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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은 수많은 앙트레 프레너(프랑스어로 큰사업의 기업가를 의미)들을 탄생시키며 세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불과 2백년전만 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미래였다.
존 스틸 고든/작가(부의 제국, 해밀턴의 은총, 저자)-미국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앙트레 프레너쉽이 전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이민자 정신 때문입니다. 모두가 패기에 차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의 후손들입니다. 이민자들이 건설한 나라, 그곳은 도전과 모험이 삶의 방식이었다니 앙트레 프레너들에겐 어떤 잇점이 있는 환경이었을까.
존 스틸 고든-미국에는 귀족계층이 없었습니다. 고유한 상류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영국보다 훨씬 더 유동적인 사회였습니다. 유럽의 보수적인 신분질서로부터 자유로웠던 초기 미국, 그곳에서 농업국가였던 미국을 산업대국으로 만든 앙트레 프레너들이 탄생했다.
김두얼/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미국은 건국 초부터 프랜시스 로웰, 밴더빌트, 카네기, 록펠러, 에디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뛰어난 앙트레 프레너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이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19세기말 태동한 거인 앙트레 프레너들은 철도와 석유로 거대한 미국 대륙을 움직였고 강철로 도시와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철도왕 코넬리어스 밴더빌트(1794~1877), 석유 재벌 존 D 록펠러 (1839~1937),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1806~1919),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1847~1939), 미국과 인류에 새로운 빛의 세계를 선사했다.
그리고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인류에 가져다 주었다. 대량생산의 아버지 핸리 포드(1863~1947), 19세기말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에서 일어났던 앙트레 프레너들의 폭발적인 번성,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앙트레 프레너들이 그저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니라면 이들의 성장을 도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식민지에 불과했던 미국이 영국의 산업을 단시간에 따라 잡을 수 있었던 비밀에는 유럽과는 전혀 다른 미국만의 고유한 시스템이 존재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거대한 대륙 위에 건설된 그 특별한 시스템 위에서 앙트레 프레너들이 번성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것을 그들이 걸어온 미국만의 길, American System, American Way 라고 부른다.
아메리칸 시스템을 만든 첫번째 공헌자는 미국의 초대 재무부에서 탄생했다.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고 마침내 건국의 아버지중 한 명이 된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 미국 초대 재무부장관, 이민자였던 그가 어떻게 독립정부의 초대 재무부 장관이 되고 미국 지폐에 까지 얼굴을 남기게 되었을까.
1787년 해밀턴이 미국인들에게 보낸 한 강력한 문장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13개의 주들을 확고한 단일연방으로 구성하고 유럽을 뛰어넘는 하나의 아메리칸 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 미국 역사에 아메리칸 시스템이라는 중요한 단어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리처드 브룩하이저/작가(건국의 아들, 알렉산더 해밀턴과 미국, 저자)-미국 경제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은 초대 재무부 장관 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입니다. 리처드 실라/뉴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저는 그가 이룬 성과를 미국 경제사의 빅뱅이라고 부릅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여섯명중 유일한 이민자였던 해밀턴, 앙트레 프레너였던 그는 자신이 정착한 기회의 땅, 미국에서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삶을 살았다.
카리브 해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10대 때부터 사탕수수 농장과 무역회사 점원으로 일하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의 서인도제도에선 유럽과 신대륙을 잇는 중개무역이 활발했다. 해밀턴은 설탕, 럼, 노예 등 서인도제도를 오가는 국제적인 거래를 직접 보고 배웁니다.
리처드 브룩하이저-배가 물건을 싣고 드나드는 걸 보며 주문을 받고 모든 물건의 선적과 하역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명석했고 경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카리브 해의 노예들과 불평등한 계급구조를 보고 자라며 10대 때부터 많은 글을 썼던 해밀턴, 그에게 배움의 기회가 찾아왔다.
고든 우드/미국 브라운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상인들이 말하길, 이 아이는 워낙 똑똑하니 뉴욕에 있는 대학에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후에 컬럼비아 대학교가 된 킹스칼리지로 가게 됐습니다. 그는 영민했기 때문에 자신의 학업을 2년만에 다 해냅니다. 그리고 10대 때 이미 미국 독립혁명의 대의를 위해 소책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해밀턴이 미국에 와서 목격한 풍경은 영국 본토와 식민지 사이에 고조되는 갈등과 혼란이었다.
