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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지난 2007년 11월 양평의 춘천의병장 후손을 찾아 탐방하였던 기록입니다. 회원들께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여기 다시 옮겨 스크랩합니다.
<양평군 개군면 앙덕리 이해종옹 탐방>
습재연구소에서는 지난 11월 25일에 양평에 계신 춘천의병의 후손인 이해종옹을 탐방하였습니다. 벌써부터 한번 가려고 했던 것을 바쁜 중임에도 결행을 했던 것이었는데, 이참에 정리해서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난번 송년모임에서의 말씀도 있어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일요일이던 25일은 마침 짙은 안개가 종일토록 내려앉아 내내 안타까움을 더했던 날이었습니다. 한희민 회장이 집의 투싼을 몰고 왔고, 김정기 선생이랑 제가 동행하였지요. 9시에 만나 오후 4시경 옹과 헤어져 돌아오기까지의 탐방은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 되었고, 특히 의병사에서 구술사의 중요함이 얼마나 큰지를 실제로 깨닫게 된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10시 넘어 양평에 들어서서 전화를 하고 길을 물어가며 남한강 북안에 자리한 앙덕리 마을을 찾아갔고, 마을회관에서 집을 물었더니 온 길을 되돌아 나가 마을입구의 언덕길 마루에 집이 있다고 대번에 알려주었습니다. 마을 언덕길에는 '춘천의병장 이만응 묘 입구'라는 반갑고도 가슴 설레게 하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집에는 이해종옹이 혼자 계셨지요. 훤칠하신 키에 밝은 표정으로 반겨주셨지요. 노령임에도 무척 건강해 뵈었습니다. 옹은 1922년생으로 이미 86세. 그 까마득한 연세에 이미 우리 역사의 한 세기가 다 녹아있을 것 같았고, 말씀하시던 내내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거쳐오신 온갖 경험들이 표정과 말투에서 배어나오는 듯하였습니다.
먼저 옹에 대해 먼저 소개를 해야겠군요. 이해종옹은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춘천의병장이었던 습재 이소응(1852-1930년)의 사촌 동생인 구초 이만응(1857-1938년)의 증손이셨습니다. 이만응은 습재 다음으로 춘천의병장을 지낸 직헌 이진응(1847-1895년)의 친동생이자 또 직헌 다음으로 춘천의병장을 지냈던 이경응(1865-1947년)의 친형이기도 하며, 을미년(1895년) 춘천의병에서는 습재보다 먼저 의병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습재에게 주장의 직책을 넘기고 자신은 아장(亞將)의 직책을 수행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니까 간략히 그려보면,
도재 - 이소응 - 이재인(배인)
도빈 - 이진응
이만응 - 이재의 - 이윤용 - 이해종
이경응
이렇게 되는 거지요. 옹은 4살 때부터 16,7세까지 증조이신 이만응의 슬하에서 자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애초
우리가 습재의 생전 면모에 대해 듣게 되지 않을까 하던 기대는 생전에 만나지는 못하셨다는 말에 무너진 것이긴 했으나, 대신 이 가문이 춘천의병 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을미년에 습재가 의병장으로 추대될 때 이만응, 이경응은 적극 나서서 일을 함께 추진하였기 때문에 을미의병이 끝나고 난 뒤 이 세 집안은 모든 가산을 몰수당하고 춘천 고향마을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때 이만응은, 그 사이 의병이 일차로 패산하였을 때 의병장으로 나서게 되었다가 전장에서 순절한 큰형 이진응 대신에 노모이신 배천조씨를 등에 업고 여주 땅으로 걸어서 이사를 가야 했다고 했습니다. 의병 당시와 관련한 이야기로는 이만응의 아들 이재의도 습재의 아들 이재인처럼 의병진에 따라 나갔었다고 하였습니다. 춘천부에 모인 군인들이 새 의병장이 과연 대장감인지를 시험해볼 요량으로 마구 총을 쏘아대는 일이 벌어졌을 때, 습재 부자는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음(이는 이미 알려진 내용임)에 비해 어렸던 이재의는 놀라서 봉의산 쪽으로 달아났었다는 일화가 전한다는 구술이 있었습니다.
