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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입문] 제2강 자료입니다.
제 2강
‘개념의 운동’(헤겔)·24 | 변증법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실체화한다·25 |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통일로서의 헤겔 변증법·26 | 과정 속의 비동일성, 결과 속의 동일성·27 | 변증법 모델로서의 변증법 입문·27 | 개념의 운동은 궤변이 아니다·28 | 과학의 노정인 개념의 운동·29 | 자체 내에서 역동하는 인식의 객체·30 | 합법칙적인 객체의 운동·31 | 형이상학적 진리 개념·32 | 진리의 필연적 사물화·33 | 역사적 운동은 존재의 운동이 아니라 구체적이다·34 | 변증법은 기초철학이 아니다·35 | 진리의 시간적 핵심·36
지난번에 나는 변증법 개념에 접근하려고 할 때면 처음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는 한 가지 문제 혹은 어려움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그 어려움은 한편으로 변증법이 사유의 한 가지 방법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 고찰하려는 사태 자체의 규정⋅질⋅본성에 합당해지려는 시도라는 데에 있습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개념들의 운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점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의 경우 바로 ‘개념’이라는 것이 이 이중적인 것입니다. 즉 한편으로 우리가 사물들에 부여하는 개념, 그러니까 우리가 방법적으로 사용하는 계기들의 종합이고, 다른 한편으로 사태 자체의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이제 알게 되겠지만, 헤겔의 경우 한 사태의 개념은 사태에서 추출해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사태 자체의 본질을 실제로 구성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변증법의 개념 일반에 접근할 때의 어려움, 이 분과가 낯설 경우 일단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개념 혹은 관념을 만들 때의 어려움은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대목, 즉 한편으로는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사유 방식이 관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 자체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에 있습니다.(입문24)
내가 여러분에게 묘사하려고 시도한 이 이중적 성격의 변증법 개념을 다룰 수 있으려면 일종의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상정해야 한다고 불가피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실제로, 또 궁극적 의미에서 이 방법을 통해 서술되는 사유와 이 사유의 대상, 즉 변증법을 통해 표현되어야 할 사태 자체가 동일한 경우에만, 단지 그럴 때에만 이런 이중적 의미에서 변증법에 대해 의미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입문25)
이 둘은 분명 변증법적 철학이 필연적으로 사유와 존재를 동일한 것으로 설정하는 철학일 수밖에 없다고 말할 때에만 일단 결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사실상 이는 철학적으로 완전히 만개된 형태의 변증법인 헤겔의 변증법에 적용됩니다. 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최종단계에서 바로 존재 자체가 혹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이야기하듯, 진리가 주체라고 주장하는 일종의 동일성철학인 것입니다.(입문26)
이때 여러분이 부딪치는 이 최고수준의 모순, 즉 한편으로 변증법은 비동일성을 사유하는 시도, 그러니까 사유로 소진되지 않는 대립적 계기들을 사유를 통해 받아들이려는 시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성철학으로서만, 즉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는 철학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이 모순이야말로 원래 헤겔식 관념변증법이 설정한 계획을 정식화해줍니다. 즉 헤겔식의 사유는,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동일성을 비동일성과 통일시키겠다는 계획을 명백히 표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사유 속에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매순간 사유를 그 대상과 상이한 것으로 확인하려는 계획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분은 우선 그것이 언론의 자유이면서 검열이기도 하다고, 사유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명백한 모순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즉 한편으로 변증법은 다름 아니라 주체와 객체 사이의 대립, 사태와 방법 사이의 대립, 인^식과 무한한 절대자 사이의 대립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다시 통일시키고 이로써 이 대립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입문26-27)
