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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런 글을 쓸 만한 역량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배워 가는 사람이고, 어디서 따로 신학을 배운 적도 없는 평범한 교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틀렸다면 고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글을 쓰려 합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사계 님이 하시는 일을 늘 응원해 왔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사계 님의 글을 읽어 가는 중에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듯한 내용이 있어서 덧글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왜 사계 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지 말씀드렸지만, 여전히 저희 생각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은 점이 있는 것 같아, 저도 좀 더 자세히 사계 님의 의견을 비평하는 글을 써보려 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이것도 말씀드렸지만, 저도 연중론에 반대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중생과 회심과 칭의의 동시성을 믿습니다. 저는 한국 연중론 목사님들이 교과서처럼 여기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의 의견이 세미 알미니안 정도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한 문제점은 칭의의 순간과 초기 중생의 순간을 떼어 놓고, 그 사이에 회심이라는 긴 기간을 집어넣은 점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데서 우리의 행위(믿음과 회개라는 행위)가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지위를 얻게 된 점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개혁 신학은 중생의 시점이 칭의의 시점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회심이 들어가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믿음이 발휘되자마자 우리는 바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칭의의 도구적 원인이라는 그 사실이 잘 드러나는 것이 저는 개혁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마스터스 목사님의 의견에서는, 믿음과 회개라는 행위가 개혁신학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지위를 얻습니다. 이 점이 마스터스 목사님 의견이 개혁신학보다는 알미니안에 더 가까운 점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제 생각에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혼자 생각했던 것이고, 어디서 검증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중생-성화-영화로 이어지는 우리의 상태의 변화를 믿습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시작이 중생이라는 점, 사계 님이 말씀하시는 거룩성의 주입이 중생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저희 의견 차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은 사계 님도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가 어떤 점에서 사계 님과 생각을 달리하는지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줄곧 말씀드렸다시피, 바로 구원 서정에서 확정 성화의 위치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사계 님이 중생과 확정 성화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밝혀 보겠습니다.
첫째, 사계 님처럼 중생과 확정 성화를 지나치게 붙여서 생각한다면, 확정 성화라는 것은 어쩌면 신기루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 이신칭의론은 그릇됐는가? ⑦>에서 인용하신 머레이 목사님의 다음 글에 대한 사계 님의 오독을 짚어 보겠습니다.
"주입된 의는 그것이 비록 완전하고 모든 미래의 죄를 제한다 할지라도 칭의에 포함되는 것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입된 의는 과거의 죄와 불의를 없이하지 못한다. 그러나 칭의는 모든 죄와 사법적 책임의 사면을 포함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가 없다. 따라서 의는 미래에 대한 보증과 마찬가지로 죄 사함과도 관계되는 종류의 것이어야 한다. 주입된 의는 이 필요에 미치지 못한다. 중생에서 주입된 의는 결코 이생에서 완전하지 않다."
