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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시는 여호와 출애굽기 15장 26절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일곱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1. 여호와이레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이 여호와이레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일생 동안 겪어 보고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라고 정리하여 부른 이름입니다. 여호와이레 - 준비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이레로 역사 하시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위하여 앞에서 준비하고, 나를 믿음으로 행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여호와살롬 사사기 6장 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여호와는 평강이라는 뜻으로 기드온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한 후에 부른 이름입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는 이 세 가지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살롬, 여호와는 평강이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여호와살롬의 역사는 기드온과 같이 열심을 하나님께 보이는 자에게 나타나는 이름입니다. 3. 여호와삼마 에스겔서 48장 35절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라는 의미의 여호와삼마입니다. 이전에는 여호와께서 성전을 버리셨으나 다시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며,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말하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 심령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4. 여호와라파 (RAPHA) 출애굽기 15장 26절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모든 병을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심을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신 이름입니다. 경외하는 자에게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온역을 내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질병을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5. 여호와닛시 출애굽기 17장 15절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나를 항상 인도하심으로 여호와닛시의 승리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6. 여호와찌드게누(DIKAIOO) 예레미야 23장 6절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말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33장 15절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구세주 예수를 보내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편안하게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찌드게누의 하나님이십니다. 7. 여호와라하(RAAH)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하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목자와 같이 양떼를 인도하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상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이름의 별호가 있지만, 오늘은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라파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등산을 자주하면서 산을 종합병원이라고 하는 것은 사소한 질병들은 산에 다니면 다 낫는다는 뜻이고 특히 소나무가 많은 산을 등산하라는 것은 소나무 송 자를 살펴보면 나무 목자에 공자가 붙어 있기에 해석하면 나무 중에서 소나무는 공자이기에 몸에 좋은 입자들을 품어내어 사람이 호흡하면 그 미립자가 우리 몸에 들어가 생기있게 재생시켜 준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등산을 할 때는 소나무가 많은 금정산이 참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라파라는 말을 우리의 의사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하여 여호와라파라는 종합 병원의 간판을 걸고 지금 치료를 하시고 계십니다. 종합 병원에는 갖가지의 온갖 질병을 다 치료하는 과가 있어서 철저한 진단 후에 치료의 수술이나 약물을 투약합니다. 병이 있으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병명을 알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육신의 병자를 치료하는 외과 내과도 있고, 혼의 병을 치료하는 정신과도 여호와라파 병원에는 있습니다. 각가지 치료과가 있어서 어떤 병자이든 이 병원에 오기만 하면 고침 받고 낫습니다. 몽유병자, 탐욕 병자, 앉은뱅이, 문둥병자, 귀먹은 자, 벙어리, 소경, 각종 성인병, 암병 등 모든 人類(인류)의 병을 고칩니다. 현재 약 25,000가지의 질병이 세계에 있고, 그 중에 5,000가지를 의사가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여호와라파 병원은 모든 병을 무료로 치료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이 치료하여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 병을 모두 말하고 모든 병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환자는 먼저 의사에게 자기의 병의 증상을 말하여야 합니다. 의사는 그 말하는 증상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의 진찰이라는 확인을 한 후에 치료를 시작합니다. 이때 바로 낫는 분도 있고, 오랜 시간이 필요로 하는 사람도 병의 증상과 환자의 체질과 경과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경험 많은 의사는 환자를 척 보기만 하여도 대강은 알게 됩니다. 알지만 본인이 말하는 것을 더 참작합니다. 본인이 말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나의 병세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백을 다 들은 후에 치료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는 것은 병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고, 의사에게 내 병세를 말하는 것은 고침을 받기 위하여서이듯, 우리가 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죄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하나님께 나의 죄를 회개 할 때에 하나님은 이 회개를 받으시고, 나를 치료하여 주시고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병이 있으면서도 몰라서 병을 키웠다가 정 견디지 못하여 병원에 갈 때에는 이미 늦은 것으로, 암이 이미 온 몸에 퍼진 후이기 때문에 의사도 어쩌지 못하고 얼마 안 있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 인 줄을 모르고, 세상 쾌락을 즐기며 살다가 죽게 된 다음에야, 하나님 나를 살려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기 암 환자가 되기 전에 나의 죄를 하나님께 해결 받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영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은 먼저 자기에게 치료를 받으러 나오는 자에게 먼저 영을 치료하십니다. 병원에 가면 일단 아무 환자나 무슨 병이건 상관없이 혈압을 재고 체온을 재고 청진을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치료하시는 것은 영입니다. 영을 창조하신 영이신 하나님만이 영을 치료하지 다른 어떠한 이는 영을 치료하지 못합니다. 요한 3서 1장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의 영이 제일 먼저 강건하고 잘 되어야 다름에 따라오는 건강과 물질의 잘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이 잘되려면 영을 안 되게 하고 못되게 하는 일곱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1). 我執(아집) 아담과 하와도 처음에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지만, 아집의 귀신이 들어오자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중심의 생활로 바뀌어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서 먹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사람이 되어야 자기중심의 고집이 없어집니다. 나의 뜻대로 하려 하는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 위하여 아집의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2). 貪心(탐심). 일반적인 욕심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것 등은 정상적인 욕심이지만, 자기 분수 이상의 것을 욕심내는 것을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탐심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으로 자기 분수에 지나치는 욕심을 위하여 정당치 못한 일을 하여 욕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허영과 탐심은 내 마음에서 도려내고 이러한 마귀, 귀신이 가져다주는 탐심의 귀신을 쫓아 버려야 합니다. 한 달에 1,000 딸라를 버는 사람이 10,000 딸라를 버는 사람과 같이 살려고 하는 것은 탐심입니다.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자기 분수를 지나쳐 욕심을 부리는 탐심을 내 영에서 도려내야 합니다. 3). 거짓말. 거짓말은 스스로의 인격을 분열시킵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거짓말을 하게 되면 양심과 거짓의 싸움으로 인격적인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의 응답이 없어지고 거짓말하는 귀신에 사로 잡혀 양심을 무시하며 살다가 결국 마귀에게 양심에 화인 맞아서 거짓을 거짓으로 느끼지 못하는 멸망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의 영에서 거짓말하는 귀신이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쫓아내야 합니다. 4). 미움. 원한과 미움이 있는 사람의 기도는 정상적이 될 수 없습니다. 미움은 파괴력이 있어서 남을 파괴하고, 자기 자신도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미움을 가져다주는 귀신을 나의 영에서 쫓아내어, 미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5). 恐怖心(공포심). 전쟁이나 싸움, 강도, 도적, 깡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일반적인 두려움으로 정상적인 것이지만, 병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캄캄한 밤에 나가기를 싫어하는 두려움, 노이로제, 정신 분열증의 두려움 등은 귀신에게 매인 바가 된 사람의 두려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내 영에서 두려움의 귀신을 쫓아내어 버려야 합니다. 6). 劣等意識(열등의식). 열등의식도 마귀가 가져다 준 것으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가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만드는, 마귀의 도구로 우리를 자기 수하에 묵어 두고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위한 도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으로 믿는 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영등의식을 가져다주는 귀신을 쫓아 버려야 합니다. 7). 罪意識(죄의식). 물론 사람에게 죄 의식은 있어야 합니다. 죄를 짓고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의식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후에도 계속하여 죄의 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악한 귀신들이 죄를 이용하여 자기를 복종케 하려는 수단임을 알고, 우리는 한번 회개하면 다 용서 받았다. 라는 주장을 하여 죄의식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마귀, 귀신을 쫓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라파 병원에 가서 제일 먼저 영을 치료받아, 나를 병들게 만든 모든 악한 마귀, 귀신들을 쫓아내는, 말씀의 검으로 도려내는 수술을 받아 영이 자유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의 영을 건강한 영으로 치료하여 주시는 의사이십니다. 2. 魂(혼)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혼과 영은 확실하게 다름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은 영의 생각이요,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은 혼의 생각이듯, 완전히 영과 혼은 다른 것입니다. 영이 없이도 혼의 생각으로 육신을 지배하면서 잘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혼의 지배를 받으면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육신의 생각대로 살아간 자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 때에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됩니다. 영이 살아서 혼을 지배하고, 육신을 지배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라파의 병원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혼도 치료하여 주십니다. 모든 생각을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혼도, 영도, 몸도 강건하게 여호와라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주님 오실 때까지 강건하게 영혼육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 육신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은 靈魂肉(영혼육)을 치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에 육신이 병든 자가 주 앞에 나오면 그냥 두고 지나가신 일이 한번도 없으시고, 모두 치료하여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시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2/3가 치료하시는 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병든 육신을 여호와라파 병원으로, 믿음으로 치료 받으려고 오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든 병을 다 고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을 치료하고 혼을 치료하시고 다음에 육을 치료하시는 순서가 있습니다. 왜 육신의 질병의 치료를 하려다가 실패를 합니까? 하나님의 치료의 순서를 복종 안하고, 육신부터 치료하려고 하는 고집을 부리니,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치료하시지 않습니다. 잠언 18장 14절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4. 생각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4장 4절 - 7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도 치료를 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면 보험증이 있어야 치료를 시작하듯, 하나님도 먼저 우리를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서류를 확인하시고 그 서류가 있을 때에 치료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서류는 믿음이라는 서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는다는 믿음의 카드를 보여 줄 때에 하나님은 그때부터 치료를 시작하십니다. 부정한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과 생각으로, 슬픈 마음이 기쁜 마음으로,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희망과 소망이 앞에 가득하게 하고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게 하여 주십니다. 인긴 스스로가 노력할 때에는 잠시 동안은 되는 것 같으나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옛 생각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서 성령으로 역사 할 때에야 나의 생각이 바뀌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내가 연필을 잡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려면 그림을 잘못 그려 아까운 종이만 버리게 되지만 그러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내 손을 붙잡고 그림을 그리면 그때는 아주 그럴싸한 그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손을 붙잡고 그림을 그려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것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내가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예수님이, 성령님이 하게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게, 예수님이 하시도록, 성령님이 하시도록 하는 생각을 갖고, 긍정적인 생각,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어 주시는 여호와라파 병원입니다. 5. 행동을 치료하는 여호와 베드로 전서 1장 1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 하나님은 잘 못된 행실을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행실을 치료하시기 위하여 인정사정도 없는 외과 의사로서 치료를 하십니다. 호세아서 6장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실 때에 근본적으로 치료를 하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먼저 찢으시고 악의 근원을 도려 낸 후에, 회개한 연후에야 상처를 싸매어 완전 치료를 하시는 것입니다. 암이 있으면 암 세포를 완전히 도려내는 수술을 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잘못된 행동이 있으면 악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불시험으로 더욱더 큰 연단을 주신 후에 싸매어 주십니다. 시험 당할 때에 더 큰 불시험이 옵니다. 이러 할 때에는 우리를 사랑 하셔서 악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시는 중임을 알고, 감사함으로 참고 견디면 완전한 치료를 하여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6. 기도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기도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를 어떻게 치료하는가 하는 의심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되는 기도를 치료 하셔서 바른 기도를, 하늘에 상달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시도록 기도를 치료하여 주십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나 다른 사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치료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보면 그 기도를 마귀가 가로채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기도하는 목적과는 반대 대는 방향으로 기도하여 기도가 삼천포로 가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성령님을 통하여 올바르게 하나님만을 향하여 기도하게끔 기도를 치료하십니다. 다음은 외식으로 하는 기도를 겸손한 기도, 진실 된 기도로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외식으로 하는 기도를 책망하시면서 바른 기도를 모범을 보여 주시며 기도를 치료하십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감사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의심의 기도를 믿음의 기도를 치료를 하십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기도를 이루어지게끔 응답의 역사가 나타나는 기도로 치료하여 주십니다. 성령으로,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여 감사와 기쁨과 찬송의 기도를 드리면서 능력 있는 기도를 하도록 기도를 치료하여 주십니다. 7. 믿음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병든 믿음, 연약한 믿음, 작은 믿음, 의심 섞인 믿음, 감사치 못하는 믿음, 보고도 못 믿는 믿음, 듣고도 안 듣는 믿음, 등 믿음의 병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이 모든 병든 믿음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보이면 하나님께서 건강하고 좋은 믿음으로 고쳐 주십니다. 욥은 듣는 믿음에서 보는 믿음으로, 환난과 시험을 통과하게 하여 고쳐 주셨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는 순종의 믿음을 갖게끔 믿음의 왕으로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정리 :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나아 와서 나의 병든 모습을 그대로 보이면 하나님은 나를 보시고 나의 병든 것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영의 질병, 혼의 질병, 육신의 질병, 생각의 질병, 간구의 질병, 행동의 질병, 믿음의 질병 등 모든 병을 하나님께서 진찰하시고, 치료하여 주시는 여호와라파의 하나님,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우리가 순서가 바뀐 치료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영이 먼저 치료받고, 혼이 건강하여진 후에 육신의 건강을 주십니다. 육신이 영, 혼보다 먼저 치료를 받으려 하니 문제가 남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치료를 매끼고, 하나님의 방법과 순서대로 나를 치료하여 주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라파의 하나님.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병든 영혼육과 생각과 기도와 믿음과 행동을 치료받고 강건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행복 【히브리서 6장 13-20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간추린 내용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행복의 본질은 모든 인류가 구세주이신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인생의 항해에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갈 길을 앞서 가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주님에 대한 신뢰와 소망이 바로 성도들의 영혼의 닻이다. 이로 인해 우리의 구원도 행복도 소망도 영원할 수 있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또 이 행복을 이웃들과 나누도록 권면한다. 적용 포인트: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며 영원한 행복을 소망하며 살고 있는가? 이런크리스천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과거에 자기와 교제하던 자매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진심으로 결혼을 축복합니다.(요일 4:18)” 요한일서 4장 18절은 이런 내용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진심으로 이제는 아무런 과거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버리고 새롭게 만난 남편과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가정을 만들라는 뜻이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성경구절을 첨부하여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우체국의 실수로 ‘요일 4:18’이 ‘일’자를 뺀 ‘요 4:18’이 되어 결혼 전날 신부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신부가 전문을 받아보니까 “진심으로 결혼을 축복합니다.(요 4:18)”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얼른 성경을 열어 보았습니다.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잘 아시는 대로 이 말씀은 사마리아 땅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면서 행복을 찾았지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행복을 찾아 오늘은 이 남자, 내일은 저 남자에게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참 행복을 이 여인에게 선물할 수 없었습니다. 옛 시의 한 대목처럼 이 여인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이 산 너머에서 저 산 너머로 방황했지만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가련한 여인에게 순간적 쾌락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과연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그 영원한 행복의 정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이 증거하는 영원한 행복의 본질과 확실성, 그리고 그 소망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영원한 행복의 본질에 대한 묵상입니다 본문 13-14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행복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아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히 6:13-14) 본래 이 말씀은 창세기 22장 16-18절에서 인용된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17-18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창 22:17-18) 본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씨가 될 한 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언약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결국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행복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류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구세주이신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없이 행복은 없습니다. 죄책은 마음의 행복을 앗아가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죄 사함을 선물로 얻습니다. 로마서 4장 7절부터 8절에서 바울 사도도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이 행복의 본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불법의 사함을 얻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할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7-8) 그러나 믿는 자의 행복은 단순히 죄를 용서 받음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단순히 그가 용서 받는 행복만을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창세기 12장 2절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여기 마지막 부분에 “복이 될지라”는 말씀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경적 행복관은 자기 혼자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을 복되게 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해지는 복인 것입니다. 이번 이웃 사랑 축제에서 전도하고 이웃들을 위해 중보하면서 우리가 누렸던 행복이 바로 그런 행복이 아니었나요? 우리의 이웃들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는 것을 보고 그들보다 더 행복한 것은 그들을 인도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잊지 마십시다. 영원한 행복의 본질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이웃들을 축복하는 통로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원한 행복의 확실성에 대한 묵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믿을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한 까닭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보장 받기 위해 은행에 저축을 하기도 하고 보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은행을 그리고 그 보험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화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마 어마한 액수의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그 분은 오래 동안 병을 앓아온 심신이 허약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통고하면 그 분이 충격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보험 회사에서는 회의를 거쳐 그 당첨자가 교회에 나가는 분인 것을 알고 교회 목사님에게 충격이 안 되도록 상담하면서 통고 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교인을 만나 조심스럽게 복권을 사신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교인이 ‘예’라고 대답하자, 제가 기도해 드리고 싶은 맘이 생겼다고 말을 꺼낸 다음, “만일, 만일에 그 복권이 당첨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교인은 서슴치 않고 “예,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절반을 목사님께 드리지요”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우리 세태를 풍자한 유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어느 시대에나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구약 전체를 한마다로 요약한다면 “여호와(창조자 하나님)를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신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구속자 하나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언약하신 것을 믿을 수 있는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선행하는 17절에서 그 대답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7)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맹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 그리고 하나님의 맹세의 보증성을 걸고 내가 내 백성들에게 언약한 영원한 행복은 믿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을 맹세할 때 내 권위로는 충분치 않기에 하늘을 걸고 맹세한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걸고 맹세하실까요? 본문이 시작되는 13절 말씀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하실 자가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의 최종적 권위이십니다. 그가 자신의 명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우리의 행복을 보증하십니다. 그러면 된 것이 아닙니까? 그만하면 안심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행복의 확실성-영원하신 하나님이 보증하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원한 행복의 소망에 대한 묵상입니다 인생은 일종의 항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네비게이션인 것입니다. 항해의 성공여부는 과연 파도를 헤치고 포구까지 무사히 승객들을 인도할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 항구에 정박한 배가 파도에 떠밀리지 않고 그 승객들을 지킬 것이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 소망은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견고한 소망이라고 가르칩니다. 본문 19-20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 6:19-20)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 길을 앞서 가신 분이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들의 역할을 감당하고 그 역할을 다른 제사장에게 승계할 수밖에 없었지만 딱 한 사람 구약 창세기에 시작도 끝도 모를 신비한 제사장 멜기세덱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유형의 제사장으로 그의 역할은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신 것입니다. 그분이 인도하시기에 우리는 모두 마침내 구원을 이루고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마침내 이룰 것이며 그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환경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크게 잠시 흔들릴 수도 있고, 우리의 육체가 병들 수도 있고, 육체가 망가지듯 정신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의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보장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한번 구원하신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신실하심과 그의 불변하신 언약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런 성도의 구원의 안전성을 가리켜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의 교리’ 혹은 ‘견인(perseverance)의 교리’라고 불러 왔습니다. 찬송가 작가 가운데 릴리아 모리스(Lelia N. Morris)여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50세부터 시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52세가 되자 완전히 실명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작사하고 작곡하며 믿음의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힘들지 않느냐고, 피곤하지 않느냐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팔이 저를 붙들고 계시는데요.” 여러분, 찬송가 464장을 기억하시나요?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하신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도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이 찬송은 바로 모리스 여사의 간증이었던 것입니다. 포구에 정박한 배가 폭풍이 일어도 흔들리지 않고 정박할 수 있는 것은 저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우리 주님에 대한 신뢰와 소망-그것이 바로 성도들의 영혼의 닻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행복도 영원합니다. 우리의 소망도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지구촌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인도하고자한 우리 VIP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소망의 닻을 내리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이 부분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나머지는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성장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을 사실상 키우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의 양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하신 분들이 믿음의 출발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참으로 의지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그들은 주님의 네비게이션을 따라 위대한 믿음의 항해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내 영혼의 생수
요한복음 4장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 사마리아 여자:예수님은 관계단절의 깊은 고독 속에 있던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오신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마리아 여자의 인생이 변화된다.
