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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의 진실 - 제1부
1. 아버님의 이북 노정
1) 기독교 세례 요한 집단과 재림노정
③ 최선길 여사와의 혼인
아버님은 해방 전인 1944년 5월 4일에 최선길 여사와 결혼하셨다. 주례는 이호빈 목사가 집례하였다. 그러면 아버님은 왜 해방 전에 결혼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버님은 거기에 대해서 설명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러면 아버님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결혼했을까 생각해 보면 답은 쉽다. 아버님은 하나님 앞에 최고의 효자가 되는 것을 모토로 생활하신 분이다. 그런 아버님이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할 리가 없다. 만약에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하셨다면, 아버님은 타락한 아담과 똑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아담이 어떻게 해서 타락했는가를 알아보면 이해가 쉽다. 아담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갔다. 아버님이 만약에 그런 길을 갔다면 아버님도 타락한 아담과 같이 된다. 그런데 아버님은 결혼 하신 후에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의 길을 가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님이 최선길 여사와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한 것이다. 아버님 개인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아버님은 중요한 일을 하실 때는 언제나 하나님과 의논하고 하신다고 하셨다. 아버님은 아담이 천사장으로부터 따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유혹의 말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에게 보고하고 의논했어야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님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 분이시다. 하늘이 바로 그런 계시를 내리셨기 때문에 한 것이다.
아버님은 원죄 없이 태어나신 분이다. 우리는 타락한 조상으로부터 태어났지만, 예수님과 아버님은 타락한 조상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직접 새로운 조상으로, 그러니까 타락한 조상의 혈통을 이어 받은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새로운 혈통을 가진 새로운 조상으로 태어나신 분이다. 그러니까 아버님은 원죄도 없고 사심(邪心)도 없으며, 유전죄도 없고 타락성도 없으시다. 그러나 아버님의 다른 형제들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 이유는 그때 당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종적으로 완전히 일체된 순간은 아버님을 잉태하신 그 한 순간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과 아버님은 원죄가 없고 사심도 없고 유전죄도 없고 타락성이 없었기 때문에 타락한 세상에 태어나셨지만 타락한 세상의 모든 악한 환경을 이기고 혼자서 개성 완성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도 아버님도 완성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러면 아버님은 왜 결혼하셨는가? 그 이유를 축복가정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은 21세가 되면 완성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창조원리적인 기준이다. 육신이 21세가 되면 완성한 육신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인체도 동시에 완성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 완성의 마무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인간이 완성하면 그 기준에 맞추어서 성혼식을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원칙이다. 그런 노정을 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완성 인간의 완성을 마무리 짓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맺어주시는 결혼인 것이다. 한국의 옛 의식에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어른으로 취급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의 창조본연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은 완성 인간으로서 결혼으로 마무리를 지어서 완성한 본연의 인간, 사랑을 실현한 본연의 인간으로서 한국의 해방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공식 섭리를 출발하시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지 못했는데, 아버님은 이 공식노정을 걸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은 성혼 축복을 받으심으로써 명실상부 완성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섭리를 출발하시게 되었다.
아버님의 결혼은 문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두 가정을 중심한 결혼식이고 아버님의 완성을 위한 섭리로 거행된 것이기 때문에 가정기준의 축복 성혼식이라고 할 수 있다. 『천성경』 제7편 「지상생활과 영계」의 3장 4절(781쪽)에서 ‘축복가정은 천국문 열쇠’란 소제목 하에 다음의 말씀이 있다.
