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료예약 상담문의 02-900-8276
체질 다이어트 / 디스크, 관절염/ 체질진료/전통 침
스마트 한의원(4호선 쌍문역 3번)
무의식의 차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사는 다른 세상
이처럼 우리가 동일하게 마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남녀, 나이, 지역, 시간 등 여러가지 요소에 따라 마음이란 말의 실제 내용은 각각 다르다.
마음 mind 이란
인간의 정신활동. 일반적으로 ‘정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마음’은 ‘정신’에 비해 훨씬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뜻으로 쓰이는 일이 많고,
그 의미 내용도 애매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육체나 물질의 상대적인 말로서 철학상의 ‘정신’
또는 ‘이념’의 뜻으로도 쓰이는 막연한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 철학사에서의 ‘마음’은 오늘날과는 달리 주요한 개념의 하나였다.
중국 철학사에서 마음에 관해 논의된 것은 송대(宋代) 이후로, 주자(朱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마음을 성(性: 天理)과 정(情: 人欲)의 둘로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육상산(陸象山)은 이 구별에 반대하여 마음은 결국 이(理: 天理, 즉 우주의 법칙)와 같은 것이라는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주창하여 인욕(人欲)은 실재성이 없는 환망(幻妄)이며, 실재하는 것은 이와 일치하는
마음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육상산의 제자인 양자호(楊慈湖)에 의해 더욱 강조되어 일체의 이는 마음속의 현상이라고 하는
일종의 선천적 유심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왕양명(王陽明)도 이 설을 계승하여 심즉리(心卽理)를 지행합일(知行合一), 치양지(致良知)와 함께 그의 철학의 3강령(綱領)으로 삼았고, 후자의 2가지를 심즉이설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또 이보다도 마음에 중점을 두어 실천을 강조하고, 자기의 학문을 심학(心學)이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한역불전(漢譯佛典)에서는 산스크리트어의 치타(citta)를 ‘심(心)’이라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의 심(心)은 만유(萬有)를 색(色: 物)과 심의 2법(法)으로 나누었을 때의 마음을 가리키며
정신 및 그 속성작용을 말한다.
또, 보다 좁은 의미에서 마음을 그 주체와 종속작용(從屬作用)으로 나누었을 때의 주체를 단순히
‘심(心)’ 또는 ‘심왕(心王)’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열가지 의식(10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의 구조와 기능을 불교에서는 유식론(唯識論)이라 하는데,
우리 마음을 십식(十識) 즉 열가지 의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식이라 하는 말도 역시 마음이나 똑같은 뜻니다. 심(心)이나 식(識)이나 같이 풀이한다.
(마음을 헤아리고 사고하는 쪽으로 말할 때 식(識)이라 쓴다)
1. 안식(眼識)...눈
2. 이식(耳識)...귀
3. 비식(鼻識)...코
4. 설식(舌識)...혀
5. 신식(身識)...몸 - 전오식(前五識)
6. 의식(意識)...뜻 - 표면의식
7. 말나식(末那識)...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등의 망식(妄識)
모든 망령된 미망과 무명, 무지의 근본이 되는 식으로 나쁜 것과 옳은것, 싫은것, 싫은 것과
좋은 것을 분별해내는 마음(분별식)이며, 기독교에서의 원죄와 유사하며,
불교에서는 근본무명(본래 밝지 않음 , 어리석음)이라 함.
6식의 경계에서 좋다, 싫다를 구분해 내는 작용을 하는데 이런 작용은 8식인 아뢰야식(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8. 아뢰야식(阿賴耶識)... 장식(臧識) 무몰식(蕪沒識), 함장식(含藏識) -무의식
보통 윤회를 할때 이 8식이 윤회를 하게 된다.
따라서 7식 이전의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이나 감정은 윤회할 수 없고 다만 8식인 무의식에 저장되어
윤회한다고 한다.
9. 암마라식(菴摩羅識)... 무구식(無坵識), 백정식(白淨識)
8식인 아뢰야식을 벗어난 즉 윤회를 벗어난 상태로 깨달음에 이른 경지
10.건율타야식(乾栗陀耶識)..진실심(眞實心), 견실심(堅實心), 진여, 여래, 불심이라 함.
붓다의 경지
십식(十識)을 감각과 연관시키면,
맨 처음 안식(眼識)이라, 시각(視覺)이고
그 다음 이식(耳識)이라, 청각(聽覺)이고
그 다음 비식(鼻識)이라, 후각(嗅覺)이고
그 다음 설식(舌識)이라, 미각(味覺)이고
그 다음 신식(身識)이라, 촉각(觸覺)이고
그 다음 제6 의식(意識)이라, 이것은 우리가 느끼고 판단(判斷), 분별(分別)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십식 가운데서 다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또는 맛 알고
몸의 촉각 알고 또는 의식으로 분별하는 6식(六識)까지 밖에는 지금 쓰지 못한다.
인간의 이외의 동물은 6식도 못 쓰고 5식까지만 쓸 뿐이다.