보스턴 차 사건(1773년). 영국의 과도한 세금징수에 식민지인의 반발은 커져갔고 영국과의 통상을 중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3개의 식민지들은 연합했고 영국군의 철수를 주장하며 실질적인 저항에 돌입했다. 해밀턴은 혁명적 가치관에 경도되었고 미국인들이 영국의 예속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자신만의 법, 자유로 살아간다, 다른 이의 법으로 살아가는 것은 노예다, 당신은 노예가 되고 싶은가?
독립전쟁에 참여한 해밀턴은 전쟁터에서 조지 워싱턴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워싱턴과 해밀턴은 독립전쟁에서 처음 만납니다. 해밀턴이 뉴욕 포병중대 대위였고 워싱턴이 총사령관이었죠. 워싱턴은 항상 재능있는 젊은이를 찾았습니다. 그가 총사령관으로서 행정 업무가 아주 많았죠. 워싱턴은 해밀턴의 총명함을 파악하고 곧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했다. 그들 사이에 특별한 유대감이 형성되죠. 워싱턴에겐 아들이 없었고 해밀턴은 아홉살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죠. 그래서 아들없는 남자와 아버지를 잃은 젊은이가 서로 통했던 겁니다.
워싱턴의 보좌관이 된 해밀턴은 독립군 군대의 모든 행정 업무를 도맡았다. 재정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군대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 독립젼쟁 내내 워싱턴이 처한 상황이었죠. 군인들이 급여를 못받았고 물자도 부족했죠. 그런데 이 문제들을 이해하는 똑똑한 젊은이가 나타납니다. 좋아! 그에게 해결하라고 해! Let him solve them.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자 해밀턴의 해결능력도 한계에 도달했다.
해밀턴: 미국에도 제조업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군수용품을 프랑스와 다른 나라로부터 빌리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대륙회의에선 부족한 물자를 언제 보내준다고 합니까?
워싱턴: 여기 답신이 왔네. 워싱턴 장군, 장군이 요청하신 물자는 대륙회의에서 토론한 다음에 각주의 의견을 모아 위원회를 결성하고 다시 그 위원회의 결정으로 지급해야 함을 알려드립니다. 당시 미국은 13개 주로 나뉘어져 있었다. 대륙회의는 각 주 대표들이 모인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했으며 의사결정과정은 한없이 느렸다.
고든 우드-대륙회의를 잘 이해하려면 이들이 독립 주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독립 13개 주를 선언한 것으로 이들은 오늘날 거의 EU가 하는 식으로 하나가 됐습니다. 이들 각 주는 스스로를 개별적이고 독립된 주로 봤습니다. 대륙회의는 오늘날의 유엔과 같았습니다. 여러 주에서 대표를 파견하지만 그 대표들은 주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투표해야 하죠.
존 스틸 고든-그래서 대륙회의는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능함을 드러냈습니다. 해밀턴: 한시가 급한 일을 두고 13개 주의 토론 후에 결정한다니요. 도대체 지금 그 사람들은 우리가 전쟁중인 걸 알고나 있습니까? 워싱턴: 우리의 대륙회의가 원래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 않나? 13개 주의 대표들이 각자 입장이 다르니 말일세. 해밀턴에겐 영국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연방에 대한 열망이 절실했다.
그는 워싱턴을 도와 요크타운 전투에 참여하고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요크타운 전투-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벌어진 미국 독립전쟁을 사실상 종결시킨 전투). 그 결과 미국은 빚더미에 앉았다. 독립전쟁 때 빌린 막대한 부채로 파산위기에 처한 미국, 하지만 각 주 대표들은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서로 다투고만 있었다. 해밀턴은 미국의 경제를 구제하려면 흩어져있는 주들을 하나의 강한 연방으로 묶어 경제를 통합해야 한다고 믿었다.
해밀턴: 미국 민중들은 가난하고 절망에 빠져 있어요. 제가 이 문제의 특효약을 알고 있습니다. 강한 정부입니다. 하지만 빨리 이 약을 쓰지 않으면 환자는 죽어버릴 것입니다. 해밀턴이 남긴 연방주의자 논설에는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이 필요하다고 설득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연방주의 논설-미국의 헌법을 비준시키기 위해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메디슨, 존 제이가 쓴 에세이 모음).