여기서 “완전하고”는 확정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거룩함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화의 순간에만 그런 완전함에 이르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거듭날 때 그런 완전함을 얻는다면, 점진 성화라는 과정 자체는 필요 없게 됩니다. 물론 사계 님도 이 모순을 잘 알고 계셔서, ‘논리모순으로 여길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순을 어떻게 풀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계 님과 같이 ‘완전하다’는 말을 확정 성화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중생할 때 갑자기 영화에 이르렀다가 다시 부패한 상태로 떨어져 점진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머레이 목사님의 글에는 그런 모순이 없습니다. 머레이 목사님은 단순히 어떤 상황을 가정하신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풀어 쓰자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거듭날 때 완전한 거룩함에 이르러 죽기까지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그 의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왜냐면 거듭나기 이전의 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완전하고”는 완전한 상태를 가정하신 말일 뿐이지, 확정 성화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 사계 님은 <조나단 에드워즈 이신칭의론은 그릇됐는가? ③> 글에서, 신자가 죄인이며 의인이라는 루터의 말을, “중생으로 값없이 의인이 된 우리이지만 여전히 죄인인 우리”라고 독특하게 적용하셨습니다. 루터는 우리가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이신칭의)을 받더라도 여전히 본성의 부패가 남아 있어 죄인이라는 뜻으로 말했지만, 사계 님은 우리가 ‘중생’으로 값없이 의인이 되지만, 과거의 죄가 남아 있어 여전히 죄인이라고 적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의 머레이 목사님 글을 오독(‘완전하고’를 확정 성화로 오독)하신 데서 나온 독특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중생 때 주입되는 의는 우리가 의롭다 인정받을 만큼 완전한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도 여전히 죄인인 것은 과거의 죄 때문만이 아닙니다. 거듭나도 여전히 본성의 부패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수동 순종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죄하고만 관련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동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 받기 위해 필요합니다. 능동 순종은 죄 사함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영생의 자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사함 받는다 해도, 율법의 긍정적 요구, 곧 율법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는 요구는 그대로 남아 있어, 율법을 다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계 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중생자의 선행(율법준수, 순종)은 흠이 많은 선행”이라서 그리스도의 능동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흠(죄)에 대한 용서는 수동 순종과 관련이 있지, 능동 순종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죄는 수동 순종으로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의인이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의는 부족하니까 이제 능동 순종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이나 후나 모든 죄에 대한 사함은 그리스도의 수동 순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능동 순종과 수동 순종을, 적극 순종 소극 순종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순종과 형벌 받는 순종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사계 님의 이런 오해는 확정 성화를 중생과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완전하고’라는 말을 확정 성화로 이해하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러한 글을 장황하게 쓰는가 하면, 바로 확정 성화란 무엇을 말하는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계 님은 사실상 중생과 확정 성화를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즉, 중생과 확정 성화를 모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확정 성화라는 것은 사실 대단히 모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앞에서 말한 확정 성화와 점진 성화의 모순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확정 성화 때 얻은 완전함은 그냥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까? 사계 님이 말씀하신 그 ‘완전한 거룩함’은 어디로 사라져서, 다시 점진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한단 말입니까? 사계 님은 이 모순을 풀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말하는 내용을 저도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래도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확정 성화는,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라기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요소입니다. 곧 죄의 권세, 죄의 지배에서 단번에 건져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어서 확정 성화를 설명하십니다. 로마서 6장 2절 설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Think of two fields with a road between them. The field on the left represents the dominion, the kingdom, the territory, the empire of sin and of Satan. That is where we all were by our natural birth. But as the result of the work of the Lord Jesus Christ for us and upon us through the Holy Spirit, we have been taken hold of, and transferred to the field on the right of the road -'Delivered from the power of darkness and translated into the kingdom of his dear son'. I was there on the left, I am now here on the right. Yes, but I spent many a long year in the first field, and the devil is still there with all his powers and his forces.
