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간호사 파독과 동백림 사건의 산 증인 이수길 박사의 증언Ⅰ
“한국간호사 파독 40년을 회고하며”
2007-03-06 오후 4:02:59
[ 김운경·재독교포 저널리스트 ]
재독동포들의 연합단체인 ‘재독한인총연합회’는 2006년 10월 한국간호사 파독 40주년을 맞아 독일 이민사는 물론이고 한독외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하여 그 한복판에 있던 이수길 박사(78)를 초청하여 4시간여에 걸친 기념 대담을 가졌다.
주제는 주로 한국간호사 파독 과정과 실태 그리고 동백림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이 박사는 신문, 잡지 등의 보도기사와 공한과 개인 서한 등, 그 동안 본인과 관련된 거의 모든 국내외 자료들을 차곡차곡 수집해 왔으며 이날도 상당량의 자료를 근거로 답변했다. 이 박사는 증언하는 중에 연도와 수치 등을 밝혀야 하는 대목이 나올 때마다 준비해온 자료를 찾아가며 성실히 답변해주었다.
1966년 꽃다운 나이에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백의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독일 땅을 밟은 이래 꼭 40년이 지난 지금 바로 한국간호사 독일취업의 산파역을 맡은 이수길 박사에게 당시의 사정과 사건들을 직접 들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 박사는 그 동안 가슴 속에만 간직하고 밝히지 못했던 많은 숨은 이야기와 사건 뒤에 묻혀있던 진실들을 과감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간호사 파독과 관련되어 세상에 떠돌던 무수한 소문들. 소문이라는 말 자체가 풍기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그러하듯 이 중에는 근거 없는 낭설이나 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악소문도 적지 않았다. 이번 대담은 특히 진실 규명을 위해 때때로 심층 질문도 가했으나 대담에 임한 이 박사는 어느 질문에 대해서든 거칠 것 없이 본인의 견해를 밝혔다.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줄츠바흐 소재 도린트호텔 소 세미나실에서 열린 대담은 이곳 동포언론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이 패널로 참석했으며 재독한인총연합회장(안영국)이 사회를 맡았다. 다음은 이날 있었던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단 질문자는 재독한인으로 통일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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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7월28일, 슐타이즈 병원협회장이 한국대사관에 한국간호사 취업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 ⓒ이수길
재독한인 : 한국인 간호사들을 파독하게 된 과정을 소상히 밝혀 달라. 우선 어떤 계기로 간호사 독일취업을 구상하게 되었나.
_ 이수길 박사 : 우연한 기회가 발단이 되었다. 마인츠 대학병원 소아과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아침에 회진을 돌고 올 때면 아기들이 자주 울고 있었는데 간호사들이 우는 아기들을 돌보지 못했다. 이유는 당시 내가 담당하고 있던 병동에 23명의 영아 환자들이 있었는데 배속된 간호사가 부족해서 아기들에게 그때마다 우유를 먹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장 말이 당시 독일에 최소한 3만 명의 간호사가 부족한 상태이고 이로 인해 병원은 환자를 더 받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한국의 간호사가 독일에 취업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보건사회부에 알아보니 한국에는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3천 명의 여성들이 실직상태라고 했다. 한국으로서는 간호사 파독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또 내가 한국간호사의 독일 취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내 자신이 한때 수도육군병원 문관으로 근무하면서 우리 간호사들이 얼마나 친절했던지 그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간호사들이 독일에 오면 틀림없이 환영을 받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백 명의 간호사를 독일에 취업시키는 일이 한 사람의 민간인 주선으로 가능했나.
