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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윌리엄 해밀턴 쇼
- William Hamilton Shaw
김순진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UN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김포반도와 행주산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신촌 노고산 전투에서마저 큰 전과를 올린 쇼의 부대는 사기가 충천했다. 쇼 중위는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전한 일은 참 잘한 일이었다. 순간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갑을 열어보았다. 지갑에는 두 장의 흑백사진이 들어 있었다. 한 장은 윌리엄 목사 내외인 부모님 사진이었고, 한 장은 아내와 아이들 셋이 함께 막내 딸 밀라니의 첫돌을 기념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노고산의 여기저기에 주검이 나뒹구는 전장에 앉아있는 쇼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사진에 대고 키스를 했다.
“존경하옵는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의 체취가 묻어나는 평양을 탈환해드리겠습니다. 공산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당신의 교회를 다시 세워드리겠습니다. 저도 고향 친구들과 만나 대성산의 진달래꽃을 따러 가겠습니다. 유년의 추억이 서린 대동강 물에 멱을 감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는 그 사진을 뒤로 포개어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바라보았다.
“여보 주아니타! 사랑하오. 너무나도 보고 싶소. 그러나 내겐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소. 내 고향 사람들에게 웃음을 되찾아주는 일이오. 평화를 되찾아주는 일이오. 그들의 전통과 추억을 계속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오. 그것은 곧 나의 일이고 당신의 일이며, 미국의 일이오. 조금 더 기다려줄 수 있겠소 여보!”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가 참전을 결정한 이후 맛보는 최초의 눈물로 가슴 벅찬 눈물이었다.
“사랑하는 큰아들 스티븐 쇼와 둘째 아들 리차드 쇼, 그리고 막내딸 밀라니야! 아빠가 전장에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슬퍼하지 말아라. 이 세상의 누구든 한 번은 죽는단다. 아빠는 고향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한가로이 공부나 하고 있을 순 없었단다. 맥주를 마시며 야구나 즐기고 있을 수는 없었단다. 이해해주렴!”
그의 참전에 대한 각오는 단호했다.
*
1학기 학기말 시험이 끝난 날이다. 해밀턴 쇼는 함께 종교철학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 도널드 리건과 함께 하버드대학교 교문을 걸어 나오고 있다.
“내일 야구 보러 가지 않을래? 뉴욕 자이언트와 LA다저스가 붙는단 말이야. 이번 야구는 어디가 이길 것 같아. 난 원래 뉴욕 자이언트 팬이었는데 요즘은 달라졌어. LA다저스가 너무 좋아졌어. 다저스 단장 브랜치 리키는 온갖 모욕과 핍박, 차별을 참아내며 세계 최초로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을 받아들여 백인들의 잔치였던 메이저리그 다이아몬드에 세웠잖아? 그것도 1루수 겸 4번 타자로 말이야.”
쇼가 흥분한 듯 물었다.
“야, 인마! 흑인 보러 가려면 너나 혼자 가라! 세상에는 귀천의 구분이 있는 거야. 백인과 흑인은 달라! 백인은 우월해. 우리 백인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거야! 이 신성한 메이저리그에 흑인 선수를 기용한다는 것은 수치야! 흑인들이 할 수 있는 스포츠는 무수히 많아. 복싱도 있고 레슬링도 있고 할 수 있는 운동이 많잖아! 왜 흑인들을 메이저리그 게임에 넣는 거야! 내가 보건데 이제 메이저리그는 망했어! 이젠 야구 같은 거 다신 안 볼 거야. 미식축구도 있고 농구도 있고 얼마나 재미있는 게 많은데 그따위 야구를 보겠어! 그럴 시간이 있으면 공부나 한 자 더 해 인마!”
리건은 깜짝 놀라 쇼와 거리를 두면서 말했다.
“그래? 싫으면 그만 둬라! 우리 와이프 주아니타랑 봐야지! 인마, 네가 안보겠다고 하면 함께 야구 보러 갈 사람이 없는 줄 알아? 짜식! 모처럼 시험도 끝나고 해서 머리도 식힐 겸 맥주나 마시면서 야구 좀 보려고 했더니 튕기긴 되게 튕기네! 인마, 피부 색깔이 어떻든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거야.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누구나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거야! 그 피부 색깔 때문에 잘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안 는다면 어떤 게임도 반쪽이 될 수밖에 없는 거야 인마! 싫으면 관둬! 그래, 그럼 월요일에 만나자! 잘 가!”
쇼는 속으로 기분이 너무 나빴다. 평소 흑인뿐만 아니라 멕시칸이나 중남미, 그리고 아시아 사람들을 천대하는 백인들의 생각에 대하여 늘 불만을 가지고 있던 쇼였다.
둘은 헤어졌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온 쇼는 아이들을 불렀다.
“스티븐, 리차드! 어디 있니? 아빠 왔다.”
다섯 살 박이인 큰아들 스티븐 쇼와 둘째 아들 리차드 쇼는 멀리서 들리는 아빠의 음성에 팬티차림으로 뛰어나오고, 뒤를 이어 딸아이 밀라니는 엄마 주아니타의 품에 안겨진 채 거실에서 나오고 있다. 쇼는 뛰어나오는 둘째 아들 리차드를 안아 하늘로 번쩍 던졌다가 되받으며 말했다.
“잘 놀았어, 리차드? 엄마 말 잘 들었어?”
“응, 아빠! 엄마 좀 야단쳐줘! 엄마가 ‘이놈’했어?”
“그래, 왜 엄마가 혼을 냈을까?”
“글쎄, 콜라를 두 병이나 마셨는데 또 사달라고 하잖아요.”
“그랬구나! 그러면 안돼요. 엄마가 ‘이놈’ 해요! 콜라는 가끔 한 번씩 먹는 거야! 날마다 먹으면 이가 ‘아야!’ 해요!”
해밀턴 쇼가 이빨을 가리키며 리차드에게 설명하는 사이, 아내 주아니타가 대답하며 해밀턴 쇼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한다.
“밀라니도 잘 있었어? 뽀! 이리와 봐!”
