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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기독교의 교파들
1517년에 일어난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에 따라 기존의 로마 중심의 교황제도를 왜곡된 교회제도로 보는 교회와 새로운 교회들이 교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천주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뒤를 이어, 개신교 각 종파들이 앞을 다투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개신교는 1884년 매클래이 선교사에 의해서 전해진 감리교이다. 그를 필두로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 성결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대부분 1900년대 초에 들어왔다. 이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교육과 병원 사업에 주력하여 우리나라 근대화를 이끌게 해주었다. 1909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져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많은 개신교들도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순교도 하고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개신교에서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일본의 종교인 신교를 믿도록 강요했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광복을 맞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는 이제부터 분열의 아픔을 겪기 시작한다. 개신교는 다양한 이유로 많은 분열을 겪는데, 특히 장로교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현재 49개의 교단이 있다. 세계 기독교 백과에 따르면 2001년 238개 국가에 33,000개 이상의 개신교 교파가 있으며, 매년 270~300개의 교파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약 200~250개의 분파가 있고 다.
❶ 정교회 : 정통보편교회(Orthodox Catholic Church)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로 이루어진 교회. 동방 정교회는 교회의 대분열 이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중심으로 성립된 교파로서,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였다.카톨릭(서방 교회)과 달리 지역별로 별도의 체제를 갖춘다. 카톨릭(서로마교회)와 달리 제정 일치에 가까웠던 관계로, 비잔티움 제국이 건재했던 시절에는 그리스 정교회가 중심이었으며,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뒤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중심이 되었다.❷ 로마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 : (로마에 있는) 보편교회(Catholic Church)라는 뜻으로 로마 주교, 즉 교황과 친교를 이루는 지역 교회들로 이루어진 교회. 천주교라고도 한다.➌ 개신교 : 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 또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해 나간 여러 기독교 종파를 두루 일컫는 말이다. 개신교는 영문 명칭에서 보여지듯 로마 가톨릭교회에 항의한다는 뜻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도 불린다. 대한민국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비하여 개신교라고 불리며, 20세기 초·중반에 쓰이던 신교, 구교라는 표현은 현재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기독교의 범위를 개신교에만 한정지어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기독교(基督敎)라는 표현은 개신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교 즉 천주교, 성공회, 동방 정교회, 콥트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개혁교회등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종파를 아우르는 말이다.
1. 동서교회 분열 원인 : 천주교(서방교회, 카톨릭) 와 동방교회(그리이스정교, 아르메니아교회,곱틱교회)
❶ 교권 쟁탈 문제 : 이그나티우스 파면 문제(동로마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이그나티우스를 반역죄로 파면함.
그 이유는 황제의 외숙 바르다스 (Bardas)가 자부와 간통 했으므로 857년 강림 주일의 성찬 참석을 거부하였기 때문.
그러나 로마 지방 대회는 이그나티우스를 대주교로 시인함. ❷ 정치적 원인...동서 로마 제국의 분리. ❸ 문화적 원인... ㄱ. 동:희랍어 ㄴ. 서:라틴어 >의사 불통. ❹ 인종적 원인...국민성의 차이. ❺ 사상적인 이유 - 동 : 교리 중심 (사색, 철학, 황제 중심), 서 : 제도 중심 (법적, 교황 중심) ❻ 교리적 이유 (성령론 문제) - 동 : 성부에게서 성령이 유출, 서 :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 유출. ❼ 성상 숭배 문제 - 동 : 반대 서 : 찬성
2. 종파 분열의 원인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은 전부 해방 이후에 일어나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의 억압과 박해로 분열 할 틈이 없었지만, 해방 이후에 일제 시대동안 박해를 받아왔던 교회를 정리하면서 교회 분열의 문제가 하나둘씩 대두 되었다.
첫째로, 일제에 협력하였던 자들과의 대립이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 있는 천주교와 개신교에 신사참배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모든 이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좀 더 강경한 방법으로 신사참배할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1938년 장로교측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가결안을 따르지 않은 이들은 순교하거나 투옥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면서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교회는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의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들을 도와주었다. 신사참배를 하거나, 복음서이외의 성서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개신교와 신도(神道)를 결합시키려고 했다. 해방 후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과의 대립으로 여러 교회가 분열되었다. 이는 일제로 부터뿐만 아니라 가톨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때 로마 제국의 대박해에 순교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배교하거나 박해를 피해 달아났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해가 끝난 후 개혁자 문제로 가톨릭교회도 진통을 겪었다. 이러한 일제 시대에 일본을 협력한 자들의 문제로 개신교 교회는 분열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장로교측에서 고려파장로교가 분열하였고, 감리교회도 이 문제 때문에 분열하게 되었다.
둘째, 교회 안에서 신학적 노선의 차이로 인한 분열이다. 한국개신교회는 신학적 배경과 유산으로 미국의 보수주의적 근본주의를 가진다. 근본주의 신학이 이식되었고, 독단주의적이며 배타주의적 정신, 절대적 권위주의적인 교회제도들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 사고양식이었다.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좀 더 자유스러운 신학을 하는 분위기가 한국개신교회에 유입되었다. 즉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신학 노선을 따를 것인가에 대하여 대립하면서 교회가 분열했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분열, 예수교장로회의 합동, 통합의 분열, 예수교장로회 합동의 진보, 보수 분열 그리고 성결교 분열을 들 수 있다.
셋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교권 싸움이다. 개신교회는 어느 한 사람이 모든 권력과 권위를 쥐고 있지 않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를 통해서 해결한다. 이 총회의 위원들은 모두 투표로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총회 밑에 노회라는 것이 있어, 이는 우리 가톨릭의 교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조직체계는 매우 민주적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신학적 노선 문제, 일제 협력자들 문제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어느 누가 교회를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대립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감리교회의 분열, 침례회의 분열 등이 있다.
넷째, 해석의 차이가 교파들을 생겨나게 한다. 기독교 안의 모든 교파들은 성경을 최고의 근거로 삼는 데 동의를 한다. 그러나 성경 구절이나 단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힘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의견의 차이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고 여겨질 때에는 심각한 논쟁이 벌리게 되고, 서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나누어지게 된 결과로 교파들이 만들어진다.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교파 분열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성경 해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성경을 해석하거나 읽는 것조차 금했던 중세시대 때까지는 성경해석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교파의 분열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의 조명을 받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든지 성경을 직접 읽고 그 의미를 깨달아 교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나면서부터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개신교 안에서도 루터파, 칼빈파, 침례파, 경건파 등의 분열이 생겨났다.
<진리와 교리의 차이>
* 진리= 성경(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 해석= 신학= 교리 = 교파마다 다름
다섯째, 교회 운영 방식의 차이가 교파들을 생겨나게 한다. 교회는 성도들이 교통하는 집합체이다. 집합체에는 질서와 순결의 유지를 위한 제도와 조직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대나 지역 또는 교인들의 수준이나 전통에 따라, 이 제도와 조직의 운영 방식에 있어 어떤 형태가 가장 효과적일 것인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여러 형태의 교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장로제 운영을 택한 장로교, 감독제 운영을 택한 감리교, 회중들 중심의 운영을 택한 회중교회, 일체의 인위적 운영을 부정하는 무교회파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 초기 선교사들의 갈등(알렌과 언더우드)
한국선교사들은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알렌의 장로교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의 “감리교적” 감리교, 둘로 분활되었다. 알렌은 직접적인 설교나 복음의 전파는 우선 왕명이 있어서 허락이 날 때까지 보류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정부를 현대 문명의 기관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 휠씬 면적이 넓은 공헌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한국 왕실 선교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거리나 지방으로 직접 순회 전도를 나갔다. 물론 감리교 선교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다가 1888년 종교 금령이 내리자 알렌은 순회전도에 나간 언더우드를 서울에 소환하고, “이 금령의 발표는 경거망동한 순회전도가 그 기본적 원인이 되어 있다” 고 반박하면서, 선교나 전도에서 손 떼고 의료사업과 교육에만 당분간 치중할 것을 종용했다. 이에 대해 언더우드를 비롯한 순회 전도사들은, 알렌은 선교사도 아니라며 공박한다. 의견 충돌이 처음 표면화된 데 불과했으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상징하는 첫 사건이 되었다.