_ 맨 먼저 내가 근무하던 마인츠병원에서 한국간호사 30명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외국인이 독일에 취업을 하려면 노동청 허가가 있어야 하므로 해당 관청인 라인란트팔츠 주 노동청에 한국인 간호사 독일취업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답변은 딱 잘라서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라인란트팔츠는 보수정당인 기민련/기사련(CDU/CSU)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프랑크푸르트를 알아보았다. 각 병원마다 일일이 편지를 보내며 교섭을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11개 병원에서 총 210명을 취업시키겠다는 양해각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노르트베스트 크랑켄하우스 병원장 겸 병원협회장인 슐타이스 씨를 알게 되었다. 간호사 일을 계기로 그와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이후 슐타이스 병원협회장은 한국간호사 취업과 관련하여 독일 측 실무 책임자가 되어 이 일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슐타이스 원장은 진보적 성향의 사민당(SPD) 당원이었고 프랑크푸르트 시장이었던 브룬데르트 박사 또한 이 때 사민당 부당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잘 되려고 프랑크푸르트가 소속되어 있는 헤센 주가 독일에서 유일하게 사민당 정권이 들어선 때였다. 주지사와 사회부장관 등 주정부의 고위층이 우호적인 입장에서 이 사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하고 협조할 것을 약속해 주었다. 정말이지 헤센 주가 아니었다면 한국간호사 파독의 물꼬를 트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지난 5월에 있었던 파독 간호사 40주년 기념일을 맞아 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FAZ) 등 독일 언론들도 당시 헤센 주(州)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없었다면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진출은 없었을 것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간호사 파독에 대해 당시 주독 대사관 입장은 어떠했는가.
_ 독일 정부의 허가를 받은 후 바로 당시 본(Bonn) 소재 주독 대사관(대사 최덕신)에 가서 관련서류를 제출하고 정부가 이 일을 진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가 없어 궁금해 하는 차에 슐타이스 병원협회장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주독 대사관에서 각 병원과 병원협회에 공한을 보내 “우리는 한국인 간호사를 독일에 취업시킬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독일간호사의 질이 한국간호사만 못한데다 독일의 간호사 급료가 미국간호사 급료의 삼분의 일 밖에 안 될 정도로 낮다”는 것을 들며, “이 일은 이수길 개인이 하는 일이지 정부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대사관에서 반대한 진짜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보았다. 아마도 정부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개인이 추진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공관의 자존심이 상해서 반대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강하게 들었다.
(참조 : 당시 주독대사 최덕신 장군은 사석에서 이 박사의 간호사 파독사업을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수길 박사는 프랑크푸르트 지역한인회에서 발간했던 월간 <한인사회>(2002년 3월호)에 게재된 기획연재 <뿌리를 찾아서> 제2편 간호사<1부>, 「한독 양국 간 직접적 민간외교 물꼬… 백의 천사들의 프랑크푸르트 공항 첫발」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65년 4월 16일 부활절 전 금요일에 주 서독대사 최덕신 장군 내외분이 주말을 우리 집에서 보내기 위하여 마인츠에서 오셨는데 최 장군과 나는 전과 같이 바둑을 두었으며 이 기회에 한국간호사를 서독에 취업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진언하였더니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하면서 최 대사도 적극 협력하겠으니 추진하여 보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15쪽)
그러나 막상 간호사 초청 취업 건이 접수되자 대사관 내부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일어났고, 결론은 ‘직접 취업알선 거부’로 방침이 정해졌다고 이 박사는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16쪽) 1. 서독의 봉급이 미국보다 낮다. 2. 한국간호사의 교육기간이 서독보다 길다. 3. 서독 간호사의 자격을 미국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사관은 공식적으로는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춘수 참사관을 통해 슐타이스 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귀하가 보낸 한국간호사 서독 취업에 대한 7월 28일자와 8월 2일자 서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신합니다. 앞으로 상기 문제에 대하여는 이 사업의 주동자인 이 박사와 전적으로 협의하기를 바랍니다. 한국대사관은 이 박사가 추진하는 이 사업을 도와줄 용의가 있습니다.’(17쪽)라고 함으로써 이중 플레이를 펼친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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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진 프랑크푸르트 공항도착, 1966년 1월31일 ⓒ이수길
한국 관계당국과의 협의에 문제점은 없었나.
