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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3
우리는 스무 살을 하루도 채 남기지 않고 있었다. 모두가 들떠있는 12월 31일 나는 열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아주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엄마는 민철이 아저씨와 함께 해돋이 여행을 떠났고, 열이의 옥탑 밑에 살고 있는 열이의 가족들도 모두 여행을 떠난 뒤였다. 열이는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가족 여행에 동참 하지 않았다고 했다.
몇 시간 째 같은 자리에 앉아 열이는 소설책을 나는 만화책을 보았다. 짜장면을 두 그릇 시켜 점심 식사를 해결했고 열이의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낮잠도 늘어지게 잤다. 이상하게도 내 방 내 침대보다 열이의 방에 있을 때 더 깊은 잠에 드는 것 같았다.
해가 지고 시계바늘은 자정을 향해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열아.”
열이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열이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집중을 하고 있는 모습이 사뭇 다른 사람 같아보였다. 그래서 자꾸만 말이 걸고 싶었다. 이름을 부르면 1초도 안되어 응 수현아 하고 대답하는 열이는 2시간이 지나도록 대답 한마디를 해주지 않았다. 펜을 잡은 열이와 내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기가 싫어 최대한 늦게 집에 갈 생각으로 열이를 기다리던 나는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손에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에 눈을 떠보니 열이는 침대 아래에 앉아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해?”
“잘 잤어?”
열이는 싱긋 웃으며 내 머릿결을 쓸어주었다. 너무도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에 다시 잠에 들 것만 같았다. 몽롱하고 나른한 기분에 손을 뻗어 열이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여주며 열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몇 시야?”
“열두시 십 오분이야. 스무 살 된 거 축하해.”
잠깐 잠에 들었던 사이 열두시가 지나 우리는 스무 살이 되어있었다. 열이가 예쁘게 웃으며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스무 살의 시작은 꽤나 달콤했다. 이런 게 어른이 되는 일이라면 누구든 기꺼이 어른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웬일인지 어른이 달갑지는 않았다. 열이는 내 이마를 한 번 더 쓸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었다. 들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재촉하듯 말했다.
“일어나 수현아. 우리 어른놀이 하자.”
“어른 놀이?”
“응. 어른 놀이. 이제 우리 어른 됐으니까.”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일으켜세워 열이는 겉옷을 입혀주었다. 감기에 걸리면 절대 안된다며 목도리도 둘러주었다. 장난감을 사러 마트에 가자고 엄마를 조르는 아이처럼 열이는 내 오른손을 잡은 채 빨리 어른놀이를 하러 가자며 들뜬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는 주민등록증이 들어있는 지갑만 달랑 손에 든 채, 새해를 맞이해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거리로 무작정 길을 나섰다.
어른놀이를 하자며 들떠있던 열이는 막상 밖에 나오니 어디로 가야할지 결심이 서지 않는 눈치였다. 스무 살이 되어도 동화 속의 피터팬처럼 아이같은 열이가 어른놀이를 한 다는 것이 어쩌면 처음부터 모순이였을지도 몰랐다. 시끌벅적한 거리에서 내 손을 꼭 쥔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열이가 너무 귀여웠다.
“가자.”
나는 열이의 손을 잡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전 같았으면 당당하게 문을 열지 못했을 술이 들어있는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시원한 냉기가 얼굴에 닿으니 마음이 설레었다. 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와 냉장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리 맥주 마시자.”
“맥주? 술?”
“응. 어른놀이 하자면서.”
“그래. 좋아!”
열이는 빙그레 웃으며 냉장고 안을 유심히 살폈다. 엄마와 단 둘이 맥주를 마신 일이 종종 있는 나는 익숙하게 손을 뻗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흑맥주 두 캔을 집어들었다. 무엇을 고를지 한참을 고민하던 열이는 캔이 예뻐서 좋다며 과일향이 나는 맥주 두 캔을 집어들었다.
