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짓국
작품합평을 끝낸 늦은 점심
강산골 선짓국으로 하지
아, 뜨거라 뜨거워 혀 데이겠네.
아마 300도 이상은 될 것이다
뜨거운 불에 팔팔 끓여낸 선짓국
주재료가 엉겨 붙은 소피덩어리란다
푸른 초원에서 파란 풀을 뜯고
맑은 개울에서 쭉쭉, 흐르는 물을 마시던 기억 되새김질하며
도축장으로 느릿느릿 끌려가며
툭 툭 떨어뜨린 방울방울 뜨거운 눈물자국 얼룩얼룩
피 피 장밋빛 피, 픽픽 끊어지는
희미한 소의 울음소리 들리시나
엉겨 붙은 슬픔의 덩어리
내가 그 속에 들어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위로해주고 싶다
어른거리는 슬픔의 그림자
엉엉 울면서
오로지 인간의 허기를 위해 몸을 던진
소의 身命
누가 매를 맞아야하나 인간의 죄
아무래도 우리 글쟁이들이 어떻게든 어떤 형식으로든 갚아야겠지 2019.2.25.
28일로 2월이 끝나는 까닭은
1, 2월이 기다려지는가.
11월 12월이 기다려지는가.
열두 달 중 어느 달이 제일 많이 기다려지는가
꽃 피는 3, 4월 아닌가
그렇다. 그도 그렇다고 하고
나도 그렇다고 하고
너도 그렇다 하고
새들도 꽃들도 대지도
대지의 모든 생명도
새 학년을 맞는 학생들도
어서 3월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이의 없이 우리 모두는 이에 동의했다
해님도 달님도
빨리 봄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
우리와 같아서
서둘러 2월을 28일로 단축하고
3월을 앞당기기로 합의를 봤다 2019.3.1.
양산 살이 추억을 새기며
2000년 3월 초부터 2005년 3월초까지 너는 양산에 있었다
난생 처음 집을 떠나 오랜 기간 혼자서 양산에 살았다
양산이 어디 붙어있는지조차 모르고 막연히 부산과 마산 부근이거니 했는데
아니고 부산과 울산 兩山 사이 양산이 있었다
이쪽 지방엔 산들이 많다
자연 양산일대의 산들, 울산 일대의 산들, 부산 일대의 많은 산들을 다녔다
천성산 대운산 솥발산 달음산 문수산 금정산 장산 황룡산 山 山 山
영남알프스 영취산 신불산 가지산 간월산 화왕산 운문산 천황산 山 山 山
남들 다 갔다 오는 군대도 못가고 외톨이로 집만 지키고 있던 네가
다리가 굵어지고 가슴이 넓어졌다
너는 산을 밟고 산은 네 품에 안겼다
산 너머 동해도 네 눈에 들어왔다 반짝반짝
임랑 진하 해변에서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눈이 시리게 바다를 바라봤다
반짝반짝 경산도 사투리도 귀에 들어왔다
서창마을 덕계마을 부산 울산 골골이 이름 없이 살던 순박한 사람들이 너를 만났다
희성 정숙 미숙 미희 미자 춘호 극수 정희 경혜 정혜 헌경 중남 문수 숙녀 김백 미옥
정경남 김양옥 부부, 황재남 배일남 부부
난생 처음 여러 여자와 여러 남자가 네 가슴에 들어와 같이 살았다 따뜻하게
밤낮없이 반짝반짝 지워지지 않는 이름들 2019.3.1.
몰입
십 몇 년을 학생지도를 하다가
학생지도에 빠진 너
일주일째 잡초를 뽑다가 일주일째 잡초에 빠진 너
하루 한나절을 책을 보다가
하루 한나절 책에 빠진 너
한 시간씩 두 시간씩 밥을 먹다가 밥에 빠진 너
한 시간씩 두 시간씩 티브이를 보다가
티브이상자 속에 푹 빠진 너
언제부턴가 나의 눈을 응시하다가 나의 눈에 빠진 너
나에게 빠진 너의 눈을 바라보다가
라라라 라라라
어럽쇼, 지금 이 순간 너의 눈에 빠진 나를 본다
보고 있다
행운일까 아닐까 2019.3.2.