_ 방법은 이제 본국의 주무관청인 보건사회부에서 직접 허가를 얻어내는 길 밖에 없었다. 나는 슐타이스 병원협회장과 함께 일본항공(JAL) 프랑크푸르트지사 판매부장 빈터 씨를 만났다. 한국에 나가서 보사부장관을 만나 어떻든지 간호사 취업 건을 성사시켜보고 싶은데 비행기 표 살 돈이 없다고 하자 빈터 씨는 선뜻 왕복 비행기 표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 대신 일이 잘 돼 간호사들이 독일로 올 경우 일본항공 전세기를 이용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전세기 이용계약은 프랑크푸르트 시와 체결되었다. 물론 대한항공은 아직 설립되기도 전이었다. 당시 한국 왕복 비행기 표는 내 월급으로는 생활비를 절약해서 1년은 꼬박 저축해야 겨우 한 장 살 수 있을 만큼 큰돈이었다. 그리고 마인츠 대학병원의 주임교수를 찾아가 사정 얘기를 하는 한편 동경에서 열리는 세계 소아과 학회에 참가하겠다는 명분으로 한 달반 휴가를 받았다.
사전에 최덕신 대사가 소개 해준 덕분에 한국에서 이만섭, 김호철 등의 국회의원을 만났고 이 분들의 중재로 오원선 보사부장관(재임기간: 1964년 5월~1966년 4월)을 접견하는 데 성공했다. 긴장과 기대감에 벅찬 마음으로 보사부장관을 면대했으나 단 15분 만에 모든 일이 끝났다. 15분간 얘기를 나눈 오 장관은 “이 박사, 얼마든지 데리고 가시오”라고 했다. 주독 대사관의 공식 입장이 무색케 되는 순간이었다. (웃음)
(참조:이 당시 한국 왕복 비행기 티켓은 1,400달러로 당시 환율로는 대략 5,600 마르크, 지금의 유로화로 환산하면 약 2,800유로가 된다. 최덕신 대사는 귀임 후 천주교 교령을 지내다 도미. 미국에서 반체제운동을 하면서 수차례 북한을 방문하다가 끝내 부인과 함께 월북했다.)
간호사 선발은 어떻게 했나. 항간에서는 선발과정에 부정이 있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는데.
_ 총 128명을 선발해야 했다. 그런데 신문에 공고를 하고 자격 가진 이들을 모집하니 약 600명가량 지원했다. 5대 1이나 되는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최종심사는 보사부 간호과장과 간호협회장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보았는데 뽑힌 사람들은 거의 모두 간호대학 또는 간호전문학교 출신들로 21~24세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런데 최종 명단을 훑어보니 이 중에 30살이 훨씬 넘은 여성들 7~8명이 끼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로 새 나가자 간호협회 총무를 비롯해 탈락된 간호사들이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났다. “우리는 나이가 많다고 떨어졌는데 저 사람들은 어째서 합격이 됐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보사부 입김이 작용한 것을 알고 젊은 마음에 의협심이 발동해서 이 사람들은 못 데려 가겠노라고 겁도 없이 항의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중앙일보는 ‘얼굴이 예쁘지 않으면 독일에 못 나간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선발 기준을 무시하고 주무관청의 압력행사로 간호사 선발이 공정치 못했음을 비아냥거리는 고발기사였다.
이들 7명 중에는 지금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는 김모 씨도 있었고 양호교사도 한 사람 있었다. 양호교사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둘째 딸(박근영)이 다니는 학교에 근무했는데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청을 넣어 명단에 오른 케이스였다. 이 같은 행태에 대해서 나는 물론 한국간호협회 등에서도 불가하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지만 결국 모두 데려오고 말았다. 당시 보사부에서 통역 일을 보고 있던 강신호 씨가 “그만 양보하지 왜 고집을 부리냐. 당신 병원에 데려다가 쓸 사람들도 아닌데 너무 그러지 말라”며 보사부 요구에 응할 것을 종용했는데 아무래도 보사부가 철회할 것 같지 않아 못이기는 체 7명을 받아드렸던 것이다.
(참조:1) 강신호(79)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195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으며(1958년), 현재 동아쏘시오그룹 회장인 동시에 29대 전경련회장이다. 2) 언급한 중앙일보는 1966년 1월 14일자로 <서독 갈 간호원 8명, 예쁘지 않아 갑자기 출국보류>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선발과정에서 수속비 명목으로 사례비를 받은 일이 있는가.
