이 숟가락', 박창경의 '죽음의 무늬', 그리고 손훈영의 '비를 기다리는 마음'을 놓고 토론하였다. 고심 끝에 '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완성도나 문학성이라는 면에서 다른 작품들보다 돋보인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여러 작품 가운데서 한 편을 가려 뽑는 작업은 힘들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당선작은 낱말의 부림이나 문장의 구성이 탄탄하다. 부족할 것도 넘칠 것도 없이 필요한 만큼의 언어가 사용되었다.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수필을 머리로 읽는 글과 가슴으로 읽는 글로 나눈다면, 당선작은 가슴으로 읽는 글에 해당한다. 그만큼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읽고 나면 뒷맛이 삼빡하다. 당선,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만하지 말고 정진하여 꽃을 활짝 피우기 바란다. 심사위원 김종욱(수필가), 허창옥(수필가)
<2016년 제주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보자기/양태순>
어머니는 큰오빠 곁으로 가기로 했다. 육십여 년을 살던 집을 비우자니 그만큼 더께가 앉은 살림살이가 자꾸 나온다. 부엌을 정리하니 막걸리 사발과 놋그릇을 비롯하여 뭉그러진 나무주걱, 아끼시던 꽃무늬 접시도 나온다. 낡은 장롱을 여니 맏며느리가 해온 상이불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다. 한 쪽에는 사십 대에 꽃구경 갈 떄 입었던 개나리색 한복이 걸려있다. 팔십이 넘고는 먼 길 떠날 때 가벼워야 한다고 조금씩 정리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음은 그 물건에 담은 마음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사는 묵은 시간과의 만남이다. 마당으로 끌려나온 물건은 버릴 것이 많았다. 구석 구석에서 나온 사소한 물건들을 붙잡고 눈을 맞추니 갖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장롱 밑에서 나온 싸구려 비녀를 보며 은비녀를 부러워했던 그 날의 엄마에게 안녕을 고하고, 앉은뱅이 책상서랍에서 쏟아져 나온 오남매의 통지표와 상장을 보며 천지분간 못했던 어린 날과 아쉽게 작별했다.
단출한 이삿집이 한나절이 걸려서야 꾸려졌다. 보자기에 싼 상이불을 트럭에 먼저 실었다. 뻣뻣한 이불 속으로 바람이 들락거려 발이 시리다고 한 아버지가 생각나 차마 덮지 못했던 이불이다. 부드러운 호청을 가만히 쓸어보며 '조금만 더 살지'하고 안타까운 숨을 내쉰 적이 여러 번이었다. 한 번은 덮어야 하는 이불이라고 딱 한 번만 덮었다. 그 이불을 가지고 간들 덮지 않을 것이지만 꼭 가지고 가야 했다. 어머니가 마지막 가는 길에 가지고 가서 아버지와 같이 덮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아는 나는 가슴이 촉촉해졌다. 그 뒤로 몇 개의 보따리를 더 실었다. 떠나는 차에 오르기 전, 엄마는 뒤돌아서서 찬찬한 눈길을 주며 정든 집과 이별을 했다.
차에 오르시는 어머니의 손에는 하얀 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뭐냐고 여쭤 봐도 별거 아니라며 웃으신다. 형제가 각자 맡은 구역을 청소하고 짐을 정리하느라 어머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지 못했다. 무얼까. 무엇인데 어머니가 손수 안고 가실까? 보자기 속이 궁금해 갸우뚱거리던 나는 어느새 책보를 메고 팔랑거리는 소녀를 만났다.
초등학교 내내 책보와 함께였다. 교과서만 싸면 반듯하게 되는데 필통 때문에, 도시락 때문에 참하게 되지 않았다. 조심스레 걸었어도 학교에 도착하면 물건들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거나 보자기 끝이 느슨해져 책보가 엉덩이에 닿을락 말락 걸쳐져 있었다. 소풍날에는 책 대신 계란, 사이다, 도시락, 과자를 울퉁불퉁하게 싼 보자기를 메고 신나게 뛰었다. 덕분에 계란이 터지고 반찬 국물이 새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꾸중도 않고 깨끗이 빨아주는 엄마가 있었으니까.
