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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김삿갓 방랑기
2020. 8. 22.
방랑시인 김삿갓 (11)
*약사금강이면 천산개골이라..(만약에 금강산의 경치를 버린다면 청산은 모두 뼈만 남으리라)
"참 좋습니다."
선비들은 무릎을 쳤다. 김삿갓은 얻어 먹을 것을 먹었으니 이제 볼일은 다 끝났다 생각되어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벌써 가시렵니까 ?"
선비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바람처럼 왔으니 바람처럼 가야지요.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납시다."
김삿갓은 이 말을 남기고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개를 몇개 넘으니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가가 보이지 않아 계속 걸었다. 가는 길이 숲속 길이라 해는 아직 넘어가지 않았으나 앞은 어둑어둑 하였다.
이때 삼거리 길에서 중을 만났다. 그는 무료하던차에 잘되었다 생각하고 슬쩍 문자를 써서 말을 걸었다.
"문여소승하처래 ?" / 問余小僧何處來 ? ( 여보시오 젊은 스님 , 어디서 오십니까 ? )
그러자 젊은 중도 냉큼 문자로 대답을 하여왔다.
"소승금강래" / 小僧金剛來 (소승은 금강산에서 옵니다.)
이렇게 일단 인사겸 대화가 오가자 두 사람은 자연히 길동무가 되었다.
"날이 어둡기 시작했는데 시주께서는 어디까지 가십니까 ?"
젊은 스님의 말은 매우 정중했다. 글을 할줄 아는 과객임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정처없이 나선 길손 입니다.갈곳이 따로 있겠습니까 ?"
"이 근방은 사나운 짐승들이 많이 출몰하는 곳입니다. 바쁜 길이라도 어두운 때는 삼가셔야 합니다.
다행히 소승의 암자가 멀지 않으니 유하고 가십시오."
김삿갓으로선 듣던중 반가운 소리로 귀가 번쩍 트였다.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스님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룻밤 묵을 곳을 염려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젊은 중을 따라가는 김삿갓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금강산에서 온신다고 하셨지요 ?"
"예 유점사에 갔다오는 길 입니다."
"유점사라면 금강산 제일의 명찰로 들었는데 예서 몇리나 되는지요 ?"
"한 삼십리쯤 될겝니다.그나 저나 시주께서는 금강산 길이 초행이신가요 ?"
"예 처음이지요. 가도가도 팔십리 길이라고 하는군요."
김삿갓이 길에서 들은대로 말을 건넸다.
"산길은 원래 정확한 잇수를 헤아리기 어렵지요."
"그런가 봅니다."
두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눈앞에 조그만 암자가 나타났다.
숲속에 자리잡고 있어 얼핏 보기에는 멋들어진 누각처럼 보였다.
"변변치 않으나 드십시다."
김삿갓은 젊은 중의 안내를 받아 객방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사미승이 저녁상을 가져왔다. 쌀과 조가 반반씩 섞인 밥이었다. 찬은 모두 산나물이었다.
"소찬입니다만 시장하실 터이니 어서 드십시오."
"고맙습니다."
김삿갓은 정갈한 산나물 찬이 구미에 당겼다. 밥상을 물리자 젊은 중은 김삿갓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말문을 열었다.
"시주께서는 아까 소승에게 글월로 물으셨는데 시나 한수 들려 주시겠습니까 ?"
어찌 고양이가 생선을 싫다 하겠는가. 김삿갓은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글제는 무엇으로 하면 좋겠습니까 ?"
"여기는 산속이니 산 풍경을 읊어 주십시오."
"산 풍경이라 ..... "
김삿갓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즉시 누에가 실을 뽑듯 술술 싯귀를 읊기 시작했다.
약사금강경 / 청산개골여 (若捨金剛景 / 靑山皆骨餘)
기후기려객 / 무흥단주저 ( 其後驥驪客 / 無興但躇躇)
만일 금강산 경치를 버린다면 청산은 모두 뼈만 남으리
다음에 나귀를 타고 온 길손은 흥이 없다 다만 주저하겠지.
"천하의 명시 올씨다. 소승도 풍월을 좋아합니다만 시주께서 읊으신 시를 지으려면 아마
한나절은 고생을 해야 얻을것 같습니다."
젊은 중이 이같이 격찬하자 김삿갓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원 칭찬이 과하십니다. 다만 남의 것을 모방하였을 뿐입니다.."
"겸손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젊은 중은 이렇게 말하고 김삿갓의 귀가 번쩍 트일 말을 해주었다.
"지금 금강산에는 명물이 하나 있읍지요."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니 명물이 어디 하나 뿐이겠습니까 ?"
"그런뜻이 아니라 시 잘하는 스님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많은 시인이 그분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재주를 겨루었습니다만 아직도 그분의 글을 꺾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요 ?"
김삿갓은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햇다. 호기심과 경쟁심이 동시에 일었던 것이다.
"불초 워낙 과문한 탓으로 그토록 고명하신 스님이 계신줄 여지껏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스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여기서 약 삼십리쯤 올라가면 입석봉이라는 큰 봉우리가 나옵니다. 금강산 제일이라는 만물상이 시작되는 곳입니다.그 아래 입석암이라는 정갈한 암자가 있는데 시승은 바로 그곳에 계십니다."
방랑시인 김삿갓 (12)
*김삿갓의 대필 시.
"과연 명승절지에 명승(名僧)이 계시군요. 불초 감히 고명하신 분과 겨룰수야 없습니다만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야 시주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글이라면 그 스님도 뒤지지 않으시는 분이나 가신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셔야 할겁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 스님은 누구든 찾아오는 손님은 글을 알든 모르든글 실력을 시험해 보십니다.
그래서 상대는 안되지만 실력이 있다고 인정되면 쾌히 대접을 해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장으로
후려쳐 쫒아버립니다. 물론 시주께서는 좋은 상대가 되시겠습니다만."
김삿갓은 갈수록 흥미를 느꼈다.
"거참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만약 겨루기를 하여서 지는 편은 이를 뽑혀야 합니다.
아마 그 스님이 비장하고 있는 자루 속에는 뽑은 이가 한말은 넘을 것입니다."
"오 대단한 지고."
김삿갓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자신의 글이 짧아 설혹 이를 뽑히는 한이 있더라도 꼭 가보고 싶었다.
그날밤 김삿갓은 시승 생각에 잠을 제대로 못잤다.