This is a picture of what often happens. As a Christian I am here in the new field and Satan cannot touch me, as we are told in John's First Epistle, chapter 5, verse 18, 'That evil one toucheth him not'. He cannot touch us because we are no longer in his kingdom. He cannot touch us; but he can shout across the road at us. Every Christian who falls into sin is a fool. The devil cannot touch us; why then do we listen to him? Why do we allow him to frighten us? Why do we pay any attention to him? We no longer belong to him, and he cannot touch us. We know that Scripture asserts our freedom as an actual fact; but because of the old habit, the old influence, like the slaves that had been set free, we tend to forget it, and when he speaks to us we listen to him and fall under his spell. We should resist him. 'Resist the devil and he will flee from you, (James 4:7); but we fail to realize it. The whole object of the Apostle in this sixth chapter is to get us to rea1ize it. 'Reckon yourselves to be dead indeed unto sin'. You are therefore to realize it, to reckon it. Realize also that you are 'alive unto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이것은 분명히 우리 안에 거룩성이 주입되고 그것이 점점 자라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또 머레이 목사님이 <확정적 성화의 행위>라는 글에서, 또 <로마서 주석>에서 로마서 6장 7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로마서 6장 7절 말씀은 칭의의 언어로 확정 성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법정 용어로 확정 성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레이몬드 목사님이 ‘칭의-확정 성화-양자’를 한꺼번에 묶어서 회심 뒤에 두신 것이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존 프레임 목사님도 다음 글<https://frame-poythress.org/salvation-and-theological-pedagogy/>에서 ‘칭의-확정 성화-양자’를 triad라고 하시며 한 쌍으로 묶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의견은 레이몬드 목사님 의견과 같은 것입니다. 프레임 목사님은 위의 글 각주 1, 2번에서 자신이 말하는 구원의 논리 순서를 머레이 목사님께 배운 듯이 말씀하십니다. 아무튼 잘 아시다시피, ‘칭의와 양자’는 객관적인 요소,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확정 성화를 칭의와 양자와 같이 둔다는 것은 그만큼 확정 성화에 그런 객관적인 요소가 있다는 뜻입니다. 김홍전 목사님도 죄의 죄책에서 건져 주시는 것(칭의)과 죄의 권세에서 건져 주시는 것(확정 성화)을 늘 한 쌍으로 묶어서 말씀하신다는 것도 기억하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확정 성화의 시점이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는 머레이 목사님 글이, 사계 님이 주장하시는 <중생-확정 성화-회심-칭의>라는 논리 순서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머레이 목사님은 확정 성화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려고 그런 글들을 쓰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효력 있는 부르심’만 언급하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효력 있는 부르심’과 ‘중생’을 같이 언급하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effectual operations of grace’라는 말을 쓰기도 하시고, 또 어떤 때는 ‘그리스도인 삶의 시초에’라는 말을 쓰기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때가 언제인가’ 하는 물음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인가를 묻는 것이지, 구원 서정의 어떤 국면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루어지는가를 엄밀히 논하는 물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머레이 목사님의 “사람이 복음의 유효한 소명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 죄와 죄의 세력과 단번으로 결정적 단절이 생긴다”는 글을 가지고, 구원 서정의 논리 순서를 <효력 있는 부르심-확정 성화-중생-회심-칭의>라고 주장한다면, 사계 님은 황당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계 님은 당연히 “유효한 부르심을 입고 거듭난 모든 사람에게 죄는 더 이상 아무런 권세도 없다”와 같은 글을 들어서, 확정 성화의 위치가 중생 뒤라고 밝히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같은 의도로 다음의 글들을 들어서, 확정 성화의 위치가 믿음 뒤라고 주장했습니다.
"Perfectionists are right when they insist that this victory is not achieved by us nor by working or striving or labouring; they are correct in maintaining that it is a momentary act realized by faith"(Redemption, Part 2, Chapter 7, Sanctification).
"Faith is a whole-souled movement of self-commitment to Christ for salvation from sin and its consequences"(Redemption, Part 2, Chapter 4, Faith and Repentance).
이와 관련해 한 구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The priority of effectual calling and of regeneration in the ordo salutis should not be allowed to prejudice this truth either in our thinking or in the preaching of the gospel. It is true that regeneration is causally prior to faith. But it is only causally prior and the adult person who is regenerated always exercises faith. Hence the salvation which is of the gospel is never ours apart from faith. This is true even in the case of infants, for in regeneration the germ of faith is implanted. There is order in the application of redemption, but it is order in that which constitutes an indissoluble unity comprising a variety of elements. It is salvation in its integral unity of which the apostle speaks and this is never ours without faith-we are saved by grace through faith(Eph. 2:8). The person who is merely regenerate is not saved, the simple reason being that there is no such person. The saved person is also called, justified, and adopted. It is not only pertinent to the apostle's doctrine of salvation that he should lay such emphasis upon faith but also particularly appropriate to what is the leading theme of the early part of this epistle, namely, justification. It is preeminently in connection with justification that the accent falls upon faith"(The Epistle to the Roman, 존 머레이, 1장 16-17절 각주).