고든 우드-연방주의자 논설은 헌법을 위한 변론이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서가 됐죠. 해밀턴은 중요한 주였던 뉴욕을 아메리카 합중국에 가입시키고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게 만든 주역이었습니다. 이민자들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나라 미국은 각 독립한 신생 국가의 헌법에는 어떠한 귀족의 계급도 허용하지 않고 모든 시민들의 평등한 재산권을 명시하고 있다.
김두얼-헌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의무와 권리를 어떻게 확장한 것인가와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의무와 권리를 확장한다는 것은 곧 국민들의 재산권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재산권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도록 하는 국가의 능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래리 스웨이카트/미국 데이턴 대학교 역사학 교수-미국 헌법은 여러 방면에서 비즈니스 문서입니다. 헌법을 들여다보면 거의 모든 구절마다 비즈니스에 대한 지원과 관련이 있죠. 예를 들면 특허법과 저작권이 있습니다. 뭔가를 발명한다면 그 발명품을 7년간 소유할 수 있습니다. 7년간 거기서 수익을 낼 수 있죠. 미국 헌법내의 이런 여러 요소들이 사업과 창업을 장려합니다.
1789년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은 새 헌법을 기초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이 정부의 성공의 바탕이 될 드넓은 전망 신중한 헙의 및 지혜로운 법안들도 신성한 축복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대통령이 된 워싱턴은 자신을 도와 줄 재무부 장관으로 당시 경제 분야에 가장 능통했던 해밀턴을 임명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했던 토머스 제퍼슨을 국무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두 사람은 워싱턴의 양 날개가 되는 순간,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정적이 된다.
부채해결과 경제회생이 우선 과제였던 해밀턴은 재무부 규모를 키웠다. 해밀턴 휘하의 재무부 직원이 570명이 넘는데 비해 제퍼슨 휘하의 국무부 직원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작은 정부만이 시민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믿었던 제퍼슨은 해밀턴을 강하게 반대한다.
토머스 제퍼슨/미국 초대 국무부장관-해밀턴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주 정부의 자치권을 약화하는 행위로 우리가 그렇게 벗어나고자 했던 영국 군주제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최우선 과제는 국가 신용의 회복입니다. 제퍼슨이 강조하는 시민의 자유를 계속 보장받으려면 말이죠.
고든 우드-그들은 연방정부의 규모를 두고 대립했죠. 반연방주의자인 제퍼슨은 훨씬 더 약한 중앙정부를 원했습니다. 거의 모든 것에 견해가 달랐습니다. 미국 정부의 구상, 미국의 미래에 관해서 말이죠. 미국이 걸어가야 할 미래를 두고 세력이 갈라졌다. 양당정치의 시작이었다.
해밀턴파/연방파, 제퍼슨파/공화파. 경제의 이상을 먼저 실현하려는 해밀턴과 정치의 이상을 먼저 실현하려는 제퍼슨이 그 우두머리였다. 해밀턴의 연방파를 지지하는 이들은 동북부 해안도시의 상공업 세력들이었고 반면 제퍼슨의 공화파를 지지하는 이들은 노예제와 농장에 기반을 둔 남부의 농업세력들이었다.
고든 우드-토머스 제퍼슨이 나의 조국에 대해 말할 땐 미국이 아니라 버지니아를 말한 것입니다. 해밀턴은 특정 주의 정서적 헌신이나 충성심이 없었습니다. 생애의 많은 시간을 뉴욕에서 보냈지만 뉴욕 밖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제퍼슨에겐 버지니아 주, 존 애덤스에겐 매사추세츠 주, 이런 충성심이 해밀턴에겐 없었죠. 그래서 해밀턴이 훨씬 더 대륙적인 사고를 했죠.