“결혼해서 첫사랑을 하는 순간은 남성으로서 여성으로서 완성되는 자리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사랑하는 자리는 남성 완성 여성 완성하는 자리입니다. 비로소 천지의 중심으로서 땅 위에 정착할 수 있는 왕궁이 그곳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지 못했는데, 아버님은 이 공식노정을 걸으신 것이다. 메시아의 재림이라는 예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성경에는 없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예수님이 실패하실 경우에 그 뒤를 이어 책임을 할 재림주를 보낸다는 예언을 하시지 않았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런 예언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실 때 예수님 재림의 이야기를 하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실패할 수 있다는 말이 되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갖고 일할 수 없게 된다. 믿는 사람도 재림의 말 때문에 예수님이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예수님에게 절대적인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실 때는 재림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섭리하실 때는 모든 것을 믿는 가운데서 행하신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아시지만, 그러나 누구에게 사명을 맡길 때는 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 선민을 세울 때도, 유대교단을 세울 때도 그들이 책임을 다한다는 믿음 위에서 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실 때도 책임을 다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보내신 것이기 때문에 실패 할 경우에 대한 예언은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에 따로 예언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직접 그에 관한 예언을 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재림 예언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버님이 결혼하시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아버님의 섭리노정 가운데는 목숨을 걸고 가야 할 길도 있다. 예를 들면, 공산세계에서 거쳐야 할 2단계 노정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버님이 잘못 되었을 때에는 아버님 자신이 후계자를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시고 최선길 여사와의 사이에서 1946년 4월 2일에 아들을 낳게 하셨다.
그래서 아버님은 그 아들에게 후계자로서 그 뜻을 이어받아서 전진해야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거룩할 성(聖)’ 자에 ‘나아갈 진(進)’ 자를 따서 ‘성진’이라고 지었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딱 한 번 하셨다. 성경에는 재림주가 오신다는 말은 있지만, 재림주가 잘못되었을 때에 후계를 어떻게 한다는 말은 없다. 하나님은 아버님이 결혼하게 하셔서 후계자가 될 아들을 사전에 준비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러한 결혼의 노정을 가지 못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을 낳은 부모의 역할을 한 사람이 사가랴와 마리아다. 그들은 부부 사이가 아니다. 그것이 만약 노출되면 두 사람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와 요셉도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다. 그 집안에서 마리아는 밝힐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떳떳하지 못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또 사가랴 가정도 마찬가지 사정에 있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엘리사벳과 마리아, 마리아와 요셉 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들 사이의 문제가 드러나면 모두가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는 쉽게 ‘마리아가 책임 못했다, 사가랴가 책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장가(결혼)를 못가셨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과 요셉과 마리아의 두 가정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의 결혼을 추진했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은 장가를 가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국 장가가지 못하시고 섭리의 길을 가시다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아버님은 1946년 5월 27일에 하나님으로부터 “북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으시고, 집에 연락을 하지 못한 채 북쪽을 향해 떠나셨다. 성경에는 하늘의 말씀을 받고도 바로 행하지 않았다가 징벌을 받게 된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는데
뒤를 돌아봐서 소금 기둥이 된 일이다.
그때 아버님은 집에 쌀도 없고 돈도 없어서 바로 삼팔선 북쪽에 있는 쌀 생산지인 백천(白川)에 쌀을 사 놓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가져오기 위하여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집에는 아내와 출생한지 55일밖에 안 되는 아들이 있었고, 먹을 것은 동네 집에서 다음 날 갚아 주기로 하고 쌀 한 되를 얻어다 놓은 것 밖에는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백천으로 가는 도중에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아버님은 처자에게 연락해야 한다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북으로 갈 수밖에 없으셨다.
아버님은 1946년 6월 6일에 평양에 도착하셨다. 평양 경창리에 있는 나최섭이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방을 하나 얻고 거기에서 북한의 섭리를 출발하셨다. 나최섭 씨는 아버님이 이스라엘수도원에서 알던 사람이었다. 아버님은 평양에서 밖에 나가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지 않았다. 방안에서 기도하시며 정성을 들이기 시작하셨다. 영계를 동원하시기 위한 정성을 들이신 것이다. 평양에는 굉장히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에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어졌다. 그래서 기도 정성을 들이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946년 6월에 김인주(金仁珠, 1917~2010) 씨가 아버님을 찾아 왔다. 친척인 김종화(金宗嬅) 씨가 서울에서 훌륭한 선생이 왔으니 함께 가서 은혜를 받자고 하여 찾아간 것이다. 아버님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는 안 될 것이었는데 유대인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중심으로 설교하셨다.
