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진 [해금강총석정절경] 1920
비단에 채색 ㅣ 195×880cm ㅣ 창덕궁 희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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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뛰어난 석공의 솜씨일까. 가히 자연의 석공이라 할 만하다. 세찬 해풍에 깎이고 거친 파도에 패인 우람한 돌기둥 무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것이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정교하다. 바로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총석정(叢石亭)의 모습이다. 이 절경을 그린 이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으로 일제 강점기에 들어선 20세기 초 최고의 서화가이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이 작품은 1917년 불에 타 3년 만에 중건에 들어간 창덕궁 희정당(熙政黨)의 응접실 내부를 꾸밀 목적으로 제작된 벽화였다. 그러고 보니, 벽화로서의 장식성을 감안한 듯 당시에는 보다 선명하고 화려했을 채색과 세밀하지만 다소 도식적인 필선이 눈에 띈다. 그러나 화면 중앙에서 약간 왼쪽, 푸른 산 정상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정자(총석정)를 그려 넣은 점과 해변에 부딪히는 흰 포말의 실감나는 표현 등에서 실경을 바탕으로 한 화가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묘사력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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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유학파, 신감각과 신문물 수용
희정당은 본래 침전이었다가 조선 후기부터 왕의 사무실이자 접대실로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궁궐의 주요 공간을 장식할 벽화를 의뢰 받을 정도라면 당시 김규진의 화가로서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20년 6월 24일자 <동아일보>에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이후 조선 최고의 천재 화사로서 김규진과 김응원(金應元) 두 사람에게 각각 일천삼백오십원과 일천오백칠십원의 대금을 주고 희정당, 대조전(大造殿), 경훈각(景熏閣) 세 곳의 벽화를 촉탁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어찌된 일인지 김응원은 벽화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고 김규진과 당시 20대의 신진화가들이었던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 이용우 등이 맡게 되었다. 김규진은 희정당 동벽과 서벽에 두 점의 벽화를 그려 넣었는데, 동벽에는 [해금강총석정절경]이, 서벽에는 흰 운무에 둘러 쌓인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장식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채색화로 표현한 [금강산만물초승경]이 걸렸다.
김규진 [금강산만물초승경] 1920년
비단에 채색, 195×880cm, 창덕궁 희정당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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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규진의 작품 가운데 위의 두 점은 장식 벽화로서 특화된 예이고, 그의 주된 화풍은 흔히 말해 문기(文氣)와 격조가 드러나는 문인화(文人畵)류라 할 수 있다. 김규진은 평안남도의 농가 출신으로 어릴 적 몹시 가난하게 자랐으나 어머니 경주 이씨가 아들을 7세 때부터 외숙이었던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에게 보내 서화를 익히도록 했다. 외숙 밑에서 10년간 재능을 키운 김규진은 1885년 그의 나이 18세 때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명승고적을 탐방하고 서화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연구하며 만 8년을 채우고 1894년 정월에 귀국한 그가 택한 길은 대한제국 관리의 길이었다. 중국에서 만난 민영익의 동생 민영선과의 인연으로 왕실에 소개되어 1896년 8월 궁내부 외사과 주사 판임관 6등의 관직에 임명된 것이다.
김규진, 묵죽도 [쌍폭], 19세기
지본수묵(紙本水墨), 122×30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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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속한 부서는 주로 외교문서 통,번역, 황실 재산 관리, 비서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서화가로서의 자질이 알려져 영친왕의 서화선생까지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김규진 본인이 직접 밝힌 것인데, 과정인즉 다음과 같다. 1907년 8월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고, 영친왕 이은(李垠)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 가면서 김규진 역시 관직을 그만두었고, 이후 놀랍게도 그가 차린 것은 사진관이었다.
그는 1907년 8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천연당(天然堂)사진관’ 광고를 냈고, 이후 지속된 1913년 12월 2일자 <매일신보> 광고에서 “서화미술에 30여 년 공을 쌓았고, 일찍이 8년간 중국에 유학하며…… 벼슬에 종사한 지 10여 년이며, 구한국황실의 서화 수응과 영친왕 서법 교수에 열성이었다. 또 일본에 동경에 가서 사진법을 배우고 천연당사진관을 개업한지 어언 10년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바 있다. 이쯤 되고 보니, 김규진이 그리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대체 언제 사진기술을 익혔으며, 어떤 연유로 사진관을 열게 된 것일까?
