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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탈출 / 느 8:1-12, 눅 4:14-21
미국의 신비적 문학작가인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이란 책이 있다. 이것은 어떤 갈매기 한 마리의 이야기를 그린 내용이다. 그 갈매기의 이름은 조나단 리빙스턴 시겔이라고 하였다. 갈매기란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고, 어부들이 먹고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먹고 사는 새의 한 종류이다.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높이 날 필요가 없어 낮게 날으며, 물 속에 있는 먹이를 먹는 것이 그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목적이다. 그래서 모든 갈매기들은 그 선조들 대로부터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 조나단은 낮게 날지 않고 높게 나는 연습을 하기 위하여 높이 올라가곤 하였다. 그리고 돌기도 하였다. 빨리 내려오는 연습도 했다. 그러니까 자연히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계속하여 멀리, 높이, 빨리 나는 연습만을 계속했다. 이 갈매기는 물고기를 잡기가 싫어서도 아니고, 먹기가 싫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다른 갈매기와 다르게 날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어미 갈매기도 그것을 반대했다. 아비 갈매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사회에서 이러한 행위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 조나단은 ‘분별없는 무책임자’라는 죄목으로 갈매기 떼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절벽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나는 연습만을 꾸준히 했다.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고, 그들이 오히려 불쌍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고통이 조금도 부끄럽거나 가련하게 생각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의 외로움이 아니라 다른 갈매기들이 그 높이 나는 영광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조나단이라는 갈매기는 나중에 훌륭한 비행의 갈매기가 되어서 다른 갈매기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속력으로 높이 오르고, 돌고, 내려오는 기술을 익히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꿈을 말하는 작품이다. 꿈을 갖고 살려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고, 외로움이 있어도 그것을 이기고 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 갈매기의 꿈은 곧 인간의 꿈이다. 이 갈매기의 꿈이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의 꿈이 될 수 있나? 그것은 어떤 꿈이며, 그것을 위하여 여러분이 얼마나 노력하며 극복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켜 애굽에서 탈출한 출애굽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러엘 민족 역사 가운데서 출애굽의 역사를 가장 역동적이고 깊은 의미를 가진 내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들이 노예 생활을 하던 가운데서 해방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민족적인 결단에 이하여 이루어진 하나의 혁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세는 위대한 혁명가였으며, 그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그가 한손에 율법을, 다른 한손에는 지팡이가 아닌 칼을 들고 이스라엘을 이끌면서 광야 40년을 지나왔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노예적인 민족을 영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믿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증거가 필요하지만 상황적인 것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노예적 민족을 자주적 민족으로 비약시키는데 그러한 강권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들 사회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탈출은 그 민족이 자각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좀 심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이 애굽에서 밀어내셨다. 이것이 그들에게 지나간 역사로서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의 역사가 되었다. 그래서 구약성서를 보면 그 출애굽의 역사를 말하지 않는 예언자가 없고, 책이 없다. 출애굽은 고통보다는 영광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그렇게 유명한 민족이 되도록 하신 이유는 그들에게서 특별한 역사를 이룩하시기 위함이었다.
성서의 역사와 초대교회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2천년 역사가 탈출의 역사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첫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떠난 행위는 신앙의 결단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하나의 민족을 이룩하였다. 영광의 역사였다. 그는 나그네였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본향은 가나안 땅, 곧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니까 갈대아 우리에 그렇게 애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야곱은 어떠한가? 그는 형의 장자권을 강탈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집을 떠나갔다. 그러나 그도 탈출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켰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미묘한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만일에 야곱에게 이러한 고통의 탈출이 없었다면 벧엘의 제단이 마련된 수 없었을 것이다. 요셉을 한번 알아보자. 그는 어떠한 이유로 그의 전통적인 장소를 떠나게 되었나? 그는 꿈을 꾸는 사람이기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그 결과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다. 이것은 그를 불행하게 만든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먼 미래의 역사는 인간의 상상을 넘는 위대한 희망을 보여 주었다.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줄은 인간이라면 상상할 수 없었고, 그가 살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 인간의 역사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역사까지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역사 속에서 실망하지 않고 살았다. 오늘도 그들은 절망이 없는 민족이라는 사실을 세계 역사 속에서 증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탈출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향을 떠난 사람이었다. 그가 자란 고향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형식적인 탈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적이고, 사상적인 탈출, 곧 영적인 탈출을 말하는 것이다. 민족의 신앙적인 전통을 버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편에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보내졌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탈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탈출하게 하는 역할을 하셨다. 에릭 프롬은 ‘자유를 향한 도피’를 말했지만, 예수님은 고난을 향한 도피를 실천하셨다.