이만응은 여주 산골의 엄씨네에서 숙사의 생활을 하셨고, 이때 한학을 배운 엄항섭이라는 제자는 나중에 중국으로 건너가 백범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함께 하고 해방정국에서도 정치노선을 같이 했던 사람인데,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다고 합니다(이 내용은 이구용 교수가 쓴 묘소 옆의 공적비에서도 있었음). 그러던 중에 종친으로 여주에서 만석군이었던 이민응 가의 도움을 받게 되어 이만응은 대신면 보통리의 속칭 판서댁이라던 한옥으로 이사가 만년을 보내게 됩니다. 아들 이재의(호가 요산임)도 부친에 이어서 서당 선생 및 면장 일을 하면서 지내신 선비셨다고 하셨지요.
<구초 이만응 초상> <이경응 초상>
미리 전해져 있던 이 이만응, 이경응의 사진을 보았던 터였는데, 특히 이만응은 사진에서도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모습이어서 과연 의병다운 풍모라 여기고 있었지요. 그런 굳건한 선비의 기상과 생전의 모습들이 이해종옹의 생생한 구술로 여실하게 전해져 오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옹께서는 어려서 키워주신 증조 이만응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애틋한 그리움에 문득 북받치시며 느껴 울먹이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의 배경에 놓인 병풍이 같은 것 같아서 옹에게 여쭈었더니 아주 상세한 답변을 해주셨답니다. 1930년대 중반경 먼 친척 중에 사진업을 하는 사람(최씨)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와서 촬영한 사진이며 병풍은 배천조씨가 돌아가셨을 때(습재의 연보에 의하면 1897년임) 시신 곁에 세워두었던 것으로 아직도 이해종옹의 서울집에 보관돼 오고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생전의 일들 가운데서도 상투를 지키셨던 일화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면장이랑 파출소장이 상투를 자르게 하려고(당시에는 상투가 일제에 항거하려는 의식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고 하였음) 함께 사랑방으로 찾아오게 되었답니다. 이들을 사랑방으로 들인 이만응이,
"자네가 어쩐 일인가?"
라고 물으며 바라보자, 면장은 안부의 말 말고는 다른 말은 결국 꺼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해종옹도 어려서 슬하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보통학교엔가를 가게 되었는데, 이미 14세에 결혼식을 올린 이해종옹이 학교에서 갑자기 상투를 잘리게 된 일이 생겼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증조께서는 일주일인가를 끼니를 거부하신 일도 있었다고 당시의 일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여주 김영구 가옥 전경> <이만응이 말년에 기거한 사랑방>
이때는 이경응 가문도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고 했구요. 그리고 만주에 망명했던 습재가에서는 이배인(을미의병 후 같은 가문의 재자돌림 관찰사가 부임해오자 재자를 버리고 배자로 고쳤음)이 다니러 들리기도 했는데, 그런 때면 항시 이해종옹이 세숫물을 떠다드리는 등 시중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일제 말기에 제천에서 지내던 이배인이 무슨 징병찬조금을 내지 않아서 경찰에 끌려가게 되어 수모를 당하셨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선비로서 일생을 사셨던 이만응은 왜 직헌이나 습재 선생처럼 화서학파에 입문하지 않았으며, 또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이 질문에 이해종옹께서는, 당시에 이미 직헌과 습재의 나이가 동생들보다 많아서 특히 형님인 직헌에게서 배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나중에 이만응이 남긴 유일한 글인 <가정훈행록>에서도 확인이 되었습니다.(이만응이 남긴 기록들이 더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피난가며 사당에 파묻었다가 모두 부패해버리고 말았다 하셨음)
이해종옹의 아버님인 이윤용 대에 오면 가산이 불어나 천석군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1940년대에 들자 이해종옹도 징병 대상자가 되었는데, 아버님께서는 논을 팔아 당시 2만 5천원을 마련해주시면서,
"도망을 가든 뭘 하든 네가 알아서 결정하여 하거라!"
