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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된 교회공동체
2020. 1. 19.(주일낮예배) 빌립보서 2:1-4
찬양사역자 신은영전도사는 하율이라는 딸을 가지고 있다. 그 하율이가 6살 때 아응 아응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무슨 소리야 하고 물었더니 노래하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그때 신은영전도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율이의 말을 받아드렸다. 그런데 밥을 먹는데 아응하면서 음식을 주루룩 흘려버리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검색을 해보니 음성틱증후군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 심리검사를 했더니 애정결핍으로 나왔다. 그때 의사선생님은 착한 엄마가 아이를 망친다는 말씀을 해 주었다. 당시 신은영전도사님은 하율이가 놀이터에서 친구와 실랑이를 벌리면 항상 하율이를 제재했다. 또 누가 하율이 장난감을 가지려 할 때 전도사님은 하율이에게 친구와 나누어 가져야 착한 아이다고 말했다. 이렇게 엄마의 제재를 받은 하율이는 내 편이 없다는 불안감에 음성틱장애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음성틱장애는 평생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신은영전도사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율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사역을 감당하겠다고 기도하였다. 어떤 날은 하율이가 작은 소리로 아응할 때도 있지만, 또 어떤 날에는 고함을 치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신은영전도사님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은 의연하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수천명이 모인 교회당에서 집회를 하였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은혜 속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내려오는데, 음성틱장애를 가진 하율이가 맨발로엄마에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하율이를 보는 순간 전도사님은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때 나온 말이 하나님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였다. 시도때도 없이 고함치는 하율이의 모습이 머리 속에 지나가면서 전도사님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눈물흘리며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6개월만에 하율이는 완치되었다. 이렇게 완치된 하율이는 심리치료실에서 나무를 그렸다. 애정결핍으로 음성틱장애를 가졌을 때 하율이는 나무르 빨갛게 그렸다. 그래서 왜 나무가 빨간색이냐고 물었더니 하율이는 나무가 피를 흘리고 있어요. 나무가 아파요하고 말했다. 그런데 완치된 후에 나무를 그리라고 했더니 초록색에 빨간 열매를 그렸다. 그리고 하율이는 나무가 살아났어요. 나무가 이제 아프지 않아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무가 살아났어요 라는 말을 할 때 신은영전도사님은 자기가 나은 것보다 더 큰 기쁨을 가졌다고 간증했다.
여러분은 신은영전도사님의 이 기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다. 천사들이 와서 물을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려도 나음을 입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거기에 38년된 병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를 만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면 38년된 병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바디매오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면 네 라고 대답하면 된다. 그런데 38년된 병자는 요 5장 7절로 말한다.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된 병자는 자신의 몸을 고치기 위하여 베데스다로 왔다. 아픈 몸을 이끌고 가족과 헤어져 살던 이 병자는 물이 동할 때 누구보다 먼저 물에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항상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서 자신은 38년 동안 병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육체적 질병을 가진 이 사람은 그 병을 고치려 하다가 실패와 분노 그리고 원망이라는 마음의 병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38년된 병자만의 모습이었겠는가?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할 때 사람들은 모두 물을 향하여 달려 들었다. 어떤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밀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더 빨리 가기 위하여 앞에 달려가는 사람의 옷을 당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항상 낙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베데스다에 있는 모든 사람은 육체의 병만 가진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가진 것이다.
여러분은 베데스다의 모습이 상상이 가는가? 아주 오래전에 유행했던 천국과 지옥탐방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과 천국을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래서 이 사람은 먼저 지옥을 갔다. 잘 차려진 테이블 위에 사람들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정말 이 사람이 보기에도 지옥도 살만하구나!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옥을 깨끗하고 좋았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숯가락과 젓가락의 손잡이가 너무 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건 왜 이렇게 길지?하고 생각하는데, 어디에서 시작하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숯가락을 잡고 밥을 먹는데, 자기 입으로 들어가지 않아 짜증과 원망을 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 이 사람은 천국에 갔다. 천국도 지옥과 똑같은 조건이었다. 깨끗한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 놓여져 있었고 숯가락과 젓가락 역시 지옥과 똑같이 긴 것이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식사 시작 하는 소리가 들릴 때 사람들은 모두 그 숯가락을 잡고 앞에 있는 사람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만족해 하며 기뻐하는 식탁을 나눈 것이다.
이것이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다. 천국은 상대방의 배고픔을 내가 알고, 그 배고픔을 내가 채워주는 곳이다. 그런데 지옥은 상대방의 배고픔은 보이지 않고, 오직 내 배고픈 것만 생각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곳이다. 결국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상대방의 아픔이 보이면 그 사람은 천국의 삶을 살고, 상대방의 아픔이 보이지 않고 내 아픔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지옥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서 살고 있는가? 지옥에서 살고 있는가?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많은 표적을 행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행하여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는고 기록한다. 그런데 요한은 그 뒤에 또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이 뭐라고 기록하고 있는지 요한복음 2장 23-24을 읽어보기 바란다.