그런데 이에 대한 헤겔의 해답은, −또 나는 지금 헤겔식 변증법, 즉 관념변증법에 대해서만 말하겠습니다. 유물변증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겠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구조를 지닙니다− 이 경우 헤겔의 이념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이로써 여러분은 아무튼 한 가지 변증법적 철학의 계획을 마치 호두껍데기 속에 있는 상태로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즉 사유 일반이 접할 수 있는 모든 개별 규정 속에서는 비동일성이 드러납니다. 사유와 그 대상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유 일반이 상승해 올라갈 수 있는 모든 규정들의 총괄개념 혹은 철학의 모든 규정들의 총체는 바로 이 절대적 동일성을 산출해낸다는 점도 드러납니다. 어쩌면 좀 더 조심스럽고 엄밀하게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철학은 이 동일성을 산출한다고, 철학은 실현된 개별 모순들 모두의 총체 내지 총괄개념으로서의 동일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헤겔의 경우 철학은 전체임을 주장하는데, 이 전체 속에는 모순들이 살아 있으며 동시에 전체로서의 철학 속에서 지양되어 있는 것입니다.(입문27)
이것이 아주 간단히 말해서 관념변증법이 본래 설정한 계획입니다. 이를 헤겔은 진리는 전체다라는 명제로 표현했습니다.(입문27)
본 강의에서 나는 여러분을 변증법으로 안내해갈 뿐 전체로서의 변증법 철학을 여러분에게 개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여러분에게 지난 시간에 암시한 이유들 때문에, 단지 내가 우리의 과학 이전 의식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정형화된 의식 속에서도 변증법에 제기되는 난^관들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난관들에 대한 이 부정은 동시에 언제나 변증법적 개념 자체에 대한 하나의 규정과도 사실상 같은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와 같은 입문은 동시에 여러분이 정말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일종의 모델입니다.(입문27-28)
여러분은 모두 과학 이전적인 사유나 그 이상으로 여러분이 어떤 형태로든 수행한 과학적 연구에 근거해, 여러분의 개념들을 고수하는 것, 즉 일정 수의 특징들을 통해 개념들을 ‘깨끗하게’ 정의하는 것을 여러분의 정신적 훈련의 과제로 삼는 데에 익숙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그런 다음에는 이 개념들에다 다른 식으로 정의된 다른 개념들을 떠맡기지 않는 것, 달리 말하면 이 개념들을 운동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과학적 청결의 증거로 간주됩니다.(입문28)
변증법적 사유의 과제는, 예컨대 하나의 개념이 지니는 어떤 규정들을 동일한 개념의 다른 규정들로 은밀히 대체하는 식으로 개념들을 가지고 곡예를 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런 방식은 사실상 궤변적 사유의 길이며 변증법적 개념의 길은 아닙니다. 오히려 변증법의 이상에 비춰볼 때 −이와 관련해 나는 결코 그것이 언제^나 또 어떤 변증법적 작업에서나 실현되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본래 변증법이 요구받는 바는, 어떤 개념과 그것이 뜻하는 사태 사이에 어떤 난관들이 생겨난다는 점이 드러날 때까지, 개념들 자체를 활용하고 그것의 사태를 추적하며, 특히 그 개념을 그것이 뜻하는 바와 대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어려움으로 인해 사유의 진행과정에서 이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 개념이 원래 가졌던 규정들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는 바로 원래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러니까 원래 개념이 그것의 사태 자체와 −이 사태가 아무리 잘 정의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또 이 원래의 개념이 그 사태와 일치하도록 촉구하는 점에서 그러한 변화는 원래의 개념을 정당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어떤 하나의 정의를 버린다는 것은 다양한 정의들로 유희함으로써 야기되는 자의적 행위가 아니라 −아무튼 그 이념상− 개념이 사태와 부단히 대면하는 가운데, 그러니까 개념의 내재비판을 통해, 또 그것을 무엇이라고 칭하든, 개념 자체의 불충분함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바로 그 비동일성의 계기, 즉 개념과 사태의 불일치를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이때 개념이 경험하는 변화는 동시에 헤겔 철학의 의미에 비춰볼 때 사태 자체의 변화이기도 합니다.(입문28-29)