쇼는 아내의 가슴에 안겨 있던 딸 밀라니를 넘겨받아 살짝 키스를 하면서 말을 잇는다.
“여보, 내일 야구장에 가자! 뉴욕 양키즈와 LA다저스가 맞붙는데.”
“에이, 그거 어디가 이길지 뻔하네요. 뭐? 난 안 갈래요? 애들 건사하느라 힘들어서 야구가 별로 재미있지도 않고요.”
“여보, 그게 아니야! 난 원래 뉴욕자이언트 팬이었는데 응원하고 싶은 팀이 하나 더 생겼어! LA다저스야.”
“당신이 어쩐 일로 LA다저스를 좋아하게 됐어요? 전에는 관심도 없었잖아요?”
“그게 말이야! LA 다저스 단장 브랜치가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을 4번 타자로 세워 승승장구하고 있잖아. 난 내일 뉴욕 자이언트가 이기든 LA 다저스가 이기든 상관없지만 재키 로빈슨이 너무 보고 싶어요. 여보! 같이 가자, 응!”
1950년 6월 24일. 저녁 6시. 팡파르가 울리고 뉴욕자이언트 홈구장에서는 LA다저스와의 경기를 보려고 암표상까지 등장하며 만원사례를 이루었다. 1회 말까지 각 팀의 공격은 3자 범퇴로 끝났다. 2회초 LA다저스의 공격이다. 4번 타자 재키 로빈슨이 타격에 들어섰다.
“재키, 사탕수수 밭에나 가라!”
“발목에 쇠사슬은 왜 풀어준 거야! 그건 링컨의 실수였어!”
“로빈슨 크루소! 아직도 LA다저스는 표류하고 있다.”
여기저기 로빈슨을 비하하는 피켓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왔다.
“우, 우, 우…….”
관중들은 야유했다.
딸아이 밀라니는 관중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애 좀 받아 봐요! 힘들어 죽겠단 말이에요?”
“뭐라고? 잘 안 들려! 잠깐만 기다려봐! 저거 4번 타자 한 사람 치는 것만 보고…….”
투 쓰리 볼카운트였다. 재키 로빈슨은 갖가지 투구로 타자를 공략해오는 13구째 투수의 공을 파울성 타구로 걷어내고 있었다. 딱!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타구는 3루 쪽 펜스를 훨씬 넘어 관중석 상단에 꽂혔다.
“와우! 브라보! 브라보!”
쇼는 딸아이가 우는 것도 모르는 채 겅중겅중 뛰며 하늘로 두 팔을 솟구친 채 열광했다.
재키 로빈슨이 3루를 돌아 홈을 밟는 순간 라디오에서 중계되는 장내 방송이 들렸다. 그리고 스코어보드에는 아시아의 나라 코리아에서 전쟁이 났다는 자막이 떴다.
“이게 무슨 말이야 여보!”
쇼가 아내 주아니타를 보며 물었다?
“글쎄요.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여보, 일어서요. 얼른 집에 가자!”
해밅턴 쇼는 주섬주섬 가져온 물건을 챙기고 큰아들 스티븐 쇼의 손을 잡과 둘째 아들 리차드 쇼를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아니 왜요!”
아내 주아니타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코리아에서 전쟁이 났다고 하잖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집에 가자 여보!”
쇼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치는 듯 두근거렸다.
“아니, 코리아에서 전쟁이 나면 난 거지 우리가 왜 집에를 가요? 모처럼 야구구경을 하러 와서요.”
아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구가 끝나면 집에 가서 TV 뉴스로 소식을 들어도 되잖아요. 당신이 하도 재키 로빈슨을 두둔해서 LA다저스가 조금 좋아지려는 참인데…….”
“아니야 여보, 지금 내가 한가하게 앉아서 야구나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태어난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잖아.”
해밀턴 쇼는 심각했다.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몽롱해보였다. 그런 쇼의 창백한 얼굴을 본 아내 주아니타는 하는 수 없이 젖먹이 딸아이를 들쳐 업고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네. 알았어요. 여보, 집으로 가요. 그럼.”
집으로 돌아온 쇼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일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그는 깊이 고민했다. 일요일 오전 내내 침대에서 골몰하던 쇼는 저녁때가 되자 친구 도널드 리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리건! 맥주 한 잔 하자! 지금 나올 수 있냐?”
“하하하, 그거 봐! 너 LA다저스가 져서 속이 아파서 그러는구나! 야 인마. 흑인 한 명 투입했다고 뉴욕 자이언트를 이길 수는 없지. 그래, 네가 속이 아파서 맥주 한 잔 사달라면 사주마! 그래, 어디서 만날까?”
“응, 캠브리지 32번가 보들레르 레스토랑으로 나와! 지금이 5시니까 5시 30분까지 나와!”
“그래 알았어. 한 30분 걸릴 거야!”
통화를 끝낸 쇼는 아내를 불렀다.
“여보, 나 좀 나갔다 올게.”
“주일인데 어디를 나가려고 해요. 나도 힘이 든단 말이에요. 아이들도 봐주고 청소도 좀 도와줘요. 난 무쇠팔인줄 알아요?”
“그래그래, 알았어요. 미안해요 나 좀 나갔다 올게. 미안해.”
해밀턴 쇼는 말리는 주아니타에게 억지로 키스를 하고 집을 나왔다.
평소 걸음이 늦던 해밀턴 쇼는 자신도 모르게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캠브리지 32번가는 대학가이다. 늘 학생들의 데이트와 미팅장소로 붐빈다. 보들레르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집에서 나온 지 10분이 채 되지 않는다. 평소에는 도보로 20분쯤 걸리는 거리인데 쇼가 자신도 모르게 빨리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해 로널드 리건이 사는 집은 버스로 20분 이상 거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버스를 잡거나 조금 꾸물거리다가는 40분 이상 걸리기 십상이다.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한 해밀턴 쇼는 자꾸만 손목시계와 창밖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다. 약속한 시간 30분이 넘었다. 해밀턴 쇼는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한다. 그래도 리건은 보이지 않는다. 40분이 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짜식! 늘 늦는단 말이야! 오기만 해라. 벌주 석 잔이다!”