재무부 장관이 된 해밀턴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부채해결이었다. 독립전쟁을 통해 자유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빚더미에 앉게 된 신생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 해외에서 빌린 부채가 1200만 달러였고 (프랑스 네델란드 부채원금 +이자 180만 달러포함), 수천명의 미국인들에게 연방정부가 지고 있는 부채도 4100만 달러에 달했다 (연방정부 부채원금 2900만 달러+이자 1200만 달러). 발행지가 제 각각인 주 정부의 부채도 2600만 달러가 넘었다 (주정부 부채). 신생국 미국이 지고 있는 총부채는 7900만 달러, 당시 국내 총생샌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래리 스웨이카트-해밀턴이 재무장관으로서 했던 주된 업무는 바로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대출을 원한다면 새로운 대출을 받기 전에 그전의 대출을 갚아야 한다는 거죠. 해밀턴은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고 미국의 신용을 회복할 기회에 착수한다. 부실채권을 새로운 국채로 교환하는 것이었다. 언제 파산할 지 모르는 채권들이 연방정부의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된 새로운 채권으로 교환됐다. 만기도 없고 이자율도 낮아졌다. 연방정부의 확실한 지불보장이 해외투자가들에게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리처드 실라/미국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채무 불이행 상태의 쓰레기 채권이 신뢰도가 높은 채권으로 바뀌었습니다. 외국인들이 미국의 국채를 사들였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오늘날 일본, 중국, 기타 국가들이 미국 국채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해밀턴이 마법을 부렸던 시기에 시작됐습니다.
해밀턴: 국립은행 설립을 들러 싸고도 큰 논쟁이 벌어졌다. 국립은행을 설립해야 합니다. 공적자금을 보유하고 시민들에게 이자를 지불할 기관이 필요합니다. 제퍼슨-반대합니다. 국립은행은 투기와 부패를 가져올 것입니다. 은행은 미국을 부정부패의 나라로 만들 것입니다. 해밀턴은 국립은행의 설립이야말로 유럽의 경제대국과 경쟁할 수 있는 아메리칸 시스템의 초석이라 여겼고 의회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렇게 탄생한 미합중국 제1은행은 필라델피아를 필두로 전국으로 지점망을 넓혀 나갔다.
리처드 실라-연방은행 설립으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금융의 관점에서 가끔 제가 미국 경제사의 빅뱅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은 해밀턴 아래에서 좋은 금융시스템이 있었고 이것이 미국사에서 많은 앙트레 트레너쉽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민자 출신의 해밀턴이 구상했던 미국의 미래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산업국가였기 때문에 해밀턴은 미국내의 제조업을 우선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제퍼슨을 필두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은 미국이 부유하고 평화로운 농업국가로 자리잡기를 원했다.
제퍼슨: 나는 우리 정부가 앞으로 수백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서가 붙습니다. 시민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할 것이라는 조건입니다. 농업국가야말로 평화를 보장하고 공화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밀턴의 전망은 달랐다.
해밀턴: 제조업을 우선적으로 육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국이 이루어낸 경제성장을 단시간에 미국에서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특정제조업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며 산업을 육성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리처드 실라-1790년대 살았던 사람들의 시점으로 보면 제퍼슨의 관점이 비교우위의 면에서 더 사리에 맞았을지 모릅니다. 그는 미국이 땅이 많아서 오랫동안 농산물을 수출하는 농업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해밀턴은 비교우위는 바꿀 수 있고 농업국 뿐만 아니라 산업국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드아일랜드의 포투켓 시에는 해밀턴의 시대에 만들어진 미국 최초의 수력발전 면사공장이 자리하고 있다. 설립자인 사뮤엘 슬레이터(1768~1835) (미국 최초의 방직공장 설립자)는 영국의 섬유제조 기술을 가지고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온 이민자였다. 당시 영국은 직물산업을 국가기밀로 취급하고 있었고 슬레이터는 농부로 위장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 당시 가장 손실이 컸던 두뇌유출이었다.
존 스틸 고든-당시 영국에서는 최첨단 기술이었습니다. 영국은 그 기술의 수출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경쟁을 원치 않았던 거죠. 그래서 기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 도면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도면을 혼자 내버려두어도 안되었죠. 그래서 슬레이터는 기계를 통째 외웠습니다. 어떻게 전과정을 만드는지 그 도안을 머리 속에 다 넣었죠.
해밀턴: 새뮤엘, 당신이 만든 방적기를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확산시키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슬레이터: 1년이면 뉴잉글랜드의 모든 방적기술은 이와 같은 것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장담하지만 영국이 했던 것 보다는 빠를 겁니다.
