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1819년 춘천부사 자하 신위(申緯:1769-1845년)가 지은 <맥록>의 <송하옹의 조양문 방서(松下翁
朝陽門방書)>이다. 19세기 초에 춘천부 관아의 조양문, 수춘관, 위봉문의 현판 글씨를 보고 쓴 7언율시
라서 고증적 가치가 큰 사료이기에 여기 옮겨서 함께 보도록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 있는 원문 영인 사진과 활자본 표점본 사진이다. 먼저 그의 문집인 <경수당
전고>의 원문이다.
아래는 위 원문을 활자로 옮기고 표점한 화면 사진 캡처이다. '수춘관' 노랑은 검색어 때문에 생긴 것.
위에서 보듯이 이 시는 신위가 조양문의 현판 글씨를 보고 읊은 시로서, 그것이 송하(松下) 조윤형(曺
允亨:1725-1799년)이 쓴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높은 감식안으로 감상하며 그 유래까지 밝힌 것이다.
제목의 '기묘'란 1819년으로 자하가 춘천부사로 재직하던 때였다. 그는 여기서 춘천 관아의 조양루,
위봉문, 수춘관의 현판 글씨를 평가하며 소감을 적었다.
이는 이미 김태을 씨가 2002년에 신문지상에 발표하여 밝혀진 내용이고, 근래 또 <聞韶 3>(2011년)
에서도 이 시의 일부를 번역 소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일부 글자의 잦은 오독이나 시도 댓구 넷을
'중략'하여 소개함으로써 앞으로 더 정확한 번역과 소개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특히 '조양문'을
김태을 씨는 최근 "고지도에 문소각의 후문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잘못 말하기도 하였다. 이 시가
말하는 조양문은 어느 점으로 보나 조양문을 주요 대상으로 하며 말하는 것이다.
"조양문을 열어 봄 햇살 쏟아지니
하얀 현판의 먹글자는 아름답기가 짝할 만한 것 없다."
이로 보면 현판을 말하는 그 '방(片+旁)'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방이란 흔히 자호나 격언명구 등을
기억하도록 종이나 나무판에 큼지막하게 적은 것을 가리킨다. 또 '악방묵자(흰색 방에 묵서)'였다.
"날 듯한 외관을 글자에 돌이키며 전패(殿牌)를 호위하니
송하 선생께서 기꺼이 붓을 드신 것이다."
'전패'란 지방관아 등에서 현 임금의 존재를 위패로 대신 모셔놓은 것을 말한다.
이어서 '조양'의 뜻을 여러 헌(軒), 각(閣)들과 같이 말한 다음에 주석의 말로, "영조 갑신(1764년)에
공께서 오시어 조씨의 가연리 집에 머무셨는데, 내가 공의 배를 따르며 모셨다. 가릉(가평?)의 강석
자리에 올라간 때는 곧 건릉(융건릉의 정조) 정미(1787년)였다"는 언급도 있다.
이 말은 자하의 행적과 비교하여 더 찾아볼 내용이지만, 일단 조윤형이 춘천의 풍양조씨 집에 전에도
왕래가 있었고, 자하도 유년기에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래서 그의 사위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글씨를 송나라 때 행초서로 유명했던 미불의 서법에 비교하였다. 조윤형을 흔히 초서, 예서에
능하였던 명필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보건대 조양루의 현판글씨도 수춘관이나 위봉문과 같이 행서체
였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수춘관과 위봉문에 새긴 글자로 상고해보자면
조양문 또한 마땅히 같은 때 나왔다 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직접 언급하는 말 다음에는 주석의 말로, "수춘관 위봉문 두 방 또한 모두 공의 글씨이고,
낙관이 있어 '무신(1788년) 3월 일'이라 하였다"라는 언급도 적어 놓은 것이다.
조양루 현판으로 현재 남은 민형식의 치졸한 글씨 말고, 조윤형의 미려한 행서체 현판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윤형은 뭣보다도 윤순-이광사를 이은 이른바 '동국진체'의 최고 명필이다. 다시 말해 아다시피 영조
정조 시대에 꽃피운 조선의 문화 절정기를 대표하는 해서체의 최고였다는 점이다. 그랬기에 정조가
"가장 총애하였던" 서예가였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시파/벽파의 구분처럼 동국진체는 '시체(時體)'
라고도 불렸으며, 문체반정처럼 정조는 단아하고 순정한 필체를 높이 평가하여 '서체반정'에도 관심이
많았다 . 정조가 타계하고 북학파의 고증학이 유포되자 예서체 등의 다양한 필체들이 구사되면서 결국
추사체까지 발전해 나아간 거다. 조선시대 문화 절정기의 동국진체이기에 조윤형의 이들 글씨는 그만한
대표성을 가진 것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의 동국진체 해서체는 정조대에 그의 서체로 나온 <춘추좌전>에서 볼 수 있다. 좌씨전 가운데 경문의
큰 글자만을 대자(이른바 '춘추강자')로 넣은 이 판본은 조윤형과 황운조의 필체를 받아서 낸 두 가지
판본이 있다.
황운조는 '종요체'에 뿌리를 둔 서체라고 평해지기도 하여 조윤형의 서체와는 약간 다르다.
하지만 19세기로 넘어가 자하의 시대에 오면 이미 동국진체는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지 오래된 상태였고, 신위 역시 고증학의 세례 아래 있었기에 미불체를 보였던 조윤형의 이 행서체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며 높이 평가한 것이라 보이는 것이다.