혼잣말을 하고 또다시 밖을 내다보았지만 문이 열릴 때마다 리건의 모습이 아니다. 50분이 지났다. 그런데도 리건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런 걸 친구로 두고 있다니…….”
쇼는 자신에다 대고 공연히 생트집이다.
문이 열리고 리건의 모습이 보인다. 리건은 ‘쇼가 LA다저스를 응원하다 져서 시무룩해져 맥주를 마시자 했을 것’이라 판단해서인지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띠며 손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해밀턴 쇼는 리건을 못 본 척하며 맥주를 한 잔 들이켰다. 그런 쇼의 앞에 리건이 앉으며 말을 건넸다.
“야, 응원하는 야구팀이 졌다고 휴일인데 불러내서 맥주 사달라는 놈은 처음 보겠다. 아무튼 나도 심심했던 참인데, 마시자. 마셔! 자. 건배!”
“너나 혼자 마셔 인마! 나 지금 건배할 기분이 아니거든.”
“왜? 야구에 진 게 그렇게 약 오르냐? 참, 코리아에서 전쟁이 났다더라. 너 거기서 태어났다며? 아하, 그래서 네가 속이 좀 상했구나! 그래 내가 위로주 한 잔 사줄게. 마셔라. 마셔. 원래 전쟁도 하고 그래야 무기도 팔고 경기도 살아나고 그러는 거야 인마.”
“…….”
“짜식, 말도 안하고 술만 마시고 있네! 너 혼자 벌써 세 잔째야. 집에서 쉬고 있는 친구를 불러냈으면 기쁘게는 못해줄 망정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야, 리키야! 나 어떻게 할까? 나 코리아전쟁에 참전할까?
“뭐야? 너 미쳤어! 그런 말 하려면 나 집에 갈 거야. 인마! 이거 순 미친 놈 아니야. 전쟁에 재미가 들렸거나. 너는 이미 1차 세계 대전에 가서 죽을 뻔 했잖아. 노르망디 작전에 갔다가 죽을 뻔하고 살아서 돌아왔다면서? 네 나이가 몇 살인 줄 알아? 스물아홉 살이야 인마, 넌 처자식이 넷이나 있는 몸이야. 그리고 너 같은 늙은 군인은 필요가 없대 인마! 너 지금 나를 두고 장난 하냐? 정신 차리고 박사과정이나 마쳐! 얼른 돈 벌어야 아이들 교육시키고 아내 수고도 덜어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더 이상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았다. 해밀턴 쇼는 맥주 값을 지불하고 혼자 카페에서 나와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리건이 부르는 모습은 들리지 않았다. 포탄이 날고 총알이 날아가고 있는 코리아의 전쟁 모습만 눈에 선했다. 가슴이 터질 듯 했다. 마구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해서 집으로 들어갔는지 자신도 몰랐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쇼는 7월 한 달 내내 방에서 뒹굴었다. 수염도 깎지 않고 누구를 만나러 나가지도 않았다. 가끔 책을 들여다보는가 싶다가도 대낮에도 커튼을 친 채 불을 끄고 누워있었고, 밤이면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고민했다. 아버지가 집으로 찾아왔으나 인생에 대한 심오한 사고를 하느라 그렇다며 아버지까지 돌려보냈다. 아내의 수고는 수포로 돌아갔다. 거의 금식을 한 채 기도에 매달렸다. 참전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끙끙 앓고 있는 중이었다. 부모님과 아내에게 말을 하자니 난리가 날 것 같았다. 그러다가 혈기 왕성한 나이에 ‘공산군에게 낙동강까지 밀려 적화가 코앞에 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가슴은 요동쳤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코리아전쟁에 참전할 병사를 뽑는다는 모병기사가 올라왔다.
해밀턴 쇼는 갑자기 담당 교수님이 만나고 싶어졌다. 전화를 집어 들었다.
“프랭크 교수님! 저 윌리엄 해밀턴 쇼입니다.”
“누구, 아……, 해밀턴 쇼 군! 자네가 어쩐 일인가? 방학 중인데…….”
“긴히 상의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왜 공부가 잘 안 되나? 취직 문제라든지 자네의 장래에 관한 문제라면 만나지 마세.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거야.”
“아닙니다. 교수님, 아주 급한 일입니다.”
“급한 일이라니? 방학 중에 급한 일이 무엇이 있겠나? 나도 방학 중에 하던 연구가 있으니 시간이 많이 부족해! 이번 방학에는 아무도 안 만나겠네. 개학하면 만나세. 이만 전화를 끊음세.”
“교수님! 교수님! 뚜뚜뚜…….”
쇼는 너무 화가 나서 수화기를 내던졌다. 수화기의 줄이 끊어져 저만치 날아갔다.
해밀턴 쇼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평소에는 수염이 그리 많지 않았던 쇼였다. 그렇지만 한 달 여 동안 칩거를 했으니 그 모습은 가히 가관이 아니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덥수룩한 모습이었고 머리도 감지 않아 그야말로 노숙자의 형상이었다. 게다가 얼굴까지 긴 모습이니 마치 예수의 형상과 같기도 했다.
해밀턴 쇼는 프랭트 교수님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세계적인 철학자요, 석학으로 알려진 아놀드 프랭크 박사가 그의 담당 교수였다.
“교수님, 안에 계시지요?”
쇼가 여직원에게 물었다. 여직원은 쇼의 기이한 모습에 움찔했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직원의 말을 들은 쇼는 뚜벅뚜벅 교수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곤 문을 열었다.
“프랭크 교수님, 해밀턴 쇼입니다.”
“아니, 자네!”
프랭크 교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명석하고 명랑하던 천재 학생 쇼가 노숙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아니, 자네! 해밀턴 쇼 군! 무슨 일이 있나? 이리로 와서 앉게!”
그럼에도 해밀턴 쇼는 여전히 목석처럼 서 있었다. 프랭크 교수는 인터폰을 눌러 여직원에게 커피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여직원이 커피를 가져다 놓고 나간 뒤 해밀턴 쇼는 펄썩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커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교수님! 저 어떻게 해야 하지요?”
