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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위한 사랑은 있는가?
2014. 1. 19(주일낮예배) 마태복음 22:34-40
40년 전에 대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중에 문제 하나가 40년 후에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40년 후에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500불정도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1만 9천불이었다. 우리 사회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빨리 성장하고 있다. 1970년대 인간이 만든 로켓이 달나라에 가는 시대에 미국이 가지고 있었던 최고의 컴퓨터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의 1/30의 용량이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당시 슈퍼컴퓨터가 우리 핸드폰보다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발달한 과학은 두려움이 없다. 우리는 과학의 발달로 식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전자공학으로 뿌리에는 고구마와 감자가 열리고, 줄기에는 예쁜 꽃이 피고, 열매로는 사과와 배와 감이 열리게 할 수도 있다. 온난화문제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기계를 만들어 수면 3-4천M 아래에 넣어서 수면 깊숙이 있는 찬물을 위로 올리고 더운 물을 내려서 온난화를 막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공해문제도 마찬가지다. 자본이 많이 들지만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 원전쓰레기로 우리가 고민하고 있지만, 이 원전 쓰레기를 우주선에 실어서 우주공간으로 버리는 때가 곧 올 것이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발달한 과학은 우리의 수명을 길게 하였다. 그래서 1940년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수명은 41세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수명이 80세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우리나라 수명은 120세가 될 것이다. 또 인간의 젊음이 30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60세로 연장할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여기까지이다. 과학은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주고, 또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생명이 연장되고, 편안한 삶을 사는 인간의 행복이 커져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는 조선시대 왕이 먹는 음식보다 더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맛난 것을 먹고 사는 여러분은 행복한가? 시편 13편은 다윗이 사울왕을 피하여 도망할 때 지은 시라고 한다. 그런데 다윗은 그 10년의 세월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지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여 어느때까지입니까? 하면서 어느때까지 라는 말을 4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특히 1-2절을 보기 바란다.
(시 13:1-2)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는 시간은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그런데 그러한 고통가운데 이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아마 다윗은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조급하게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어느 때까지 입니까? 하면서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이 이렇게 불평과 원망을 가지고 어느때까지이니이까? 하면서 하나님을 부르기를 원하고 계시겠는가? 시편 13편을 묵상해 보면 다윗은 처음에는 언제까지 입니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다윗은 고통가운데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소망을 가지는 모습은 고난의 끝이 언제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5-6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다.
(시 13:5-6)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 13편에서 다윗은 모습은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1-4절의 다윗은 고난가운데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그는 고난의 때가 끝나는 그 시점을 바라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5-6절에서 다윗은 고난의 시점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참된 소망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망하는 자세가 달라졌을 때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던 다윗은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내 삶에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서 행복할 수 없어! 하면서 그때가 다 지나가기를 소망하며 산다. 그런데 고난의 때에 우리가 바라고 소망해야 하는 것은 고난이 끝나는 그때가 아니라, 고난을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할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아마 자녀양육일 것이다. 엄마가 자녀를 키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밤에 잠을 자지 않아서 힘들고, 또 똥오줌을 싼다던지 아니면 배가 고프면 울어서 정말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런데 그때 엄마가 가지는 소망은 유치원만 가면 힘들지 않을꺼야! 하면서 어렵고 힘든 때의 마지막만 소망하고 산다. 그런데 그렇게 마지막 때를 소망하며 산 엄마가 아이를 유치원에 입학 시킨 후에는 참 평화를 누리겠는가? 그때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면 고생이 끝인 줄 알 것이다. 그런데 저는 아이를 대학에 입학을 시켰는데도 여전히 힘은 든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는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엄마는 웃을 수가 있다. 그때가 언제인가? 몇 주 전에 박여원이를 안았다. 그리고 여원이 뽀 하면서 제가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여원이에게 여원이 뽀 하고 뽀뽀를 시켰더니 여원이가 이마를 제 볼에 바짝 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뽀 했더니 또 이마를 제 볼에 대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몇 번을 반복을 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자려고 누웠는데 여원이 얼굴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저는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왜 손주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엄마 아빠는 아이를 빨리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힘들어하면서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 자체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손주만 봐고 기쁘고 행복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고난의 때가 끝나는 그 때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순간에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렵고 힘든 이 순간에도 의미와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렵고 힘든 순간에 사랑의 대상을 알고 참된 사랑을 하며 사는가? 이영태선생님이 쓴 잃어버린 세월 그리고 기다리는 세월 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던 이영태선생님은 93년도에 초등학교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였다. 선생님은 퇴임을 할 때는 남은 여생 사모님과 함께 여행도 다니며 여유로운 노후를 보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96년도에는 사모님과 좀 더 편안하게 살려고 아파트로 이사도 하였다. 그런데 98년에 사모님이 혈관성치매에 걸린 것이다.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좋은 실력을 가진 사모님이 치매에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엎친데덮친 격으로 2004년에는 사모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척추장애가 생겨 이제는 하루 종일 집에서 누워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후로 선생님은 사모님이 욕창에 걸리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자세를 바꾸어주고, 또 변비에 걸리지 않도록 60가지의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서 먹이고, 복부맛사지와 온수찜질을 매일 해 주고 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였다. 그러므로 아는 사람이 굉장히 많이 있었는데, 이렇게 아내를 간병하느라 출입을 하지 않으니 안부를 묻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3년전부터는 치매가 심해진 사모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전혀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선생님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픈 날이 언제냐고 물으면 아내와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그날이다고 말씀을 할 정도로 선생님은 많이 외로와 지셨다.