“순수한 본질들의 이 운동이 과학성 일반의 본성을 이룬다. 그 본질들의 내용의 연관관계로서 고찰할 때, 이 운동은 내용의 필연성이자 유기적 전체로의 확장이다. 마찬가지로 지의” −철학적인 지, 완전히 전개된 지의− “개념에 도달하는 길은 이 운동을 통해 필연적이고 완전한 형성과정이 되며, 따라서 이러한 준비과정은 우연성을^ 수반하는 불완전한 의식의 이러저러한 대상들⋅관계들⋅사고들과 결합되거나, 특정한 사고들에 근거하는 오락가락하는 추론⋅추정⋅결론도출을 통해서 진리를 정초하려는 우연적 철학행위이기를 그친다.” −그러니까 내가 방금 여러분에게 말한 개념들의 자의적 연장이기를 그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길은 개념의 운동을 통해 의식의 완전한 세계성을 운동의 필연성 속에서 포괄하게 될 것이다.”(입문29-30)
내가 처음에 말한 바, 즉 변증법의 이념은 언제나 본래 이중의 것을, 즉 사유의 방식과 관련된 것만 아니라 사태의 형태와 관련된 것도 뜻한다는 점을 여러분이 잠시 기억하면, 내 생각에 아마 여러분은 변증법 일반에 대해 핵심적인 ‘개념의 운동’이라는 이 개념에 도달할 것입니다.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여러분이 어떤 한 변증법 철학의 기초가 되는 −그리고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건대, 헤겔식의 관념변증법과 맑스식의 유물변증법이라는 두 부류의 변증법 철학 어느 한 쪽에든 마찬가지로 기초가 되는− 사태 혹은 대상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좀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이 규정의 독단적이고 단순한 주장에 그치는 측면을 나중에 만회하리라고 기대합니다만− 대상, 혹은 개념을 통해 전개되어야 할 것에 대한 관념은 그 자체로 운동하는 것의 관념이며, 따라서 자체로서 같은 것, 영원히 자체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본래 그 자체가 일종의 과정인 것에 대한 관념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일단 이 대목에 근거해 정식화하자면, 기본경험은 사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주체의 이론이 아니라 객체의 이론으로부터, 변증법 일반을 고취한 사태로부터 나오는 것, 사태 자체의 원칙적 역동상태에 대한, 달리 말하면 세계 일반의 원칙적 역사성에 대^한 경험입니다. 즉 하늘과 땅 사이에는 단순하게 그냥 존재하는 것은 본래 아무것도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래 역동적인 것,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원칙적 경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칸트(Kant)의 이론에서도 이미 구상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우리 직관의 필연적 형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고들을 결합하는 최후의 유효한 규정이며, 그래서 본질적으로 어떤 시간적인 것으로 사유될 수 없는 것은 전혀 아무것도 사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입문30-31)
따라서 원칙적인 역사적 운동성에 관한 이러한 사고로 인해 사유는 이제 사실상 개별 본질들을 경직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객관적 구성에 비춰볼 때, 객관적 규정상태에 비춰볼 때, 역사 속에서 변해가는 것으로서 파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또 하나의 본질적인 계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헤겔에게 특징적이고 원래 체계적 사고, 즉 실재를 자체 내적으로 통일적으로 서술하려는 사고에서 나온 계기입니다. 즉 사태 자체의 이러한 역사적 운동성, 존재에 대한 역사의 이 우선성은 단순히 시간 속에서 대상들이 겪는 우연한 변화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가 따르는 필연성, 법칙적인 것, 포괄적인 것이 원래 바로 이 역사적 변화라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 사유, 변증법 이전의 사유는 필연적인 것, 무조건 타당한 것을 고정된 것, 불변적인 것, 늘 그렇게 존재하는 것과 동일시했습니다. 예컨대 몽테스키외(Montesquieu)와 비코(Vico) 이래, 또 18세기를 지나며 콩도르세(Condorcet)를 거쳐 마침내는 피히테(Fichte)와 헤겔에 이르러 완성된 역사적 차원의 발견은 이 지점에서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konpernikanische Wendung) 의미하며, 그 파급효과는 이른바 칸트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충분히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즉 필연성은 본래 사물들이 자체로서 같은 상태로 머물고 서로 동일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필연적인 것은 다름 아니라 자체와 동일한 것을 다른 것으로, 자체와 상이한 것으로, 마침내는 자^체와 모순된 것으로 되게 만드는 발전의 주요 법칙들이라는 점입니다.(입문31-32)