시간
眞伊*처럼 아무나
춥고 외로운 시간은 줄이고
따습고 즐거운 시간은 늘릴 수 없기에
시간밖에 홀로 설 인간 누가 있겠느냐
아무도 한 장소에 묶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기에
시간 스스로 빨리 오고 더디 가주느냐
더디 더디 오고 빨리 가버리느냐가 문제로다
아이들이 보내는 시간과 어른들이 몸으로 느끼는 시간의 낙차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기다리던 시간과의 만남은 짧다
재깍재깍 괴로움의 시간은 일초가 길고
똑딱똑딱 기쁨의 시간은 하루가 너무 빠르다
동창이 밝았느냐
낙조의 눈물이 너무 붉구나
시간 밖에서 누가 이 낙차를 극복할 수 있을까
아무도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그대는 지금 그 낙차를 견디느라 우주적 외로움을 느낄 뿐이다
어디서 뭘 하는지
그저도 지난봄처럼 길 잘못 들지 않고 잘 오고 있는지
아직도 그대가 기다리는 시간은 멀기만 한데
*황진이의 시조 2019.2.10.
나의 몸, 안부를 묻다
자네의 두 눈과 두 귀와 두 입술
자네의 목구멍 하나 똥구멍 하나 두 가슴 두 불알
모두모두 안녕하신지 배꼽도 혓바닥도 자지도
자네의 두 팔과 두 다리 두 발과 두 손
열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
열 개의 발톱 손톱 모두모두 안녕하신지
자네의 머리털 가슴털 겨드랑털을 비롯해
온몸에 부지기수 솜털 한 개까지
자네의 등뼈 머리뼈 갈비뼈 넓적다리뼈 무릎뼈 복숭아뼈
귓속뼈 6개 총 206개의 뼈들 두루두루 안녕하신지
구석구석 피돌기는 잘 돌아가고 있는지
자네의 손끝 발끝이 따뜻하신지
숨쉬기엔 아무 지장이 없으신지
귓속 콧속 뼛속
자네의 뱃속 머릿속도 두루두루 편안하신지 2019.3.3.
외계인 보셨나요
창씨개명이다 귀신의 새로운 이름 외계인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에
혼자서 들에 나갔다가 고갯길을 넘다가
불쑥불쑥 마주치셨다던
보이지 않는 귀신이 우리들 앞에 나타나
A는 11년 전 무인지경 새만금 간척지기슭에서 보았다하고
B는 지난 해 여름 서울 한복판 광화문 광장에서 몇 번
나는 오늘 노량진 환승역에서 보았네 13시 13분에
보자 네가 서울 살이 할 때
1972년 여름 1983년 봄 1984년 가을 그리고 1999년 겨울
종로 5가 3가쪽에서 어깨를 부딪치고 시치미 뚝 뗐던 그 자가 바로 외계인?
오늘날 전파를 허공에 거미줄같이 깔아놓고
포위하듯 너의 앞뒤 양옆에
너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는 E IT씨 외계인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
두렵지 않은가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행성의 주인이 되겠다고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지구를 탐색하고 공작하는
머지않은 장래에 가면을 벗고
인간 앞에 정정당당이 얼굴을 드러낼 외계인들 2019.3.4.
설이 줄 서고 설이 날개 달고
설이다
전국방방곡곡 설이다
고속도로 지바방도로 마을앞길 전국에 길이란 길 다 설이다
설로 가득 붐비고 밀리고 있다 산길 뱃길 하늘길도 설이 줄서고
스물한 집 우복동 우리 마을도 스물한 집 모두 다 설이다
집집마다 승용차 한 대 두 대 세 대 안 서 있는 집 없고
돌방죽 배씨네는 네 대 다섯 대 여섯 대 일곱 대 칠남매가 다 차를 끌고 내려왔다
조용하던 시골 동네가 갑자기 설로 설설 설레고
한국의 설이 한국을 넘어 외국여행길에 오른다
일본 중국 동남아를 넘어
미국 캐나다 중남미 호주 유럽 아프리카 전 세계 안 가는 곳이 없다
설이 한국의 설이 날개를 달고
너의 장남도 캐나다 갔지 20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