아칙일찍 일어나 조반을 얻어먹고 곧장 입석봉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갈수록 산세는 더욱 험악해졌다. 고개는 가팔랐고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내리는 물소리는
웅장하기 조차 하였다. 삼십리 길이라고 하였지만 오시가 넘을 때까지 절반쯤이나 온듯 했다.
김삿갓은 배가 고팠다. 이른 아침부터 산길을 내처 걸었으니 배가 고플만도 헸다.
더구나 오시도 훨씬 지났지 않은가.
"물이라도 마시고 가야겠구나."
그는 조심조심 계곡쪽으로 내려갔다. 냇가로 내려가는 비탈은 가파르고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돌멩이도 많았다. 간신히 냇가로 나오자 의외로 냇가는 넓었다.
더구나 그의 눈을 번쩍 뜨게 한 것은 냇가 벼랑위에 아담한 정자가 있었는데 갓을 쓴 선비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별세상에 들어온 느낌이어서 한동안 김삿갓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 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커니 , 시회를 열고 있나보구나."
김삿갓은 제 정신이 들자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정자쪽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급히 걸었다.
그리고 그는 다짜고짜 정자안으로 올라갔다.
"지나가는 과객입니다만 말석이라도 빌릴수 있을까요 ?"
화선지를 펼쳐놓고 시작(詩作)을 하고 있던 선비들은 웬놈이냐는 듯 김삿갓을 쏘아 보았다.
"당신 글줄이나 지을줄 안다면 어디 끼어보구려. 하지만 글재주 없이 술 잔이나 얻어 먹으려 한다면 딴 데나 가보시오."
노골적으로 하대하는 말씨였다. 하지만 이런정도의 말에는 이미 이골이 난 김삿갓 아니던가.
"그저 책 몇권을 읽었습니다. 보아하니 공짜로 얻어 먹기는 틀린것 같으니 가르침을 주십시오."
"허허 , 무료하던 차에 심심치 않은 구경거리가 생겼군 그래."
좌중에 팔자 수염을 기른 사내가 마치 김삿갓을 장난감으로 생각했는지 이렇게 거들고 나섰다.
"불초가 여러분들의 무료함을 풀어주게 되었다니 천만다행 입니다. 자, 어디 받아 보겠습니다."
김삿갓은 모욕적인 말에도 낯색을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수작을 부렸다.
"운을 떼라는 말이군. 풍월구경을 하긴 한 모양인데 , 누가 운을 한번 붙여보지."
팔자수염은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뭐 운이랄 것까지야 있겠소. 그저 생각나는대로 한번 읊어 보라고 하시오."
누군가 김삿갓을 얕잡아 보고 말을 하였다.
"보시다시피 불초는 워낙 불학무식한 놈이어서 막연히 글을 지을수는 없습니다.
글제라도 말씀하시면 억지로라도 뜯어맞춰 보겠습니다."
"그럼 금강산의 절경을 읊어보시오. 구경 좀 해봅시다."
"해보겠습니다만 불초가 글을 제대로 쓸줄 모릅니다. 하오니 어느 분께서 대필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내친김에 김삿갓은 바보행세를 하였다.
"허허, 세상 살자니 별일을 다 보겠구먼. 그래 글씨도 쓸줄 모르면서 어떻게 시를 짓는단 말인가 ?
이거야 말로 기상천외한 일이로군. 좋소 , 내가 대필을 할터이니 어서 불러 보시오."
얼굴이 동그런 선비가 별꼴을 다 보았다는 듯 무릅까지 치면서 붓을 들었다.
"그럼 부르겠습니다. 소나무란 글자를 두자 쓰십시오.
김삿갓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소나무 송(松)자를 두자 쓰라는군. 松松이라 ..자 썼소."
"다음에는 잣나무란 글자를 두자 쓰시오."
"잣나무 백자로군. 栢栢이라..썼소."
"그러면 그 뒤로 바위라는 글자를 두자 적어주시오."
"바위 암 자로군..岩岩이라 썼소."
"끝에다 돌다라는 글자를 붙여주시오."
"돌회라 .. 廻라 썼소."
이쯤되자 좌중의 선비들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침들을 꼴깍꼴깍 삼키며 글이 이루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럼 이제는 행을 바꾸어 물이란 글자를 두자 쓰시오."
"물 수(水)자 두자라고 ? 水水 썼소."
"다음으론 산이란자를 두자 쓰시오."
"묏 산자라 , 山山 썼소."
"그럼 곳곳이라는 글자를 두자 써주시오."
"곳처라는 글자군, 處處라고 썼소."
"끝에다 왜 기이하다고 할때 쓰는자 있지요? 그자를 한자 써주시오."
"이상할 기자로군.奇라 썼소."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끝났으니, 붙여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비들은 김삿갓이 부르는대로 옮겨적은 화선지의 조합된 글을 보고 깜짝놀랐다.
"세상에 이럴수가 .."
방랑시인 김삿갓 (13)
*촉촉금강산..삼야숙청전 (우뚝우뚝 솟은 금강산..사흘밤을 청천에서 잠이드네)
松松栢栢岩岩廻 / 水水山山處處奇
송송백백암암회 / 수수산산처처기
소나무 잣나무 바위가 돌고돌아
물도 산도 곳곳이 기묘하도다.
"허 ..이거 천하의 명시일쎄 ! "
선비들은 글을 읊조리고 나서 무릅을 치며 감탄했다.
그들은 이미 금강산을 두고 읊은 수 많은 시를 많이 보아온 터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금강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쉬운 글자만 사용하여 딱 두줄로 간결하게 적은 것은
처음이다.
"허어, 금강산의 경치를 이렇듯 쉽게 나타내는 방법도 있었구먼." 누군가는 탄식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들은 금강산 곳곳의 절경 앞에 할말을 잊고, 이것을 글로 옮길 적당한 문구를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이 초라한 나그네는 물 흐르듯이 쉬운글자로 술술 읊어버리니 감탄만이 나올 뿐이었다.
"아니 이런 재주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어찌 그토록 시침을 떼셨습니까 ? 우리가 그간 실례가 많았습니다. 과히 섭섭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뽐낸다고 이 주제꼴에 빛나겠습니까 ?
칭찬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선비들은 하인을 부르더니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술상을 차려 김삿갓을 상좌에 앉혔다.
"자, 드십시다. 거 볼수록 수작(秀作) 이로군"
김삿갓은 배불리 먹고 마셨다. 마신 술이 얼큰하게 올라오자 세상살이 사람의 일생이 한낮의 일장춘몽으로 여겨졌다.
"선비양반 , 이제 취향이 도도하시니 한수 더 들려주십시오. 귀를 씼고 기다리겠습니다."
