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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2016. 1. 17(주일낮예배) 민수기 1:1-4, 출 30:12
히딩크의 어퍼컷세레머니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선수가 골인을 넣었을 때 히딩크가 날려준 어퍼컷세레머니는 흥분한 한국국민들의 흥을 더하여 주었다. 그런데 히딩크의 골세레머니보다 더 유명한 세레머니가 안정환선수의 반지키스 세레머니이다. 16강에서 한국은 이탈리아와 경기하였다. 그때 안정환선수가 패널티킥을 실축하였고, 그 후 이탈리아에 한골을 주어서 끌려가는 경기를 하였다. 그런데 후반 거의 마지막에 설기현선수가 한골을 넣어서 동점이 되었고, 연장전에서 안정환선수의 헤딩으로 골을 넣은 후 반지에 키스하는 일명 반지키스세레머니를 하였다. 그렇게 극적인 승리를 한 한국이 승리에 도취되어져 있을 때 이탈리아 감독은 편파판정으로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불쾌해 했다. 그렇게 불평하는 이탈리아 감독에게 히딩크 감독이 한 말이 거울이론이다.
남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라.
빗장수비로 유명한 이탈리아는 한골을 넣은 후 지루하고 재미없는 축구를 구사하였고, 또 교묘하고 팔꿈치로 선수를 치는 악질적인 반칙을 많이 하였다. 히딩크감독은 그렇게 비신사적인 축구를 하는 이탈리아감독에게 거울 좀 보라고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14년이 지나 히딩크 감독이 2016년 첼시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축구 명문구단인 첼시는 자타가 공인하는 엄청난 선수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그런데 선수들이 자기주장만 펼치다가 결국 최하위팀으로 하락하게 되어서 감독이 바뀌게 된 팀이다. 그러한 팀에 부임한 히딩크가 처음으로 한 말이 거울이론이었다. 2002년 이탈리아 감독에게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라고 한 히팅크는 또 다시 거울이론을 이야기했다.
내가 여기에 서 있다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거울을 들여다보라. 잠깐이 아닌 오랫동안
첼시의 감독이 된 히딩크는 개인적으로는 축구를 잘하지만, 팀웍이 무너져서 꼴지가 된 자신의 현주를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오랫동안 살펴서 그것을 고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거울을 본다는 의미이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라는 것이고, 또 고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거울을 보아야 할 일이 없는가? 민수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민수기 1장에 각 지파의 군사의 수를 계수하는 이 장면이 왜 제일 앞에 나와 있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민수기 9장을 보면 애굽땅에서 나온 후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그 시작이 애굽땅에서 나온 다음해 첫째 달에(민 9:1) 라고 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군사의 수를 계수는 출애굽하여 둘째해 둘째 달에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짜로 본다면 민수기 9장이 더 앞에 와야 하는데 출애굽 2년에 있었던 일이 제일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왜 모세는 군사수를 계수하는 것을 제일 앞에 두었겠는가? 그것은 군사의 수를 계수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수기를 기록한 모세는 군사를 계수하는 이 사건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서 온 후대의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기억할 수 있도록 제일 앞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민수기 1:1을 읽으면 군사를 계수하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하였다는 것을 또 알 수 있다. 먼저 읽어보기 바란다.