헤겔은 이 대목에서 −그리고 이는 그의 변증법에서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유물변증법에서 더 [나타나는] 계기입니다− 창끝을 돌렸습니다. 즉 전통적인 사유 전체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견고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 자체와 같은 상태로 머물고 몰역사적이고 고정된 진리가 이제 그 자체로 역사적 왜곡상, 달리 말하면 스스로를 영속화하려는 굳어진 관계들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들 자체의 본성이기도 한데, 그 관계들은 근본적으로 주체에 대한 살아 있는 관계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며, −이 철학의 결정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사물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대중적이고 비변증법적인 사유에 대해 진리의 보증처럼 보이는 것, 고정적인 것, 불변적인 것이 이 철학에 대해서는 −이 점은 변증법의 두 부류에 모두 해당됩니다− 처음부터 일종의 경직현상으로, 철학을 통해 용해시켜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즉 마치 진리 자체인 것처럼 자체 내에서 완결되고 절대화된 유한한 사물을 그릇되게 기초로 삼는 것 혹은 실체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세계가 사물화되고 관습화될 때에는 역사적으로 생성된 것, 얼어붙은 것, 굳어버린 것이 마치 우리에게 단적으로 언제나 타당한 즉자존재자처럼 보이는데, 그러한 사물화 내지 관습화에 맞선 싸움이 말하자면 변증법적 사유 일반의 논쟁적 출발점을 이루는 것입니다.(입문32-33)
그런데 또한 이 변증법적 사유의 경우, 그것이 어떤 한 가지 원칙, 하나의 또 다른 추상적이고 그 자체로 −여러분이 원한다면− 사물적인 원칙, 예컨대 생명의 원칙 따위의 이름으로 이 사물화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화 자체를 그 필연성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사물화를 극복하려 시도한다는 점이 매우 특징적입니다. 즉 [그것은] 제도들의 경색 혹은 경화 현상들, 우리에게 낯선 것, 우리를 속박하는 것으로 맞서는 모든 것의 소외현상들, 그것 자체를 나름으로 또한 역사적인 개념으로부터 추론해냅니다. 이 경우 역사적이라는 말은 내가 여러분에게 해석해주려 시도한 ‘개념의 운동’이라는 표현을 통해 묘사한 각별한 필연성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필연성을 사태 자체에 대한 통찰과 결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태 자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한 사태의 역사적 필연성을 그 모든 단계에서 파악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입문33)
이러한 운동성은 실제 역사에서 역사가 분열되어 있다는 점, 역사가 모순들 속에서 전개되며 우리가 이러한 모순들을 추적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로 인해 −또 내 생각에 여러분이 이 점을 주의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만− 변증법은 처음부터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존재철학과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존재철학은 원래부터 반-변증법적으로 시작됩니다. 또한 나는 오늘날의 존재론적 사유를 대변하는 여러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헤겔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이 첨예하고 예민한 대립을 지워버리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고 여러분에게 경계하고자 합니다. 이 존재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헤겔을 존재론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그들은 진리 자체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극히 근본적인 관념을, 마치 존재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관건인 것처럼 해석하려 시도합니다. 이에 반해 두 부류의 변증법 철학은 공통적으로 단순한 역사성과는 아무 상관없으며, 따라서 존재 혹은 진리가 역사적 성격을 띤다는 단순한 주장에 머물지 않고, 그로부터 대상들의 모든 구체적 규정들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역사적 성격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따라서 변증법이란 존재의 역사성 혹은 진리의 역사성을 추상적으로 어느 정도는 세계관적으로 보증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것일 수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변증법에서 실제로 그 사태의 철학적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때, 이는 변증법이 관련 대상들의 역사적 의미들을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에는 한편의 보편적인 것, 영원한 것, 지^속적인 것과 관여하는 철학과, (다른 한편의) 실증적 개별 과학들 사이의 흔한 구분을 변증법적 사유는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변증법 자체가 그것이 해석하는 구체적 과학들의 규정들에 그 실체를 두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과학들의 규정들은, 그것들이 개념의 의미에서 해명되지 않은 한, 역사적으로 말하기 시작하지 않은 한, 변증법에 대해 아무 상관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입문33-35)