새마을 운동은 시골을 변화시켰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친구들이 책가방을 사기 시작했다. 새 가방을 메고 온 친구가 자랑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르르 몰려가 구경을 했다. 약간의 부러움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철부지였지만 집안 형편을 눈치채고 있던 터라 안 되는 것을 떼를 써서 얻어내는 재주는 없었다. 군말 없이 책보와 시름하며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에 딱 하나 좋은 것은 책보에서 나는 소리였다. 내가 달음박질 하면 달각달각 박자 맞춰서 울리는 리듬이 음악 시간에만 들을 수 있는 고운 풍금 소리를 연상시켰다. 동요를 흥얼거리며 타박타박 걸을 때는 책보가 있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보자기와 연이 깊다. 책보 대신 책가방을 들면 연이 끝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앟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자취생의 보자기 안에는 내 먹거리가 들어 있었다. 쌀, 장류를 비롯하여 봄에는 산나물, 여름에는 오이김치, 가을에는 콩잎무침, 겨울에는 시래기 등 철마다 다른 것이 담아졌다. 가끔 간식거리도 보태어졌다. 엄마가 챙겨주는 것을 다 넣다보니 삐죽하게 나오기도 하고 위로 불뚝 솟기도 하여 손에 들린 보따리는 참으로 볼품없었다. 그래도 툴툴거리지 않고 부지런히 들고 다녔다.
종이가방을 들면서부터 예가 아닌 아니오가 많아졌다. 엄마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한결 같은데 보자기 아닌 종이가방은 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따. 폼이 나게 들고 다니려면 물건을 꽉 채우면 배가 볼록해서 안 되었다. 무엇보다 무거워서 가방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난감한 일이었다. 자꾸만 더 가져가라는 것을 됐다고 거절하고, 종이가방 크기에 맞도록 양을 덜어내고 물건을 뺐다.
사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 기준은 어쩌면 사소한 행동에서 시발점이 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종이가방에 짐을 꾸리면서부터 내 기준에 맞춰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지 싶다. 인간관계에서도 고정된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들어올 사람과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을 가려내었다. 안에서 바깥으로 자유롭게 드나들던 마음을 받아주는 문이 점점 작아졌다. 뒤웅박처럼 줄어든 가슴으로 못난 것을 품기보다 불만을 키우면서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차가 멈추었다. 형제들은 이삿짐을 들이느라 부산하다. 그 틈에 어머니 손에 있던 보퉁이가 온데간데없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두리번거렸으나 보이지 않는다. 엄마가 식구들과 얘기하고 있을 때 안방에서 짐들을 더듬었다. 상이불 속에 끼워져 있었다. 얼른 꺼내 펼쳤다. 갈색 삼베옷이 단정하게 개켜져 있다. 몇 년 전 윤달에 흘려 들었던 말이 스쳤다. 먼 길 떠날 때 입고 갈 옷을 당신 스스로 마련할 때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조차 어렵다. 끝까지 자식들의 걱정을 싸안으려 한 엄마의 마음의 전해져 눈앞이 흐려졌다.
세상에서 엄마를 닮은 물건을 찾자면 보자기가 아닐까. 어떤 모양도 다 쌀 수 있는 보자기이고, 부족하고 못나도 치마폭으로 감싸 안아 가려주는 어머니이다. 또한 자식들 걱정으로 해진 마음을 다시 여미듯 오래 되어 뜯어진 보자기도 꿰매어 다시 쓸 수 있지 않은가. 많이도 닮았다. 엄마의 보자기는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여 한계절 묵힌 오월의 바람향에 가득하다. 자취생 시절 수없이 꾸렸던 보따리가 주위를 에워싼다.
눈가를 지그시 누른 휴, 서랍에서 보자기를 꺼냈다. 엄마의 개나리색 한복을 곱게 접어 보자기에 쌌다. 그날 나와 같이 온 보퉁이는 옷장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어머니가 보고 싶은 날에 품에 안아보면 어머니의 다정한 음성이 들린다. 젊은 날 입었던 한복을 입고는 환하게 웃으시며 '늘 너를 지켜보고 있다. 아직도 내 치마폭이 그립냐'며 물으신다. 나는 매번 차랑멀었다고 응석을 부린다. 보자기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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