_ 전혀 그런 일 없다.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 나는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출국예정일을 한 달 가량 남겨놓고 여권수속을 시작했다. 여행사에 의뢰하면 건당 100~150불을 요구하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간호사들에겐 그럴 돈이 없었다. 내가 수고 좀 하면 되는데 싶어 자발적으로 여권수속을 대행해 주었다. 한 사람 서류 작성하는데 꼬박 30분 걸렸다. 한겨울 난로 하나 피워놓고 작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128명 모두를 끝내고 무사히 패스포드를 받았다.
당시 간호사들이 부담한 일인당 수속비용은 여권 발급비를 포함해서 3~4천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독일 비자를 받으려면 신체검사도 받아야 했다. 지금은 이 제도가 없어졌지만 그 때만 해도 반드시 뢴트겐을 찍어야 했는데 한국에서 엑스레이 한 번 찍는데 당시 비용이 3~5천 원 정도나 되었다. 독일에서는 한 푼도 안내고 찍는 엑스선 사진을 왜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은 돈을 내야 하는지 사정을 알아보니 필름 값이 비싸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서울대학병원에서는 만일 필름을 가져온다면 800원 실비만 받고 찍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급히 프랑크푸르트 슐타이스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필름 200장을 받아 120장을 사용하고 남은 80장은 서울대학에 기증했다.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하는 이유는 당시 나는 간호사 128명을 무사히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도착시키는 것, 이것 하나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 비행기 표 값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웃음)
사실 조금만 앞을 내다보면 얼마든지 사업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이후 수 천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에 들어오게 되는데 혹시 사업 구상을 해보지는 않았는지. 예를 들면 비행기 티켓, 수속비 등에서 일정한 수익을 챙길 수도 있었다고 보는데.
_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당시 나는 128명이 무사히 비행기를 타서 독일 오는 것, 단순히 이것만 생각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간호사가 계속 독일에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128명만 데리고 가면 끝인 줄 알았다. 만일 그 때 간호사 송출 사업이 계속적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혹 나도 연속사업으로 무슨 계획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
- 도착 당일 프랑크푸르트 시장이 베푼 환영식에서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는 간호사 제1진, 지휘자는 김인환 간호사 ⓒ이수길
왜 간호사들이 매번 128 명씩 왔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_ 그 이유는 당시 제트여객기 중에서 제일 큰 기종이 ‘DC 8’ 이었는데 총좌석수가 129석이었다. 그러니까 내 자리 하나 빼서 128명이 된 것이다. (웃음)
인간 모두가 경제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박사의 순진무후하기만한 행동이 잘 이해가 안 간다. 수속비나 사례비 또는 수익사업 구상 등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간호사 파독과 관련하여 어떤 혜택을 받은 일은 없는가, 또는 그런 것을 약속 받지는 않았나. 아직도 세간에는 파독 간호사와 관련하여 이수길 박사, 이종수 박사 등이 착복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_ 만일 어떤 형태로든 간호사 독일취업과 관련해서 돈을 받았다면 지금 세상을 향해서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게다. 혜택이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를 통해서 독일에 온 간호사들이 친목회를 구성했는데 훗날 ‘재독간호협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친목회에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30마르크 정도 되는 선물 하나를 정성껏 준비해 주었는데 그것이 혜택이라면 혜택이랄까. 내가 돈 문제에 관한 한 결백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동백림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어느 날 본 대사관으로 납치되었다가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을 때 그들이 나에게 말하길 “너 간호협회에서 받은 돈도 없는데 무슨 돈으로 한국에서 한 달 반씩 돈 쓰고 돌아다녔느냐. 이북에서 돈 받은 것 아니냐”고 다그치고 고문했다. 간호사 친목회는 나에게 간호사들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했는데 적어도 그 동안 들어간 전화비용만큼은 갚아야겠다며 청구하라고 해서 1,200마르크를 신청한 적이 있었는데 돈이 없다고 해서 결국 1페니히도 받지 못했다. 내가 이런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은 순전히 이종수 씨가 간호사들에게 돈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전에는 교민사회에서 돈에 관한 말이 나돌지 않았다.
제 1진이 독일에 들어온 이후 계속적인 한국간호사 취업 요청이 있었는데 이수길 박사가 데리고 온 간호사는 모두 몇 명인가.