김삿갓의 구술을 받아 적던 선비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하자 나머지 선비들의 이목이 김삿갓을 향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어떤 시가 나올까 기대 하면서 김삿갓의 거동을 주시한다.
"원 귀까지 씼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이처럼 대접을 잘 받았으니 감사의 뜻으로 한수 더 읊어보겠습니다."
김삿갓은 성큼 붓을 잡고 쓸줄 모른다는 글씨를 달필로 청산의 유수가 흐르듯이 쓱싹 휘갈기는데 ..
태산재후 천무북 / 泰山在後 天無北 대해당전 지진동 / 大海當前 地盡東
교하 동서남북로 / 橋下 東西南北路 장두 일만이천봉 / 杖頭 一萬二千峰
큰 산이 뒤에 있으니 하늘은 북(北)이 없고 큰 바다가 앞에 있으니 땅은 동쪽에서 끝났도다
다리 아래로는 동서남북 길이 뻣어있고 지팡이 든 머리에는 일만이천봉이 걸렸도다.
"명시로다 ,명시야 ..오늘 우리들이 운이 좋아 시신(詩神)을 만났구려."
좌중은 모두 넋을 잃고 있었다. 시도 시려니와 막힘없이 써 내려가는 김삿갓의 재주가 더욱 놀라웠다.
술김에 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다시 한수를 읊고 싶었다.
"이번에는 오언(五言) 시를 지어보겠습니다."
선비들은 다시 긴장했다. 자기들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시 한줄 못 이루고 쩔쩔매고 있었는데
남루한 차림에 삿갓을 쓰고 불현듯 나타난 젊은선비는 그대로 시신이요 천재였다.
김삿갓은 다시 필을 들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자를 휘갈겼다.
촉촉 금강산은 / 고봉이 만이천이라 (矗矗金剛山 / 高峰萬二千 )
수래 평지망 이나 / 삼야숙청천이라 (遂來平地望 / 三夜宿靑天 )
우뚝우뚝 솟은 금강산은 높은 봉우리가 일만이천이라
평지를 바라보고 내려왔건만 사흘밤을 청천에서 잠이들었네.
"허 , 또 .. 기가막히군."
선비들은 다시 무릅을 치며 감탄했다.
"처음에 두 줄은 평범하더니 끝에 두줄에 삼야숙 청천이라, 이거 사람 미칠 노릇이군."
한 선비가 김삿갓의 화선지를 들고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젖는다.
김삿갓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마셨으니 볼일은 끝이 났고 진짜 볼일을 보러 가야만 했다.
"아니 어찌 일어서시오 ?"
선비들이 깜짝 놀라며 김삿갓을 붙잡았다.
"어줍쟎은 글 덕에 잘먹고 갑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만나게 되겠지요."
김삿갓은 그 자리를 미련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곤 시승이 있다는 입석봉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했다.
방랑시인 김삿갓 (14)
*입석봉 신승
입석봉은 글자가 말해주듯 깎아지른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들은 짐승의 형상을 한것도 있지만 발돋움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상도 있었다.
"가히 만물상이로군 "
김삿갓의 입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헌데 시승은 어디에 살고있단 말인가 ?"
그는 바위 천지인 봉우리 아래쪽을 훑어 보았다. 시선이 머무르는 한 곳이 있었는데 둥그스런 큰 바위 아래로 노송 가지가 휘늘어진 밑에 초막같은 암자가 빼꼼히 보이는 것이다.
김삿갓은 지체없이 그쪽으로 바삐 걸었다. 길은 바위사이로 나있는 사람이 발로 밟은 자욱이 있는
구불구불 바위 사이 길로, 자칫 발을 잘못 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면 송곳 같은 바위끝에 뼈가 으스러질 판으로 보였다.
"자기가 무슨 은둔거사라고 이런 곳에 암자를 지었담"
김삿갓은 저절로 불평이 나왔다. 그러면서 아슬아슬 훠이훠이 땀 흘려가며 바위사이 비탈길을 내려와 암자밑에 다다르자 신기하게도 딴판으로 평지가 나타났다.
"허, 집터 한번 잘 잡았다."
이번에는 감탄이 나왔다. 뉘라서 이 높은 바위산 중턱에 평지가 있으리라 짐작인들 하겠나?
그러고보니 저 암자 속에서 시나 읊고 있을 노승이 신비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서 부터 암자까지는 싸리나무가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길이 통로 구실을 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소로를 따라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않은 법당이 있었는데 법당 가운데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중이 보였다.
김삿갓은 저 중이 바로 그 글잘하는 시승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조심 그쪽으로 다가갔다.
늙은 중은 조용히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김삿갓은 한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그를 불렀다.
"스님 ... ! "
불경소리가 멋었다.
"뉘시오 ?"
우렁우렁한 목소리였다. 고개는 여전히 숙인채였다.
"스님의 공부를 방해 한것 같아 대단히 죄송 합니다. 불초는 입성봉 밑을 지나는 과객 입니다."
"그럼 어찌 여기는 왔소 ?"
중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은채 대꾸를 하였다.
"바위의 형상이 가히 만물상이라 절경에 심취하여 발길을 옮기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허허 , 그럴리가 있나 "
김삿갓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자기의 말이 꾸며낸 것임을 이 늙은 중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이 다시 말했다.
"혹시 딴 생각을 하고 오시지 않았소 ?"
"딴 생각 이라뇨 ?"
김삿갓은 자기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는 이 늙은 중을 다시금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 보았다.
"방금 시주가 과객이라고 하지않았소 ? 적어도 자신을 과객이라 칭하려면 시문(詩文)에 능해야 할것 이니 과객은 시문에 통달 하였다는 말씀이 아니오 ?"
" ... "
김삿갓은 대답에 머뭇 거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후 입을 열었다.
"둔재의 몸으로 어찌 시문에 통달 하였다 말씀드리겠습니까, 다만 면무식을 면했다 여깁니다."
"겸손의 말씀이군"
"아니올시다. 실은 스님께서 시에 능하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가르침을 받을까 하여 찾아 왔습니다."
"하하하하 , 그럼 그렇지 ! "
늙은 중은 자기의 생각이 적중하여 기쁘다는 듯이 비로소 너털 웃음을 웃으며 김삿갓을 향해 돌아 앉았다."
김삿갓은 그의 얼굴을 보고 순간 다시금 감탄했다. 짧은 머리는 그대로 백발이었고 눈썹역시 하얗게 세었는데 그 아래 자리잡은 두 눈은 가을 호수처럼 맑으면서도 형형한 빛을 내쏘고 있었으니 ,
늙은 중은 가히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채를 하고 있었다.
