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일장
유 인 술
1950~60년대 시골 5일 장 풍경을 추억해 본다. 돌이켜 볼수록 감회가 새롭다.
그 당시에는 나무를 땔감으로 사고파는 행위가 대단히 활발했던 때였다.
깊은 산골에서 손수레도 아닌 지게로 지고 장터로 나와서 나무 장터 한 곳을 점령하다시피하고 장(場)마당을 형성했었다. 솔가리나 장작의 질을 보고 흥정이 이루어지는데 고객은 대개는 읍내 음식점 주인이다. 흥정이 되면 지게로 그 가게까지, 혹은 원하는 장소까지 날라주었다. 집에서 오일장터까지는 무려 5km가 넘었다.
우(牛)시장도 크게 섰다.
대략 수십 마리의 누렁이, 검정, 점박이, 암소, 수소, 황소 등이 우는 소리와 새끼 찾는 어미와 팔려가는 이제 겨우 코 두레를 꿴 송아지의 울음으로 장터가 떠나갈 듯했다. 소들의 소리만이 아니었다. 흥정하는 소 장수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섞여 귀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소 거간꾼(경매인)이 소 등을 내리치면 소가 놀라서 펄쩍 뛴다.
“살집 좋고 잘도 생겼지. 이놈 10만 환에 데려가요!”
소릴 친다. 이때 관심이 있는 매입자가 소 주인과 흥정을 시작하는데 거간꾼은 은근슬쩍 주인 편을 드는 척하지만 결국, 양쪽에서 구전을 먹는 거라 일방적 편들기는 아닌 듯했다.
돼지 장터에도 구경거리가 즐비했다.
다리 넷을 새끼줄로 묶어서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서 모두 옆으로 뉘어놓으면 장터가 떠나갈 지경으로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농사 틈틈이 길러서 내다 파는 것이라 돼지를 키우지 않는 농가가 없었다. 돼지가 지저분하긴 해도 거름 내기에 한몫하는 터라 일석이조(一石二鳥)였다. 자녀들 학자금이 목돈이 들어갈 걸 예상하고 두서너 마리를 키우는 집에서는 먹다 남은 음식물이 남아날 리 없으니 이웃에서 혀 굳은 소리 해서 얻어오기도 했다.
닭을 쳐서 달걀을 팔아 돈을 사기도 했다.
그러니 달걀 한 알 먹기도 어려웠다. 짚으로 엮은 달걀 꾸러미에 다섯 알씩 두 줄로 채워 넣어서 장에 내다 팔았다. 잡다한 일상용품을 사 쓰기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채소는 초여름부터 키워서 새벽에 읍내로 들어가 팔아서 돈을 만들었다.
읍내에 한몫을 잡고 앉아서 아침 준비하러 나온 아낙들한테 팔고 해 뜨기 전에 집에 돌아와 또다시 농사일에 전념하기에 좋은 벌이가 되니 조그만 텃밭이라도 놀릴 틈이 없었다. 제대로 된 밭에는 무랑 배추를 가꿔서 김장철에 한몫을 잡았다.
장터에서 어린 우리들의 관심은 역시 약장수가 벌이는 놀이였다.
앞줄에 앉아서 해가 질 무렵까지 약장수 아저씨의 입담에 넋을 잃고 구경을 했다. 등에 둘러맨 북을 발재간으로 어찌나 장단을 잘 맞추는지 닷새에 한 번 구경하기에 늘 아쉬움이 남았다. 차력도 하고 마술도 하는데 돌덩이 하나를 보자기로 덮어놓고 ‘이놈이 슬슬 춤을 출 때까지 기다리시오, 그러면 이 만병통치약을 모두한테 드릴 거니깐’ 이 말을 믿고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 봤지만 늘 ‘허, 이놈이 오늘도 잠만 자네’하고 싱겁게 끝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우리는 다음 장날에 또 삼삼오오 모여서 돌덩이가 슬슬 걸어 다니기를 기다리곤 했다.
만병통치약은 어르신들이 단골이었다.
“이 약 한 봉지만 잡숴봐. 꾸부러지는 허리에, 콕콕 쑤시는 다리에, 뒤틀리는 배앓이에, 눈이 쓸데없이 부어올 때 한 봉지만 잡숴봐!”
이 말에 너도나도 몇 봉지씩 사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 아프면 치통, 머리 아프면 두통, 아기 낳을 땐 산통”
그러면 우리는 ‘머리 아프면 꼴통!’하고 소릴 치곤 했지만, 약장수 아저씨는 빨간 코를 달고 씩 웃어줄 뿐 나무라거나 언짢아하지 않았다. 과대광고란 걸 아시면서도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라 농산물이나 솔 갈비, 혹은 장작 판 돈으로 약 몇 봉지를 사시곤 했다.
그중에 장사가 제법 잘 되는 곳은 포목점이나 옷가지를 파는 시장이었다.
다양한 모양, 색깔에 현혹되어 자녀들의 옷 사서 입히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요, 보람이신 듯했다.
파장쯤에 들리는 곳은 쇠고기 국밥집이었다.
펄펄 끓는 국물을 밥 한 그릇 담은 밥사발을 데워내어 놓았다. 그것이 ‘토렴’인 줄은 머리가 굵어서야 알게 됐다. 국밥에는 으레 탁주 한 사발을 곁들여야 제격이다. 행복에 겨워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것이 그리워서 지금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쇠고기 국밥을 먹어 봤지만, 그때 그 맛은 영영 찾을 수가 없어서 씁쓸하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가족들이 먹을 반찬거리를 사는데, 새갈치를 짚으로 한 두어 손 묶어서 달랑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게 중에는 얼큰하게 취해서 한 두어 마리가 빠져나가도 모르고 비포장도로를 비틀거리며 걸어갈 때 서산에 걸린 해가 긴 그림자를 만들어 주곤 했다.
중년 남성들은 흰 두루마기에 갓을 썼는데 바지춤이 조금 내려가거나 갓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서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주기도 했다. 중년 여인들은 치마저고리에 깨끗하게 차려입고 동동구루무로 치장했다.
지금은 흑백사진으로 그 모습들이 남아 전해지지만, 그 귀한 풍경들이 못내 그리울 때가 많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절이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넘치니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세태에 흑백사진을 보여 준들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도 내 가슴 한켠에 깊숙이 자리 잡고 숨 쉬고 있다. 그 시절의 환영이라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내 즐거움의 하나이니 이 또한 보물 중의 보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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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속에서 빛나는 家族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