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TWINS 봉중근
LG 트윈스의 레전드가 되고픈, 돌아온 봉타나
봉타나가 돌아왔다! 지난 시즌은 좌완 에이스 수난시대라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 대표 좌완투수
들의 존재감이 미미했다.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팀과 국가대표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중 생긴 부
상으로 인해 엔트리에 빠져있었던 게 그 원인이었는데, 봉중근도 그 중 한 명이였다. 몇 시즌 간
LG 트윈스와 국가대표 야구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다 팔꿈치에 탈이 난
것이다. 다행히 재활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1군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년 만에 LG의
철벽 마무리로 돌아온 봉중근, 돌아오기 위해 힘겨운 재활 과정을 견뎌낸 그와 그를 기다린 팬들
을 위해 인터뷰를 준비했다.
(본 기사는 2012년 5월 작성됨)
PHOTOGRAPHY LEE YONG HAN EDITOR 전홍권
봉중근은 지난 시즌 마운드에 서지 못한 점이 매우 아쉬웠다고 고백했다. 사실,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함께 뛰어야 하는데,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만 하는 그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착잡했을 것이다. “그 것 때문인지 재활에 더 몰두했고, 2~3개월 앞당겨서 등판할 수 있었죠. (마운드에 서니) 감격이었어요. 선수들도 좋아하고, 특히 팬 여러분들이 잊지 않고 열심히 응원해주셔서 더 힘이 나고 재밌게 야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하고 즐겁습니다.”
사실, 봉중근의 팔꿈치는 2009시즌 후반기에도 온전치 못했다. 그래서 잔여 시즌을 치르지 못하고 엔트리에서 빠졌는데, 사실 이 때 수술을 했어야 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술을 연기했다. 그가 그토록 바랐던 목표는 바로, 2010시즌이 끝난 후 열리는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무리라며 만류했죠. 하지만, 국가대표로 뛴다는 건 선수들에게 자부심이자 영광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어요. 다행히 조범현 감독님께서 불러주셨고, 주장이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행복했죠. 수술을 늦게 했던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결국에는 금메달을 목에 걸어 목표를 이룬 영광스러운 순간이니까요.”
유망주 봉중근, 배트를 내려놓고 포수 미트를 바라보다.
야구팬들에게 봉중근은 투지 넘치는 모습으로 좋은 투구를 하는 좌완 에이스의 이미지다. 하지만, 투수와 타자를 겸했던 신일고등학교 시절의 봉중근은 야수를 하고 싶었다. 끝내 투수로 마음을 굳혔지만, 타자를 포기해야만 했던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 그다. 그래서 인지 2009시즌 종료 후 진행된 행사였던 ‘LG 트윈스 러브 페스티벌’에서 선수단과 코칭스태프가 각각 팀을 이루어 펼쳐진 경기에서 선수단 팀 3번 타자 겸 중견수로 출전, 3루타를 치기도 했다. “야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도 마운드 위의 투수보다는 공을 치고, 잡고, 슬라이딩하는 야수에 가까웠거든요. 그래서 아쉬움이 많았죠. 지금도 방망이를 잡으면 흥분되고, 옛날 생각도 많이 나요. 저도 타석에 서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먼 훗날, 제가 은퇴하기 전 한 시즌이라도 타자로 뛰고 싶어요.”
그렇다면, 봉중근의 야수 포지션이었던 외야수를 포기했던 이유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사실 그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중견수로 지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투수 전업은 모험에 가까웠다. “첫 훈련에 나무배트로 타격 연습을 하는데 배트를 다섯 개 정도 부러트렸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애틀랜타 측에서는 제가 왼손 타자에 키도 크고, 타격의 자질이 충분했지만 투수로 진출하면 메이저리그로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게 투수 전업이 결정된 거죠. 고등학교 때도 투수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차이점은 없었지만, 여러 구질을 배우는 데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어요.”