_ 모든 수속을 마치고 떠날 날만 기다리는 데 프랑크푸르트에서 슐타이스 병원장이 한국에 왔다. 깜짝 놀랐다. 그는 브룬데르트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친서를 품에 넣고 왔는데, 친서의 내용은 간호사 300명을 더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최초의 한국간호사 128명이 비행기도 타기 전에 간호사를 더 요청한 것이었다. 요청대로 제 2진 128명을 보사부에 의뢰하고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제 2진은 4월에 들어왔다. 1진과 2진 256명이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병원과 양로원에 배치되었다. 이 같은 사실이 독일 신문 방송 등 언론을 타고 전국으로 보도되자 독일 전역에서 한국간호사를 원한다는 신청이 쇄도했다. 그 수가 3,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시는 전국규모의 사업은 감당할 수 없다고 해서 이 일은 진행이 안됐다.
내가 데려온 간호사가 모두 5차에 걸쳐 간호사 628명과 간호학생 40명해서 668명, 후에 이종수 씨가 경영하는 ‘사단법인 기독교 한국난민구제회’에서 취업시킨 간호사 416명, 간호보조원이 459명, 간호학생 106명 등 모두 981명, 또 주독 대사관이 초청해서 한국 노동청을 통해 들어온 간호사가 17 명, 종로 ILI 학원을 통해서 온 사람들이 150명 그리고 천주교 종교단체(담당 아잉가 신부)에서 초청 취업된 간호학생 26명 등으로 1968년까지 한국간호요원은 총 1842명이었다. 그리고 3년 계약이 끝나서 귀국할 때 간호사들이 나가는 수만큼 교체되었는데 이때 독일병원협회가 교체인력으로 받아드린 간호사들이 자료에 의하면 간호사 4668명, 간호보조원 3417명으로 총 8085명이었다.
따라서 교체된 연인원 8000여명과 앞에서 언급한 1800여명을 합해서 1966년 1차부터 1976년 마지막 팀까지 독일에 들어온 한국의 간호요원 총계는 10032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1976년 5월 이후부터는 더 이상 교체인원이 선발되지 않았다. 독일정부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간호요원의 독일 취업을 전면 금지시켰던 것이다.
(참조:이 박사는 추후 증언에서(2007년 1월 18일 자택) 위에서 언급된 1968년까지의 독일취업 간호요원 1,842명과 교체인력으로 들어온 8,085명 외에 한국 국방부에서 독일 육군병원과 교섭하여 간호장교 출신 60명 정도를 1974년과 1975년에 독일 내 몇 개 군병원에 취업시킨 일이 있다고 했다. 이 케이스로 독일에 온 간호장교 출신 김모 씨가 현재 마인츠에 거주하고 있다.)
교체인력으로 들어온 간호요원들의 독일취업실무는 독일병원협회가 직접 한국 담당기관과 접촉해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다른 중개기관을 거쳤는가.
_ 병원협회의 위임을 받아 내가 실무를 맡았다. 1966년 1월 30일에 독일에 입국한 간호사 1진들이 계약에 따라 1968년 말로 3년 임기가 끝나게 되었다. 당시 마인츠 대학병원에는 모두 180명의 한국 간호사들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계약만료가 되는 사람이 70명가량 되었다. 마인츠병원으로서는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학병원장하고 독일병원협회장이 의논한 끝에 나가는 인원만큼 새 사람들을 받기로 하고 교체업무를 병원협회에 일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협회에서 실무를 나에게 맡겼다.
(참조:이 박사의 간호사 교체에 관한 실무는 초기 단계에만 관여했고, 이후에는 독일병원협회가 한국 담당기관과 직접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해당지역은 헨센 주, 라인란트팔츠 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이었다고 한다.)
제 1진 이후의 간호사 선발과 파독과정에 변화가 있었는가.