"그래 이 빈승에게 가르침을 받겠다고 ? 보시오 . 젊은 시주 , 왜 시를 한번 겨루어 보겠다고 솔직히 말 못하고 어물쩡하는게요 , 그야 이 늙은이를 대접하느라 그렇게 말 했으리라 알고는 있소만."
"외람되게 견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도해 주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헌데, 빈승은 한 가지 괴퍅한 성질이 있습니다. 그 말도 시주께서는 들으셨소 ?"
올커니, 이 뽑는 이야기구나. 김삿갓은 그의 말뜻을 알아 차렸으나 내색을 하지않고 물었다.
"무슨 말씀 이신지요 ?"
"그럼 아직도 모르고 계신가 ? 우리 시를 주고 받는 내기를 함에 있어 한가지 약속을 하고
싶은데 , 그것은 어느 편이든 막히는 쪽은 진것으로 하되 진 죄로 이를 하나 뽑기로 합시다."
"당연한 말씀 입니다. 그 옛날 이백(李白)도 춘강(春江) 도리지원 (桃李之園)에서 시회를 베풀며
시불성(詩不成) 이면 주삼배(酒三杯)라 하여 벌주 세잔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
응당 벌을 받음이 옳을 것 입니다."
"하하하 ..과연 시주는 빈승과 좋은 상대가 될것 같소. 그럼 어서 이리로 올라오시오."
김삿갓은 법당 위로 올라가 늙은 중과 맞대고 정좌했다.
"빈승이 먼저 읊어갈 터이니 시주는 뒷글을 맞춰 주시오. 빈승이 더이상 부르지 못하거나 시주가 댓귀를 짓지 못하면 지는 것으로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시작 합시다."
늙은 중은 법당의 천정을 바라보며 이윽고 읊기 시작했다.
방랑시인 김삿갓
*(15) 시승과의 문답
노승 .. 조등입석 운생족 (朝登立石 雲生足)
아침에 입석봉에 오르면 구름이 발 밑에서 일어나고
삿갓 .. 모음황천 월괘순 (暮飮黃泉 月掛脣)
저녁에 황천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리도다.
노승 .. 간송남와 지북풍 (澗松南臥 知北風)
물가의 소나무가 남쪽으로 엎드려 있으니 북풍이 주는 것을 알겠고
삿갓 .. 헌죽동경 각일서 (軒竹東頃 覺日西)
마루의 대나무 그림자가 동쪽으로 기우니 날 저무는 것을 알겠노라.
노승 .. 절벽수위 화소립 (絶壁雖危 花笑立)
절벽은 비록 위태로우나 꽃은 웃으며 피어나 있고
삿갓 .. 양춘최호 조제귀 (陽春最好 鳥啼歸)
따듯한 봄볕 제일 좋은 때련만 새는 울며 돌아가네.
노승 .. 천상백운 명일우 (天上白雲 明日雨)
하늘의 흰구름은 내일의 비가 될 조짐이요
삿갓 .. 암간낙엽 거년추 (岩間落葉 去年秋)
바위틈에 떨어진 낙엽은 지난 가을의 흔적이네.
노승 .. 양성작배 기유일 최길 (兩姓作配 己酉日 崔吉)
양성의 혼사일은 기유일이 제일 좋고
삿갓 .. 반야생손 해자시 난분 (半夜生孫 亥子時 難分)
밤중에 애를 낳으려면 해자시가 어렵도다.
노승 .. 영침녹수 의무습 (影侵綠水 衣無濕)
그림자는 녹수에 젖었으나 옷은 젖지 아니하고
삿갓 .. 몽답청산 각불고 (夢踏靑山 脚不苦)
꿈결에 청산을 거닐었으나 다리는 아프지 않도다.
노승 .. 군아영리 천호가 (群鴉影裏 天戶家)
무리진 갈가마귀 그림자 속에 천호의 저녁이 저물고
삿갓 .. 일안성중 사해추 (一雁聲中 四海秋)
외기러기 울음소리에 천지는 사해에 잠겼도다.
노승 .. 가승목절 월영헌 (假僧木折 月影軒)
가중나무 가지가 부러져 달그림자가 추녀끝에 어른거리고
삿갓 .. 진부채미 산임춘 (眞婦菜美 山姙春)
참며느리 나물이 제맛이 든것 보니 산이 봄을 머금었도다.
노승 .. 석전천년 방도지 (石轉千年 方到地)
산위에 돌은 천년을 굴러야 땅에 이를 듯하고
삿갓 .. 봉고일척 감마천 (峰高一尺 敢摩天)
높은 봉우리는 한 자만 더하면 하늘을 찌를듯 하도다.
노승 ..청산매득 운공득 (靑山買得 雲空得)
청산을 사니 구름은 절로 얻은 셈이요
삿갓 .. 백수임래 어자래 (白水臨來 魚自來)
백수에 다다르니 물고기는 절로 오도다.
노승 ..추운만리 어린백 (秋雲萬里 魚鱗白)
가을 구름이 만리에 뻗쳤으니 고기 비늘처럼 하얗고
삿갓 .. 고목천년 녹각고 (枯木千年 鹿角高)
천년 묵은 고목은 사슴뿔 인양 높구나.
노승 .. 운종초아 두상기 (雲從樵兒 頭上起)
구름은 나뭇군 아이놈의 머리위에서 일고
삿갓 .. 산입표아 수중명 (山入嫖娥 手中鳴)
산은 빨래하는 계집의 방망이 소리에 울더라.
노승 .. 등산 조래갱 (登山 鳥來羹)
산에 오르니 새들이 쑥국쑥국하며 울고
삿갓 .. 임해 어처병 (臨海 魚萋餠)
바다에 가니 물고기가 풀떡풀떡 뛰더라.
노승 .. 수작은저 춘절벽 (水作銀杵 春絶壁)
물은 은 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삿갓 .. 운위옥척 도청산 (雲爲玉尺 度靑山)
구름은 옥자가 되어 청산을 재는구나.
노승 .. 월백설백 천지백 (月白雪白 天地白)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니 천지가 모두 희고
삿갓 .. 산심야심 객수심 (山深夜深 客愁深)
산도 깊고 밤도 깊으니 나그네의 수심도 깊도다.
방랑시인 김삿갓 (16)
*김삿갓의 고백.
김삿갓 ,노승과의 문답으로 어느덧 밤이 깊었건만 두 사람의 부르고 쫒는 시 짓기는 그침이 없었다.