천연당사진관과 근대적 화랑 고금서화관
1909년 천연당사진관에서 찍은매천(梅泉) 황현(黃玹)선생
김규진이 사진술을 배운 시기와 정황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학자들에 따라 1906년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기술을 배우고 돌아왔을 것이라는 설, 또는 김규진 본인은 직접 사진술을 배웠다기보다는 일본방문을 통해 사진관 경영에 관한 정보입수와 기자재 구입에만 관여했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보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1907년 7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김규진이 외국에서 배워온 미술사진촬영법으로 어진(御眞) 사진도 여러 차례 촬영했으며, 자기 집 사랑 뒤뜰에 사진관을 세웠다’는 기사를 근거로 아마도 본격적인 사진관 개업이전인 관직 시절에 기자재만을 갖추고 궁궐에서 사진촬영을 행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김규진 본인의 천연당사진관 개업 10년은 이런 계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천연당사진관은 오늘날 소공동에 해당하는 석정동 그의 집 뒤뜰에서 시작해 1908년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음력 정월 1일에는 천명의 손님이 들었을 만큼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부인 사진사(아마도 그의 처 김진애)가 따로 부인 손님들의 촬영을 담당했는데, 이는 내외구별이 엄격한 당시의 세태를 고려한 김규진의 상술이 돋보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1912년에는 평양에 ‘기성(箕城)사진관’이라는 분점을 내고 조카 김영선(金永善)에게 맡기기도 했으며, 1913년에는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이라는 화랑을 석정동 사진관 건물 안에 함께 열고 자신의 서화 작품은 물론 고서화(古書畫)와 다른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위탁 받아 표구부터 진열, 주문, 판매하는 등 최초로 근대적인 화랑 영업방식을 수행했다. 물론 신문지면 광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1915년 고금서화관은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고금서화진열관으로 확대되면서 김규진의 본격적인 영업활동과 서화 제작활동이 이루어졌다. 이 때 제작된 그의 작품들을 보면, 중국 해파(海派) 양식의 영향과 함께 한 화폭에 다양한 길상적 소재들을 혼합해 그리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고객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과감한 구도, 먹색과 필법의 다채로운 운용도 눈에 띈다. 중국 여산폭포의 장광을 떠올리며 그린 [여산비폭]의 풍부한 먹의 번짐과 갈필의 효과라든지, 같은 해 제작된 [유하백마]에서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을 달려가는 말과 버드나무의 휘날리는 가지 등에서 느껴지는 속도감과 생동감이 무척이나 세련된 감성을 보여준다.
한편 고금서화관 개관을 추진할 무렵부터는 천연당사진관 운영이 어려워진 듯하다. 이유는 그가 1909년 6월과 7월에 신문을 통해 호소하고 있듯이, 재료비는 오르는 반면 외상으로 사진을 찍고 갚지 않는 사람들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때 이후부터는 사진관 업무보다 화랑 업무에 더욱 주력한 것으로 보이며, 1915년부터는 서화연구회를 발족해 일본인은 물론, 귀족과 서화지망생들을 대상으로 3년 수업연한에 매달 1원씩의 학비를 받으며 미술교습을 시작했다. 게다가 일일이 가르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학생들을 위해 [서법진결(書法眞訣)], [난죽보(蘭竹譜)], [육체필론(六體筆論)]과 같은 서화 교본 및 이론서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근대의 지극히 상업자본주의적인 교육 체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규진은 작품 가격을 적은 표를 뜻하는 ‘윤단(潤單)’을 만들어 이에 따라 작품 판매 대금을 받은 최초의 서화가였다고 한다. 이는 그가 유학 당시 중국 서화가들의 윤단 체제를 보고 느낀 바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전하는데, 그가 쓴 [해강일기]에는 어떤 글씨와 그림을 팔아 얼마만큼의 ‘윤료’를 받았는지에 대해 간간이 적혀 있다. 서화를 이렇듯 구매자와 판매자의 욕구가 반영된 상품으로 정당하게 취급하고자 한 김규진, 이 범상치 않은 인물의 행적은 과연 무엇을 시사하는가? 자신의 재능을 믿고 떠난 중국 유학, 사진술에 대한 관심과 사진관 및 화랑 운영, 고객의 요구를 반영한 서화 제작과 판매, 그리고 교육 사업, 여기에 신문 광고와 출판과 같은 매체의 적극적인 이용 등. 그는 분명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를 통해 우리는 그 시대와 사회를, 변화를 유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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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보다 가까운 미술사, 소통하는 미술사에 대해 고민하며 집필 및 강의 활동을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