2. 인생의 목마름:사마리아 여자의 고독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문제이다.사람은 누구나 영적인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
3. 주님의 초청: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다.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 ● 핵심 메시지: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 인생의 고독과 목마름이 해결된다.● ● ● 청중의 적용 포인트
‘주님을 만난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예전에 10대 청소년들이 열광하던 유행가 중에서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난 연휴기간에 그 노래를 가지고 쓴 수필을 읽었는데 그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파트너가 되고 또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날이 정기 휴일이고…” 이런 내용의 유행가 가사였습니다. 이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어차피 잘못되기 마련이다’ 이게 그 노래에 전체적인 줄거리였습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이라는 말은 ‘왜 나만’이란 의문을 가지고 던지는 내용입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그러고 보니까 이런 질문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때 던지는 질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만히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별 노력 없이도 인생이 술술 풀려가고 순탄하게 되는 것 같은데 나만 어려움이 생기고 인생이 자꾸 꼬여드는 것 같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왜 내게만 이런 일이’라는 이런 푸념 어린 질문이 던져진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만족스럽고 행복스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떠오른 또 다른 유행가가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설교시간에 인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종용이라는 옛날 가수가 불렀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제목의 유행가였습니다. 무슨 목사가 계속 유행가 이야기만 하나 싶으시겠지만 오늘 여기 처음 초대되어 교회에 나오신 분들을 배려하기 위한 접목점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고 배려다 이렇게 받아들여주시면 좋겠습니다. 가사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러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을.” 이렇게 쭉 나가다가 후렴에 가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우~” 이렇게 계속 반복이 되면서 ‘바보처럼 살았다, 바보처럼 살았다’ 이런 내용인데 그 노래에 사연이 있더라고요. 그 당시 가수로서 인기 절정을 누리던 그 이종용이라는 가수가 그 인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대마초에 손을 댑니다. 그래서 구치소로 들어가 무려 5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합니다. 그는 거기서 인생에 전환을 가져다주는 한 사건을 경험합니다. 어느 날 아침 사형집행을 당하는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에 이종용 씨의 손을 붙잡으며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나는 내 죄 값 때문에 이렇게 인생을 끝내지만 당신은 내 몫까지 주님을 위해 살아주셔야 됩니다.” 아마 이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나 봅니다. 그러나 기회가 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당신은 감옥을 떠나게 되니까 내가 다하지 못한 인생까지 살아주기를 바란다는 그 사형수의 한마디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자기 귓가에 크게 들리더라며 회고하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감옥 속에서 인기를 누리며 쫓아다니던 그 과거의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가를 처절하게 깨달았던 그가 출소 이후에 불렀던 곡이 바로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입니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그래도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23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래도 조국을 위하여 흔적 하나 남기는 삶을 살고 싶어서 30세 때 이민 보따리 2개 들고 저 혼자 역이민을 왔었고 지난 십여 년 동안 이 땅에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섬기고 돌봐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주간 문득 지나간 27년의 세월을 이렇게 필름 돌리듯 되돌려 볼 때 할 수만 있다면 그 과거로 되돌아가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그 순간들이 제 인생 군데군데에 생채기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문득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게 우리 대부분의 회한이요 심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종용이라는 가수처럼 큰 대과를 저지른 적은 없다 할지라도 우리 입술에서 ‘난 참 바보처럼 살아온 것 같아’ 이런 독백을 되뇌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게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사마리아 여자
오늘 이런 마음을 담아서 방금 읽었던 이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한 여자 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여자 분은 한마디로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 입술에서 이종용이라는 가수가 허무하게 불렀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이 가사를 되뇌이지 않을 수 없던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는 가정생활에 실패했던 여자였습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결혼을 무려 5번이나 한 부끄러운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데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절대로 정상적인 삶을 사는 여자라고 말할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사는 그런 여인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이 여자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매 만남 매 인연이 있을 때마다 이 남자야말로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백마 탄 왕자 같은 존재이겠거니 그런 어떤 꿈을 가지고 진심으로 대해 주었는데 모든 남자들이 그를 이용하거나, 그를 떠나가거나, 그를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였습니다. 상처를 가졌습니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열어 보여주지 않을 거야’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 허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어서 이번만은 다르겠지 그러면서 수없는 남자들을 만났던 것이 이 여인의 과거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사랑에 목말라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이 여인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관계 단절로 인한 고독감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6절 말미에 보니까 이 여자가 우물을 길으러 갑니다. 요즘처럼 수도가 가정마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시대이니까 필요한 물을 길러 가는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물을 길러 가는 그 시점이 언제였냐 하는 것입니다. 중동지역은 사막지역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공간 정도가 아니라 그 마을 주민들의 커뮤니티의 장소입니다. 그 마을 주민들의 교제의 장이 바로 우물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으러 갔다가 거기서 만나는 이웃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고 교제를 하고 또 여러 가십 거리들을 같이 나누고…요즘으로 말하면 연예인들 이야기를 하고 부부간에 속상했던 일을 같이 나누는 이런 커뮤니티 장이 바로 우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물 뜨러 간 것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선선한 오전이나 저녁시간이 아니라 가장 햇살이 뜨겁게 비치는 한낮 12시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6시가 우리나라로 계산하면 정오 12시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중동 사막 지역에 정오 12시면 햇살이 너무 뜨겁게 내리쬐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사람들이 물 길으러 가지 않습니다. 선선해지기를 기다립니다. 왜 이 여자가 아무도 물을 길으러 가지 않는 그 뜨거운 시간에 커뮤니티 공간인 우물가에 물 뜨러 갔을까요? 왜 그랬겠습니까? 한마디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 북적거리는데 가서 기웃거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어느 집에 누가 사는 것을 다 아는 마을의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합법적인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동거생활하고 있는 이 여자의 부도덕한 삶을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이 여자가 겪어야 하는 이 따가운 눈초리라는 것은 왜 남들이 기르지 않는 한낮에 물을 기를 수밖에 없었는가를 쉽게 설명해줍니다. 이 여자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그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마치 전염병 환자처럼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존재인 것처럼 기피해왔던 사람입니다. 아무도 이 여자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또 찾아가서 자기의 외로움을 하소연 할 데가 한 군데도 없는 고독한 삶을 이 여인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계의 단절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는 경험해보신 분들은 다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고독한 한 여인이 비참한 과거를 가지고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희망 없는 한 여인에게 일대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은 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누구와의 만남인지 아시죠?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이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이 한 여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진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본문에서 한 가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이 낯선 예수님과의 만남, 7절에서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렇게 말문을 열고 예수님과 대화를 하기 시작한 이 사건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져다주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마름
저는 오늘 이 상황이, 우물가에 물 길러 온 그 여자와 살아계신 예수님이 만나게 되는 이 사건이 오늘 이 교회에 초대되어 예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우리들의 상황과 굉장히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사마리아 여자처럼 가정이 붕괴되고 손가락질 받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 여자가 가지고 있었던 깊은 상처인 고독의 문제를 우리 모두가 안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공통된 점을 발견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고독하지 않습니까? 어떤 인생이 고독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로 우리 인간이 얻게 된 가장 큰 슬픔과 아픔이 있었다면 바로 관계 단절로부터 오는 고독이라는 무서운 병입니다(Ⅰ-1).
우리는 인간관계를 가장 힘들어 합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도 더 많은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이 남자를 의지하고 싶어서 결혼했는데 가장 가까운 남편으로부터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받고 허덕이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우리 부부들의 자화상이더라는 것입니다. 이 여자를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받는 상한 마음이 다른 남모르는 사람에게서 얻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크더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 관계의 단절로부터 오는 고독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가 되었습니다. 범죄 한 이후로 아담이 보여주는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 왜 선악과를 따먹었냐고 추궁하시니까 아담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창세기 3장 12절에서 이렇게 변명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 여자 때문에 내가 망했다는 겁니다. 이 여자가 유혹을 해서 내가 무너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하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당신은 내 전부라고 고백했던 아담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몸과 마음이 그의 육신과 영혼이 전적으로 투명하게 벌거벗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온전히 사랑하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런 관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죄악이 자리 잡고 나서 첫 번째 찾아온 것이 인간관계의 단절이었습니다. 불신이 싹텄습니다. 원망이 싹텄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가정이 오늘도 여전히 아담의 범죄 이전에 아담과 하와의 관계처럼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전부를 드러내도 여러분 배우자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순결한 사랑을 지금 부부간에 나누고 계십니까? 모르긴 해도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저를 위시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범죄 한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관계의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한 사람이 정상적인 정서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6명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마음 깊은 이야기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모든 허물과 치부를 마음껏 털어놓고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6명 떠올려 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6명은 고사하고 단 1명의 그런 진실한 만남을 찾기도 어려운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시인해야만 할 것입니다(Ⅰ-2). 이런 점에 있어서 오늘 관계에 단절로 말미암아 그 극심한 고독 속에 아무도 물 길러 오지 않았던 그 뜨거운 사막의 한낮 12시에 남 몰래 물을 길러 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여인의 이 고독의 문제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초청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인생의 깊은 고독의 문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 나는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고 고통 받던 이 여인을 우리 예수님께서 만나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한 가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마 이 여자 분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운이 터진 날이다. 어떻게 마침 예수님이 쉬는 그때 내가 물 길러 갔을까. 내가 오늘 너무너무 잘한 거 같아. 12시에 물 길러 간 건 내 인생에 가장 최상의 선택이었어’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여자의 철저한 착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연히 물 길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초라한 한 여인을 만나시고자 하는 우리 예수님의 철저하게 의도되고 철저하게 계획된 주님의 의도 속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Ⅱ-1). 요한복음 4장 3-4절 보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하여야 하겠는지라”
이 표현 속에는 내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여자를 꼭 만나야 하겠다’라는 어떤 결의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당시 시대를 조금만 알면 금방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 이스라엘은 크게 세 등분 할 수가 있습니다. 남쪽 아래지역이 유다지역이고 가운데가 사마리아 지역이고 그 위쪽이 갈릴리 지역입니다. 성지순례 가보시면 이 위쪽에 있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아래쪽으로 요단강 물줄기가 흐르고 맨 밑바닥에 사해가 있습니다. 사해는 요단강에서 물이 흘러오기만 하고 물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죽은 바다라고 사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가운데 지역인 사마리아 지역은 양쪽 사람들이 다 기피하던 장소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멸망된 이후로 그 당시에 사마리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외지의 이방인들이 그 사마리아 지역으로 유입됐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 외에는 다른 모든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쓰려고 만들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이후로 혼혈 정책으로 그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이방 사람들과의 결혼이 이루어졌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런 이방 사람들과 피가 섞여진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이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입니다. 길을 갈 때 유다지역에서 갈릴리를 갈 때 관통하는 지름길인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 길을 관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더러운 땅을 밟고 싶지 않아서 ㄷ자로 이 요단강을 끼고 길을 왕래하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을 가시면서 내가 사마리아를 관통해야만 되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래야만 됩니까? 거기에 만나야 될 한 여인이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Ⅱ-2). 그 유배지 같았던 땅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셨는데 그것도 언제 지나가셨습니까? 낮 12시입니다. 왜 그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길을 걸으셔야 됐습니까? 그 여자가 그 때에야 물을 뜨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정말 목이 메는 걸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만나고자 했던 그 사람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내가 반드시 그를 만나야 되겠다고 작정하셨던 그 사람이 그 당시 고관대작이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던 그런 인물이 아니라 바로 만나고 싶지 않던 혐오감을 느끼던 기피대상 1호였던 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우연히 찾아왔다 생각하시면 여러분 오산이십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지난 수개월 동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손길이 오늘 고독감을 느끼고 있는 한 영혼에게 스며지게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지난 수개월 동안 눈물로 기도해왔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이 고독한 한 여인을 만나주시기 원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그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그 여자를 그렇게 만나기를 원하셨습니까? 4장 10절과 13-1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생수가 뭘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본질적으로 목마름이 있습니다(Ⅲ-1). 갈증이 있습니다. 구원자를 발견하지 못한 인생에게는 영적인 풀려지지 않는 갈증이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가 있습니다. 다 갖추었는데 열심히 노력해서 누리는 게 많은데, 이제는 허리 펴고 살 거 같은데 뭔가 목마름이 계속됩니다. 낮 동안에는 잘 모르고 잊고 살았는데 어둑어둑해지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어가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스산한 바람이 내 마음을 횡하고 지나갑니다. 여러분 이것을 경험하지 않으십니까? 아무 이유가 없는데, 나는 이종용 같은 실패를 경험한 적도 없었고 나는 이 우물가의 여인처럼 결혼생활에 실패한 적도 없었고 모든 것이 순탄한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목마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목마름일까요? 내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영적인 갈증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님은 설명하십니다. 주님은 이 인생의 목마름을 너무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생수라는 비유를 들어서 오늘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내 내면 속에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그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하다고 주님은 그렇게 비유로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갖추고 아무리 성공한 삶을 산다 하더라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허무와 고독의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통하여 여러분을 이 자리로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인생의 목마름, 그 허한 내면, 그 갈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 영적인 생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Ⅲ-2).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에 있는 본질적인 갈증이 멈추어지게 됩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거 말고 모태신앙이라는 어떤 타이틀 말고 정말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이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새로운 생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밖으로부터 채워지는 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내 내면의 세계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가져다주는 생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외부에서 문제를 찾았습니다. 환경이 달라지면 내가 행복해 질 줄 알았습니다. 수입이 많아지고 소득이 많아지면 내가 행복해 질 줄 알았습니다. 목마름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이 매력 없는 남자가 변화되면 아내가 변화가 되고 내 목마름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변화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달라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달라져야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내면이 변화가 되고 내면에 끊임없는 목마름을 해결하는 생수를 공급받을 때 환경은 달라지지 않고 남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도 그 환경을 대하는 내면이 달라질 때 그 목마름은 그치게 된다고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외부에서 문제를 찾으려는 공허한 몸부림을 그만두는 복된 날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안에 있는 내면이 치료가 될 때 허한 내 내면의 교정이 이루어질 때,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이 공급해주시는 생수를 얻게 될 때 우리의 모든 환경들이 다 달라지게 됩니다. 이미 예수 믿고 예배드리러 나오는 모든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그 은혜는 변함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주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숫자 많이 모이는 걸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생수를 공급받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내면의 변화를 경험하고, 교회 환경이 바뀌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던 그 손가락을 자기에게로 돌리기 시작하는 생수를 공급받는 성도가 많아지는 한국 교회가 될 때에 교회에 갱신이 일어나고 새롭게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캐나다 밴쿠버에 교민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1년에 두세 차례 외국 집회를 가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중에 작은 이유 하나가 고독을 경험하러 가는 것입니다. 외국에 첫발을 내디디면 첫날은 늘 고독합니다. 여기에 온 걸 후회합니다. 거의 매 집회 때 마다 그런 걸 경험합니다. 이번에도 밴쿠버에 도착했는데 생전 처음 밟는 땅입니다. 목사님은 생전 처음 뵙는 분입니다. 메일로 인사 주고받고 그냥 집회 부탁이 와서 그렇게 하겠다고 한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서먹서먹합니다. 공항에 나와 있는 모든 분들이 다 낯선 분들입니다. 첫날 그분들에 의해서 이리저리 배려를 받으며 다닙니다. 저녁식사를 마치면 숙소로 데려다 줍니다. 한 8시쯤 숙소에 들어가면 그 조그마한 호텔방에서 얼마나 고독한지 모릅니다. 호텔 전화는 비싸기 때문에 제가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사용하지 않고 올 전화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곳은 어둑어둑해지면 위험하기 때문에 바깥에 못나갑니다. 긴 시간 동안 그 호텔 방 안에서 얼마나 고독한지 몰라요. 시차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교회의 방향과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좀 좋은 교회를 만들어 드릴까 씨름하면서 거기에 갔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새벽 3시 넘어서까지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내일부터 집회를 하려면 잠을 자둬야 되는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너무 고독합니다. 확 집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제가 왜 외국 집회를 일 년에 두세 번씩 고집하겠습니까? 배가 불러져서 불면의 밤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걸 까마득히 모르는 그런 목사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으로라도 그런 고독한 밤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밤이 얼마나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인가를 짧게라도 경험을 하는 겁니다. 이번 밴쿠버에 호텔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분당우리교회에 많은 성도님들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시차만 극복되면, 3-4일만 지나면 해결되는 불면의 밤을 보내지만 오늘도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오늘일까 내일일까 부도를 맞을 것 같은 위기 속에 한밤을 뜬눈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밴쿠버에서 고독한 밤을 보내면서 너무너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삯꾼이 아닐까. 이 불면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아픔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배부른 목회를 하고 있지 않은가’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벽 3시 넘어 까지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집회를 다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친한 목사님하고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였습니다. 감사용이라는 인물은 실존인물입니다. 프로 야구가 시작이 될 때 1승 15패의 패전 투수 처리용입니다. 정상적인 때는 결코 내보내지 않다가 이 팀이 10대 0, 8대 0 더 이상 이 게임이 소용이 없다고 생각될 때 주전 투수의 팔을 보호하기 위해서 패전 투수 처리용으로 나가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선수가 나올 때는 이미 승패가 끝나고 관중들은 다 떠나기 시작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 영화 중심부에 그 당시 프로야구에서 왕년의 슈퍼스타였던 박철순이라는 걸출한 투수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인이 자처해서 뛰겠다고 간청해서 서게 된 첫 라운드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온 전심을 다해서 공을 던져대기 시작했는데 9회까지 3대 2로 이기고 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온 가족이 눈물 흘리면서 야구를 보고 택시운전을 하는 형은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에서도 동생이 1승을 올릴지 모른다는 기대 가운데 야구가 진행이 되었습니다. 9회 말 이제 한 선수만 잘 이겨내면 평생 1승이라는 소중한 승리를 따내는 그 시점인데 3번 타자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선수에게 홈런을 맞아 역전패를 하게 됩니다. 모든 관중이 다 떠나간 텅 빈 그라운드의 스탠드에 앉아서 이 패전 투수 감사용이라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독백합니다. “나도 우승하고 싶은데. 나도 승리하고 싶은데. 나도 잘하고 싶은데.”
저는 그 눈물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오늘도 힘든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수많은 인생들 가운데 잘하고 싶은데, 우리 가정을 멋지게 이끌고 싶은데, 내 아이 만큼은 최고로 기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가정을 시작했는데 잘 안 되는 겁니다. 이런저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 인생의 목마름을 가지고 신음하는 수많은 성도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분들 얼굴이 제 머리를 스쳐 영화 내내 지나갔기 때문에 전 그 시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인생이더라는 것입니다. 잘하고 싶은데 더 이상 내 입에서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런 초라한 고백은 안하고 싶은 삶을 살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마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인생의 굴레 속에서 목마름을 느끼고 갈증을 느끼고 오늘도 텅 빈 그 라운드에서 쓴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우승하고 싶습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던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 땡볕 한낮에 사막을 걸어가는 고통을 감수하며 그 여인을 만나주셨던 우리 예수님께서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을 위하여 만나주시기 위하여 고통의 십자가라는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성경을 뒤져보다가 목이 메이는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 19:28)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오늘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내가 목마르다’라는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감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그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그 십자가를 거부하고 뛰어 내려가셔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끝가지 고통하며 다 이루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너 인생이 목마르지 않니? 너 인생에 갈증을 느끼지 않니? 모든 것들을 다 추구하고도 다 가지고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깊은 목마름이 있지 않니?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며 대가를 지불했던 나만이 줄 수 있는 생수를 마셔야 돼’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초청에 거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거부하지 않고 그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인 이 여인의 변화를 보십시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28-29)
이 여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서 대인 기피증에 빠져 있어서 가장 햇살이 뜨거운 아무도 사람이 없던 한낮에 물을 길러 갔던 대인 기피증에 빠진 여자가 어떤 변화를 경험합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달려 찾아갑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소리쳐 외치기 시작합니다. 저는 복음의 본질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교회 다닌 걸 예수 믿는다 말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변화입니까? 권태로운 삶에서 사명을 가진 삶으로, 생존을 위한 삶 마지못해 사는 삶, 오늘 아침에도 눈이 떠져 호흡이 연장하니까 사는 삶에서 꿈을 가진 삶, 내가 호흡하는 동안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 가슴 벅찬 감격의 삶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사람들이 누리는 특별한 은혜인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한 가지 촉구를 드리고 싶습니다. 조용히 반주를 들으시면서 한 1-2분 동안만이라도 조용히 눈을 감으시고 지나간 우리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우리 인생 전부를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여기 초청되어 오신 대부분의 분들은 이미 인생의 전반전이 끝나신 분들입니다. 대부분의 분들은 인생의 후반전을 달려가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인생에 마감을 앞두고 있는 12월 중순에 와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 이 시점에서 깊이 생각하며 내 지난 삶, 내 인생의 전반전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런 독백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으십니까? 목마르지 않으세요? 오늘 주님은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더 이상 인생의 짐에 허덕이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해주마” 거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좋은 찬양 한 곡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아침 안개 눈 앞 가리듯>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무얼 말하는지를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해서 들으시면서 ‘하나님 오늘 내 삶 속에 이 우물가의 여인이 경험했던 한 사건을 내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요한복음 14장1-6절/길창원 목사
한 시인(詩人)은 모든 종류의 마지막은 각각의 죽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우리에게 묘한 감상을 줍니다.
여러분들이다녔던 학교 교정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수업을 했던 날을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남자 분은 군대를 가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날을 생각해 보고.
여자 분은 시집가기 전날 친정에서 보낸 마지막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는 사랑하는 이들의 임종을 지키던 그 순간을 연상해 보십시오.
북 유럽의 성자(聖者)라고 일컬어지던 오할레스비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이 아름답도록 기도하십시오.
1. 두 사람의 죽음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인물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1989년 12월 14일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소련의 핵물리학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수소폭탄을 제조했지만, 핵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에서부터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어 핵무기제한 운동과 세계평화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 결과 1975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그 당시 소련의 수준으로는 상당한 재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련에서는 대단한 액수인 15만3천 달러를 암 연구 기관에 증정하고 새로운 삶을
출발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조국 소련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은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매스컴들은 앞을 다투어 그의 일생을 소개했고, 그에게 여러 가지 칭호를 붙여 주었습니다.
도덕의 나침반! 우리 시대의 양심! 진실한 목소리! 진정으로 유일했던 자유인! 러시아의 성자!
그러나 사하로프박사가 죽은 며칠 후 성탄절에 죽은 루마니아의 대통령 니콜라이 차우세스크의
마지막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동유럽의 마지막 공산 독재자로서 6만 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죽게 했던 그는 비밀 재판 끝에 아내 엘레나와 함께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돌연히 시체가 되어서 비참한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비쳐졌던 그의 얼굴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칭 카파르티아 산의 최고의 천재 혹은 ‘하늘의 별‘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성탄절 아침, 내전이 채 끝나지 않았지만 그 도시에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도시마다 기쁨으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침 방송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한 범죄자가 죽었다.“ “적그리스도가 죽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죽음은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삶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음과 영원한 미래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불안과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2. 풍성한 삶
본문은 돌연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곁을 떠나 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예언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고 그들의 정신적인 기둥이었던 주님이 떠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제자들은 깊은 근심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다시 메시지를 시작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4:1)
여기에서 근심이라는 단어는 바람 때문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요동하는 파도를 연상케 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방향 감각과 초점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사는 인생은 길 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을 때, 놀라운 처소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분명한 하나의 처소인 것입니다.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절)
『뉴스위크』 (newsweek)지(紙)에 발표된 통계를 보면 미국인의 80퍼센트가 천국을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수년 전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겨우 30퍼센트 미만이 아마도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천국을 믿는 신앙을 소위 기복 신앙이라고 일축 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식인일수록 그것을 유치한 신앙이라고 쉽게 간주해 버립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이 기복 신앙에 빠져버린 이유는 사실은 천국 신앙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복에만 너무 매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내세를 믿는다면, 주께서 나를 위해서 죽음 저 건너편에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처소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놀랍고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유치한 축복들에 그렇게 매달리며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고도 정의로운 영원 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할 때 현재의 삶은
더 의연하고, 좀더 자유롭고, 더 당당하게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대의 저주는 내일이 없는 삶이라고 합니다.
시집가는 여인이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이 예식장에 선다면, 그 결혼의 자리는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자리입니까? 그곳은 무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졸업하는 학생에게 진학이나 내일에 대한 꿈 이 없다면, 그의 졸업식장은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단테의 『신곡』 신곡(神曲)에 보면, 지옥의 입구에는 일체의 희망을 버리라. 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6.25 사변 때,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한 군목이 참호 사이를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가 한 병사에게 다가갔을 때의 일입니다.