“자 이제 각자 흩어져서 어른만 살 수 있는 물건 하나씩 골라오는거야.”
“응. 알았어.”
열이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계산대로 걸어가 담배를 골랐다.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알바생에게 이제야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된 주민등록증을 당당하게 꺼내 보여주었다. 내가 이렇게 들뜬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설레었다. 열이와 함께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뒤쪽 진열대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열이는 소심하게 손을 뻗어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카운터 위에 열이가 올려놓은 물건의 정체에 알바생은 얼굴이 붉어졌다. 나 또한 당황스러워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열이만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빠져나올 때 까지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알바생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혹은 ‘좋을 때지’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인지 모르는 척을 하는 것 인지 아무런 생각이 없어보이는 열이는 한 손에는 내 손을, 다른 한 손에는 편의점 봉투를 신나게 흔들며 집을 향해 걸었다.
“열아.”
“응 수현아.”
“그거 왜 고른거야?”
“뭐?”
“콘돔.”
열이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해맑게 웃었다. 한 손에 든 봉지를 흔들거리며 황당한 소리를 뱉어놓았다.
“토끼가 그려져 있더라구. 그래서 골랐지. 그리구 우리 어른놀이 하기로 했잖아.”
“그거랑 어른놀이랑 무슨 상관이야?”
“어른만 살 수 있는 물건을 산거지!”
“바보야. 그거 어른만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내 남자친구 열이는 역시나 엉뚱했다. 다른 남자가 샀더라면 음흉하게 보일 수 있는 물건인데도 그저 토끼가 그려져 있고, 어른만 살 수 있는 물건을 골라오자는 내 말을 착실히 이행하기 위해 콘돔을 골랐다는 열이는 전혀 음흉해보이지 않았다. 물론 남자는 남자였다. 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열이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하늘만 바라보았다. 열이의 얼굴이 진한 분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귀에서는 금방이라도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열이가 너무 귀여워서 꼭 끌어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 둘은 그렇게 어른놀이를 할 준비물이 담긴 봉지를 흔들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열이의 옥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는 나는 열이의 노트북을 열었다. 쓰다 만 글이 띄워져 있었다. 연필로 직접 글을 쓸 때 더 좋다는 열이는 노트북으로 글을 쓰면 항상 몇 줄 쓰지 못하고 닫아버렸다. 열이가 쓴 글을 저장해두고 영화를 다운받을 수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 어른들이 볼 법한 영화를 골랐다. 맥주캔을 냉장고에 넣어두고온 열이는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내 정수리에 턱을 대고 비스듬히 서서는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본격적인 어른 놀이를 준비하는 마음이 꽤나 설레었다. 열이도 설레는 모양인지 내 어깨에 얹혀진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 이런 영화는 한 번도 본 적 없어.”
“나도야.”
화면에 띄워진 꽤나 야시시한 영화 포스터를 바라보며 열이는 또 한 번 얼굴을 붉혔다. 열이의 엉뚱한 머릿속에서 무슨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들이 상영되고 있을지 궁금했다.
영화가 다 다운로드 되고 방에 불을 끈 채 열이와 나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하나씩 손에 쥔 채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노골적인 포스터답게 영화의 분위기는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흘러갔다.
“자, 건배. 어른 된 거 축하해 열아.”
“어른 된 거 축하해 수현아.”
맥주캔을 부딪히며 건배를 했다. 스무 살이 되면 지금껏 보다 어깨에 짐이 더 무거워질 줄만 알았는데. 나도 그저 평범한 스무 살 여자애처럼 가슴이 뛰었다. 쌉싸름한 맥주가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톡 쏘는 탄산의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스무 살이 되기 이전에도 엄마와 종종 마셨던 맥주였지만 스무 살이 된 후 마시는 맥주는 왠지 다르게만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니 왼쪽 눈을 찡그린 열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와, 이거…. 톡 쏘는 사이다랑 시원한 보리차 섞은 맛이야!”