라고 하셨답니다. 옹은 도망을 가면 경찰에게 당할 집안의 핍박을 생각하고 징병에 응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나전쟁 중인 중국에 투입되었고, 개봉을 지나면서는 탈출을 시도했다가 일본도에 맞아 죽을 고비도 넘겼다고 하셨지요. 그러고 조금 있어 상해인가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같이 학병이었던 장준하, 김준엽 같은 분들이 탈출하여 중경의 임시정부로 갔던 일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서 읽었던 장준하의 <돌베개> 생각이 났지요. 이해종옹은 그 후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 4년 넘게 봉천(심양의 당시 이름)에서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해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귀국 전 습재가 말년을 보낸 곳을 찾아가 보려고 시도하였으나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말았다고 하셨지요.
한국전쟁 때는 보통리의 한옥이 인민군 본부, 당사무소로 쓰이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이해종옹은 그후 경기도 도의원도 하셨고(나중에 찾아보니 4.19 후인 1960년도에 제2대 도의원으로 여주에서 민주당으로 당선되셨었음), 자제분은 열 분이나 되셨습니다.
1시가 넘자 옹께서는 오래 전부터 다니던 막국수집에 가자시며 점심을 사주셨습니다(춘천에서 먹는 막국수와는 달리 거의 냉면 수준이었음!). 점심 후에는 대신면 보통리의 한옥을 찾아가서 안내하시며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주인은 달라졌으나, 지금도 경기도 중요문화재 126호로 '여주 김영구 가옥'이라는 안내판이 보였습니다. 특히 이만응옹이 만년을 보내셨던 안채 사랑방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해종옹께서는 뒤꼍에까지 늑대가 와서 울던 밤이면 증조께서 자상하게 돌봐주시던 추억어린 애틋한 이야기들도 해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묘소에 들렀습니다. 집 곁의 산자락인 묘역에는 이해종옹께는 고조인 이도빈의 묘부터 먼저 타계한 부인의 묘까지 5대의 묘소들이 내리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첫째인 직헌 이진응이 순절하자 둘째인 이만응이 선조에 대한 봉사를 이어왔음을 여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번듯하게 묘소를 정리해놓은 것은 모두 이해종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맨 윗자리에는 이만응(좌)과 이도빈의 묘(우)가 있었고, 특히 이도빈과 배천조씨의 합장묘 곁에는 후손을 대표하여 이해종옹께서 해세우신 배천조씨에 대한 <송덕비>가 있었지요. 자식들을 모두 의병장으로 내세우셨을 만큼 기개가 높으신 여사이셨음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송덕비에는
"효도는 마땅히 힘을 다하는 것이요, 충성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孝當竭力 忠則盡命)"
라는 배천조씨의 말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 말은 이경응이 남긴 <을미의병실적>에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의병진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들려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또 이만응의 <가정훈행록>에서는,
"어려움에 임해서도 구차히 면함이 없어야지, 만약 내가 창을 내던진다면 성인의 죄인인 것이요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장부의 일이니라.(臨難無苟免 若我投戈而圖生 則聖人之罪人父母之不孝也 死於當死 丈夫之事)"
라고 이때 모친(조씨부인)께서 전하셨던 말씀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묘소 윗부분 - 위 우측부터 이도빈, 이만응, 이재의> <구초 이만응의 묘소>
<구은 이도빈와 배천조씨의 묘소> <구은공의 부인 배천조씨 송덕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연신 질문을 해대며 구술의 말씀을 듣다 보니 어느듯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지요.
저희는 이만응의 유일한 저술인 <가정훈행록>을 사진에 담고 이 사본과 또 이재의의 <요산유고> 사본을 빌려가지고 하직인사를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찾아뵙고 못 다 들은 을미의병 이야기와 또 이해종옹께서 지나오신 우리 현대사의 굴곡에 따른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겠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
<후기>
이 글은 제게 가슴아린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뒤로 이해종 옹은 다시 찾아뵙지 못하였고, 옹께서 2010년에 타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영 다시 뵙지 못하게 된 거지요...
첫댓글 이같은 글이 남아 읽힐 수 있다는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닙니다.
기록은 기억을 앞선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 같군요.
자료 잘 봤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