슬레이터의 장담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가 도입한 새로운 방적기술은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확산됐고 그가 세운 마을은 미국 산업혁명의 씨앗이 되었다. 해밀턴은 유럽의 숙련된 앙트레 프레너들을 미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특별한 지원을 시작했고 더 많은 외국의 기술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대에서 미국의 유한회사수는 8개에 불과했지만 해밀턴의 시대에는 3천개 이상으로 늘었다 (3884개).
그러나 해밀턴의 세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워싱턴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해밀턴은 정치적으로 고립됐고 1804년 정적이었던 앨런보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해밀턴은 49세의 젊은 나이에 뉴욕 트리니티 교회에 묻혔다. 오랫동안 당대의 정치인들은 이민자였던 해밀턴을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고 여겼다. 해밀턴이 미국경제의 아버지로 평가 받게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해밀턴의 무덤 근처에는 월스트리트와 주식거래소가 자리하고 있다. 카리브 해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가 앙트레 프레너의 꿈을 펼치며 도착했던 뉴욕은 이제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됐다.
로웰/미국 매사추세츠, 해밀턴이 세상을 떠난지 10년 후 동시대인들이 비웃었던 제조업국가로의 전환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미국 제조업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시스 로웰이었다 (프란시스 로웰-미국 최초의 역작기 제작 보스턴 제조회사 창설).
존 스틸 고든-그를 기념하여 매사추세츠 주에 로웰이라 불리는 도시가 생겼습니다. 백년간 뉴잉글랜드를 지배해온 위대한 뉴잉글랜드 직물산업의 시초였죠. 엄청난 규모의 로웰 공장은 진정한 미국식 공장제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직공을 최초로 고용했으며 미국 초기 여성지도자들을 대부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래리 스웨이카트-로웰 공장은 독특한 일을 벌였습니다. 농장을 찾아가 농부들에게 이 공장에서 일하도록 딸들을 보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죠. 그것의 결과가 ‘조웰 걸스’였습니다. 농부의 딸들은 로웰 직물공장내의 기숙사에서 거주하며 교육을 받고 좋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남성이 받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당시엔 꽤 좋은 임금이었죠. 거대한 숫자의 미국 여성들이 농장에서 보다도 노동인력으로 성공했던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로웰 공장의 여성들은 섬유산업을 발전시켰고 미국 산업혁명의 주역이 됐다. 농부의 딸들이 도시의 경제를 일구면서 미국의 제조업은 급속하게 발전했다. 혁신은 또다른 혁신을 낳았고 농업현장에서도 공장지대에서도 많은 앙트레 프레너들이 배출됐다. 사이러스 맥코멕(수확기 발명가), 일라이 휘트니(조면기 발명가), 일라이어스 하우(재봉틀 발명가).
리처드 실라-미국은 기본적으로 해밀턴 노선을 따라 발전했습니다. 해밀턴은 재정이 정치력과 경제발전의 열쇠란 걸 깨달은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산업기술의 가능성을 보았고 미국 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럴 수 있다면 공산품을 수입하는 대신에 자체 생산을 하는 나라가 국가의 안보에 더 좋은 거라고 생각했죠. 제조업 보호정책 외에 아메리칸 시스템의 또다른 중요한 열쇠는 운송망이었다. 미국운송망 발전의 토양이 되는 커다란 사건이 1803년 벌어진다.
초대 국무부장관을 지낸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이었다. 해밀턴 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축소된 시기 공화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제퍼슨에게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스페인 정부가 뉴올리언스를 프랑스에 반환했습니다. 앨버트 갤러틴(1781~1849)/재무부 장관, 스페인에게서 프랑스로 반환된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무역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항구였다.
제퍼슨은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를 매입하기로 했다. 리빙스턴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뉴올리언스가 아닌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라고 하는군요. 나폴레옹이 제시한 가격은 얼마입니까? 1500만 달러입니다. 현재 화폐가치로는 2억 4천만 달러 한화로 2800억원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루이지애나가 미국 영토가 되면 미국은 우리가 늘 꿈꾸었던 이상적인 농업국가가 될 것입니다. 해밀턴이 쌓아놓은 신용덕분에 자금을 조달 할 수 있었던 제퍼슨은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루이지애나 주 전체를 미국의 영토로 만들었다.