일반 식물이나 그런 것은 역시 아무 식(識)도 못 쓰는데 그러나 식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닐것이다.
비록, 하나의 나무라 하더라도 다 마음이 있을 것인데 다만 그것이 잠재해 있을 뿐 이다다.
마음의 형상이 없어놔서 잠재해 있을 뿐이다.
다시 사람에게 국한하여 보면
사람은 각 개인에 따라 마음이 있지만 각각 그 내용이 다르다.
즉 같은 마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말이 뜻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뜻이다.
예를들어 어떤 여자가 애인에게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몰라? 라고 했을때
그 마음이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뜻하는 것인데 남자는 실제 그 원하는 바를 말로 전해듣거나 의사표현을 하지
않으면 그 원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즉 그 여자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남자도 잘 알것이라 여겨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그 남자는 실제 그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도대체 그 마음이 뭔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경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우리는 6식인 의식까지만 알아차릴 뿐 7식인 말나식부터 8식 9식 10식은 알아차릴 수조차 없는데 이런
무의식이 우리 마음을 결정하는 밑바탕이 된다.
예를 들어 소와 새는 같은 동물이므로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그 무의식이나 체질이 다르면 같은 현상을 놓고 전혀 다르게 반응하게 된다.
소가 새를 봤을 때 왜 새는 편안히 걸어다니면 될 것을 저렇게 힘들게 멀리까지 날아다니는지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거꾸로 새가 소를 봤을 때 이처럼 자유롭게 멀리 날아다닐수 있는데 왜 저렇게 답답하게 우리 속에서 저러고
살고 있을까 답답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서로 잠재된 무의식이 다르면 소는 아무리 예쁜 닭을 만났어도 무의식이 다르므로 아무런 느낌이
없이 소 닭보듯 하게 된다.
닭계의 전지현을 만나도 그냥 지나가는 새 중 한마리일 뿐으로 밖에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서도 체질의과 남녀와 지역과 시간이 다르면 무의식의 구조가 다르게 된다.
즉 남자와 여자는 호르몬이나 여러가지 생리적 구조에 있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이 다르다는 뜻이다. 같은 여자라도 체질이 다르면 다시 오장육부의 대소가 다르므로 생각의 구조가 달라진다.
또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시 마음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처럼 마음이란 정해진 어떤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체질이 다르면 소가 닭을 보는 것만큼 마음이나 생각의 구조가 다르다.
물론 오장육부와 몸의 구조 또한 다르다.
그러므로 공통적인 사회적으로 서로 이해할수 있는 언어소통 수단을 통해 마음이 표현되지 않으면
당연히 마음이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소와 닭만큼 서로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닭이 꼬꼬댁하며 울며 마음을 표현하는데 소가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처럼 서로 몸이나 마음이 서로 다른 구조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즉 내 체질을 알아 나의 한계 내 몸과 마음의 한계를 알아 차릴수 있다면
훨씬 사람과 사물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내가 아는 것은 내 마음일 뿐이고 아니 내 마음도 시간 장소에 따라 달라지니 내 자신도 모르는 마음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동물, 다른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내가 내 마음도 잘 알수 없는데 하물며 모두가 내 마음과 같을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보다
더 큰 착각은 없을 것이다.
내 마음조차 내 스스로 잘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 줄 수 있겠는가
소가 자신이 소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닭의 마음까지 알아 줄 수 있겠는가.
내가 내체질의 울타리와 내 눈에 체질이라는 썬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눈은 비슷한 모양으로 되어 있으나 그 눈에 체질이라는 썬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돌아가고 있고
나름대로 다 잘살고 있음이 보일 것이고
내가 그것들에 불만을 가지거나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소가 닭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모든 문제는 이처럼 우리 의식 밑바닥에 깔린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구조를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착각에서 발생되는 것이고
이것을 불교에서는 근본무명 (根本無明, 밑뿌리부터 밝지 아니함, 바닥으로 부터 어리석음) 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처럼 체질이 다르면 내부의 장기인 오장육부가 다르고 뇌구조도 다르게 되어 그 마음이나 성품과
감정이 다르게 된다.
물론 체질이 아니더라도 남자, 여자만 돼도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겉모습은 비슷한 듯하나 그 기능은 전혀 다르게 되어 똑같은 사실을 놓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고
반응도 다르며 똑같은 음식을 먹고도 소화가 다르고 흡수가 다르게 된다.
이처럼 체질은 타고난 성품 즉 무의식에 가까워서 우리 몸안에서는 자율신경의 경향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체질이 다르면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소와 닭만큼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서로 이해할 여지가 생긴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전혀 다른 기능을 하므로 이상한 사람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볼때 여자가 남자를 볼때 잘 모르므로 신비스럽기도 하지만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이해가 안되는 구석도 많다.
이것은 그만큼 체질이 다르다는 뜻이다.
체질의 세계는 명확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 미묘한 또 하나의 세계이고 눈이다.