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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풍요의 변증법
3. 자명한 제일원리는 없다
1. [반듀링론]에서 엥겔스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의 주요 특징 몇 가지를 변증법적 사유방식과 대조하며 비판한다. 그 요지는 대상들을 변화하는 상호작용과 포괄적 연관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고정된 경계선과 대립관계 속에서 개별화하여 죽어 있는 불변 상태로만 다룬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유방식이 자연과학의 발전과정에서 필요했던 점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베이컨과 로크에 의해 철학에 도입됨으로써 편협한 사유방식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판이 오늘 우리의 운동에 제기하는 의미는 지대하며 이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때 비판의 무게중심은 형이상학적 사유 자체보다는 기계적이고 분류법적인 사유에 놓여 있다.
그렇다고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제일의 원리나 원인을 연구하는 이론적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또 [변증론]에서는 “자체로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참이고 최초인 것들”, “그 자체로 믿어질 수 있는” 것들을 제일원리라고 칭한다. 이처럼 자체로 확실한 제일원리를 찾고 여기서 출발하여 확실한 인식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려는 사유방식을 특히 모범적으로 보여준 인물은 데카르트일 것이다. 흔히 아는 바처럼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그처럼 자명하고 확실한 혹은 명석판명한 제일원리로 내세웠다. 이처럼 확고부동하고 자명한 제일원리들을 찾고 그것에 기초해 온갖 것을 생각하고 재단하려는 사유방식은 데카르트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옛날 철학자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까지 깊이 스며들어와 있다. 아마 자본독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통용되는 원리, 누구나 별 생각 없이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제일원리로는 ‘경제활동 혹은 기업의 목표는 이윤추구다’라는 공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공리는 대부분의 경제학 원론 교과서들 첫머리에 떡하니 못 박혀 있다. 또 그것은 자본가만 아니라 대다수 노동자민중의 경제활동 자체와 이에 대한 관념을 사로잡고 있다.
변증법적 사유는 자명하고 당연한 진리로 여겨지는 제일원리에도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사유와 구별된다. 이는 비뚤어진 심성이나 악취미 때문이 아니라, 제일원리라는 것들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다지 자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독재의 제일원리인 이윤추구가 기업의 목표라는 관념 역시 따지고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가 아니다. 사람들의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수단이나 방법의 영역에 들어가야 마땅한 이윤추구 즉 돈벌이를 목표의 자리에 앉혀 놓고 있는 것부터가 수상쩍지 않은가. 그러한 공리는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에 대한 무비판적 굴복 선언 아닌가. 경제활동의 목표를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물적 조건 형성’처럼 사용가치 중심으로 설정하면 왜 안 되겠는가. 혹은 맑스가 자유와 관련지어 제안하는 바처럼, “연합한 생산자들이 자기들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그 물질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물질대사를 집단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 그리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것”을 경제활동의 목표라고 이해하면 또 어떻겠는가. 그래야 비로소 제국주의 자본독재의 폭주를 이성적으로 제어할 가능성이 가시화되지 않겠는가.
