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기획] 포천에서 태어나고 묻힌 한국 천주교 창설의 주역 이벽 선생 / 양상현, 내외경제 tv, 2021.12.24
[수도권=내외경제TV] 양상현 기자= 지금으로부터 267년 전이었던 조선시대인 175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주역이었던 광암(曠菴) 이벽 선생은 포천시 화현면에서 태어났다. 건장한 체구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장래를 촉망받던 그는 불과 32살의 나이인 1785년에 포천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국 천주교 창설의 주역 이벽 선생 [사진-포천시]
그는 선교사가 한국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자생적인 한국교회를 만들어 교황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은 인물이다.
지난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3명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교황은 한국 천주교가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발생했음을 특별히 강론했다.
광암 이벽 선생의 출생지가 확인된 것은 지난 1978년 11월, 경기도 광주면 목리 나무골 이준희 가택에서 경주 이씨 족보가 발견되면서다. 오기선 신부와 박희봉 신부, 류홍렬 박사, 이원호 교수 등이 족보를 통해 화현면 화현리 543-1번지에서 부친 이부만의 자녀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벽의 묘소는 42년 전까지 포천시 화현면의 한 공동묘지에 버려져 있었다. 후손들은 이벽의 무덤이 우연히 발견되기 전까지 그 위치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1979년 4월 10일, 이벽의 묘는 화현면 화현3리 산 289번지에서 폐묘 작전에 발굴됐다. 무덤을 뒤덮은 소나무를 걷어내자 지석(誌石)이 나타났다. '통덕랑(通德郞) 경주 이벽지묘'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광암 이벽은 유교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던 조선시대인 1779년 당시 천진암에서 열린 강학회에 참여, 실학과 서학 위주의 학문 모임을 가지면서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신앙인으로 변화되는 일대 계기를 만든 주역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이벽은 조선후기 당시 서울 수표교 자신의 집을 거점으로 교리를 연구하는 등 이에 따른 천주교 전파를 해 왔으며, 1784년 당시 이승훈을 통해 이벽, 권일신, 정약용 등이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 천주교 창시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경주 이씨인 광암 이벽은 1754년 포천 화현에서 출생한 후, 유교사상으로 닫혀 있던 조선 후기 당시, 자생적 천주교 신앙을 싹 틔웠으나, 을사추조적발 사건으로 시작된 당시 시대의 탄압과 엄중한 이씨 집안의 문중 반대 속에서 효와 교리에 대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벽은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1785년 서울 명례방(현재 명동성당) 김범우씨 집에서 예배 중, 형조에 의해 가택 감금돼 32세(정조 9년 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당 내부에는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103명의 성인을 그린 순교 성화가 걸려 있다.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과 서양의 신부들, 그리고 신도들이 천주교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현재 가톨릭에서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성인으로 존경하고 있다. 1984년 103명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시복 시성이 있은 뒤 2차 시복 시성이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총 대상자 107명 중 28명은 성인 추진 리스트에서 제외되어 있다. 여기에 이벽의 이름이 보인다. 사망 사실이 불분명해 순교 사실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순교 증거가 불확실하고 배교 논란이 있어서 미뤄 왔던 복자(福者) 추천을 교황청 시성성에 할 예정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올해 3월 25일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諡福) 안건의 예비심사 법정 회기를 종료했다.
주교회의는 이벽을 복자로 추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국 천주교 초기를 이끈 그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선교사 전도가 아닌 자생적으로 신앙 공동체가 생긴 것은 한국 천주교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2월부터 33회기가 열린 교회법정 심사는 조선 왕조 시기인 1785∼1879년 박해로 죽임을 당한 천주교인 133명을 시복하기 위한 것이다. 시복은 교회가 공경할 복자로 선포하는 일을 말한다. 천주교 성인으로 추대하는 시성(諡聖)과 같은 맥락이다. 성인은 세계 교회 어디서나 공적으로 공경할 수 있고, 복자는 특정 교구와 지역, 국가 안에서 한정적으로 공경한다는 차이가 있다.
한국 천주교는 1984년 시성식, 2011년 시복식을 통해 103위 성인과 123위 복자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 천주교 역사 맨 앞을 연 이벽, 이승훈, 황사영은 빠졌다. 국내 교계에서 추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벽은 아버지 반대에 부닥쳐 동료 교인들과 연락을 끊은 것과 관련해 배교했다는 설과 효(孝)를 위해 물러서는 척했을 뿐이라는 의견이 대립해왔다.
남인 계열의 유학자였던 그는 청년 시기에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며 천주교를 믿게 됐다. 경기 광주의 천진암(天眞庵) 강학회 등을 통해 당대 학자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함으로써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신앙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1784년 이승훈에게 중국 사신으로 가는 부친을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서 세례를 받아올 것을 부탁했고,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그에게서 영세를 받아 정식으로 신자가 됐다.
이후 남인 계열 학자인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과 중인 김범우(金範禹) 등도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됐다. 이들은 명례방(明禮坊·현재 명동 대성당)에서 천주교 모임을 열고 했는데, 1785년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세상에 드러나 큰 타격을 받았다.