그후 해방전 일제치하에서의 신사참배에 대한 조선기독교계의 대응양상은 각 교단마다 달랐다. 특히 선교부가 신사참배문제로 선교부 설립 학교를 폐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었던 이인식은 총독부 교섭위원을 통해 기독교 학생들의 신사참배면제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총독부측은 아무리 교회경영의 학교들이라 하더라도 조선총독의 교육정책에 따라 신사참배를 해야만한다고 강경하게 대답한다. 그래서 장로교 선교사들은 서로 모여 이 문제를 상의하였고, 대체적으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신사참배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학교의 존폐문제가 달렸으므로 각 학교 이사들은 입장을 달리했다. 즉시철저히 거부하자는 입장과 신사참배 행위에 비록 종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을지라도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참배에 응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도 있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중에서는 남북 장로교 선교부와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대체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폐쇄로 나아갔는데 비해, 카나다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이고 학교 경영을 계속해 나갔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정부는 그들을 강제적으로 참배시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대처는 자신의 신앙의 문제라기 보다는 학교폐쇄냐 학교유지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선교지 교회인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문제를 신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파악했는데, 선교사 들은 한갓 학교 존립여부로만 이를 파악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대 까지는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인의 신학적 존구가 시작되었고 보수주의 신안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성경관이나 신학적 견해에 분명한 차이가 나타났는데, 다음의 동기와 영향이 있었다. 첫째로로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유학한 인사중에 자유주의적 신학을 연구하거나 그 신학의 영향을 받은 인사가 귀국하여 집필히나 신학활동을 한것이고, 둘째는 미국 교회의 신학적 논쟁과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북 장로교회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인 자유주의화 경향은 선교의 상관관계를 볼때 한국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교단의 개수가 약 80개 270여개의 파가 있다. 1953년 김재준 목사 등의 신학적 입장을 이유로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었고, 1959년에큐메니컬 운동에 관한 이념 갈등 때문에 통합과 합동으로 분리되었다.
3. 보수주의과 진보주의 차이
보수주의
진보주의
1) 개인구원
1) 사회구원
2) 하나님-교회-세상
2) 하나님-세상-교회
3) 성경내용중심 세속과 분리
3)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 강조 세속에 적극 참여
4) 문자적 해석 치중
4) 신학적 입장에서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서의 성서사용 주장
5) 배타적, 억제
5) 세상과의 대화 모색, 자유
6) 과거중시 교리 전통
6) 현재, 오늘의 사건의 해답으로서의 성서
7) 기억
7) 경험
1) 신학적 성향
❶ 장신: 중도적 (유럽신학추구)
❷ 총신: 중도 보수적 (영미신학추구)
➌ 한신: 진보적 (민중신학추구)
❹ 고신: 보수적
2) 여성 목사 안수
❶ 장신: 허용
❷ 총신: 비허용
➌ 한신: 허용
❹ 고신: 비허용
3) 신학적 트렌드
❶ 장신: 다양한 노선이 혼재된 가운데 대체적으로 기풍으로는 에큐메니칼 신학, 대체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인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신학노선을 따름.
❷ 총신: 표류중 (강성칼빈주의, 영미개혁주의, 화란개혁주의, 신칼빈주의 등 노선을 자주 변경하고 있으나, 최근 신칼빈주의의
대표주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연구 이후 현재 방향을 못 잡고 있는 중.
➌ 고신: 위의 세 교단과 달리 '회개의 전통'을 독특하게 강조하는 가운데 신학적 노선은 표류중 (교수진 사이에 표면적 갈등이
가장 심하며, 대체로 신학노선은 합동측의 신학노선과 비슷.)
❹ 한신: 다양한 노선이 혼재된 가운데 대체적으로 사회, 경제, 계급, 민중, 한국적 신학을 말함. 문익환, 문동환, 정대위, 안병무,
박형규 등의 정작 외국에서 유명한 한국신학자들이 많음.
4.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차이
칼빈의 5대교리
알미니안 5대교리
1. 무조건적 선택 : 사람의 자유의지 없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일방적으로 바꿀 수 없는 작정에 의해 개인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구원과 멸망이 결정됨(二重豫定).
1. 조건적인 선택 : 하나님이 예지(豫知)하심에 따라,사람의 믿는 여부 결정에 따라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심.
2. 제한된 속죄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정된 소수의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이라 함.
2. 보편적인 속죄사역 :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그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개인의 믿는 여부 책임에 따름.
3. 거절할 수 없는 은혜 :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들은 본인이 싫어해도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구원을 받게되며 저주가 예정된 자들은 구원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다고 함.
3. 저항이 가능한 은혜 :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先行)됨으로만 인간은 구원될 수 있으며 시작, 보존, 완성도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 섭리에 따라 개인의 악한 의지에 따라 거부될 수도 있음.
4. 전적인 타락 :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적 타락의 존재이며 중생까지 절대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함.
4. 자연적인 타락 : 처음부터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도, 구원될 수도 없고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 타락한 존재임.
5. 궁극적인 견인 : 불가항력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끝까지 구원이 보존됨.
5. 조건부적인 견인(堅忍) :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얻은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시지만 인간의 도중 타락과 나태에 의해 은혜가 상실될 수도 있다고 함.
※ 여기서 칼빈 사상의 장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존중하는데 있고 단점은 개인의 자유 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고 지옥갈 자는 예정 되었다는 인간 책임 회피론에 있다.
※ 알미니안주의 장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죄 (요1:29)를 지고 가신 사실을 그대로 받는 데 있고 개인의 믿음 수용에 따른 구원에 있으나 단점은 도중에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데 있어 구원을 지나치게 개인의 자유의지 책임에 맡긴 것이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를 묻는 것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차이를 묻는 것과 같다. 단순하게 말하면장로교의 기초는 예정론을 강조하던 칼빈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었고 반면에 감리교나 성결교 등의 교리는 알미니안 주의의 중심인 자유의지론에 기초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칼빈주의냐 알미안주의냐 란 질문은 예정론이냐 자유의지론이냐에 기초한 것으로 예정론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강조한다면 자유의지론은 인간의 결단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정론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한 인간이 구원받고 저주받는 것조차 다 아시고 계신 것이고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구원받을 사람 지옥 갈 사람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으로 결국 구원 사역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의지론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더불어 인간의 결단 즉 의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과 같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나름대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의 가르침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구원을 하시기 위해서 미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준비해 놓으셨다.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다. 이것을 선행은총이라고 한다.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이라는 사상은 사실 알미니우스(Arminius)가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미리 정해 놓은 이 길,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이 의지적인 결단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잇으나 그래도 하나님은 이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인정(칭의, Justification)해주시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칭의의 은총(Grace of Justification)이 함께 하며 이것은 단 일회적인 사건이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덜된 인격을 다듬는 의지적인 결단이 요구된다. 이 단계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과정으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총(성화의 은총)이 함께 하셔서 한 인간이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성화의 마지막 마지막 단계가 영화(榮化, Glorification)인데 요한 웨슬리의 가르침을 보면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중심이긴 하지만 인간의 의지적인 순종이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구원으로 좀 복잡하게 말하면 신인 협동 구원론(Synergism)이라고 한다.
