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남사의 해산 이우(李遇) 선생에 대하여 (종보게재예정) 단성 남사 - 사월리 후손을 찾습니다 前 史蹟會長 醫學博士 李 秉 錫 진주 수곡의 입향조이신 심운재공(心雲齋公, 諱 榮國, 1598~ ?)은 교남지(嶠南誌) 제53권의 진주군 - 문학편에 ‘李榮國 弘勛孫號心雲齋有文行構亭士芳山中奬進後學南沙李遇撰碣’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홍훈의 손자이며 호는 심운재이고 문학을 행하고 사방 산중에 정자를 지어 후학을 장려하는데 힘쓰셨는데 남사의 이우(李遇)가 묘갈명을 지었다. 이우(李遇)는 심운재처사공묘비에 공의 종자칠세손(從子七世孫)이라 되어 있으니 이 분에 대한 내력 및 기록은 족보에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이천의 仁浩 형님이 경술보(1850년 刊行)에서 판관공(判官公)파 행정공(杏亭公, 휘 重光)의 칠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려왔으나 신사보(1941년)이후 여러 족보에는 전혀 기록이 없어 산청군 남사리의 후손은 현재까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경술보 내용) 청사(淸榭)공 아들 손자 증손 현손 5세손 6세손 세태(世泰) ┳ 태징(台徵) ┣ 태삼(台三) ┗ 태화(台華) ┳ 시하(時夏) ┗ 정하(廷夏) ┳ 인진(鱗晋) ━ 우(遇) ┳ 훈(勛) ━子 ? ┃ ┣ 제(第) ┃ ┣ 소(紹) ┃ ┣子 ? ┃ ┣子 ? ┃ ┗1女 星山人 李道千 ┃ ┣ 경진(敬晋) ━系동유(東儒) ┗ 4女(문화인 柳 壎, 김해인 金慶述, 칠원인 諸啓元, 단양인 張泰運)
청사공의 손자 정하(廷夏, 1736~1793)공은 산청남사의 성주이씨 윤적(胤迪)의 따님에게 장가듬으로서 지수 청원리에서 산청 남사리로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그 아드님 시진(始晋)은 55세때인 1829년에 덕천서원의 원임(院任)을 맡았는데 청사공행장 등에는 성진(成晋 1775~ ? )으로, 배위인 달성서씨족보에 시진(始晋), 경술보에 인진(鱗晋)으로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니 후에 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경술보에 인진공은 자(字)가 군익(君翼)이고 배위는 달성서씨 유장(有章)의 따님으로 1805년에 우(遇)를 낳았다고 했으나 서씨 족보에는 시진으로 아들은 근성(近性)이다. 그러나 서유장의 부인 하씨 족보에는 하응경(河應經)-女서유장-女이시진-子이경유(李敬儒)이며 우(遇)의 배위는 은진송씨 옥명(玉明)의 따님인데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후손으로서 여기서도 이경유(李敬儒)라 했으니 하씨보와 같다. 행정선생문집의 행정 봉안문(奉安文)을 지은 칠대손 계영(啓榮)은 청사유집의 書碣陰記後에 서 성진의 男이라 했는데 지은이는 유치명(柳致明, 1777~1861)으로 정재선생문집에는 청사공의 현손(玄孫)인 우(遇)는 성진의 아들이라 했으므로 청원리에서만 계영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선생의 이름[諱]이 경유(敬儒), 근성(近性), 계영(啓榮) 등으로 되었다가 1840년대부터 우(遇)로 개명한 것으로 생각되며, 자(字)는 숙진(肅珍 또는 叔晋)이고 호(號)는 월촌 하달홍(河達弘, 1809~1877) 선생의 문집(師友錄)에 해산(海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산선생은 옥종 모한재(慕寒齋)에서 월촌선생을 비롯하여 성천교(成天敎, 悔山 成采奎) 권사일(權思一, 字 孝克) 등과 교유하면서 지은시가 월촌문집에 전하고 해산선생은 수곡 심운재처사공의 묘갈명과 일신당 이천경(李天慶, 1538~1610)선생의 문집 발간에 관여하여 이때(1855년경) 물재 노광리(勿齋 盧光履)와 함께 발문(跋文)을 지었다. 또 월촌 물재 등 제현들과 겸재선생문집(謙齋 河弘度, 1593~1666)의 간행에 대해 의논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산선생의 동서(同婿)인 전주인 정종대왕의 후손 덕천군파 이명윤(李命允)이 문과급제후 1860년경의 진주 민란에 연루되어 고금도유배를 갔으나 곧 해제되었는데 이미 유배지에서 별세하였다하니 해산선생과 무관하다고는 할수 없을 것 같다. 해산선생은 슬하에 五남 一녀을 두었으나 족보에는 아들 둘 기록은 없이 ? 표시만 되었으며 三男의 이름은 항렬을 벗어나 외자로 되어 있어 배위기록에 따라 정리해보았다. 1) 훈(勛) : 자(字)는 경화(敬和), 을유생(乙酉生, 1825년)이며 배위 함안조(趙)씨 성민(性敏)의 따님으로 덕곡공파보에는 사위의 기록이 없었으나 후산(后山 許愈, 1833~1904)선생문집의 조부(趙斯洪)묘갈명에 이수락(李壽樂)으로 기록되었고 계배(繼配)는 문화유씨 지광(之光)의 따님인데 족보에서는 확인이 안된다. 2) 제(第) : 字는 성부(聲夫)이고 신묘생(辛卯生, 1831년)으로 배위가 안동권씨 목사(牧使) 준(濬)의 후예 사열(思烈)의 따님인데 권씨 족보에는 사위가 이수목(李壽穆)으로 되어 있으며 계자(系子)는 이우현(李佑鉉)이고 3) 소(紹) : 字는 덕화(德和)이고 갑오생(甲午生, 1834년)으로 배위는 창녕조(曺)씨 통덕랑 용순(龍珣)의 따님인데 창녕조씨족보에는 사위가 이수관(李壽瓘)이고 아들은 이현용(李鉉用)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청사공행장을 척암(拓菴 金道和, 1825~1912)선생에게 부탁한 분은 후손 용현(用鉉)이라고 했으니 후손중 이런 분은 족보에 없으므로 같은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머지 두 아들은 기록이 없고 따님 한분은 성주인 이도천(李道千)에게 출가했는데 성주이씨족보에는 이도부(李道溥)의 배위가 載寧 李遇의 따님이라 했다. 현재 남사리에 세거해 왔던 재령이씨는 주로 판관공파 중 행와공(휘 重榮)의 후손들은 확인이 되고 있으나 행정공(휘 重光)의 후손은 확인이 안되며 행정공의 10세손 ○浩, 11세손 秉○, 12세손 ○燮 또는 ○煥, 13세손 在○ 또는 均○ 항렬되는 분들의 해산공 후손이 발견되기를 기대해 본다. 특히 우현(佑鉉) 용현(用鉉) 공의 손자나 증손자되시는 종친의 연락을 바람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