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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풍은 두 번 불지 않는다 4부
뜰 윤창환
* 1~3편의 줄거리
(1950년대 후반, 소작농으로 남의 땅이나 부쳐먹으며 식구들 입에 간신히 풀칠을 하는 봉식은 아편중독자가 되어 사경을 헤매는 딱한 처지다
마을의 대 지주인 성부자 영감에게 잘 보이지 못한 탓으로 그동안 얻어 부치던 땅뙈기 마저 빼앗긴 봉식은 딸 언년을 넘보는 성영감의 탐욕에 분을 삭이다가 무능한 봉식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딸 언년이 스스로 성영감의 후처로 들어가자 그 덕으로 괜찮은 땅뙈기를 얻어 그럭저럭 연명을 하지만 끈질긴 아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책하다가 세상을 뜨고 만다.
봉식이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봉식의 처도 성영감의 노리개가 된 딸의 처지를 비관해 병을 얻어 눕게 되고 언년에게 하루라도 빨리 지옥 같은 이곳을 떠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생을 마감한다.
언년을 후처로 맞아들인 성영감이 언년에게 집칸을 내어주고 언년 사이에 아들까지 얻었지만 언년은 성영감 처의 모진 구박에 시달린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머슴 수삼이 언년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고 바쁜 농번기를 틈타 언년에게 몰래 마련한 패물을 쥐어주며 도망을 가라고 한다.
수삼이 쥐어준 패물을 들고 도망을 친 언년이 타관 함바집에서 날일을 하며 지내다 공사판 인부인 태석의 눈에 들어 살림을 차리고 딸 은교를 낳지만 의처증에 술로 세월을 보내던 태석이 광산 매몰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학교 소풍을 갔던 은교마저 사고로 잃게 된다.
객지에서 얻은 인연을 모두 잃어버린 언년은 낙담하지만 두고 온 아들 학기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식집을 차려 재기를 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을 객지로 보내준 수삼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 수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께달은 언년은 버리고 간 아들이 고향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삼을 앞세워 살았던 마을에 찾아가지만 멀리서 바라본 아들이 불구의 몸이 된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언년은 아들과의 만남을 위해 절치부심 돈 버는 일에 매달린다.
분식집에서 출발한 언년의 영업은 악착같은 언년의 노력으로 번듯한 식당을 차리게 되고 돈을 버는 대로 아들 학기를 위해 땅에 투자하여 살림을 늘려나간다.
불어난 자본을 바탕으로큰 요릿집을 낸 언년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근방은 물론 먼 곳까지 소문이 나고 그 일대의 요식업소로 자리를 잡지만 여러 성격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언년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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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문이 참말이랑가?"
"밑구녕도 없씨 그게 무신 말이여?"
"거 있잖아. 학기 그놈이 장개를 간다고 온 동네 소문이 번번하던데 여때까정 그것도 몰랐어라?"
"금시초문이구만. 하이고야, 그 절뚝발이한테 어떤 미친년이 시집을 온디야."
"무슨 소리여. 샥시가 아주 참하게 생겼다던디. 학기 갸가 몸땡이는 부실해두 땅뙈기가 제법 되잖여."
해가 밝아야 사람구실을 하는 동네엔 길 가다가 엎어지면 죽지 않을 만큼 드문드문 낡은 초가집이 바다의 섬처럼 떠 있었다.
밥 짓는 저녁연기가 가물가물 피어오르고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면 이곳이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었다.
갈참나무가 제법 서있던 언덕에 나뭇짐이나 져다 생계를 꾸리던 동네에서 제일 나이 많은 노인이 세상을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도저가 언덕을 파헤치더니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언덕을 위로 두었던 양쪽 초가집들이 상면을 하게 되었다.
언덕 작은 산자락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마을 이장의 큰아들이 노름빚으로 선영( 先塋 )이 깃든 문중산을 팔아 올렸다는 소문이 돈 후 문중의 질타를 받던 이장은 언덕 아래 한그루 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수리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다.
그의 큰아들이 언년을 찾아온 것은 부친의 장사를 치른 지 며칠 뒤였다.
언년을 만난 이장 아들은 똥 마려운 개모양 몹시 급한 표정이었다.
"저기, 급전이 필요한데 제 아버님 이름으로 된 논을 좀 사시지요."
언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상속도 되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사나요?"
그는 벌겋게 단 얼굴로 땅문서를 내놓았다.
"우선 근저당을 하시고 오백만 원만 돌려주시지요. 제가 초면이지만 선생님이 재력가라는 소문은 다 듣고 있었습니다."
"급하신 거 같은데.. 사정은 알겠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언년이 잘라 말하자 그가 매달렸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학기를 봐서라도 한 번만 살펴주시지요."
학기 얘기가 나오자 언년은 속이 뜨끔했다.
그동안 감추느라 애를 썼지만 이미 절름발이 학기가 언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돌아 객지에 나가있는 사람이 알 정도로 퍼져 있었기에 학기를 어떤 얼굴로 만나야 할지 하루하루 피가 마르고 있었다.
"그 소문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 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더 할 말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그러나 이장 아들은 방을 나가지 않고 매달렸다.
이곳에 오기 전 술을 마신 까닭인지 불콰한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이 보기에 불편하여 아까부터 참고 있었지만 그의 막무가내 행동에 부아가 난 언년이 수차례 말리다가 들어먹지 않자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수삼이 쫓아왔다.
"워떤 놈이 지랄을 떠는거여?"
방 안으로 들어온 수삼이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이장 아들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야, 이놈아. 뺨따구는 어데서 처맞고 여그 와서 쌩 지랄이여 지랄이."
수삼의 커다란 덩치에 짓눌려 질질 끌려 나오던 이장 아들이 수삼을 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자네 수삼이 아닌가. 나야 나."
그제야 이장 아들을 바라본 수삼이 멱살을 놓았다.
"행님이 여기는 웬일이요? 장사 치른 지 한 줄도 안 된 양반이 여그는 왜 왔수? 난 어느 잡놈이 돈 냥이나 구걸 허러 온 줄 알았소."
흐트러진 윗옷을 벗은 이장 아들이 담배를 꼬나물고 한숨을 내 쉬었다.
"내 신세가 이렇게 꼴시럽게 됐네. 자네가 내 대신 부탁을 좀 해 주게."
멋적은 얼굴로 서있던 수삼이 한참동안 그의 신세타령을 듣고 안으로 들어가 언년에게 돈을 내어온 건 해가 뉘엿하게 넘어갈 무렵이었다.
"문중산 홀라당 털어 먹은 거 동네가 다 아는데 처신 잘 하고 댕기시우. 글카고 이 돈 그냥 주는 거 아니고 땅문서는 놓고 가쇼."
돈다발을 안쪽 주머니에 구겨 넣은 이장 아들이 고개를 굽신거리며 밖으로 튀자 이내 땅거미가 밀려왔다.
그에게 받은 너덜한 땅문서를 언년에게 내던진 수삼이 부리나케 이장 아들을 쫓아갔다.
이장 아들이 찾아간 곳은 읍내 여관방이었다.