그날 밤 김인주 씨는 동굴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한 청년이 동굴 앞에 서 있었는데 지금은 동굴이 어둡지만 후퇴하지 말고 곧바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동굴이 어둡고 무서웠기 때문에 발을 멈추고, 뒤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 청년의 말이 생각나서 그대로 걸어가 동굴을 나갔다. 더 나아가니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꽃밭이 나오고 거기에 꿈에도 보고 싶었던 예수님이 서 계셨고, 예수님은 김인주 씨의 손을 잡고 꽃밭을 구경시켜 주었다고 간증했다. 아버님을 만난 다음 날 예수님을 만난 꿈을 꾸었으니 그 기쁨은 더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아침에 남편이 출근한 후에 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 갔다. 아버님은 김인주 씨에게 대뜸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꾸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버님은 그 꿈의 내용까지 다 알고 계셨다. 그런 영적인 역사로 인해 김인주 씨는 계속하여 아버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기 위하여 교회에 다녔다.
어느 날, 아버님은 재림주는 한국에 오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김인주 씨는 재림주는 유대나라에 오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놀랐다. 그리고 아버님은 재림주가 한국의 어느 곳에 오시는지도 기도해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말씀에 감동한 김인주 씨는 열심히 기도한 결과, 평양에 오신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김인주 씨는 평양 어디에 오시는가를 아버님이 정성 들이시는 방에서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문이 활짝 열리면서 예수님이 영적으로 방에 들어오셨다. 예수님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이 딸이 가는 길은 정말 고난의 길이고 험한 길이지만, 이 딸이 끝까지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해 주셨다. 그 기도가 끝나서 “아멘” 하고 눈을 떠보니 예수님의 모습이 아버님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김인주 씨는 열심히 진리를 구하였지만, 집에서는 큰 문제가 되었다. 시아버지는 장대현(章臺峴)교회의 장로였기에 며느리가 아버님의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목사와 장로가 매주 집에 심방하게 하였다. 1년에 두 번밖에 오지 않던 그들이 이렇게 자주 오게 된 것은 김인주 씨가 아버님의 교회에 나오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함께 살고 있는 시부모와 목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김인주 씨는 계속하여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아버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그녀는 남편이 집을 나가면 바로 집에서 나왔다. 그렇게 되니 집안 살림도 등한시하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가 아버님과 연애에 빠졌다고 생각하였다. 시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고 옷을 벗기고 하여도 그에 굴하지 않고 교회를 찾아 나왔다.
때론 가정에서 반대가 너무 심해서 집을 나갈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아버님은 “모든 십자가를 넘어가십시오. 하늘은 더 큰 사랑과 복을 주기 위하여 시련을 주시는 것이오, 김인주 씨가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시는 하늘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하는 편지를 어린아이를 통해서 써 보내주셨다.
김인주 씨가 아버님을 만난 다음 달인 7월에는 조카인 김원필(金元弼, 1928~2010) 씨를 전도하였다. 김원필 씨는 평양에서 부산까지 아버님과 함께 피란을 내려온 분이고, 피란민으로 넘쳐나는 부산에서는 한 평 내지 한 평 반 밖에 안 되는 작은 방에서 이불 하나를 함께 덮고 자던 분이다. 김원필 씨 이상 아버님의 초창기 생활의 일부시종(一部始終)을 보아온 사람은 없다. 김원필 씨가 본 아버님은 그야말로 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무엇이든지 말씀하는 것은 다 믿을 수 있는 분이었다. 입교 시 아버님은 김원필 씨를 귀한 손님같이 대하시고, “당신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지만, 항상 중심을 구하고 생활하십시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아버님은 교회 초기에 신약성서의 로마서에 관하여 2주 이상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에 교회는 가로세로 3미터 정도의 작은 방인데, 거기에 사람들이 매번 가득 차서 말씀을 들었다.