해밀턴 쇼는 눈물을 흘렸다.
“아니, 해밀턴 쇼 군! 왜 이러나? 무슨 일이 있나? 이러지 말고 어서 일어나 이리로 앉게.”
프랭크 교수가 쇼의 팔을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교수님은 저에 대하여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 코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의 평양에서 태어나 황남초등학교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웨슬리언대학교를 나왔지요. 그래서 저의 조국은 둘입니다. 하나는 코리아고 하나는 미국이지요. 저의 고향, 저의 조국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적화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회담을 잘못하여 한 민족을 둘로 갈라놓은 것이지요. 저는 그런 미국에 대하여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우스 코리아인 공산주의국가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사우스 코리아마저 공산화시키려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아무리 미국 국적이라 할지라도 저의 조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만히 강 건너 불처럼 구경만 하며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내 주변의 부모님과 아내와 친구들은 모두 제가 참전하겠다는 생각을 말했을 때 미쳤다고 말합니다. 조국이 멸망하고 있는데 나의 안위를 위해 가만히 있으면, 그래서 조국이 적화되어 공산주의자들인 소련이나 중국공산당의 손에 넘어간다면 저는 비겁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교수님!”
해밀턴 쇼는 프랭크 교수 앞에서 거의 울부짖었다. 눈물 콧물이 범벅되었다. 프랭크 교수는 함께 울고 있었다. 프랭크 교수는 눈물을 닦으며 쇼에게 말했다.
“그래, 자네의 말이 맞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정의를 위해서야. 인류의 정의를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네. 자네가 심판하게. 자네가 가서 공산주의자들의 최후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심판해주게. 공산주의자들, 학살자들, 게시타포 같은 사람들, 일본군 같은 못된 자들의 총칼 앞에서 선량한 시민을 구해주게. 내 오른 팔 같은 자네가 혹시 전장에서 죽는다고 해도 나는 슬퍼하지 않겠네. 그리고 자네의 거룩한 판단에 경의를 표하네. 미국이라는 나라는 한 사람의 나라가 아니야. 코리아 민족들도 수백만이 와서 살고 있는 나라야. 미국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존재하여야 하네. 그것이 가정이 있다거나, 박사과정에 있거나, 군대에 갔다 왔다고 해서 걸림돌이 될 수는 없네. 마음 같아선 조금만 더 젊었어도 나도 자네의 조국 코리아를 위하여 참전하고 싶네. 내가 뉴욕타임스에 ‘젊은이들이여! 코리아의 자유를 지키자.’라고 기고하겠네. 그리고 자네의 결정에 대하여서도 언급하겠네. 난 우리 미국의 젊은이들이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네. 자, 전장으로 나가시게. 자유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심판해주게. 미국 젊은이의 기개를 보여주게. 나는 자네에게 감사하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제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조언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쇼는 또다시 눈물이 났다. 그러나 부모님과 아내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런지 고민스러웠다. 그냥 자신의 생각을 믿어주지 않으면 무조건 입대해서 전장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해밀턴 쇼가 프랭크 교수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 주아니타는 이미 결정하고 돌아왔을 쇼의 생각에 동조했다.
“여보. 나는 당신이 판단을 믿어요. 당신은 세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될 거에요. 사랑해요. 여보!”
해밀턴 쇼는 자신의 판단에 힘을 실어준 아내 주아니타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꼭 안아주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완고했다.
해밀턴 쇼는 부모님께 “한국인들은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난 뒤 돌아가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부모님을 떠나 입대했다.
그가 떠나자 아버지 윌리엄 목사는 온 가족들을 모아놓고 그의 아내 주아니타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모두들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 주 예수 아버지 하나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아들이자 미합중국의 아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아들 쇼가 코리아전장으로 떠난다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들 쇼를 굽어 살피사 그가 옮기는 발걸음과 머리와 가슴과 손발과 그의 모든 것을 주관해주실 것을 믿사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쇼에게 축복을 내려주시옵소서! 그가 걷거나 잠자거나 먹거나 굶을지라도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이 땅에서 공산주의가 발붙일 곳이 없도록 심판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민주주의가 승리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중국 공산주의와 소비에트연방 공산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코리아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코리아가 승리하여 자유민주주의 힘으로 마침내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택할 수 있도록 이 젊은이에게 삼손과 같은 힘을 주시옵소서!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가 가는 곳마다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그가 전장에 나가 적을 대할 때 사탄을 물리치는 것과 같이 담대하여 거침이 없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2000년 만에 가나안 땅을 되찾아 행복해진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5000년 역사의 코리아 민족들이 전통과 행복을 지킬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윌리엄 목사의 기도가 끝났을 때 아무도 울거나 해밀턴 쇼의 결정에 대하여 가타부타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내 주아니타도 그녀의 등에 업힌 밀라니까지도 전장으로 떠난 아빠의 거룩한 뜻을 이해하는지 울지 않았다.
1950년 8월 16일. 해밀턴 쇼는 노르망디 작전에 참여했던 경험을 살려 해군으로 재 입대할 것을 결심하고 해군본부 모병지원과에 들러 입대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입대지원서는 반려되었다. 29세라는 적지 않은 그의 나이와 한번 전역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그에 이력이 전례 없던 일이라 재 입대는 안 된 다는 것이 이유였다. 화가 난 해밀턴 쇼는 해군참모장을 만날 참이었다. 그래서 해군본부 내에 있는 해군참모장 방으로 가기 위해 비서실에 들렀다가 제지를 당했다. 그는 큰 소리로 분노하며 소리쳤다.
“지금 자유민주주의가 망하고 있는 시점이요! 내가 군에 갔다 왔건 안 갔다 왔건, 나이가 많건 적건 그것이 무슨 상관이오! 나는 코리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단 말이오! 지금 그 코리아의 앞날이 경각에 달렸단 말이오!”
그가 크게 분노하며 열변을 토할 때쯤 해군참모장의 방이 열리고 모자에 별이 두 개가 달린 참모장이 나왔다.
“무슨 일이오!”
참모장이 물었다.
