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이름(3) : 엘로힘 / 창 1:26-28
도장 새기는 집에 한 손님이 왔습니다. “도장 하나 새기는데 얼마입니까?” “예, 천원입니다.” “한자나 한글이나 값이 같습니까?” “예, 같습니다.” “이름자가 길건 짧건 값이 같습니까?” “아, 물론이죠”이 말을 듣자 손님이 도장에 새길 이름을 내 놓았다고 합니다. 한 참을 들여다 본 도장집 주인이 묻습니다. “어느 것이 이름입니까?” “그게 다 이름인데요?” “이게 한 사람 이름입니까?” “그렇다니까요?” “아니 선생님, 이런 긴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있습니다. 제 아들입니다.” “선생님, 혹시 저를 놀리시는 것 아닙니까?” “놀리다니요 분명히 제 아들 이름인데요”도장 집 주인이 계속 못 믿는 표정을 보이자 손님은 주민등록등본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도장집 주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원, 세상에 이렇게 긴 이름이 호적에 오르다니.”거기에 적힌 이름은 “밝 차고 나온노미 새미나”였다고 합니다. “복을 차고 나온 것을 남들이 샘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황금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하다’입니다. 18자죠. 그리고 여기에 견줄만한 이름이 있습니다. ‘박하늘별님 구름햇님보다 사랑스러우리’입니다. 17자죠.
이 이름이 나오기 전에는, 이름에 몇 글자가 들어가든 제한이 없었는데, 주민등록증에 다 기록할 수 없다는 불편함이 생겨서, 1993년부터 성을 제외하고, 다섯 글자이내로만 만들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이 바뀌지 않는 한, ‘황금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 하다’라는 이 이름은 최고의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피카소입니다.(2위) 보통 우리가 피카소의 이름을 표기할때는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라고 합니다만, 사실 이것은 그의 이름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만 표기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이름은 ‘파블로-딩고-호세-프란시스코-드파우라-호안-드로스-레메디오스-크리스피노-드라산티스마-트리니나드-루이즈-피카소’입니다. 피카소의 성격과 기질상 그런 이름을 가질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름은 캐럭터 곧 성격이요 기질이요 품성입니다. 참, 이름도 별 이름이 다 있다 싶을 정도로 듣기에 이상한 이름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긴 이름뿐만 아니라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 애를 씁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이름을 잘 짓기 위해 예쁘게 짓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쓸까요? 이름은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자녀에게 지어준 부모는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우리 하나님도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이름과 뜻을 잘 알고 믿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닐까요? 우리의 하나님은 저 높고 높은 곳에 가만히 앉아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찾아오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유한한 우리 인간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찾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절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붙잡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허망한 우상일 것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체험했던 교훈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으로 부지런히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했지만, 결국 그가 붙잡았던 것은 우상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을 아십니다. 무엇보다 죄로 오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우리들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직접 알려주시면서,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을 보다 더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길을 걸어가는 어떤 낯선 사람을 붙잡고 “아저씨, 내 이름이 임남수요”라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웃이나 친구로 사귀고 싶은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에게나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가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는 것은, 우리와의 인격적 관계를 기대하시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다 바르게 알고, 그분을 높여드리며,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9: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여기에 보면, ‘주의 이름을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은 단순히 호칭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름은 그 이름으로 대변되는 존재의 전 인격을 나타낸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곧 한 개인의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존재의 성품과 능력, 인격 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는 자’는 체험적으로, 관계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으로 아는 자들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삶의 현장 속에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의한 자들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에게로 달려가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환난의 때에 피할 요새가 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를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이름을 체험적으로 아는 자들은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거룩한 이름을 힘입어 도움과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 주님을 아는 사람이 주님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위기와 환난의 때에 우리가 달려가 피할 안전한 바위요,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알아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세 번째로 살펴보게 될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의 어근인 ‘엘’이라는 뜻은 ‘강한 자, 능력 있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끝에 ‘im’이라고 해서 영어로 ‘him’을 붙입니다. 그래서 ‘엘로힘’이 됩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엘’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 200회 이상 등장하고, ‘엘로힘’이라는 복수로는 구약성경에 2,500 번이나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에만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무려 31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로 도배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1장부터 10장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모두 ‘엘로힘’입니다. 창세기 1:1절을 아십니까? 