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보았듯이 판소리란, 창자는 소리를 하고 고수는 북을 치면서 ‘추임새’를 하고 청중은 창자와 고수에 호응하여 소리판의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판’을 어울리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판소리라는 말의 어의(語 義)가 시사하는바 판소리의 내용은 수미일관 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지닌 서사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무대 예술인 것도 알 수 있었다. 또 그것을 표현하는 구체적 기법은 ‘창. 아니리. 발림. 추임새’의 네 가지 요소가 있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모든 예술 형태가 그러하듯이 이 판소리 예술도 발생 단계를 거쳐 독립된 새로운 예술형태로 발전하면서 몇 가지 세부적인 장르로 분화하기에 이르렀다. 창법이나 창조의 분화 발전에 따른 유파의 분화나 발성법 장단의 분화 발전에 따른 표현 기교의 발달은 말할 것도 없고 유개념으로서의 몇 가지 하위 단위인 독특한 장르가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누차 지적하였듯이 판소리의 본령(本 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줄거리를 지닌 이야기(서사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예술 형태이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세 판소리 이론의 대가인 신재효의 중대한 증언을 들어 보기로 하자. 그의 창작으로 보이는 ‘오섬가(烏 蟾 歌)’의 1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조선국 남원부에 이도령 그 아이가 춘향가 서로 만나 사랑가로 노던 모양 이별로 우던 광경 근래에 광대들이 타령으로 지어내어 중두지미 판을 짜서 횡설수설하거니와........
여기 방점으로 표시된 부분을 보면「(1)근래의 광대들이 (2)타령으로 지내어 (3)종두지미 판을 짜서」로 되어 있다. 이 경우(1)은 판소리의 창조자를 지칭하였음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리고(2)와 (3)은 창조하는 과정을 말한 것으로 보이는데,(2)는 문학적인 사설의 내용을 ‘타령’이란 말로 나타내었고,(3)에서 말한 ‘판’은 종두지미(鐘 頭 至 尾) 즉 처음부터 끝까지의 작품 구조를 뜻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꾸어 말하면, ‘타령’이라는 문학적인 사설 내용을 ‘창’과 ‘아니리’의 구분, 장단의 배치, 창법의 구별, 발성의 변화, 발림의 규식(規 式)등의 결정짓는 과정을 ‘판을 짜서’라고 표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판소리의 본령을 근간으로 하여 파생된 장르로 단가, 가야금병창. 승도창(繩 渡 唱), 창극 등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제 이러한 장르들이 제가끔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판소리 레퍼토리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단가
판소리 분야에서 ‘단가’라는 명칭을 언제부터 썼으며, 그것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확실히 알 도리는 없다. 지금으로부터 꼬박 백 년 전에 생존했던 신오위장(申 五 衛 將) 즉 신재효(申 在 孝1812∼1884)는 그의 전집 속에 15편의 단편의 단가를 남겼는데, 거기에는 단가라고 하지 않고 ‘허두가’(虛 頭 歌)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각 작품의 명칭은 없으나 오늘날 소리로나 문헌으로 전하는 ‘대관강산’(大 觀 江 山), ‘역대가’(歷 代 歌), ‘궁장가’(宮 墻 歌), ‘역려가’(逆 旅 歌), ‘소상팔경’(瀟 湘 八 景), ‘고고천변’(皐 皐 天 邊), ‘새타령’, ‘달거리’, ‘금화사가’(金 華 寺 歌), ‘숭유가’(崇 儒 歌), ‘태평가’(太 平 歌), ‘효도가’(孝 道 歌), ‘북정가’(北 征 歌), ‘호남가’(湖 南 歌), ‘광대가’(廣 大 歌)등의 내용이 해당하는 가사들이다. 신오위장 생존 당시에 이런 등속의 단가들이 불려 졌다면 그 역사는 상당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본격적인 판소리의 양식이 완성되었을 그 무렵에 이 단가는 불리기 시작했을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 단가의 내용은 주로 역대의 성군(聖 君)이나 현주(賢 主) 또는 철인(哲 人), 지사(志 士), 영웅호걸, 문장재사, 절세미인들의 사적을 읊었거나 아니면 은일처사(隱 逸 處 士)의 청아(淸 雅)한 흥취 또는 환해명리객(宦 海 名 利 客)의 말로를 읊은 것도 있다. 그밖에 우세연군(憂 世 戀 君)을 내용으로 하는 것, 음풍영월(吟 諷 詠 月)하는 자연의 한정(閑 情)을 읊은 것도 있다. 이러한 내용이라면 화평정대(和 平 正 大)하다는 평조(平 調)나 청장격려(淸 壯 激 勵)하다는 우조(羽 調)가 적격이지 오열처창(嗚 咽 悽 ?) 한 계면조(界 面 調)가 어울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서사적인 줄거리를 가지지 않은 단순한 서정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북 장단도 ‘중머리’ 장단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단가는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창자의 목을 풀기 위한 구실을 한다고 한다. 단가를 부르는 시간은 대개가 5분 내외의 짧은 길이를 가진 것인데, 이 단가를 부르는 동안 목 성음을 풀어서 음정을 고르고 또한 그날의 컨디션을 판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기자의 말을 빌면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그날의 레퍼토리를 선정할 수 있고 아울러 청중의 수준을 판단하는 기회도 된다고 한다. 특히 그날의 컨디션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그날의 생리적인 상태로 말미암은 목의 ‘시김새’를 측정하고 상하성의 발성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밖의 파생 장르들