“네, 참모장님! 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작전에서 전과를 세워 무공훈장을 받은 예비역 중위 윌리엄 해밀턴 쇼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코리아의 선교사로 저는 코리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코리아에서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전쟁이 났습니다. 그것도 지금 부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이 침략자들에게 밀려서 공산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장에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요? 이 말이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어이, 이 사람이 제출한 입대지원서 좀 가져와봐!”
참모장은 이리저리 서류를 훑어보더니 해밀턴 쇼에게 물었다.
“어이, 해밀턴 쇼 중위! 무슨 증거물 같은 게 있나요?”
“네,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노르망디 작전 성공으로 받은 무공훈장과 그가 모시던 아이젠하워장군과 찍은 사진 등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했다.
“빨리 입대시켜요. 이런 전문가가 우리가 찾던 사람이란 말이오!”
그리고 참모장은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모병담당 장교를 윽박질렀다.
8월 23일. 1주일 동안의 신체검사와 부대배치를 끝내고 그는 특별비행기 편으로 일본 오키나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미 7함대가 코리아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 7함대의 위용은 대단했다. 해밀턴 쇼는 노르망디 작전 때 타고 작전을 수행했던 배였지만 그 위용에 또다시 놀랐다.
“충성! 윌리엄 해밀턴 쇼 중위입니다.”
“잘 오셨네! 기다리고 있었네. 어이, 윌리엄 중위가 도착했으니 서둘러 작전회의를 하세. 모든 지휘관들은 작전벙커로 들어오라고 해!”
맥아더 사령관은 노르망디 작전에 큰 공을 세운 바 있는 해밀턴 쇼 중위의 참전 소식에 내심 흥분이 되어 희색을 띄고 있었다.
며칠 째 수뇌부들이 참여한 작전회의는 난상토론을 거듭하고 있던 차에 해밀턴 쇼의 참전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운이 맴돌았다. 맥아더는 이제 결정을 내릴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회의를 주제한 맥아더는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또다시 의견을 물었다.
“원산 쪽에 항구시설이 좋으니 항공모함을 그곳에 대고 진격해서 북한 전역을 먼저 접수해야 합니다.”
“제 의견은 다릅니다. 해주항에서 옹진반도로 상륙해서 평양을 집적 공략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해주항에서 평양을 공격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니 평양 근처인 남포항에 배를 대고 평양을 집적 공략해야 효과적인 공격으로 적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서울은 인천항과 가깝습니다. 인천으로 상륙해서 서울을 탈환하고 교두보를 마련해서 북진통일의 발판으로 삼아야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부산 함락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우선 우리의 모든 화력을 부산에 집중해서 적을 막아내고 서울로 진격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산으로 상륙하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각자 자기의 주장을 펴며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어릴 적부터 평양과 서울을 오가던 해밀턴 쇼였다. 서울을 탈환하고 침략자들의 보급로를 차단해야만 승산이 있다는 것이 해밀턴 쇼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말단 중위가 장성들이 하고 있는 작전회의에 참여해서 발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의견이 모아지지 않자 맥아더 사령관은 해밀턴 쇼 중위를 불러들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데다가 코리아에서 자란 해밀턴 쇼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제 생각엔 인천을 치고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수도 서울을 탈환할 수 있고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까지 내려간 괴뢰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섬멸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해군의 화력을 모두 동원해서 인천을 초토화시키고 해병대를 포함한 지상군을 진격시켜 서울부터 탈환해야 합니다.”
“그게 좋겠소! 우린 인천으로 상륙합니다.”
맥아더는 지난 며칠 동안 고심을 했던 일이 풀렸다는 듯 무릎을 쳤다. 작전회의를 거듭했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결정이었다. 그러나 해밀턴 쇼 중위의 말을 듣자마자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일언지하에 결정해버렸다.
코리아 전쟁에 참전하려는 UN 산하 우방국들이 속속 입국했다. 의료지원단을 보내는 나라도 있었다.
미 극동군 사령관 겸 UN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대장은 인천상륙작전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미국합동최고참모본부와 미국 해군본부는 ‘인천항에 이르는 좁은 단일 수로였기 때문에 함정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와 북한군이 상륙에 대비하여 지뢰를 매설해놓았을 경우 많은 피해가 예상된다는 것, 병력, 탄약, 보급품 등에 운송이 어려워 작전에 실패한다면 전쟁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이유를 들어 인천상륙작전 계획에 대하여 반대했다. 이에 그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충청도 아산만 포승면 일대를 상륙지점으로 변경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적은 후방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하게 이를 신속히 차단할 수 있다. 북한군 전투부대는 사실상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돼 훈련된 예비병력 마저 없고 작전이 성공한다면 전세를 회복할 능력이 없다. 이것이야 말로 적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을 유일한 희망이며 결정타를 입힐 수 있는 기회다’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맥아더의 주장은 관철되었다. 맥아더의 그러한 결정에는 해밀턴 쇼 중위의 조언이 일조했던 것이다. 미 해군 제7합동기동대 사령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도 이에 동조했다.
인천상륙작전이 미국합동참모본부와 미국 해군본부에서 최종 승인을 받자 맥아더 사령관은 한국정부에게 대한민국 육군과 해병대의 참여를 요청해왔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백선엽 장군의 동생인 백인협 대령을 추천했다. 백인협 대령은 1950년 8월 제17연대장에서 수도사단장으로 승진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스스로 사단장직을 사임하고 제15연대를 지휘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선 보름 동안은 첩보의 수집기간이었다. 미국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 조장 임병래 중위는 상륙작전에 앞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북괴군의 군사기밀을 탐지해와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하루 전인 9월 14일 특공대를 도피시킨 그는 적에게 생포될 경우 고문에 의해 작전 정보가 유출될 것을 염려해 자결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해군 함정 15척을 이끌며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를 이끌고 참가했다. 미 육군 제10군단 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은 미국해병대 제1사단과 미국 보병 제7사단을 이끌고 참가했다. 미국해병대 제1사단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선봉부대로 참가했다. 미 육군 제8군단장 해리스 월턴 월커 중장은 낙동강 전선 미국 총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 시행 후 총반격을 감행하는 의무책임자로 선정되었다.