“형제여! 당신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까요?
흑인 병사가 군목을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우리에게 내일이 없다는 것은 최대의 저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영원한 처소를 참으로 확신한다면, 오늘 현재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당당하고 자유로울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진정한 승리는 주께서 나를 위해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셨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영원한 처소에 이르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14:6)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여섯 번째 「나는-이다」(i am)라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말씀의 길이라는 단어 앞에는 본래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유일한 길, 그 길, 하나밖 에 없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당시에 대단히 밝고 환한 큰 길을 말할 때 특별히 사용되었습니다.
길을 묘사하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분명치 않습니다.
오솔길, 골목길, 차도, 대로(大路) 고속도로 같은 것이 있고,
영어에는 path, valley, road, way, street, avenue, highway 등이 있습니다.
하여간 헬라어의 이 길은 아주 크고 밝은 길을 묘사할 때 쓰여 지던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가는 밝은 길, 환한 길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그 죄악의 수렁을 뛰어넘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5.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6.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딤전2:5)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자기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6:2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그분은 우리를 천국에 도달하게 하는 길이십니다. 그분이 없으면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5.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는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가며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도다. 8. 그는 감옥에도 가지 못하고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밝히 드러내리요? 그는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으며 내 백성의 범법으로 인하여 매를 맞았도다. 9. 또 그는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 무덤을 만들었으며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이라.”(사53:4-9)
➤“10.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12.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롬3:10-12)
이런 방황의 인생 여정 속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우리 나그네 인생길에서 예수님이 친히 우리 길의 안내자가 되시고 또 길 자체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전에 제가 「새생활 세미나」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줄곧 류관순 기념관에서 이 세미나 모임을 가졌는데, 어느 해 첫째 날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날은 제가 조금 일찍 나서서, 광화문에서 내려 류관순 기념관까지 걸었습니다. 새생활 세미나 교본을 손에 들고 걸었는데, 어떤 분이 오더니 새생활 세미나에 가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그 사람이 자기는 이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서 왔는데, 류관순 기념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잘 됐군요. 그럼 같이 가시지요』 했습니다.
그 분과 같이 가면서 새생활 세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저는 새생활 세미나에 3년째 계속 참석하고 있습니다.』 했더니 좀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드디어 류관순 기념관에 도착하여 강단으로 가면서 『제가 강사 이동원입니다. 끝나고 나서 또 만납시다.』라고 했더니, 그 분은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영원한 비전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그분이 없는 우리의 삶은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없이는 우리는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 묶인바 되어서 세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길이십니다.
3. 예수님은 또한 진리이십니다.
나는 진리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천국도 진리의 나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마지막 구절에는 천국을 이렇게 묘사 했습니다. ➤“더럽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또 무엇이든지 가증한 것을 이루게 하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일체의 죄악이나 오류가 천국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나라요, 진리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 진리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죄의 문제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31.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그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33. 그들이 그분께 응답하되,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로서 결코 누구에게도 속박된 적이 없거늘 어찌 네가 이르기를,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하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니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항상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요8:32-36)
그리스도로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이다!” 그분이 없는 우리의 삶은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계3:1)
현대인의 권태! 살아도 재미가 없고 그 삶이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삶 속에 진정한 생명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이 생명이라는 단어는 본래 질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생명은 시간 적으로 무한한 영원한 생명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없으면 재물을 모아도, 명예를 쥐고 있어도, 남들보다 무언가를 더 많이 갖춰도, 삶은 끝없는 권태요 허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은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자기 손에 쥐어 봤습니다. 그러나 자기 인생의 석양에 서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포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이러한 우리 인생을 향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다만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함이거니와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또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예수님은 바로 당신에게 이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한 여인이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으며 울었습니다. “저의 삶은 너무 권태롭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습니다.” 테레사는 그 여인에게 이런 충고를 했답니다. 『그래요, 제가 살고 있는 인도에 오시면 진정한 삶을 드리겠습니다. 죽기 전에 제가 있는 곳에 꼭 한번 와 보세요.』 그래서 그 여인은 인도로 갔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죽어가는 사람들, 질병으로 거동도 못하고 앓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거기에서 그 여인은 테레사 수녀와 같이 그들을 돕고 보살폈습니다. 온종일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일에 자기 삶을 쏟다보니 삶의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도에 오시면 삶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여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기쁨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은 몸은 살아 있어도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다만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함이거니와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또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14: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영원한 미래를 향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나를 위해 이 엄청난 희생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과거를 다 청산해 버리고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10:28) 그 영생의 나라! 예수님께서는 그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이다! 우리를 위해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신 그 주님이 바로 그 영원한 처소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 말씀의 메시지는 그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서 도 우리의 길이요, 우리의 진리요, 우리의 생명이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원한 처소에 이르게 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내 삶에서도 그리스도가 여전히 진리요, 나의 생명이심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14:6) 당신은 왜 근심하십니까? 왜 방황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요14:1)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께서 나를 위해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신 것과 예수님이 바로 그 영원한 처소에 이르게 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 것은, 그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서도 내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 주님 주님이 없으면 저는 방황과 어두움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생명을 얻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 풍성한 삶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 양 합니다. 이제 저는 더욱 새로운 하루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저의 길입니다. 주님은 저의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저의 풍성한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제 삶을 주 앞에 온전히 의탁하고 그 길을 걷기 원합니다.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 거하면서 주님의 풍성한 생명을 늘 누리며 살기 원합니다.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시오니 이젠 실망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주께서 저를 위해 준비하신 그 영원한 처소에 이를 때까지 주님은 저의 길, 저의 진리, 저의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나날들을 주님과 함께 힘차게 걷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저의 삶을 다 맡기는 삶이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주일예배 설교,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요한복음 14장 1-6절 설교|작성자 엔젤로테
동굴의 축복
시편 57편 1-2절“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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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난과 아픔의 동굴 인생에는 고난과 아픔의 동굴이 찾아온다. 다윗도 극심한 어려움과 고통의 동굴의 경험을 하였다.
2. 동굴의 교훈 인생은 누구나 동굴을 피할 수 없다. 고난의 동굴 그 자체가 인생을 윤택하게 해주지 않는다.
3.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려면 동굴의 축복의 통로로 만들기 위해 위대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자. 단절의 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자. <핵심 메시지>고난과 아픔의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자.<청중적용 포인트>
‘나는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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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난과 아픔의 동굴
최근에 읽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란 책에는 참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현재 교수인 이 책의 저자는 미국 뉴욕주립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6년 동안 박사학위를 따려고 고생한 끝에
논문이 마무리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 짐을 다 정리하고 논문 초고를 완성해서 딱 트렁크 하나만 가지고 LA에 있는
언니 댁에 놀러갔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공항에 친구가 나왔습니다.
이 친구가 우리 집에 가서 차 한 잔만 하고 가자고 해서 그 친구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친구 딸이 집에 들어오더니 방금 도둑이 트렁크를 열어가지고 짐을 가져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님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절을 해버렸어요.
왜냐하면 그 안에 논문 원본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컴퓨터로 작성한 것도 아니고 전동 타자기로 치다 보니 저장이 된 것도 없었니다.
그러니까 6년 동안 수고한 땀의 결정체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분이 지난 6년 동안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목발을 짚어가면서 도서관에 가서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자리에 앉아
밤을 지새우며 고생을 하면서 만든 논문이었습니다. 그런 논문이 없어져버렸으니 마음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 길로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방문을 잠가버리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은 채 꼬박 사흘 밤낮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무더운 8월이었는데 두꺼운 커튼을 닫고는 넋이 나간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닷새를 보낸 어느 날 그 두꺼운 커튼 사이로 한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분이 닷새 만에 무슨 호기심이 들었는가 하니 사람이 이렇게 닷새를 먹지 않고 씻지도 않고 누워있으면
어떤 몰골이 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답니다. 그래서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유령 같은 자기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을 때 그때 자기 내면 깊숙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이더라는 것입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 해봐야 논문인데. 그래, 살아 있잖아’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그는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 도둑맞은 뒤 자기 수중에 남아있던 전 재산인 20불을
가지고 학교 카페테리아의 스낵 바에서 닭튀김을 먹는데 그분 표현대로 하면 토할 지경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교수님을 찾아갔더니 그 논문 교수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네가 그대로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어. 다시 일어날 줄 알았다”라고 용기를 주면서 기차 안에서
잃어버린 렌즈를 사라고 100불을 주더랍니다.
그렇게 다시 용기를 내서 논문을 다시 시작했는데 딱 1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안 해도 되는 그 수고를 1년이나 더하고 이제 논문이 완성이 됐는데 보통 논문을 완성하면 맨 앞 페이지에 헌사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이분이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내게 생명을 주신 사랑하는 부모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
그리고 내 논문을 훔쳐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인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남의 것을 훔쳐가고 칭찬 듣는 도둑은 이분이 처음일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마무리하셨습니다.
“누군가 실패의 좌절을 안고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둑에게 헌정한 내 논문을 보여주면서
‘인생이 짧다지만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1년은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 라고 말해 주고 싶다.”
여러분, 참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시편 57편을 오늘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다윗 역시도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에 빠져있습니다.
4절을 보니까 “내혼이 사자들 가운데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활 같도다”라고 말합니다.
위협을 맞고 있는 자기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절대 권력자였던 사울 왕이 질투의 화신이 되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으니 얼마나
두려운 상황입니까?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다윗이 동굴로 숨어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동굴이야말로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요 아픔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2. 동굴의 교훈
저는 이 시편 57편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그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교훈을 느낍니다.
첫 번째 교훈은 인생은 누구나 동굴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동굴을 빠져나와있다고 할지라도 언제 다시 동굴로 들어갈 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살다가보면 그 교수님처럼 6년의 진액을 쏟아놓은 논문을 훔쳐가는 도둑을 만날 때가 있고
다윗처럼 아무 이유 없이죽이려고 덤벼드는 권력자를 만날 때가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무슨 문제로 힘이 드시는지 모르지만 이런 일들이 찾아올 때 나만 고통당하는 것 같은
나만 불행한 것 같고 절망적인 것 같고 내 결혼만 불행한 것 같은 일들이 다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에게서 동굴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을 설교시간에 많이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고난이 유익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고난을유익으로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대가 지불과 처절한 몸부림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구원이 수고 없이 공짜로 얻는 것이다 보니 우리에게 그런 심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교수님이 장애를 가지고 목발을 짚고 6년 동안 그렇게 수고하며 쓴 논문을 어떤 도둑놈이 훔쳐갔는데
그 다음에 저절로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인생의 유익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 1년 동안에 끊임없이 좌절하고 끊임없이 일어서려는 각고의 몸부림이 그 교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수님이 헌사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도둑에게 감사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 도둑은 인사를 들을 자격이없습니다.
그런 인사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은 그 논문을 쓴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위대한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이 동굴에서의 절망과 아픔과 상처를 오히려 축복의 통로로 이용했지만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뼈를 깎는 고통과 몸부림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날마다 기도하면서 ‘동굴을 피하게 해주세요, 나는 동굴이 싫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바꿔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려면
저는 미국 집회에 갈 때마다 시차로 인한 불면증으로 어려움을 겪는데 이번에는 유난히 더 심했습니다.
새벽에 2시에 깼다가 옆 사람 깰까봐 몰래 빠져나와서 책상에 앉았다가 한 4시쯤에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또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또 빠져나왔다가 이렇게 몇 번을 들락거리는 것을 며칠이나 반복했습니다.
새벽에 5시까지 잠이 안 오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시차로 인한 한시적인 불면증인데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 수개월을 고통 가운데 마음의 절망 가운데 불면의 밤을 보내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에게는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미국에서 3시면 한국에선 저녁 7시쯤 됩니다.
그러고는 “얼마나 힘드세요 집사님” 하며 기도를 해 드렸는데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님에게 전화 통화 드리는 게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저절로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이제 교회 성도가 많아지다보니 이런저런 어려움에 아픈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그들이 동굴에 갇힌 고통의 과정에서 오히려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대로 거기에 무너지지 않게 해주시기 원합니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 중간 중간에도 한 15분, 20분 쉬는 시간에도
혹은 점심시간에도 이 시편 57편을 프린트해서 얼마나 꺼내서읽었는지 모릅니다.
다윗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다윗을 자랑하려고 가져온 게 아닙니다.
다윗이 동굴을 축복으로 만들 수 있었다면
오늘 주사랑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도
다윗과 같이 그 어려움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게 해달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동굴의 축복>이라고 정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모순된 제목입니다. 동굴과 축복은 조합하기가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분은 이 동굴과 축복이라는 조합되지 않는 단어를
하나로 만들어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님입니다.
여러분 삶 속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동굴이라면
여러분이 겪고 있는 동굴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에 자꾸 옛날 어른들이 부르던 찬양이 생각이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또 옛날 어른들이 자주 부르던 찬양이 떠올랐는데 이 찬양을 아실 것입니다.
373장입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얼마나 좋은 가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인생의 항해 가운데 주님이 순풍 주셔서 순풍에 돛단 듯 편안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피할 수 없는 게 2절입니다.
큰 물결이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풍랑인연하여서더빨리갑니다.
어려서 새벽기도를 가거나 또 금요철야기도회에 가보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셔서
저 찬양을 부르시던 어른들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큰 물결이 일어나 쉬지 못하고 고통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동굴에 갇히고 그 풍랑 때문에 고통하고 낙심하지만
이 풍랑을 인연하여서 더 빠르게 가는 것입니다.
저는 간혹 너무나도 절망적인 일을 당해서 기도 부탁하러 오시는 분들을 만날 때 간혹 이 찬양을 들려드립니다.
할 수 있으면 1절에 머무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만, 순풍의 돛 단 듯 편안한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만
동굴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2절은 반드시 옵니다.
그럴 때 동굴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대가에게 배워야 됩니다.
제가 미국총신대학원에 2과목 들으려고 비행기 타고 가서 비싼 학비를 내며 공부하는 이유는
대가들을 만나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동굴의 갇혀있는 대가 다윗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윗이 동굴에 갇혀 있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우리가 깊이 살펴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바꾸었나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정답이 2절에 있습니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다윗은 동굴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 동굴은 한마디로 고립의 상징입니다.
동굴은 그동안 연결되어있던 세상 모든 것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그래서 동굴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동굴이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은 놀랍게도 그동안 자기가 의지하고 자기가 연결되어 있던 모든 세상과의 단절이 일어나자
그 순간에 하나님과 소통하려고 애씁니다. 하나님과 연결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오늘 믿었던 어떤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마음을 주었던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낙심하고 실패해서 좌절하고 단절이 이루어져서 동굴에 갇힌 듯 한 아픔이 있습니까?
지금은 하나님과 소통할 때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이 연결고리를 이어야 될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이요 지혜입니다.
인생에 담을 만나면 인생에서 동굴에 빠지면 그때는 하나님을 찾아야 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동굴에 갇히는 그 자체가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동굴에 빠질 수도 있고 절망적인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동굴에 갇히는 게 비참한 것이 아니고,
동굴에 갇혔는데 부르짖어 도움을 구할 절대자 하나님이 없는 상황이 비참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동굴에 빠졌어도 비참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동굴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께 손을 내밀 수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2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누구에게 부르짖습니까? ‘지존하신 하나님께’입니다.
다른 번역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
저는제가 극심한여려움을다니면서그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본 것입니다.
새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콘크리트 벽에 갇혀서만 살았는데 내 일을 다내려놓고 나니까
하늘이 보이고 자연이 보였습니다. 하루하루 일과를 다끝나고 나면 허리도 아프고 몸은 파김치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동네 공원으로 찾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그 공원에서 놀라우신 하나님의 불덩어리, 저 하늘에 매달아 놓으신 태양이 지는 그 광경을 보니까
하나님만이 취하실수 있는 그 배색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한번은 그랜드캐니언에 간적이있습니다. 저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압도되는 그 자연 앞에서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데 거기에 위협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누가 그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제일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렵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데 여러분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운 게 뭔지 아십니까?
‘하늘에 별 달기’입니다. 달아놓은 것을 따는 것도 어려운데 그 허공에 별을 달아 놓으신 하나님,
저는 그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압도되는 저를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찬양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습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위대하심을 경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압도하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승복할 수 있습니다.
동굴에 갇혀 있어도 하나님의 크신 생각으로 이것이 내게 유익할 것이라고 승복이 됩니다.
그러면 용기가 생깁니다. ‘인간 중에 가장 강한 왕이라고 하는 사울이 지금 나를 데려가지만
그 사울을 압도하는 하나님이 내게 계시다.’ 우리 마음에 새로운 소망이 생깁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다른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나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 내가 부르짖으니’ 여러분 이 두 조화를 아십니까?
‘가장 높으신 그 하나님’ 그리고 또 하나, 그 하나님이 나와 상관없는 하나님이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가장 높으신 그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주시면서 제일 먼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발상을 뒤집어 놓는 기도였습니다.
어떻게 우주의 주인 되신 그분이 내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분, 시시하지 않은 그분, 내가 거룩히 여겨야 되시는 분이
그러나 멀리계시는 분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다윗이 동굴에서 그렇게 담력을 가지고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었는지 살펴보니
그 비결 중의 하나가 사무엘상 16장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이 악한 사울 왕을 폐위시키시고 새로운 왕을 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막내아들을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사무엘이 왕을 찾으러 선보이는 자리에 막내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이런 표현을 하는데
이 ‘막내’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가 서열적으로 맨 끝이다
이런 뜻도 있지만, ‘보잘것 없다, 초라하다, 자격이 없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아버지도 인정하지 않던 초라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인정하십니까?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삼상 16:12)
아버지도 인정하지 않던 초라한 자기였는데 위대하신 하나님 우주를 지으신 그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해주시고
관계를 맺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얼마나 놀라운 긍지가 되었는지 그 이후로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상대하든지
다윗은 비굴해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 본문을 설명하면서 동굴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다윗이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내가 죽이면 안 된다’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처단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맺고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치를 취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몸은 동굴에 갇혀있지만, 비록 사업은 잘 안되어서 만신창이가 되어있지만,
비록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지만 그러나 내 안에 절대 빼앗기지 않는 긍지 우주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
저 불덩어리를 우주에 달아놓으시는 하나님, 저 별을 우주에다가 만드시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이 긍지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다윗의 다윗 됨이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8편 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그렇게 자연을 노래하고는 그는 다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제가 오늘 이 본문을 왜 다시 끄집어냈습니까?
다윗이라는 사람이 동굴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얘기를 하려고 꺼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위대한 게 아니고 다윗 내면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하나님이요 내 아버지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우리 생각에 담겨지지 않을 만큼 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가 동굴에서 비참하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이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바꿔 주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청년사역을 할 때 가르쳤던 제자들 중에 참 훌륭한 사람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청출어람이라고 이제는 저하고 비교도 안 되는 제자들이 너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미국에 동부의 허듀대학에 갔더니 거기에 내 제자 하나가 교수가 되어 있더라고요.
32세밖에 안된 자매인데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는
미국에서 굉장히 좋은 학교 중에 하나인 허듀대학에서 교수가 되어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제자가 실력이 탁월해서 인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친구가 최근에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그러고는 온 김에 건강검진을 받았더니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방암 3기라는 것입니다.
더 불행한 것은 암덩어리가 너무 커서 수술이 안 된다는 사실과 임파선으로 전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매가 이틀 절망하더라고요. 누가 이 상황에 절망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동굴에 갇혀가지고 이틀 절망하더니 정확하게 이틀 지나고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감사하게도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암 크기가 많이 크고 임파선으로까지 나가있기 때문에 먼저 항암치료부터 받아야합니다.
일단 암 크기를 줄여서 수술시기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심각한 암3기인데 저는 이렇게 감사하네요.
하나님께 다시 기회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회개 많이 하고 이제부터 주님 위해서 살기로 다짐합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치료받고 밥도 많이 먹어서 꼭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저는 월요일에 항암주사 맞으러 병원에 갑니다.
의사선생님 만나러 가는 길에 너무 떨렸는데 로마서 8장으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기쁨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저는 이 메일을 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32세 밖에 안된 자매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세상 경험이 없는 자매인데
누가 이 자매를 그 무서운 암 덩어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로 만들었습니까?
누가 이 고생하지 않은 어린 자매가 암3기,
수술할 수도 없는 그 상황에서 이렇게 노래할 수 있도록 용사로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이 경험도 없는 어린 자매가 이런 담대함으로 동굴에서 노래할 수 있다면 여러분 모두가 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동굴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동굴을 피했다고 안심할 수 없는 것도 인생입니다.
무슨 일로 마음상해 있습니까, 무슨 일로 좌절하고 계십니까?
그 교수님처럼 6년의 수고가 물거품이 된 절망 속에 빠져 아주무더운8월 달에 짙은 커튼을 드리우고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아픈 마음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특히매주투석을받아야만하는아주깊은동굴에같혀있는김경래집사님
저는 오늘 여러분이 김경래집사가하나님을 찾아야 될 때임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과의 접속이 끊어지면 그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계신우리아버지
동굴속에서
아버지하나님을더욱믿고
담대한믿음으로세상을이기고
하나님의영광중에
건강하게하시고
하나님과함께
영광중에하나님과함께찬양하게하옵소서예수님이름으로기도합니다.아멘
예배의 부름 목회기도]
좋으신 하나님!
이 세상에 살지만 믿음 가진 우리게 영원히 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자 되게 하심 감사드립니다.
거룩한 예배의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도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듣습니다.
