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 선생님도 학생을 사랑합니다 !
단풍이 곱게 물드는 만추의 계절이 되면 대학을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은 초임지가 생각난다. 내 고향 대전과는 머나먼 산과 호수가 있어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춘천 S중학교의 초년생 선생님이 되었다.
매일 늦은 밤까지 '가르치는 사람은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교재연구를 해서, 좋은 수업을 하면 보람은 넘쳐나는데 늘 피곤과 긴장감은 떠나질 않는다. 그 때는 학급당 학생수도 70명 정도로 많았고 주당 수업시간도 26-8시간이었다. 그 날도 토요일 오후 모든 업무를 마치고 담임반 아이들이 하교한 텅빈 교실에서 조용히 지난 한 주간의 과정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갖었다. 수업과 학급에서 있었던 일과 제자들 얼굴들을 한명한명 떠 올리며 다음 주 계획도 세우는 등 한 주의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교실 문을 잠그고 퇴근을 해도 하숙집 외엔 딱히 오라고 하는 곳도 가야 할 곳도 없었다.
평일에는 교무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그래서 한 번은 그 길을 꼭 걷고 싶었던 학교앞 의암호 호숫가의 노란 은행잎과 푸라타나스 낙옆이 수북히 쌓인 호젓한 가로수 길로 여유롭게 발길을 돌렸다. 한 옆에는 햇빛에 비친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여서 고요하기만 한데, 또 다른 켠 밭에는 배추와 무가 튼실하게 자라, 가을이 풍요하고 평화롭기만 하였다.
그런데 문득 고개를 들어 앞 길을 바라보니 인적이 없던 그 길로 이웃 학교 3학년은 됨직한 여고생 대여섯명이 길 가득 걸어 오고 있었다. 같은 교문으로 출퇴근하던 터라 출근 길이면 복장지도를 하던 그 간부 학생들인 것 같다. 아침마다 교문 저만치부터 호기심을 갖고 나를 유심히 주시하면 왠지수줍어 눈길을 피해 나의 걸음을 휘청이게 하던 그 학생들을 여기서 만난 것이다. 생각같아서는 바쁜 척 종종 걸음으로 뒤돌아 갈 수도 있었지만 교사의 체면을 지키려고 몇 발자국을 더 나아 가면 정면으로 맞 닥트려야 하는 진퇴양난의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 학생들이 전혀 길을 터줄 생각없이 닥아서니 절벽 앞에 선 느낌으로 서로 맞 바라보며 멈춰 섰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그 때 가운데 있던 학생이 빙긋이 웃으며 두어 발짝 앞으로 더 닥아 왔다.
"제가 오래 전부터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그 학생들은 재미있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며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는데 내 머리속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않았다.
"그래요? 선생님도 학생을 사랑합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사랑하고 학생이 선생님을 사랑하는 일은 교육상 너무도 바람직하지요 ?"
일순간 그 학생들은 줄행랑을 쳐서 시야에서 사라졌고 위기를 모면한 나는 낙옆쌓인 그 가로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다. 이후로는 학교에 출근을 할 때 고개를 들고 웃으며 교문을 들어 설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자"라는 신념으로 살아 온 후회없는 지난 세월이었다. 초임 시절 나의 제자들도 이제는 예순을 모두 넘겼을텐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만추의 계절이 되면 그리움이 아련해진다.
대전 유성구 도룡동 399 -8
( 한국독서글짓기연구회 회장 이현세 )
첫댓글 2017년 11월
강원일보에 게재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