드디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미7함대와 대한민국 해군에서 쏘아대는 포탄이 빗발치듯 인천항구로 날아들었다. 이틀 동안 밤낮으로 퍼부었다. 엄청난 화력에 적들은 혼비백산했다. 지상군이 투입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지상군들은 물밀듯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해밀턴 쇼는 해군이었음에도 해병대 지상군에 자원했다. 내 고향 평양의 자유는 내 손으로 찾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해밀턴 쇼의 부대는 김포반도로 진격하여 큰 전과를 이루었다. 9월 21일 새벽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야음에 진군나팔 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진격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해밀턴 쇼가 소속된 미 해병7사단 7연대는 행주산성으로 진격하라는 것이었다.
9월 중순, 서울의 새벽 기온은 살을 에는 듯 매서웠다. 낮에는 땀 흘리며 적군과 싸워야 했고 밤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여름에 보급된 옷을 입고 있고 아직 야전점퍼 같은 것은 보급되지 않았다. 전장으로 보급되는 식량은 건빵과 비닐봉투에 든 밥인 전투식량이 다였다. 김포반도 전투에서 승리한 해밀턴 쇼의 부대원들은 김포평야를 지나와 행주산성으로 향했다. 신발과 전갱이에 묻은 진흙은 그들의 노고를 말해주고 있었다. M1소총은 무거웠다. 게다가 수류탄 몇 발, 탄알이 장전된 탄창 10개와 완전군장을 메고 진격한다는 일은 아무리 장정들이라도 버거운 짐이었다. 통일화 끈이 끊어진 사람, 총탄을 맞아 철모가 뚫어진 사람, 모포에 총알을 맞아 모포가 누더기가 된 사람도 있었다. 온 몸은 땀 냄새로 진동했으며 위장크림이 땀범벅으로 지워져 얼굴은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건빵과 전투식량을 먹는 병사들의 입에서는 행복감이 묻어났다.
행주산성을 향하여 진군 나팔소리가 울렸다. 여기저기에서 총알이 사선을 그으며 날아오고 날아갔다. 하늘은 포연으로 뿌옇다. 후방에서는 계속해서 곡사포를 쏘아주고 있고 B29폭격기가 쉴 새 없이 북녘을 향해 굉음을 내뿜으며 날고 있다. 마침내 행주산성을 아군의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해밀턴 쇼의 직책은 연대 작전참모였다. 한국해병대와 미국해병대과 미육군 등 연합군의 병사들의 눈과 귀는 그에게 쏠려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시시때때로 지도를 펴놓고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나침반은 그의 오른 손과 같았다. 적군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는지 퇴각했는지 모르지만 매우 조용했다.
“선두 제자리! 십분 간 휴식!”
오랜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에게 휴식 명령이 떨어졌다. 새벽부터 진격해 벌써 경계를 주시하며 진군해온지 벌써 다섯 시간째이다. 작전참모인 해밀턴 쇼의 제안에 따른 휴식이었다.
“이 산은 수색산입니다. 한국해병대과 미국1사단은 17연대는 수색산을 지나 비단산, 봉산, 앵봉산으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이 산은 안산입니다. 안산은 성산 104고지를 공격하고 있는 한국해병대와 미 해병대 제5연대가 추후에 진격하기로 했습니다. 불광리 근처에 있는 이 산은 북한산자락이고, 그 앞에 있는 산이 신촌 노고산입니다. 이 노고산과 인왕산 자락인 녹번리 산1번지가 우리 부대가 공략해야 할 산입니다. 인왕산은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진 산입니다. 따라서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지 않아 적군들이 숨을만한 곳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괴뢰군들은 대부분 퇴각했고 남은 괴뢰군들은 5천에서 1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촌 노고산으로 진격합니다. 신촌리에 있는 노고산은 야산이지만 도처에 괴뢰군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노고산을 집중 공략해 신촌 일대를 탈환하고 녹번리로 진격해서 1번 국도인 불광리 길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북진통일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문산으로 이어지는 불광리 길 1번 국도를 탈환하지 못하면 서울에 남은 빨갱이들을 처단할 방법이 없습니다. 산골고개를 정점으로 도처에 숨어있는 괴뢰군들의 잔당을 뿌리째 뽑아내는 일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진격은 중대별 작전이 아니라 분대별 작전이 되어야 합니다. 한꺼번에 진격하다가는 적의 화기에 몰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불광리와 녹번리, 그리고 홍은리를 감싸고 수색할 수색조를 편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이 매복해 있을만한 곳을 미리 찾아내고 의심되는 것이 있으면 후방의 곡사포 공격의 지원요청을 해야 합니다. 저는 정 중앙인 녹번리로 진격하겠습니다. 민가에도 적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시가전의 교전방법을 위한 특별교육을 시행한 후 작전을 수행해야 합니다.”
해밀턴 쇼 중위는 녹번리 전투의 당위성과 전투방법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
“해밀턴 쇼 중위의 말이 맞소! 그럼 대대별로 진영을 다시 편성하시오. 7~8명씩 짜여진 분대를 적극 활용하여 진격합시다. 분대별로 전열을 가다듬으라! 먼저 노고산 공략에 나선다! 노고산을 포위하라. 진격하라!”