(요 2:23-24)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고 할 때 사용된 믿음과 예수님이 그의 몸을 의탁하지 아니하였다고 할 때 그 의탁이라는 단어는 모두 πιστεύω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의미는 다르다. 많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그 사람들의 믿음은 표적이 있을 때만 믿는 제한된 믿음(아오리스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탁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렇게 표적에 제한된 믿음은 완전하지 못한 믿음 상태를 표현한다(미완료시제).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3년 후에 또 나타난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때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 빌라도 앞에 한마디 말을 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보고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치는 것이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치고 있는가?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푼 표적을 보면서 또 다른 표적을 보여 줄 것이다고 기대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로마에서 유대를 해방시키고 자유의 나라를 세워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초라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며 그들은 실망한 것이다.
이것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진 믿음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난 후에 또 다른 표적만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요한은 표적에 제한된 믿음이다고 하였고, 또 예수님이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믿음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여교회는 예루살렘과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기독교보에 포항장로교회 김창원목사님이 쓴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면 안되나요? 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그 글에서 김창원목사님은 예배는 삼위하나님과의 교제로 설명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므로 아름다운 교제를 펼쳐나가는 것이 예배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교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이다. 그래서 삼위하나님이 교제하는 그 교제에 내가 들어가고, 또 함께 예배하는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이 사도신경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에서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백성으로 함께 불러주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주신 한 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교제하고, 또 함께 죄용서함의 기쁨을 누리고, 부활과 영생을 소망을 가지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 교회공동체이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면 거기에는 하나님 불러주신 함께하는 공동체의 교제를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의 예루살렘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바란다. 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베데스다 못으로 달려가는 38년된 병자와 같이 내 필요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이다. 함께 교제하는 하나된 공동제가 무너져 있는 것이다.
여러분 보시기에 예루살렘 교회가 심각한 모습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연합된 교회의 모습을 가지기 위한 권면을 하고 있다. 함께 읽어보기 바란다.
(빌 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권면, 사랑의 위로, 교제, 긍휼, 자비는 윤리적 성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이 가지는 성품이다. 왜냐하면 권면과 사랑의 위로와 교제, 긍휼과 자비는 우리의 인격으로 나타낼 수 있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가정문제로 어렵고 힘든 성도가 있다. 그래서 그 가정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지혜를 모아서 권면도 하고, 또 위로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밥도 사주고, 또 필요한 것을 사서 챙겨도 주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 가정의 회복을 위하여 수고하였는데, 2년이 지나 힘들어하는 성도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그 대화가 2년 전과 똑같다면 그때 나도 모르게 짜증이 올라온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사람을 만났다면 그래도 지치지 않고 또 기쁨으로 권면과 사랑의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권면, 사랑의 위로, 교제, 긍휼, 자비는 윤리적인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된 기쁨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너희가 만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그 성품으로 ①마음을 같이하고, 또 ②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③다른 사람의 일까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여교회가 만일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시겠는가? 지난 월요일에 동부시찰남전도회 신년하례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가음정교회 제인호목사님은 설교 중에 국제시장의 제일 마지막 부분을 말씀하였다. 6.25 사변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은 퇴각로가 차단되었다. 그래서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철수하는데, 거기에 민간인을 태워주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물을 타고 배위로 오르는데, 덕수는 동생 막순이를 업고 배에 올랐다. 그런데 배에 올랐을 때 막순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덕수에게 두루마기를 입혀주면서 아버지가 없으면 네가 가장이다는 말씀을 하고 헤어진다.
이렇게 덕수는 아버지와 막순이를 흥남부두에 두고 부산 자갈치 시장으로 와서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엄청난 고생을 한다. 공부를 잘하는 남동생을 위하여 구두닦이를 하고, 또 수천개의 궤짝을 만든다. 그런데 서울대학에 입학한 동생의 등록금을 위하여 독일광부로 떠난다. 그리고 갱도가 무너져서 죽을 고비를 넘긴 덕수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자신의 꿈인 마도로스가 되기 위하여 해양대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한다. 그런데 그 합격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여동생이 시집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수는 여동생의 결혼자금을 위하여 해양대학 합격증을 찍어 버리고 월남전 파병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총탄을 맞아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래도 덕수는 가장으로서 어머니를 잘 섬기며, 또 동생들을 잘 건사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1993년 남북이산가족 찾기운동이으로 덕수는 흥남부두에서 잃어버린 막순이가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구정 명절날 미국에 있는 막순이가 한국으로 와서 온 가족은 함께 명절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때 덕수는 혼자 안방으로 들어와 장롱안에 있던 아버지의 두루막을 방바닥에 놓고 또 아버지 사진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이 정도면 가장 노릇 잘 한거지요? 막순이도 찾았어요! 아버지!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 거실에서는 온 가족이 깔깔깔 웃으면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안방에 들어온 덕수는 혼자서 울고 있는 것이다.
제인호 목사님은 이것이 아버지가 아닌가? 하는 말씀을 하였다. 온 가족이 함께 깔깔깔 웃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다 희생한 그 사람이 바로 아버지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또 여러분의 가정 안에도 이런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온 성도가 또 온 가족이 깔깔깔 웃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그 희생과 섬김을 하는 아버지가 우리 자여교회에도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이 아버지가 될 수 있겠는가?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의 교제에 연합하여서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만이 이런 멋진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멋진 아버지가 되어서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두 행복해하는 그런 가정과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