(민 1: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 회막으로 따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 말은 시내산과 시내광야는 다른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와 온 백성들이 시내산에 있는데 하나님은 그 중에서 모세만 시내광야로 부르셔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모세를 따로 부르셨는가? 모세가 미디안광야에서 이드로의 양을 칠 때였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가시떨기 나무에 불로 임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게하지 않고, 모세를 그곳으로 부르셔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무 중요하여서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따로 부르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씀하여 이르셨다고 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시간이 있으면 계수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 반드시 군사를 계수해야 돼! 말씀하고 있다. 지금 이 모습을 잘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그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군사를 계수하는 일을 왜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정채봉이 쓴 내 가슴속 램프라는 책에 개똥벌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개울가 언덕에 개똥벌레네 집이 있었다. 개똥벌레는 밤이면 사랑을 찾아서 훨훨 날아가는 이웃 나방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개똥벌레는 엄마개똥벌레에게 엄마 나도 저 나방들처럼 사랑을 찾아가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 엄마개똥벌레는 그러한 아들에게 너는 아직 어리다고 말렸지만 아들의 고집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손을 잡고 철길이 있는 방죽으로 갔다. 거기에는 열차의 불빛을 향해서 덤벼들다가 다친 나방들이 즐비하게 누워있었다. 머리가 깨어지고, 날개가 부러져서 죽어가는 나방들은 저 유리만 없었으면 님을 안을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만 가지고 있었다. 아들 개똥벌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유리만 없으면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을 데리고 엄마개똥벌레는 숲속의 야영장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모닥불에 덤벼들다가 타버린 나방의 시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맹목적인 사랑에 몸을 던져서 죽어가는 나방은 아들개똥벌레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그 후 아들 개똥벌레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들 개똥벌레는 통 말이 없었다. 그러한 아들개똥벌레에게 엄마는 사랑은 이루기 어려운 것이고, 또 오래 참아야 하고, 교만하지 말아야 하고, 또 앙심을 품지 말아야 하고, 또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 후 개똥벌레는 일편단심으로 별을 사모하였다. 이루기 힘든 사랑을 위하여 날개를 펼쳤다. 그래서 미루나무에 있는 별을 향하여 날아갔더니 별은 산위로 올라가버렸다. 그래서 개똥벌레는 산을 향하여 날아갔을 때 별은 더 멀리로 가버렸다. 그런데 개똥벌레는 그 별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별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힘차게 날개를 펼칠 때 엉덩이가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개똥벌레의 엉덩이에 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똥벌레의 꽁무니를 보고 반딧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별을 열렬히 사랑하였던 개똥벌레의 꽁무니에는 별의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출애굽기 3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 20세 이상의 장년들의 수를 계수한 사건이 있다. 그리고 그때는 속전이다고 하여서 세금까지 거두었다. 그 부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출 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들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처음에 숫자를 계수할 때도 20세 이상 군사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세금까지 내면서 계수에 들어간 이유는 내가 하나님께 속했으니 이제 하나님이 나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는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씀드리면 자기 바램과 필요에 의하여 계수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민수기 1장의 계수는 다르다. 출애굽기 30장의 계수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기 혼자 광야길을 건너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를 맡기고 의지하기 위하여 그 수에 들어왔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민수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길에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행군해서 나가는 그 길을 이방족속이 막아설 때 그들을 물리치는 그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의 숫자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군대를 계수하는 일을 유월절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여겨서 민수기 1장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주시고, 또 이스라엘의 앞길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물리쳐 주었는데, 이제 그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있는가? 저는 성직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이 주신 장소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는 성직자라는 개념으로 말할 때 신부와 스님은 성직자인데,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다고 말을 하는 분이 있다. 왜냐하면 신부와 스님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외로움 가운데 자신의 종교를 지키는데, 목사는 결혼도 하고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떻게 성직자냐?는 것이다. 아마 우리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왜 목사님들은 결혼을 하겠는가? 목사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가정을 돌보고, 또 목회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는 남편이고, 또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자식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지를 늘 체험하고 산다. 이렇게 가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도 알고, 또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아는 목사는 성도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희교단은 목사가 되려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목사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것은 가정만을 먹여살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자기가정을 위하여 목회를 한다면 그 사람은 삯군목사가 되고, 자기 가정을 최선을 다하여 돌보는 그 모습으로 성도를 돌아본다면 그 목사는 성직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저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성직자라고 하는 것은 목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받아 이 땅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여 산다면 그 사람은 삯군이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하여서만 돈을 벌고, 또 나와 내 가족만의 기쁨을 위하여 오늘도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삯군인 것이다. 그런데 나만 위하여 살지 않고, 내가 있는 곳에서 내 아픔과 어려움을 통하여 서로를 돌아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좋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좋은 성직자가 될 수 있겠는가? 출애굽기 30장과 민수기 1장을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출애굽기 30장의 계수는 혼자 광야를 헤쳐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속전을 내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는 무리로서의 계수였다. 그런데 민수기 1장은 하나님을 위하여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인의 계수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만을 위하여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변화되었는가? 출애굽기 40:17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받고, 또 성막을 다 세운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그 날이 며칠이었겠는가? 같이 읽어보자.
