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파트공화국, 신화의 시작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우리나라를 가리켜
아파트공화국이라 칭하였습니다.
서구에서 아파트는 도시문제의 집약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건축적인 측면에서는 성냥갑을 쌓아놓은 듯 볼품없고,
생활환경면에서는 저급하며,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도시의 소외계층이 거주하는
범죄의 온상으로 상징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은
주거형태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54%에 이르고,
중산층이 거주하는 고급주거지이자
서민층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겠지요.
현재는 도시의 전형적인 주거형태가 된 아파트
그렇다고 아파트가 우리의 전통적인 주거형태였던 것은 아니죠.
우리의 전통적인 주거형태는
ㄱ자나 ㄷ자형 한옥이었습니다.
<ㄴ자형>
<ㄷ자형>
<북촌 가회동>
1958년, 기존의 주거형태를 완전히 뒤엎는
혁신적인 형태의 주택이 건설됩니다.
성북구 종암동 고려대 인근 언덕 시유지에
4~5층 규모의 3개동 152가구의 공동주택이 건설되는데,
그것이 해방 후 최초로 지어진 종암아파트먼트 하우스입니다.
미국자본과 독일의 설계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대한주택영단(지금의 한국토지주택공사 LH)이 주가 되어
우리의 기술로 우리가 직접 지은 최초의 아파트입니다.
<신축 당시 전경>
당시 안암동 고려대학교 담장 옆 언덕은 온통 흙먼지로 뒤덮힙니다.
공사차량들이 거친 엔진음을 내뿜으며 숨가쁘게 언덕을 오르내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슬땀을 흘리는 대규모 공사현장
아직 한국전쟁의 폐허와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당시에
이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종암아파트가 기존의 주택과 차별되는 커다란 특징은
목재 대신 콘크리트 자재를 사용한 것과
수세식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당시엔 동네마다 공동화장실이 있고,
아침이면 동네사람들이 화장실 앞에 줄지어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광경이 일상적이었죠.
이런 현실에서 집안으로 들어온 수세식 변기는
일대 혁신적인 사건이었고
이로써 집안의 편안한 공간에서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문명의 진보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이 문명의 진보를 누리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종암아파트 입주자들은
정치인, 의사, 교수와 같은 상류층이었으니까요.
종암아파트는 2개의 방과 거실, 주방, 창고, 발코니가 갖춰졌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발 벗는 공간이 있고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주방과 거실은 작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었는데,
주방엔 인조석 싱크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에게 친숙한 구조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난방은 연탄난방이었고,
온돌을 깔아놓은 방은 거실보다 한 단 높았습니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효형출판, 2009)>에 따르면
단이 높은 안방에서 발코니를 통해 내려다보는 공간감은
옛날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내려다보던 시각과 닮았다고 풀이합니다.
언덕받이에 세워진 종암아파트는 외연적으로도 특이했는데
인위적으로 평평하게 정지작업을 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지형을 살려 위는 높고, 아래는 낮은,
계단식으로 지었으며,
남향으로서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는 배산임수형이었습니다.
<철거 직전 전경>
1958년 세워진 종암아파트는 35년이 지난 1993년 철거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2개동 238세대 종암선경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