왁자지껄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걸로 보아 방안에 있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수삼이 작은 쪽문이 난 곳에 기대어 방안을 살피자 굽굽한 담배연기가 확 밀려 나왔다.
"에이, 드런놈들, 기차화통들이 잔뜩 들어앉았구만"
침을 발라 문구멍을 뚫어 안을 들여다 보자 대 일곱 명이 화투판을 벌리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담배연기가 방안에 가득했지만 투전판의 분위기 탓인지 담배연기 사이로 비치는 얼굴들이 번들번들했다.
"오호호,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어데 가서 밑천을 땡겨 왔는고. 구라만 치는 게 아니었구만."
"잔소리 걷어 치우고 빨랑 패 돌리라구."
웃통을 벗어젖히고 담배를 꼬나문 채 코맹맹이 신소리를 핑핑 해대는 사람은 이장 아들이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시커멓게 눌어붙은 자장면 그릇들과 마시다 만 막걸리주전자와 소주병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자, 이제 밑천도 두둑하니 초장 끗발로 가 보자고."
기고만장한 이장 아들의 소리를 들은 수삼이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문을 박차고 들어선 수삼이 발로 걷어찬 화투판이 먹다만 자장면 그릇 위로 엎어지자 이를 본 이장 아들이 화들짝 놀라 밖으로 나가려고 버둥댔다.
"야, 이 썩을 놈아. 형님이고 뭐시기고 바짓가랭에 매달려 울고불고하더니 투전판에 처박을라구 돈 빌맀냐?"
고래 같은 소리에 이장 아들이 밖으로 튀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손가락을 겨누며 수삼에게 달려들었다.
"니 놈이 누군데 남 신성한 사업을 뒤집어 엎는 거여. 이거 웃기는 놈이로세."
수삼에게 달려든 사람이 눈을 부라리자 수삼이 사내를 발로 냅다 걷어찼다.
큰 덩치에 밀려 방구석으로 나동그라진 사내가 일어서려고 버둥대는 사이 수삼이 잽싸게 밖으로 나와 방문을 걸어 닫았다.
재빠르게 밖으로 나온 수삼이 이장 아들을 찾았지만 이미 어둠이 깔린지라 이장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몇 군데 서성이는 동안 있으나 마나 한 문짝을 걷어찬 사내들이 수삼을 쫓아온 건 순식간이었다.
남정네들이 따라붙었지만 수삼의 동작이 워낙 날랜 터라 수삼의 모습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수삼이 이장댁을 찾아가자 수삼을 본 이장 아들이 꽁지가 빠지게 뒷 산으로 치달았다.
훤한 대낮이라 수삼이 이장 아들을 따라잡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수삼에게 다시 멱살을 잡힌 이장 아들은 처음과 달리 아주 당당한 표정이었다.
"내가 노름빚으로 돈 빌린 거 꼭 갚음세. 그거 때문이라면 모르는 척 해주게."
"이 양반아, 어르신 돌아가신 게 미칠이나 됐소. 땅문서 잽혀다가 겨우 노름판이요?"
"그럼 어쩌겠는가. 배운 게 도둑질인데"
"아니. 이적지 객지 나가서 배운 게 노름이요?"
"허, 이 사람이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애기지 말귀가 그렇게 어두워서야.."
"그따구 일은 그렇다 치고, 내사 형님을 따라붙은 건 돈 때문이 아니구 학기어멈 요릿집에서 일하는 영순이 갸 때문이여."
수삼이 영순이 얘기를 꺼내자 이장 아들은 손사래를 쳤다.
"이봐,여기서 영순이가 왜 튀어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뭘 잘 못 알고 있어. 영순이 갸가 우리 큰아버지딸이 아니란 말이지."
수삼이 담배를 꺼내물며 그중 한가치를 이장 아들에게 건넸다.
"그럼 동네 소문은 다 허따배기란 말이우? 고따우 소리 지꺼리지 말고 영순이가 형님 사춘이라는 걸 예전부터 알았는데 오리발을 내민다고 참말이 거짓뿌렁이 된디오?"
담배연기를 뿜어 올리던 이장 아들이 이내 담배꽁초를 발로 짓 이기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니 더는 말을 않겠나만 영순이 갸가 뭘 어쨌다는 건데. 무슨 요릿집 돈을 떼어먹기라도 했는가?"
"학기가 장개를 간다고 대추나무 연 걸리듯 소문이 났는데 큰일 났소. 샥시가 영순이라고 소문이 나니 그게 말이요."
이장 아들이 헛웃음을 치자 수삼이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재빨리 물었다.
"행님이 사춘이라는 게 맞구만. 내 쿠사리가 맞았구먼 그래. 그러지 말구 요리 앉아 보시요."
수삼이 이장아들의 어깨를 잡고 힘을 주자 그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이 사람이 왜 이러는 거야. 깡패가 따로 없네."
두 사람이 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해가 중천에 올랐다.
까마귀가 몇 번 울고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마을은 절간 같아서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반갑기까지 했다.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여린 강줄기가 햇살을 받아 거두미가 끝난 가을 들판의 논둑처럼 보였다.
동네 입구에 세워진 장승이 가끔 걸어오는 사람이라고 느낀 수삼은 이미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라는 걸 알았다.
언년을 따라붙어 언년의 부탁대로 닥치는 대로 땅을 사들여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언년에게 거는 믿음은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 쪼그라들고 있었다.
지금은 육신을 쓰니 그 관계가 그럭저럭 이어지겠지만 법적인 관계는 아니어서 나이가 들면 색 빠진 나뭇닢처럼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끔씩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버릇이 생겼다.
언년이 자신의 요릿집에서 일하는 영순을 며느리감으로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게 된 수삼은 그 일을 성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학기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생산하면 아들에 대한 언년의 관심이 지금보다 확연하게 줄어 들거란 실낱같은 희망을 두고 영순의 뒤를 캐던 참이었다.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영순의 말은 이웃마을 똥바가지라고 소문난 고삼댁의 주책에서 새어 나오더니 수삼이 고삼댁 적삼에 돈냥깨나 찔러주자 며칠이 가지 않아 언 송아지 똥 싸듯 줄줄이 나발을 불었다.
아무한테나 말하지 않은 비밀인데 수삼에게 처음 말하는 거라고 했다.
실은 영순이 땅마지기나 가지고 방귀깨나 뀐다는 이웃마을 훈장 여식인데 남모를 사연이 있노라는 타령조의 너스레를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줄줄이 엮어냈다.
수삼이 무릎을 치며 귀를 바짝 세우자 고삼댁은 뭔가를 더 바라는 눈치였다.
"고렇게 궁금한 걸 워떻게 참았는가. 꼴이 여태까정 모르고 있었냐벼"
"고따구로 비꼬지 말구 좀 자세허게 말해 보더라고."
"근깐에..요릿집사장님이 영순이를 점찍었다고 진작에 소문이 났던데 정작 본인들은 암 껏두 모르고 있었다 요거요? 희한한 일이고 마."
고삼댁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몸이 단 수삼이 집으로 내려가 작은 단지 하나를 들고 올라왔다.
"그게 뭐시요?"
"알 거 읍꾸, 뭘 더 알쿼줘야 내도 속을 차릴 거 아녀?"