노승이 부르면 김삿갓이 즉석에서 받고, 삿갓이 받으면 노승이 이내 불렀다.
부르는데도 막힘이 없으려니와 쫒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노승은 김삿갓의 뛰어난 실력에 내심 크게 탄복 하였다.
이것은 김삿갓도 다르지 않아 노승의 실력에 내심 찬사를 보냈다.
이렇듯 주거니 받거니를 계속 한다면 이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것 같았다.
"어허 , 내 평생 가장 뛰어난 시재(時才)를 만났구료. 더구나 젊은 나이에 이토록 무궁한 시상 (詩想)을 가지고 있다니 그저 탄복할 따름이오."
노승이 이렇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소생 금일에야 시선(詩仙)을 만나 뵈온듯 합니다.
대사님을 존경한다는 말씀밖에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 시선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외다. 내 칠십 평생에 수 많은 시객을 만났으나 진실로 탄복하기는 처음이요. 오늘 내기는 이 빈승이 진것으로 합시다."
김삿갓은 펄쩍 뛰었다.
"대사님 솔직히 말씀드려 오늘밤 겨루기는 승패가 없는줄 압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는 판단이고 실은 불초가 굴복하였습니다.
왜그런고 하면, 불초 비록 용자(用字)에 능해 대사님의 부름에 쫒았다 할지라도 그건 한갖 재주에 불과할 뿐 그 속에는 심오한 뜻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사님의 시 속에는 평범함 속에 오묘한 뜻이 서려있으니 어찌 이 미천한 불초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겠습니까. 대사님 앞에 무릅을 꿇습니다."
김삿갓은 진정 겸허한 인사말을 하였지만 이 노승을 높게 우러러 모시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누가 뭐라 하여도 이 노승의 시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했다.
"허허허, 빈승이 이겼다고요 ? 대체 그런 예의가 어디 있습니까 ? 빈승은 나이를 먹었으나 결국
나이값도 못하고 시주의 기도 꺾지 못했으니 빈승이 진것 입니다. 백중세가 되었다 할지라도말 입니다.
늙은이 대접 하느라고 이겼다고 하지 마십시오. 시주는 정말 대성할 분입니다.
헌데 어떡한다 ?"
갑자기 노승은 정색을 하고 김삿갓을 바라본다.
"무슨 말씀 이십니까 ? "
김삿갓은 영문을 몰라 노승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우리 처음에 약속을 하였잖습니까. 지는 쪽이 이를 뽑혀야 한다고, 헌데 빈승은 나이를 먹어 뽑을 이가 없으니 어떻게 약속을 지켜야 할지 걱정스럽습니다."
이 말을 듣고 김삿갓은 빙그레 웃었다.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이를 뽑힐 사람은 불초이온데 하물며 대사님의 이를 어떻게 뽑을 수있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은 후학을 너그럽게 보살펴 주시니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김삿갓은 정색을 하며 노승을 위로하였다.
"하하하, 고맙소 오늘처럼 즐거움을 맛보기는 칠십평생 처음이오. 나무관세움보살."
노승은 합장을 하면서 김삿갓에게 일예를 보냈다.
두 사람은 십년지기 처럼 갑자기 친숙해졌다.
김삿갓은 노승을 진정 마음속 깊이 스승처럼 존경하였고 노승은 젊은 시인을 둘도 없는 제자처럼
사랑했다. 두 사람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시를 논하고 천하의 경륜을 논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두 사람은 의기가 부합되었다.
결국 김삿갓은 한여름을 노승과 더불어 지내게 되었다.
시를 지어 주고받는 사이에 여름이 무르익어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글쎄 행색은 거지나 다름없는 젊은 과객이 입석봉 늙은 스님의 콧대를 꺾어 놓았다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노승과 김삿갓의 일은 사미승 밖엔 알수 없는 일이었건만 , 금강산 일대에 산재한 절과 인가에 이러한 말이 널리 퍼졌다.
말이란 한 사람만 건너가도 커지기 마련인가 ? 급기야는 늙은 중이 젊은 과객 앞에서 무릅을 꿇었다느니, 젊은 과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한다는등 ..별의별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렇게 김삿갓의 이름은 어느새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떠도는 말이야 어찌되었든 김삿갓은 노승을 깎듯이 섬기었다.
스승으로서의 존경의 선을 넘어 일종의 부정(父情) 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노승에게 자기의 내력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는 노승을 신뢰하고 있었다.
"오 그렇던가. 이제야 하는 말이네만 내 자네를가까이 두고 보면서 뼈대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네. 아무튼 비극일세. 나무관세움보살."
김삿갓의 집안 내력을 듣고난 노승은 눈을 감은채 이렇게 말하고 한동안 묵상에 잠겨 있었다.
"대사님 ! "
김삿갓은 자신의 내력을 털어놓고 나자 천만감회가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좀 해야 속이 풀릴것 같아 노승을 불렀다.
노승은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본다.
"대사님 불초에게 떨어진 기구한 운명은 어떻게 생각하면 전생의 업보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같은 운명을 맞기도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맞이하여 헤쳐 나가는 길은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어 집을 떠난 것입니다.
요즈음은 대사님 곁에서 즐거운 나날을 맞이하니 문득 불초도 불문에 입문하여 인간의 고해(苦海)를 건너가고 싶은 생각이 솟아 나는군요."
김삿갓은 솔직히 자신의 심경을 털어 놓았다. 노승이 인도만 하여 준다면 그의 제자가 되어 삭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승은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불문에 귀의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세.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자네에게는 시가 있으니까. 시는 자네의 슬픔을 위로하고 마음의 갈등을 진정시켜 줄것
이니까. 또 자네 삶이 어려울때 밝은 빛을 비쳐 줄 것이네.
노승은 김삿갓의 시를 높이 사고 있는 터라 그의 불문의 귀의를 만류하였다.
어느덧 김삿갓이 입석암에 머문 지도 달포가 넘었다.
계절은 늦은 여름 벌써 아침 저녁으로는 가을 기운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외출했던 노승이 돌아오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 술생각이 간절하지 ? 늙은 중과 같이 있자니 먹고 싶은 술도 못 먹고 꾹꾹 참고 있으려니 갈등이 여간 아닐걸세."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말하는 노승의 얼굴을 김삿갓은 의아스럽게 쳐다 보았다.
방랑시인 김삿갓 (17)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리도 박정해서, 봄날 지는 꽃만을 울어주느냐.