앞에서 본 단가 이외에 가야금 병창과 승도창 그리고 창극 등이 판소리에서 파생된 새로운 장르라 하겠다. 그 중 가야금 병창은 창을 부르는 사람이 동시에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부르는 것을 말한다. 이 가야금병창의 발생 시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어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일설에는 김창조(金 昌 祚1865∼1918)라는 말도 있으나, 이에 대한 이설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가야금 병창은 판소리 한 마당을 부르지는 않고 판소리 중에서 특정한 대문을 따로 떼어 낸 ‘토막소리’나 단가를 병창제(판소리 가풍 중 ‘석화제’에 가깝다고 한다)로 부르기 때문에 창법이 본격적인 판소리와는 아주 다르다. 그리고 장단은 북이 아니라 장구장단으로 한다는 점이 보격적인 판소리와 다른 점이다. 병창의 창법은 판소리의 공력에 비하면 훨씬 수월할 뿐 아니라 판소리로 대성할 수 없는 자질을 가진 사람, 말하자면 빈약한 성음을 타고난 사람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목 성음이 부족한 약점을 가야금이 커버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특징을 살릴 수 있다 할 것이다. 이 가야금 병창과 아울러 거문고 병창이 있었다고 하며 줄을 타면서 부르는 승도창이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은 하는 사람이 거의 끊어진 것 같다. 판소리는 원래 한 사람의 배우가 작품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구실을 도맡아서 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판소리의 창자는 이도령도 되고 춘향도 되고 방자도 되고 향단이도 되고 춘향모도 되어서 그 인물들의 모든 행동이나 심리를 소리로써 표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세 개화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서구식 연극이나 가극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배역(配 役)이라는 새로운 무대 형식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판소리의 음악은 그대로 살리면서 작중 인물을 별개의 창자가 맡아서 출연하는 창극이라는 장르가 파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창극이라는 형태가 청중의 인기를 끌게 되자, 지난날 ‘바탕소리’(한 작품 전체를 다 불러내는 것)를 공부하는 노력이 줄어들고 ‘토막소리’(바탕소리 중에서 어떤 부분만을 떼어서 부르는 것)에 치중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처럼 판소리가 ‘바탕소리’로부터 ‘토막소리’로 변하면서 배우들의 수업 과정이 경감되고 게다가 전자 기계(마이크)에 의지하게 되는 경향이 짙어짐으로 말미암아 무대에 오르는 창자들의 정통적인 기교는 가속적으로 쇠퇴하여져서 오늘날에 와서는 ‘판소리’의 ‘소리’와 구분되는, 이른바 ‘연극 소리’라는 명칭이 붙게 될 만큼 음악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소위 ‘창극단’이니 ‘국극단’이니 하는 데서 부르는 ‘창’ 은 엄격히 말해서 정통적인 판소리의 창법과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판소리의 레퍼토리
레퍼토리 면에서 보면 판소리는 분명히 사양기(斜 陽 期)로 접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씻기 어렵다. 18세기 후기로부터 19세기 초반에 생존했던 송만재(宋 晩 載1769∼1847)의 ‘관우희(觀 優 戱)’에는 열두 개의 레퍼토리가 판소리로 불렸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생존했던 윤달선(尹 達 善)의 ‘광한루악부(廣 寒 樓 樂 府)’에도 “잡가 열두 마당 중에서 향낭가(香 娘 歌)는 그 하나이다”라고 적혀 있어 당시의 레퍼토리가 열둘이 있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열두 개의 레퍼토리를 종래부터 “판소리 열두 마당”이라고 불러 왔다. 이제 그 작품명을 들어 보자.
이 열두 마당은 일제 강점기에 저술된 정노식(鄭 魯 湜)의 <조선창극사>에도 소개된 바 있으나, 11이 ‘무숙이 타령’으로, 12가 ‘숙영낭자전’으로 적혀 있다. 이 열두 마당 중 신오위장(신재효)은 1에서 6까지를 새로운 판을 짜서 전해줌으로써 오늘날 그 전모를 알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했던 것이다. 또 신오위장과 문통(文 通)이 있었던 정현석(鄭 顯 奭)의 <교방제보(敎 坊 諸 譜)>에는 ‘매화타령’이라는 이름 아래 “기녀에게 혹해서 망신을 당하니 이는 곧 음탕함을 징계함이다”고 한 것이 있다. 그리고 신오위장의 창작으로 보이는 ‘오섬가’에는 ‘베비장타령’과 ‘강릉매화전’의 줄거리가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구한말까지는 열두 마당이 거의 불려 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진주 출신 이선유(李 善 有)가 편찬한 <오가전집(五 歌 全 集)>(1933년 출간)에 이르러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만이 남게 되었고, 오늘날 남아 있는 판소리의 레퍼토리도 오직 이 다섯 마당이 불릴 뿐이다. 다만 박녹주(朴 綠 珠)여사가 부른 ‘숙영낭자전’을 통해 ‘숙영낭자전’의 편모를 알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