수삼이 단지를 뒤로 감추자 고삼댁이 코맹맹이 소리를 했다.
"있는 대로 다 내뱉다가 훈장어른이 알면 내사 마을에서 쫓겨날 낀데 나도 그만한 보상은 있어야잖겠수?"
"그거이 무슨 대단한 이야기라고 빼기는.."
고삼댁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고럼, 이쯤에서 난 일어서야지 별 수 있간요. 돈 푼깨나 얻어먹었으니 그 값은 했잖수."
수삼의 손목을 힘껏 뿌리친 고삼댁이 부득부득 언덕을 내려가자 수삼이 단지를 들고 부리나케 쫓아갔다.
이장 아들이 언년에게 빌려간 돈을 몽땅 해 먹었다는 소문이 돌기 바쁘게 이장아들이 수삼의 집에 들이닥쳤다.
마른 무쪼가리 같은 얼굴에 가득하게 자란 수염에 달라붙은 희끄무레한 분비물들이 깡통만 차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이보게, 나 돈 좀 돌려주게. 지난번에 맡긴 땅문서 그만하면 300은 더 줄 수 있잖은가."
"아니, 행님은 그 큰 돈을 며칠각딴에 다 해 먹었소?"
"그까이 꺼는 알거 없고, 되나 안 되나?"
"이 행님이 진짜루..내사 무슨 은행도 아이고.."
수삼의 비웃는듯한 얼굴을 본 이장 아들이 정지깐으로 들이 닫더니 바가지에 물을 퍼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충 동여맨 무명 잠뱅이 사이로 들어 난 가느다란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거부죽한 그의 머리숱이 옥수수 수염처럼 보였다.
"에이 씨발, 네깟놈이 돈 안 돌려 줘도 내가 죽지 않아. 두고 보라고 "
정지깐을 나온 그가 씩씩대며 대문을 박차고 나가자 수삼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꾸며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수삼은 재빨리 언년에게 달려갔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언년의 태도가 전같이 싹싹하지 않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기운을 바꿀만한 묘안이 없었던 터라 수삼의 속은 하루하루 타들어가고 있었다.
"워쩐 일이긴, 내사 여그에 오는 게 달갑지 않나?"
수삼이 정색을 하자 눈치 구단인 언년이 수삼의 눈치를 보며 낮게 웃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갈도 없이 오시니 그런 게지요."
"전갈은 무신, 사또 행차도 아이고."
언년이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수삼이 급했던지라 앉기 바쁘게 영순이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언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없어요.다른 데 일을 알아보겠다고 잠시 나갔는데 영순이는 왜요?"
"아이고 이 사람아, 지금 영순이를 내 보내면 우짤라고 그러는가."
"다 큰 사람을 붙들어 맬 수도 없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데 그럼 어떡해요?"
"자네가 며느리감으로 삼았지 않은가. 고럼 꽉 매달카야지, 시방 무신 소리를 하고 있는기여."
수삼의 독촉에 언년이 대답을 하지 않고 바깥을 내다보자 수삼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내 말이 우습나? 언제는 내한테 부탁을 한다고 해 쌌더니 맴이 바뀟나? 내사 아주 기맥힌 뱅법이 있어서 해 볼라구 하는데."
언년이 입을 닫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수삼이 피워문 담배연기가 방안에 가득 차자 오늘은 이만 가는 게 좋겠다며 언년이 얼른 일어났다.
"억지로 할 수 없잖아요. 영순이 한테 은근하게 눈길도 주었구요. 그리고 학기 몸을 아시잖아요.
형편이 이런데 잘 못하면 서로 상처만 받아요. 그렇게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인연이 닿아야지."
"뭐가 은근하게야. 이런 건 대장깐 쐐불 빼듯이 빨리 해 치워야지."
들었는지 말았는지 언년이 방문을 닫으며 그만 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수삼이 피우던 담배꽁초를 방문에 냅다 던지고 일어서자 이내 땅거미가 밀려왔다.
이장 아들이 돈을 더 빌려간 건 수삼의 작단이었다.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 다짐을 받고 언년에게 돈을 받아낸 수삼은 몰골이 말이 아닌 이장 아들을
요릿집으로 불러냈다.
거하게 차려진 요릿상을 받은 이장 아들은 연신 입을 벌리며 감탄을 했다.
"아이고, 말로만 듣던 요릿집을 와 보다니 이거 내 운세가 이제 펴지려나 보네."
그는 눈치도 없이 음식이 나오는 대로 게걸지게 먹어댔다.
그 모습을 본 수삼은 옳다구나 싶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추접스런 인간아, 돼지 뻔때보고 잡아먹지 않으니 많이 먹고 내 부탁이나 잘 들어라.
먹느라 정신이 없는 그를 멀뚱이 바라보자 그제야 그가 수삼을 의식했는지 먹던 음식이 잔뜩 묻은 입을 쓱 닦으며 멋쩍게 웃었다.
"내 꼴이 말이 아닌 거 나도 잘 아네. 그런데 웬일로 나를 불렀는가."
수삼이 답을 하지 않자 이장 이들이 몸이 달았다.
"왜, 빌려간 돈을 돌려달라고 그러는가? 내 처지를 잘 알 텐데 그 말은 하지 말게나."
"그라믄 줄 돈이 없으이 배 째라 이거요"
수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닦달하듯 몰아세우자 이장 아들이 한쪽 구석으로 나 앉으며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밑천만 더 있으면 될 거 같기도 한데.."
담배를 피워 문 수삼이 넌지시 그를 바라보자 방 기운이 전 같지 않을 걸 느꼈는지 이장 아들이 바짝 다가앉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밭문서 마저 맡길 테니 한 번만 더 돌려줄 수 없을까?"
"행님요. 지난 번에 잽힌 땅문서 팔아두 가져간 돈이 안 나와. 그깟 놈의 밭문서 밋평이나 된다구."
"그니까 300만 달라고 하지 않는가."
눈치를 보던 수삼이 그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그거이 말구 더 좋은 뱅법이 있기는 한데 해 볼라우?"
수삼의 속닥임을 듣던 이장 아들이 반색을 했다.
"그게 뭔데 귀에다 속닥거리나. 그냥 말로 하게 말로."
이장 아들이 바짝 다가앉자 수삼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좋시다. 다른 거이 아니구 영순이 갸한테 부탁 한 가지만 하면..."
영순이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 여기에 영순이가 왜 끼어드는데. 지난번에도 그러더니만."
"내가 다 알고 있다고요. 영순이가 건넛마을 훈장님 딸이라는 거 말이요. 행님이 사춘 오빠 아이요."
"그런데?"
"그런데는 무신, 그랗게 눈치가 없소. 이집 사장님이 영순이 갸를 좋게 생각하고 있다 요거요."
이장 아들이 코웃음을 쳤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넘겨 짚기는. 건넛마을 훈장어른이 내 큰 아버지인 건 맞지만 영순이가 내 사촌 동생인 거는 거짓뿌렁이지. 누가 그런 헛소문을 내는 거야."
"대충 알고 하는 얘긴데 빼기는, 그럼 돈 얘기는 없는 걸로 하믄 되것네. 딴데 가 보시요"
이장이들이 수삼의 허리춤을 잡았다.