눈물 젖은 빵과 영광의 순간이 오갔던 미국에서의 8년 그렇게 한국인 투수 봉중근은 마이너 리그에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너리그 더블A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할 예정이었던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메이저리그로 올라오라는 애틀란타 코칭스태프의 전화였다. 그는 지금도 이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애틀랜타가 차로 한 시간 반 걸리는 거리인데, 제가 직접 운전해서 가는 길이었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는 느낌이었어요. 그 정도로 기분이 좋았죠. 그런데 저의 첫 선발 경기였던 애리조나와의 홈경기의 선발 이름을 듣고 조금 당황했어요.”
봉중근이 첫 선발 경기에서 맞서야 할 상대는, 당시 랜디 존슨과 애리조나의 원투펀치를 이루던 커트 실링. 당시 그의 팀 동료였던 애틀랜타 타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로 공포의 선수였다. “경기 당일 날 라커룸에 들어가 보니 치퍼 존스, 쉐필드, 앤드류 존스가 ‘오늘 경기에서 1점도 못 뽑아 줄 수 있다. 미안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었고 좋은 경험이었기 때문에 커트 실링이라는 이름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그 날 정말 저희팀 타선이 딱 1점 뽑았어요. 하하하. 심지어 애틀랜타가 내셔널 리그 소속이었기 때문에 투수로 나온 저도 타석에 나와 커트 실링에게 안타를 쳤고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봉중근은 2006년 5월 신시내티에서 미국 생활을 마무리하기까지 8년의 시간을 타지에서 보냈다. 그 곳에서 그가 배운 건 두 가지다. 팀플레이의 중요성, 그리고 위기에도 버틸 수 있는 단단함이다. “야구는 혼자만의 스포츠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아홉명이 한 팀이 되어 나가야 만이 이길 수 있는 경기가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메이저 리그 팀의 라인업이라고 해서 아홉 명이 모두 미국 사람이 아니에요. 남미 계통의 선수들도 있을 수 있고, 저와 같은 아시안 계통의 선수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팀 내에 개인주의가 만연할 수 있는데, 야구장에서는 한 팀이라는 마음가짐을 갖다 보니까 제가 속했던 팀들은 팀워크가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만 8년 간 미국에 있었지만, 그 곳에서 많은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국내에서 2군으로 내려갔을 때도 적응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보통 선수들이 1군에 있다가 2군에 가면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하지만 저는 미국에서 그런 일을 많이 겪다보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 올 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는 정말 뜻 깊은 시간이었죠.”
실망으로 끝난 첫 시즌, 이를 발판삼아 비상한 에이스
고국에서 맞이했던 첫 해인 2007시즌, 메이저리그 출신으로 기대를 모았던 그는 예상과 달리 6승에 머물렀다. 이 결과에 대해 누구보다 실망감이 컸던 건 본인 자신이었다. “메이저리그 출신 봉중근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팀 안팎에서 엄청난 기대를 받았었어요. 시즌 초반에는 첫 단추를 잘 끼다가 5월부터 부진이 시작되었는데, 한 번 못할 때마다 부담이 오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거액을 받고 왔는데, 이 정도인가?’라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을 때 정말 가슴이 아팠죠. 한국 야구의 벽을 느끼는 순간이었어요. 예상은 하고 왔지만, 제가 없는 8년 동안 한국 야구의 수준이 매우 높아져 있었어요. 참 힘든 첫 시즌이었죠. 특히 팬 분들과 팀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 시즌을 5위로 마감했는데, 제가 더 잘했으면 가을 야구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힘들었죠. 다행히 그런 시련을 빨리 겪었기 때문에 한국 야구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듬 해 열린 2008시즌, 11승에 2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봉중근은 명실상부한 LG의 에이스가 되었다. 첫 시즌의 실패를 말끔히 씻어낸 그가 밝힌 성공 비결은 한국식 훈련이었다. “솔직히 한국이나 미국이나 운동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우리나라 훈련은 미국에서 받은 훈련과 달랐어요. 첫 시즌에는 미국에서 훈련하던 대로 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편하게 운동했죠. 우리나라 선수들보다 집중도 높은 훈련을 하지만, 2시간 안에 모든 훈련이 끝나니까요. 다만 다른 선수들보다 훈련을 일찍 마쳤으니 실력은 그만큼 떨어지지 않았나 싶었어요. 그래서 2008시즌을 앞두었을 때는 운동량과 시간을 더 늘린 한국식 훈련으로 변화를 줬어요. 한국식 훈련은 미국식 훈련보다 쉬는 시간이 많은 대신 4~5시간을 매달려야 하니 죽기 살기로 운동할 수 밖에 없었죠.” 그는 2008시즌을 준비하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던 중, 구토를 하기도 했을 정도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결국 그 때 했던 한국식 훈련이 그의 구속을 늘리고 페이스를 찾아준 것이다.