고든 우드-미국 역사상 최고의 흥정이었죠. 4센트인가를 지불했으니까 말이죠. 리처드 브룩하이저: 영토가 엄청나게 확장된 셈이죠. 연방의 심장부였던 워싱턴 시는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인해 한쪽 귀퉁이로 밀려났다. 리처드 브룩하이저: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나라 크기가 두배가 됐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이죠. 미시시피 강 너머로 거의 태평양 까지 서부가 열렸어요. 미국인들이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끝까지 가보자!
바야흐로 미국의 영토확장 역사가 시작됐다. 미국은 서부로 서부로 뻗어나갔다. 마침내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광대한 대륙이 미국의 영토가 됐다. 1819년 플로리다 할양, 1845년 텍사스 병합, 1848년 멕시코와의 조약으로 캘리포니아, 유타 확보, 1863년 애리조나, 뉴멕시코 합병, 1846년 오리건 합병.
피터 오너프/미국 버지나아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먼저 해야 할 일은 대륙을 연결하는 겁니다. 수송 시스템을 창조해야 하는 거죠. 나라를 하나로 묶으려고 엄청난 자본투자가 운하, 유료 고속도로, 철도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제조업과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서부로 확장된 영토를 따라 모험심 많은 앙트레 프레너들이 길을 나섰고 그들이 가는 길 위에 도로와 운하가 건설됐다. 운하사업에선 특허를 가진 수많은 앙트레 프레너들이 생겨났다.
1930년대에 이르자 철도가 운하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발명된 증기기관차는 미국 대륙에서 급속하게 발전했다. 운하보다 운송비용이 적게 들고 이윤은 더 많이 나는 철도산업으로 앙트레 프레너들이 몰려들었다. 제조업과 유통업 뿐만 아니라 건설업과 금융업도 철도변에서 빠르게 발전했다. 화물을 이동시키는데 3주 걸리던 일이 (1830년) 20년만에 3일로 단축됐다 (1850년).
김두얼-19세기 전반 미국의 철도는 오늘날의 IT산업과 같습니다.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졌고 그 투자 속에서 새로운 앙트레 프레너들이 탄생했습니다. 한 척의 보트로 운하 사업에 뛰어든 밴더빌트는 철도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스탠다드 오일을 설립한 록펠러는 철도를 통해 전미국 대륙에 석유를 공급했다. 철도산업에서 기반을 닦은 카네기는 강철기술을 개발해 미국의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도는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만든 지도자 한 명을 탄생시킨다. 특허기술을 보유한 앙트레 프레너이자 철도 변호사였던 에이브러험 링컨 (1809~1866) (미국 제16대 대통령) 이다.
아일린 맥커비치/에이브러험 링컨도서관 박물관관장-링컨은 그 자신이 앙트레 프레너쉽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교통과 운송의 이상을 꿈꾸던 인물이었죠. 링컨은 철도가 미국 경제발전의 열쇠이자 아메리칸 시스템을 완성하는 혈관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당시에 산발적으로 건설되던 철도는 모두 규격이 달랐다. 링컨은 기차가 모든 철길을 이어서 달릴 수 있도록 하나의 표준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웨인 베솔로프스키/미국 철도전문가-링컨이 표준을 만들었어요. 그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건을 운송하려면 철도 간격이 달라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간격이 다르면 끊임없이 물건을 옮겨 실어야 했으니까요. 링컨은 국가 경제가 균일한 철도 시스템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철도규격의 통합은 운송의 속도와 효율성을 현저히 높일 것이다. 링컨의 원대한 계획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하나로 잇는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이었다.
당시 혁신적인 철도 앙트레 프레너이자 기술자였던 그랜빌 도지(1831~1906), 그는 링컨과 함께 대륙횡단 철도의 계획을 현실화시킨다.
링컨: 도지, 철도가 여기서 서부로 가려면 어느 길이 최고로 좋은가?
도지: 이곳을 출발해서 플렛 벨리 외곽으로 빠지면 됩니다. 그랜빌 도지/유니온 퍼시픽 철도회사 철도기술자, 미국에서 가장 숙련된 철도 시공자 중 하나였던 그랜빌 도지, 그는 링컨에게 최적의 노선으로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는데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득했다.