이것은 다 외우실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을 다같이 암송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여기에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바꾸어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태초에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렇다면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첫째로,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1절에서 ‘태초에’라는 말은, 시간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출발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천지 창조의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의 기원을 제시하면서, 천지 창조의 주체가 엘로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엘로힘의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가 그냥 ‘엘’이 아니라 ‘엘로힘’이라고 해서 복수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권세 있고 힘있는 뛰어난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엘로아흐’의 복수형입니다. ‘엘’이라는 단어도 ‘God’으로 번역되는데, ‘엘로힘’을 영어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God에 s자를 붙여서 ‘God's’가 됩니다. 그러니까 복수라는 말인데, 여기에 힘(him)을 붙이면 세 개 이상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둘도 안 되고, 세 개 이상의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이것을 가지고,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성경이 고대 중동의 다른 종교들처럼, 다신 숭배사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들의 주장처럼 성경은 정말 다수의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라고 하면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문장 구성에서 주어에 해당되는 ‘엘로힘’에 바로 이어서 사용된 ‘창조하시니라’라는 동사는 분명히 단수 형태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하나님이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복수가 사용되었을까요? 그것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엘로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복수어미라고 해서 다수의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의 인격체 안에서 세 위격이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에 보면,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라는 단어를 쓰셨을까요? 인간 창조에 있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을 창조함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가 되시는 하나님이 일체가 되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히브리어에서는 복수형을 사용할 때 복수를 쓰면, 그것은 아주 대단한 능력과 위엄을 나타내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이라고 하지 않고 ‘물들’, 영어로 ‘water’이라고 하지 않고 ‘water's’라고 쓰면 ‘거대한 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위대한 위엄,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낼 때 복수어미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단수로 쓰지 않고 엘로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매우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지혜의 결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누군가 무엇을 만들게 되면, 거기에는 그 사람의 능력과 개성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림이나 조각품만을 보고서도, 그것을 그리거나 만든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에도, 하나님의 능력이나 신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통해, 당신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하셨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을 보면서 그 자연에 압도당할 때가 있습니다.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기가 막힌 조화와 질서를 발견하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창조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시인 브레이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한 알의 모래를 보고 우주를 생각하고, 한 송이의 꽃을 보고 천국을 생각하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하고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과 짐승과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들 변명의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심판의 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소위 과학의 발달을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현대 과학이 발달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극히 일부분 밖에는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영역은 아직도 건드리지 못한 신비한 영역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창조의 신비를 알면 알수록, 그리고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경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찬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어마어마한 놀라운 만물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을 경배합니까? 그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그분을 찬송합니까? 그가 만물의 창조자, 엘로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엘로힘의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이 우리들에게 계시하고 있는 엘로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번째로,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엘로힘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가운데 절정에서 창조하신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마지막 여섯째 날에 창조하신 순서가 짐승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마지막에 창조의 최고 클라이막스에서, 하나님이 최고의 정성을 들여 창조하신 걸작품이 바로 인간입니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이 자신을 닮은 존재로 지으신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그 신비로움 앞에 경탄해 보았습니까?
유명한 그리스도인 의사 가운데 ‘폴 브랜드’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필립 얀시와 함께 지은 ‘오묘한 육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가 의사로서 처음 현미경으로 살아있는 세포를 관찰했을 때의 충격과 감동을 평생 잊어버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한 세포의 존재, 그 신비를 들여다 본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신비 앞에 놀라서 온 종일토록 경탄과 감격을 말해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것이라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생애 중 누구라도 이 세포의 신비를 설명하는데 성공할 수 있다면, 나는 공중 광고문을 내는 비행기를 전세 내어 하늘 높이 날으며, 내 돈이 바닥 날 때까지 이 하늘의 모든 공간마다 감탄 부호를 계속 그릴 것이다.”그만큼 세포 하나의 존재의 신비를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아홉 달에 걸쳐서 정교한 방법으로 그 기능을 나누는 세포들, 수십억 개의 혈구가 생겨나고, 수백만 개의 간상체와 원추체가 생겨나는데, 단 하나의 수정란 세포에서 십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생성되고, 그리고 마침내 한 생명이 태어난다. 아기다. 인간이다. 도대체 그 무엇으로 이 생명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다만 시편 기자와 더불어 감격하고 감탄하며, 그리고 감사할 따름이다.”