장차 한시 전공자에 의한 <맥록> 전체의 정확한 번역도 조속한 시일 안에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첫댓글 송하 조윤형이 신위의 장인이었으니 춘천부사로 춘천에 부임한 신위가 장인의 현판 글씨를 보고 얼마나 감격하였을까. 1895년 춘천이궁을 그린 춘천관찰부도에 보면 문소각 후문이 조양문으로 표기가 돼 있습니다. 이것이 신위가 쓴 '송하옹조양문방서'이 그 조양문인지, 아니면 조양루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조양문은 춘천이궁 건립시 문소각의 후문으로 지었을 것으로 보아 엄황 부사 당시 지은 조양루로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후문명이 '조양문'으로 돼 있군요! 하지만 정문의 누각명이 '조양루'인데 후문명도 '조양문'이라는 점이 매우 부적절하고 안 맞아 보입니다. 자하가 본 현판을 '방서'라고 한 점을 보면 또한 정문의 누각용으로 번듯하게 쓴 것은 아닌 듯하다고도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위 시는 제목에 '조양문'을 넣고 그 내용으로 다른 현판들을 언급하였다는 점에서 조양문의 대표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 여겨집니다. 문소각의 후문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거 아닐까요?! 정문도 아니고 내삼문도 아니고 후문을 내세울 순 없겠지요!
지도를 다시 자세히 보니 '내아' 쪽에서 문소각으로 가는 문이 조양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1648년 문소각의 창건시에 조양루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단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집니다. <춘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는 1869년의 김병륙 중수 때 '구성루'를 짓고 운현궁(대원군)에서 이름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이 구성루가 조양루였다고도 하였고, 또 당시의 지도(?)에 별명의 구성루가 보인다고도 하여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조양문=조양루로 생각했던 것은 잘못인 것 같습니다. 오영섭의 이궁 글에서는 뭐라고 했는지 더 확인해보아야겠네요... 1890년대의 지도가 확실하다면 이궁공사 때 새로
오영섭은 조양문이 후문(북쪽)이고 내아쪽(동쪽) 문이 귀창문이라고 하였네요. 귀창문 글자를 지도에 뉘여 썼으니 이 말이 맞아 보입니다. 오영섭은 이궁공사 때 조양루를 신축한 걸로 봤구요.
'조양루' 이름이 정해지고 현판(옮겨지기 전의 민형식 어렸을 적 글씨)도 달았다고 추정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유원의 <구성루기>(1870년)에 소루(小樓)로서 "樓고(告/非)閣之北間架(루는 문소각의 북쪽에 기댄 짜임새)"라고 하였고 문소각과 남휘당, 구성루가 통하게 하였다고 한 점으로 보아 구성루는 문소각에 붙여서 누각 형태의 구조물을 붙인 것이라 보입니다. 각 안에 남휘당이란 방도 있고 말입니다. 기문에는 루 옆에 묘정(妙井=오수물)이란 샘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추론에도 불구하고 조양문, 조양루라는 이름이 문소각 한 건물의 문/루에 함께 쓰였다는 점은 내내 의문으로 남습니다.
글을 쓰면서 찾아보아 번거로운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춘천조양루 목부재의 수종과 연륜연대 분석'이란 논문자료에 따르면 춘천 조양루 목부재 87점에 대한 수종분석결과 조양루 목부재의 연륜연대는 조양루가 1646년 문소각의 문루로 건립된 이후 1887년 직후에 중수 내지는 중건된 사실을 보여준다고 결론지었더군요. 특히 건물의 주요 구조재인 보가 1887년 부재로 측정되어 이 시기에 건물의 상당부분을 새로운 부재로 교체하였거나 완전히 새로 지은 건물, 즉 중건한 건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즉 1600년대나 1880년 이전 부재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 조양루도 문소각 확장 개축 때 중건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 이로 보아서 1890년에 조양루건물을
새 논문자료네요! 그리고 '1646년 문소각의 문루로 건립'☞이건 어디서도 언급된 글이 안 보이는 거 같아요! 그 논문자료에도 17세기 부재가 있다고 하였는지요?
문소각 문루건립글은 강원향토문화연구회가 2006년에 발행한 강원문화재대관 도지정편을 인용하였답니다. 논문자료에는 17세기 부재는 없다고 해 중건시 모든 부재들을 새 것으로 교체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의 새로 지을 정도로 개축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두산으로 옮길 때에도 원부재를 그대로 사용하였음을 논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890년에 조양루를 신축하였다면 조양루를 우두산으로 옮길 때 굳이 현판을 바꿀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갑니다. 1920년대의 조양루 정면사진을 봐도 현판은 아주 오래돼 글씨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우두산으로 옮기면서 낡은 현판도 다시 교체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희미한 조양루현판의 "樓"자가 현재의 현판글씨와 비슷한 필체인 것으로 보아 민형식이 당시의 글씨를 그대로 흉내내 모사했을 가능성이 있지요.
조양문과 조양루가 정문과 후문으로 함께있는데 대한 의문은 저도 마찬가지인데 어쩌면 조양루보다 조양문이 먼저 건립되었을것이라는 정재경 선생님의견에 동감이됩니다.. 문소각 건립당시나 그이후로도 조양루에 대한 말이 없는것 같아서요...
회장님글을 보아도 사실만 가지고 보면 조양루는 19세기에 지어진것이 아닐까요?
일택선생님과 강마을 선생님 그리고 오동철 선생님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