_ 변화가 있었다. 제 2진부터는 청진동에 사무실을 둔 해외개발공사(초대사장 정희섭)에서 파독간호사 업무를 전담했다. 내가 독일에서 슐타이스 씨와 함께 독일병원들이 필요로 하는 간호사 수요를 파악해서 보사부에 인원을 신청하면, 해외개발공사가 나서서 간호사 모집공고서부터 선발, 수속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내업무를 맡아서 했다. 그리고 수속이 완료되면 나는 간호사들을 인솔해서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오면 되었다. 따라서 제 2진부터는 이수길에 의해서 간호사 선발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인력송출 전문기관을 통해서 간호사 파독이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제 1진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파독 간호사 일과 관련해서 보사부와 갈등도 있었고 매번 일하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
- 1966년 12월21일자 동아일보 ⓒ이수길
한국 간호사를 데려오는 일에 전념하다 보면 시간부족 때문에라도 의사로서 진료업무에 충실을 기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소속 병원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나. 혹 이 박사 개인에게 어떤 변화는 없었는가.
_ 1966년 1월 30일 드디어 제 1진 간호사 128명이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영접을 받으며 공항에 도착했다. 성대한 환영식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제 2진 인솔문제가 논의되었다. 부시장, 병원협회장 등이 제 2진도 내가 맡아서 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나는 직장인인데 어떻게 그렇게 자주 한국에 나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자 이 분들이 나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안했다.
프랑크푸르트 시 부시장과 병원협회장의 제안은 마인츠에 있지 말고 프랑크푸르트로 오라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훽스트 병원의 소아과 과장 직책도 주고, 관사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또 봉급도 250마르크 정도 더 많아 졌다. 나에 대한 주문은 앞으로 병원일은 할 것 없고 1년 동안 간호사 데려오는 일만 하라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프랑크푸르트로 오는 게 좋겠다 싶어 승낙을 했다. 마인츠대학 주임교수가 또 선선히 허락을 해줘서 훽스트 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1966년 4월 1일부터 병원 관리본부 사무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보직은 소아과 과장(Oberarzt)이었지만 진료는 안하고 간호사 데려오는 일만 전담했다.
이 박사 외에도 외국인 학원 강사가 간호사 취업을 알선했다가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증언해 달라.
_ 1966년 벽두부터 국내 신문들이 파독 간호사와 나에 대한 기사를 앞 다퉈 보도하면서 간호사 서독취업 붐이 일자 당시 종로에 있던 ILI 어학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던 오스트리아인 줌파(Shumber)라는 사람이 뒤셀도르프 병원과 일을 꾸며 간호사 150명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줌파가 이때 1인당 150~200불씩 수수료를 챙긴 일이 뒤늦게 발각돼 경찰의 조사를 받고 결국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조선일보가 이 사실을 폭로함에 따라 검찰에서 입건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보도가 국내에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이 독일로 전해졌다.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가 조선일보를 인용 보도하면서 슐타이스 병원장과 이수길도 부정한 돈을 받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기사를 써 애꿎은 우리만 명예가 실추되었다. 줌파를 통해서 독일에 들어온 간호사들은 대부분 나에게 신청했다가 불합격된 사람들이었다.
또 한국간호사의 독일취업에 관여한 사람 중에 이종수 박사도 있는데 이종수 박사는 이수길 박사보다 더 많은 간호요원들을 독일에 취업시킨 걸로 안다.
이종수 박사의 활동에 대해서 아는 대로 소상히 밝혀 달라.
_ 같은 해 6월에 제 3차 간호사들이 들어 왔는데, 부터탈 시립병원 외과 수련의로 있던 이종수 박사가 7월부터 한국간호사 취업알선 일을 시작했다. 그는 바트 크로이츠나하 병원협회 재무과장과 함께 ‘코리아 디아코니’를 창설하고 간호사들을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과 베를린 등지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를 우리말 표기로는 ‘한국난민구제회’라고 칭했다. 그런데 이종수 씨는 간호사들에게 일정액을 갹출하여 한국에 난민구제병원, 즉 영세민, 부랑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병원을 짓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통해 취업한 간호사 또는 간호조무사들에게 매월 40마르크씩을 봉급에서 원천징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종수 씨는 이 문제로 주독 대사관 노무관을 찾아가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대사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내었다. 이 사실이 한국의 보사부에 알려졌다. 보사부는 40마르크가 너무 많으니 25마르크로 하라고 액수를 줄여주었다. 25마르크 중 5마르크는 회비이고 20마르크가 병원건립기금이었다. 간호사들의 월급에서 빠져 나가는 기금은 모두 슈트르가르트의 디아코니로 입금되었다.