미해병 7연대장 맥그리거 중령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열은 삼삼오오 나뉘어서 각자 그물망을 치듯 적들을 포위해나갔다. 노고산 전투는 효과적이었다. 7연대에 소속된 수천 여명의 병력들이 낮은 포복으로 약진에 약진을 거듭해나갔다. 적군이 비트를 파고 있을만한 곳은 모두 파헤쳐졌다. 나무들은 화염방사기를 통해 모조리 불살라졌다. 멀리서 보면 마치 불타고 있는 한 척의 배처럼 보였다. 바위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수류탄이 투척되었고 곳곳에서 치열한 교전이 이루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에 있던 괴뢰군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왔다. 우려했던 백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군 6명이 전사하고 적 200여명을 사살했으며 76명의 인민군이 투항해 포로가 되었다. 태극기와 성조기, 미 해병 7연대기가 노고산 정상에 꽂혔다. 전우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모두들 만세를 불렀다. 승전보는 미 해병대와 대한민국 국군 최고사령관에게 타전되었다. 승전보를 울리고 먹는 늦은 점심은 사상 최고의 만찬이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미국 병사들의 눈에서 나온 푸른 눈물이 위장크림 위로 흘러 굳은 빵 위로 떨어졌다. 보리빵은 촉촉이 젖어들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병사들의 입가에는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한편 UN군 정보처에는 서울 서방측을 방어하는 북괴군 25여단 독립 78연대 소속 병력들은 4,000여명이나 된다는 첩보가 알려졌다. 그에 소속된 장교 및 준사관들은 대부분 중공군에서 복무했던 정예화된 전투경험자들이라는 것이다. 아군은 한국해병대 제1대대를 중앙에, 미 해병대 제5연대 제1대대를 좌측에, 제3대대를 우측에 배치하여 서울 서부지역을 병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9월 21일. 한국 해병대 제1대대 제3중대는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같은 날 오후 6시 30분에 104고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3일 동안 주야간의 끝없이 벌어졌던 혈전은 1개 중대 대원 중 26명만이 생존하는 처절한 혈전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9월 22일. 포성이 멎은 백련산 자락에 앉아 건너편에 있는 녹번리의 산자락을 보니 쥐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 물체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불광동으로 향하는 1번 국도의 도로는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평화가 찾아온 듯한 착각 속에 빠지게 했다.
김포반도와 행주산성, 연이어 노고산 전투에서 승리한 아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부대는 증산리와 응암리를 지나 백련산을 커다란 저항 없이 접수했다. 또다시 작전회의가 개최되었다. 작전참모인 해밀턴 쇼 중위는 녹번리 1번 국도 건너편에 있는 인왕산 자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맡은 부대원들이 이곳을 진격하겠습니다. 연대장님은 후방에서 지원해주시고, 1대대와 3대대는 각각 불광지구와 홍은지구로 진격해주십시오.
해밀턴 쇼가 소속된 부대는 녹번리로 진격했다.
“쇼 중위님! 조심하십시오. 도처에 괴뢰군들이 매복해있습니다. 후방 경계를 게을리 하면 안 되십니다. 위험합니다. 적들이 스스로 물러갈 때까지 조금 시간을 가지고 정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다. 개리 중사! 우리 고향땅 평양을 공산주의로 물들이고 낙동강까지 무참히 짓밟은 침략자들을 그냥 둬선 안 된다. 이참에 평양, 신의주까지 밀어붙여서 통일을 해야 한다. 샅샅이 수색하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무조건 사살하라.”
“지금 적의 동태가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진지에 있어야 합니다. 후방으로부터 곡사포의 사격을 지원받아서 우선 적을 퇴치해야 합니다.”
“아니야, 그럴 시간이 없어! 개리 중사!”
적군들이 숨어있을 만한 전방을 향해 아군의 화기가 집중적으로 불을 뿜었다. 적들의 동태는 보이지 않았다. 미동도 없었다. 향도를 기점으로 선발대가 도로를 건너고 쇼 중위도 뒤를 따라 도로를 건너던 중이었다. 순간 괴뢰군의 소총 소리와 기관총 소리가 정적을 깨며 메아리쳤다.
피융, 피융! 다다다다다…….
어디선가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나고 기관총의 총알이 수없이 날아들었다. 순간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후방 민가에 숨어있던 괴뢰군 병사가 기관총을 난사했던 것이다.
“윽!”
“해밀턴 쇼 중위님이 총에 맞았다.”
한 병사가 소리쳤다.
“쇼 중위님! 쇼 중위님! 정신을 차리십시오.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의무병! 어디 있나? 의무병! 빨리 응급조치를 취하라! 복부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해밀턴 쇼 중위님이 총에 맞았다. 가슴을 관통했다. 빨리 지혈하라. 지혈해야 한다. 피가 너무 많이 흐르고 있다. 들것이 어디 있나? 빨리 들것을 가져와라! 빨리 후송하라!”
해밀턴 쇼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였다. 아주 인자하신 얼굴이었다.
“윌리엄 해밀턴 쇼, 정말 잘했다. 너의 결정은 곧 나의 결정이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였나니 너는 곧 나의 아들이니라. 이제 너는 내 곁에서 영생할지어다.”
꿈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뒷동산에 올라온 듯 했다. 아주 오랫동안 걸어온 길을 걸어가는 듯 했다. 어릴 적 함께 놀던 영철이와 수남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께서 목회를 하시던 언덕 위의 교회도 보였다. 대동강도 보이고 평양고등보통학교의 교정도 보였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의 입가에는 행복감이 묻어났다.
곧 해밀턴 쇼 중위는 숨을 거두었다. 대원들은 분노했다. 발사 지점을 향해 모든 화력을 쏟아 부었다. 대응이 없어 수색한 결과 두 명의 괴뢰군 병사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소련제 기관총 1문과 AK소총 1정이 발견되었다.
*
은평평화공원의 윌리엄 쇼 대위 동상에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고 있겠어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아요.”라고 쓰여 있다. 이 말은 6·25전쟁 당시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국 학생의 편지가 아니다. 미국인인 윌리엄 해밀턴 쇼 해군 중위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끝난 뒤 당시 해군 중령인 이성호 제5대 해군참모총장에게 한 말이다.
동상의 높이 2.2m(기단 포함 3.5m)로 정복을 입고 차렷 자세 서 있는데 자신이 피를 흘렸던 이 땅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추모비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하는 성경말씀이 새겨져 있다. 가끔 비둘기들이 날아와 놀고 철따라 꽃들이 피어나는 은평평화공원, 어린이, 중고생, 주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는 이곳은 그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켜낸 자유의 땅이다.
전사 당시 29세였던 쇼 중위는 1계급 특진되어 대위로 진급했으며 현재 부모와 함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역에 잠들어 있다.