그런데 사계 님은 제가 제시한 위의 글들에 대한 해명은 하지 않으시고, 다만 효력 있는 부르심과 중생 때 확정 성화를 말씀하신 구절만 찾아서 쭉 나열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사계 님이 만일 <중생-확정 성화-회심-칭의>라는 논리 순서를 계속 주장하시려면, 먼저 위의 글을 제시한 제 생각을 반박하셔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사계님이 더 하실 일은, 레이몬드나 존 프레임 같은 몇몇 신학자의 글을 반박하시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제 의견을 거칠게나마 적어 보았습니다. 아무쪼록 저희 생각의 거리가 조금 더 좁혀지기를 바라며, 부족한 글을 마치겠습니다.
@TR-RE
말씀 고맙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을 먼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도행전 10장 고넬료의 예를 말씀해 주셨는데
이를 이해하는 것은 다를 것 같습니다.
제가 TR-RE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말해 볼까요?
(혹시라도 틀렸으면 용서하세요)
TR-RE님께서는 성령을 받았다는 표현을 아마도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러니까 고넬료는 성령세례로 중생케 되었다는 생각이지요?
중생케 되었으니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생각하시고요?
그리고 세례를 받았으니 세례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지요? 맞지요?
@TR-RE
그런데 저는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고 생각하지 않고
성령충만케하는 성령세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례는 베드로가 말씀하셨듯이 죄사함을 받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쓴 것이지요?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면서 오순절 성령세례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기록하면서 죄사함과 그에 따른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연결시켜 놓은 것입니다.(행 2:38절)
사도행전에는 모두 아홉번의 세례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는 사도행전 2장 이후의 여덟번의 세례를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아도
여덟번의 세례를 죄사함을 받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은 경우로, 자신의 독자들이 볼 것을 기대했겠지요?
그래서 고넬료의 경우 성령충만케 하는성령세례가 먼저 있었고
그후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은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제가 세례에 대해 말씀드리니 TR-RE님께서 성령세례로 질문하십니다.
이처럼 세례의 이해는 성령세례의 이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한 세트로 두개의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TR-RE
세례에 대한 오해가 성령세례에 대한 오해를 가져 온 것입니다.
관련 구절은 고전 12:13절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느니라" 입니다.
저는 성령께서 인도하신 물세례를 받았다고 이해하는데
아마도 TR-RE님께서는 기존의 신학에 따라 물세례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물과 관련없는 성령세례라고 생각하십니다 맞지요?
물세례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므로 한 몸에 속하게 되는 것인데
기존 신학은 물세례로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니 물세례로 볼 수 없고
그래서 성령세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 12:13절은 중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기존 신학은..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는 이해로
사도행전의 성령세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가 성령세례를 어떻게 보여 주는 것과 관계없이 사도행전의 성령세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선 '성령세례에 관한 이해"라는 글을 보시는 것이 좋겠네요
올려 드릴테니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지끼을 성경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읽으시는 느낌입니다. 사도행전 11장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와 그 식구들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사건을 설명한 말씀입니다. 이지끼을 님 생각과는 달리, 베드로 사도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건을 '구원'과 관련된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지끼을 아울러 사도행전 15장도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고넬료 가정)의 마음이 깨끗하게 된 것은, '(물)세례를 받아서'가 아니라, '믿어서'입니다.
@TR-RE
1)
제가 자의적으로 성경을 읽는다고 하신 것 기억하겠습니다.
제가 그렇지 않다는 것 증명하면 나중에 사과하셔야 합니다.
제가 틀리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TR-RE님께서는 세례요한은 물세례를 주었고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주신 것으로 알고 계시나요?
예수님께서도 물세례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주셨습니다.
제가 올려 드린 글에 있으니 보세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현재의 물세례는 어떤 물세례가 될까요?
@TR-RE
2)
베드로가 말씀한 선물(행11:17절)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경험한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또 다른 선물을 말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절)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무엇과 연관시켰나요?