계약기간 3년간 모금된 기금 총액이 약 41만 마르크에 달한다. 그리고 이종수 씨는 이 돈 가운데 14만 마르크로 1970년 서울근교에 12만평의 땅을 샀다. 병원부지로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병원은 건립되지 않았다. 그 땅이 지금도 있다면 아마 수 천억 원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막대한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참조:간호사들의 월급에서 원천 징수된 병원건립기금의 행방이 밝혀져야 한다고 공개 해명을 촉구하는 사설이 재독동포 계간지 ‘한독레포드(발행인 임석훈)’ 2000년 6월 20일자 ‘신뢰는 사회의 기본덕목이다’, ‘사회지도층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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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3월21일자 한국일보 - 한국간호사들이 3년간의
계약기간 무시하고 제 3국으로 빠져나간다는 기사. ⓒ이수길
어떻게 이 같은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는가.
_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착복을 했다고 하니까 (실상을 알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내가 직접 슈투트가르트 디아코니에 문의 편지를 보냈다. 모금된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 또 예정대로 병원을 설립했는지 소상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슈투트가르트 디아코니에서 이종수 씨에게 편지를 보내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이종수 씨로 하여금 그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이종수 씨가 그 내역을 보내왔는데 당시 내가 한독협회 회장이었으므로 질의에 대한 회신을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이종수 씨가 보내온 공한은 한독협회장한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슈투트가르트 디아코니, 본 대사관 등에 일제히 편지를 발송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종수 씨는 한국에서 간호사를 선발할 때 해외개발공사와 함께 난민구제회가 참여케 했다. 이때 지원자들 난민구제회 기금조성 명목으로 기부금을 받아냈는데 이 같은 선발 방법이 부당하다는 기사가 연일 동아일보에 보도 되었고, 결국 이종수 씨 내외가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난민구제회’는 본(Bonn)에 본부가 있었고 서울에 지부가 있었는데 주로 부인, 형제 등 가족들이 운영했다. 이종수 씨는 간호사 송출사업을 위해 여행사도 경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처럼 128명 단위로 간호사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형편 되는 대로 20명, 30명씩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파독간호원 사기’라고 크게 보도했는데 이와 더불어 세간에서는 이수길도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이를 지켜보다 못해 동아일보에 ‘나와 이종수의 난민구제회와는 아무런 관계없다’는 해명 기사를 내기도 했다.
(참조:1) 기독교난민구제회(독일명칭은 Diakonische Gesellshcaft fuer Korea e.V.)에서 추진한 간호사 서독 취업의 사기행각에 관한 기사는 동아일보 1966년 12월 10일자(‘인력수출 사기행각’, ‘간호원을 고아라 속여’), 12월 13일자(‘파독간호원 사기’, ‘피해자 속속 늘어나’, ‘검찰서 강력수사 지사’) 등 이 기간 중 연일 관련기사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2) 이수길 씨가 난민구제회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한 기사는 동아일보 1966년 12월 21일자 ‘서독 라인란트팔츠 주로 초청될 간호사들에게’)
이 구제기금은 사회복지를 위한 공금인데 정작 기금을 조성한 간호요원들의 입장이 어떠한지 들어 볼 필요가 있다. 간호협회에서는 사라진 이 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_ 그 돈이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리고 간호협회 내에서도 의견이 서로 다른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제 밝혀 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는 정서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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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5월8일자 독일 시간주간지 슈피겔 광고문. ⓒ이수길
간호사들은 병원근무 등 독일 생활에 적응을 잘 했나. 독일병원 측의 평가는 어떠했나. 이 점은 한국간호사 독일취업이라는 업적을 이룬 이 박사로서는 매우 중요할 것 같은데.