1956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금성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미국 정부는 은성훈장을 추서했다. 같은 해에 해군장교 및 많은 서울 시민들은 그가 전사한 자리에 전사기념비를 세웠으나 이후 서울 도시계획으로 철수되었고, 지금까지는 응암어린이공원에 해군사관학교 제2기생들의 협조로 만든 작은 추모비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은평평화공원이 건립되고 그가 전사한지 60년 만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니 늦은 감은 있으나 그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 같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한편 쇼 대위의 아버지 윌리엄 쇼 박사는 평양의 광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목사 직분을 안수받고 영변과 만주 등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해 아들인 쇼가 참전하자, 마음의 동요를 느껴 아버지 쇼 박사 역시 주한미군에 자원입대하여 군목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육군에 군목제도를 도입하는데 역할을 다하였다. 쇼 대위의 부인 주아니타 여사는 1956년 서울로 돌아와 이화여대 교수를 지냈으며, 큰 아들 큰아들 스티븐 쇼는 서울대 법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큰 손녀는 오산 공군기지에서 장교로 근무한 바 있다. 해밀턴 쇼 대위의 가족은 4대째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지금부터 6.25한국전쟁 60주년 기념 은평평화공원 준공식 겸 윌리엄해밀턴쇼 동상 제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용모가 훤칠한 사람들과 몇몇의 이방인들이 흰 목장갑을 낀 채 가위로 오색 테이프를 끊었다.
“다음은 한국 이름 서위렴, 미국이름 윌리엄 해밀턴 대위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겠습니다. 해밀턴 대위의 가족이신 큰며느리 캐롤 캐머런 쇼님, 둘째 아들인 리차드 쇼 님, 손자 스테판 쇼 님과 조카 캐서린 님, 엘리자베스 님, 참전용사이신 제서스 로드리콰이어즈 님는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통일부장관님, 해군참모총장님, 국회의원님, 은평구청장님, 은평구의회 의장님, 은평구재향군인회 회장님도 앞으로 나오셔서 제막식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이동해서 흰 천막이 가려진 동상 앞에 섰다.
“제가 구령을 하면 구령에 때라 동상에 씌워진 천막을 힘차게 당겨주시기 바랍니다. 하나 둘 셋!”
천막을 당기자 제복을 입은 이방인이 나타났다.
“참, 멋지게도 생기셨네.”
“우리나라 사람 동상인줄 알았더니 아니잖아.”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다음은 우리 대한민국의 숭고한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에 대하여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일동 묵념!”
모두들 숙연하게 묵념을 올렸다. 스피커에서 녹음된 나팔소리가 구성지게 울려 퍼졌다.
2010년 6월 22일, 은평구 역촌역 앞, 은평평화공원에서는 애국가와 미국 국가가 힘차고도 숭고한 가락으로 널리 울려 퍼지고 있다. 한 쪽에는 노구를 이끌고 나온 6.25전쟁에 참여했던 참전용사회 회원들과 재향군인회 회원들, 은평구 주민들, 은평구청 관계자 등 2,000여명이 참석하였고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서 윌리엄 해밀턴 쇼가 전사한지 60년 만에 세워지는 동상의 제막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다음은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연혁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당시 선교사였던 윌리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22년 6월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윌리엄 얼 쇼의 아들로 태어난 쇼 중위는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웨슬리언대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1943년 해군 소위로 임관해 1945년 어뢰정(PT518) 부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미국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습니다. 1947년 미 해군에서 전역 그는 한국으로 와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영어와 함정 운용술 교관으로 생도를 가르치며 초창기 우리나라 해군 발전과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하며 대한민국 국군 태동기를 이끌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50년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한국을 돕기 위해 미 해군 중위로 재입대를 합니다. 그는 부모님에게 ‘한국인들은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난 뒤 돌아가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한국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이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한 그는 1950년 9월 22일 미 해병 7연대의 서울 진격에 앞서 녹번리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인민군의 총탄을 맞고 산화합니다. 가족으로는 미망인 주아니타 여사와 큰아들 스티븐 쇼, 둘째 아들 리차드 쇼, 그리고 딸 밀라니가 있습니다.”
사회자는 쇼의 연보를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그랬군요. 우리 은평구 사람들은 그걸 까맣게 모르고 살았네요.”
“정말 고마우신 분이네요.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면서 우리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다니! 정말 고마우신 분이에요.”
“이렇게 훌륭하신 분을 왜 이제야 알아봤데요. 이제라도 그런 훌륭하신 분의 동상이 세워지고 은평평화공원이 준공된다는 것은 정말 잘한 일이네요.”
참석자들은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고, 이구동성으로 ‘저런 고마운 사람, 저런 아까운 사람이 있나.’라며 한 마디씩 떠들어댔다.
(끝)
김순진
고려대 강사, 도서출판 문학공원 대표, 계간 스토리문학 발행인,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은평예총 회장, 은평문인협회 회장 역임 현재 고문, 한국스토리문인협회 회장, 중앙대문인회 수석부회장, 한국교수작가회 회원, 시섬문인협회 고문
수필춘추문학대상 외 다수 수상
시집 『더듬이주식회사』 등 3권, 단편집 『윌리엄 해밀턴 쇼』, 장편소설 『너, 별똥별 먹어봤니』, 수필집 『리어카 한 대』 등 3권, 장편동화 『태양을 삼킨 고래』, 평론집 『자아5, 희망5의 적절한 등식』 등 3권 등 저서 16권
첫댓글 감동적인 해밀턴 쇼 중위의 사랑과 헌신에 대한 짧은 삶을 역시 감동적으로 문장에 옮겨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는 것 자체가 사랑입니다.오늘을 살아가는 모든이들은 내가 살아가는 동력을 부여해준 해밀턴 쇼같은 은인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같습니다
달관한 문장속에 깃든 샘물같은 휴매니즘
건강하세요
해밀턴 쇼는 정말 고마우신 분입니다, 저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겁니다. 그걸 알리고 싶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마운 분을 고마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글을 통해 감동을 받아 깨닫게 하는
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문학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위대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늘 의미부여를 하시는 수석부회장님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와아~ 대단하십니다.
이름이 순진이라 그냥 순진한 분이라 여겼는데
진정 순수한 보배같은 분이셨군요.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