(출 40:17)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
시내산에서 언약을 받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성막을 건축하고 제사장을 세웠을 때가 출애굽 둘째해 첫째달이었다. 그리고 이제 둘째해 둘째달 첫째날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사를 계수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은 후 그들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들은 끌려가는 이스라엘공동체가 아니라, 헌신하는 공동체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들고 있는가? 오늘 오전예배 올라오기 전에 여원이가 유치부실에 올라가기 싫어서 울고 있었다. 그러한 여원이를 박순각집사님이 억지로 유치부실로 데리고 가고 있었다. 그때 제가 여원이를 목양실로 데리고 와서 30초를 데리고 있었는데 여원이가 깡충깡충 뛰면서 유치부로 내려갔다. 제가 이렇게 여원이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과자이다. 쵸콜렛을 주었는데, 여원이꺼만 준 것이 아니라, 여원이에게 한 개를 주고, 그 다음에 한움큼을 주면서 선생님께 가져다 주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여원이는 선생님께 드릴 과자가 손에 쥐어지자 깡총거리면서 유치부로 간 것이다. 무엇을 가졌느냐?하는 것이 이렇게 바뀌어 놓은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손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깡총거리며 갈 수 있다. 그런데 말씀이 없으면 억지로 와서 끌려가는 신앙인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손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서 주의 군대로 나아가는 주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히딩크가 말한 거울 앞에 서 보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시내산언약을 받기 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인가? 아니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인가?
이제 말씀을 맺는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흥행하는 영화는 이석훈감독 황정민, 정우 주연의 히말라야이다. 지난 목요일에 아내와 함께 히말라야 영화를 보면서 명대사가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히말라야 명대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여자는 산이야 산은 정복하는게 아니다. 살살 달래줘야지 하는 대사는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서비스스타일의 대사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했던 대사는 엄홍길대장이 박무택대원의 시체를 발견한 후에 울면서 했던 이새끼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너무 딱딱해 하는 대사는 시청자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리고 박무택대원의 시체를 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다 많은 위기를 넘기는 것을 무선으로 듣고 있던 박무택대원의 아내가 하는 말이 었다. 대장님 오빠가 산을 떠나고 싶지 않은가 봐요 그래서 결국 무택이를 산에 두고 올 때 많은 사람들은 남은 눈물을 다 흘려야 했다.
그런데 저에게 가장 감동이 된 대사는 엄홍길대장의 말이었다. 엄홍길대장은 라디오에서 산에 왜 오르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 엄홍길대장은 이렇게 대답한다.
해발 7천M에 올라가면 죽음의 고통을 느끼고, 또 8천M에 올라가면 그 죽음의 고통을 이겨가고 있다는 기쁨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제가 산에 오르는 것은 너무너무 고통스럽고 힘겨울 때 제 얼굴이 나옵니다. 비로소 가면을 벗는거죠.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맨 얼굴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저는 그 대사를 들으면서 사람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인간본심이 드러난다는 엄홍길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속에서 사람은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까? 궁금했다.
그런데 이런 저에게 엄홍길대장은 또 다른 말을 해 주었다. 엄홍길대장은 가장 훌륭한 산악인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엄대장님이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 엄홍길대장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대답한다.
박무택대원이 호흡이 곤란한 데스존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택이를 구하기 위하여 박정복대원은 혼자서 산을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박무택대원이 쓸쓸히 죽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그의 죽음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이 가장 훌륭한 산악인입니다.
왜 엄홍길대장은 박무택, 박정복 대원이 가장 훌륭한 산악인이다고 하였겠는가? 박무택대원은 자일을 끊었으면 자신은 살 수 있었다. 그런데 후배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배낭을 잘라버렸다. 그래서 후배를 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해서 죽어가는 박무택을 살리기 위하여 아무도 구조에 나서지 않는 최악의 기상에 박정복대원은 산을 올라간 것이다. 박정복대원이 올라가지 말라고 말하는 본부의 무전을 받고 한 말이 무택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였다. 박정원대원은 최악의 순간에 자기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 내 삶이고, 또 우리교회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모두 자기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허우적거리는 삶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 내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삶이 내 삶이되고, 또 우리교회의 모습이 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군대가 가지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자여교회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찾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