2. 경제활동의 목표를 돈벌이라고 믿는 자본의 제일원리가 요지부동으로 노동자민중의 의식과 욕구를 얽어매는 만큼, 오늘의 경제위기를 공존과 공영을 위한 평등사회 건설의 기회로 전환하는 것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 제일원리는 경쟁력 절대주의나 승자독식 원리, 자본과 힘에 비례한 제국주의적 세계분할의 권리, 달러패권에 근거한 통화제국주의의 영속성 등등과 같은 부수적 공리들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리체계 속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생산된 전세계 부의 60% 이상을 1%의 부자들이 독식하는 말도 안 되는 현상도 분노 이상으로 부러움과 함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이 누리는 것은 전우원의 적절한 표현처럼 “사람들의 피로 세워진” 부일 뿐이다. 또 그러한 하위공리들의 체계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제일원리 역시 자명한 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점은 최근의 경제 상황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SVB의 파산으로 미국 국채를 최고 안전자산이라고 여기는 자본의 하위공리 하나가 쓰라린 상처를 입은 것이다. 이 상처가 미국 정부의 신속한 처방 덕분에 가벼운 외상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미국 경제의 속병이 깊어 보인다. 더 높은 이윤율 혹은 더 낮은 임금을 찾아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금융자본과 양질의 고용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요구 사이의 불화, 좀 더 근본적으로는 노동력을 절약해가는 생산력 발전 및 유기적 구성 증대와 이에 따른 자본증식의 한계가 병의 주원인인지라, 양적 완화와 이자율 조작 혹은 통화제국주의적 조치로는 근치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처방은 전세계의 노동자민중에게 고통을 떠넘김으로써 제국주의적 자본독재를 연명시키면서 병을 키울 뿐이다. 양적 완화-인플레이션-강달러정책-국채가격 하락-신용파괴의 연쇄반응이 달러패권의 댐을 조금이라도 빨리 붕괴시키는 기폭제로 작동하기를 기원한다. 제국주의적 재앙을 피하면서 미국 경제의 속병을 치유할 근본 대책으로는 자본의 무한증식본성을 인류사회 바깥으로 내다 버리는 일 말고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다. 물론 자본이 무슨 ‘따뜻한 자본’ 따위로 변신하여 무한증식본성을 죽여가며 스스로 자본이기를 포기할 리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만 아니라 전세계 노동자민중의 격하고 뜨거운 도움, 즉 혁명이 필요하다. 그 기회는 대략 십여 년을 주기로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다. 이때 노동자민중의 에너지가 엉뚱한 목표들을 향해 분산되지 않고 자본독재를 정조준하려면, 자본독재가 유포하는 제일원리 및 공리체계들을 철저히 불신하는 사고 훈련이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훈련이 없으면 우리가 추구하는 풍요도 확대재생산, 자본증식, GDP증대, 더 큰 집과 승용차, 더 편리한 가전제품들 등과 자동으로 동일시되기 쉽다. 또 여기에는 무한경쟁과 장시간의 소외된 노동, 양극화와 서열체계, 무수한 차별과 예속관계, 제국주의적 착취와 수탈, 제국주의적 갈등과 전쟁, 환경파괴 등이 필요악으로 따라붙는다. 이 불평등한 서열체계 속에서는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 더 높은 곳을 향해 곁눈질하며 궁핍과 불행을 맛보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오늘의 불평등한 착취구조와 서열체계를 허무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연합한 생산자들’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인한 착취를 근절하고, ‘최소의 노력으로’ ‘인간성에 알맞고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수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비로소 인류는 증식의 한계에 따르는 경쟁과 독점과 과잉생산과 주기적 위기를 벗어나, 생산력 수준에 부합되는 최적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의식주와 교육, 의료, 교통, 통신 등의 기본생활이 사회적으로 보장될 때, 오늘의 서열체계에 대한 맹신이나 부와 가난의 세습에 대한 욕구와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생산력의 발전에 비례해, 즉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위한 노력을 줄일 수 있는 데에 비례해, 노동시간도 보편적으로 축소될 것이다. 물론 실업이나 비정규직이라는 개념도 역사교과서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미 맑스의 청년기인 19세기 중엽에도 당대의 생산력이면 5시간 노동만으로도 물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연구가 나왔다. 오늘의 생산력이 소수의 독식과 인류문명의 파괴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와 공영을 위해 활용된다면, 아마 4시간 노동제로도 충분하고 남을 것이다. 이렇게 확보되는 자유시간에 우리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인류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갈등과 새로 닥쳐오는 문제들도 해결해가며 의미를 찾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자연과 인류의 무궁무진한 문화유산들을 합리적으로 다루며 함께 누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인간의 감각과 욕구 혹은 초자아 등도 자본독재의 감옥에서 벗어나 공존과 공영, 그리고 평등을 새로운 제일원리로 발전시키는 에너지로 쓰일 것이다. 모든 노고를 돈으로 환산하는 오늘의 인정체계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인정체계 역시 섬세하게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풍요의 의미 역시 자명한 것이 아니라 자본독재를 극복한 대안 사회 속에서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3. 