"그 얘기랑 영순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는가. 나 살리는 셈 치고 좀 봐주게. 안 그러면 난 객사를 하고 말 걸세. 마누라도 진작에 애들 데리고 친청으로 내 뺐고 이대로 가면 난 죽는 도리밖에 없다구."
수삼이 그를 밀쳐내며 팽하고 코를 풀었다.
"죽거나 말거나 고거는 행님 사정이고, 보소 지금 내말도 개 방구로 듣잖소.
지금까정 한 내 말을 똥구녕으로 들었소? 그만 가 보시우."
수삼이 그를 밀치며 일어서자 이장 아들이 수삼에게 바짝 매달렸다.
"그렇다면 좋아.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나."
이장 아들의 간절한 눈을 본 수삼이 나직하게 말했다.
평소 우락부락한 그의 성격으로 보아 아주 대단한 진전이었다.
돈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영순을 찾아가 설득을 해 달라고 물가에 세워둔 어린아이 달래듯 수차례 얘기를 했지만 이미 놀음에 미쳐있는 그가 그 일을 제대로 할는지 미심쩍기 짝이 없었다.
남보다 피붙이가 말을 하면 언년이 그토록 애를 태우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영순이 비록 요릿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으나 그래도 글줄깨나 배운 여자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여자여서 언년도 영순을 놓치기 싫어 몇 차례 눈길만 보냈을 뿐 더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사정을 알아차린 수삼인지라 어떻게든 언년의 소원을 만들어주리라 갖은 생각을 다 하고 있었으므로 이리저리 연줄이 닿은 고삼댁이나 이장 아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여겼다.
떠도는 동네 소문을 들었음 직도 한데 무슨 까닭인지 건넛마을 훈장 어른은 기척도 하지 않았다.
조카가 한양에서 있는 재산 다 털어 올리고 그 화근으로 목을 매 자살을 한 이장이 자신의 동생이라는 걸 대놓고 얘기하기 그랬는지는 몰라도 손바닥만 한 동네에 대추나무 연걸리듯 걸린 입방아들을 그냥 묻고 갈 성인군자가 아니었기에 동네 사람들의 관심은 더 커져갔다.
돈을 받아 든 이장 아들이 수삼의 부탁을 받은지 열흘이 지났지만 어찌 된 일이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빌어먹을 그 인간이 또 다 해 올렸나 보다 벼르고 있던 차에 전갈이 왔다.
그가 병원에서 다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일이 꼬여 간다는 걸 눈치챈 수삼이 득달같이 병원으로 쫓아갔지만 그를 만날 수없었다.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서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맥이 풀려 병원을 나오는데 어떤 여인이 다가왔다.
그 여인은 수삼을 보고 몇 번인가 주저하더니 혹시 우리 애 아빠를 찾아온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 여인을 데리고 근처 다방에 들러 자초지종을 들은 수삼은 그제야 그 여인이 이장 아들의 처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도통 소식이 없길래 집에 와보니 사람이 저지경이 되었더라구요. 그동안 먹지를 못해서 영양실조로 머리가 터져서 일어나기 힘들다고 하는데..."
초췌한 그 여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수삼이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여인에게 돈을 쥐여주자 여인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소문을 들으니 아저씨한테서 돈을 가져갔다고 하던데요. 어떻게 된 거예요?"
수삼이 그렇다는 눈빛을 보내자 여인은 이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뭐를 믿고 돈을 주셨는지 모르지만 당장 때꺼리도 없는 처지라 저는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요. 그 문제로 저를 보신 거라면 저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
한동안 말이 없던 수삼이 영순이 얘기를 꺼냈다.
" 행님이 저 꼴로 누워 있는데 이런 야기를 하기 뭣하지만서두 실은 행님도 영순이를 만나는 조건으로 돈을 가져 갔으니께 그쪽에서 말을 건네보는 게 어떨까 하구만유. 그랗게만 해 주신다믄 행님 돈 빌려간거도 글코 당장 병원비도 내야 하잖소, 생각을 해 보소."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얘기를 듣던 여인은 수삼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만 해 준다면 영순을 만나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얼마를 지나도 영순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학기가 수삼에게 장가를 가면 자기와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만날 때마다 뇌까렸지만 수삼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용케 학기가 장가를 들어 살림을 차리면 그때서야 당당하게 언년에게 구애를 해 보겠다는 열망은 수삼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저 덜 떨어진 놈 때문에 그 긴 세월을 참고 기다리는 언년도 그렇고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도 참으로 모진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다.
이미 쉰 중반을 넘어선 자신의 나이테가 갈수록 좁아진다고 생각을 하자 느는 건 술과 담배였다.
그나마 남아 있는 습기있는 날들을 학기 때문에 날려먹는다는 생각에 이르자 수삼은 학기를 만나면 공연히 소리를 질렀다.
전후 사정을 알리 없는 학기는 땅이 생기고 누구에게 매달리지 않는 살림이 되자 더 이상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성영감 머슴으로 살던 수삼이 어릴 때부터 있었던 사람이라 마치 아버지 대하듯 거리낌이 없어서 수삼이 여간하게 화를 내어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넘겼다.
그 인연의 골이 깊다는 걸 사람이 아닌 살아온 날들의 그림자가 타이르고 있었다.
수삼은 자신의 마음이 콩죽 끓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밥술깨나 먹으면 그만이었던 지난날들이 배신을 하고 덤벼들고 있었다.
언년이 부탁하여 마련한 그 많은 땅과 소출이 조금씩 조금씩 수삼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언년의 만류에도 수삼이 영순을 찾아간 건 이장 아들의 부인이 수삼을 찾은 며칠 뒤였다.
짧게 말했지만 영순이 그러마 눈짓을 보냈다는 것이다.
곱게 화장을 한 영순이 수삼을 맞았다.
성질이 급한 수삼인지라 앞 뒤 말을 끊고 자신이 할 말을 댓바람에 내지른 탓인지 영순은 적잖게 놀라는 눈치였다.
그간의 사정을 들은 영순은 나직하게 말했다.
"전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사장님이나 아저씨가 저를 생각해주는 마음 고맙고 감사하지만 제 결혼에 관한 일은 별개라고 생각해요. 이해하여 주세요."
영순은 자신의 의사를 길게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수삼이 더 이상 물을 수 없도록 마치 예리한 칼로 무를 단번에 자르듯 말했다.
"그럼 평생 혼자 살겠다 이 말이요?"
"말씀 드렸듯이 결혼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앞으로 허면 되겠꾸마."
영순은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확 내지르는 급한 성격이었지만 다소곳하면서도 강력하게 말하는 영순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할 힘이 없다고 생각한 수삼은 그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요. 사장님을 봐서라두 생각을 잘 해 보시우. 그양반이 원채 말수가 적으니 하는 말이지만서도."
밖을 나오자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가랑비를 피해 처마 끝에 선 수삼이 담배를 피워 물자 제법 찬 바람이 불었다.
수삼은 내리는 비가 꼭 자신의 처지처럼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내리는 비 사이로 퍼지는 담배연기가 지금까지 허부덕대며 살아온 궤적처럼 보였다.
