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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죽으나 / 시 19:7-14, 빌 1:20-30
요즘 감기 - 고생, 어제 신문 - 웃음 효과
전주를 아침에 가다 보면 장의사 차를 자주 만나게 된다. 무주, 진안, 장수 쪽으로 오는 차들이다. 사람들이 적게 사는 이곳으로 거의 매일이다시피 이렇게 죽어서 묻히러 오는데,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은 장의사 차들이 하루에도 몇 십대씩 지나갈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데, 죽을 줄 알고 세상을 살아갈까? 이 세상에서 무얼하다 죽었을까?
성도는 세상을 초월한 존재다. 적어도 이론상으로 그렇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자기 속에 모셨기 때문이다. 우선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여기 주민등록증이 있고, 여기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또 다른 주민등록이 있으니, 더 크고 영원한 나라에 속한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이중국적자인 셈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잠깐 있는 곳이고, 저 세상은 영원한 곳이다. 동시에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삶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도 저 세상의 지원으로 남보다 더 강하고 아름답게 살게 된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부러워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이 세상이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만 소망을 두고 산다. 구원받은 성도가 그들과 똑같이 그렇게 사는 것은 참으로 안 된 일이다. 그러다 보면 더 큰 세상에서의 삶이 준비가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훨씬 멋지게 살 수 있는 힘이 공급되지 않는다. 성도는 더 큰 세상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장차 올 더 크고 영원한 세상에서 더욱 잘 되는 것이다.
무디는 죽으면서 ‘하늘 문이 열리는구나. 천사가 나를 데리러 오는구나. 이게 죽음이라면 얼마나 기쁜 것이냐?’ 하면서 죽음을 맞이 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는 것이 끝나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으로, 더 좋은 집으로 이사가는 것임을 깨닫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이다. 조그만 집에 전세 살다가 어렵게 노력해서 자기 집을 장만했다. 그런데 이사가는 날, ‘나 이사 안가!’ 하면서 인상쓰는 사람 보았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과 삶 사이에서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 이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함은 말로 할 수 없는 복이다.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감사함으로 맞이해야 한다. 왜 그런가? 성도에게는 심판도, 영원한 죽음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한다. 그리고 적어도 죽음 뒤에 무엇인가 무서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몹시 두려워한다. 하지만 성도는 죽음 뒤에 무엇이 오는지 알고 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낙원에 가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거기서 부활을 기다린다. 계 21:2, 4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리고는 그 나라의 아름다움이 그려진다. 말로 표현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이 세상의 말로는 형용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을 비교한 뒤에 그것과 ‘같더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그 그림자라는 것이다. 성도는 다음 세상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죽음이란 모든 것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세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것처럼, 죽음으로 일생이 끝나는 우리는 새로운 생활, 주님과 영원한 영광 가운데 찬송과 기쁨의 생활을 하는 것이 죽음 후의 생활이다. 결혼을 앞둔 남녀가 결혼 약속을 하고 약혼을 합니다.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고서 기다리면 왜 그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빨리 결혼하고 싶은데 시간이 안 간다. 왜 빨리 결혼하려고 하는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렇다. 왜 같이 있고 싶어하나? 좋으니까, 사랑하니까. 하물며 우리 주님과 영원히 사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빨리 하나님 앞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마지막에 주님과 만나서 영원히 영광을 누리며 사는데 왜 두려워하겠는가?
2. 이 세상에서 주와 함께 하는 복은 그 복을 더 키운다.
사도는 이 세상에서이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한다. 23절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분명히 그는 이 세상을 떠나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말한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세상에 남아서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며, 동시에 그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강하고 아름답게 살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면, 이 세상에서의 어려움이 큰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 춘향전을 보면 춘향이를 새로 부임한 사또가 수청을 들라고 명령한다. 춘향이는 이를 거절하고 감옥생활을 당당하고 꿋꿋하게 이겨 나간다. 왜 그런가? 이는 춘향이가 장차 만날 신랑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픔이 훨씬 덜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성도의 삶은 그 이상이다. 실제로 신랑 되신 예수께서 영으로 들어와 함께 있어 격려하고 힘을 공급한다. 그렇다면 이미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 그 힘으로 살아간다면 그 삶은 속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고후 4:16절의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는 말씀대로 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처럼 겉사람으로만 살아간다면 속사람에게 유익이 없다.