예정론과 자유의지론. 이 두 주장의 대립이 최초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어거스틴 시대로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으로 교회 안에 이 문제가 터져 나온다. 예정론을 주장했던 어거스틴은 카르타고 회의(주후 418)를 소집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자유의지론을 주장했던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리고 1000년이 지난 후에 예정론을 주장했던 칼빈의 입장을 옹호하는 고마루스(Gomarus)와 자유의지론을 주장했던 알미니우스(Arminius)의 논쟁이 터져 나온다 고마루스는 알미니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한다. 문제는 성경을 뒤져보면 바울의 글들 안에는 예정론을 지지하는 말씀들이 많이 나오고 요한복음과 같은 요한의 글들을 보면 인간의 결단 즉 자유의지를 지지하는 말씀들이 나온다. "예정론과 자유의지론, 둘 중에 어느 쪽이 맞냐 틀리냐?"라는 질문을 성경의 한쪽만 받아들이고 다른 쪽은 버리겠다는 말과 같다. 성경에는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설명해 보려는 신학의 두 체계입니다. 칼뱅주의는 프랑스 신학자 존 칼뱅(1509-1564)의 이름을 따라 그리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 신학자 야고보스 아르미누스(1560-1609)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다.
두 가지 체계는 다섯 가지 점들로 요약될 수 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고수하고,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고수한다. 완전한 타락을 고수하는 칼뱅주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측면들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그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말한다. 부분적 타락은 인간의 모든 면이 죄로 물들어 있지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말한다.
주목: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는 “일부 타락”을 거부하고 칼뱅주의적 “완전한 타락”과 매우 비슷한 견해를 고수한다(하지만 그 타락의 정도와 의미는 알미니안주의를 믿는 집단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아르미안주의자들은 완전한 타락과 구원 사이에 “중간” 상태가 있다고 믿는다. 이 상태에서는, 죄인들이 선행적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께 이끌리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
칼뱅주의는 선택이 무조건적이라는 믿음을 포함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선택을 믿는다. 무조건적 선택은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타고난 어떠한 가치에 따르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전적인 뜻에 근거하여 구원할 개인들을 선택하신다는 견해입니다. 반면에 조건적 선택은 누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지를,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들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을 미리 아시는 예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개인들을 선택하신다고 말한다.
칼뱅주의는 구속을 제한적이라고 보며,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적이라고 본다. 이것이 다섯 가지 점들 중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제한적 구속은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다. 무제한적 구속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으나 그분의 죽음은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칼뱅주의가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거부할 수 없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 부르시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거부할 수 있는 은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 부르시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부름을 반대하고 거부한다고 말한다.
칼뱅주의는 성도들의 인내를 고수하지만,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구원을 고수한다. 성도의 인내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고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는 개념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은 믿음으로 굳건해지게 되어 있고 결코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 본다. 조건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설 수 있고 그것 때문에 구원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주목 –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조건적 구원”을 부인하고 대신에 “영원한 보장”을 고수합니다.
5. 큰 흐름 속의 한국기독교 교파
한국교회를 교파별로 살펴보면 카톨릭 교회의 전통에 제일 가까운 교회는 성공회와 정교회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가장 먼 교회는 장로교, 침례교, 오순절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중간 성향의 교파는 감리교와 루터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체험과 성경의 비중으로 교파의 성향을 분류하면 웨슬리안 신학에 영향을 받은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오순절, 나사렛 등은 체험을 강조하며, 장로교나 퀘이커교, 무교회주의는 체험보다는 성경에 비중을 둔다.
각 교파의 정치제도를 살펴보면 ‘장로제도’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교회를 치리하는 형태의 제도이며, ‘감독제도’는 감독이나 주교에 의해 치리되는 교회형태로 카톨릭, 영국성공회, 감리교, 루터교회 등이 따르고 있다. ‘회중제도’는 개교회가 자치권과 자결권을 갖고 있는 형태로 침례교가 대표적이다.
신학적 성향에서는 진보적인 교단(기장, 기감, 복음교회, 성공회 등)과 보수적인 교단(대다수 장로교, 오순절, 성결교, 침례교 등)으로 구분되는데, 한국교회는 70% 이상이 보수 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장로교회가 전체 교회의 60여%를 차지하고 있어 칼빈주의 신학이 강세를 보인다.
6. 한국기독교 교파
1> 장로교 : 장로교 (長老敎 Presbyterian)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장로교(Presbyterians)는 종교개혁기에 스코틀랜드 교회가 장로제를 교회정치제도로 채택하게 된 것이 그 출발점이다. 당회, 노회, 총회 등 교회의 치리기구에 평신도 대표인 장로가 참여해 협의의 과정을 통해 모든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장로교의 특징이다. 장로교는 동시에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1560년경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개혁교회’에는 당시 과격한 좌파 종교개혁자에 대해 성경적 보수 신앙으로 로마 가톨릭을 개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교회를 개혁한다는 뜻에서 유럽대륙 중 특히 스위스와 네덜란드 등에서는 지금도 개혁교회라는 말을 쓰고 있다.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영·미 계통의 나라로부터 선교를 받은 나라들의 경우 장로교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있다. 장로회신학대의 이형기 교수는 에큐메니컬을 지향하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개혁교회’라는 용어가 더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피력했다.
장로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의 하나가 개교회의 모든 운영과 실질적인 정책 입안이 당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당회의 주최가 되는 장로와 목회자의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 중요하다. 장로와 목회자의 알력으로 빚어지는 불미스런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당회 중심의 교회 치리는 장로교의 미래를 위해서 제고해 보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장로교의 세계적인 협의체로는 1875년 영국 런던에서 조직되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에큐메니컬 공동체로 세계개혁교회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 WARC)이 있으며, 1946년에 설립된 개혁교회협의회(Reformed Ecumenical Council ; REC)가 있다. 다섯 솔라를 핵심 교리로 인정한다.
창시자는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뱅(Jean Calvin)으로, 그는 16세기 중엽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1559년에는 프랑스에서만 2,000여 교회가 장로제도를 채택하였고, 이어 네덜란드·스코틀랜드에서도 많은 장로교회가 생겨났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1560년 이후 장로교회를 국교회로 지정해 이후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660년 청교도혁명이 끝나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뒤 잉글랜드에서는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세계 장로교의 규범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헌법·예배지침 등을 청교도혁명 기간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장로교 역사상 중요한 시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1706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노회가 조직되고, 1789년에는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노예문제·신학·전도방법 등의 이견으로 여러 교단이 출현하였는데, 신학·교리 등에는 차이가 없었다. 18세기 이후 미국 장로교회는 아시아·아프리카 등 해외선교에 앞장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함으로써 장로교의 세계화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1882년(고종 19) 《누가복음》《요한복음》이 번역 출간되고, 1907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1912년에 총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행정조직으로 운영되던 한국 장로교회는 광복 이후 신앙과 신학노선 등 여러 갈등 요인으로 인해 분열되기 시작해 2002년 현재 40개가 넘는 교단이 활동하고 있다. 세계적인 장로교 연합단체로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이 있고, 세계 장로교 총 교인수는 약 5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장로교는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중시한다. 그래서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 등의 교회 중직을 임명에 의해 세우지 않고, 공동의회에서 세례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한다. 심지어 장로교는 담임목사를 위임할 때도 먼저 공동의회에서 세례교인들의 위임 투표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까 장로교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교회정치를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 장로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도를 가지게 된 하나의 원인은 이러한 민주적 교회정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장로교 5대 교리 : - 인간의 전적 타락 - 무조건 선택 - 제한된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성도의 견인
다섯 Sola
◾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로마 가톨릭은 이와 달리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함께 중요시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주장한 이유는 당시 정치·사회·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 즉, 진리이냐, 아니냐의 권위는 오로지 성경에 있지, 전통과 교도권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교리.