2008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봉중근은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며 활약했다. 하지만, 유난히 타선의 지원을 못 받으면서 승리에 실패한 경우가 잦았고, 9이닝 1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된 적도 있었다. 선발 등판 경기가 끝나고 더그아웃을 뜨지 못하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중계화면에 잡히며, ‘봉크라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보통의 투수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동료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기 마련이었을 텐데, 오히려 그는 팀 동료들에게 고마워했다. “사실 타자들이 제가 등판하는 날 부담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등판하면 점수가 안나오는 걸 인식하고 조금 더 해보자는 이야기도 오갔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많은 분들은 빈약한 타선지원을 말씀하시지만, 반면에 저희 야수들의 호수비로 실점을 막았던 적도 많았습니다. 제가 나오는 날 더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선수들에게 고마울 뿐이에요.”
지금까지 봉중근의 야구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이었다. 특히,
30년 발언으로 한국 야구팬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스즈키 이치로를 견제하는 모습과 일본전에서 보여준 좋은 투구로 일본 킬러, 봉열사 등의 애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WBC 초반에 그가 맡은 보직은 불펜 투수였다. 팀 내에서 ‘일본 킬러’라고 불리던 김광현이 일본에 간파 당하자 히든카드로 발탁, 우리가 기억하는 봉열사의 모습을 뽐낸 것이다. “예선전 첫 게임을 콜드게임 패로 마무리했는데, 국가대표팀 간의 경기였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김인식 감독님께 제가 선발로 던지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감독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셔서 선발 투수로 등판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막상 등판하니 괜히 말씀드렸나 싶을 정도로 후회감이 오긴 하더라고요. 하하하. 하지만 저는 이미 마운드에 올라와 있었고, 이제는 제 자존심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자존심으로 던져야겠다는 생각에 죽을 각오로 경기에 임했죠. 다행히 일본 측에서는 저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았던 상태였어요. 제 이름조차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그날은 구위도 좋았지만, 분석 싸움
에서 우리 국가대표팀이 승리하지 않았나 싶어요.”
봉중근에게는 야구선수 외의 다른 타이틀이 있다. 바로, 대학생이다. 자신을 ‘성균관대학교 스포츠과학부 10학번 봉중근’이라고 소개한 그는 늦깎이 대학생이 된 이유로 학업과 운동 모두 열심히 하는 선수로 평가받고 싶기 때문이라 밝혔다. 하지만 주 6일 근무, 그것도 원정 경기 등의 지방 출장도 잦은 프로야구 선수 생활과 대학생 생활을 병행하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는 솔직히 학교 출석은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대체 수단을 통해 충분히 대학생으로서의 학업 활동을 하고 있다. “대신 교수님들과의 전화 통화나 인터넷을 통해 과제는 꼭 해서 보내고 있죠. 그러다 보니 교수님들께서도 매번 출석하는 일반 학생들 못지않게 많은 지도를 해주세요. 시즌이 끝나면 학교로 가서 교수님들도 뵙고, 학생들도 만나고 있어요. 그리고 저희 학교에는 야구부가 있는데, 그 곳에 가서 선수들에게 1~2시간 씩 야구를 지도해 주고 있어요.”