‘히데꼬’라는 일본 여자가 쓴 ‘사는 것이 황홀하다’라는 책에 보면, 그녀는 손목과 발이 잘려진 장애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했다. 예수 믿고 주님꽈 함께 사니까 너무너무 기쁘다는 것이다. 장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으니까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말하는데,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것이 지겹고 죽지 못해서 산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는 것도 즐겁고 기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찬 325장의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와도 겁없네.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라는 가사처럼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과 함께 살면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고, 이 세상을 즐거움으로 살 수 있음을 믿기 바란다.
3. 주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면 더욱 복은 많아진다.
속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삶 중에 주를 위한 고난이 가장 큰 것이다. 벧전 2: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면 더 바람직한 것이다. 마 5:11-12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어느 교회에서 전도팀이 돌아와서 보고회를 했다. 많이 전도한 사람을 향해 박수를 쳤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한 명도 전도 못하고 욕먹고 창피만 당하고 왔습니다. 마지막에는 듣던 사람이 뺨을 쳐서 맞고 왔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일어서서 오래오래 박수를 쳤다고 한다. 주를 위해서 모욕을 당하고 매는 맞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도한 사람이 칠 배의 복을 받았다면, 전도 못하고 매만 맞은 사람은 77배의 복을 받을 것이다. 29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했다. 이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면 그 박해가 복이 된다. 그러나 박해가 두려워서 의를 저버리면 그것이 화가 된다. 잠시 편안을 누리다가 영원히 수치와 고통을 당할 것이다. 잠시 눈 앞에 보이는 세상과 그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의를 위해서라면 박해와 고난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뜻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박해와 고난이 두려워서, 손해를 보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뜻과 의를 저버린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삶을 오늘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젛히 기도하기를 바란다. 의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박해와 고난을 달게 받을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바란다. 그래서 이 땅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의 복을 받기를 바란다.
4. 복음에 합당하게 순간을 보내는 복을 누려야 한다.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자기 영혼을 위한 최선의 길이기도 하다. 27절상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여기 ‘생활하라’는 말의 헬라어 뜻은 ‘시민답게 살아라’는 의미이다. 곧 빌립보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라’는 강조점이 담겨 있으며, 하늘의 시민답게 사는 삶의 기준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27하-28절상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것도 한 마음 한 뜻으로 해야 한다. 이는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가 되어 복음의 신앙을 위해 애써야할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고 대적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해주신 일이요, 지금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이다. 그것을 설명하면 복된 소식이 된다. 그 내용을 의지하고 행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 주는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성도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말씀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그리스도는 이 일이 일어나도록 우리 속에서 성령으로 일하신다.
1990년대 초반 아파트 과열 투기를 억제하고, 수도권 인구 분산을 위해 일산과 분당에 대형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여 공사를 할 때이다. 공사가 50% 이상 진척되었을 때 여러 곳에서 부실 공사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파트 건축 일정을 맞추려다 보니 모래가 부족하여 바다에서 모래를 채취하여 염분을 제대로 씻어내지 않고 사용한 결과였다. 염분이 제거되지 않은 모래는 시멘트와 잘 배합이 되지 않아 콘크리트는 단단해지지 못하고 철근이 쉽게 부식된다(삭는다). 결과는 부실공사였다. 그래서 입주를 하지 못하고 새로운 공사를 발주할 수밖에 없었다. 한 건물이 지어져가는 과정도 그러하듯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도 개인 개인에게서 제거되어야 할 세속적인 것들을 제거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 일원으로 함께 한다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는 부실 공동체를 이루어 결국에는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무엇보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의 엽합이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모든 일을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복음에 합당한 삶이 펼쳐질 것이다. 사나 죽으나 성도이 삶은 복된 것임을 알고 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복음 신앙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 축 도 >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보호하심과 교통하심이 오늘도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축복 속에 살기를 원하는 자녀들과 또한 각 가정과 일터와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나라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실지어다. 아멘. (2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