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 94 - 언니가 왔다 (사소 )
언니가 왔다. 향긋한 파래와 고소하고 새콤한 톳 콩나물 무침.
어젯밤 언니가 퇴근하고 와서 밥맛이 나려면 이런 걸 먹어야 한다고 해 준 거다. 입맛이 없어 힘들어 하는 내게 언니가 양파랑 쪽파랑 송송 썰고 청양 고추도 넣고 고추장이랑 매실을 넣어 무쳐서 그릇에 담아준 음식. 이걸 먹고 나는 더 건강해지고 힘을 낼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언니에게 제발 휴일에 의왕에 가서 반찬을 한다든지 하지 말고, 쉬다가 내려오라고 신신 당부했다. 키가 작고 아담하고 누구든지랑 같이해도 따뜻하고 세심하고 배려 깊은 내 언니. 언니가 왔다. 작년부터 어쩐지 언니가 내게 와야 할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내 어떤 일이든 엄마처럼 챙겨주던 나의 언니.
언니가 공무원 사회의 극명한 한계에 진저리를 칠 때 쯤 나는 언니가 평택에 내려와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16년 동안이나 공무원이었고, 다 늙었는데 어떻게 학원 일을 하겠느냐며 걱정이 한 짐이었다. 그러나 작은 이익만 챙기는 공무원 조직에 언니는 과분한 보석이었다. 내가 느낀 공무원 사회는,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챙기는 낡은 조직이었다. 개혁과 진화라는 새로운 세상은 없었다. 사교성 좋고 세심하고 반짝 반짝 아이디어가 많은 언니는, 분명 아까운 사람이었고, 정치적 이해가 개입된 공무원 사회의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며 결국 지난해 여름, 종지부를 찍었다.
의왕에서 2일 평택에서 5일. 언니는 아들 둘 남편을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는 일을, 딱 이틀만 한다. 그리고 5일은 졸혼이라도 한 것처럼 집안 일이라곤 없는, 입시 학원의 상담 과장이라는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또 언니는 16층 나는 7층, 나와 한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게 됐다. 나의 세상에는 참 신기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주민들이 이미 다 입주한 상태였기 때문에,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언니가 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매우 적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고 맘 속으로 기도 하면서, 이제 시간이 없다고 부동산에 재촉하자마자,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 집이, 반나절 만에 따악! 나타났다. 슬리퍼나 잠옷 차림으로 서로 얼렁 오갈 수 있게 된 건 내가 꿈꾸던 행운이다. 물론 구복은 아니지만 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그냥 하느님께 맡겨버리는 게 이번에도 통한 것이다.
일을 시작하면서, 완벽주의면서 집안 일에, 살림에, 세 아들 챙기는 것에, 거의 강박증에 가깝게 일에 치여 사는 언니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것을 나는 제안했다. 물론 서기관에서 갖 퇴임하신 형부와는 귀여운 바퀴벌레 한 쌍처럼 애정 전선에 이상은 없다. 다만, 언니가 인생의 2막 1장을 열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위치 다른 상태에서 시선과 조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덜 외로운 상태가 되었다. 그분의 정교한, 나를 위한 설계라는 것을 언니는 알 리 없겠지만 말이다.
첫댓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의 이름 ‘친정언니’
사소 님의 일상에 햇볕이 쬐는군요. ^^
언니와 동생의 우애가 남다르군요.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나는 알지 못하는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말해 봅니다. 하나님, 댕큐 소 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