_ 제 1진에 대한 독일병원의 평판은 매우 좋았다. 그래서 계속 더 많은 한국간호사를 원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진, 3진이 연속해서 들어오면서 간호사들 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싸움도 자주 일어났고 이런 저런 말썽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것보다도 크게 문제로 부각된 것은 바로 간호사들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중도에 일방적으로 병원을 떠나는 일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시는 6월에 들어온 제 3차에 이어 제 4차 간호사 128명을 또 신청했다. 그런데 이 때 벌써 각 병원마다 다수의 간호사들이 미국으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온 취업 브로커들이 한국의 간호사들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계약 위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 같이 부끄러운 행태를 보이자 독일 병원들은 이내 한국간호사들에게 실망했다. 이에 따라 프랑크푸르트 시는 제 4차 간호사 취업 건을 취소시켰고 이후 프랑크푸르트는 더 이상 한국간호사를 받지 않았다.
(참조 : 1969년 3월 한국일보는 독일 일간 Frankfurter Allegation을 인용하여 ‘한국간호사는 골칫거리’, ‘계약기간 어기고 미국, 캐나다로 빠져나가’, ‘이미 120명 이탈’이라는 기사를 발표했다.)
그 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_ 4차 간호사 취업 철회는 나를 힘들게 했다. 해외개발공사에 이 사실을 통보하자 공사 측은 이미 사람을 다 선발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그러면 어떻게 하냐며 4차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면 나보고 손해배상을 하라고 보사부와 합세하여 윽박질렀다. 계약서에 그렇게 써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제 4차와 5차 간호사들을 마인츠가 있는 라인란트팔츠 주에서 받아들이기로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4차 간호사 취업초청 계획이 무산되면서 입지가 편치 못한 나는 차라리 간호사 파독하는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간호사를 취업시키는 일이 보람된 일이어서 프랑크푸르트에 와 있었는데 이 일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면 나보고 나가라는 말과 같은 것이기에 나는 마인츠 병원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마인츠 대학 주임교수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
주임교수는 마인츠로 돌아오되 방사선과를 전공할 것을 권했다. 공부를 끝내고 전문의가 되면 소아방사선과를 맡길 테니 그걸 해보라는 것이었다. 소아과 전문의로서 방사선학을 더 공부해서 앞으로 소아방사선 분야에서 일한다면 나로서는 해볼 만한 일이었다. 해서 67년 4월 방사선과 전문의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생활은 고달팠다. 방사선과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면서 의사로서의 일을 해야 했고, 또 주말에는 간호사 일도 해야 했다. 하루 종일 공부와 일에 치여 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방사선과 공부를 시작해서 두 달 정도 있다가 그해 6월 동백림사건이 터졌다. 간호사 파독과 관련하여 당시 한국기독교연합회(한기련)는 한국간호사의 독일취업을 반대하고 나섰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이 한국사회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이 박사는 말한다. 한기련에서는 한국의 간호사들이 한국의 환자들을 위해서 양성되었고 한국에서도 의료진이 모자라 쩔쩔매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로 취업을 나간다는 것은 인도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독일기독교연맹으로 하여금 독일에서 여론을 조성하여 한국간호사를 데려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기독교연맹은 한기련의 요청을 받아들여 독일의 유력한 시사평론지 <슈피겔>지에 막대한 광고비를 들여서 독일병원이 한국의 간호사를 데려오는 일은 인도적 차원에서 못할 짓이라는 광고기사를 게재했다(1972년 5월 8일자).
이 같은 기독교계의 움직임 때문에 독일정부도 더 이상 한국간호사 취업을 허가하지 않게 되었다고 이 박사는 말한다. 그래서 이후에는 기존의 간호사들이 계약을 마치고 귀국하는 수만큼만 인원을 보충하는 수준에서 한국의 간호사 파독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1976년을 끝으로 더 이상 간호사가 독일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간호사 독일취업 인력송출은 1976년 5월 이후 완전히 종료되었다.
다음호에는 이수길 박사가 동백림사건을 만나게 되는 시점부터 고문현장의 증언, 독일정부의 구명운동과 독일로의 귀환 등과 함께 이 박사 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싣는다. 이 박사는 현재 국가를 상대로 보상을 청구한 상태이며, 자서전 <실록 이수길>도 금년에 한국기자협회에서 발간할 예정이다.
첫댓글 https://blog.daum.net/dongbukayonhap/14633604 같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