도지: 여기 부터는 로키 산맥까지 일직선으로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링컨: 32도 선은 어떤가? 동서를 제일 빠르게 잇는 길이 어딘가?
로지: 32도 선은 얼핏 보면 빠르게 보이지만 건설비용은 지형 때문에 더 많이 듭니다. 42도를 따라 가는게 가장 경제적입니다.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에서 동부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횡단철도가 생겨난다면 엄청난 운송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존 스틸 고든-당시에 캘리포니아는 아주 멀었습니다. 그곳도 도착하는 방법은 최소 6개월간 마차로 황야를 횡단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바닷길로 가려면 남미를 빙돌아서 3개월이 걸려야 도착할 수 있었죠. 링컨은 미국을 새로운 영토와 연결하고 싶어했습니다. 1860년대에 이르러 철도망은 5만 km가 넘게 확장되었지만 서부와 동부를 가르고 있는 미시시피 강과 산맥들이 대륙횡단 철도건설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1862년 링컨은 마침내 대륙횡단철도 건설법안을 추진합니다. 이른바 태평양철도법안. 수많은 앙트레 프레너들과 서부의 작은 도시들이 이 벌판으로 새로운 운명을 맞았다. 이 대륙횡단철도가 후발국인 우리 미국이 영국을 따라갈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어쩌면 신생국인 우리가 영국을 앞설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영국을 따라 잡겠다는 미국의 포부, 그러나 그 길을 막고 있는 것이 있었다. 남북전쟁 (1851~1855). 미국은 하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었다. 건국 초기부터 이어져 왔던 남부와 북부의 오랜 갈등이 전쟁으로 촉발된 것이다.
고든 우드-미국의 역사에서 보면 남북전쟁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쟁이 미국이 어떤 나라가 될지의 문제를 결정했습니다. 통일국가가 될지 아니면 별개의 주들로 남을지 말이죠. 갈등의 원인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남부 주들은 아메리칸 시스템이 추구해온 보호무역과 높은 관세, 제조업 정책에 반발이 컸다.
래리 스웨이카트-전쟁이 터졌을 때 링컨은 태평양 연안을 달리는 철도가 절실했습니다. 소와 말, 동물을 먹일 식량, 금과 은 등 미국서부가 보유한 모든 것들을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 (물자를) 필요로 하는 북쪽으로 실어나르기 위해서 였죠. 철도는 남북전쟁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남부 지역에 건설된 철도는 북부지역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웨인 베솔로프스키-미국 남북전쟁은 최초의 철도전쟁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수만명의 병력을 몇 시간만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남부와 북부는 서로의 철도망을 파괴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더 많은 철도망을 보유해 군대와 물자의 수송이 유리했던 북부가 마침내 5년간의 긴 전쟁에서 승리했다.
고든 우드-남북전쟁 후에 미국은 단일국가가 됩니다. 남북전쟁 직전까지 미국은 복수로 거론됐습니다. ‘미국들은’ 이라고 사람들은 묘사했죠. 오늘날엔 그렇게 묘사되지 않죠. ‘미국은’ 이라고 단수로 말하죠. 남북전쟁은 백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미국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동시에 4백만명의 노예들이 자유를 찾았다. 노예 해방으로 인해 미국 앙트레 프레너 역사에 비로소 흑인들이 등장하게 됐다. 애니 말론(사업가 발명가), 비리 메이슨(부동산 영토), 부기 T 워싱턴(기술학교 설립자).
래리 스웨이카트-사람들은 링컨이 앙트레 프레너들 역시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종종 잊습니다. 독립전쟁 전에는 노예였다가 해방 후에 앙트레 프레너가 된 이들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다시 하나의 나라가 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지 5일만에 링컨은 워싱턴 시내의 한 극장에서 암살자의 총에 맞았다. 링컨을 암살한 연극배우 조 윌크스 부스는 남부연맹의 지지자였다.