창문을 닫던 영순은 멀리 처마 밑에서 담배를 피우는 수삼을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처음엔 언년의 말을 덕담쯤으로 들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언년의 눈길이 연인을 대하는듯한 시선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낀 영순은 이쯤에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삼이 고삼댁을 다시 찾아가자 고삼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쫓아 나왔다.
"웬일이야, 이곳까지 찾아오고. "
고삼댁이 입을 삐죽하게 내밀었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소문 들었는데 이장 아들놈이 병원에 있다카데요. 그 인간이 왜 그모냥이 됐는지 참.."
수삼이 어디 조용한 곳으로 나가는 게 어떠냐는 눈짓을 보내자 방으로 들어간 고삼댁이 입술을 빨갛게 바르고 나왔다.
보기에 천해보였지만 자신을 남성으로 대하는 고삼댁의 성의로 생각하니 딱히 눈에 띄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괜찮게 보였다.
"뭘 그렇게 봐요? 내 얼굴이 이쁜가 보지?"
수삼이 빙그레 웃자 고삼댁이 얼른 팔짱을 끼었다.
"왜 이래요, 남사스럽꾸로."
"뭐, 임자도 없는 천하에 고아인데 이때라도 좀 여자구실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여인이 팔짱을 끼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걸 느낀 수삼은 언년과의 뜨겁던 밤을 떠올렸다.
언년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풍만한 몸뚱이에 전율하던 때가 떠오르자 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소변을 누고 몸을 떠는 소년처럼 수삼의 손이 떨리자 고삼댁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야, 수삼이가 아직도 살아있네."
읍내 다방에서 들은 영순의 이야기는 다소 의외였다.
"영순이 갸가 건넛마을 훈장 딸은 맞는데 실은 그 영감이 어린 처자를 건드려서 몰래 낳은 딸이라서.."
"몰래 낳았다고?"
"하여간 훈장이든 뭐시기든 남자들의 그놈의 아랫도리가 문제야. 그 영감이 아주 점잖은 거 같아도 뒷구녕으로 호박씨란 호박씨는 다 깠다니깐.
새파란 애를 건드려서 배가 불러 오니까 읍내 멀찍이 방 한 칸 얻어 주고 애를 낳았다지 뭐야.
감추느라고 감췄는데 그 영감 예편네가 어떻게 알고 그 애를 찾아와서 반 죽음이 되도록 잡았다는거예요. 부창부수라고 지들도 말 만한 딸이 있는데 그놈에 그 년이지 . 닭 똥이나 돼지 똥이나 같은 똥인데 뭐가 달라."
"그런 일이 있었단 말여?"
"그랬다니까요. 잘못은 영감탱이가 했지 애가 무신 죄가 있어. 그 애 부모가 션치 않다는 걸 알고 영감탱이가 흑심을 품고 드러운 욕심을 채운거지. 그래놓고 애 배니까 지 체면 깎일까 봐 쉬쉬 하다가 그 사달이 난거지."
"그럼 영순이를 낳은 여자는 같이 사요?"
"하이고, 어림도 없는 소리지.돈 몇 푼 쥐여서 전라도인가 어딘가로 내 쫒았다고 합디다.
그 영감이 쳐 죽일 놈이지. 그런 놈이 무슨 동네 유지라고 낮짝을 들고 다니는지 모르지. 훈장은 무슨 , 개같은 놈이지."
"그럼 영순이는 누구 키웠다는 거요?"
"뭘 키워요. 지 혼자 여기저기 떠돌며 컷지.젖동냥도 꽤 받았을걸.
객지로 나갔다가 그래도 고향이라고 들어와 우연찮게 언년이사장님 댁에서 얹혀 지내는데 그 사정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러니까 죽은 이장과 그 영감이 형제인 건 맞구만. 이장 아들 그놈이 그래서 내 곁에 빙빙 돌았구만."
"초록은 동색이라구 그 영감이나 죽은 이장이나 끼리끼리고 아시잖아요. 이장 아들 투전판에 다 말아 올린 거.
근데 거기에 수삼씨기 왜 춤을 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예요. "
수삼이 헛기침을 하자 고삼댁이 알아들으라는 듯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지거렸다.
"영순이 갸가 무슨 좋은 애라고 요리집 사장이나 수삼씨가 매달리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자란 애가 살림을 지대루 하겠어요? 난 도무지 모르것네."
시답지 않게 생각하는 고삼댁에게 여비를 찔러준 수삼이 그래도 좋으니 영순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고삼댁은 일이 잘 되면 성사비나 거하게 챙겨 달라며 돌아갔다.
오늘 나눈 얘기는 언년은 물론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라고 다짐을 받았으나 수삼은 그런 말 하지 말라는 얘기까지 할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소문이라는 게 타작마당 검불 같아서 한 번 날리면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야속한 것이었다.
고삼댁을 보낸 며칠 뒤 이장 아들의 부인이 수삼을 찾아왔다.
다 죽게 되었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의식을 찾고 이제 자기 발로 걸어 다닐 정도로 회복이 되었지만 그동안 밀린 병원비가 거금이라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요?"
" 땅문서가 아저씨한테 있고 돈 얘기를 할 데가 여기밖에 없어요.저 좀 살려주세요."
"그깟 땅문서 빌려간 돈으로 치믄 반절도 안되는데 무신. 글카고 영순이 부탁을 골케 혔는데 딱 한 번 만난 거 뿐이고
된 일이 없으이 나는 모르겄소."
수삼이 잘라 말하자 그녀가 울면서 매달렸다.
어떻게든 영순이 일을 성사시킬 테니 급한불은 꺼 달라고 했다.
사람 마음을 사는 일이 누구의 억지에 달린 게 아닌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희망에 수삼이 언년을 찾아가 돈 얘기를 꺼내자 연년은 대뜸 화를 냈다.
"벌써 몇 번째에요. 그동안 수삼씨 말을 믿고 돈을 건넸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쪽 사정은 딱하지만 돈을 몇 번이나 건넸구요. 수삼 씨 체면은 세워 주었다고 생각해요."
수삼이 소리를 질렀다.
"그거이 아니라니께. 다 학기를 위해 글카니께 토 달지 말구 돈이나 내어 놓으라구."
하늘처럼 믿는 수삼이었지만 마치 제 돈을 내어 놓으라는 투로 말하는 수삼이 마뜩지 않은 언년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씨발, 누구를 위해 그러는 근데 . 알지도 못하민서 왜 지랄이고 지랄이."
성질을 참지 못한 수삼이 조리실 안으로 들어가 조리기구를 때려 부수자 지배인이 쫓아왔다.
"형님, 왜 이러세요. 사장님 알면 큰일 나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참아요. 여기 손님들도 있잖아요."
"야. 이 새끼야. 까불지 말구 저리 꺼져. 이것도 내 맘대루 못 허냐?"
몇 번 만류를 하던 지배인이 수삼을 강제로 내보내려고 하자 수삼이 조리실 기구를 들고 막아섰다.
결국 수삼이 휘두른 조리기구에 얼굴을 맞은 지배인이 소리를 질렀다.
