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3년 10월 9일이었다. 청명한 가을 날씨였던 그날 오후, 멀리 동남아시아의 버마(현 미얀마)로부터 정말 믿기지 않는 소식이 들려왔다.
버마를 공식방문 중인 전두환 대통령을 살해하고자 북한의 지령에 따라 밀파된 간첩들이 버마(공식 명칭은 ‘버마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수도 랭군에 위치한 「아웅산 국립묘지」(버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을 기리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국립서울현충원에 해당)를 참배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몰래 설치해 놓은 폭발물이 터져 많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로 인해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해 함께 갔던 서석준(徐錫俊) 부총리, 이범석(李範錫) 외무부장관, 김동휘(金東輝) 상공부장관, 이계철(李啓哲) 버마 주재 대사 등 수행원 17명과 버마인 4명이 희생되고, 다른 수행원을 포함해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비보(悲報)가 속속 전해진 것이다. 다행히 전두환 대통령 내외는 목숨을 건졌으나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의 이목이 온통 한반도로 쏠렸다.
국가원수가 외국을 공식 방문하는 경우 그 상대 국가에서 경호에 책임을 지는 것이 오늘날의 세계적인 불문율이다. 그럼에도 버마 방문 중 대통령의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 일정을 미리 알아낸 북한은 간첩을 보내 참배하는 건물의 상량 부분에 시한폭탄을 전날 밤 몰래 잠입해 설치한 다음, 대통령의 참배 시간에 맞춰 폭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비밀리에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탄 차량이 출발하기에 앞서 경찰 호위를 받으며 태극기를 단 이계철 버마 주재 대사 일행의 승용차들이 국립묘지에 도착한 후 이계철 대사가 미리 도착해 있던 서석준 부총리 등 수행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곧 각하가 오실 테니 모두 자리에 정렬하자.”는 이계철 대사의 말에 수행원들 모두 2열 횡대로 도열하였다. 기자들도 촬영 준비를 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날 아침 10시 20분경 전두환 대통령은 숙소인 영빈관에서 버마 외무장관의 안내를 받아 4.5㎞ 떨어진 국립묘지로 출발할 계획이었으나 외무장관의 차가 중도에 고장이 나 영빈관 도착이 늦었다. 이로써 전두환 대통령의 출발시간이 4분 정도 늦어짐에 따라 테러를 모면할 수 있었다.
원래 일정에 따르면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에 버마 외무장관이 전두환 대통령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해서 대통령을 잠시 접견한 후 10시 20분에 묘소로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빈관으로 향하던 외무장관이 탑승한 승용차가 운행 도중에 길바닥에서 고장이 났다.
그런데 당시 버마의 교통 인프라는 대한민국의 1960년대 수준이어서 지나가는 택시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운전기사는 주변을 사방팔방 뛰어다녀 간신히 대체 차량으로 택시 1대를 끌고 와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이때가 이미 도착 예정 시각이었던 10시 15분이고 당연히 지각은 불가피했다.
같은 시각 10시 15분, 영빈관에 있던 전두환 대통령은 도착해 있을 외무장관과 함께 차량을 타고 묘소로 출발하려 1층 로비에 내려갔으나 외무장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빈인 국가원수가 로비에서 외무장관을 기다리는 격이 되어서는 모양새가 이상할 것도 같고, 또 그럴 경우 외무장관이 더 미안해할 것 같아 대통령은 그냥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와서 "이왕 기다리는 김에 영빈관의 영접 요원들에게 격려라도 하자.”며 영접 요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4분 뒤인 10시 19분에 버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격려 인사를 중간에 멈추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며 격려인사를 끝까지 한 후에야 버마 외무장관과 함께 묘소로 출발하였다.
이때가 예정 시각보다 4분 늦은 10시 24분이었다. 오전 일정은 대한민국 수행원들끼리만 진행하는 묘소 참배다 보니 스케줄이 조금 늦어도 외교적 결례가 될 일은 아닌지라 굳이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무렵 태극기를 단 벤츠를 타고 이계철 버마 대사가 도착한 후 전두환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던 중 현장 경호책임자인 천병득 대통령 경호처장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버마 군인 두 사람에게 다가가 “hey Soldier(헤이 솔저)...”하며 말을 건넸다. 이들은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나서 잠시 후 나팔을 불었다.
갑작스러운 천병득 경호처장의 몇 마디 영어를 이 버마군인들은 시험 삼아 나팔을 불어 보라는 것으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당시 천병득 처장은 그저 신원이나 한번 확인해 보려고 시도했던 것이 의외의 크나큰 결과를 초래했다.
갑자기 “뿌, 뿌우~~”진혼곡 두 소절이 공중으로 울려 퍼졌다. 천병득 경호처장이 “대통령께서 곧 도착하시는데 왜 나팔을 불까?”하고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순간 ‘꽝’‘찡’하는 폭음이 귀청을 때렸다. 아웅산 참사의 순간이었다.
국립묘지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 대통령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소리에 맞추기로 했기 때문에, 결국 이 나팔소리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원격 테러 버튼을 누런 것이다.
현장 2㎞(주행시간 2분 거리) 지점을 앞두고 달려오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은 이 참사 소식에 즉각 차를 영빈관으로 되돌렸다.
버마 외무장관의 자동차 고장으로 인한 일정 지연에 이어 나팔수들의 연주가 없었더라면 전두환 대통령은 그날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은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계획을 미리 입수한 후 암살계획을 세운 다음 김진수 소좌 등 3명의 장교를 밀파했다. 그들은 북한대사관 직원의 안내를 받아 폭탄 3개를 전날 밤에 「아웅산 국립묘지」의 참배단 지붕 위에 몰래 설치하였다.