간절함이 만들어 낸 성공적인 재활
이제 봉중근이라는 투수의 인생에 아픈 손가락인, 부상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가 진행한 토미 존 서저리는 많은 야구팬들이 알고 있다시피 팔꿈치의 인대를 잇는 수술이다. 그가 집도를 받고 재활을 한 곳은 이 수술로 인해 유명해진 미국의 조브 클리닉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의료의 질도 미국 못지않게 좋다고 설명하는 그다. “토미 존 서저리는 미국에서 유래된 수술이고, 첫 성공을 한 게 조브 클리닉이다 보니 유명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재활 프로그램은 전 세계 어딜 가나 똑같거든요. 시스템이 관건인데, 우리나라도 미국 못지않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봐요. 건국대학교병원이나 스포츠 의학의 권위자이신 김진섭 박사님께 들었던 소견도 미국과 차이가 없어요. 다만 미국의 스포츠 의학 인프라가 우리나라보다 두텁다 보니 일대일로 재활을 받
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요. 반면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 이러한 인력이 적다 보니 재활을 받아야 할 때 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해요. 똑같은 재활 프로그램이 미국에서는 하루 만에 다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흘, 많게는 일주일이 걸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런 차이일 뿐, 시스템이나 의료진은 우리나라도 미국에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무리 양질의 시설로 무장한 조브 클리닉에서의 수술일지라도, 봉중근은 수술실에 오르는 순간부터 재활이 끝나는 순간까지 불안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투수의 팔에 칼을 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험을 부담하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재활 기간도 한 두 달이 아닌 1년을 예상했다. 하지만 계획보다 빠르게 재활 과정을 마치고 마운드로 돌아온 그다. 그가 재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 데에는 구단의 지원과 그가 느꼈던 절실함 때문이었다. “이렇게 빨리 재활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재활 프로그램을 받고 이를 따라했는데, 구단측에서 사이판이라는 따뜻한 나라에서 재활을 받을수 있도록 배려해주셨어요. 그리고 흔히 재활기간을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잖아요? 저 또한 제 자신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 노력했어요. 원래 계획된 훈련 시간이 다섯 시간이라면 열 시간을 목표로 운동했고, 그러다 보니 체중도 12kg 정도 감량이 되었죠. 그리고 항상 제 곁에는 식구들이 저의 부활을 바랐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봉중근은 성공적인 재활의 몫을 자신에게만 돌리지 않았다. 종교가 있는 선수답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말로 운을 뗀 그는, 사이판에서 홀로 재활훈련을 한 자신을 기다려준 그의 가족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그의 공백기동안 가족들을 보살펴준 지인에게도 감사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사이판에서 혼자 재활을 했었는데 두 아이를 계속 보살펴준 제 와이프에게 감사해요. 그리고 제가 친형이 없는데, 재활기간동안 친형처럼 물심양면으로 저와 제 가족들을 도와준 정환범 이사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또한, 함께 움직이며 고생한 ‘일등공신’, LG 트윈스 트레이너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특히 이건엽 트레이너는 저와 같이 사이판에서 일대일로 지내면서 제 스케줄에 맞게 재활을 도와주었고, 긴 재활 속에 지쳐있는 저의 모습에 파이팅을 불어 넣어 주신 분인 만큼 정말 감사해요. 또한 김용일 트레이너님을 포함한 LG에 계신 모든 트레이너 분께 DUGOUT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돌아온 봉타나, 달라진 LG 트윈스
봉중근이 돌아온 2012시즌, 그의 소속 팀인 LG 트윈스는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물론 오프시즌 동안 불미스런 사건과 기존 선수의 FA 이적으로 인한 전력 유출로 인해 시즌 전, 많은 전문가들에게 약팀으로 분류되었지만 새로운 코칭스태프의 지도와 선수들의 끈끈한 팀워크 속에 4월 한 달을 중위권으로 순조롭게 보냈다. 그도 돌아와 보니 많은 점이 바뀌어 있었다고 놀라워했다. 그가 말한 변화는 크게 두가지, 바로 오기와 끈기다. “시즌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이번 시즌 LG는 안 된다는 주위의 말을 너무 많이 듣다 보니 선수들 사이에도 오기가 생겼어요. 오키나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을 당시 김기태 감독님께서 선수들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죠. 그 일로 인해 얻게 된 점이라면 이병규 선수 같은 고참 선수들부터 임찬규 선수 같은 신인급 선수들까지 하나가 되었던 것이었어요. 이번 시즌은 그 무엇보다도 한 팀이 되자는 마
음가짐이 LG에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고 봐요. 특히, 언론에서 예년보다 적게 저희 스프링캠프 훈련지를 찾아주신 점도 선수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어요. 서운한 마음과 함께 야구를 잘하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생겼어요. 그러다보니 부상 전력 없이 스프링 캠프를 마쳤고, 시범경기에 이어 지금까지 변함 없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거죠. 과거에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우승을 바랐다면, 이번 시즌에는 처음으로 감독님을 위해 4강에 들고, 우승을 하자는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했어요.” 지난 시즌 이후, 언론에서는 ‘모래알 팀’이라며 LG를 비난했다. 하지만, 지금은 끈끈한 조직력이 LG 트윈스의 최고의 전력이다.