"드런놈의 새끼 지가 뭐라고 행패야. 지가 사장이야? 얹혀사는 주제에. 야 야, 빨리 경찰 불러. 경찰 부르라고."
"그래 이새끼야. 경찰 불러라. 읍내 경찰들 다 오라구 혀."
읍내 경찰서에 불려간 수삼이 바닥에 드러눕자 언년이 쫓아왔다.
얼굴에 붕대를 감은 지배인과 바닥에 누운 수삼을 본 언년은 격앙된 목소리로 법대로 처리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비명에 가까운 날카로운 언년의 목소리를 들은 수삼이 얼른 바닥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언년은 수삼을 본체도 하지 않고 경찰과 한동안 얘기를 하더니 지배인만 일으켜 데리고 나갔다.
수삼이 쫓아 나가려고 했지만 경찰 제지로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언년의 태도에 수삼은 부아가 끓어올랐지만 이번 일은 자신의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자 이내 고요가 찾아왔다.
폭행죄로 들어왔으니 간단하게 끝낼 일은 아니었지만 언년의 배려로 풀려난 수삼이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짐을 꾸렸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이곳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은 있으나 뚜렷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 앞으로 이렇다 할만한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어제저녁 지배인이 지꺼린 말중에 얹혀사는 주제에 행패를 부린다 말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오로지 언년의 말만 믿고 우직하게 버텨왔지만 요즘 들어 자신을 대하는 언년의 태도나 분위기가 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녀에 대한 순정이 믿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곁을 지키겠노라 다짐했던 자신의 생각이 순진했다고 느껴지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작은 가방을 싸서 어깨에 걸치고 언년을 찾아 갔을 때 언년은 외출을 하기 위해 밖을 나서고 있었다.
가방을 멘 수삼의 모습이 평소보다 달리 보였는지 언년은 놀란 토끼눈을 했다.
"좀 쉬지 어디를 가려고 그러셔요? 그 가방은 뭐고."
" 이제 그만 여기를 뜨겠소."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를 간다구요?"
"내를 찬밥취급 하는데 여그에 남아 무엘 해. 작별 인사나 하구 가지."
수삼의 호기 어린 말을 들은 언년은 그럼 그렇게 하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구두를 닦고 걸친 옷을 매만지며 조리실 안을 향해 나가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누가 찾아오면 일러 달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뜻밖의 말을 들은 수삼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적어도 한 두 번은 말리겠지.
간곡히 만류하면 눈 딱 감고 못 이기는 체 들어주리라.
그리고 이번에 내 사랑과 믿음을 확인받으리라.
그런데 이 큰일을 몇 마디 들어보지도 않고 단박에 자르다니.
그래, 결국 이거였구나. 내가 바보였구나 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수삼은 언년이 힐끔힐끔 돌아다 보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뭐해요? 가신다면서요. 그럼 빨리 나가세요. 저도 볼일이 바빠요."
수삼이 입술을 깨물고 현관을 나서자 언년이 앞서 나갔다.
분명 백주 대낮인데도 밖은 어두웠다.
가야지. 간다고 했으니 떠나야지. 그런데 어디로 가나.
머리가 하얗게 저려 오는 걸 느낀 수삼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담벼락에 기대자 이내 현기증이 몰려왔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골목을 돌아 나오자 골목 밖은 더 어두웠다.
수삼이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지만 혼미한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그 수많은 세월이 말 몇마디에 가을 낙엽처럼 날리고 말다니..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미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떠난다고 했으니 미련없이 떠나리라.
생각은 그리 했지만 수삼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살며시 매만졌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수삼이 살며시 눈을 뜨자 코 앞에 언년이 밝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살며시 수삼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이래도 가실 거예요?"
언년의 풍만한 가슴이 얼굴에 닿자 또다시 현기증이 밀려왔다.
아...
수삼은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깨어나지 말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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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삼의 부탁을 받은 언년이 다시 돈을 내어준 건 이장 아들이 퇴원을 할 무렵이었다.
받으나마 나한 땅문서를 받기는 했으나 팔 수도 없는 땅이어서 실상 거저 내주는 것이었지만 영순이가 학기에게 마음을 줄 수만 있다면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력을 차린 이장 아들과 고삼댁의 간절한 부탁에도 영순은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동안 큰 상처를 안고 살아온 자신의 이력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듯 보였고 더구나 성치 않은 몸에 모자라는 사고를 지닌 학기의 짝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언년과 수삼의 순수한 마음에 자신의 행동이 욕심으로 비칠 것 같아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수삼을 찾아온 고삼댁이 입을 내밀었다.
"하이고, 뭐 누군들 상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학기가 좀 모자라긴 해도 착하고 뭣 보담도 돈이 많잖아.
그게 최고지. 지가 맘만 먹으면 떵떵거리고 살 건데 뭐를 그리 재고 난리야. 그놈의 집구석이 노랭이 훈장 영감이 내버리다시피 한 혼외 딸에게 땡전 한 푼이라도 주겠어?"
고삼댁의 푸념을 들은 수삼은 속이 쓰렸지만 학기 신세가 그러하니 달리 대꾸할 변명도 없었다.
"언년 사장님이 평생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살게 해 준다고 내가 열댓 번은 말했을 거야. 그런데도 눈썹도 까딱하지 않아요. 가진 거라곤 몸뚱이 하나가 전부인데 무신 놈의 고집이 쐐심 줄이야. 어떻게 돼야 나도 국물이라도 얻어먹을 거 아녀."
그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자 언년은 요릿집 내부를 고치기로 하고 공사를 사작했다.
여름과 달리 비수기인 겨울철에 요릿집 내부공사를 해서 분위기를 바꾸기로 한 것이었다.
수년 전에 영업하다가 매도한 요릿집 사장이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언년은 속이 편하지 못 했다.
그 사람의 영업능력에 따른 결과라는 걸 알지만 자신이 운영하던 음식점을 비싼 가격에 넘겨받은 상대방이 망했다는 소리는 아무리 남이어도 가슴에 남았다
산업발전에 따라 급속하게 변하는 음식문화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터라 주저 없이 공사를 시작한것은 자신의 결단보다는 언년을 향한 수삼의 노력이 가상 해서였다.
건물의 크기를 늘리고 내부를 현대식으로 바꾸는 등의 공사가 이어질 무렵 언년에게 뜻밖의 일이 찾아왔다.
속이 아파 병원을 찾은 언년이 큰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 서울 큰 병원을 찾아 검사를 했지만 뚜렷한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챙겨주는 약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픈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공사를 맡고 있던 수삼은 몸이 달았다.
"자꾸 아퍼서 어쩌면 좋은가. 큰 병원에서도 모르는 병이 있다등가?"
"괜찮겠지요. 죽을병이 든 것도 아닌데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러나 언년의 병세는 시간이 갈수록 짙어졌다.
다시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곡기를 넘기지 못하니 풍만하던 몸매가 살이 빠져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몇 달이 되지 않아 반쪽이 되어 있었다.
하던 공사를 멈출 수 없어 일에 매달리던 수삼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언년을 지켰지만 언년은 쉬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공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 언년이 수삼을 불렀다.
초췌해진 언년의 얼굴을 본 수삼은 눈물을 흘렸다.