◾ 오직 은혜(Sola Gratia)):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참된 생명력을 잃은(“죽어 있는”) 절대적인 절망의 상태로서 죄의 노예 노릇을 하고 있으며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만 사후의 심판에서 죄에 대한 대가로 영원한 벌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스스로 죄를 벗어날 능력이 없고,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라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에 담긴 내용이다.
◾ 오직 믿음(Sola Fide): 하나님이 내리시는 구원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선행은 구원에 필요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결과로 발생하는 열매이다.
◾ 오직 주님만 영광 받으심(Soli Deo Gloria):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교리.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기초한 12조항을 요약
1) 신구약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2) 하나님의 유일성과 무소부재 및 전지전능을 믿는다.
3)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는다.
4) 하나님의 창조섭리과 거룩하신 뜻을 믿는다.
5)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류를 지으시고 주관하심을 믿는다.
6) 모든 인간은 금세와 내세에 있어서 그 행한 대로 하나님의 공평한 진노와 형벌을 받음이 마땅하다.
7)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인류 구원을 이루신다.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죄가 없는 분이다. 그러나 자기 몸으로 화목 제물로 삼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하나님 오른편에 앉 으셔서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재림하신다.
8) 성령은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사 그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
9)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녀로 삼으셨다.
10) 그리스도가 세운 세례와 성찬의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합하는 표정으로 삼는다. 이 성례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지속하며
교우와 더불어 교통하는 표이다.
11) 신자의 본분은 입교하여 서로 교제하고 그리스도의 성례와 기타 법례를 지키며 주의 법을 복종하며 항상 기도하며 주일을 거룩 하게 지킨다.
12) 최후 심판을 믿는다.
장로교 신조
1) 각 사람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 이루어짐
2) 각 신도의 구원은 영원한 하나님의 뜻의 일부이다.
3)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에 대한 상급이 아니다.
4)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5) 중생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6) 한번 구원받은 자는 언제나 구원받은 자로 있다.
* 교권체제 : 총회-노회-교회
① 고려파 장로교의 분열 : 해방이 되면서 신사참배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1945년 9월 18일 재건노회가 열리고 2개항의 자숙안을 정했다. 그러나 곧 기성교회 인사들과 주남선 목사등의 출옥성도와의 마찰이 야기되었는데,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한 것이며, 지금에 해방이 되었다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 라고 주장했고,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빚어내어 말썽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 로마의 탄압에 의한 배교자문제 처리로 인한 교회의 분열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해방전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성도들은 기왕에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를 향하여 통회 자복 근신을 요청하였고, 그 참회의 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 곳에서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정죄가 잇달았다. 이렇게 해서 이북에 재건파, 복구파의 교회가 세워졌고, 남한에서는 박윤선 목사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세칭 고신파 장로교의 분열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런피차의 공방과정에서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중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장로교회는, 사변으로 단속된 총회의 속회에서 고신파를 정식 단죄하였고, 고신파는 그 나름대로 총회를 향해 용공을 비수처럼 덮어 씌웠고 신사참배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 고신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게 된다.
②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분열(신학적 차이)
선교 개시 이래 한국 개신교는 그 신학사상과 신앙적 태도에서 보수적 입장을 지켜왔다. 이는 한국에 개신교회를 전래시킨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에 기인하고 있었으며, 또한 한국교회 지도자들(특히 장로교) 이 세계적인 여러신학적 조류에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데에도 그 이류를 찾을 수 있다. 더구나 1920년 대로부터 한국신학을 대표해온 박형룡 박사는 미국유학시절에도 근대 보수 신학의 대표 메이천에게서 사사한 신학자로서, 귀국이후 한국 신학의 객척자의 구실 등, 모두가 한국 신학을 더욱 한 방향에 고착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진출한 몇몇 개신교파 (이중캐나다 장로회도 포함된) 의 신학적 입장은 자못 자유로왔고, 그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훈련된 한국인 지도자들도 그러한 경향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30년대 이후 한국의 새로운 신학사조 도입의 주체가 되는 김재준 박사를 비롯한 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 신학적 갈등을 엿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1935년의 단권 성경 주석 문제로 신학적 갈등은 표면화 된다. 이사건은 감리교 류형기 목사의 편집발행 『아빙돈 단권주석』이 새로운 신학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이유로 그 집필자로 참여한 장로교 인사인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에 대한 문제이었다. 채필근은 즉시 사과하였으나 나머지 세 사람은 자신들의 잘못없음을 별도로 설명하였고, 장로교총회는 동주석의 열람, 참고를 금지한 사건이다.
자유로운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였던 일군은, 평양신학교가 무기휴학하자 1940년 4월 19일 숭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개교했다. 해방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조선신학교는 49년 남부총회 의직영의 허락을 받았다. 그후 새로운 신학사상을 나타냈다. 김재준 교수는 마음놓고 보수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 성경연구와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남북장로교의 신학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1947년 김재준 목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 51명이 그를 자유주의라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로교는 흥분했고, 박형룡 박사는 진정서를 검토한 후 그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김재준은 문제가 신학적 문제만은 아님을 직감하고 보수주의에서 이탈을 결심하였다. 한편 총회가 제출한 조선신학교에 대한 개혁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학대책위원회에서 박형룡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교 신학교를 세웠다. 한교단에 2개 신학교의 모순이 있자 합동 7원칙안을 내놓았으나 조선신학교측의 수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후 1952년 37차 총회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 조선신학교의 직영취소를 재인식시켰다. 조직신학교는 불복하고 한국 신학대학교로 출발했고, 1953년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을 대한 기독교 장로회라 하였다.
③ 통합파와 합동파의 분열 (에큐메니칼운동으로 인한 분열)
6. 25후 일치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때 장로교의 3번째 분열이 1959년에 일어 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 A E)라는 단체는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한 단체이다. N A E는 보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W C C를 용공이라 하여 탈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44차 총회서 정회서 거듭하는 혼란속에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온 총대들은 승동교회에서 1959년 합동총회를 결성했다. 이것은 세계교회협의회 (W C C) 서 영구탈퇴를 선언했고, W C C 를 지지하는 총대들은 1960년 서울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일치를 위해 W C C서 잠정 탈퇴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기금 유용을 두고 양측간의 대립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동교회 총회를 오늘의 ‘장로회 신학대학’(총회측) 승동교회총회측을 오늘날 ‘총회신학대학’ (합동측)으로 구분된다. 분열의 자기 신앙노선을 내세우려는 주도권의 싸움이요, 신학보다는 그 방법론 때문에 다수의 분열을 보여주는 오점을 낳았다.
④ 예장 합동측 분열
신념 체계의 측면에서 볼 때 약간 진보적인 성격을 띠는 신복음주의 운동, 성서해석의 방법에 있어서 엄격한 전통방식을 벗어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합동진보측은 이러한 시도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이었고, 합동보수측은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교단 운영과 신학교 운영을 둘러싼 의견 불일치와 대립이 심화되었다. 1979년 9월 대구총회에서 합동진보측이 합동보수측을 총회장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합동보수측은 대구 은일 교회당에서 자기들만의 또 다른 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예수교 장로회 합동 진보와 예수교 장로회 합동 보수로 또 다시 분열 되었다. 합동보수측은 분열 이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하나의 교단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다시 몇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였다.
⑤ 기타장로교단의 분열
대한예수교성경장로교 : 대한신학교의 교장 김치선의 주도로 합동 측에서 1960년 9월 창립하였다. 1961년 총회를 개최하여 완전 분열하게 되었다. 미국의 성경장로회 선교회의 원조를 받으며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근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성서대로만 믿고 그대로 실행한다.
대한예수교호헌장로회 : 1962년 9월 제47회 합동 총회에서 분립하여 11월 19일 호헌총회를 창립하였다. 이들도 대한예수교성경장로교와 마찬가지로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 가입하였다.