"대사님 , 갑자기 술 이야기는 어째서 하십니까 ? "
사실 술 생각이 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입석암을 훌쩍 떠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돌연 노승이 술 이야기를 꺼내자 마치 잊고 있었던 정든 여인의 이름을 듣는것 같아았다.
그러나 어째서 갑자기 술 이야기를 거내 놓는지 노승의 마음이 궁금했다.
"허허허 , 난 자네의 마음 속을 환히 알고 있네. 중이 되어가지고 자네에게 술 대접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마침 자네가 술을 실컷 마실 좋은 일이 생겼네."
" ..... "
김삿갓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수 없었다.
"입석봉 동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그럴듯한 절이 하나 있네. 내 지금 그 곁을 지나왔는데 천하에 내노라 하는 시객들이 모여 시회를 열고 있더구먼.
자네 심심할 것이니 거길 다녀오게 맛있는 술이 생길걸세.
그렇다고 너무 취해 돌아오진 말고." 김삿갓은 비로소 노승의 말을 알아 들었다.
"예. 시회가 열렸다면 구경을 가야지요. 얼마나 쟁쟁한 시객들이 모였는가 궁금합니다."
"이사람, 시객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술이 궁금하겠지 ? "
두사람은 너털 웃음을 웃었다.
"어서 다녀 오게나."
"예,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김삿갓은 술도 술이지만 시회를 열고있는 시객들의 수준이 더욱 궁금하였다.
그는 가파른 길을 조심하면서 입석봉 기슭에서 동편으로 휘돌았다.
노송이 우거진 가운데로 제법 큰절이 보였다. 절 입구 시내위로 누각이 올라서 있는데 선비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김삿갓은 단숨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누각 아래로는 근처 아낙네들 인듯 서너 여인들이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허허, 호화판 시회로구나."
김삿갓은 공연히 신명이 났다. 누가 아는체도 하지 않는데 그는 성큼 누각위로 올라갔다.
"뉘시오 ? "
시객들은 불쑥 나타난 김삿갓을 힐끔 쳐다 보았고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예, 천하의 고명하신 분들께서 시회를 열고 계시다기에 구경차 왔소이다. 물리치지 마십시오."
선비들은 삿갓을 쓰고 차림새가 허술하여 혹 강호를 떠돌며 어설픈 글로 술이나 빌어먹는 그런 부류로 알았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이 젊은 과객에서는 냉큼 얕볼수 없는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아 감히 물러가라는 말을 못했다.
선비들은 마냥 외면을 하였다. 김삿갓은 물러가라는 말이 없자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시를 가다듬고 있는 시제를 보니 가을이었다.
(허허, 벌써 가을이던가 ? )
김삿갓은 먼 산봉우리를 쳐다 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칠월 하순. 평지 같으면 노염(老炎)이
기승을 부릴 때 인데 이곳은 지대가 높은 산중이다 보니 벌써 찬서리가 내린 듯 ,먼 봉우리 중턱이 붉으스럼하게 보인다.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김삿갓의 가슴에는 가을에 대한 시상과 더불어 천만가지 감회가 아련히 깔렸다.
이런 김삿갓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선비들이 자기들 끼리 수근거린다.
"보아하니 사이비 과객은 아닌듯 하니 글을 한번 지어보라고 하면 어떠하오 ?
듣자하니 입석봉 시승을 이겼다는 젊은 과객도 삿갓을 쓰고 다닌다고 하는데 저 사람이 장본인인줄 뉘 알겠소 ?"
"그 삿갓을 쓴 과객은 지금 입석암에 눌러 있으면서 노승과 더불어 시선(詩仙)의 경지를 즐기고있다는데 여기에 나타날 일이 있겠소 ?"
"하지만 저 사람 거동으로 보아하니 뭐가 나올법도 하니 글제를 주어 봅시다."
선비들은 구수회의 하듯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후 한사람이 김삿갓에게 말을 던졌다.
"여보시오 보아하니 시상을 가다듬고 있는것 같은데 한수 지어 보겠소 ? "
김삿갓은 그렇지 않아도 시를 읊조리고 있던 차였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 불초에게도 기회를 주신다니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글제는요 ? "
"푸르던 나무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으니 이제 머지않아 낙옆이 짙게 되지 않겠소 .
떨어지는 잎을 보고 한수 지어보소. "
"예"
김삿갓은 간단히 대답했지만 이미 머리속에서는 어느새 한편의 시가 무르익었다.
"그럼 지필을 좀 빌려주실까요 ? "
"옛수 ! "
한 사람이 화선지와 붓을 내주었다. 김삿갓은 필을 들기 무섭게 싯귀를 죽죽 써내려갔다.
소소슬슬 우제제 / 매산매곡 혹몰계 ( 蔬蔬瑟瑟 又齊齊 / 埋山埋谷 惑沒溪 )
낙엽이 쓸쓸히 휘날려 / 산에도 계곡에도 시내에도 떨어지네
여조이비 환상하 / 수풍지자 각동서 ( 如鳥以飛 還上下 / 隨風之自 各東西 )
새가 나는 듯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 바람에 휩슬려 사방으로 흩어지네
녹기본색 황유병 / 상시구록 우갱처 ( 綠其本色 黃猶病 / 霜是仇綠雨更凄 )
푸른것은 나무의 본 얼굴이고 누런 것은 병색이라 / 서리도 원수이지만 가을비는 더더욱 처절 하구나
두자이하 정박물 / 일생하위 낙화제 (杜子爾何 情薄物 / 一生何爲 落花啼 )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리 박정해서 / 일생을 봄 날에 지는 꽃만을 울어주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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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8)
*입석암 노승과의 작별
마지막 글자가 붓끝에서 떨어지자 이를 지켜보던 좌중의 시객들은 숨을 헉하고 쉬었다.
순식간에 싯귀를 써내려가는 재주도 비상하였지만 화선지 위에서 용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서체며 그 글자들이 토해내고 있는 뜻들은 천하의 일품이었다.
장내는 시감에 몰입되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한 시객이 무릅을 치며 입을 열었다.
"기가 막히군. 대체 이런 글이 단숨에 나올수 있단말인가."
이 말을 신호로 시객들이 다투어 김삿갓을 칭찬했다.
그중 한 사람이 김삿갓을 요모조모 띁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선 혹시 입석암 시승과 다투어 이겼다는 바로 그 김삿갓이 아니시오 ? "
김삿갓은 빙그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초가 바로 김삿갓 올시다. 지금은 입석암 대사에게서 글공부 가르침을 받고있지요."