"이 사람아. 기골이 끌끌하던 사람이 이게 뭐고.우짜믄 좋캤나."
수삼의 손을 잡고 있던 언년이 영순을 불러 달라고 했다.
"왜 글카나.영순이는 왜?"
"그냥요. 좀 오라고 하세요."
언년의 부름을 받은 영순은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들어왔다.
감기 기운이 있어 누워 있다가 온다는 영순은 마스크를 했지만 기침을 심하게 했다.
"사장님 죄송해요.제가 시원찮다 보니.."
언년이 영순의 손목을 꼭 잡았다.
"그동안 우리집 일 잘 해줘서 고맙고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부모가 되다 보니 영순이를 놓치기 아까워서 한 말이니 그동안 했던 말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영순을 바라보는 언년의 눈길이 나른한 봄언덕에 핀 복사꽃 같이 아련했다.
"아니에요. 제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빨리 털고 일어나세요. 사장님이 누워 계시니 모든 게 정지 됐어요."
말을 마친 언년이 영순의 손목을 놓자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수삼은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언년과 영순은 눈을 감고 있었다.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함성이 들렸다.
"와, 첫눈이 와요. 밖으로 나와 보세요."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문을 열어젖힌 수삼은 언년이 누운 이불자락을 문 입구로 끌고 갔다.
" 눈이 오네. 올게 첨이지? 좀 보더라고."
문 밖 마당에 나풀나풀 내리는 첫눈을 바라보는 언년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물끄러미 이 모습을 바라보던 수삼의 눈가에도 눈물이 흘렀다.
영순이 마음을 바꾼 건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뒤였다.
공사가 끝나고 건물 안팎이 훤하게 바뀌자 연말을 맞은 손님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그때까지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언년이 영순에게 요릿집을 맡아 운영하라는 전권을 내어 주자 젊은 여사장이 요릿집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새롭게 단장한 건물에 영순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자 요릿집 분위기가 확 바뀐 건 시간문제였다.
영순의 업무 능력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이를 바라보는 수삼은 진작에 왜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고 있었다.
그랬더라면 언년이 저지경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죄책감이 밀려와 낮 일이 피곤했음에도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언년의 은은한 눈길을 받아들인 영순의 결심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수삼은 봄이 가까워지자 혼례준비를 서둘렀다.
언년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지만 수삼도 같은 마음이어서 더 이상 미룰 까닭이 없었다.
소식을 들은 고삼댁이 수삼을 찾아와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경사 났네. 드디어 소원을 풀었네요. 그거 다 내덕인 줄 알고 그 은혜 잊으면 안되요. 암만 잊으면 안 되지."
수삼이 웃자 고삼댁이 눈을 찡끗했다.
"학기 혼사가 끝나면 이참에 확 땡겨요. 망설이지 말구. 그게 나였으면 좋겠꾸만."
수삼이 어두운 얼굴을 하자 고삼댁이 코를 찡끗거리며 물었다.
"왜? 아직도 아픈가? 경사가 났는데 왜 그런디야. 언년 사장님이 보통내기가 아닌데."
고삼댁이 다녀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년 아들 학기와 영순이 곧 혼례를 치른다는 소문이 온 동네는 물론 이웃마을까지 퍼졌다.
전 같으면 헛소문이라 몸이 달았지만 번듯한 현실이 되었으니 수삼이 소리라도 크게 지르고 싶었지만 누워있는 언년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공사가 끝나 살던 시골로 돌아온 수삼에게 학기가 쫓아와 물었다.
"아저씨 지가 장개 간다는 게 맞아요? 내 색시가 누구래요? 난 본적두 없는데."
거무데데한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뜬 학기의 질문에 수삼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분명 좋은 소식임에도 앞으로 닥칠 수많은 일들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였지만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가기엔 한없이 연악한 체구를 지닌 학기가 과연 영순을 맞아 남편노릇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숨이 멎는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수삼이 대답대신 학기의 손을 꼭 잡았다.
영문을 모르는 학기가 수삼의 얼굴을 만지며 다시 물었다.
"누가 그러는데 우리 엄마가 색시를 데리고 온다는데 우리 엄마가 있어요?"
"그래, 있어. 있으니께 쬐끔만 가달벼 봐."
엄마가 있다는 말에 학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수삼은 괜한 말을 꺼냈다고 자책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건너야 할 강이었다.
언년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수삼의 가슴은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해지고 있었다.
언년의 부탁으로 상견례날을 잡았지만 영순의 가족이 없는지라 망설이고 있던 차에 몇 차례 돈을 빌려간 이장 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건넛마을 훈장 영감이 돌고 돈 소문을 듣고 언년을 한번 만나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몰랐던 영순의 과거를 알게 된 동네 아낙들이 입방아를 찧었다.
"에고야. 그 영감이 미쳤지. 어린년과 싸질러 놨으면 책임을 지덩가 해야지. 시앗을 보고 내쫓은 주제에 다 큰 딸을 무슨 낯짝으로 보려고 만난데. 저렇게 뻔뻔하니 대놓고 그러겠지."
어찌 됐든 영순의 아비는 분명했으므로 거절할 명분이 없던터라 상견례날을 잡았지만 수삼은 썩 내키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순이 처음엔 거북하게 생각한다고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끝내 거부하지 않는 걸로 보아 자신도 혈혈단신 혼자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인심이 내 맘 같지 않으니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하는 게 세상 이치라고 느낀 수삼은 더 이상 간섭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상견례를 잡은 날 억지로 몸을 일으킨 언년을 도와 간단하게 몸단장을 시킨 수삼이 읍내 음식점으로 나가자 오전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곱게 단장을 한 영순이 언년을 부축하고 자리를 잡자 이내 학기가 들어왔다.
수삼이 시킨 대로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학기의 모습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지만 심하게 저는 다리가 눈에 밟혔다.
오랜 간 혼사이야기가 오가고 많은 갈등을 겪었지만 대면이 전혀 없었던 터라 사실상 영순과 학기가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영순은 학기가 다리를 절며 들어오자 잠깐 돌아다보았을 뿐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언년은 자신이 성영감 후처 자리를 박차고 객지로 나가 수 십 년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자신이 낳은 아들을 처음 대하는 날이었음에도 긴장을 한 탓인지 학기가 들어와 앉았음에도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수삼이 언년의 손을 잡았다.
"학기가 왔어요. 정신 채리구.."
그제야 언년이 끝쪽에 앉아있는 학기를 바라다 보았다.
학기야.. 학기야...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던 아들인가.
그동안 상면할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미루고 또 미루고 차마 만날 수 없는 아들이었다.
그것은 핑계가 아닌 죄책감이 만들어 준 커다란 짐이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튼튼한 밧줄을 만든 뒤 아들을 만나리란 자신과의 약속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쉬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야 애틋함도 생긴다는 말은 공짜가 아니어서 오래 떨어져 지낸 커다란 빈 공간을 생각과 노력만으로 채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모든 게 너무 늦은 뒤였다.
학기를 바라다본 언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영순은 학기를 바라보는 언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꼭 다물었다.
수삼이 학기를 데리고 와 같이 언년의 손을 잡았다.