깨끗게 하심과 회복, 능력과 치료를 구합니다. 성령 충만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부족한 종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은 풍요로워진 것 같은데 먹고 사는 것 때문에 근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질병으로 아픈 이들도 있습니다. 특별히 주사랑교회를 사랑하는 자 치료받고자 할때 저를 온전하게 치료하여 주옵소서
일어나게 하시고, 걷게 하시고, 뛰게 하셔서 감사와 간증이 넘치게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권력을 가진 이들, 저항을 위해 하는 일이라며 환자를 외면하는 의사들 …
이런 상황에서 제때 / 바르게 치료받지 못해 아픈 환자들 … 특별히 수술받아야 하는 성도들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이런 국가적인 어려운 일도 선하게 해결되기를 소원합니다. 모두가 은혜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줄 믿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5장
교독문 제34문 시81편
신앙고백 사도신경
찬송가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기도 정은선 전도사
특송 정은선 전도사
성경봉독 하나님 말씀은 요4:13~14절 김종훈 목사 봉독합니다.
내 영혼의 생수 제목으로 말씀을 듣겠습니다.
내 영혼의 생수
요한복음 4장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설교 한눈에 보기
1. 사마리아 여자 예수님은 관계단절의 깊은 고독 속에 있던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오신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마리아 여자의 인생이 변화된다.
2. 인생의 목마름 사마리아 여자의 고독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문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영적인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
3. 주님의 초청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 ● ● 핵심 메시지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 인생의 고독과 목마름이 해결된다.
● ● ● 청중의 적용 포인트 ‘주님을 만난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예전에 10대 청소년들이 열광하던 유행가 중에서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노래를 가지고 쓴 수필을 읽었는데 그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파트너가 되고 또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날이 정기 휴일이고…” 이런 내용의 유행가 가사였습니다.
이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어차피 잘못되기 마련이다’ 이게 그 노래에 전체적인 줄거리였습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이라는 말은 ‘왜 나만’이란 의문을 가지고 던지는 내용입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그러고 보니까 이런 질문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때
던지는 질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만히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별 노력 없이도 인생이 술술 풀려가고 순탄하게 되는 것 같은데
나만 어려움이 생기고 인생이 자꾸 꼬여드는 것 같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왜 내게만 이런 일이’라는 이런 푸념 어린 질문이 던져진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만족스럽고 행복스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떠오른 또 다른 유행가가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설교시간에 인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종용이라는 옛날 가수가 불렀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제목의 유행가였습니다.
가사를 보면.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러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을.” 이렇게 쭉 나가다가 후렴에 가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우~” 이렇게 계속 반복이 되면서 ‘바보처럼 살았다, 바보처럼 살았다’
이런 내용인데 그 노래에 사연이 있더라고요. 그 당시 가수로서 인기 절정을 누리던 그 이종용이라는 가수가
그 인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대마초에 손을 댑니다. 그래서 구치소로 들어가 무려 5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합니다.
그는 거기서 인생에 전환을 가져다주는 한 사건을 경험합니다.
어느 날 아침 사형집행을 당하는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에 이종용 씨의 손을 붙잡으며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나는 내 죄 값 때문에 이렇게 인생을 끝내지만 당신은 내 몫까지 주님을 위해 살아주셔야 됩니다.”
아마 이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나 봅니다.
그러나 기회가 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당신은 감옥을 떠나게 되니까 내가 다하지 못한 인생까지 살아주기를 바란다는
그 사형수의 한마디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자기 귓가에 크게 들리더라며 회고하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감옥 속에서 인기를 누리며 쫓아다니던 그 과거의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가를
처절하게 깨달았던 그가 출소 이후에 불렀던 곡이 바로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입니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그래도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오늘 이런 마음을 담아서 방금 읽었던 이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한 여자 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여자 분은 한마디로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 입술에서 이종용이라는 가수가 허무하게 불렀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이 가사를 되뇌이지 않을 수 없던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는 가정생활에 실패했던 여자였습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결혼을 무려 5번이나 한 부끄러운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데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절대로 정상적인 삶을 사는 여자라고 말할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사는 그런 여인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이 여자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매 만남 매 인연이 있을 때마다 이 남자야말로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백마 탄 왕자 같은 존재이겠거니
그런 어떤 꿈을 가지고 진심으로 대해 주었는데 모든 남자들이 그를 이용하거나, 그를 떠나가거나,
그를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였습니다.
상처를 가졌습니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열어 보여주지 않을 거야’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 허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어서 이번만은 다르겠지
그러면서 수없는 남자들을 만났던 것이 이 여인의 과거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사랑에 목말라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이 여인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관계 단절로 인한 고독감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6절 말미에 보니까 이 여자가 우물을 길으러 갑니다.
요즘처럼 수도가 가정마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시대이니까 필요한 물을 길러 가는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물을 길러 가는 그 시점이 언제였냐 하는 것입니다. 중동지역은 사막지역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공간 정도가 아니라 그 마을 주민들의 커뮤니티의 장소입니다.
그 마을 주민들의 교제의 장이 로 우물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으러 갔다가 거기서 만나는 이웃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고 교제를 하고
또 여러 가십 거리들을 같이 나누고…요즘으로 말하면 연예인들 이야기를 하고 부부간에 속상했던 일을 같이
나누는 이런 커뮤니티 장이 바로 우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물 뜨러 간 것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선선한 오전이나 저녁시간이 아니라
가장 햇살이 뜨겁게 비치는 한낮 12시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6시가 우리나라로 계산하면 정오 12시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중동 사막 지역에 정오 12시면 햇살이 너무 뜨겁게 내리쬐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사람들이 물 길으러 가지 않습니다. 선선해지기를 기다립니다.
왜 이 여자가 아무도 물을 길으러 가지 않는 그 뜨거운 시간에 커뮤니티 공간인 우물가에 물 뜨러 갔을까요?
왜 그랬겠습니까? 한마디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 북적거리는데 가서 기웃거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어느 집에 누가 사는 것을 다 아는 마을의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합법적인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동거생활하고 있는 이 여자의 부도덕한 삶을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이 여자가 겪어야 하는 이 따가운 눈초리라는 것은 왜 남들이 기르지 않는 한낮에 물을 기를 수밖에
없었는가를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그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배척의 대휴상이었습니다.
마치 전염병 환자처럼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존재인 것처럼 기피해왔던 사람입니다.
아무도 이 여자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또 찾아가서 자기의 외로움을 하소연 할 데가 한 군데도 없는 고독한 삶을
이 여인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계의 단절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는 경험해보신 분들은 다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고독한 한 여인이 비참한 과거를 가지고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희망 없는 한 여인에게
일대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은 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누구와의 만남인지 아시죠?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이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이 한 여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진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본문에서 한 가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이 낯선 예수님과의 만남,
7절에서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렇게 말문을 열고
예수님과 대화를 하기 시작한 이 사건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져다주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마름
저는 오늘 이 상황이, 우물가에 물 길러 온 그 여자와 살아계신 예수님이 만나게 되는 이 사건이
오늘 여러분들이 주사랑교회에 초대되어 예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우리들의 상황과
굉장히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사마리아 여자처럼 가정이 붕괴되고 손가락질 받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 여자가 가지고 있었던 깊은 상처인 고독의 문제를 우리 모두가 안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공통된 점을 발견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고독하지 않습니까?
어떤 인생이 고독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로 우리 인간이 얻게 된 가장 큰 슬픔과 아픔이 있었다면 바로 관계 단절로부터
오는 고독이라는 무서운 병입니다
Ⅰ, 우리는 인간관계를 가장 힘들어 합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도 더 많은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이 남자를 의지하고 싶어서 결혼했는데 가장 가까운 남편으로부터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받고
허덕이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우리 부부들의 자화상이더라는 것입니다.
이 여자를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받는 상한 마음이 다른 남모르는 사람에게서 얻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크더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 관계의 단절로부터 오는 고독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가 되었습니다.
범죄 한 이후로 아담이 보여주는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 왜 선악과를 따먹었냐고 추궁하시니까 아담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창세기 3장 12절에서 이렇게 변명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 여자 때문에 내가 망했다는 겁니다. 이 여자가 유혹을 해서 내가 무너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하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당신은 내 전부라고 고백했던 아담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몸과 마음이 그의 육신과 영혼이 전적으로 투명하게 벌거벗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온전히 사랑하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런 관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죄악이 자리 잡고 나서 첫 번째 찾아온 것이 인간관계의 단절이었습니다.
불신이 싹텄습니다. 원망이 싹텄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가정이 오늘도 여전히 아담의 범죄 이전에 아담과 하와의 관계처럼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전부를 드러내도 여러분 배우자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순결한 사랑을 지금 부부간에 나누고 계십니까?
모르긴 해도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저를 위시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범죄 한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관계의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한 사람이 정상적인 정서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6명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마음 깊은 이야기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모든 허물과 치부를 마음껏 털어놓고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6명 떠올려 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6명은 고사하고 단 1명의 그런 진실한 만남을 찾기도 어려운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시인해야만 할 것입니다(Ⅰ-2).
이런 점에 있어서 오늘 관계에 단절로 말미암아 그 극심한 고독 속에 아무도 물 길러 오지 않았던
그 뜨거운 사막의 한낮 12시에 남 몰래 물을 길러 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여인의 이 고독의 문제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초청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인생의 깊은 고독의 문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 나는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고
고통 받던 이 여인을 우리 예수님께서 만나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한 가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마 이 여자 분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운이 터진 날이다. 어떻게 마침 예수님이 쉬는 그때 내가 물 길러 갔을까.
내가 오늘 너무너무 잘한 거 같아.
12시에 물 길러 간 건 내 인생에 가장 최상의 선택이었어’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여자의 철저한 착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연히 물 길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초라한 한 여인을 만나시고자 하는 우리 예수님의 철저하게 의도되고 철저하게 계획된
주님의 의도 속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Ⅱ-1).
요한복음 4장 3-4절 보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하여야 하겠는지라”
이 표현 속에는 내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여자를 꼭 만나야 하겠다’라는 어떤 결의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당시 시대를 조금만 알면 금방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 이스라엘은 크게 세 등분 할 수가 있습니다.
남쪽 아래지역이 유다지역이고 가운데가 사마리아 지역이고 그 위쪽이 갈릴리 지역입니다.
성지순례 가보시면 이 위쪽에 있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아래쪽으로 요단강 물줄기가 흐르고
맨 밑바닥에 사해가 있습니다.
사해는 요단강에서 물이 흘러오기만 하고 물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죽은 바다라고 사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가운데 지역인 사마리아 지역은 양쪽 사람들이 다 기피하던 장소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멸망된 이후로
그 당시에 사마리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외지의 이방인들이 그 사마리아 지역으로 유입됐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 외에는
다른 모든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쓰려고 만들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이후로 혼혈 정책으로
그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이방 사람들과의 결혼이 이루어졌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런 이방 사람들과 피가 섞여진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이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입니다.
길을 갈 때 유다지역에서 갈릴리를 갈 때 관통하는 지름길인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 길을 관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더러운 땅을 밟고 싶지 않아서 ㄷ자로 이 요단강을 끼고 길을 왕래하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을 가시면서 내가 사마리아를 관통해야만 되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래야만 됩니까? 거기에 만나야 될 한 여인이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Ⅱ-2).
그 유배지 같았던 땅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셨는데 그것도 언제 지나가셨습니까? 낮 12시입니다.
왜 그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길을 걸으셔야 됐습니까? 그 여자가 그 때에야 물을 뜨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정말 목이 메는 걸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만나고자 했던 그 사람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내가 반드시 그를 만나야 되겠다고 작정하셨던
그 사람이 그 당시 고관대작이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던 그런 인물이 아니라
바로 만나고 싶지 않던 혐오감을 느끼던 기피대상 1호였던 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우연히 찾아왔다 생각하시면 여러분 오산이십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지난 수개월 동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손길이 오늘 고독감을 느끼고 있는 한 영혼에게 스며지게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지난 수개월 동안 눈물로 기도해왔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이 고독한 한 여인을 만나주시기 원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그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그 여자를 그렇게 만나기를 원하셨습니까?
4장 10절과 13-1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생수가 뭘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본질적으로 목마름이 있습니다(Ⅲ-1). 갈증이 있습니다.
구원자를 발견하지 못한 인생에게는 영적인 풀려지지 않는 갈증이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가 있습니다.
다 갖추었는데 열심히 노력해서 누리는 게 많은데, 이제는 허리 펴고 살 거 같은데 뭔가 목마름이 계속됩니다.
낮 동안에는 잘 모르고 잊고 살았는데 어둑어둑해지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어가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스산한 바람이 내 마음을 횡하고 지나갑니다. 여러분 이것을 경험하지 않으십니까?
아무 이유가 없는데, 나는 이종용 같은 실패를 경험한 적도 없었고
나는 이 우물가의 여인처럼 결혼생활에 실패한 적도없었고 모든 것이 순탄한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목마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목마름일까요?
내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영적인 갈증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님은 설명하십니다.
주님은 이 인생의 목마름을 너무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생수라는 비유를 들어서 오늘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내 내면 속에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그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하다고 주님은 그렇게 비유로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갖추고 아무리 성공한 삶을 산다 하더라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허무와 고독의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통하여 여러분을 이 자리로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인생의 목마름, 그 허한 내면, 그 갈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
영적인 생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Ⅲ-2).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에 있는 본질적인 갈증이 멈추어지게 됩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거 말고 모태신앙이라는 어떤 타이틀 말고 정말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이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새로운 생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밖으로부터 채워지는 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내 내면의 세계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가져다주는 생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외부에서 문제를 찾았습니다. 환경이 달라지면 내가 행복해 질 줄 알았습니다.
수입이 많아지고 소득이 많아지면 내가 행복해 질 줄 알았습니다. 목마름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이 매력 없는 남자가 변화되면 아내가 변화가 되고 내 목마름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변화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달라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달라져야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내면이 변화가 되고 내면에 끊임없는 목마름을 해결하는 생수를 공급받을 때
환경은 달라지지 않고 남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도 그 환경을 대하는 내면이 달라질 때
그 목마름은 그치게 된다고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외부에서 문제를 찾으려는 공허한 몸부림을 그만두는 복된 날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안에 있는 내면이 치료가 될 때 허한 내 내면의 교정이 이루어질 때,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이 공급해주시는 생수를 얻게 될 때 우리의 모든 환경들이 다 달라지게 됩니다.
이미 예수 믿고 예배드리러 나오는 모든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그 은혜는 변함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주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숫자 많이 모이는 걸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생수를 공급받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내면의 변화를 경험하고,
교회 환경이 바뀌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던
그 손가락을 자기에게로 돌리기 시작하는 생수를 공급받는 성도가 많아지는 한국 교회가 될 때에
교회에 갱신이 일어나고 새롭게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다시 이곳에 오기 전에 미국 동부지역 뉴욕 state지역에 4개월간 교민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가끔씩 외국 집회를 가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중에 작은 이유 하나가 고독을 경험하러 가는 것입니다.
외국에 첫발을 내디디면 첫날은 늘 고독합니다. 여기에 온 걸 후회합니다. 거의 매 집회 때 마다 그런 걸 경험합니다.
이번에도 뉴욕에 도착했는데 생전 처음 밟는 땅입니다.
목사님은 생전 처음 뵙는 분입니다. 메일로 인사 주고받고 그냥 집회 부탁이 와서 그렇게 하겠다고 한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서먹서먹합니다. 공항에 나와 있는 모든 분들이 다 낯선 분들입니다.
첫날 그분들에 의해서 이리저리 배려를 받으며 다닙니다. 저녁식사를 마치면 숙소로 데려다 줍니다.
한 8시쯤 숙소에 들어가면 그 조그마한 호텔방에서 얼마나 고독한지 모릅니다.
호텔 전화는 비싸기 때문에 제가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사용하지 않고 올 전화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곳은 어둑어둑해지면 위험하기 때문에 바깥에 못나갑니다.
긴 시간 동안 그 호텔 방 안에서 얼마나 고독한지 몰라요. 시차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교회의 방향과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좀 좋은 교회를 만들어 드릴까 씨름하면서
거기에 갔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새벽 3시 넘어서까지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내일부터 집회를 하려면 잠을 자둬야 되는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너무 고독합니다.
확 집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제가 왜 가끔씩이지만 외국 집회를 고집하겠습니까?
배가 불러져서 불면의 밤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걸 까마득히 모르는 그런 목사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으로라도 그런 고독한 밤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밤이 얼마나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인가를 짧게라도 경험을 하는 겁니다.
이번 뉴욕에 호텔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 네가 속해있는 교회에 많은 성도님들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시차만 극복되면, 3-4일만 지나면 해결되는 불면의 밤을 보내지만
오늘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오늘일까 내일일까 부도를 맞을 것 같은 위기 속에
한밤을 뜬눈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뉴욕에서 고독한 밤을 보내면서 너무너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삯꾼이 아닐까. 이 불면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아픔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배부른 목회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벽 3시 넘어 까지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집회를 다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친한 목사님하고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였습니다. 감사용이라는 인물은 실존인물입니다.
프로 야구가 시작이 될 때 1승 15패의 패전 투수 처리용입니다.
정상적인 때는 결코 내보내지 않다가 이 팀이 10대 0, 8대 0 더 이상 이 게임이 소용이 없다고 생각될 때
주전 투수의 팔을 보호하기 위해서 패전 투수 처리용으로 나가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선수가 나올 때는 이미 승패가 끝나고 관중들은 다 떠나기 시작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 영화 중심부에 그 당시 프로야구에서 왕년의 슈퍼스타였던 박철순이라는 걸출한 투수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인이 자처해서 뛰겠다고 간청해서 서게 된 첫 라운드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온 전심을 다해서 공을 던져대기 시작했는데 9회까지 3대 2로 이기고 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온 가족이 눈물 흘리면서 야구를 보고 택시운전을 하는 형은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에서도
동생이 1승을 올릴지 모른다는 기대 가운데 야구가 진행이 되었습니다.
9회 말 이제 한 선수만 잘 이겨내면 평생 1승이라는 소중한 승리를 따내는 그 시점인데 3번 타자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선수에게 홈런을 맞아 역전패를 하게 됩니다.
모든 관중이 다 떠나간 텅 빈 그라운드의 스탠드에 앉아서 이 패전 투수 감사용이라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독백합니다. “나도 우승하고 싶은데. 나도 승리하고 싶은데. 나도 잘하고 싶은데.”
저는 그 눈물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오늘도 힘든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수많은 인생들 가운데 잘하고 싶은데, 우리 가정을 멋지게 이끌고 싶은데,
내 아이 만큼은 최고로 기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가정을 시작했는데 잘 안 되는 겁니다.
이런저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 인생의 목마름을 가지고 신음하는 수많은 성도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분들 얼굴이 제 머리를 스쳐 영화 내내 지나갔기 때문에 전 그 시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인생이더라는 것입니다. 잘하고 싶은데 더 이상 내 입에서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런 초라한 고백은 안하고 싶은 삶을 살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마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인생의 굴레 속에서 목마름을 느끼고 갈증을 느끼고
오늘도 텅 빈 그 라운드에서 쓴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우승하고 싶습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던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 땡볕 한낮에 사막을 걸어가는 고통을 감수하며 그 여인을 만나주셨던
우리 예수님께서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을 위하여 만나주시기 위하여 고통의 십자가라는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성경을 뒤져보다가 목이 메이는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 19:28)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오늘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내가 목마르다’라는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감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그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그 십자가를 거부하고 뛰어 내려가셔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끝가지 고통하며 다 이루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너 인생이 목마르지 않니? 너 인생에 갈증을 느끼지 않니?
모든 것들을 다 추구하고도 다 가지고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깊은 목마름이 있지 않니?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며 대가를 지불했던 나만이 줄 수 있는 생수를 마셔야 돼’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초청에 거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거부하지 않고 그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인 이 여인의 변화를 보십시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28-29)
이 여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서 대인 기피증에 빠져 있어서
가장 햇살이 뜨거운 아무도 사람이 없던 한낮에 물을 길러 갔던 대인 기피증에 빠진 여자가 어떤 변화를 경험합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달려 찾아갑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소리쳐 외치기 시작합니다.
저는 복음의 본질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교회 다닌 걸 예수 믿는다 말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변화입니까?
권태로운 삶에서 사명을 가진 삶으로, 생존을 위한 삶 마지못해 사는 삶,
오늘 아침에도 눈이 떠져 호흡이 연장하니까 사는 삶에서
꿈을 가진 삶, 내가 호흡하는 동안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 가슴 벅찬 감격의 삶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사람들이 누리는 특별한 은혜인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한 가지 촉구를 드리고 싶습니다.
조용히 반주를 들으시면서 한 1-2분 동안만이라도 조용히 눈을 감으시고
지나간 우리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우리 인생 전부를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여기 초청되어 오신 대부분의 분들은 이미 인생의 전반전이 끝나신 분들입니다.
대부분의 분들은 인생의 후반전을 달려가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인생에 마감을 앞두고 있는 12월 중순에 와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 이 시점에서 깊이 생각하며 내 지난 삶, 내 인생의 전반전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런 독백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으십니까? 목마르지 않으세요?
오늘 주님은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더 이상 인생의 짐에 허덕이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해주마”
거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내 삶 속에 이 우물가의 여인이 경험했던 한 사건을 내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 이 한 주간 주님을 의지하며 살려 합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버림받은 것 같아도 멸시당하고 천대를 받는 것 같아도
살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내 뜻, 내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259장 예수십자가에 흘린 피로서
봉헌합니다.
헌금을 위한 기도 김종훈 목사
축도
유 레이즈 미 업 (You raise me up!)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내가 쓰러지고 나의 영혼이 지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¹
고난이 찾아오고, 내 마음이 무거워 질 때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그럴 때면, 나는 잠잠해 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조용한 가운데 기다립니다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당신이 찾아와서 잠시 나와 함께 앉아 있어주실 때 까지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은 나를 높이 올려 산꼭대기에 설 수 있게 해줍니다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당신은 나를 높이 올려 폭풍이 부는 바다 위를 걷게 합니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의 어깨 위에 올라설 때 나는 강한 자가 됩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꽃들도 (하나모...)