⓽ 소속교단의 탄생 배경
❶ 장신: 1959년 총신과 결별. 총신과 달리 박형룡 박사의 삼천만환 사건을 비롯한 교권과 정치적 갈등을 분열의 이유로 듬.
❷ 총신: 1959년 장신과 결별. 장신과 달리 WCC를 비롯한 신학적인 차이를 분열의 이유로 듬.
➌ 한신: 성경관에 대한 이견으로 김재준 박사를 필두로 1951년 분리.
❹ 고신: 1952년 한상동, 주남선목사 등 일제강점기시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투옥됐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짐.
(총회로부터 축출됨으로써 세워진 타의에 의한 교단 분열)
각교단 로고 및 통합측의 로고
1) 장로교의 제1차 분열 (1) 1946년 9월 고려 신학교 개교. (2) 출옥 성도들의 교회 재건안과 일제시 일본 신도에 귀의했던 교직자 사이 의 알력.
1940년 1월1일에는 한상동 목사가 마산 제비산 위에 위치한 태매시 선교사 집에 이인재, 최덕지 전도사 등과 모여
“1) 신사참배한 현 노회는 해체토록 한다.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세례받지 않는다. 3)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새노회를 조직한다. 4) 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 원조를 도모한다. 5) 신사불참배 그룹 예배의 여행과 동지획득에 주력
한다” 는 사항을 합의, 결정하였다. (3) 1952년 9월 11일 분립하여 고려파 총회를 따로 세움으로 오늘의 예장 고신측이 되었다.
2) 장로교의 제2차 분열 (1) 1938년 9월 30일 평양 신학교가 신사 참배 문제로 무기 휴학. (2) 1939년 가을,서울에서 조선 신학교 개교. (3) 해방후 (1947년) 조선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불만을 품은 조선 신학생 51명의 진정서가 총회에 제출되었다.
김재준 교수는 이미 <신학지남>1934년 1월호에 게재한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것이라’는 말의 ‘처녀’를 사실과 본문에 가깝다며 ‘젊은 여자’로 고쳐 불렀고 거기서 ‘표적’을 ‘이적’으로 볼것은 없 다고 지적하므로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 성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김재준 목사를 중심한 일부 교수권의 신학내용이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허용하고 성경유오설을 주장하므로 학생들중 51인이 1947년 4월 18일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총회에 김재준, 송창근 목사의 교수내용을 적시하여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4) 자유주의 신학 (김 재준 교수 주도) 문제로 1953년에 기독교 장로회가 설립되었다.3) 장로교의 제 3 차 분열 (1) 1959년 9월 대전서 모인 제 44 회 총회에서 WCC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 되었기 때문에 탈퇴를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상반된 입장이 점점 가시화되면서 총회는 결국 WCC를 지지하는 총회와 반대하는 총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2) WCC를 지지하는 자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통합총회'를 이룩했고, 통합측을 추종하는 교수와 학생들은 신학교를 분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상의 교파분열을 살펴보면 고신파는 순결문제로, 기장파는 신학문제로, 통합파는 W.C.C.문제로 나누어 졌으나 여기에는 교권과 지방문제, 선교사들 개입도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해방후 한국교회가좀더 자숙하고 스스로 겸비한 모습을 보였어도, 조선신학교가 장로회 정통적 신학 입장에만 있었어도, 선교사들의 본국교단 입장에 영향받고 휘둘리지만 않았어도 장로교 총회는 찢어지고 나누어 지는 분열의 아픔을 겪지않고 하나의 장로교 총회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2>감리교 : 감리회 (監理會 Methodist Church)
1729년 영국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하여 시작된 그리스도교 교파로서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그리고 G.휘필드등의 대학생 그룹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데 규칙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행동하여 메서디스트(Methodist:格式主義者)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들은 성경 및 신학 연구 등에 힘쓰고, 빈민과 병자, 감옥의 죄수들의 전도에 힘썼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이성, 전통, 체험을 기독교의 근간으로 이해하는 복음주의적이며 경건한 신학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감리교는 장로교와 달리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예정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한다.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모인 올더스케이트 거리의 집회소에 참석하여 오후 8시 45분경 인도자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로마서(書) 서문을 읽을 때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한다. 이 회심의 사건은 존 웨슬리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고, 감리회의 구원·신앙·성결의 교리를 설명해 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원래 존 웨슬리는 고교회파(高敎會派)로서 영국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독자적인 운동을 하였는데, 영국교회에서는 그의 교회 내 설교를 금하였으므로 야외설교의 방법을 택하여 그 운동은 점차 확대되었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메서디스트파 신자들을 런던에 모아놓고 전도사업 방침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이것이 곧 감리회의 최초의 연회(年會)이다. 이때까지도 존 웨슬리는 영국교회와 분리하려는 뜻은 없었고 교회에 속한 채 전도하려 했지만, 1784년 런던 감독에게 미국으로 파견할 선교사를 안수하여 주도록 청하자 감독이 거절하므로 그 자신이 안수를 베풀어 T.코크 박사를 미국의 총감독으로 삼고 그 밖에도 몇 사람에게 안수를 주어 목사로 세우니 이때부터 감리교회는 실제적인 한 교파를 이루게 되었다.감리회의 발전은 교구제도와 경건한 신앙을 고수하는 데 있었다. 존 웨슬리의 인격 ·조직력 ·지도력, 그리고 야외설교 ·평신도설교 등 꾸준한 복음활동 및 엄격하고 규율적인 생활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1791년 존 웨슬리가 서거하였을 때의 교세는 영국 전역에 확장, 잉글랜드를 본거지로 하였던 감리회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이르렀고 미국에서는 휘필드의 주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조직의 기본단위는 구역이며, 그것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회로 조직된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방회의 감리사, 대규모 구역인 연회에 감독이 있는 교회구조를 가졌다. 감독은 연회의 성직자를 안수하고, 연회를 인도해 주요 의사결정을 내린다. 현재의 전 세계적으로 폭넓은 신학적 토양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영미에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폭넓은 신학적 역량으로 다양한 개신교 교파가 감리교 영향 하에 설립되었다. 성결교, 순복음교회, 구세군교회 등이 감리교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는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있으며, 1930년부터 사회신경을 선언하는 등 복음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다.감리회 교리는 사도신경 속에 제시된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한다. 감리회의 특색은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라 하겠다. 사랑에 의하여 구현되는 신앙과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며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신학적 이론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 것도 특색의 하나이다.
감리회에는 모든 신도가 각기 행하지 않으면 안될 규율, 곧 규범이 있고, 25개조의 종교강령이 있으며, 이것은 감리회의 헌법정신이기도 하다. 감리회 전도방법의 특색은 부흥설교를 통한 전도와 평신도를 통한 개인전도 및 심방전도이다.감리회의 신앙과 교리는 존 웨슬리가 발표한 25개조의 종교강령과 그의 53개의 ‘표준설교’, 그리고 그가 지은 신약성서 주석에 잘 나타나 있다.
유래 :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웨슬리를 중심을 종교계의 침체를 바로잡기 위하여 성경 연구와 감옥 전도 등이 시초이다.조직 : 비사제적 감독 정치 감독은 총회에서 투표 목사는 감독이 파송되었다.교리 : 하나님은 은혜 무차별적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다. 지옥에 가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자기 구원에 대하여 성령의 확신을 얻을 수 있음. 원죄는 믿지만 완전 타락은 불신. 의롭게 된자는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여야 한다.