"학기야, 이분이 바로 네 엄마여. 인사를 혀야제."
언년이 엄마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학기가 갑자기 잡았던 손을 뺐다.
무슨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수삼이 학기 입에 귀를 바짝 들여밀자 학기가 이내 울음을 떠트렸다.
학기가 울음을 떠트리자 언년이 뒤로 몸을 빼려는 학기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끌어안고 우는 동안 수삼과 영순은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았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학기와 언년을 번갈아 바라보는 영순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이었다.
언년 측이 먼저 와 있었으므로 잠시 뒤 영순 아비가 지팡이를 잡고 이장 아들과 함께 들어왔다.
언년이 아들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영순 아비는 자신이 왔다는 신호로 헛기침을 여러 번 했다 .
그제서야 울음을 그친 언년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바로 앉았다 .
수삼이 학기를 중간 자리에 앉게 하고 영순이 반대편으로 가자 헛기침을여러 번 하던 영순 아비가 누구를 나무라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보시게들, 이 좋은 날에 곡소리가 들리니 참으로 기괴하오이다.이게 무슨 일이요?"
영순 아비는 긴 담뱃대로 탁자를 탁탁 치며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나이가 많다지만 초면에 하는 꼴이 그러해서 수삼이 일어서려고 하자 언년이 수삼의 팔을 잡아 앉쳤다.
"예 , 어르신 나오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제가 몸이 부실해서 잠시 소란을 피웠네요. 용서하세요."
언년의 말에 영순 아비의 태도가 누구러지긴 했으나 상견례장 분위기는 살얼음을 걷는 양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난 또 초상집을 잘 못 찾아온 줄 알았소이다. 그래요. 내사 여기 있는 딸애의 아비로서 할 수없이 나오긴 했으나 신랑짜리를 본 적도 없고 ...아, 복판에 앉아있는 청년이 이 애 짝 될 사람이오? 그런데 혼사얘기가 나왔으면 진작에 한 번 찾아와야지 신랑짜리가 왜 그러는가?"
수삼은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처음부터 마치 죄인을 심문 하는듯한 영감의 태도가 눈에 거슬려 속이 끓어올라 이를 참느라 무진 애를 먹고 있었다.
수삼이 일어나 언년 측 소개를 하고 인사를 건네자 영순 아비가 앉아서 인사를 받았다.
"다 알고 나왔으니 간단하게 하십시다. 그쪽 아들이 몸이 성치 않은데 무슨 배짱으로 우리 딸아이를 탐을 내시오.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영순이 일어나 아비를 말렸지만 영감은 막무가내였다.
"돈냥깨나 만지는 모양인데 자고로 양반집에서는 재물을 보고 혼사를 치르는 게 아니요. 내가 나온 것은 허락을 하자고 온 게 아니고 그쪽 말을 들어보고 싶어서요. 그래 이 혼사를 치르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잠자코 듣던 언년이 일어서려는 수삼을 가로막고 말을 꺼냈다.
"어르신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만 저희가 무슨 대가를 바라거나 목적을 가지고 혼사를 치르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영순이가 오랫동안 우리집에서 일을 하면서 성실하게 살았고 또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요. 본인의 의사를 충분하게 듣고 한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언년의 말을 들은 영순아비는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말씀은 그렇게 하지만 육신이 멀쩡한 우리 아이가 뭐가 부족해서 몸이 부실한 사람에게 갑니까. 입장을 바꾸어 댁의 딸이 그런다고 한다면 얼른 허락을 하겠소?
원, 욕심도 부릴 걸 부려야지 . 이건 애초부터 잘못 된 혼사가 아니오. 난 허락할 수 없으니 더 듣고 싶지도 않고 그만 일어나겠소이다."
영감이 일어서려고 하자 영순이 큰소리로 말했다.
"이건 제가 오래 생각하고 결정한 거예요. 아버지 마음은 알겠지만 제 뜻대로 하려고 하니 이해하여 주세요."
영감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럴 거면 네 마음대로 하지 나를 왜 오라고 했냐. 그래, 내가 너한테 아비노릇 제대로 못 했다고 날 불러다가 망신 주려고 이러는 거냐?"
다시 일어서려는 영감을 붙들고 나선 영순이 울음을 떠트리자 이를 본 영감이 겸연쩍은지 자리에 앉았다.
"원 돈이 좋기로서니 저런 불구자한테 왜 스스로 기어들어가. 평생 무슨 꼴을 보려고."
"돈 때문에 가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그럼, 돈 아니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절룩발이한테 시집을 간다는거냐. 평생 수발을 들어야 할 판인데 니가 지금 제 정신이냐?"
영순이 오랜시간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영순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맞은편에 앉아있는 학기를 바라보던 영감이 학기를 보고 일어나 걸어보라고 했다.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마세요. 제가 이미 다 알고 있는데요."
"무슨 소리야 너도 오늘 저 사람을 처음 보잖아. 뭐를 다 알고 있다고 그래. 세상에 이런 상견례가 어디 있다더냐."
떠들썩한 소리를 들었는지 식당 관계자가 쫓아왔다.
"저기 다른 분들도 계시니 좀 조용히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민원이 들어와서요."
그 소리를 들은 수삼은 당장 탁자를 뒤집어엎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참고 또 참고 있었다.
그때였다
학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영순이 있는 자리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 할아버지, 이렇게 걸으면 허락을 할래요?"
갑작스러운 학기의 행동에 영순은 어쩔줄 몰라했지만 수삼은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학기가 영순의 손을 잡자 당황하던 영순도 얼른 학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 광경을 눈물 반 웃음 반으로 바라보던 언년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감의 태도는 단호했다.
"허, 버르장머리하고는, 다리 꼴이 저래서야 어디 남자 구실을 하겠소?
딸아이가 좋다고 우기니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렇다면 약속 하나 합시다. 그 말을 들어주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수삼이 참고 참다가 나섰다.
"무신 말씀이신지 말씀해 보시우. 훈장 영감님."
수삼이 약간 비꼬는 투로 말하자 영감이 가늘게 뜬 눈으로 수삼을 째려보았다.
"듣자니 그쪽은 이 혼사와 하등 관계가 없다고 하던데 왜 나서서 감놔라 배 놔라 하는거요?"
수삼이 씩씩대며 대꾸를 하려고 하자 언년이 수삼을 가로막았다.
"어르신 잘못 알고 계시네요. 이 사람은 제 남편입니다.당연히 여기에 와야지요."
평생을 그렇게 바라고 살았지만 가슴 한쪽이 늘 비어 있었던지라 언년의 말을 들은 수삼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속으로 언년의 이름을 수없이 불렀다.
언년의 말을 들은 학기가 놀라는 눈치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언년을 바라보는 수삼의 시선에 물기가 어렸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영순 아비가 다시 나섰다.
"아까도 말했지만 조건이 있소이다.
이 혼사를 허락하는 대신 당신 재산 반을 딸아이와 내 앞으로 이전해 주시오. 그게 내 조건이오."
5부로..
첫댓글 기다리던소설은 먼저 보게되어 행복합니다
또 다시 봄을 기다려야하니 빨리 한권의 책으로 보여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리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