김원필 씨는 “당시 선생님은 27세였습니다. 선생님은 정력적으로 말씀하시고 듣는 사람은 번개에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선생님의 옷은 빨래를 한 것 같이 젖어 있었습니다. 짜면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생님은 셔츠를 벗고 땀을 짜고 있었습니다. 겨울에도 땀으로 몽땅 젖은 솜옷을 짜고 있었습니다. 예배는 아버님의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기도는 너무도 열렬하였고, 말씀을 시작하면 회중은 영적 불에 휩싸이고 영적 직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번개가 친 것 같은 상태였고, 실제로 밖에서부터 몸속으로 뜨거운 열이 들어오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면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영적인 불은 대단히 기분 좋고, 근심이나 불안으로부터 순간적으로 해방됩니다. 위로 받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육체적인 병까지도 낫게 되었습니다.” 라고 간증하였다.
김원필 씨는 1928년에 평양에서 8형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본 통치 시대였기에 일본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말을 쓰는 데가 교회였기 때문에 김원필 씨는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서 장대현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에 가도 하나님을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고 산에 가서 기도하였다. 1946년 3월에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7월에 숙모인 김인주 씨에게 진로 문제로 상담하러 갔을 때에 “남쪽에서 온 젊은 청년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진리와 신령으로 예배를 보는 곳이니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유받고 1946년 7월 17일부터 아버님의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김원필 씨는 어느 날 아버님이 사용하는 성경책을 보았는데, 모든 페이지에 붉은 표시가 되어 있었고 글씨들 사이에는 작은 글씨로 글이 씌어있었다. 아버님에게는 많은 기독 신도가 찾아왔고, 많은 목사들도 신도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성경에 관하여 토론하여 누가 옳은지를 신도들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찾아온 목사가 질문을 하기 전에 아버님은 그 질문을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이 대답하셨다. 데리고 온 신도들은 목사들이 아버님의 답을 듣고서 놀라서 말문이 막히는 장면을 여러 번 보게 되었다. 아버님은 목사가 질문하려고 한 내용 뿐만 아니라 목사 자신에 관하여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는 목사 자신밖에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며 돌아가는 목사도 있었다.
아버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셨다. 나이 많은 영통인들은 한 번 말한 것을 잊고 같은 말을 몇 번이고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도 말을 막지 않고 마지막까지 들어 주신다. 신도가 집에 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고 언제까지고 함께 있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아버님의 자세는 생애를 통하여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초기 교회 때에 가정의 박해로 교회에 가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식구가 많았다. 아버님은 그 사람 집 근처까지 가셔서 베란다에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겨울 추위 속에 기다리기도 하셨다. 이와 같이 아버님은 식구들에게 자기 가족 이상으로 애정을 쏟으셨다.
계시를 받은 분들이 아버님을 만나서 아버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알게 되고 그분들이 사람을 전도해오니까 아버님은 그 자리에서 예배를 볼 수 있는 집회를 하게 된 것이다. 아버님의 집회에 오는 분들은 대다수가 기성교회에 열심히 나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아버님에게 오다 보니까 자기들이 다니던 교회를 등한시 한 것이다. 신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으니까 열심히 나오던 사람들이 왜 안 나오는가 하고 그 교회 목사들이 조사해 보니 남한에서 이상한 청년이 와 있는데 그 청년이 있는 곳에 가서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들이 자기들의 신도들을 찾아가기 위해서 아버님의 집회 장소에 찾아 왔다. 처음에는 점잖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신은 여기서 이런 일을 그만두고 우리 교인들을 다 보내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님의 입장은 그들을 가라고 할 수 없었다. 또, 그 사람들이 가라고 한다고 해서 가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곳에서 아버님의 집회가 계속되니까 결국에는 아버님에게 폭행을 가하게 되고, 또 사람들을 납치해 가고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점점 이 사건이 커지게 되었고, 아버님이 계속 집회를 하니까 자기들의 신도를 지키기 위해서 결국 그들은 아버님을 공산 당국에 고발해서 대동보안서에 잡혀가시게 되었다. 아버님은 보안서에 가실 때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가셨다. 그 안에는 아버님이 만나고자 하는 영통 집단의 지도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