- 1절 -
ここにいずみはわく 涙をすぎるとき
코코니 이즈미와 와쿠 나미다오 스기루 토키
이곳에 생명샘 솟아나 눈물골짝 지나갈 때에
やがて実を結び 笑い声に満ちる
야가테 미오 무스비 와라이고에니 미치루
머잖아 열매 맺히고 웃음소리 넘쳐나리라
<후렴>
花も雲も風も大海も
하나모 쿠모모 카제모 오오우미모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かなでようかなでよう イエスを
카나데요우 카나데요우 이에스오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空にひびけ 歌え魂よ
소라니 히비케 우타에타마시이요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恵みを恵みを恵みを
메구미오 메구미오 메구미오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 2절 -
あおげ天はひらき 僕らは見るだろう
아오게 텐와 히라키 보쿠라와 미루다로우
그날에 하늘이 열리고 모든 이가 보게 되리라
やがて花は咲き 栄光の主が来られる
야가테 하나와 사키 에이코우노 슈가 코라레루
마침내 꽃들이 피고 영광의 주가 오시리라
<후렴>
花も雲も風も大海も
하나모 쿠모모 카제모 오오우미모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かなでようかなでよう イエスを
카나데요우 카나데요우 이에스오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空にひびけ 歌え魂よ
소라니 히비케 우타에타마시이요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恵みを恵みを恵みを
메구미오 메구미오 메구미오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동굴의 축복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
시편 57편 1-2절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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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눈에 보기>
1. 고난과 아픔의 동굴
인생에는 고난과 아픔의 동굴이 찾아온다.
다윗도 극심한 어려움과 고통의 동굴의 경험을 하였다.
2. 동굴의 교훈
인생은 누구나 동굴을 피할 수 없다.
고난의 동굴 그 자체가 인생을 윤택하게 해주지 않는다.
3.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려면
동굴의 축복의 통로로 만들기 위해 위대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자.
단절의 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자.
<핵심 메시지>
고난과 아픔의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자.
<청중의 적용 포인트>
‘나는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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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난과 아픔의 동굴
최근에 읽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란 책에는 참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현재 교수인 이 책의 저자는 미국 뉴욕주립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6년 동안 박사학위를 따려고 고생한 끝에 논문이 마무리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 짐을 다 정리하고 논문 초고를 완성해서 딱 트렁크 하나만 가지고 LA에 있는 언니 댁에 놀러갔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공항에 친구가 나왔습니다. 이 친구가 우리 집에 가서 차 한 잔만 하고 가자고 해서 그 친구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친구 딸이 집에 들어오더니 방금 도둑이 트렁크를 열어가지고 짐을 가져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님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절을 해버렸어요. 왜냐하면 그 안에 논문 원본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컴퓨터로 작성한 것도 아니고 전동 타자기로 치다 보니 저장이 된 것도 없었니다. 그러니까 6년 동안 수고한 땀의 결정체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분이 지난 6년 동안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목발을 짚어가면서 도서관에 가서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자리에 앉아 밤을 지새우며 고생을 하면서 만든 논문이었습니다. 그런 논문이 없어져버렸으니 마음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 길로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방문을 잠가버리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은 채 꼬박 사흘 밤낮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무더운 8월이었는데 두꺼운 커튼을 닫고는 넋이 나간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닷새를 보낸 어느 날 그 두꺼운 커튼 사이로 한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분이 닷새 만에 무슨 호기심이 들었는가 하니 사람이 이렇게 닷새를 먹지 않고 씻지도 않고 누워있으면 어떤 몰골이 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답니다. 그래서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유령 같은 자기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을 때 그때 자기 내면 깊숙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이더라는 것입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 해봐야 논문인데. 그래, 살아 있잖아’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그는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 도둑맞은 뒤 자기 수중에 남아있던 전 재산인 20불을 가지고 학교 카페테리아의 스낵 바에서 닭튀김을 먹는데 그분 표현대로 하면 토할 지경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교수님을 찾아갔더니 그 논문 교수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네가 그대로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어. 다시 일어날 줄 알았다”라고 용기를 주면서 기차 안에서 잃어버린 렌즈를 사라고 100불을 주더랍니다.
그렇게 다시 용기를 내서 논문을 다시 시작했는데 딱 1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안 해도 되는 그 수고를 1년이나 더하고 이제 논문이 완성이 됐는데 보통 논문을 완성하면 맨 앞 페이지에 헌사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이분이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내게 생명을 주신 사랑하는 부모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 그리고 내 논문을 훔쳐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인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남의 것을 훔쳐가고 칭찬 듣는 도둑은 이분이 처음일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마무리하셨습니다. “누군가 실패의 좌절을 안고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둑에게 헌정한 내 논문을 보여주면서 ‘인생이 짧다지만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1년은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 라고 말해 주고 싶다.”
여러분, 참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시편 57편을 오늘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다윗 역시도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에 빠져있습니다. 4절을 보니까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활 같도다”라고 말합니다.
위협을 맞고 있는 자기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절대 권력자였던 사울 왕이 질투의 화신이 되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으니 얼마나 두려운 상황입니까?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다윗이 동굴로 숨어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동굴이야말로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요 아픔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2. 동굴의 교훈
저는 이 시편 57편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그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교훈을 느낍니다.
첫 번째 교훈은 인생은 누구나 동굴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동굴을 빠져나와있다고 할지라도 언제 다시 동굴로 들어갈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살다가보면 그 교수님처럼 6년의 진액을 쏟아놓은 논문을 훔쳐가는 도둑을 만날 때가 있고 다윗처럼 아무 이유 없이 죽이려고 덤벼드는 권력자를 만날 때가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무슨 문제로 힘이 드시는지 모르지만 이런 일들이 찾아올 때 나만 고통당하는 것 같은 나만 불행한 것 같고 절망적인 것 같고 내 결혼만 불행한 것 같은 일들이 다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에게서 동굴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얻는 교훈은 고통의 동굴 그 자체가 저절로 우리를 윤택한 인생으로 이끌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통 그 자체가 자동적으로 우리 인생에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을 설교시간에 많이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고난이 유익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고난을 유익으로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대가 지불과 처절한 몸부림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구원이 수고 없이 공짜로 얻는 것이다 보니 우리에게 그런 심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교수님이 장애를 가지고 목발을 짚고 6년 동안 그렇게 수고하며 쓴 논문을 어떤 도둑놈이 훔쳐갔는데 그 다음에 저절로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인생의 유익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 1년 동안에 끊임없이 좌절하고 끊임없이 일어서려는 각고의 몸부림이 그 교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수님이 헌사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도둑에게 감사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 도둑은 인사를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인사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은 그 논문을 쓴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위대한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이 동굴에서의 절망과 아픔과 상처를 오히려 축복의 통로로 이용했지만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뼈를 깎는 고통과 몸부림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날마다 기도하면서 ‘동굴을 피하게 해주세요, 나는 동굴이 싫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바꿔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려면
저는 한국을 떠나 있던 지난 3주 동안에 담임목사님들이 다 가지는 마음이겠습니다만 얼마나 애틋한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미국 집회에 갈 때마다 시차로 인한 불면증으로 어려움을 겪는데 이번에는 유난히 더 심했습니다. 새벽에 2시에 깼다가 옆 사람 깰까봐 몰래 빠져나와서 책상에 앉았다가 한 4시쯤에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또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또 빠져나왔다가 이렇게 몇 번을 들락거리는 것을 며칠이나 반복했습니다. 새벽에 5시까지 잠이 안 오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시차로 인한 한시적인 불면증인데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 수개월을 고통 가운데 마음의 절망 가운데 불면의 밤을 보내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에게는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미국에서 3시면 한국에선 저녁 7시쯤 됩니다. 그러고는 “얼마나 힘드세요 집사님” 하며 기도를 해 드렸는데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님에게 전화 통화 드리는 게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저절로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이제 교회 성도가 많아지다보니 이런저런 어려움에 아픈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그들이 동굴에 갇힌 고통의 과정에서 오히려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대로 거기에 무너지지 않게 해주시기 원합니다.’
수업 시간 중간 중간에도 한 15분, 20분 쉬는 시간에도 혹은 점심시간에도 이 시편 57편을 프린트해서 얼마나 꺼내서 읽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 본문을 왜 읽었을까요? 그리고 지난번에 했던 이 설교를 왜 또 가지고 나왔을까요? 다윗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다윗을 자랑하려고 가져온 게 아닙니다. 다윗이 동굴을 축복으로 만들 수 있었다면 오늘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도 다윗과 같이 그 어려움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게 해달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동굴의 축복>이라고 정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모순된 제목입니다. 동굴과 축복은 조합하기가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분은 이 동굴과 축복이라는 조합되지 않는 단어를 하나로 만들어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님입니다. 여러분 삶 속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동굴이라면 여러분이 겪고 있는 동굴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에 자꾸 옛날 어른들이 부르던 찬양을 소개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또 옛날 어른들이 자주 부르던 찬양이 떠올랐는데 이 찬양을 아실 것입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얼마나 좋은 가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인생의 항해 가운데 주님이 순풍 주셔서 순풍에 돛단 듯 편안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피할 수 없는 게 2절입니다.
큰 물결이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어려서 새벽기도를 가거나 또 금요철야기도회에 가보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셔서 저 찬양을 부르시던 어른들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큰 물결이 일어나 쉬지 못하고 고통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동굴에 갇히고 그 풍랑 때문에 고통하고 낙심하지만 이 풍랑을 인연하여서 더 빠르게 가는 것입니다. 저는 간혹 너무나도 절망적인 일을 당해서 기도 부탁하러 오시는 분들을 만날 때 간혹 이 찬양을 들려드립니다. 할 수 있으면 1절에 머무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만, 순풍의 돛 단 듯 편안한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만 동굴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2절은 반드시 옵니다. 그럴 때 동굴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대가에게 배워야 됩니다. 제가 퓰러신학교에 2과목 들으려고 비행기 타고 가서 비싼 학비를 내며 공부하는 이유는 대가들을 만나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동굴의 갇혀있는 대가 다윗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윗이 동굴에 갇혀 있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우리가 깊이 살펴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바꾸었나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정답이 2절에 있습니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다윗은 동굴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 동굴은 한마디로 고립의 상징입니다. 동굴은 그동안 연결되어있던 세상 모든 것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그래서 동굴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동굴이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은 놀랍게도 그동안 자기가 의지하고 자기가 연결되어 있던 모든 세상과의 단절이 일어나자 그 순간에 하나님과 소통하려고 애씁니다. 하나님과 연결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오늘 믿었던 어떤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마음을 주었던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낙심하고 실패해서 좌절하고 단절이 이루어져서 동굴에 갇힌 듯 한 아픔이 있습니까? 지금은 하나님과 소통할 때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이 연결고리를 이어야 될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이요 지혜입니다. 인생에 담을 만나면 인생에서 동굴에 빠지면 그때는 하나님을 찾아야 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동굴에 갇히는 그 자체가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동굴에 빠질 수도 있고 절망적인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동굴에 갇히는 게 비참한 것이 아니고, 동굴에 갇혔는데 부르짖어 도움을 구할 절대자 하나님이 없는 상황이 비참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동굴에 빠졌어도 비참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동굴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께 손을 내밀 수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2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누구에게 부르짖습니까? ‘지존하신 하나님께’입니다. 다른 번역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
저는 이번 안식년 동안 참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난 한 학기 동안에 신학교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인정받는 학자 밑에서 공부하는 영광을 누렸고 함께 점심을 나누며 대화를 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영적으로 탁월한 지도자를 만나면서 제 자신이 초라하게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던 그런 만남들이었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부흥하는 교회를 탐방하는 기회를 누렸고 곳곳에서 숨겨진 신실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기쁘고 감사했지만, 제가 안식년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지난 한 학기동안 자연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본 것입니다. 목회가 바쁠 때는 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단풍이 언제 폈는지도 언제 졌는지도 모르고 콘크리트 벽에 갇혀서만 살았는데 사역을 잠시 내려놓고 나니까 하늘이 보이고 자연이 보였습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하고 나면 허리도 아프고 몸은 파김치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동네 공원으로 찾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그 공원에서 놀라우신 하나님의 불덩어리, 저 하늘에 매달아 놓으신 태양이 지는 그 광경을 보니까 하나님만이 취하실수 있는 그 배색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한번은 가족과 함께 그랜드캐니언에 갔습니다. 저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압도되는 그 자연 앞에서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데 거기에 위협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누가 그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제일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렵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데 여러분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운 게 뭔지 아십니까? ‘하늘에 별 달기’입니다. 달아놓은 것을 따는 것도 어려운데 그 허공에 별을 달아 놓으신 하나님, 저는 안식년 기간 동안에 그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압도되는 저를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찬양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습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위대하심을 경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압도하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승복할 수 있습니다.
동굴에 갇혀 있어도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순 없지만 하나님의 크신 생각으로 이것이 내게 유익할 것이라고 승복이 됩니다. 그리고 용기가 생깁니다. ‘인간 중에 가장 강한 왕이라고 하는 사울이 지금 나를 데려가지만 그 사울을 압도하는 하나님이 내게 계시다.’ 우리 마음에 새로운 소망이 생깁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다른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나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 내가 부르짖으니’ 여러분 이 두 조화를 아십니까?
‘가장 높으신 그 하나님’ 그리고 또 하나, 그 하나님이 나와 상관없는 하나님이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가장 높으신 그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주시면서 제일 먼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발상을 뒤집어 놓는 기도였습니다. 어떻게 우주의 주인 되신 그분이 내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분, 시시하지 않은 그분, 내가 거룩히 여겨야 되시는 분이 그러나 멀리계시는 분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다윗이 동굴에서 그렇게 담력을 가지고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만들었는지 살펴보니 그 비결 중의 하나가 사무엘상 16장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이 악한 사울 왕을 폐위시키시고 새로운 왕을 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막내아들을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사무엘이 왕을 찾으러 선보이는 자리에 막내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이런 표현을 하는데 이 ‘막내’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가 서열적으로 맨 끝이다 이런 뜻도 있지만, ‘보잘것 없다, 초라하다, 자격이 없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아버지도 인정하지 않던 초라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인정하십니까?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삼상 16:12)
아버지도 인정하지 않던 초라한 자기였는데 위대하신 하나님 우주를 지으신 그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해주시고 관계를 맺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얼마나 놀라운 긍지가 되었는지 그 이후로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상대하든지 다윗은 비굴해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 본문을 설명하면서 동굴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다윗이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내가 죽이면 안 된다’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처단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맺고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치를 취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몸은 동굴에 갇혀있지만, 비록 사업은 잘 안되어서 만신창이가 되어있지만, 비록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지만 그러나 내 안에 절대 빼앗기지 않는 긍지 우주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 저 불덩어리를 우주에 달아놓으시는 하나님, 저 별을 우주에다가 만드시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이 긍지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다윗의 다윗 됨이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8편 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그렇게 자연을 노래하고는 그는 다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제가 오늘 이 본문을 왜 다시 끄집어냈습니까? 다윗이라는 사람이 동굴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얘기를 하려고 꺼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위대한 게 아니고 다윗 내면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하나님이요 내 아버지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우리 생각에 담겨지지 않을 만큼 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가 동굴에서 비참하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이 동굴을 축복의 통로로 바꿔 주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청소년사역을 할 때 가르쳤던 제자들 중에 참 훌륭한 사람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청출어람이라고 이제는 저하고 비교도 안 되는 제자들이 너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동부의 허듀대학에 들어갔더니 거기에 내 제자 하나가 교수가 되어 있더라고요. 32세밖에 안된 자매인데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는 미국에서 굉장히 좋은 학교 중에 하나인 허듀대학에서 교수가 되어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제자가 실력이 탁월해서 인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친구가 최근에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그러고는 온 김에 건강검진을 받았더니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방암 3기라는 것입니다. 더 불행한 것은 암덩어리가 너무 커서 수술이 안 된다는 사실과 임파선으로 전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매가 이틀 절망하더라고요. 누가 이 상황에 절망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동굴에 갇혀가지고 이틀 절망하더니 정확하게 이틀 지나고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감사하게도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암 크기가 많이 크고 임파선으로까지 나가있기 때문에 먼저 항암치료부터 받아야합니다. 일단 암 크기를 줄여서 수술시기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심각한 암3기인데 저는 이렇게 감사하네요. 하나님께 다시 기회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회개 많이 하고 이제부터 주님 위해서 살기로 다짐합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치료받고 밥도 많이 먹어서 꼭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저는 월요일에 항암주사 맞으러 병원에 갑니다. 의사선생님 만나러 가는 길에 너무 떨렸는데 로마서 8장으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기쁨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저는 이 메일을 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32세 밖에 안된 자매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세상 경험이 없는 자매인데 누가 이 자매를 그 무서운 암 덩어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로 만들었습니까? 누가 이 고생하지 않은 어린 자매가 암3기, 수술할 수도 없는 그 상황에서 이렇게 노래할 수 있도록 용사로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이 경험도 없는 어린 자매가 이런 담대함으로 동굴에서 노래할 수 있다면 여러분 모두가 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동굴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동굴을 피했다고 안심할 수 없는 것도 인생입니다. 무슨 일로 마음상해 있습니까, 무슨 일로 좌절하고 계십니까? 그 교수님처럼 6년의 수고가 물거품이 된 절망 속에 빠져 8월 달에 짙은 커튼을 드리우고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아픈 마음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저는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아야 될 때임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과의 접속이 끊어지면 그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의 생수
요한복음 4장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설교 한눈에 보기
1. 사마리아 여자 예수님은 관계단절의 깊은 고독 속에 있던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오신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마리아 여자의 인생이 변화된다.
2. 인생의 목마름 사마리아 여자의 고독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문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영적인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
3. 주님의 초청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 ● ● 핵심 메시지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 인생의 고독과 목마름이 해결된다.
● ● ● 청중의 적용 포인트 ‘주님을 만난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예전에 10대 청소년들이 열광하던 유행가 중에서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노래를 가지고 쓴 수필을 읽었는데 그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파트너가 되고 또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날이 정기 휴일이고…” 이런 내용의 유행가 가사였습니다.
이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어차피 잘못되기 마련이다’ 이게 그 노래에 전체적인 줄거리였습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이라는 말은 ‘왜 나만’이란 의문을 가지고 던지는 내용입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그러고 보니까 이런 질문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때
던지는 질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만히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별 노력 없이도 인생이 술술 풀려가고 순탄하게 되는 것 같은데
나만 어려움이 생기고 인생이 자꾸 꼬여드는 것 같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왜 내게만 이런 일이’라는 이런 푸념 어린 질문이 던져진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만족스럽고 행복스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떠오른 또 다른 유행가가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설교시간에 인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종용이라는 옛날 가수가 불렀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제목의 유행가였습니다.
가사를 보면.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러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을.” 이렇게 쭉 나가다가 후렴에 가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우~” 이렇게 계속 반복이 되면서 ‘바보처럼 살았다, 바보처럼 살았다’
이런 내용인데 그 노래에 사연이 있더라고요. 그 당시 가수로서 인기 절정을 누리던 그 이종용이라는 가수가
그 인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대마초에 손을 댑니다. 그래서 구치소로 들어가 무려 5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합니다.
그는 거기서 인생에 전환을 가져다주는 한 사건을 경험합니다.
어느 날 아침 사형집행을 당하는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에 이종용 씨의 손을 붙잡으며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나는 내 죄 값 때문에 이렇게 인생을 끝내지만 당신은 내 몫까지 주님을 위해 살아주셔야 됩니다.”
아마 이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나 봅니다.
그러나 기회가 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당신은 감옥을 떠나게 되니까 내가 다하지 못한 인생까지 살아주기를 바란다는
그 사형수의 한마디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자기 귓가에 크게 들리더라며 회고하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감옥 속에서 인기를 누리며 쫓아다니던 그 과거의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가를
처절하게 깨달았던 그가 출소 이후에 불렀던 곡이 바로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입니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그래도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오늘 이런 마음을 담아서 방금 읽었던 이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한 여자 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여자 분은 한마디로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 입술에서 이종용이라는 가수가 허무하게 불렀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이 가사를 되뇌이지 않을 수 없던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는 가정생활에 실패했던 여자였습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결혼을 무려 5번이나 한 부끄러운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데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절대로 정상적인 삶을 사는 여자라고 말할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사는 그런 여인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이 여자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매 만남 매 인연이 있을 때마다 이 남자야말로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백마 탄 왕자 같은 존재이겠거니
그런 어떤 꿈을 가지고 진심으로 대해 주었는데 모든 남자들이 그를 이용하거나, 그를 떠나가거나,
그를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였습니다.
상처를 가졌습니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열어 보여주지 않을 거야’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 허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어서 이번만은 다르겠지
그러면서 수없는 남자들을 만났던 것이 이 여인의 과거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사랑에 목말라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이 여인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관계 단절로 인한 고독감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6절 말미에 보니까 이 여자가 우물을 길으러 갑니다.
요즘처럼 수도가 가정마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시대이니까 필요한 물을 길러 가는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물을 길러 가는 그 시점이 언제였냐 하는 것입니다. 중동지역은 사막지역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공간 정도가 아니라 그 마을 주민들의 커뮤니티의 장소입니다.
그 마을 주민들의 교제의 장이 로 우물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으러 갔다가 거기서 만나는 이웃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고 교제를 하고
또 여러 가십 거리들을 같이 나누고…요즘으로 말하면 연예인들 이야기를 하고 부부간에 속상했던 일을 같이
나누는 이런 커뮤니티 장이 바로 우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물 뜨러 간 것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선선한 오전이나 저녁시간이 아니라
가장 햇살이 뜨겁게 비치는 한낮 12시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6시가 우리나라로 계산하면 정오 12시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중동 사막 지역에 정오 12시면 햇살이 너무 뜨겁게 내리쬐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사람들이 물 길으러 가지 않습니다. 선선해지기를 기다립니다.
왜 이 여자가 아무도 물을 길으러 가지 않는 그 뜨거운 시간에 커뮤니티 공간인 우물가에 물 뜨러 갔을까요?