오늘날 현존하는 철학과 과학들 사이의 분업에서는 비록 반대로 단언들 하지만 사실상 인식이 그 실체를 갖게 되는 모든 것, 인식에서 중요한 모든 것이 대체로 개별 과학들에 맡겨져 있으며, 이때 이 인식은 단순히 실증적인 것으로, 그러니까 사실에 대한 단순 확인으로 빠져들고, 그렇게 확인된 것의 의미나 현존하는 것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은 전혀 제기하지 않는 듯해 보입니다. 그럴 경우 철학에 남아 있는 것은 실제로 지극히 공허하고 텅 빈 것, 순수한 존재의 개념과 같은 개념밖에 없을 것입니다.(입문35)
변증법은 진리가 자체로 동일하게 머무는 것,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증법은 역사의 규정을 자체 내에 받아들인 진리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변증법은 좀 더 겸손하지만, 또한 이 실질적 규정들로 스스로를 채우고^ 진정한 철학적 규정들을 바로 구체적 대상들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는 한에서 덜 겸손합니다. 또한 존재철학들이 이 구체적 규정들을 그저 사취할 뿐인 반면에, 그러니까 [그것들을] 역사적인 것과 존재자의 전 영역으로부터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순수한 존재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는 반면에, 순수 존재와 단순한 역사적 현존재 사이의 대립을 받아들일 수 없는 변증법적 철학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기인하는 규정들을 통해 아무튼 자체의 철학적 판단을 수행하고자 하며, 바로 이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따라잡고자 합니다.(입문35-36)
진리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사실 진리가 초시간적으로(zeitlos) 존재하는 것, 절대적으로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사실 시간 속에 위치하며, 시간 지수를 지니며, 아무튼 시간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며, 우리는 시간으로 인해 결코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플라톤 시대 이래로 칸트에 이르기까지 진리의 이념은 영원하고 전적으로 타당한 것의 이념과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칸트의 ‘아프리오리(Apriori)’ 개념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것은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단적으로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것, 즉 아무튼 가능한 모든 판단의 조건인 것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변증법의 실로 결정적인 요구는 진리를 시간 속에서 혹은 시간과 대립하여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자체가 시간적 핵심을 지닌다는 것, 시간이 진리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미 이러한 개념도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며, 특히 칸트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점을 암시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변증법은 중요한 의미에서 자기^이해에 도달한, 자의식에 도달한 칸트철학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변증법의 문제틀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규칙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나는 칸트가 아직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프리오리라는 의미의 전통적 진리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여러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시간을 인식 일반의 본질구성적 조건으로 삼았고, 이로써 이미 그것은 그의 철학 속에서 그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의 경우 시간 자체가 진리의 기관이 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그로부터 결론을 끌어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후 그의 후계자들, 특히 다름 아니라 헤겔이 그러한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또한 이로써 물론 존재에 대한 사유의 적절성⋅적합성이라는 전통적 [진리의] 정의도 영향을 받게 되며, 그리하여 그러한 철학을 통해 또한 필연적으로 변화하고 수정되는 것입니다.(입문3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