봉중근은 이번 시즌 팀의 마무리로 나선다. 그 또한 정말 해보고 싶었던 보직이었다며 이를 반겼다. “물론 많은 팬 여러분들께서는 제가 선발투수로 많은 이닝을 책임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셨을 거라고 봐요. 하지만 마무리는 저희 팀의 고질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저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인 셈이죠. 사실 마무리 전업은 매 시즌 감독님께 부탁을 드렸던 부분이에요. 물론 제가 나온다고 해서 모든 경기를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마무리를 한다면 죽을힘을 다해 던져보겠다는 얘기를 주위에 하고 다녔었어요. 승부욕이 강하다 보니 마운드에 오를 때 마다 경기를 끝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생기는데, 마무리라는 보직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마무리의 자리에 서보니 아직 배울 점이 많지만, 동료들이 많이 격려해줘서 기분이 좋아요. 이상훈 선배님이나 김용수 감독님 같은, LG의 레전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LG의 차기 레전드를 선언한 봉중근의 올 시즌 개인적인 목표는 없다. 사실 지금도 재활 과정에 있기 때문
인데, 확실한 건 두 가지다. LG라는 팀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 그리고 올 시즌 팀의 4강 진출에 보탬이 되는 것이다. 소박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10년이 되어버린 LG 트윈스 팬들의 가을야구에 대한 열망을 생각한다면 ‘4강 진출’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일 것이다.
지난 5월 1일, 봉중근은 생애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보통 첫 기록을 세운 선수의 공은 동료 선수가 챙겨주는 게 예의다. 하지만, 그의 팀 동료인 ‘슈퍼소닉’이대형은 이를 잠시 잊은 채 자신이 처리한 마지막 아웃 카운트의 공을 관중석으로 던져버리는 실수를 했다. “사실 대형이도 제가 첫 세이브인지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우)규민이나, 작은 이병규 선수, 그리고 대형이가 친한 사이라 서로 귀띔을 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대형이 자신도 던지는 순간 아차 싶더라고 하더라고요. 하하하. 감사하게도 그 공을 받으셨던 팬 분께서 저에게 돌려주셔서 즐거운 해프닝으로 끝났죠.”
봉중근이 재활 기간 동안 그토록 그리워했던 것은 잠실야구장 마운드다. 그가 마운드에 서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도 작년 한 시즌을 쉬면서 재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준 팬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복귀 후 처음으로 잠실에서 게임을 했을 때 팬 여러분들의 응원의 함성을 잊지 않고,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LG의 레전드가 될 수 있게끔 좋은 모습 많이 보여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해서 팬 여러분께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끝까지 열광적인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야구 선수,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팬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팀의 가을야구를, 그리고 우승을 갈망한다. 하지만 LG 트윈스에게 가을야구라는 단어는 10년 전 한국시리즈에 올랐던 것이 마지막이다. 그래서 이번 시즌은 팀의 아킬레스건을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봉중근의 역할이 중요하다. LG 팬 마음속의 넘버 원 투수, 봉중근의 가을야구를 향한 파워 피칭이 시작됐다.
촬영장소 잠실야구장
지금 봉중근은 LG 투수력이 안정돼있다고 판단하며, 삼성의 팀 평균자책점을 따라잡고 싶다는 소견을 밝혔다. LG의 팀 평균자책점은 3.61로 삼성(3.56)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봉중근은 LG 투수진 내에서 선후배 사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주요한 역할도 하고 있다.
LG의 투수력이 이후 어떻게 전개될 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