위슬리 : 1738년 5월 24일 모라비아 교회의 기도회에 참속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
대학내에<성단>이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경건을 목적으로 매일밤 기도회 모임과 성경과 경건 서적 읽기 병자, 가난한 자, 감옥에 갖힌 자 돌보는 일을 하였다. 표어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감리교의 신학적, 교리적 특징 : 그것은 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인에게 이루어지는 보편적 구원,
② 완전한 성화(聖化),
③ 교회 공동체를 통한 성도의 교제,
④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 교권체제 : 감독회장-연회감독-감리사-목사 * 학교: 감리교신학대학3> 성결교회 : 성결교 (聖潔敎 Holiness Church)
성결교는 19세기말 미국 감리교에서 존 웨슬리의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며 형성된 교파로서, 20세기초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성결 운동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이 4가지를 4중 복음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그 중 성결을 가장 강조한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이 강조한 '칭의'(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음)를 계승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결'(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성결운동가들은 그 위에 신유와 재림의 신앙을 가미하여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강조하였다.성결교 신학의 배경에는 우선 개신교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개신교의 복음주의와 그 당시 시대적으로 19세기에 있었던 성결 운동, 그리고 웨슬리의 신학적 배경이 되었던 알마니안주의를 들을 수 있다.
1901년(광무 5) 2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 소속 선교사인 C.E.카우만과 E.A.킬보른(한국명 吉寶倫)에 의해 세워진 프로테스탄트의 교파로서 장로교·감리교와 함께 한국에서는 3대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하나이다. 감리교 목사인 이들 선교사는 일본의 도쿄[東京] 간다구[神田區]에 동양선교회 전도관을 세우고 일본인 목사 나카다[中田]의 후원 아래 동양일원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교육에 힘쓰라는 선교회 본부의 지시도 있었으므로 전도관 1층에 성서학원을 개설, 성경 ·신학 등을 가르쳤다. 한국인 유학생 김상준(金相濬) ·정빈(鄭斌) 등이 이 학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귀국하자 1907년 염곡(鹽谷:현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마련한 것이 한국성결교의 효시이다. 1911년 이명직(李明稙)·이명헌(李明憲) 등 5명이 동경성서학원을 마치고 귀국, 안수를 받고 장로사(長老師:순회목사) 가 되어 선교사들의 후원 아래 아현동 고개 위에 새로이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을 열면서 본격적인 목회자 양성과 노방전도(路傍傳道) 등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21년 9월 중생(重生)·성결(聖潔)·신유(神愈)·재림(再臨)의 사중교리를 내세운 ‘기독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가 탄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수백 명의 성직자 ·신도들이 수난을 겪고, 교단이 강제 해체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한국 교계를 휩쓴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를 둘러싸고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 현재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http://www.kehc.org/)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및 중도파 등 몇 개파로 나뉘어져 있다.
성결 교회 교리와 신조
이 교회는 새 교파라기 보다는 순수한 복음을 동양 각국에 전하기 위하여 일어난 운동이므로 특별한 교리나 신조가 없다. 대한성결교회의 7개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근거로 하되 특히 중생, 성결, 재림, 신유를 성결 해설의 요제로 한다.
2) 교파주의에 편립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를 설립한다.
3) 사도신경을 신앙의 기초로 하고, 성경을 진리의 대해로 받아들여 영적으로 무한한 발전을 도모한다.
4) 교회의 정책은 일반 신도의 양심을 기초로 한 회의 제도를 채택한다.
5)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행위이므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진행해야 한다.
6) 건전한 지와 성결한 정과 견실한 의지에 기초하며 계발적으로 신앙을 지도한다.
7) 문서와 설교로 전도에 주력하는 동시에 실생활로서 시범하기를 기한다.
* 교권체제: 총회-지역총회-지방회-개 교회 * 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성결대학교4>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기하성), 순복음교회
1914년 미국 알칸사스 주 복음주의 할스프링에서는 오순절 교회의 목사들과 복음주의파 목사들이 보다 더 열렬한 복음전도 사업을 위해 합동하였는데, 그 본 교회에서 승인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한 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열렬한 근본주의자(진화론 반대자)로서 알미니안 주의를 그들의 신학으로 삼았다. 이 교인들은 대부분이 감리교회나 침례교회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므로 모든 저에 있어서 이 교회들의 형식이나 교리를 채용하고 있다. 그들의 교리의 요점은 삼위일체, 원죄,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말미암은 인류의 구원, 예수의 처녀 탄생과 신성, 영감, 성경의 문자적 무오설, 성령의 역사의 풍부함과 자비함을 믿는 것으로서 일반교회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특별한 점은 예배드릴 때에 매우 열정적이어서 소리치며 기도하고, 손뼉을 치며, 때로는 정신 이상이 일어난 듯이 뛰면서 방언을 하는 것이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 있으며, 세례는 전신 침례로 하며, 성찬시에는 서로의 발을 씻겨준다. 이들은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은 병 고침을 굳게 믿으나 의료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순절교회의 특성은 성령세례와 방언, 신유 등의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데, 순복음교회도 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성령체험을 중시한다. 장로교나 감리교의 기독교 조직신학에서는 성령론을 그다지 비중 있게 취급하지 않지만, 오순절교회는 성령론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이 계열의 교회들은 성령운동을 강조하여 이들을 오순절파 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학적 바탕은 뚜렷하게 어느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대략 웨슬레안에 가깝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 삼위일체(三位一體)인 하나님을 믿으며, 중생(重生)· 성령충만· 신유(神癒)· 재림(再臨) 등을 주요교리로 삼고 있다. 20세기 초반 성령 운동을 통해 생긴 기독교 교파이며,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에서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28년 개인 자격으로 M.C.럼시가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許弘)과 함께 정동(貞洞)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이 교회의 효시가 된다. 1959년 미국의 아시아 선교부장 케참 목사가 내한하여 2만 달러를 투자,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에 중앙회관을 설립하는 등 전국복음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복음(Pure Gospel)' 운동의 주동이 되어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고, 1972년에는 분열되었던 교단이 다시 합쳐 선교부와 협력관계를 맺고 조직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2001년 현재 교회수 1,417개, 목사수 3,534명, 교인수 110만 6712명이며, 교육기관으로 한세대학교가 있다. 이 밖에 5개의 농아교회, 경기도 파주시의 오산리 기도원과 2곳의 수양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222번지이다.
한국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이란 것을 중시하며 학교는 순신대학교(순복음), 한영신학대학 등이 있다.
원인 : 1914 년 미국에서 오순절 교회 목사들과 복음주의파 목사보다 열렬한 복음 전도 사업을 위하여 합동하였는데
각기들이 본 교회에서 승인하지 아니하므로 하나의 교파가 되었다.신학 : 열렬한 근본주의자들이며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그들의 신학으로 한다.
정치 : 교회 정치는 장로 정치와 회중 정치를 겸한 것을 채택하고 있다.신조 : a.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성 확신
b.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속량. c. 성령, 세례와 방언, 신유 은사
d. 거룩한 생활. e. 예수 재림 강조한국에는 1947년에 들어왔으며 일명 순복음 교회로 알려지고 있다.
순복음 교회(하나님의 성회) 신조
1)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성을 굳게 믿는다.
2) 사람은 타락되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량을 받는다.
3) 성령으로 세례 받음과 방언을 믿는다.
4) 세상과 짝하지 말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
5)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
6) 예수의 재림을 믿는다.
7) 악한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고 신자는 영원한 천국 복을 누린다.
8) 전쟁을 반대한다.
5> 침례교 :
개신교의 한 교파이며, 영국의 청교도 J. 스미스와 T. 헬비스가 1612년 최초로 런던에 침례파 교회를 세웠다. 이 교파는 성서를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절대권위와 규범으로 삼으며, 자각적인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를 행하고,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침례를 행할 때 물을 뿌리거나 부어서 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의식을 주장한다. 또 만인사제, 각 교회의 독립, 교회와 국가의 분리등을 강조한다.