이것이 지금 이영태선생님의 삶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이영태선생님의 삶에 무슨 소망과 기쁨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영태선생님은 사모님이 치매에 걸려 누운 후 지금까지 16년동안 A4지에 간병일기를 썼다. 그 양이 지금 책 12권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저는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어렵고 힘든 간병을 하면서 선생님은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하고, 또 그 사랑을 고백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아무리 큰 고난과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가운데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도 이러한 차원에서 한번 보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행동강령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었다. 그런데 그 율법을 10가지로 축소하면 십계명이 된다. 그러면 이 10계명을 둘로 요약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본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저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차전놀이를 해 보았다. 그때 저희 팀은 100전 100승하는 팀이었다. 처음에 운동회 연습을 할 때는 한두번 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저희팀은 차전놀이에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그것은 동군과 서군의 동채를 부딪쳐서 위로 들어 올릴 때 끝까지 밀어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동채가 높이 올라가면 상대편에서 겁을 먹고 결국 동채를 내리면 그때 눌러서 우리가 이기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다. 세상에서 승리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기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꽤 오래 전에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었다. 그 목사님의 교회에 조직폭력배 두목의 아내가 출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조직폭력배 두목의 아내가 집에 심방을 와서 남편과 상담을 좀 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직폭력배 두목을 상담하기 위하여 그 집으로 갔다. 목사님이 그렇게 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싸움을 잘 하는 사람은 몸도 크고 얼굴도 우락부락하게 생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보니 작고 곱상하게 생긴 사람이 깍듯하게 목사님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작고 곱상한 몸으로 어떻게 싸움에서 이깁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분이 목사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목사님 상대방은 싸움을 할 때 살려고 싸웁니다. 그런데 저는 죽으려고 싸웁니다. 그러면 제가 이기지요.
이것이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이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된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갈 때 목숨걸고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행동강령인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 바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바쁘게 살면서 연봉에서 또 직책에서 다 이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성도는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모습이다. 내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도와서 진급이 더 잘될 것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십계명이 가르치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모습인 것이다.
5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또 내 감정을 격앙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고 그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지 않고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참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힘을 키워서 승리하며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된 우리에게 너희가 힘을 키워서 세상과 싸워 이기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여 세상과 싸워서 이기며 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가르친 것이 산상수훈이다. 특히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0절에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의 자세에 주목해 보기 바란다. 나에게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부탁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사람이 나를 고발하여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 천국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눈으로 속옷만 주는 것이 아니라,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성도가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살면 분하고 억울하겠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는 것으로 기뻐하며 고난의 순간이 다 지나가기를 소망하며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고난의 인생에서 기쁨과 행복을 빼앗기지 않고 소망의 날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기쁨과 행복으로 소망의 날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2008년에 상영된 강우석감독의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가 있다. 겸손하게 인자한 부부가 있었다. 그 부부는 잘 생긴 아들을 낳아서 대학까지 공부를 시키고 많은 재산까지 물려주었다. 그리고 부부는 남은 재산을 고아원에 기부하기로 마음에 결정을 하였다. 그런데 아들이 찾아와서 그 돈을 주식에 투자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므로 고아원에 기부하지 말고, 주식에 투자를 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고아원에 기부하기로 이미 약속을 하였고, 또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 보람이다고 아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살고 있으면서 더 큰 재산을 가지고 싶은 욕심에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아야 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래서 어느 폭우가 내리는 날 밤에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버지의 배와 가슴을 무자비하게 찔러서 살인을 하였다.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나오자 아들은 어머니도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러면서 손톱 일부가 부러져서 떨어지게 된다.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그 집을 나갔는데, 죽어가는 어머니의 눈에 그 손톱이 보인 것이다.
나중에 경찰이 증거물을 찾기 위하여 온 집을 뒤지고 또 시체를 부검하였지만 특별한 증거품을 찾지를 못한다. 그런데 경찰들이 의구심을 품는 한가지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목에 걸려 있는 손톱이었다.
어머니는 복면을 하고 아버지를 죽이고, 또 자신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람의 눈빛을 보고 아들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이 손톱이 증거가 되어서 아들이 잡힐 것만 같아서 그 손톱을 삼키면서 죽어갔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들은 정말 비정하고 악한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이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아들까지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이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사랑이 있으므로 고난을 이기고, 또 이 사랑으로 고난의 순간에 기쁨과 행복을 소유하며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