왜 그랬겠습니까? 한마디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 북적거리는데 가서 기웃거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어느 집에 누가 사는 것을 다 아는 마을의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합법적인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동거생활하고 있는 이 여자의 부도덕한 삶을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이 여자가 겪어야 하는 이 따가운 눈초리라는 것은 왜 남들이 기르지 않는 한낮에 물을 기를 수밖에
없었는가를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그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배척의 대휴상이었습니다.
마치 전염병 환자처럼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존재인 것처럼 기피해왔던 사람입니다.
아무도 이 여자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또 찾아가서 자기의 외로움을 하소연 할 데가 한 군데도 없는 고독한 삶을
이 여인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계의 단절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는 경험해보신 분들은 다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고독한 한 여인이 비참한 과거를 가지고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희망 없는 한 여인에게
일대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은 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누구와의 만남인지 아시죠?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이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이 한 여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진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본문에서 한 가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이 낯선 예수님과의 만남,
7절에서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렇게 말문을 열고
예수님과 대화를 하기 시작한 이 사건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져다주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마름
저는 오늘 이 상황이, 우물가에 물 길러 온 그 여자와 살아계신 예수님이 만나게 되는 이 사건이
오늘 여러분들이 주사랑교회에 초대되어 예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우리들의 상황과
굉장히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사마리아 여자처럼 가정이 붕괴되고 손가락질 받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 여자가 가지고 있었던 깊은 상처인 고독의 문제를 우리 모두가 안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공통된 점을 발견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고독하지 않습니까?
어떤 인생이 고독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로 우리 인간이 얻게 된 가장 큰 슬픔과 아픔이 있었다면 바로 관계 단절로부터
오는 고독이라는 무서운 병입니다
Ⅰ, 우리는 인간관계를 가장 힘들어 합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도 더 많은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이 남자를 의지하고 싶어서 결혼했는데 가장 가까운 남편으로부터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받고
허덕이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우리 부부들의 자화상이더라는 것입니다.
이 여자를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받는 상한 마음이 다른 남모르는 사람에게서 얻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크더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 관계의 단절로부터 오는 고독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가 되었습니다.
범죄 한 이후로 아담이 보여주는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 왜 선악과를 따먹었냐고 추궁하시니까 아담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창세기 3장 12절에서 이렇게 변명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 여자 때문에 내가 망했다는 겁니다. 이 여자가 유혹을 해서 내가 무너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하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당신은 내 전부라고 고백했던 아담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몸과 마음이 그의 육신과 영혼이 전적으로 투명하게 벌거벗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온전히 사랑하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런 관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죄악이 자리 잡고 나서 첫 번째 찾아온 것이 인간관계의 단절이었습니다.
불신이 싹텄습니다. 원망이 싹텄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가정이 오늘도 여전히 아담의 범죄 이전에 아담과 하와의 관계처럼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전부를 드러내도 여러분 배우자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순결한 사랑을 지금 부부간에 나누고 계십니까?
모르긴 해도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저를 위시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범죄 한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관계의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한 사람이 정상적인 정서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6명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마음 깊은 이야기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모든 허물과 치부를 마음껏 털어놓고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6명 떠올려 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6명은 고사하고 단 1명의 그런 진실한 만남을 찾기도 어려운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시인해야만 할 것입니다(Ⅰ-2).
이런 점에 있어서 오늘 관계에 단절로 말미암아 그 극심한 고독 속에 아무도 물 길러 오지 않았던
그 뜨거운 사막의 한낮 12시에 남 몰래 물을 길러 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여인의 이 고독의 문제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초청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인생의 깊은 고독의 문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 나는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고
고통 받던 이 여인을 우리 예수님께서 만나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한 가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마 이 여자 분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운이 터진 날이다. 어떻게 마침 예수님이 쉬는 그때 내가 물 길러 갔을까.
내가 오늘 너무너무 잘한 거 같아.
12시에 물 길러 간 건 내 인생에 가장 최상의 선택이었어’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여자의 철저한 착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연히 물 길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초라한 한 여인을 만나시고자 하는 우리 예수님의 철저하게 의도되고 철저하게 계획된
주님의 의도 속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Ⅱ-1).
요한복음 4장 3-4절 보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하여야 하겠는지라”
이 표현 속에는 내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여자를 꼭 만나야 하겠다’라는 어떤 결의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당시 시대를 조금만 알면 금방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 이스라엘은 크게 세 등분 할 수가 있습니다.
남쪽 아래지역이 유다지역이고 가운데가 사마리아 지역이고 그 위쪽이 갈릴리 지역입니다.
성지순례 가보시면 이 위쪽에 있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아래쪽으로 요단강 물줄기가 흐르고
맨 밑바닥에 사해가 있습니다.
사해는 요단강에서 물이 흘러오기만 하고 물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죽은 바다라고 사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가운데 지역인 사마리아 지역은 양쪽 사람들이 다 기피하던 장소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멸망된 이후로
그 당시에 사마리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외지의 이방인들이 그 사마리아 지역으로 유입됐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 외에는
다른 모든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쓰려고 만들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이후로 혼혈 정책으로
그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이방 사람들과의 결혼이 이루어졌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런 이방 사람들과 피가 섞여진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이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입니다.
길을 갈 때 유다지역에서 갈릴리를 갈 때 관통하는 지름길인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 길을 관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더러운 땅을 밟고 싶지 않아서 ㄷ자로 이 요단강을 끼고 길을 왕래하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을 가시면서 내가 사마리아를 관통해야만 되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래야만 됩니까? 거기에 만나야 될 한 여인이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Ⅱ-2).
그 유배지 같았던 땅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셨는데 그것도 언제 지나가셨습니까? 낮 12시입니다.
왜 그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길을 걸으셔야 됐습니까? 그 여자가 그 때에야 물을 뜨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정말 목이 메는 걸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만나고자 했던 그 사람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내가 반드시 그를 만나야 되겠다고 작정하셨던
그 사람이 그 당시 고관대작이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던 그런 인물이 아니라
바로 만나고 싶지 않던 혐오감을 느끼던 기피대상 1호였던 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우연히 찾아왔다 생각하시면 여러분 오산이십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지난 수개월 동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손길이 오늘 고독감을 느끼고 있는 한 영혼에게 스며지게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지난 수개월 동안 눈물로 기도해왔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이 고독한 한 여인을 만나주시기 원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그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그 여자를 그렇게 만나기를 원하셨습니까?
4장 10절과 13-1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생수가 뭘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본질적으로 목마름이 있습니다(Ⅲ-1). 갈증이 있습니다.
구원자를 발견하지 못한 인생에게는 영적인 풀려지지 않는 갈증이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가 있습니다.
다 갖추었는데 열심히 노력해서 누리는 게 많은데, 이제는 허리 펴고 살 거 같은데 뭔가 목마름이 계속됩니다.
낮 동안에는 잘 모르고 잊고 살았는데 어둑어둑해지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어가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스산한 바람이 내 마음을 횡하고 지나갑니다. 여러분 이것을 경험하지 않으십니까?
아무 이유가 없는데, 나는 이종용 같은 실패를 경험한 적도 없었고
나는 이 우물가의 여인처럼 결혼생활에 실패한 적도없었고 모든 것이 순탄한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목마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목마름일까요?
내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영적인 갈증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님은 설명하십니다.
주님은 이 인생의 목마름을 너무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생수라는 비유를 들어서 오늘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내 내면 속에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그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하다고 주님은 그렇게 비유로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갖추고 아무리 성공한 삶을 산다 하더라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허무와 고독의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통하여 여러분을 이 자리로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인생의 목마름, 그 허한 내면, 그 갈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
영적인 생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Ⅲ-2).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에 있는 본질적인 갈증이 멈추어지게 됩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거 말고 모태신앙이라는 어떤 타이틀 말고 정말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이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새로운 생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밖으로부터 채워지는 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내 내면의 세계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가져다주는 생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외부에서 문제를 찾았습니다. 환경이 달라지면 내가 행복해 질 줄 알았습니다.
수입이 많아지고 소득이 많아지면 내가 행복해 질 줄 알았습니다. 목마름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이 매력 없는 남자가 변화되면 아내가 변화가 되고 내 목마름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변화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달라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달라져야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내면이 변화가 되고 내면에 끊임없는 목마름을 해결하는 생수를 공급받을 때
환경은 달라지지 않고 남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도 그 환경을 대하는 내면이 달라질 때
그 목마름은 그치게 된다고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외부에서 문제를 찾으려는 공허한 몸부림을 그만두는 복된 날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안에 있는 내면이 치료가 될 때 허한 내 내면의 교정이 이루어질 때,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이 공급해주시는 생수를 얻게 될 때 우리의 모든 환경들이 다 달라지게 됩니다.
이미 예수 믿고 예배드리러 나오는 모든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그 은혜는 변함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주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숫자 많이 모이는 걸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생수를 공급받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내면의 변화를 경험하고,
교회 환경이 바뀌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던
그 손가락을 자기에게로 돌리기 시작하는 생수를 공급받는 성도가 많아지는 한국 교회가 될 때에
교회에 갱신이 일어나고 새롭게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다시 이곳에 오기 전에 미국 동부지역 뉴욕 state지역에 4개월간 교민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가끔씩 외국 집회를 가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중에 작은 이유 하나가 고독을 경험하러 가는 것입니다.
외국에 첫발을 내디디면 첫날은 늘 고독합니다. 여기에 온 걸 후회합니다. 거의 매 집회 때 마다 그런 걸 경험합니다.
이번에도 뉴욕에 도착했는데 생전 처음 밟는 땅입니다.
목사님은 생전 처음 뵙는 분입니다. 메일로 인사 주고받고 그냥 집회 부탁이 와서 그렇게 하겠다고 한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서먹서먹합니다. 공항에 나와 있는 모든 분들이 다 낯선 분들입니다.
첫날 그분들에 의해서 이리저리 배려를 받으며 다닙니다. 저녁식사를 마치면 숙소로 데려다 줍니다.
한 8시쯤 숙소에 들어가면 그 조그마한 호텔방에서 얼마나 고독한지 모릅니다.
호텔 전화는 비싸기 때문에 제가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사용하지 않고 올 전화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곳은 어둑어둑해지면 위험하기 때문에 바깥에 못나갑니다.
긴 시간 동안 그 호텔 방 안에서 얼마나 고독한지 몰라요. 시차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교회의 방향과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좀 좋은 교회를 만들어 드릴까 씨름하면서
거기에 갔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새벽 3시 넘어서까지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내일부터 집회를 하려면 잠을 자둬야 되는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너무 고독합니다.
확 집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제가 왜 가끔씩이지만 외국 집회를 고집하겠습니까?
배가 불러져서 불면의 밤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걸 까마득히 모르는 그런 목사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으로라도 그런 고독한 밤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밤이 얼마나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인가를 짧게라도 경험을 하는 겁니다.
이번 뉴욕에 호텔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 네가 속해있는 교회에 많은 성도님들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시차만 극복되면, 3-4일만 지나면 해결되는 불면의 밤을 보내지만
오늘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오늘일까 내일일까 부도를 맞을 것 같은 위기 속에
한밤을 뜬눈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뉴욕에서 고독한 밤을 보내면서 너무너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삯꾼이 아닐까. 이 불면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아픔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배부른 목회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벽 3시 넘어 까지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집회를 다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친한 목사님하고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였습니다. 감사용이라는 인물은 실존인물입니다.
프로 야구가 시작이 될 때 1승 15패의 패전 투수 처리용입니다.
정상적인 때는 결코 내보내지 않다가 이 팀이 10대 0, 8대 0 더 이상 이 게임이 소용이 없다고 생각될 때
주전 투수의 팔을 보호하기 위해서 패전 투수 처리용으로 나가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선수가 나올 때는 이미 승패가 끝나고 관중들은 다 떠나기 시작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 영화 중심부에 그 당시 프로야구에서 왕년의 슈퍼스타였던 박철순이라는 걸출한 투수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인이 자처해서 뛰겠다고 간청해서 서게 된 첫 라운드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온 전심을 다해서 공을 던져대기 시작했는데 9회까지 3대 2로 이기고 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온 가족이 눈물 흘리면서 야구를 보고 택시운전을 하는 형은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에서도
동생이 1승을 올릴지 모른다는 기대 가운데 야구가 진행이 되었습니다.
9회 말 이제 한 선수만 잘 이겨내면 평생 1승이라는 소중한 승리를 따내는 그 시점인데 3번 타자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선수에게 홈런을 맞아 역전패를 하게 됩니다.
모든 관중이 다 떠나간 텅 빈 그라운드의 스탠드에 앉아서 이 패전 투수 감사용이라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독백합니다. “나도 우승하고 싶은데. 나도 승리하고 싶은데. 나도 잘하고 싶은데.”
저는 그 눈물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오늘도 힘든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수많은 인생들 가운데 잘하고 싶은데, 우리 가정을 멋지게 이끌고 싶은데,
내 아이 만큼은 최고로 기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가정을 시작했는데 잘 안 되는 겁니다.
이런저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 인생의 목마름을 가지고 신음하는 수많은 성도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분들 얼굴이 제 머리를 스쳐 영화 내내 지나갔기 때문에 전 그 시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인생이더라는 것입니다. 잘하고 싶은데 더 이상 내 입에서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런 초라한 고백은 안하고 싶은 삶을 살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마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인생의 굴레 속에서 목마름을 느끼고 갈증을 느끼고
오늘도 텅 빈 그 라운드에서 쓴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우승하고 싶습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던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 땡볕 한낮에 사막을 걸어가는 고통을 감수하며 그 여인을 만나주셨던
우리 예수님께서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을 위하여 만나주시기 위하여 고통의 십자가라는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성경을 뒤져보다가 목이 메이는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 19:28)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오늘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내가 목마르다’라는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감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그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그 십자가를 거부하고 뛰어 내려가셔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끝가지 고통하며 다 이루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너 인생이 목마르지 않니? 너 인생에 갈증을 느끼지 않니?
모든 것들을 다 추구하고도 다 가지고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깊은 목마름이 있지 않니?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며 대가를 지불했던 나만이 줄 수 있는 생수를 마셔야 돼’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초청에 거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거부하지 않고 그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인 이 여인의 변화를 보십시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28-29)
이 여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서 대인 기피증에 빠져 있어서
가장 햇살이 뜨거운 아무도 사람이 없던 한낮에 물을 길러 갔던 대인 기피증에 빠진 여자가 어떤 변화를 경험합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달려 찾아갑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소리쳐 외치기 시작합니다.
저는 복음의 본질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교회 다닌 걸 예수 믿는다 말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변화입니까?
권태로운 삶에서 사명을 가진 삶으로, 생존을 위한 삶 마지못해 사는 삶,
오늘 아침에도 눈이 떠져 호흡이 연장하니까 사는 삶에서
꿈을 가진 삶, 내가 호흡하는 동안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 가슴 벅찬 감격의 삶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사람들이 누리는 특별한 은혜인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한 가지 촉구를 드리고 싶습니다.
조용히 반주를 들으시면서 한 1-2분 동안만이라도 조용히 눈을 감으시고
지나간 우리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우리 인생 전부를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여기 초청되어 오신 대부분의 분들은 이미 인생의 전반전이 끝나신 분들입니다.
대부분의 분들은 인생의 후반전을 달려가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인생에 마감을 앞두고 있는 12월 중순에 와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 이 시점에서 깊이 생각하며 내 지난 삶, 내 인생의 전반전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런 독백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으십니까? 목마르지 않으세요?
오늘 주님은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더 이상 인생의 짐에 허덕이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해주마”
거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좋은 찬양 한 곡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아침 안개 눈 앞 가리듯>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무얼 말하는지를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해서 들으시면서
‘하나님 오늘 내 삶 속에 이 우물가의 여인이 경험했던 한 사건을 내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유 레이즈 미 업 (You raise me up!)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내가 쓰러지고 나의 영혼이 지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¹
고난이 찾아오고, 내 마음이 무거워 질 때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그럴 때면, 나는 잠잠해 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조용한 가운데 기다립니다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당신이 찾아와서 잠시 나와 함께 앉아 있어주실 때 까지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은 나를 높이 올려 산꼭대기에 설 수 있게 해줍니다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당신은 나를 높이 올려 폭풍이 부는 바다 위를 걷게 합니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의 어깨 위에 올라설 때 나는 강한 자가 됩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꽃들도 (하나모...)
- 1절 -
ここにいずみはわく 涙をすぎるとき
코코니 이즈미와 와쿠 나미다오 스기루 토키
이곳에 생명샘 솟아나 눈물골짝 지나갈 때에
やがて実を結び 笑い声に満ちる
야가테 미오 무스비 와라이고에니 미치루
머잖아 열매 맺히고 웃음소리 넘쳐나리라
<후렴>
花も雲も風も大海も
하나모 쿠모모 카제모 오오우미모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かなでようかなでよう イエスを
카나데요우 카나데요우 이에스오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空にひびけ 歌え魂よ
소라니 히비케 우타에타마시이요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恵みを恵みを恵みを
메구미오 메구미오 메구미오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 2절 -
あおげ天はひらき 僕らは見るだろう
아오게 텐와 히라키 보쿠라와 미루다로우
그날에 하늘이 열리고 모든 이가 보게 되리라
やがて花は咲き 栄光の主が来られる
야가테 하나와 사키 에이코우노 슈가 코라레루
마침내 꽃들이 피고 영광의 주가 오시리라
<후렴>
花も雲も風も大海も
하나모 쿠모모 카제모 오오우미모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かなでようかなでよう イエスを
카나데요우 카나데요우 이에스오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空にひびけ 歌え魂よ
소라니 히비케 우타에타마시이요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恵みを恵みを恵みを
메구미오 메구미오 메구미오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믿음으로 기도하고 더 이상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고 초대교회 다이나믹한 부흥과 성령의 역사를 동경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 하는 것 하나가
바로 초대교회가 겪었던 시련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을 체험해서 새 사람이 되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의 불이 임하고 은혜가 임합니다.
은혜받은 형제 자매들끼리 함께 떡을 떼고 서로 사랑하며 나누는 교회 공동체가 됩니다.
거기까지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성령충만한 개인이나 교회에게 핍박이 옵니다.
풀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옵니다. 고난이 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시험이 듭니다.
아니 교회 나와서 한참 은혜받고 하나님의 일 좀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힘든 일들이 나한테
이렇게 시리즈로 닥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어찌 내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라는..
그런데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들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다 사도로 불리웠는데 사도란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들은 그 말대로 전 세계 곳곳에 보내심을 받아서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핍박 당해서 계시록의 저자 사도 요한만 빼놓고는 전부 다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마지막 죽음까지 닮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은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교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입니다.
제자의 길을 가겠다고 하면서 값은 치루려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가 아니겠습니까?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고 이 고난을 내가 어떻게 맞이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이 왜 내게 왔느냐 그렇게 묻지 말고 나도 주님 때문에 고난 받을 수 있는 반열에
세워주심을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피하지 말고 고난을 믿음으로
겪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자신과 교회에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헤롯의 핍박이 이 때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때가 언제냐 하면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교회를 무섭게 핍박하던 때입니다.
핍박자였던 사울이 바울이 되면서 종교 지도자들이 가했던 교회에 대한 핍박이 한 박자 끊겨 버립니다.
신약성경에는 헤롯 왕이 4명 나옵니다.
아기 예수를 핍박했던 헤롯의 손주가 바로 오늘 나오는 헤롯입니다.
가문의 DNA가 아주 안 좋습니다. 네 명 모두 악했어요.
그런데 오늘 나오는 이 헤롯은 아주 엘리트로 어렸을 때부터 로마에서 자랐는데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의 정권교체에 기여한 대가로 유대 지역의 통치권을 쥐게 된 인물입니다.
영리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지역의 유대 민중의 민심을 장악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가 아무리 총애해도 민심을 얻지 못하는 총독을 왕이 그 자리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감각이 빠른 헤롯은 어떻게 하면 예루살렘의 실세를 자기 등에 업을 수 있을까
생각을 했는데 가만 보니까 예루살렘의 실세가 교회를 핍박하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던거죠.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요.
이 기독교인들을 잘 탄압하면 순식간에 저 깐깐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광석화처럼 움직여서 충성된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를 먼저 잡아 순교시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이 일을 보고 기뻐했다고 되어 잇어요. 참 못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아무리 신앙노선이 다르다고 해도 사람 죽는 걸 보고
막 기뻐했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의 환호에 신이 난 헤롯은 이어서 베드로도 체포합니다.
우두머리격인 베드로를 죽이면 야고보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확실한 종교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가 있겠구나 이 생각을 하고 움직인 것입니다.
헤롯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사람은 아주 전형적인 어느 시대나 존재하던 정치꾼의 표상입니다.
헤롯의 움직이는 마인드를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일이 옳으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연 이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것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에게 정치적인 이득이 될 것인가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정치 권력의 실체입니다. 그 시대만 그렇습니까?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여당야당 할 것 없이 다 복지 정책에 이토록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들의 입신 양명때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언제부터 그분들이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걱정했습니까?
반값 등록금이 정말 우리 대학생들을 걱정하는 애틋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투표권이 있는 그 학생들이 다 표로 보이는 것입니까?
진정 가난한 이웃을 위한 복지는 무엇인지 진정 성장과 분배를 어떻게 해야
우리 후손들이 휘청거리지 않는 예산을 짊어지고 이 나라를 운영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 눈에 보이는 표가 급할뿐입니다.
다 민심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포퓰리즘이 난무하는 이 세상 권력자들의 속성은 예로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를 쳐 주느냐 안 주느냐로 여러분의 행동 기준을 삼는다면
언젠가는 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함 없으신 분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조석으로 변하거든요.
주님께서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박수 소리에 그렇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비난 소리에도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을 행가래 쳐주고 띄워줄 때 조심하십시오. 랜딩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됩니다.
세상은 또 가서 다른 사람 띄웁니다. 그리고 잊어버립니다.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조석으로 변하는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23절에서 25절을 보겠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너무나 멋있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이 엄청난 기적들을 행해서 사람들이 쫙 오빠부대 예수 당이 결성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대통령으로 그런 쏟아지는 인기를 관리하기 위해서 트위터도 계정도 개설하고
이렇게 자 이걸 힘으로 결집시켜야 될 거 아니겠어요? 정치인들이라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에게 환호하는 그 군중이 조금만 있으면 돌아서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 던질 군중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잘될 때도 오버하지 않으셨고 비난당할 때도 기죽지 않으셨습니다.