자명하고 확고한 제일원리를 향해서도 의문을 던지는 것은 모든 것을 변화와 발전, 생성과 소멸 속에서 파악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변증법적 사유방식 본연의 업무다. 이러한 업무는 자본독재의 산물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물론의 기본공리들 앞에서도 변증법적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 예컨대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명제는 자명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명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의식과 존재를 기계적으로 구분하고 존재가 의식을 일방적으로 규정한다고 이해하면 당장 비변증법적 유물론의 난관에 빠질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서 의식이 차지하는 비중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서 의식을 제거할 수는 없다면, 위의 명제는 ‘의식을 포함하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의식이 의식을 규정하는 측면도 함께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재귀구조를 고려함으로써 과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숙명론들에 맞서 의식의 중요성과 주체의 역할을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포이어바흐 열한 번째 테제 역시 단순하게 받아들여 세계의 해석과 변혁을 별개의 사안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변증법적이지 못하다. 새로운 세계 해석은 변혁의 출발점이나 동력 혹은 결과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바꾸는 데에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
자명한 제일원리나 원칙에 대한 비판은 직접 실천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 당 원칙과 규율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던 레닌이 타협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변증법적 사유의 정수를 보여준다. [좌익소아병]에서 그는 ‘원칙상’ 타협을 거부하는 것은 “진지하게 고려하기조차 어려운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기회주의와 변절을 나타내는 타협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폭로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맹렬히 전개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의회나 조합 등 모든 형태의 “반동적 제도를 없애버릴 힘이 없다면 그것들 내부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 이유를 레닌은 거기에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생활조건으로 인하여 기만당해온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 내부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면 “다름 아닌 허풍선이가 되어버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노동자정치운동에 적극 나서는 사람들은 의회나 반동적 제도 내부로 들어감으로써 자본독재에 굴복하고 변절할 위험과, 원칙적인 타협 거부를 통해 ‘허풍선이가 될 위험’ 사이에서 길을 잃기 쉽다. 이때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에 최대한 효과적으로 기여하겠다는 목적의식은 양쪽의 위험을 헤쳐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국가 건설 및 국제적 전술 통합과 관련해서도 레닌은 변증법적 과제를 내놓는다. 즉 공산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객관적 발전의 특수성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특수성은 각 개별 국가에 고유한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연구하고 모색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레닌은 ‘민족적 국가적 차이들’을 인정하며 ‘다양성의 제거’나 ‘민족적 차이의 소멸’이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의 요구는 공산주의의 원칙들을 “민족적 국가적 차이에 맞게 올바로 조정해서 적용하라”는 것이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려면 이미 만들어진 특정한 역사적 모델들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고, 그것들을 활용하되 우리의 특수한 실천적 조건에 맞는 대안들을 주체적으로 연구해낼 뿐 아니라, 그 성과물들을 노동자민중과 함께 검증하고 공유해가는 조직적 체계적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제일원리의 자명성을 비판하는 것은 모든 원리와 인식의 가치를 부인하는 인식론적 무정부상태를 추구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기존의 원리나 인식에 대한 수동적 맹목적 믿음에 빠지지 않고,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에 좀 더 다가가며 인식의 깊이와 폭을 넓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반성 회로를 가동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재검증되는 원리나 인식도 궁극적인 것일 수는 없으며, 언제라도 다시 검증대에 오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자본독재가 제일원리로 포장해 강매해온 지배적 통념과 이를 비판하며 사태의 본질에 접근해가는 인식의 해방적 전략적 의미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변증법은 제일원리의 허세와 이에 대한 맹신을 깨면서 더 나은 과학적 인식을 생산한다.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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