충격적인 소식에 수만명의 조문객들이 워싱턴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7시 21분 55초 링컨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7시 22분 10초 심장 박동이 멈추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는 갔습니다. 대규모로 치러진 링컨의 장례식, 그의 시신은 고향을 향해 긴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웨인 베솔로프스키-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을 보러왔습니다. 아마도 가장 큰 전통 장례식이었을 겁니다. 행렬이 대륙 절반을 이동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워싱턴에서 시카고로 그리고 이곳 스프링필드로 내려왔죠. 링컨의 장례행렬을 이동시킨 것은 바로 그가 평생 꿈꾸었던 철도였다. 링컨의 시신은 특별열차에 실렸다. 장례 열차는 워싱턴을 출발해 미국 철도 역사상 첫 승객을 실었던 볼티모어 오하이오 구간을 달렸다. 링컨의 장례노정을 연결하는데 열개의 운송회사가 참여했다. 링컨은 꿈꾸었던 대륙횡단 철도의 완공을 보지 못하였지만 대신 철도 위에서 마지막 여정을 보냈다.
장례 열차노정에 있는 12개 도시가 공식 장례식을 주관했다. (워싱턴-볼티모어-오하이오-해리스버그-필라델피아-뉴욕-올리버-버팔로-클리블랜드-인디애나폴리스-시카고-스프링필드 총 12개). 이 도시들은 미국 산업화의 초기 주역들과 새로이 부상하기 시작한 미국의 경제도시들이었다. 링컨이 세상을 떠난 후 대륙횡단철도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철도 앙프레 프레너들과 기술자들이 이 야심찬 계획에 몰려들었다. 동쪽과 서쪽에서 출발한 철도는 (대륙횡단철도완공: 1869년 5월 10일) 유타주 프로모타에서 만났고 사람들은 연결지점에 순금 못을 박았다.
리처드 브룩하이저-대륙횡단 철도와 모든 갖가지 철도들로 미국이 통일된 시장이 됩니다. 대륙 크기의 시장이 되죠. 대륙횡단 철도는 미국의 거대한 시장을 하나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유럽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시장을 연결하는 것, 건국초기 해밀턴이 꿈꾸었던 아메리칸 시스템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새로운 산업들이 대륙횡단 철도에서 탄생했다.
김두얼-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활용하는 백화점이라든지 체인스토아 같은 것들이 바로 철도망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유통산업이라고 하겠습니다. 래리 스웨이카트-대륙횡단 철도가 미국 경제성장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의 연구는 대단히 많습니다. 한 연구에서는 미국 GNP를 5% 높였고 다른 연구에서는 15%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합니다. 분명한 결론은 바로 대륙횡단 철도가 미국 성장의 주된 공헌자라는 점입니다.
운송망에서 결실을 맺은 아메리칸 시스템은 생산방식에서도 혁신을 가져왔다. 빠르게 연결된 시장들로 인해 대량생산의 요구가 높아졌고 이에 부응하는 앙트레 프레너들이 탄생했다. 그 중에는 미국식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세계의 산업을 바꾸고 삶의 방식까지 바꿔버린 헨리 포드도 있었다.
허먼 슈워츠/미국 버지니아대학교 정치학과 교수-포드의 기업가적인 통찰력은 부품을 작업자에게 직접 공급하고 조립라인을 통해 자동차를 작업자에게 이동시켰으며 규격화된 부품이 적시 적량으로 공급되게 한 것입니다. 빠르게 쉽게 만들어서 빠르고 쉽게 이동시키는 것 건국초기부터 있어 왔던 시장통합에 대한 노력이 포드에 의해 정점을 이룬 것이다.
김두얼-미국에서 이런 포드 시스템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포드 개인의 천재성만으로 설명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이래로 발전되어 온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걸맞은 제도적 기반, 우리가 오늘날 아메리칸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발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포드 시스템이 전 세계적으로 자리잡음으로써 미국은 최고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짧은 시간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앙트레 프레너들을 폭발적으로 탄생시킨 나라가 되었다.
존 스틸 고든-현대의 역동적 경제에서 앙트레 프레너쉽 없이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앙트레 프레너쉽을 장려하는 정부,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식민지였던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 위해 선택했던 그들만의 길, 아메리칸 시스템이었다. 연방을 하나로 묶고 시장을 통합하여 자국의 앙트레 프레너들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어쩌면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될 수도 있었던 미국의 미래를 바꾼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