변함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평가만 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사람의 인기에 너무 예민하지 말고 박수 쳐 준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시고 비난 당한다고
너무 기죽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할 뿐입니다.
베드로를 체포한 때는 무교절 바로 전날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포함된 7일간 지키는 민족 대명절 입니다.
우리 나라 구정, 추석처럼 예루살렘으로 엄청난 인파가 집결합니다.
그런데 이 무교절 기간 동안에는 사람을 처형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무교절 직전에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놓고 7일간 감옥에 가두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또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무교절 때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던 사람들 앞에서 무교절이 끝나자마자
베드로를 끄집어내서 처형하면 아주 맥시멈 정치 홍보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아주 고도의 정치 감각을 가진 권력자 답게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헤롯이 베드로에게 붙인 감시는 어마어마 했습니다. 2중 3중으로 사람들을 붙였습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대단한 사람이었던거죠.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야고보가 순교된지 얼마 안되서 최고 지도자 베드로가 감옥에 끌려 갔으니까
예루살렘교회는 초비상이 걸리지 않았겠습니까?
살기 등등한 헤롯이 기세로 봐서 무교절이 끝나는 즉시 베드로로 죽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초대교회가 단시일 내에 성장하긴 했지만 아직 내실이 단단한 교회가 아닙니다.
베드로라는 큰 지도자가 죽임 당하면 순식간에 엄청나게 흔들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다른 방도가 있었겠습니까?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church praying for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말은 교회 전체가 모여서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기도했다는 말은 열정을 가지고 피와 땀을 쏟아내면서 했다는 것이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도 기도였습니다.
오늘 여러분 삶속에서 지금 현재 자신의 힘으로 뚫을 수 없는 어떤 장벽에 막힌 분이 계시다면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장벽이 생겼다면 절망하지 말고 빨리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민하지 말고 빨리 무릎 꿇어야 합니다.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설픈 지혜와 능력에 더 이상 의존할 수가 없습니다.
위기가 오고 고난이 오면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넘어져도 하나님 앞으로 넘어져야 돼요. 그래야 살아날 수가 있어요.
우리 하나님은 환난 당하고 억울한 일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할 때 자신의 품안으로 쓰러지는
자녀들을 안아 주시는 그런 분인 것입니다. 그러면 숨쉴 수 있는 어떤 여유가 생길 줄로 믿습니다.
주님 너무 힘들어요 그러면서 탁 맥을 놓아 버리는 여러분의 손을 주님이 잡고 가실 줄로 믿습니다.
사실 기도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기도 잘할 수 있나 싶어서 책도 읽고 세미나도 해 보지만요.
여러분 기도하는게 가장 쉬워요. 눈 감고 하면 되잖아.
여러분 보고 돈 벌어오라 그러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사람한테 어려운 소리 하라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 감고 은혜로운 아버지를 믿고 주님~ 시작하면 됩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를 줄을 모를까.
고민고민하다가 기도 시작하면 저한테 꼭 그런 느낌이 들어요.
내가 왜 빨리 이 쉬운 기도를 안 하고 있었지?
그 고민하고 쫓아다닐 시간에 여러분 정말 10분 진실하게 기도함으로
내가 10년 쫓아다녀도 안 될 일을 해결할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또 한가지 교회 온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뭐 우리끼리 알아서 기도하지 그거 아니에요.
우리는 개인주의 사회가 돼 가지고 흩어져서 기도를 많이 하는데요.
초대교회 특징은 함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제는 함께 기도함으로써 생깁니다.
제성경공부 함께하고 사역도 함께하지만 진짜 성도의 교제는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에요.
같이 기도하니까 그냥 10년 어설프게 안 사람보다 같이 기도한 동지들이 더 끈끈해요.
인간성이 오고 가는게 아니고 영성이 오고 가니까 성령이 하나로 묶어주시니까.
주님께서는 두 세 명이 모인 곳이라도 함께 기도하면 거기에 주님이 계시겠다 했어요.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함께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간섭해 주시겠습니까?
상수도에 아무리 물이 흘러가고 있어도 내가 수도꼭지를 열지 않는데 어떻게 그 물을 내가 쓰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여기까지 와 있는데 내가 기도의 수도꼭지를 열지 않는데
어떻게 그 은혜의 역사가 내게 넘칠 것입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일을 해놓고 열매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여러분이 기도를 놓고 있지 않는 한 성령의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아무리 강하고 가진 게 많아도 기도를 쉬면 즉시 성령의 역사고 느슨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기도하고 있는 자에게는 계속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틈만나면 함께 기도하는 교회 됩시다.
기도하면 불이 임합니다. 생각이 살고 영이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내게서 마귀가 떠나는 것을 느낍니다. 힘이 솟아 납니다.
우울증과 미움과 분열과 슬픔의 세력이 끊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죠.
마음이 편해지고 불안이 사라지며 모든 위기가 변하여 기회로 되는 역사가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특별히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서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거 희안한 거 있죠. 중보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자기 기도도 응답을 잘 받아요.
그리고 중보 기도가 파워가 있어요. 왜냐하면은 여러분 바둑도 말이죠.
자기 바둑 둘 때는 3급인데 남의 훈수 때는 1급이 나와요. 객관적으로 되거든요.
우리가 자기 위해서 기도할 때는 진짜 이기주의적으로 무식하게 기도해요.
갈등이 있을 때 저 사람 좀 물러가게 해 주시고 막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남의 갈등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양쪽을 다보고 기도해요.
그래서 남을 위해 기도해 줄 때 오히려 파워가 있고 능력이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리고 희안한 것은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하면 다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면
주님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내가 다른 형제의 문제를 마음에 품으면 주님은 내 문제를 주님 마음에 품어 주십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다른 모든 것을 내게 더하시리라.
오늘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응답을 하시는데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옵니다.
6절에 보니까 언제 왔다고요?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일주일 내내 기도했을텐데 응답은 딱 전날 밤에 왔어요.
하나님의 응답은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정확하게 그때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을 전날 밤에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위험의 칼날이 여러분에게 해를 가하기 직전에 그 전날 밤에 하나님의 천사의 구원이
여러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왔을 때 참 베드로가 넉살좋게 자고 있었습니다.
내일 자기가 처형당할 건데도 베드로처럼 그렇게 참 프리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없는 거 같아.
주의 사자가 임재하여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날 때 옥중에 광채가 빛납니다.
주님의 사자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아무도 몰라요. 그냥 탁 들어오시는 거예요.
갑자기 여러분이 얘기치 않았던 때에 무의식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천사가 여러분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천사는 실제로 존재해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짝 붙여주셔서 도와주게 하십니다.
특별히 천사가 우리한테 바짝 붙는 때는 우리가 기도할 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바짝 붙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22장에 보면은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바짝 붙었다고 했습니다. 오
늘 주님의 천사가 우리 옆에 바짝 붙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이 두렵습니까?
천사가 오셔서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웁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아주 세게 찼다고 되어 있어요.
보니까 꼭 이 엄마가 늦잠자는 아들 그냥 엉덩이를 때려서 깨우는 거 같아요.
주님께서 그렇게 친근하게 베드로를 팍 깨우신 거예요.
그 순간에 천사가 깨우면서 쇠사슬이 그 손에서 풀어지더라. 로마 쇠사실이 장난 아닙니다.
로마는 철저히 무기로 세상을 지배한 제국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죄수를 묶는 쇠사슬은 너무너무 견고해서 도끼로 계속 찍어도 잘 안 끊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종이짝처럼 그냥 떨어진 거예요.
어떤 세상의 사슬도 하나님은 가볍게 끊을 수 있는 분임을 믿습니까?
주님은 모든 묶인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을 묶고 있는 그 어떤 어둠의 사슬이 있다면 하나님의 손으로 끊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나를 누리고 있던 병마든 관계든 어떤 안타까운 상황이든 하나님이 그 사슬을 끊어주실 때
종이짝처럼 확 떨어질 것입니다. 감옥이 얼마나 보안이 철저합니까?
이중 삼중으로 장치를 했지만 하나님의 천사가 들어오니까 장난감 집처럼 막 들어옵니다.
여러분 문제가 쉽거나 어렵거나 하나님께는 다 똑같습니다.
애들이니까 구구단 5단까지 외우는 애가 2단 외우는 애 구박하지
어른이 보기에는 99단이든 9단이든 똑같은 거예요.
우리 수준에서 뭐가 쉬우냐 어려우냐지 하나님 수준에서는 다 쉬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지 문제의 난이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축복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번 주일에 여러분이 한번 연습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가족별로 순별로 각자 문제 하나씩만 기도의 도마위에 올려놓고 하는데
이 때까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도저히 안 됐던, 여러분이 아무리 뛰어다녀도 안 되던
그래서 하나님도 안 될 거라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던 그 문제만 딱 내려놓고
한번 같이 기도해 보기를 바랍니다.
철통 감옥에서 베드로를 탈옥 시키신 주님께 이 문제를 드립시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함께 기도할 때 주님 응답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베드로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여러분 순마다 한번 실험해 보기를 바랍니다.
주의 천사는 허둥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차분하게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으라 했습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쇠사실을 풀어 주시고 띠를 디고 신을 신고 옷을 입혀주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감옥 문을 열어 주시고 우리를 걸어 나오게 하십니다.
은혜의 네비게이션으로 우리를 쫙 끌어 나오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체적으로 살려 주십니다. 도와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자상하게 간섭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9절을 보세요. 그런데 이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가는데 천사가 하는게 생시인 줄 모르고 환상을 보는가
했다고 해요. 베드로는 비몽사몽 이게 진짠가 아닌가 하는 거에요.
보안이 너무 심해서 탈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포기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옷도 다 벗어놓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현실이 너무 힘들면 하나님이 살려 주셨으면 좋겠지만 결론을 아닐거야 라고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거 있습니까?
응답이 너무 안되고 상황이 너무 힘드니까 아예 포기해버렸어.
이거 공소시효 지났다. 끝났나 보다라고 본인도 그냥 포기한 거예요.
자기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 오늘 그것들 다 끄집어내서 주님 앞에 다시 드리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오랜 시간 기다렸어요.
여러분 포기하지 마세요.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십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로는 사면초가에 답답한 상황으로 우리를 밀어 넣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트위터에도 올렸지만 내가 가장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그 때가
내가 영적으로 가장 부드러워지는 때요 바로 그 때가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는 때며
바로 그 때야말로 하나님이 미소 지으며 나의 삶을 살려 주시는 때인 줄로 믿습니다.
그게 기도하는 최고의 최적 영적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적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중삼중 했던 감시망을 다 뚫고 감옥을 나와서
그다음에 예루살렘 시내로 통하는 쇠문에 이르렀는데요.
여러분 성지순례 지난번에 같이 가셨던 분들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가는 그 스데반의 문 보셨죠?
그거 장난이 아닙니다. 15명은 붙어야지 열 수 있는 큰 문이고 열면 쇠소리가 나요.
그런데 주의 천사가 가니까 이게 마치 백화점 최신식 자동문처럼 쓱 열려 버렸어.
오늘 여러분 앞이 꽉 막혔다고 생각하는 분 주님의 천사가 앞서가면서
그 문이 열리는 그런 기적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강의를 쓴 랜디 포시 교수의 글 중에 그 좋은 말이 있잖아요.
아들아 너의 인생에서 장벽을 두려워하지마라.
그 장벽은 너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짜 뚫으려고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거야.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장벽은 장벽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 장벽을 뚫고 나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까?
오늘 믿음으로 뚫고 나가십시오.
완전히 안전지대로 왔다고 느끼는 순간 천사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 직후의 거리에 찬바람이 베드로의 얼굴을 때렸고 베드로가 드디어 정신이 딱 들었고 정신이 드니까
영적인 말을 합니다.
11절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로 알겠노라 하여
할렐루야. 자 여러분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그 당시에는 사실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인 줄 몰라요.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당사자는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를 모릅니다.
그 일이 다 지나간 뒤에야 영적으로 깨닫는 거예요. 영성이란 과거가 해석되는 거거든요.
아 그래서 내가 살았구나 그 과정 중에 살았구나.
그렇게 기도를 하지만 정작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는 그 당시는 그게 기도 응답인 줄 몰라요.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문득 깨닫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지금 많이 힘드시죠?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기도하면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 장벽이 여러분 뒤로 와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이란 것을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베드로가 이제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 갔더니 그냥 그 성도들이 모여서 아주 뜨겁게 중보 기도하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을거예요.
베드로가 얼마나 감동 됐을까요?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성도들이 기도하는 소리,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감동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제자매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소리를 서로 들려 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신 다음에 아주 코믹한 상황이 터집니다.
마가의 집 앞에서 베드로가 사방을 싹 둘러보면서 문을 당당당 두드리는데
로데라고 하는 여종이 영접하러 나왔다가 누구세요?
그러니까 나 베드로야 문 열어. 그러고나서 로데가 문을 바로 열어 주고 가면 좀 좋아요.
그냥 안으로 샥 들어가 버렸어요. 유대의 집은 대문에서 안까지 좀 깁니다.
로데가 안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베드로 아저씨가 대문 밖에 왔다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 말을 들은 집안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하면 막 뛰어 나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애가 미쳤구나 어떻게 감옥에 있는 베드로가 여기 올 수 있느냐 해요. 무슨 말이에요?
전부 다 베드로를 위해서 중보기도는 했지만 설마 그것이 응답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거죠.
우리의 문제가 뭔지 아세요? 기도는 하는데 믿음이 없어요.
기도를 해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우린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사람을 믿어요. 돈을 믿어요.
그럼 왜 기도했나? 찝찝하니까 일단 기도는 해놔야 욕을 안 먹을 거 아니겠어요?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다. 그렇지만 여러분 기도의 마침은 아멘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8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닷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실컷 기도해놓고 집에 가면서 될까, 요즘 하나님이 나이가 드셔서 될까,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거에요.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엄청난 영광과 축복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기도해놓고 의심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어떻게 구해야 한다고요?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 실력이면 충분히 될 거야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들은 그걸 믿지 못한 거예요.
그 여자아이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자기가 거짓말쟁이 됐으니까
진짜 베드로 사도 아저씨가 밖에 와 있다고 해요.
애초에 처음부터 문을 열어 베드로랑 같이 들어왔더라면 아무 문제 없었을건데 말입니다.
그럼 가서 누구든 문 열어서 베드로를 데리고 오면 될 건데 성도들은
베드로의 장렬한 순교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천사가 왔나보다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항상 이 상식의 틀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변명해 드리는거에요. 하나님이 힘드셨을테니까,
천사라도 왔으니까 감사하다 그래요. 한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베드로는 계속 문을 두드립니다.
베드로는 간이 콩닥콩닥 해요. 왜냐하면 지금 막 병사들이 사방에 순찰조를 돌고 있어요.
지금 빨리 들어가야 되는데 여종은 누구세요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문도 안 열어주고 있어요.
불안해서 떨고 있는데 마침내 문이 덜컥 열려서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16절에 보니까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영어 성경에 보니까 쇼크를 먹었다,
기절 초풍했다라고 써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지만 설마 이렇게 완전하고 정확하게 내 기도가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거죠.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베드로가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문을 열고 보니 베드로가 와 있는 축복이 주님 우리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누르고 있던 태산 같은 어떤 문제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거죠.
재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옷을 주님께서 순식간에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베드로가 살아 돌아오는 기적을 보여 주시옵소서.
베드로는 사람들을 진정 시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를 살려 주신 것을 간증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모든 성도들에게 전하라. 그리고 자기는 빨리 다른 데로 피신합니다.
날이 밝으면 또 자기를 찾으로 온 시내를 뒤집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왜 이 소식을 전하라고 했을까요? 로마의 창 칼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은 어떤 감옥이라도 열 수 있는 분이셔,
그러니까 너희들 담담하게 그리스도의 군대로 복음을 전해야 되는거야.
그 얘기해 주려고 베드로가 들린 거예요.
제 생각에는 베드로가 사라지고 난 뒤에 마가의 집은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을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무시무시한 감옥에서 베드로를 구해내셨어요.
이게 우연이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불가능이 없구나.
우리도 한번 그 감옥에 가보자. 전부 다 한번 해보자. 우리를 다 잡아 놓을 수 있는지 해 보자.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사자같은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한번 하기가 두렵지 그 다음부터 뭐가 겁납니까?
철통같은 감옥에서 베드로도 구해주셨는데 세상 권세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주님은 로마의 칼보다 강하다. 이들은 그것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해서 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체험한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기죽지 않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이 지키시는 십자가 군병들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군대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할수록 부흥하면 할수록 세상의 공격은 끊임없이 교회를 향해서 몰려올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안티 기독교 분위기가 강하다고들 합니다.
교회를 쳐다보는 눈이 곱지 않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위축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계신 자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십니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초대교회 베드로를 지키셨던 주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지키시고 계십니다.
두려우면 기도하시고 걱정되시면 기도하십시오. 그래도 힘들면 우리는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탄이 무서워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새로운 교회는 서로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불같이 기도하는
그래서 어둠의 군대를 몰아내는 강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군대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사도행전 26장 19-32절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생략)”
설교 한눈에 보기
1. 순종이 능력이다 바울의 위대함은 계시를 본 것이 아니라, 계시를 순종한 데 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2.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복음 전파에 베스도 총독을 흥분하고 아그립바 왕은 압도당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다. 3. 거룩한 광인 바울은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다. 우리도 예수님에 미친, 거룩한 광인들이 되자.
핵심 메시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최고의 삶을 살자● 청중의 적용 포인트‘나는 예수에 미친 삶을 살고 있는가?’
카멜레온 이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주변 환경에 맞춰 자신의 껍질 색깔을 그때그때 바꾸는 동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카멜레온처럼 삽니다.
신념이 있어도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든지 그 신념을 타협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어도 양보할 수 없는 믿음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2명의 로마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앞에서 말할 기회가 있었고, 유대인의 왕 아그립바 앞에서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들이었고, 특히 죄수로 있는 자기 형편에서 자기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메시지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앞선 말씀에서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과 주님을 만난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더욱 담대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 순종이 능력이다
19절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거스르지 않았다’는 말은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란,자신이 거듭날 때 주님께서 자기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주신 사명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7-18)
바울은 주님 주신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매일, 그 뒤 10여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사명은 바울의 인생의 가장 절대적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전하므로…”
어디서 많이 들은 말 같지 않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바로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씀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승천을 목격한 오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대로 삶에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남은 생애 전부를 바쳐 받은 말씀대로 우직하게 순종하며 사는 바울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바울은 삼층천의 계시도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위대함은 계시를 본 것이 아니라, 계시를 순종한 데 있습니다. 환상을 구하지 말고 순종의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환상을 보았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들은 말씀을 일단 성경말씀에 비추어 확인해야 하고, 그 다음엔 평생 받는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게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순종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고난을 겪어내야 합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라고 말합니다. 짧은 이 한 마디에 바울이 그동안 겪은 수많은 시련들이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음의 위협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계속 겪은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어도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면 그 고난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겪는 고난의 대부분이 자기 잘못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못된 성격 때문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치르는 고난이 대부분입니다. 자기 잘못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겪는 고난은 오직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아름다운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바울은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2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고 하면, 병에 걸렸다가 고침을 받았다든지,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다든지, 어쨌든 하나님 은혜로 내가 뭔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는 그 목적이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오늘날 여기서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증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잘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자신이 잘 되게 하길 원하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잘 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대게 “내 병 좀 낫게 해 주세요, 내 사업 좀 잘 되게 해 주세요”라는 것이지, “하나님 도와 주셔서 하나님 선포하고, 하나님 영광 돌리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사람 별로 없지 않습니까? 신앙도 다 자기 중심적이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직 하나님을 전파하는 일에 매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여러 곳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내가 잘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위치와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제 설교를 듣고 계신 2천명 성도들 가운데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 많이 배운 분과 그렇지 못한 분,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과 그렇지 못한 분,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 성향을 가진 분들이 다 섞여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에게 매주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저는 매주 설교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흥분되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 기세등등한 권력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앞에서도, 자신의 간증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전혀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간증을 마무리하면서 번개처럼 복음의 진수를 정리해서 선포합니다. 23절 읽어 보면 참 바울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때는 몇 시간씩 길게 복음을 설교하지만, 이럴 때는 단 한 마디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선교의 사명을 요약해서 선포해 버립니다. 자신에게 이야기할 시간이 얼마나 주어질지 몰랐기 때문에, 일단 비수처럼 복음의 에센스를 압축해서 말해 버린 것입니다. 이 짧은 말씀이 어떤 생명의 씨앗이 되어 듣고 있는 누구의 가슴에 열매 맺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언제 어디서든 복음의 에센스를 토해 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그만큼 말씀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말씀 충만한 사람은 자판기 커피처럼, 꾹 누르기만 해도 말씀이 튀어 나옵니다. 예수가 튀어나오고, 복음이 튀어 나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2.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 복음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24절에 보니까, 바울의 말을 듣던 베스도 총독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베스도는 이미 사전 조사를 통해서 바울이 바리새파들 중에서 최고의 학자로 존경받는 가말리엘의 수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창하게 헬라어를 구사하는 엘리트 로마 시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연설하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바울의 학문이 보통이 아님도 짐작했습니다. ‘많은 학문’을 쌓은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의 환상을 보며 거듭난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스토리는 베스도 자신의 인간적 지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차원이었습니다. 기가 질려버린 그는 ‘넌 미쳤다’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복음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식으로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결코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원래 높은 사람들이 항상 그렇듯이 자기감정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평정심을 잃고 ‘네가 미쳤구나’하고 크게 고함치면서, 격렬하게 반응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원래 할 말이 없는 사람이 괜히 버럭 화를 내며 소리 지르는 법입니다. 그건 그가 영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은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면, 영적인 진리가 아니면 그렇게 흥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이기 때문에, 움찔한 것입니다. 영적인 파워가 있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흔들린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게 눌려있는 그의 영혼이 날카롭게 반응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베스도를 포기하고 아그립바 왕을 상대로 말을 합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행 26:26). 로마 사람 베스도와는 달리 유대인의 왕인 당신은 우리 지역 사정과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지 않냐? 당신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신지, 그의 삶과 설교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 부활 사건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으면서 어찌 복음을 영접하기로 결단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은 없습니다. 진실 속에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인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에 1%의 거짓도 없는 사실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도 예수님 살아계실 때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아직도 살아있던 때입니다. 지난 십여 년간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비롯한 수많은 사도들과 예루살렘 초대 교회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이야기를 선포해 왔습니다. 복음은 몰래 ‘한쪽 구석에서’ 비밀리에 나눈 괴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당당하게 거리 한복판에서 선포되어온 메시지입니다. ‘시험해 보라. 검증해 보라. 확인해 보라. 한 점 거짓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이런 당당함과 떳떳함이 있어야 합니다.