“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세례를 받아서 죄사함을 얻어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중생이라고 봅니다.
@TR-RE
3)
TR-RE님은 성령세례를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라고 배웠습니다.
곧 중생(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성령세례가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중생(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성령세례는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올려 드린 글을 보시면
누가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는 중생(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성령세례는 다른 것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곧 누가는 성령세례를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TR-RE님은 사도행전을 읽을때 배우신 대로
누가가 보여 주지 않은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는 정의를
사도행전에 주입하여 사도행전을 읽는 것입니다.
@TR-RE 4)
TR-RE 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보면
베드로는 사도들이 받았던 성령세례를 고넬로 일가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하나님을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생명의 회개를 주셨도다” 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회개를 주셨도다 라는 말이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를 주셨다 는 말인가요?
@TR-RE
5)
TR-RE님은 고넬료에게 임했던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계십니다.
(제가 잘 못 알고 있으면 말씀하세요)
고넬료가, 성령세례로 중생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그 후에 받는 세례가 별 의미 없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받은 성령세례를
자신들이 오순절에 받았던 성령세례와 같다고 합니다. 맞지요?
그러면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TR-RE님께서 생각하는 “중생케하는 성령세례”입니다.
그러면 오순절에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가 사도들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시면 사도들이 “성령충만”케 되었습니다.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4절)
@TR-RE
6 )
정리해 볼까요?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로 성령충만해 진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세례가 사도들을 중생케도 하고 성령충만케도 한 것입니다.
중생과 성령충만이 동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중생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에베소교인들은 중생은 했지만 성령충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생(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성령충만은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상하지요?
@TR-RE
7)
성령세례에 관한TR-RE님의 정의인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로
오순절의 성령세례를 이해하면
사도들에게 중생과 성령충만이 동시에 있었던 것인데
바울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틀렸나요? 아니면
성령세례에 대한 TR-RE님의 정의가 틀렸나요?
바울이 틀렸다면 성경의 무오성이란 말은 이제 못하는 것입니다.
TR-RE님의 정의가 틀린 것이지요?
@TR-RE
8)
누가 가르쳐 준 것입니까?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고..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기존 신학이 그렇게 말합니다.
제가 계속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고전 12:13절,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의
세례는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를 성령세례라고 오해한다고..
이를 성령세례라고 오해하니까,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는 정의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영어로 쓰면 “ For by one Spirit we were all baptized into one body”입니다.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라고 이해하면
성령께서 (by one Spirit) 성령세례를 주신 것이네요.
그런데 성령세례는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성령께서 주십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By Jesus we ar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TR-RE
9)
TR-RE님께서는
“By one Spirit we are all baptized into one body” 와
“By Jesus we ar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이라는 말을 같은 것으로 보시는 지요?
저는 다르게 봅니다
“By one Spirit we are all baptized into one body”는 세례(물세례)를 의미하고
“By Jesus we ar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는 성령세례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갈 3:26-27절에서 세례에 대해 말씀하실 때
‘You were baptized into Christ” 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니 한 몸에 속하게(고전 12:13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By one Spirit we are all baptized into one body”를
기존신학은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따라서 성령세례를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로 이해해서
사도행전의 성령세례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TR-RE
10)
그래서 물세례도 성령세례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맞는지, TR-RE님께서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로 이해하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글을 보면,
이 분들은 고린도교회에서 세례에 관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시나 ? 하고 생각합니다.
고전 1장에 물세례에 대한 오해로 분열이 있었던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고전 10장에 바울이 이런 오해와 거의 같은 CASE 를 만들어 말씀합니다.
그리고 고전 12:13절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TR-RE님께서 한 번 이해해 보세요
그러시면 고전 12:13절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라는 말씀의 “세례”가
성령세례가 아니라 물세례를 말씀하는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는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이다”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세례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하실 것입니다.