"허허 , 이거 뜻하지 않게 고명하신 분을 모시게 되어 무상의 영광이로소이다."
시객들은 김삿갓을 상좌로 모셨다. 모두들 기쁜 표정이었다.
술상이 지체없이 나왔다. 김삿갓은 술잔을 사양하지 않았다.
비록 시인이 아닐지라도 초가을 금강산의 미칠것 같은 이 풍치를 보면서 어찌 술을 사양할 수 있으랴.
김삿갓은 술 좋고 안주 좋아 두주를 불사하고 마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술을 마실수록 외로움과 막연한 그리움이 전신을 휩쌌다.
"선생 , 청컨데 한수만 더 보여주십시요. 시를 즐기고 배우는 우리들은 삼가 귀감으로 삼겠습니다."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붓을 들었다. 사실인즉 그들을 위해 시를 읊는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시를 읊었다.
장하거연 근소추 / 탈건포말 보사루 (長夏居然 近素秋 / 脫巾抛襪 步寺樓 )
긴긴 여름 물러나고 가을이 다가와 / 건을 벗고 맨발로 절간을 거니네
파성통야 순장적 / 알색화연 요옥부 ( 波聲通野 巡墻適 / 알色和煙 繞屋浮 )
시냇물은 졸졸 담을 끼고 감돌고 / 아지랑이 빛은 연기와 함께 집에 자욱이 퍼지네
주도공허 생폐갈 / 시유여채 상미수 (酒到處空 生肺喝 / 詩猶餘債 上眉愁 )
술을 다 마시고 빈병만 남으니 갈증만 더하고 / 시만 자꾸 생각하니 수심만 맺혀지네
여군분수 파초우 / 응상귀가 일몽유 ( 與君分手 芭蕉雨 / 應相歸家 一夢幽 )
그대와 파초잎에 비내리는 이곳에서 작별을하면 / 집에 돌아가서도 꿈속에 그리울 걸세.
김삿갓은 이렇게 시를 써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수심이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깊어져 눌러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발길이 닿는대로 바위를 기어오르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산길을 미친듯이 헤매다 저녁 나절이 되어서야 입석암으로 돌아왔다.
"꽤 늦었네 그려"
노승은 법당에서 그를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사님 , 산길을 좀 걸었습니다."
"그래 시회는 볼만 하던가 ? "
"술 몇잔에 제 시만 두어수 뺐기고 왔습니다."
"하하 그럴테지. 자네 시를 보고 모두 오금을 펴지 못했겠지 .. 헌데 술을 마신 사람같지 않구먼."
" 산길을 짐승처럼 헤매다 보니 어느새 다 깨어버렸군요."
노승은 김삿갓의 심중을 헤아리는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또 보름이 지나 추석도 지났다. 김삿갓은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불문에 귀이할 것도 아니면서 더이상 무료한 세월을 보내며 노승의 신세를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그는 자기의 생각을 노승에게 전했다.
노승은 묵묵히 앉아 있더니 다음과 같이 시 한수를 지었다.
백척단암 계수하 / 자문구불 향인개 (百尺丹岩 桂樹下 / 紫門久不 向人開 )
백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 싸리문은 오랫동안 닫혀 찾는 사람이 없네
금조홀우 시선과 / 환학간암 걸구래 ( 今朝忽遇 詩仙過 / 喚鶴看庵 乞句來 )
오늘 아침 홀연히 지나가는 시선을 만났으니 / 타고가는 학을 불러 암자로 그를 청해 불렀다네.
이별을 아쉬워 하는 노승의 김삿갓을 뜨겁게 사랑하는 시였다. 김삿갓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도 필을 들어 시를지어 노승에게 건넸다.
촉촉첨첨 괴괴기 / 인선신불 공감의 (矗矗尖尖 怪怪奇 / 人仙神佛 共堪疑 )
꼿꼿하고 뾰족하고 기이함이 더욱 신비해서 / 시선도 부처님도 신령님도 깜짝 놀라네
평생시위 금강석 / 급도금강 물감시 ( 平生詩爲 金剛惜 / 及到金剛 不敢詩 )
평생 소원은 금강산을 읊으리라 별러 왔는데 / 막상 금강산을 대하니 시가 나오지 않도다.
"역시 명시야 . 자네 떠난 후로도 몸조심하게."
"예, 발길이 닿으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날 노승과 점심상을 마주 대하고 석별의 정을 나눈후 김삿갓은 눈시울을 적시면서 입석암을 떠났다.
방랑시인 김삿갓 (19)
*구름따라 발길따라
입석봉을 떠난 김삿갓은 한동안 시냇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떠나오긴 했으나 막상 갈 곳을 정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짜증이 날법도 했지만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제 다시 올줄 모르는 금강산이니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나가 바다 경치나 구경하자.
그길로 북상하면 함경도 땅이 나오겠지."
내금강 곳곳을 돌아다니고 나니 어느새 구월 초순이 되었다.
산속에 가을은 빨리와서 벌써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도 눈에 띄었다.
김삿갓은 먹고 자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골마다 암자요. 절이 있었다.
간간히 풍류를 즐기는 시객도 있어 그는 술에 목마르지 않았고 밥 한 술에 배고프지 않았다.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넘어가는 길로 들어섰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해금강 까지는 백여리가 된다고 했지만 가늠할수는 없었다. 그저 마냥 걷고 목마르면 냇가에 물을 마시고 날이 저물면 암자나 절을 찾으면 그뿐이었다.
어느 감나무가 울창한 산골마을에 이르렀다. 산중에서 오랬만에 보는 동네였다.
집집마다 감나무에 빨간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김삿갓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마을로 들어섰다.
산골마을이라 돌담이 아니면 싸리나무 울타리였다. 밤은 벌써 다 털려 빈 가지만 남았는데 집집마다 감나무는 감을 잔뜩 매달고 휘늘어져 있었다.
김삿갓은 무심코 어느 돌담길을 휘돌다가 우연히 돌담 너머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곳에는 국화꽃이 만발해 있었다. 순간 김삿갓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국화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국화꽃 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는 처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처녀는 열여덟,아홉이나 되었을까 , 삼단같은 머리가 탐스러운 엉덩이 위까지 치렁치렁 내려뜨려져 있는데 겨드랑이 부근의 살이 터질듯이 불거져 나와 있었다.
김삿갓은 부지중에 침을 꿀꺽 삼켰다. 처녀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수 없음이 자못 안타까웠다. 그는 돌을 던져서라도 처녀의 주의를 이쪽으로 끌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뿐으로 얼굴을 더욱 담곁으로 바싹 붙이고 열심히 처녀의 자태를 감상하였다.