시편 기자가 시편 139:14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솜씨가, 인간의 능력으로 능히 이해할 수 없고,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대하고 놀랍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여러분, 주변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한 번 잘 살펴보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기묘하게 지으셨는지를 말입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을 자세히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해 보기를 바랍니다. “정말 기묘하시네요.”정말로 잘 보세요. 기묘하게 생겼습니다. ‘기묘하심이라’라는 단어를 영어번역본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렵고도 경이롭게 만들어졌습니다.” “wonderfully made.”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의 창조는 정말로 wonderfull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기묘하게 생긴 옆 사람을 보시면서 슈돌(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나오는 건후의 버전으로 이렇게 감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와~”폴 브랜드 박사의 이야기는 주로 인간의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얼마나 더 신비로운 것입니까? 인간의 영혼이야말로 하나님의 인격과 품성이 깃들어 있는 존재의 지성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엘로힘’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가 ‘이르시되’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가 ‘그 종류대로’라는 말입니다. 그 종류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은 말 같이, 소는 소 같이, 개는 개 같이. 하나님께서 그 종류대로, 종자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에게 오면서 달라집니다. 사람은 사람 같이가 아닙니다. 사람만은 하나님 같이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차별화 되는 인간 창조의 독특성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품성을 이어받아 자신을 닮은 존재로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이신 것처럼 우리 인간을 알고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 사랑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가 가능한 존재, 그래서 그 창조성을 가지고 과학과 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는 놀라운 존재로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요, 특별한 기대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드리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엘로힘 하나님의 그 기대를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과 교제를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교제하십니까? 얼마나 자주 교제를 하십니까?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타락의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구원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사도 바울은 우리를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엘로힘의 하나님은 여러분으로부터 경배를 받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경배를 기다리시고, 교제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이 계시하고 있는 엘로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셋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인간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8절“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축복하신 일입니다. 이 대목이 영어 성경에 보면 ‘God blessed them’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셨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서구권에서는 만났을 때 서로 인사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God bless You!”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셨다.”그렇습니다, 엘로힘의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나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으로 자녀를 키워서, 다음 세대에 넘겨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면서 그 축복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땅을 정복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땅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나에게 받은 그 축복으로 네가 걸어다니고 살고 있는 그 땅을 축복되게 하여라!”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그 축복이 흘러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인생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축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회초리로 우리를 때리십니다.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가 아닙니다. 예레미야애가 3: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고생하는 그 백성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고생하는 것은 나도 마음이 아프다. 내가 원해서 너희들을 이렇게 때리겠느냐? 그것은 내 본심이 아니다. 너희들이 고생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내 본심이 아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결코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축복인 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엘로힘의 하나님은 인생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때마다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홍수를 내리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홍수 심판이 지나가자마자 창세기 9: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심판이 끝나자마자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축복하고 싶었어. 이것이 나의 본심이야.”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경배를 받고 싶어 하시는 엘로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축복하고 싶어 하시고, 우리가 그분에게 받은 축복을 우리의 이웃들과 열방을 향해 나누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들에게 주는 실질적인 중요성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엘로힘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분의 이름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자라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누구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 엘로힘입니다. 왜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온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창조물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놀랍고도 경이롭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또는 반대로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인 나 자신을 보면서 멸시하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애굽에서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시니까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출애굽기 4:11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스틴 목사님은 이 책에서 이런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밤중에 밤바다에 배 한 척이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배 한 척이 칠흙 같은 어둠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갑자기 강한 불빛이 앞에 나타납니다. 너무나 놀라서 긴급하게 타전을 했습니다. 선장의 시야에 너무 밝은 불빛이 들어오니까 상대방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방향을 동쪽으로 10도만 트십시오.’그랬더니 상대방으로부터 즉각적인 답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럴 수 없소. 당신이 서쪽으로 10도를 트시오.’ 화가 난 선장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해군 함장이다. 명령이다. 항로를 변경하라. 이곳은 나의 통치 아래 있다.’몇 초 후에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이등 수병입니다. 하지만 방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함장님이 항로를 먼저 바꾸셔야 합니다.’화가 극도로 치민 이 함장은 최후의 통첩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 배는 전투함이다. 앞으로 전진한다.’그러자 아주 퉁명스러운 메시지가 즉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함장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기는 등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사는 줄을 아십니까? 맨날 우리의 남편을 보고 “당신 좀 바꿔!”아니면 아내보고 바꾸라고 합니다. 자기는 돌 바위처럼 전혀 바뀌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배우자가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이 먼저 바꾸라고.”내가 먼저 인생의 항로를 바꾸셔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이 달라집니다. 교회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스타일대로 살기로 인생의 스타일을 바꾸어 보십시오. 항로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비난과 비판과 저주 속에 살아왔던 인생이,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를 받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인생을 살기로 한 번 결단해 보십시오. 그를 예배하며, 그와 더불어 교제하며, 나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축복을 나누며 사는 존재로 결단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의 인생은 엘로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경험하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삶이 지치고 곤고할 때, 견고한 망대이신 엘로힘 하나님께로 달려가십시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둠 속을 방황하며 헤맬 때, 인생의 방향을 바로 잡고 엘로힘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엘로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닮은 존귀한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존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오직 주님을 목적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의 거룩한 나라가 임하도록 기다리며, 경건한 삶을 살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전능하신 엘로힘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내일을 의뢰할 수 있는, 엘로힘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 전능하신 엘로힘의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그 위기를 넘어서서 미래의 축복을 바라보게 하시는, 엘로힘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축복을 나누며, 이웃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