침례교란 명칭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후,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주장하기 때문에 침례교회라는 교단 명칭을 갖게 되었다. 침례교는 (영아가 아닌 즉, 모태신앙 부정) 신앙인의 침례와 믿음만으로 이뤄지는 구원을 비롯해 성경을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자립적인 지역 교회를 그 특징으로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가 교리가 없이 무조건 자유롭다라고는 할 수 없으며 침례교 자체적으로 신앙고백서가 존재하고 대부분 완화된 칼빈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침례교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노선을 지향하며, 직제는 목사와 집사가 있다. 역사신학자들에 따르면 1609년 암스테르담에서 영국인 분리주의자 존 스미스를 목사로 한 침례교회가 최초의 침례교회라고 한다. 신약성경에 근거해 스미스는 영아의 침례나 세례를 거부했고, 신앙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이 있는 이들에 대해서만 침례를 주었다. 이러한 자유교회운동은 영국으로 퍼져, 칼빈주의를 기초로 하는 특수침례교인(Particular Baptists)들과, 알미니안주의를 기초로 하는 일반침례교인(General Baptists)들이 생겨났는데, 영국침례교는 일반적으로 칼빈주의를 기초로 하는 개혁파 혹은 특수침례교(Particular Baptists)적 성향이 두드러졌다.
1639년 로저 윌리엄스는 미국에 최초로 침례교회를 설립하였고, 미국의 자유정신은 침례교회의 자유정신과 유사한 점이 있었고, 침례교회가 성장하는 기초가 되었다. 특히 1700년대 중반의 대각성 시대 이후 미국의 침례교회는 감리교회와 더불어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0년을 기준으로 세계의 침례교인 수는 약 1억 5천만 명으로, 특히 미국의 개신교에서 교세가 가장 큰 교파는 세계 최대의 개신교단인 남침례회(Southern Baptist)이다.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도 이 교파에 속했으나 몇 년 전 교회가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채택한 데 반대하여 교회를 떠났다.
한국에는 1890년 캐나다의 M.위크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남 원산(元山)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두 그룹은 1959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유지재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 로 명칭을 변경하였다.침례교는 미국에서 카톨릭 다음으로 큰 교단으로 교회의 직분은 목사, 안수집사, 교사로 되어 있다. 또한 침례교회는 독립적, 자율적인 면을 중요시 하여 총회나, 연회 등을 두지 않고 '친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남 침례교’는 건전한 교단이나, ‘북 침례교’는 현재 변질된 자유주의 신학이 깊이 침투해 있는데, 우리나라의 침례교회는 대부분 남 침례교단에 속해있다(유병언의 침례교회 등 구원파 교회들은 모두 이단). 침례교는 세례를 행할 때 물을 뿌리거나 부어서 하지 않고, 전신을 물속에 잠기게 해서 베풀기 때문에 침례교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침례교는 교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다른 개신교와 같지만, 교회의 조직이나 치리형태에 있어서는 개체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회중주의 성격이 강하다. 쉽게 설명하면, 로마가톨릭교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개교회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지방분권제'에 가깝다. 침례교의 특징은 침례교만의 신학노선이 없다고 할 만큼 신학적인 바탕이 약하기에, 일반적인 기독교 교리를 따르는 추세이다.
침례교 신조
특별한 신조가 없으며 신앙에 대한 단호한 선언도 없다. 누구나 양심의 지시대로 성경을 해석하며 과학과 교육에 새로운 해석이 생길 때는 그에 따라 신앙을 수정할 수도 있다. 각 개인은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경배할 수 있다.
1) 각 교회는 독립해야 한다.
2)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
3) 모든 신앙 문제에 있어서 종교적 자유가 있어야 한다.
4)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중생한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다.
5) 유아 세례는 비 성경적이므로 실시하지 말아야 한다.
6) 세례는 신자에게만 베풀어야 한다. 형식만으로 받는 세례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세례의 예식은 전신을 물에 담그는 침례뿐이다.
7)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성찬은 반드시 베풀어야 한다.
8)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자는 최선의 판단에 의하여 이를 해석해야 한다.
* 학교: 침례신학대학교
6> 루터교 :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신학을 추종하는 개신교의 한 교파. 영어로는 “Lutheran Church”이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창립된 가장 오래된 기독 교회이다. 16세기 카톨릭에 반대하여 마틴 루터의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루터의 대소교리 문담(1529),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 슈말칼트 신앙개조(1580), 콘코드의 신조(1580)를 신조로 삼았다. 루터교는 이들 신조들 외에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안 신조를 고백한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으로 가장 먼저 성립된 루터교는 성서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권위도 두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혜만으로(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cia)’라는 세 가지 원리는 루터교를 떠받고 있는 기둥이다. 루터교에서는 평신도들이 단상에 올라와 설교를 하거나 성만찬(Holy Communion,성체와 보혈을 나누는 잔치)을 성직자들과 함께 베풀기도 한다. 성만찬을 제외한 전례가 로마 가톨릭의 미사전례와 유사하며, 종교 개혁 시대에 분리된 루터교는 비슷한 시기에 분리된 장로교와 더불어 다섯 솔라 정신을 공유한다. 루터교의 세계적 교인 수는 약 7천만 명이다. 현재의 루터교는 초기의 분리주의와 달리 독일에서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장서는 대표 종파로 알려지고 있으며, 특히 가톨릭교회와 공동으로 많은 연합사업을 펼쳐 나가고 있다.
교리적 특징은 1) 이신득의 강조 2) 성찬은 은혜의 방도가 된다.3) 세례에 의한 중생 4) 유아세례는 정당하며 합당하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에 부여된 것 6) 하나님의 은총에서 타락할 수 있지만 구원은 만민에게 보편적 한국에서 루터 교회는 문서선교를 통해 확산 되었다. 미국에서 수학하고 들어온 지원상 목사를 중심으로 컨콜디아사를 통해 문서선교를 하고 방송(루터란 아워)을 통해 선교했다. 한국에서의 루터교회는 그리 큰 교단은 아니지만 베델성서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식 명칭은 기독교 한국 루터회(http://www.lck.or.kr/)다. 오늘날 독일과 북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다. 이 교회는 회중주의이며, 행정과 결의에 있어서는 대의정치를 추구한다.
* 학교: 루터신학대학교
7> 성공회 (聖公會 The Anglican Domain)
영국 왕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기를 들고,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국왕이라고 하면서 생겨난 교파이다.영국의 국교회로서 영국에서 출발한 성공회는 앵글리칸 처치, 성공회, 에피스코팔처치, 등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1536년 로마감독의 교권을 폐지하고 1570년 교황 피오 5세가 영국왕 엘리자벳을 파문함으로써 로마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교회는 신앙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발생하였고 교회의 신학은 개혁파에 가깝지만 교회 및 예배의식은 카톨릭에 가깝다. 영국에서는 영국 왕이 교회의 정점이고 국회가 교회법을 제정한다. 그렇지만 켄터베리 대교구, 요크 대교구, 웨일스 대교구 로 나눠져 있으며 한국 성공회는 켄터베리 대교구에 속해 있다. 영국교회의 교리의 표준은 39신앙개조와 기도문이다. 한국에 성공회가 전래 된 것은 1890년 코프감독에 의해서였다. 정식 명칭은 대한 성공회(http://anck.peacenet.or.kr/)다.조직은 주교, 신부, 부제라고 일컷는 종신직 신품이 있다. * 학교: 성공회대학 8> 구세군 (救世軍 Salvation Army) 구세군은 1858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에 의해 창설된 그리스도교 교파다. 구세군(salvation army)이란 명칭은 1878.5에 정식으로 명명되었고 1880년 처음 사관학교를 세웠다. 구세군의 특징은 사회봉사에 있다. 구세군의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기회균등의 인정하에 군대 조직을 차용한다. 세계의 모든 구세군은 한 대장 아래 통솔을 받고 구세군에서는 목사는 사관 평신도는 병사라고 지칭한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8년 10.8 명동에서 영국인 호가드 정령에 의해 옥외집회를 한데서 출발한다.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남녀평등을 중요시 여겨 사관학교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입교토록 하고 있다.