그 후 이벽은 아버지로부터 “네가 믿으면 나는 죽겠다"라는 식의 반대를 받았고, 가족에 의해 외딴 방에 갇혀 지내다가 요절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압수된 천주교 교리서들을 불태우고 양반이 아닌 중인 신자들만 체포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마무리될 사건이 아니었다. 천주교는 유교적 신분질서에 기반을 둔 양반 사회의 질서를 송두리째 흔드는 위험한 것이었다. 천주를 으뜸으로 공경하는 서학(西學)은 임금과 아버지도 모르는 금수(禽獸)의 학문일 뿐이었다.
양반 가문들의 불만은 빗발쳤고 마침내 천주교는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전국의 문중들은 서학을 배격하라는 통문을 돌렸다. 오랑캐와 같은 무리로 배척하고 집 밖으로 내쫓으라는 내용이었다.
이벽의 경주 이씨 문중도 격분했다.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문중 어른들에게 불려가 수치스러운 문책과 족보에서 제명시키겠다는 협박을 받게 된다.
불 같은 성격의 아버지는 아들을 호되게 야단쳤다. 가뜩이나 과거도 포기해 못마땅하던 터에 집안까지 망치게 할 서학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문중을 다니며 잘못을 고백하고 천주교와 절연하겠다는 반성문을 제출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집요한 설득에도 이벽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이부만은 이벽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부만은 마침내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한다. 천주교와 절연하지 않으면 목을 매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앙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아버지를 죽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 이부만은 모진 마음을 먹는다. 이벽을 별당에 가두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다. 문중 사람들에게는 이벽이 천주학을 하다가 몹쓸 병에 걸렸다고 알렸다. 문중 사회에서 집안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효와 신앙, 그것은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였다. 마침내 이벽은 때가 왔음을 깨닫는다. 목욕을 하고 의관을 정제했다. 단식 15일째인 1785년, 32살의 나이로 이벽은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이벽의 시신을 수습하며 또 다른 사망설이 바로 제기된다. 이벽의 치아가 검게 변색되어 있었던 것이다. 발굴에 참여한 해부학 교수는 음독이 사망원인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병사, 살해, 독살 등 이벽은 집안에 갇혀 외부와 단절된 채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정확한 사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이벽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벽이 본격적으로 천주교 신앙 활동을 한 것은 불과 1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혼자만의 공부를 넘어 사람들을 모아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힘이 있는 기성 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효냐, 신앙이냐,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결코 쉽지 않은 갈등이다. 어쩌면 이벽이 겪었던 갈등은 낯선 외래 종교인 천주교가 이 땅에 접목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진통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벽의 죽음에 관한 역사적 판단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이벽의 사망 사실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 가톨릭 대사전에는 이벽을 순교자로 보는 시각과 그렇지 않다는 평가가 모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벽이 배교했을 가능성은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서 비롯된다. 그는 조선 순교의 역사를 정리해 비망기를 편찬했는데 여기에서 이벽을 제외했다. 아버지를 쫓아 학문을 버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벽은 과연 신앙을 저버렸던 것일까?
아버지가 자결하겠다는 협박까지 하자, 그럼 나가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대답이 두 가지로 해석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효(孝)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다.
서양인인 다블뤼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조선순교사 비망록에는 이벽이 배교적 행위에 양심이 가책을 느껴 낙심 끝에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고 나와 있다.
경주 이씨 족보에는 이벽의 죽음에 대해 의구심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사망 연도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원인이 전염병인 페스트였다면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친족이 있을 것이다. 이벽이 숨진 시기는 을사년인 1785년이고, 아버지는 그로부터 30여 년 뒤, 그의 형은 40여 년 뒤에 사망했다. 그뿐만 아니라 족보 어디에도 그 당시에 죽은 사람이 없었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던 이벽 선생은 국내 교계에서 ‘순교자’ 지위를 공식적으로 얻었다.
이러한 그의 출생지며 생가였던 포천시 화현면 일원에 천주교 성지가 조성됐다.
포천시는 이벽 선생의 생가터 주변을 천주교 성지로 조성하기 위해 지난 2009년 12월 4일 대진대학교에서 이벽 선생 학술심포지엄 개최 등 유적지 정비사업조성에 따른 기본설계와 실시계획를 통해 사업을 추진했다.
포천시는 이벽 선생의 생가인 화현면 화현3리 542-22번지 일대를 천주교 성지로 조성하기 위해 매입한 8336㎡의 부지와 춘천교구 소유부지 7402㎡ 등 연면적 2만 1287㎡의 부지에 사업비 50억 원(도비 33억 원, 시비 17억 원)을 들여 한옥 형태의 생가터(25.2㎡), 기념관(82㎡), 묘역 정비, 화장실(48.96㎡), 야외공연장 및 편의시설 등 건축 연면적 350,50㎡를 올해 7월 준공했다. 현재는 하자보수 공사 중이다.
시 관계자는 "이 지역이 전국 천주교 주요 성지 29곳 중, 한곳이 될 것"이라며 "현재 약 530여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 중, 연간 20만여 명 이상의 신자들이 이곳을 방문할 것으로 예상돼, 내년도부터는 포천문화재단으로 업무를 이관해 본격적으로 이벽 선생의 업적 발굴하는 등 적극적인 스토리텔링화를 위해 학술심포지엄 개최 등을 계획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첫댓글 관심이 많습니다.
아침내 가브리엘 형제가 페북에 올린 자료 글자 키워 복사할 준비하느라 대강 읽었습니다.
이글도 오늘 아침에서야 봅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