이들이 설치한 폭탄은 원격 조종 폭탄과 폭발의 충격으로 터지는 고성능 폭탄과 증거인멸을 위해 화재를 불러일으키는 소이탄(燒夷彈, incendiary)이었다. 폭파뿐만 아니라 그 현장에 완전 증거인멸을 시도한 것이다.
테러범 신기철은 버마 당국에 의해 현장의 체포 과정에서 사살되고, 김진수와 강민철은 생포되었다가 자국 국가원수 및 우방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시도할 경우 사형에 처해지는 버마의 형법에 따라 김진수는 1984년에 사형되었으며,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한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5년간 미얀마 교도소에 수감 중 2008년에 중증 간질환으로 옥사하였다고 한다.
당초 이들은 테러를 일으킨 후 몰래 북한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북한 당국의 속임에 넘어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 아웅산 국립묘지 참배단에서 테러가 발생하기 몇 초 전의 마지막 모습. 이 가운데 이기백 합참의장(앞열 가장 왼쪽)은 모자와 군복 정장에 단 계급장, 여러 장식물이 방탄복 구실을 한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사진/나무위키>
▲ 순식간의 폭발로 인해 건물 잔해 속에 긴급 사상자 인명구조 모습<사진/연합뉴스>
이 사건으로 인해 버마는 북한과 국교관계를 단절하고, 범인을 잡아 재판에 넘기는 등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사건 발생 후인 10월 13일까지 국가안보와 외교문제에서부터 사건 수습과 합동 국민장(國民葬)을 치르기까지 온 나라가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으로 크게 술렁거렸다.
이러한 대형사건이 일어난 가운데 당시 총무처 의정과에서 합동 국민장 준비와 집행에 실무자로 참여한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글을 남기고자 한다.
당시에는 남북한이 치열한 제3세계 외교전 펼쳐
1970~1980년대는 남북한이 UN에 가입하기 전이라 국제사회에서 서로 지지표를 하나라도 더 받기 위하여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을 대상으로 한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당시에는 우리 대한민국과의 수교국이라 해도 이들 지역에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한 나라가 많았다.
따라서 서로 상대방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자기들과 수교를 요구하며 자국의 외교적 정통성과 국격, 위세 등을 인정받기 위해 소리 없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를 위해 남북한이 서로 고위인사의 초청이나 선물 공세를 대대적으로 취하였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대한민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북한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면서 더욱더 적극적으로 외교전에 임하였다. 당시 버마(1988년 미얀마로 변경)는 제3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비슷한 체제인 북한에 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대한민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과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인 버마를 우리의 우호적인 국가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 중 첫 번째 방문국으로 지정한 전두환 대통령은 22명의 공식 수행원과 수십 명의 비공식 수행원들을 대동하여 1983년 10월 8일, 특별기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그 후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브루나이를 순방한 후 10월 25일 귀국할 예정이었다.
간소해진 요즘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국빈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거나 우리 대통령이 외국 순방을 떠나는 경우 떠들썩하게 행사를 치렀다. 김포공항 내부 주기장(駐機場)에서 3부요인, 국무위원, 관련단체 대표 등의 주요 인사와 군 의장대와 군악대, 여고 합창단 등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송)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 행사 모습은 TV를 통해 실황으로 방송되었다.
또한 행사장 밖에는 적게는 50만여 명, 때때로 많게는 100만 명 규모의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연도에 나와 순방 외교에 나선 대통령 일행을 환송(영)하고, 연도의 대형건물에는 축하 현수막과 도로 위에 인도용으로 설치했던 육교에는 축하 현판을 설치해 분위기를 띄우기도 하였다.
김포공항에서 장도에 오른 대통령 환송식을 무난하게 치르고, 또 귀국 환영식이 2주 후에 예정되어 있던 점을 감안해 필자가 소속한 총무처 의정과의 실무자 10여 명은 그간의 격무로 인한 피로도 풀 겸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에 나섰다. 행선지는 천년고찰 직지사(直指寺)가 자리 잡고 있는 경북 김천의 황악산(黃岳山. 1,111m)이었다.
아침 일찍 서울역에서 만나 출발한 우리 일행은 황악산 중턱에 올라 준비해간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놀다 오후에 하산하기 시작했다. 김천 고속버스터미널에 예매한 서울행 출발시간에 맞췄던 것이다. 일행 가운데 일부는 직지사 경내 관람을 하고, 약간의 술을 마신 필자 등 몇 사람은 직지사에 들르지 않은 채 바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에 직지사 아랫마을의 한 가게 TV 앞에 모여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 3시경 되었을까. 궁금한 마음에서 가게 앞으로 다가갔더니 이 무슨 날벼락이냐 싶었다. 버마의 「아웅산 국립묘지」에 폭발물이 터져 여러 수행원이 사망하였다는 긴급 특별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전(全) 대통령 내외는 무사한 듯’이라는 TV 자막이 계속 흘러나왔다. 필자는 직감적으로 대통령 내외도 무사하지 못했구나 하는 마음이 앞섰다. 아마도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저렇게 방송하는구나 싶었다. 우리나라 헌법에서 만약 국가원수인 현직 대통령의 유고(有故)가 발생하는 경우, 국무총리가 승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 ․ 26사태 후 혼란을 경험한 적이 있지 않은가. 국무총리가 승계한다지만 북한의 남침이나 다른 대형사건이 터지면 어떻게 되나 싶어 이런저런 걱정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