구세군 신조
* 구세군의 모든 회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며, 그들은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을 받은 군병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노략할 것을 서약한다.
* 구세군 신문이나 발행물을 가가호호 다니며 팔고, 불신자를 개인적으로 권면 하며, 가족을 심방 하여 기도하기를 힘씀
* 모든 구세군은 금주와 금연을 실시한다.
* 구세군은 특히 아이와 여자의 권위를 존중하며 여자에게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인정한다.“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립보서 1: 15-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5. 참고 : 각교단의 장·단점
한복협 11월 발표회서 각 교파 대표적 목회자들 발제 - 기독일보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장로교: "대의정치 표방, 기본권과 치리권 강조"
감리교: "참된 구원의 진리와 성서적 경건 실천"
성결교: "가교 역할 하지만 대형교단에 대한 콤플렉스도"
침례교: "성경무오설 지지하지만 신조에 대해선 상대적"
기하성: "성령 사모했으나 성도의 고난에 대한 언급 부족“
먼저 '장로교회 정치의 특징과 장·단점'을 제목으로 발표한 손인웅 목사는 "장로회 정치는 주권이 교황이나 감독에 있지 않고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라며 "다만 그 주권행사가 주권자인 교인에 의해 선출된 장로를 통해 조직되는 치리회에 있는 대의정치"라고 했다.
손 목사는 또 "장로교회는 평신도의 기본교권과 성직자의 치리교권으로 조직된다"며 "평신도의 기본적인 교권도 인정하지 않거나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한 정치체제에서는, 성직자는 막강한 권세를 행사하게 된다. 반면 성직자의 치리교권을 아주 인정하지 않는 자유정치나 조합정치체제에서는 평신도의 권세가 막강해져, 성직자는 진리 수호를 맡은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사명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로교회 정치의 기본원리를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를 반대하는 교회 △회중교회 정치와 민중교회 정치를 반대하는 교회 등으로 꼽았다. 손 목사는 "그러나 오늘의 장로교회 안에는 '신(新)교황들'과 '신(新)감독들'이 날로 범람하고 있다"며 "교회의 주인과 주권자는 교황도 감독도 아니며, 목사도 장로도 교인들도 아닌, 주님"이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그는 "장로교회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고백을 존중한다"며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오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다소 문제제기를 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예컨대 '오직 믿음'을 주장할 때,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과 삶도 함께 고백하며 실천하는 온전한 신앙을 추구하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신경하 목사는 '한국감리교회의 오늘'를 제목으로 발표했다. 신 목사는 "존 웨슬리의 신학과 뜨거운 신앙을 모태로 한 감리회의 신앙전통은, 기독교의 참된 구원의 진리와 성서적 경건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며 경건생활에 힘쓰는 신실한 사람들의 신앙공동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비롯해 많은 교육기관에서 인재를 양성했고, 최근 청소년대안학교인 산돌학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앙을 통한 교육에 헌신해 왔다"며 "1930년 한국교회 최초로 여성에게 목사와 장로 안수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여선교회 조직은 세계적인 여성네트워크를 자랑한다"고 했다. 신 목사는 그러나 "감리교회 역시 구조적 약점과 함께 비난받을 만한 문제점이 있다"면서 "교회의 공교회성을 우선해야 한다. 세습을 금지하고,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리더십을 세우며, 권위주의가 아닌, 민주적이고 공개적이며 다수의 회원이 참여하는 시스템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또한 연관적 공교회로서 감리교회의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복원함으로써, 감독제도와 의회제도 및 감리교 본부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고 높은 수준의 성직 양성을 위한 훈련체계를 마련하며, 안일과 부패를 용인하게 하는 제도와 절차를 혁신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정익 목사는 '성결교회의 장·단점'을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목사는 먼저 장점에 대해 △민족애로 자생시킨 교단 △건강한 중형교회들을 가진 교단 △한국 교계의 가교적 역할 등을 꼽았다.이 목사는 특히 "한국성결교회는 한국 기독교에서 주류교단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신학은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국교회의 주류는 결코 정통보수적인 신앙도 현대문화와 타협한 자유주의 신학도 아닌, 온건한 복음주의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소박한 복음주의 신학을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는 신학이 성결교회"라고 자부했다. 단점도 지적했다. 이 목사는 "성결교단은 자생적 교단이기 때문에 해외 파트너나 연대적 뿌리가 없다"며 "이 때문에 해외에서 성결교회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신학생들도 유학을 갈 경우 협력 자매교단이 없어 여러 가지 편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 또 신학교를 졸업한 후 교회나 연합기관, 그리고 선교 현장에 진출할 수 있는 장이 훨씬 좁다"고 분석했다.
또 "한국교회는 장·감·성으로 시작됐는데, 성결교회는 그 중 가장 작은 교단으로 대형교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면서 "간혹 대형교단들을 따라가다 보니 교단의 체제나 제도의 독창성이 상실되고 장로교단화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는 성결교단이 지니고 있어야 할 고유성을 고집하지 못하고 상실하는 계기가 됐다"고도 덧붙였다.
침례교의 특징은 고명진 목사가 발표했다. 고 목사는 "침례교는 무엇보다 성경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며, 성경무오설을 지지한다. 침례교에 의하면 권위는 오직 살아있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며,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신약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며 "이런 이유로 참례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펜윅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한글 번역에 힘을 썼으며, 성경 읽기를 장려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침례교는 개신교의 다른 교파와 달리, 신조가 신도의 양심을 구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침례교는 신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소통과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신과 올바른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침례교 내부에는 다양한 신앙 양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고 했다. 고 목사는 또 "침례교는 중앙집권적 조직 형태가 아닌, 회중제도라는 민주적인 조직 형태를 지니고 있다"며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능적 구분이다. 이렇게 볼 때 침례교의 조직적 특징은 한 마디로 개교회의 자치와 회중의 권위를 강조한다는 점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기하성의 장·단점을 발표한 최성규 목사는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순복음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한다. 성령님을 사모해 날마다 뜨겁게 기도한다. 그 결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는 말씀의 역사를 누린다"고 역설했다. 최 목사는 "초대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교회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순복음은 말씀을 실천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인답게 살며, 교회 밖의 교회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고, 성령의 은사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영성으로 무장하고자 한다. 그 결과 순복음에서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이 하나"라고 강조했다. 단점에 대해서는 "짧은 역사로 인해 전통과 신학이 부족하다. 또 지도자 한 사람에게 의존적인 경향도 있다"며 "지금까지 앞만 보면서 목적을 이루는 데 집중해 왔는데, 이제 과연 그 길이 바른 길이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꿈과 희망만 강조하다 보니 성도의 고난에 대해 알려주지 못했다"고 성찰했다.
"교단들이 본래의 기능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발표가 모두 끝난 뒤 총평한 손봉호 박사(서울대 명예교수)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침례와 여성 안수 외에는 교단 간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고, 평신도는 대부분 그(각 교단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며 "이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교단의 가르침과 전통에 충실하기보다는, 한국 기독교계의 지배적인 분위기와 문화에 더 동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손 박사는 "교단이 존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상호 감시와 견제를 통해 목회자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라며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교단이 없는 것 같다. 교단 총회들은 법적 권위만 주장할 뿐 영적·도덕적 권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고, 초대형교회들은 교단의 통제에서 거의 벗어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교단들이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