마치 신세계를 접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와 맥주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맥주 처음 먹어보는거야 너?”
“그럼, 당연하지! 어른이 되야 마실 수 있는거니까!”
열이의 말은 당연히 맞는 말이었지만 나를 당황시켰다. 한 모금, 두 모금 맥주 맛을 보던 열이는 이내 머리를 젖히고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캬---.”
맥주 광고를 찍기라도 하는 듯 열이는 비워진 맥주캔을 머리 위에 대고 두어번 털었다. 너무도 황홀한 표정에 웃음이 자꾸만 터져나왔다. 연신 헤벌쭉 웃고있던 열이는 갑자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끄억---.”
코끼리가 방귀라도 뀌고 지나간 듯 엄청난 소리로 트름을 내뱉은 열이는 자기 트름 소리에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무래도 처음 먹어보는 맥주의 황홀함에 취해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싶었다.
민망한 탓인지, 술기운이 벌써 돌기 시작한 것 인지 열이는 다른 맥주를 가져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 들었던 우렁찬 트름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맥주를 가져오겠다더니 주방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커튼으로 가려져있는 주방은 보이지 않았다.
“열아.”
“응?”
“뭐해?”
“수현이 너한테 계란후라이 해주려고. 나 계란후라이 짱 잘해.”
“그냥 네가 먹고싶어진 거 아니고?”
“사실 그것도 맞아.”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열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타이밍은 이 때다 싶어 열이의 책상 밑에 두었던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오늘 열이에게 주기 위해 가져온 깜짝 선물을 꺼내들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청년에게 주는 선물치고는 다소 여성스럽고 유치한 선물이었지만 분명히 열이는 기뻐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계란 후라이가 든 접시와 맥주, 그리고 포크를 입에 문 채 들어온 열이에게 다짜고짜 새하얀 몸통에 핑크색 귀를 가진 토끼 인형을 내밀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열이는 손에 들린 접시를 나에게 넘겨주고는 토끼 인형을 받아들었다.
“이게 뭐야? 토끼네. 귀엽다. 나 주는거야?”
“응 선물이야. 마음에 들어?”
“응. 너무 마음에 들어. 달에 사는 토끼를 만나면 이런 모습일 거 같아.”
산타할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을 꼭 끌어안고 기뻐하는 아이처럼 열이는 내가 준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진심으로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줘 본 일도, 이토록 기뻐하는 모습을 마주한 적도 드물었던 나 또한 행복한 마음에 절로 웃음이 났다.
“토끼 배 눌러봐. 핑크색 부분.”
“배?”
내 말에 열이는 소중히 안고 쓰다듬던 토끼 인형을 한 손에 든 채 핑크색으로 되어있는 토끼의 배를 지그시 눌렀다.
‘내가 여태까지 이 말 한 번도 해준 적 없지? 좋아해. 많이 좋아해. 사랑해 열아.’
미리 녹음해둔 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생각했던 것 보다 백배는 더 민망한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화끈 거리는 얼굴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한참을 말이 없던 열이가 침대에 걸터앉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응?”
“나도 사랑해 수현아.”
우주가 담긴 것만 같은 열이의 눈동자가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열이의 두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뜨거운 온기에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아마 내 얼굴도 이렇게 뜨겁겠지.
스무 살이 된 것을 축하하며 내가 열이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은 그저 사랑이었다. 좋아도 좋다고 표현하지 않고, 사랑해도 사랑한다고 표현할 줄 모르는 내가 이제 네 앞에서 만큼은 오롯이 나 자신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늘 달에 사는 토끼 얘기를 세상 제일 행복한 표정으로 하는 열이를 위해 새하얀 토끼 인형에 내 마음을 담아 선물하고 싶었다.
