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복을 입은 연필/무라카미 하루키
얼마 전에 좀 볼일이 있어서 어떤 잡지사의 편집자와 만났다. 일이 다 끝난 후 둘이서 술을 마시며 세상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 자연스레 화제가 학용품 얘기로 옮아 갔다. 학용품 얘기는 나도 퍽 좋아하는지라, 볼펜은 어느 게 좋다는 둥, 지우개는 어느 게 최고라는 둥 하는 두서없는 얘기를 술집에 앉아 계속하고 있는데, 그러던 중 상대방이 '그런데 무라카미 씨는 늘 어느 정도 딱딱한 연필을 사용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늘 F심 연필을 사용하니까 '예, F인데요'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그렇습니까. 그런데 F심 연필은, 전 늘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란다.
술자리에서의 일이었으므로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요. 느끼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로 많은 세상입니다'하는 정도로 웃고 있는 사이에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갔는데, 어쩐 일인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얘기만이 점점 마음에 걸렸다.
왜 F심 연필이 하필이면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인지를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생각할수록 영문을 알 수 없어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그리하여 영문도 모르는 채 F심 연필이 어김없이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으로 보여지곤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무척 난감하다. 최근에는 F심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세라복 차림의 여학생을 상기하고 마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체가 한번 어떤 이미지를 창출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이미지가 거꾸로 물체를 규정짓고 만다는 현상일까. 어찌 됐든 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폐를 끼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이 그대로 진행되면 언젠가는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성욕을 자극당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직업상 연필을 사용하는 일이 많은 나로서는 상당히 번거롭게 될 것이다.
차라리 F심 연필을 쓰지 말고 HB심으로 바꿔 볼까하고도 생각했지만, 불미스럽게도 그 시점에서 '만약 F심이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이라면, HB는 학생복을 입은 남자 고등학생이 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건 또 이것대로 영 달갑지가 않다. 나는 원래 세라복이니 학생복이니 하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세라복이란 멀찌감치에서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멋있어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예상 외로 더럽고, 별로 볼품이 있는 옷도 아니다. 학생복이 그 얼마나 더러운가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H심은 어떤가. 이건 또 웬지 폴리스(록 밴드 폴리스입니다)의 멤버인 스팅하고 분위기가 비슷하다. 스팅에 대해서라면 나는 딱히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도 않은데, 감정이 좋고 나쁘고를 차치하고 연필이 스팅과 닮았다는 느낌은 어쩐지 심히 껄끄러운 일이다. 늘 귀 밑에서 '폴리스'의 음악이 쩡쩡 울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H심보다 딱딱한 연필이나 B심보다 부드러운 연필은 작업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으니까, 나에게는 결국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이거나, '학생복을 입은 남고생'이거나, '폴리스의 스팅'이란 세 가지 가능성이랄까, 선택의 여지가 세 가지밖에 없는 셈이다.
어쩌다가 하찮은 연필을 가지고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 빠져 들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원인은 'F심 연필은 웬지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라는 쓸데없는 말을 꺼낸 편집자에게 있다. 거기에서부터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이미지가 퍼져 나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 이 원고의 고칠 부분을 연필이 아닌 볼펜으로 쓸 수밖에 없는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볼펜에 대해서는 최대한 아무런 느낌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볼펜은 그저 단순히 볼펜이다.
그런데 연필이란 제법 귀여운 필기구이다. 요즘은 샤프 펜슬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탓에, 학용품계에서 연필이 차지하는 지위가 얼마간 저하됐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필에는 사람의 - 적어도 나의 - 마음을 끄는 그 무엇이 있다. 단순하다면 실로 단순한 제품이지만, 연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속에 수많은 수수께끼와 예지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최초로 연필을 만든 사람은 꽤나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음이 분명하리라. 나는 치즈를 집어넣은 치쿠와(竹輪)*를 발명한 사람에 대해서 늘 외경심을 훔고 있는데, 치즈를 넣은 치쿠와보다는 연필을 만드는 쪽이 발상으로 보나 기술로 보나 훨씬 더 복잡할 듯하다.
나는 원고를 쓰다가 자잔하게 '고칠' 부분이 생기면 대개 연필을 사용한다. 샤프 펜슬도 편리하니까 곧잘 사용하긴 하지만, 감촉이나 쓰는 맛으로 치자면 아주 평범한 연필 쪽이 작업에 더 적합하다. 아침나절에 한 한 다스 정도 연필을 깍아, 언더록용 잔에다 담아 두었다가는 그걸 차례차례로 써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 얘기는 또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 연필이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의 자태처럼 보이거나 하면 몹시 곤란해지는 것이다.
"이번엔 어디, 널 써 볼까."
"깍, 싫어요. 거짓말이죠!"
라는 둥 혼자서 놀고 있노라면 작업에는 눈꼽만큼도 진전이 없고, 바보 같은 짓이다.
*** 생각하기***
세라복을 입은 연필은 환타지다.
성적 환타지다.
환타지는 공상이거나 불가능한 상상이다.
동의나 공감이 전재하지 않으면 환타지는 불가능하다.
F심 연필과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이 등장하는 환상을 제시한다.
독자들은 하루키가 뚫어놓은 유리벽을 통해
환타지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독자들은 하루키의 세라복을 입은 연필에 발을 두고 서서
자신의 인지 내부를 들여다본다.
세라복을 입은 연필은 환상 영행의 출발점인 셈이다.
문학에서 상상이나 환타지를 완전히 배제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억지다.
세라복이 입은 연필을 통해
수필이 환타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