집을 떠나온지 어언 반년 , 한창 혈기가 들끓는 청춘은 그녀 쪽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다.
김삿갓은 오랬동안 잊고 있었던 춘정이 샘솟았다. 숨결이 더워지고 심장조차 쿵쿵 뛰었다.
그는 어느새 애타는 자기의 가슴을 시로 읊조리고 있었다.
산중처녀 대여양 / 완착분홍 단포상 (山中處女 大如孃 / 緩着粉紅 短布賞)
시집갈 때 다 된듯 무르익은 산중처녀 / 분홍빛 짧은 치마를 느슨하게 입었구나
적각창랑 수과객 / 송리심원 농화향 (赤脚창랑 羞過客 / 松離深院 弄花香)
살색 좋은 통통한 다리는 과객을 부끄러워 하고 / 소나무 울밑 으슥한 곳에서 꽃향기를 희롱하네.
김삿갓은 집을 떠나오기전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가 생각났다.
그리곤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돌려 돌담을 외면했다.
"지금쯤 아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
막연한 걱정과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계속했다.
이렇게 몇 고개를 넘다보니 멀리서나마 바다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벌써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우선 잠잘 곳이 급하게 되었다. 그는 인가를 찾았다.
지세를 보아 마을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산중에 홀로 있을수는 없었다.
한고개를 다시 넘었다. 주위는 벌써 어둠에 묻히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김삿갓은 서너호의 화전민 부락을 발견하였다. 우선 마음이 놓였다.
처마가 땅에 닿을듯한 토담집들이었다. 그는 한 집을 찾았다.
"주인장 계십니까 ? "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허스름한 차림의 사나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누굴 찾으시는지요 ? "
"과객이 날이 저물어 염치없이 찾아 왔습니다. 부엌도 좋으니 그저 산짐승의 해나 면하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손님 누추하지만 들어가십시다. 아무리 단칸방이라지만 이렇게 찾아오신 손님을 부엌으로 모실수야 있겠습니까 ? " 역시 가난한 사람일수록 인정만은 따듯했다.
김삿갓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공기는 매우 탁했다.
"손님 저녁 진지 드셔야지요. 저희도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산골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 살기
때문에 대접이 변변치 못합니다."
김삿갓은 미안하여 안절부절 하였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이거 너무 염치가 없군요."
그러면서 삿갓을 벗어 한쪽 구석에 놓았다.
이집도 식구래야 두 내외 뿐이었다. 부인이 저녁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조에다 감자를 섞은 밥이었다. 그동안 절간을 다니며 신세를 졌던 터라 하얀 쌀밥이나 보리가 반쯤
섞인 밥을 먹던 입맛이라 들여온 밥은 매우 껄끄러웠으나 주인 내외의 따스한 인정이 너무 훈훈하여 식욕이 절로 일었다.
저녁을 마친후 김삿갓은 주인 내외와 금강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방이라 어쩔수 없이 주인 내외와 동침을 하게 되었다.
때문에 잠자리가 몹시 불편하였다.
어설픈 잠자리였지만 설핏 잠이들었다 깨어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단칸방임을 불구하고 간밤에 잠을자게 되었으니 삿갓은 주인아낙을 볼 염치가 없었다.
아침이나 얻어먹고 어서 떠나리라 다짐하고 있는데 상이 들어왔다. 쌀이라곤 찾아 볼수 없는 보리밥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손님 대접을 하느라고 갖 지은 밥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식사를 마친후 그는 주인 내외에게 백배 치하를 한후 길을 떠났다.
왠지 뭉클한 감개가 앞을 막아 그는 시를 한수 읊었다.
곡목위상 첨착진 / 기간여두 근용신 ( 曲木爲橡 詹着塵 / 其間如斗 僅容身 )
굽은 기둥 찌그러진 처마는 땅에 닿으듯 / 방조차 북통만하여 겨우 몸을 움직이겠네
평생불욕 장요굴 / 차야난모 일각신 ( 平生不欲 長腰屈 / 此夜難謨 一脚伸 )
평생 긴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 했는데 간밤에는 다리조차 못펴고 새우잠을 잤구나
서혈연통 혼연칠 / 봉창모격 역무신 (鼠穴煙通 渾然漆 / 蓬窓茅膈 亦無晨 )
쥐구멍으로 연기가 통해 방안은 칠흑같이 어둡고 창에는 칡과 억새가 엉켜 아침도 모르더라
수연면득 의관습 / 임별은 근사주인 ( 雖然免得 衣冠濕 / 臨別慇 勤謝主人 )
비록 이렇기는 했어도 옷젖음을 면했으니 떠날때는 은근히 주인에게 감사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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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0)
* " 眼中七子 皆爲盜" ..안중칠자 개위도 (눈 앞에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다)
김삿갓은 외금강에 이르러 바다와 접한 금강산의 또다른 풍치를 마음껏 감상했다.
이제 계절은 중추(仲秋)로 접어들어 산중의 바람은 얇은 베옷을 헤집고 들어와 오한을 느끼게 한다.
그는 마침내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망망한 바다를 보니 막혔던 속이 확 트이는것 같으면서도 시름은 파도를 타고 더욱 간절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외금강에서 함경도 땅으로 가는 길은 바다와 육지가 숨박꼭질을 하는 길이었다.
바다를 끼고 나란히 길을 걷다가도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다는 갑자기 먼곳에 있었다.
이렇게 해금강이라 일컬어지는 외금강을 지나 북으로 발길을 계속하자 강원도 땅이 다하고 함경도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으로 들어선 큰 읍내는 통천(通川) 이었다.
통천은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삼백여호의 큰 읍이었다. 읍내 저자거리를 지나 어느 소슬대문이 거만하게 솟아 있는 집 앞에 당도하였다.
무슨 잔치가 있는지 사람들이 분주하게 대문을 들낙거리고 울 안에서는 기름 냄새와 더불어 음식냄새가 풍겨 나오는데 배가 고픈 김삿갓의 회를 요동시켰다.
김삿갓은 마침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 냉큼 물었다.
"이집에 무슨 경사가났소이까 ? "
"네, 윤진사 아버지의 회갑잔치라오."
김삿갓은 올커니 했다. 밥과 술을 넉넉히 얻어먹겠구나. 그는 다짜고짜 소슬대문으로 들어섰다.
"당신 누구요 ? "
하인인 듯한 사내가 문간 안에 서 있다가 사납게 소리친다.
"앗따 , 그사람 간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