탈출이란 무엇을 말하나? 물리적인 이동만이 아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이동을 동반한 영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렇게 됨에 따라서 많은 역사를 창조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나?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영향이 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그들을 정복자 뿐 아니라 문화인이 되게 하였다. 탈출의 역사를 갖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의 역사, 이스라엘의 민족 역사를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가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겠나? 여기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그 명령에 순종할 따름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탈출의 역사이다. 요한 번연이 지은 ‘하늘가는 길(천로역정)이라는 책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가기 위해 온갖 역경을 이기고 나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론가 가는 길 위에 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길에 있다. 소극적 탈출은 ‘여기가 좋사오니, 저들을 저주하옵소서, 나에게는 복을 주옵소서’ 하는 자세이다. 거기에는 그 자리에 있고자 하는 안주와 무사안일의 게으름과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이 있을 뿐이다. 탈출은 모험이다. 생명을 걸고 가는 것이다.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해방 후 또는 6.25때 이북에서 모든 재산을 버리고 생명을 걸고 모험을 하여 월남한 사람들이 많다. 예수 잘 믿고 잘 살려고 노력한다. 그대로 이루고 산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역사와 마찬가지이다. 모험이 없는 생애는 죽은 생활이다. 현재의 안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영원히 안일할 수 없는 자리이디. 어디론가 또 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현재의 자리에 미련이 없는 사람만이 떠날 수 있다.
탈출은 포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리를 떠날 때 아무 것도 갖고 나오지 못하였다. 예수의 제자인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이 재자가 될 때 아무 소유도 갖지 않고 주를 따라갔다. 여러분들이 이제 주님을 믿는 가운데 무엇을 소유하고 있나? 우리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아직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생활이다.
탈출은 비약하는 자세이다. 언제든지 한 자리에 머무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환경을 바꾸지 못한다. 한번 바꾸어 보는 것이 비약의 기회이다. 여기에 결단이 필요하다. 칼로 자르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 쉬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든지 그 탈출의 길에서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가는 사람은 없다. 콜럼버스도 위험한 대서양을 건너서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전통의 율법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안일하게 살려고 하셨다면 나사렛에서 살면서 친구들과 사귀며 목수일을 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서 살게 되었고, 그들의 미움을 받으며 살게 되었다. 그래서 눅 4:29절을 보면 절벽에서 밀어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는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이것 이상의 고통과 슬픔이 어디 있겠나? 스스로 원한 고통이라고 말해도 좋을 이 십자가가 무언가? 탈출이다. 죄에서의 탈출이다. 인간의 안일에서의 탈출이다. 전통과 권위에서의 탈출이다.
탈출은 희망이다. 이것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고, 요셉에게 꿈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에게는 부활이라는 영원한 소망으로 보여주셨다. 오늘 우리들의 소망은 무언가? 안일한 삶인가? 자식들의 출세인가?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없는 출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 그거은 영원한 소망이다.
오늘 우리의 나약한 자리에서 우리들은 벗어나야 한다. 지금의 형편은 우리의 만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떠나야 한다. 어디로 갈 건가? 영원한 세게로 갈 용기가 있는가?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위험과 고통이 있고, 아픔과 슬픔이 있다. 오늘이라는 역사를 사랑하지 말자. 어디론가 가야 하는 우리의 미래가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하여 주님과 같은 길을 선탹해야 한다. 안일한 자리라고 만족하지 말고, 어려운 일이라고 버리지 말자. 먼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영원한 길을 가는 사람이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갈매기의 꿈’ 첫쪽에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간은 모험하는 가운데서 창조적 생활을 이끌어 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구태의연한 가운데 있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가는 때는 방법도 달아져야 한다. 보다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룩해 나가야 한다. 여러분들이 가는 길은 얼마나 모범적인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의 생활은 한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하는 투지가 있어야 한다.
우리들의 교회도 다른 교회와 같이 예전의 습관을 따라가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앞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에 있는 줄은 끊어버려야 한다. 지나간 역사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퇴보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과거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사는 사람이다. 전진하는 신앙만이 창조적인 자세이다. 성서는 말한다. 히 10:38-39절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역사를 남긴 사람들은 고생과 수고를 개의치 않고 미래를 향하여 과감하게 밀고 나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생활을 흠모하면서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머무르는 사람이다. 앞으로 나아가자. 위를 향하여 올라가자. 독수리처럼 지칠줄 모르는 용기를 갖자. 깊이 파고 들어가자. 진리를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자.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아량을 갖자. 그래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올해는 영적으로 새롭게 탈출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1996-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