@TR-RE
11)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라는
말씀을 제시하셨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 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세례를 주셔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의 “믿음”은 회개 또는 세례와 상관없는 믿음이 아니라
회개, 그리고 세례와 관계있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TR-RE님, 성경의 세례는 하나뿐입니다.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그리고 그 세례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런데 TR-RE님께서 생각하시는 “세례”는 다른 세례입니다.
합하면 둘이 됩니다.
제가 자의적인 해석을 하는 것인가요?
자의적인 해석을 하려고 하나의 세례를 고집하는 것인가요?
하나의 세례이니 세례요한의 세례. 이를 계속하셨던 예수님의 세례
승천 전 명하신 세례, 베드로가 말씀하는 세례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세례도 같아야 합니다
자의적으로 읽는다는 말이 기분이 나쁘셨습니까? 그런데 적어도 저는 이지끼을 님의 긴 글을 읽고 그런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지끼을 님은 무엇을 근거로, 제 생각을 판단하십니까? 제 생각도 자의적으로 읽으시는데, 성경인들 다르게 읽으시겠습니까? 일단 저에 대한 이지끼을 님의 자의적인 판단을 짚어 보겠습니다.
"TR-RE님께서는 신학자들이 무엇이라 하면 거기서 멈추시는 것 같네요." 저의 무슨 글을 보고 그런 판단을 쉽게 하십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안 들으시려는것 같지만" 이런 판단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오해하시느라 제가 드린 말씀은 보시지도 않았겠네요." 늘 남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고린도전서 12:23에 대한 제 생각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제가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도대체 뭘 근거로 판단하셨습니까?
그렇게 뭐든 쉽게 예단하고 마음대로 판단하시니까, 성경도 쉽게 판단하고 이지끼을 님의 단순한 구도에 끼어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왜 이런 논쟁을 하려고 하십니까? 저는 처음부터 말씀드렸지만, 별로 논쟁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시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할까요?" 하는 이 말이 "제가" 칼빈을 안 읽었다는 말입니까? "이지끼을 님"이 안 읽었다는 말입니다. 칼빈은 읽어보지도 않고, 칼빈의 생각이 이지끼을 님의 생각과 같다고 하셔서 제가 드린 말씀입니다. 이런 단순한 글도 읽어내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것 하나하나 짚어드리자면 너무 많은 시간이 허비됩니다. 저는 그렇게 많은 시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1)
그런 의미였나요?
저는20.12.15 20:20 에 TR-RE님께서
“그래서 칼빈의 생각은 이지끼을 님과 다르다고 말씀드렸더니, 칼빈은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시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할까요?” 라고 하셔서
제가 드린 말씀
“추가합니다: TR-RE님께서는 신학자들이 무엇이라 하면 거기서 멈추시는 것 같네요” 에
기분이 상하시고 오해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20.12.16 08:59글 부터20.12.16 09:50 글까지 다섯개의 글로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TR-RE 님께서 20.12.16 23:04 에 쓰신 글을 보니, 오해가 풀리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2)
그리고 제가 TR-RE님을 판단했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TR-RE님께 대한 저의 말들은
TR-RE님께서 단순하게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되는 그런 질문같은 것이었습니다.
(3)
TR-RE님의 시간을 허비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1년전쯤, 성경을 보다가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 오던 세례가
성경이 보여 주는 세례와는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해보니 세례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계속 생각해 보니 이런 오해는 세례에 관한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리고 구원까지 오해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세례는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 그리고 구원이 아닌
다른 믿음, 다른 구원을 근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4)
저에 관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카페의 특별회원입니다.
제가 특별회원이 될 만한 사람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사계님께서 아마도 저의 방언에 대한 연구를 높이 평가하신 것 같습니다.
타카페에서, 어떤 회원에게 쓰신 글에
사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방언에 관해서 세뇌를 당했던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저로 인해 방언에 관하여 바로 알게 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잘 못 생각하고 계신데
사계님께서는 저의 말을 들어 주시고, 생각을 바꿔주신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의 그 부분을 거꾸로 읽고 있습니다.
