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차별’의 차이
이광우 (2024.06.29.03:35)
{CBS 광장}(2024. 6. 23. 방송)에 출연하여 여성 안수를 주제로 인터뷰하며 한 시간 넘게 예장합동 교단을 향해 여성 안수(집사, 목사, 장로)의 문을 열라고 했더니 동영상 아래에 무척 헷갈리는 묘한 댓글이 하나 붙었다.
“성경에는 남녀평등성 뿐 아니라 차이성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연구하고 논의함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성경 전체를 다 연구하기 전에는 논의하지 말자는 이야기인지, 까놓고 말해서 이게 도대체 욕인지 칭찬인지 몹시 헷갈려서 며칠 동안 난독증(難讀症)으로 허우적거렸다. 그렇게 혼자 고민하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더 좋은 국어사전』에서는 ‘차이’와 ‘차별’을 어떻게 말하는지 한번 확인해 보았다.
차이/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 또는 그런 정도나 상태.
차별/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
이 정의에 따르면 예장합동 교단은 지금 여성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예장합동 교단의 정책은 남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 뿐이고, 남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남녀를 ‘차별’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는 궤변을 계속 늘어놓고 있다. 내가 잘못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더 솔직히 저런 말은 “남성우월론은 죽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매우 점잖고 은근한 ‘바리새 선언’으로도 읽힌다. (혹시 내가 댓글의 말뜻을 오해했다면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그래, 남자와 여자가 차이가 있다고 하자. 그 차이라는 것이, 그 차이가 차별이 아닌 그저 단순한 차이를 말하는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그 차이가 무엇인지는 좀 더 명확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더군다나 성경 전체를 샅샅이 다 뒤지고 연구해서 그 차이를 논의하자니 내가 볼 때 우리들의 갈 길이 참으로 아득해 보인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도 머리 나쁜 우리 피조물들의 성경 전체에 관한 연구는 다 끝나지 못하리라는 지레짐작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 연구가 완결될 때까지는 예장합동 교단에서 이대로 남자들이 하나님 노릇하면서 그냥 가야만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 남자의 사타구니에는 쌍방울이 있고, 여자들은 없는 차이, 그래서 남자들은 서서 오줌을 싸고 여자들은 앉아서 볼일을 보는 차이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 말고 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여자 대통령도 나오고 여성 장군도 나오는 세상에서 남자 여자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차이 때문에 여성 안수는 안 된다는 것인가. 남자들의 그 쌍방울 덕에 남자들의 머리가 더 우수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 쌍방울 덕에 신앙이 더 좋아진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 쌍방울이 있어야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올바른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예장합동 교단 소속 남자들의 쌍방울은 무소불능의 마법 항아리인가. 그 쌍방울은 금방울인가, 아니면 결국 그 쌍방울이 하나님이라는 말인가.
예장 합동 교단 안에서 “남녀의 기능상 차이를 말하는 것일 뿐 차별은 아니다”라는 얼치기 신학자들의 궤변을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다. 명백히 여성을 차별하면서도 남녀의 ‘질서’를 강조하는 것일 뿐 차별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벅벅 우겨댄다. 그 ‘질서’라는 것이 혹시 쌍방울 달린 남종들이 주구장창 하나님 노릇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쌍방울 달린 놈들이 매우 너그럽게 은혜 베푸는 자세로 “여성 사역자 지위를 향상 시키겠다”고 걸핏하면 큰소리를 치는 것인가. 그 그럴싸한 구호 자체가 쌍방울 달린 놈들의 하나님노릇을 전제한 표현임을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것 같아 한심하기 그지없다. 다 같은 종 주제에 도대체 누가 누구의 지위를 향상시켜 주겠다는 것인가. 쌍방울 달린 남종이 쌍방울 없는 여종을?
예장 합동 교단 소속 쌍방울 달린 남자 목사들이 갖고 있는 성경에는 구약성경 요엘서 2장 28절에 “내가 내 영을 오직 쌍방울 달린 놈들에게만 부어주겠다”는 말씀이 혹시 있는가? “쌍방울이 없으니 예수님의 그 감격스런 부활 소식을 여자들이 전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하였는가. 마태복음 맨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께서 “방울 ‘차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있으니 오직 쌍방울 달린 놈들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성삼위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가. 사도행전 1장 8절에 “방울 차이가 있으니 쌍방울 없는 여종들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면 큰일 난다”고 혹시 말씀하셨는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이 “쌍방울 달린 놈들에게만 골라골라” 임하셨는가. 로마서 16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이 “여성인 유니아는 쌍방울이 없기 때문에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였는가. 하나 더, 구약에서도 “드보라는 쌍방울이 없는 명백한 ‘차이’가 있으니 사사가 될 수 없는데 내가 잠시 착각해서 사사로, 사사시대의 모세로 그를 세웠노라”고 하나님이 혹시 후회하셨는가.
차이와 차별을 혼동하지 마라. 차별을 차이라고 은근슬쩍 미화(美化)하며 구렁이 담 넘듯 시간끌기하지도 말라. 차이는 차이이고 차별은 엄연히 차별이다. 차별이나 차이나 그게 그거라면 요즘 한국교회가 열심히 반대하는 ‘차별금지법’도 차라리 ‘차이금지법’이라고 하지 그러냐. 성경해석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21세기 밝은 세상에서 교묘하게 어설픈 말장난하지 마라. 차이와 차별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차이와 차별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그분이 목숨 바쳐 가르치신 복음의 정신에 그 이름이라도 발 붙일 틈이 없는 ‘차별’은 그 근본부터 아예 틀려먹은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다면, 여성 차별을 1초라도 빨리 멈추라. 그래야 쌍방울 달린 놈들이 진짜로 평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여성 안수의 문을 열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칼빈주의 새끼 유생(儒生)들아,
그냐, 안 그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