열이의 눈동자에 담긴 우주가 나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한참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열이의 등 뒤에서 재생되고 있던 영화가 야릇한 소리들을 내뱉었다. 영화로 시선을 돌리니 남녀가 침대 위에서 알몸이 된 채 서로를 탐하고 있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열이가 눈을 번쩍 뜨며 나와 노트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후끈후끈한 방 안에 야릇한 음성들이 울려퍼졌다. 야한 영화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열이와 함께 있으니 모든 것이 민망했다. 하필, 왜, 이 타이밍에 저런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 인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바닥을 봤다가, 천장을 봤다가 열이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30초 정도를 안절부절 했던 것 같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잠시 숨고싶을만큼 민망한 분위기 속 열이가 갑자기 양 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얼굴을 끌어당겼다.
“스무 살의 수현이는 더, 더 예쁘다.”
쪽---하는 소리와 함께 열이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뽀뽀세례를 퍼붓던 열이는 나와 코를 맞댄 채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열이와 이토록 밀착해본 적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늘 넓은 품으로 나를 안아주던 열이었지만, 지금은 왠지 더 가까이에 붙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코와 코를 맞대고 있으니 열이가 내쉬는 숨결이 내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수현아.”
‘응’하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열이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쳐왔다. 토끼를 좋아하고 달에 사는 토끼를 만나는 게 평생 소원이라는 열이가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남자답게 느껴졌다. 평소 가벼운 입맞춤만 해오던 우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서로의 입술을 물고 당기며 숨결을 나누었다. 늘 초코우유를 입에 달고 살아서인지 열이의 입에선 초코맛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열이의 목에 두 팔을 감싼 채, 두 다리로는 열이의 허리춤을 꼭 감쌌다. 열이는 내 머리칼을 쓸고, 어깨를 꽉 움켜쥐기도 하며 내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진짜 어른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진 토끼 인형도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바닥 군데군데 원고들이 잔뜩 쌓인, 열이만의 옥탑 안은 뜨겁고 달큰한 분위기로 가득찼다. 반쯤 열린 침대 옆 창문에는 달빛이 금방이라도 한가득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았다. 열이가 그토록 보고싶어하는 달에 사는 토끼가 지금 우릴 보면 부끄러워 도망을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손길 이외에 누군가의 손 길이 한 번도 닿아본 적 없었던 내 몸 여기저기 어딘가에 열이의 부드러운 손이 닿을 때 마다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입술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입술이 내 차가운 살 위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할 때 마다 열꽃이 피었다.
열이와 함께 해서 더 근사한 스무 살의 첫 번 째 밤이었다. 별들이 쏟아졌고 우주가 팽창했다. 열이의 세계 속에 빨려들어가 긴 긴 새벽이 다 지나도록 뜨거운 열꽃을 피우고 지기를 반복했다. 열이는 수 없이 사랑을 속삭였고 나는 수 없이 열이를 끌어안았다.
어슴푸레 동이 틀 기미가 보일 때 까지 우리는 서로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길었던 어른놀이를 끝낸 나는 열이의 팔을 베고 누워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들었던 것 같다. 1월 1일의 햇살은 유난히 밝았고 어젯 밤 보았던 별들은 보이지 않았다. 반쯤 눈을 떠 위를 올려다보면 아기처럼 곤히 잠든 열이의 얼굴이 보였다.
“열아.”
정말 깊은 잠에 빠진 열이는 꿈에서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입술을 오물거리며 싱긋 웃기까지 했다. 그런 열이의 뺨을 두어번 쓰다듬다가 열이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레 빠져나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어젯밤 샀던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들고서 고양이걸음으로 옥탑을 빠져나와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상 위 빨랫줄에 이리저리 널린 열이의 색색깔 팬티들이 눈에 띄었다. 어젯밤 열이는 무슨 색 팬티를 입고 있었더라. 담배 연기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제와 오늘은 하루 차이일 뿐 인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아주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어제에서 오늘로 넘어왔을 뿐 인데, 마치 어제 내가 존재하던 세상과 오늘 내가 존재하는 세상이 다른 것 같았다.
왠지 앞으로 내 인생에 열이는 누구보다 많은 의미를 더 해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