거꾸로 읽으면서 바로 읽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누가 책임져야 되겠습니까?
저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5)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 곧 세례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들, 그리고 목회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오해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과 구원이 아니라
다른 믿음, 다른 구원을 붙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30년 이상 살고 있어서 저의 한국어가 어눌하게 들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어눌한 한국어에 기분 상하지 마시고
제가 드리는 말씀을 한 번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TR-RE님과 사계님의 구원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6)
제가 정리해 드렸듯이,
1, [믿음] – [세례] – [구원] 이
2, [믿음] – [구원] – [세례] 로 바뀐 것입니다.
1, 2 모두 [믿음]이 구원합니다.
다른 것은 1번의 [믿음]은, 믿음의 행위인 [세례]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입니다.
반면에, 2번의 [믿음]은 믿음의 행위인 [세례]없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2번의 [믿음]은 우리를 직접 [구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믿음]은 1번의 [믿음]입니다.
(7)
1번의 [구원]은 죄사함을 얻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얻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곧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2번의 [구원]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야 죄사함을 얻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는 것인데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8)
갈라디아서 3:26-27절을 말씀을 잘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26절은
26 "너희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3:27절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지 설명합니다.
27 "왜냐하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너희 모두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기 때문이다"
(for all of you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clothed yourselves with Christ.)
(9)
갈 3:26절과 27절을 함께 쓰면
26 "너희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27 "왜냐하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너희 모두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기 때문이다"
(for all of you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clothed yourselves with Christ.) 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27절은 26절을 설명합니다.
믿음으로(26a) 어떻게 구원(26b)을 얻었는지 설명합니다.
곧 27절은 중간과정을 설명합니다.
(10)
그러면
26a 믿음으로 (말미암아)
27 (왜냐하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너희 모두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기 때문에
26b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신학은 중간과정인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너희 모두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다"를 부정합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과정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그 결과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는 말씀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말하는 [세례]입니다.
@이지끼을 미국에 오래 사셔서 한국말이 서투신 것이었군요. 오해는 풀겠습니다. 저는 이지끼을 님의 태도를 높이 삽니다. 어떤 신학자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성경을 읽고 생각하시는 것, 그 점에서 저보다 훨씬 나으십니다.
그런데 어떤 새로운 의견을 제시할 때는, 절차가 있는 법입니다. 이지끼을 님처럼 생각하시면, 개신교의 성례관 자체를 부정하시는 격이 됩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이라는 원리도 무너집니다. 개신교 신학자들이 이지끼을 님이 제시하시는 말씀을 몰라서 이지끼을 님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례는 말씀(성경)에 딸린 것이지, 성례 자체가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이지끼을 님은 세례를 반드시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벌써 여기서부터 세례와 믿음이 반드시 같이 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세례의 효력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이 없이는 세례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는 즉시 그 효력이 안 나타나고, 꼭 세례를 받는 당시의 믿음만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믿을 때 바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지끼을 천주교에서도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 까닭에, 직분자가 아닌 사람이라도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 꼭 세례를 주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그런 폐단은 종교개혁이 되면서 사라졌습니다. 물론 오늘날 세례와 성찬 자체를 소홀히 여기고, 그저 하나의 형식으로만 여기는 것은 또 다른 폐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개신교 선조들은 성례가 주는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세례와 성찬이 우리 믿음을 굳건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이라고 여기고, 엄숙히 성례를 집행했습니다. 그런 개신교 선조들의 의견은 함부로 묵살할 것이 아닙니다. 이지끼을 님은 칼빈과 그 이후 개혁주의 선조들의 글을 신중히 읽으시고 왜 이지끼을 님의 생각과 다른지 진지하게 검토하는 일을 지금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논리를 세우셨으니, 그 논리가 맞는지 한번 칼빈의 글부터 읽으면서 검증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TR-RE
이 위의 글을 쓰고 왜 이렇게 TR-RE 님과 소통이 힘든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저의 한국어도 문제가 있지만
저와 TR-RE님은 신학자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신학자들의 말을 책 등을 통하여 찾아 보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의존하는 신학을 하지 않습니다.