27절에서 바울은 아주 결심하고 아그립바를 압박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십니까?” 이 말은 구약성경을 믿으시냐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하면서 유대인들 전부가 믿고 있는 구약성경을 안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정치적 자살행위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선지자를 믿느냐”고 물은 뒤에 대답할 기회도 안 주고 “당연히 믿으시겠지요 유대인의 왕이시니까요”라고 말한 것이다. 구약성경을 믿는다면 구약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수없이 많이 예언하고 있는 것을 왜 믿지 않느냐고 다시 한 번 몰아갈 셈입니다.
아그립바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간증하며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말을 반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는 거짓의 사람인데, 바울은 진리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떳떳한데 아그립바는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많습니다. 정치적으로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밥 먹듯이 했고, 자기 누이동생과 동거하고 있는 까닭에 도덕적으로도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어둠의 사람은 빛의 사람을 만나면 왠지 주눅이 들고, 그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아그립바는 세상적 권력과 재산은 바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었지만, 영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의 거침없는 말씀 선포에 홀린 듯이 끌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아그립바는 번뜩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가 정신 차렸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그냥 예수 믿을 뻔 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는 말은 “네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노력을 가지고 감히 나를 설득해서 개종시키려고 드느냐”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 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아그립바는 거의 예수 믿기 일보 직전까지 와 있었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만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왕이라는 그의 신분이, 그의 권력과 재산이,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이, 그로 하여금 쉽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이 선지자를 믿으시냐”고 했을 때 안 믿는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그들이 믿는 구약성경을 안 믿는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믿는다고 하면 바울의 논리에 그대로 말려들어, “그러면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냐”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큰소리로 동문서답하듯이,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을 돌려 버린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너무 깊이 생각했습니다. 체면이 너무 중요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중요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유일한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너무나 많은 세상적 힘과 조건들을 갖추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가진 게 웬수입니다.’ 그가 가진 것들이 오히려 복음을 영접하는 기회를 닫아 버렸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성공 때문에, 자신의 지위나 재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체면 때문에 예수를 못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그립바는 분명 흔들리고 있었는데,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포기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돈도 없고, 권력도 없었다면, 차라리 몸과 마음이 아프고 가난했더라면 이 순간 그는 의외로 빨리 결단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마 19:24)고 하셨는지 모른다.
바울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29절에서, 그는 자신이 이렇게 로마의 죄수로 결박된 것 외에는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세상적으로 바울보다 못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바울보다 돈도 많고, 명예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부러워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합니다. 무엇이 바울을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했을까요? 바울에게는 그들이 없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는데, 돈과 명예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러니까, 열 일 제쳐놓고 먼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늘의 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울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의 인생이 세상 최고의 삶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참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자기 자식한테 “너 나처럼 살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대단한 부모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렇지 못합니다. 죽을 때 꼭 “너는 애비처럼 살지 말라. 네 애비의 못 다한 한을 풀어다오.” 이런 유언 남기고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큰 돈은 못 물려줘도 “나처럼 살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은 예수님 믿고, 그 분과 동행하는 인생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세상적인 큰 성공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인생인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런 믿음의 인생의 모범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모범과 도전을 던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처럼 예수 믿으십시오. 그래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고 사십시오. 다른 욕심 갖지 말고 이웃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행복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30절에 보니까 “너희도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하노라”는 바울의 이 당당한 선포에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재판이 끝난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은 너무나 당당한 바울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입니다. 논리와 명분, 확신과 능력에서 그들은 결코 바울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물리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바울 앞에서 무기력했습니다. 아니 바울의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했습니다.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삼상 26:31)
두 권력자들은 모두 바울의 진실과 믿음에 압도당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바울에게 세상의 법으로 죄를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만 않았어도 풀려 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바울을 위해 안타까워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석방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또, 유대인 자객들이 득실거리는 이 상황에서 석방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위험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세상의 권력자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말하는 ‘일이 잘 되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인생이 잘 되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큽니다.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이 실은 나중에 우리에게 더 큰 화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바울처럼 세상적으로는 투옥생활이 연장되는 것 같고 힘들어지는 상황 같지만, 실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거룩한 광인
저는 베스도가 복음을 전하는 바울보고 “네가 미쳤다”고 한 말이 반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정신이상자는 아니었지만, 예수에 미친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말할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뭐에 ‘미쳤다’는 말은 정신병이 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에 몰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명을 거는 것을 말합니다. 가슴에 있는 불을 아무도 끌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에 미치는 사람, 골프에 미치는 사람, 낚시에 미친 사람 등 어떤 한 가지에 몰입하면 자신의 시간과 돈과 마음을 온통 거기에 줘 버립니다. 뭐에 미치면 모든 것을 그것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골프에 미친 사람은 막대기만 보면 잡고 퍼팅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분야에든지 거기서 최고가 된 사람들은 거기에 미치지 않고는 안 됩니다. 러시아의 천재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Evgeny Igorevich Kissin)은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하루 온종일 피아노를 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잘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인생 전체를 바칠 정도로 미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합니다. 일제시대 많은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에 미쳤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미치기 위해서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작고한 코카콜라의 전 회장은 “자기 몸속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물 다음으로 많이 마시는 음료를 코카콜라로 하는 것이 자기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콜라에 미친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쁜 쪽으로 미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술, 마약, 도박 이런 데 미치면 완전히 인생을 망칩니다. 히틀러나 레닌처럼, 피의 혁명으로 자신들만의 제국을 건설하는 그런 꿈에 미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칩니다. 잘 미쳐야 합니다. 무엇에 미치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3)
예수님에게 미쳤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주신 지상명령, 모든 열방과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그 명령을 한시라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만 만나면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 가리지 않았고, 유럽과 아시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가리지 않았고, 회당에서나 이교도들의 신전에서나 집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걸린 재판정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자들 앞에서도 바울의 관심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아무도 못 말리는 열정 아닙니까?
바울 자신도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의 불길, 예수 사랑의 불길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들었을 때 그 말씀을 가슴에 담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습니다. 말씀 전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모욕과 핍박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불이 붙어 있기에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미친 사람의 증세입니다. 가슴에 불이 있다면, 일을 저지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희생이 따른다 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베스도 총독이 탄식처럼 한 말이 사실이다. “네가 미쳤구나”(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가 예수에 미쳤구나. 복음 전파에 미쳤구나”).
저는 한국 교회가 낳은 많은 영적 거인들을 만나 뵈었는데, 바울처럼 예수에 미치고, 복음 전파에 미친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돌아가신 C.C.C 총재 김준곤 목사님을 꼽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6.25 전쟁을 겪으며 아내를 공산당의 손에 잃고, 자신도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던 그는 평생을 예수님밖에 몰랐습니다. 그의 글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골수 공산당은 피 속까지 빨갱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내 무의식과 꿈속에까지 예수의식화가 된 골수 예수장이이고 싶다…내 많은 꿈속에 예수가 있고, 40일을 금식기도할 때도 밥 먹는 꿈보다 예수 꿈을 더 많이 꾸었다. 나의 언어의 대부분이 예수를 설교했고, 내가 쓴 수천 통의 편지와, 길가며 쓰고 밥 먹다 쓰고 자다 일어나 쓰는 글들도 예수이며, 내 딸들을 위해 써 놓은 한 줄 유서도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내 묘비명도 예수일 것이다…내게 흠도 티도 없는 최후의 순수하고 진실한 것이 있다면 목숨이 열두 번 다 한 후에라도 더욱 사랑하고만 싶은 예수님뿐이다.”
그렇게 예수님밖에 몰랐던 김 목사님은 모든 것이 암울하고 힘들던 1960-70년대, 데모와 최루탄으로 얼룩졌던 한국 대학 캠퍼스의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깨워 일으켰습니다. 여의도 광장에서 매일 50만이 넘는 성도들이 민족 복음화를 위해 철야기도로 울부짖던 EXPLO 74를 주최하면서, 그 분은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민족 복음화와 예수 한국의 비전을 불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이 민족이 복음화되면 나라의 색깔이 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우리 기도가 이루어져 이 나라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복음화 되는 날. 예수 한국의 두메 마을, 우물가의 여인들과 김매는 농부들의 입에서도 샘물이 터지듯 찬송이 절로 터지고, 각급 학교 교실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성서가 최우선 필수과목으로 배워지고, 술집들이 모조리 성서교실이 되고, 예수 안 믿는 것이 옛날 쌍놈이 된 것 만큼이나 부끄러워 혼인길도 막히는 민족.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기도와 신앙의 핏줄에서 자라며, 국무회의나 국회가 국정의 대소사를 논할 때 의례히 주의 뜻이 앞서고 경건된 기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예수의 나라 동방의 성민 코리아. 세계의 시장에서 예수 한국이 만든 나사못 하나, 단추 하나까지도 예수 한국의 신앙과 양심과 정성이 보증수표처럼 의례히 믿어지는 민족. 신명기 28장의 그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해당이 안 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진 예수 한국의 모습이 세계의 눈에 신기하고 기적 같이만 보일 때, 그들의 교과서는 한국의 현실 부흥은 예수의 터 위에 세운 건물 같고, 신앙의 밭에서 자라난 무성한 나무와 같다고 증언할 것이다.
지상에 일찍이 완전한 기독교 국가란 존재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한 민족 쯤은, 한 민족쯤은 단 한번만이라도, 단 한 민족쯤은 송두리째 그들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바쳐지고 쓰여질 수 있다면 우리야말로 그 기적의 도전 앞에 서 있다. 민족의 가슴에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1980년도, <세계복음화 대성회> 준비를 위한 설명회에서 김 목사님이 선포하신 설교문을 지금도 읽으면 가슴이 쿵쾅쿵쾅 뜁니다. 예수에 완전히 미친 사람, 복음 전파에 완전히 미친 사람,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엄청난 비전을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한국 교회는 지금 사람이 줄어서 문제가 아니라, 이런 비전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바울처럼, 김준곤 목사님처럼 예수에 미친 사람, 복음에 미친 사람은 적습니다. 베스도나 아그립바 같은 세상의 권력자들도 혀를 차며 그들의 열정과 영적인 권위를 어찌하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것이 슬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생에 단 한 번 믿는 예수. 정말 한 번 제대로, 화끈하게, 믿어 봅시다. 무엇인가를 위해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쳐야 한다면 한 번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를 위해 바쳐봅시다. 누군가를 목숨처럼 사랑해야 한다면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예수님이며, 밥 먹을 때, 운전할 때, 일할 때 하루종일 노상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이며, 밤에 잠자기 전에 마지막 부르는 이름이 예수님이며, 꿈속에서도 무의식 속에서도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이 예수님이 되도록 그렇게 예수님에게 푹 빠져봅시다.
다른 어떤 야심보다 예수님이 주신 그 꿈. 민족을 복음화하고, 세계를 복음화 하는 그 비전을 우리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아봅시다. 그것을 위해 나의 직업,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돈이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 날마다 고민해 봅시다. 그것을 위해 시간을 내서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받아 봅시다. 교회는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에 미쳤기 때문에 남은 생을 예수의 꿈에 헌신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미치지 않고는 헌신할 수 없고, 헌신하지 않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저의 꿈은 큰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한 명이라도 예수에 미친 사람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수님으로 꽉 찬 바울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서 세상 속으로, 열방 속으로, 미래 속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예수님에 미친, 거룩한 광인들이 되어 봅시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할렐루야! 오늘도 하늘의 하나님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최상의 은혜임을 믿고 감사하며 이곳에 모인 새생명교회 성도들과 귀하신 장로님과 그 하시는 사업장 위에 놀아운 성령의 은혜와 역사하심이 말씀을 통하여 충만하게 더욱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오늘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말씀을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1)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2)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모세란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나던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시달림을 받는 시기였습니다.거기에다 또 남자애들을 낳으면 무조건 “하수에 처넣어라”는 바로왕의 어명이 떨어져 있던 그 당시였습니다. 이러한 시기기에 그의 부모들은 그를 낳고 그가 너무나 영준하여 바로의 어명을 어기고 석달동안 감추어 키우다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모세를 하수에 던집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가슴 아파 기절했을 지도 모릅니다.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석달을 키운 귀여운 아기 동생을 위하여 갈 상자를 정성 것 준비하여 역청을 발라 모세를 넣어서 하수에 띠워내려 보냅니다. 누이 미리암은 강 뚝을 따라 내려가면서 하염없이 울며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영준한 내 동생을 살려주세요.온 가족은 칼로 가슴을 에우는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마침 그때에 애굽의 공주가 모욕하려 하수에 나왔다가 물에 떠 내려오는 갈 상자를 보고 하인을 시켜 건져오게 합니다. 그리고 갈 상자 뚜껑을 여니 아이기 옵니다.
공주는 모성애가 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히브리 아이로 구나 그는 모세라고 이름을 짓고 양아들로 삼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공주 에게 달려가 “공주님 이 아기를 위하여 유모를 불러올까요”? 했을 때 공주가 허락을 합니다. 미리암은 집으로 달려가 통곡 하는 어머니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하고 어머니를 모세의 유모로 데려옵니다. 공주는 모세의 어머니에게 삯을 주며 아기를 젖을 뗄 때까지 잘 키우라고 부탁을 합니다.
모세는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성장하여 바로의 왕궁으로 옮겨가 공주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을 합니다. 뿐 아니라 바로왕의 사랑도 크게 받았다고 합니다. 바로왕은 모세가 너무나 영준하여 사랑하기에 자기의 왕관을 벗어서 모세에게 씨웠다고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어린 모세는 그 왕관을 벗어서 땅에 내 버리고 막 발로 밟아 놓았다고 합니다. 이 광경을 본 신하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왕도 화가 났습니다. 신하들은 이 애를 살려두면 안됩니다. 이 애가 장차 우리 애굽을 발로 밟을 자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애가 너무나 영준하여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 궁전에서 애굽 문화와 무예를 다 배웠습니다.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을 돌아보려다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바로왕의 얼굴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양 몰이 생활을 합니다.기구한 인생 그대로입니다.정열이 넘쳐 자기 백성을 돌보려다 결국 다 실패하고 이젠 아무 꿈도 없이 애굽에서 배운 모든 학문은 아무 소용이 없이 지팡이를 쥐고 양을 모는 양몰이 군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보내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모세를 부릅니다.그리고 모세에게 사명을 줍니다. 이제 애굽에 가서 바로왕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라고 합니다.모세는 여러 번 거절하면서 난 말도 잘 못합니다.나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내가 누구기에 이 백성이 내 말을 듣겠습니까? 등 그때마다 하나님은 네 형이 말을 잘하니 너를 대신하여 그가 말 할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말씀과 같이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질문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질문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가지고 있는 것은 마른 지팡이 뿐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찌 보면 우리가 모세보다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재산도 더 많습니다. 모세는 바로왕을 피하여 사는 신세 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 미디안 광야에서 꿈 없이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면 여러분들도 어찌 보면 모세와 똑 같은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세와 같은 시험과 환난을 극복하면서 믿음을 성장 시켜 통일된 북한 땅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모두를 통하여 아니 남 한에 오게 하신 3만5000명의 탈북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경영의 계획을 북한땅을 향하여 예비하시며 전셰가 열방이 주님께로 돌아 오게 하시는 데 귀하게 크게 사용하시려는 뜻이 있을줄 저는 굳게 믿고 확신합니다 아멘! 이것을 믿을 때 소명이 보이고 우리가 고향을 두고 온 이유와 목적을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단 한명의 탈북민들도 자기의 의지와 자기의 뜻대로 온 것이 아니라 때로는 어려움을 통하여 때로는 광야의 출애굽을 통하여 때로는 자신이 북한에서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무런 연고도 남한하고는 없을 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복음으로 이 곳에 오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길, 홀로 걸어 가는 길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 누구도 알아 주는 이가 없는 이 길
마른 아카시아와 잡초만 무성 하게 서 있는 길, 좁고 긴 협곡 같은 길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 지기 쉬운 허막한 길, 홀로 말없이 걸어갑니다.
때로는 괴로워도, 힘들어도 가야만 하는 길, 이 길이 비전이고 사명이기에...
나는 부르심에 소명 앞에서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절망에 빠진 모세를 가시나무 떨기 불꽃가운데서 부르시어 그에게 사명을 줍니다. 사명을 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뭉치 돈을 준 것도 아닙니다. 늘 모세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그에게 능력의 도구로 주신 것 뿐입니다.
우리들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단번에 뭉치 돈을 얻어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 주님을 위하여 사용할 때 그것이 능력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행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려 올라가다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돈을 구걸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난 돈이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당신께 주니 곧 예수 이름으로 걸으십시오.”라고 말하면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 앉은 팽이는 곧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모세에게 있는 것이 능력의 지팡이였다면 베드로에게 있는 것은 바로 창조주 예수였습니다.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난 무능하다 이런 말을 버리고 난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면 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란 고백이 필요합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세가40년 동안 가지고 다니는 지핑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능력과 권능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던지면 뱀이 되었습니다. 꼬리를 잡으면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수에 지팡이를 대니 하수가 피가 되었습니다.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키니 홍해는 갈라졌습니다. 지팡이로 바위를 치지 샘물이 솟아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능력의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 것 없은 지팡일 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4:2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그때 엘리사는 그 과부에게 온 동네에 가서 그릇을 많이 빌려다가 골방에서 문닫고 그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부어라고 합니다.생도의 아내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그대로 했습니다.
한 병 기름으로 빌려온 모든 그릇에 다 채웠습니다. 과부는 그리고 그것을 팔아서 빗을 갚고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요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이는 안드레가 예수님께 한 말입니다. 어린 아이 손에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말이로5천명 먹고도 열두 바구니나 거두였습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내 손에 무엇이 있는 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활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능력을 행하십니다.내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 능력이 되게 하면 보화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편을 몰래 숨겨 상인에게 돈을 받고 전달해 주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한번은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그 아이 밑에 아편이 든, 보따리를 넣고 강을 건너오다 부두에서 사람들을 검문하는 경찰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당황한 여인이 아편 보따리를 강에 던진다는 것이 그만 아기를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아기를 버린 것을 모른 채 경찰 앞에 선 그 여인
제가 가진 것은 이것뿐입니다라며 아편이 든 보따리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무엇을 버려야 하며 무엇을 간직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 한 채 사는 인생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쾌락과 명예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낙으로 여겼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40년 동안 하나님의 일군으로 일해 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현재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혹시 가장 귀한 주님을 버리고 물질과 세상괘락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으시는지요?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중해를드 럿샐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어 불구자가 됩니다
그는 참혹한 좌절에 빠집니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었구나.”그런 가운데 그에게 차츰 진리에 말씀으로 마음을 돌이키기 시작합니다.
그는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자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의사가 그에게 손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글을 쓰고 타이프도 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화되어 직접 불구자의 모습으로 출연하게 됩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연기를 했습니다. 그 해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상금을 자기와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을 위해 기부합니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아닙니다.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게 했습니다. 언제나 잃어 버린 것을 계산 할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열 배를 보상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만 눈을 돌릴 때 그곳에는 오직 절망과 불가능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잃은 것을 넘어 가진 것을 세어보면 더 많은 가능성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욕심과 주님 보다 더 사랑하는 돈과 명예를 내려놓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성 있고 전심을 다 할 때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새생명교회 성도들! 모두는 오늘의 귀한 말씀에 힘 입어 우리의 마음을 담아 충성하며 드릴 때 축복해 주심을 믿고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의 말씀을 결론 맺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자리에서“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모세의 손에 있는 땅땅 바른 지팡이가 모세에게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예배자리에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이용한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손에 있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역사의 한 페지를 만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하여 그것으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기도드리겠습니다.
제5권 제16호
대한예수교 장로회 진해 진성 교회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교회
2024. 04. 07. 오전 11시
제1부 예배 인도 길창원 목사
주일예배순서
예배의 부름 ---------------------------------------------------------------------------------------- 다같이
송 영 ---------------------------------------- 5장 ----------------------------------------- 다같이
교 독 문 -------------------------------- 제27문 시51편 ----------------------------------- 다같이
신 앙 고 백 --------------------------------- 사도신경 -------------------------------------- 다같이
찬 송 ---------------------------- 380장 나의생명되신주 ---------------------------- 다같이
기 도 ------------------------------------------------------------------------------- 정은선전도사
특 송 ---------------------------------------------------------------------------------- 김종훈목사
성 경 봉 독 -----------------------------------로마서1:7----------------------------------- 인도자
말 씀 선 포 ------------------------------- 하나님이주신처방서 ---------------------- 길창원 목사
찬 양 --------------------------- 258장 샘물과같은보혈은 ---------------------------- 다같이
봉 헌 ----------------------------------------------------------------------------------------- 다같이
광고 와 교제 ----------------------------------------------------------------------------------------- 전도사
기 도 ------------------------------------------------------------------------------------김종훈목사
축 도 ---------------------------------------------------------------------------------- 길창원 목사
할렐루야 ! 그의 성소에서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 지어다.(시1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