이점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신학자들에게 의존하는 신학을 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말해 주지 않는 것도, 제가 알게 되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TR-RE
"오직믿음이라는 윈리도 무너집니다" 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 Luther는 "오직믿음"이라 하면서도
"세례는 꼭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순된 주장 같지만 저는 이해할 것 같습니다.
세례를 독립된 행위로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저의 글로 답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올려 드릴테니 한 번 읽어 주십시요.
그리고 제 글로 말씀드리는 믿음 세례 그리고 구원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 세례 그리고 구원인지
TR-RE님께서 확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TR-RE
"개신교 신학자들이 이지끼을 님이 제시하시는 말씀을 몰라서
이지끼을 님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셨는데
아시면서도
1, [믿음] – [세례] – [구원] 에서
2, [믿음] – [구원] – [세례] 로 바꿨다면 더 큰 일입니다.
믿음, 세례, 그리고 구원이 다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솔직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을 잘 모릅니다.
예를 들어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던 장소는 다락방이 아니라 성전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것인데도 오랫동안 몰랐던 것입니다.
오순절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다락방에 성령강림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저 앞에서 누가 그런 말을 하면 그대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교회가 옛 성전이 아니라 다락방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TR-RE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exegesis 와 eisegesis를 어느 정도는 구분합니다.
성경을 read out 하려고 하지 read in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14:2절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계속 말씀을 드리는데
칼빈의 글, 의견이라며 대응하시는 분들도 그동안 많았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칼빈의 의견을 왜곡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쨎든 저는 칼빈의 의견을 상대로 토론했던 것입니다.
저는 칼빈을 높이 평가하지만 칼빈의 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게 성경을 가르쳐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칼빈은 그 중 한 분이지만 그 분의 신학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이지끼을 이지끼을 님 논리를 위해 갈라디아서 3장 27절을 내세우시리라 생각했는데, 제 예상을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계속 신약의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하시는데, 저는 이 주장을 {무물카페}에서 반론했을지언정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TR-RE
TR-RE님
제가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있네요
제가 그렇다고 해서 신학자들의 말씀을 절대 인용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번에 제가 올릴 글에 Wayne Grudem 의 말씀을 하나 인용합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지끼을 저는 제가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신학이 제 신학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보다 성경을 훨씬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도 그분들의 모든 해석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뛰어난 신학자들끼리도 다 성경을 조금씩 달리 해석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 해석이 다 조금씩 달라도 신학의 큰 틀에서 일치를 보이는 것이 개혁 신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이지끼을 님은 그런 경계를 쉽게 넘나들고 계십니다. 그것이 대단한 용기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위태로운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단이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혼자 성경을 읽다가 나옵니다.
@사계四季
제가 올려 드릴 글을 먼저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댓글로는 저의 생각을 모두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계님께서도 한 번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신약교회가 성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 날이 오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그것도 아침 제사 드리는 시간인 제 삼시(오전 9시)에 유대인들인 사도들과 경건한 유대인들이
성전밖에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임하셨던 사람들이 120명이 아니라 12명이었다는 것은
제가 조금 더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TR-RE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제가 처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며칠 전 말씀 드렸듯이, 초대 교부부터 최소한 종교개혁 때까지는
저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지끼을 초대 교부는 읽어 보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칼빈도 안 읽어보시고 지레짐작으로 이지끼을 님과 의견이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거짓말이 될 수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어떤 교부가 이지끼을 님과 의견이 같은지 말씀해 보십시오. 그럼 저도 살펴보겠습니다. 최소한 칼빈을 비롯한 개혁 신학자들은 제가 아는 한 이지끼을님과 의견이 다릅니다.
@TR-RE
방금 전 글을 올렸으니, 보시고 말씀을 나누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